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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버렸나니, 감성의 옛 전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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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가 내 시선, 내 맘을 멈추게 하는, 내게 직접 어떤 것을 얘기하는 대상과 마주했던 적이 있었던가? 내 발길을 붙잡아 채는, 내 고동을 멎게 하는,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상황 말이다. 아마 너무도 급속하게 달려가는 산업적 시간에 적응하느라 내 초조해진 육체가 이런 정신적 경험에 노출 될 여지조차 없었던 때문일 것이지만, 왠지 관조(觀照)라는 여유의 언어가 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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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가 내 시선, 내 맘을 멈추게 하는, 내게 직접 어떤 것을 얘기하는 대상과 마주했던 적이 있었던가? 내 발길을 붙잡아 채는, 내 고동을 멎게 하는,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상황 말이다. 아마 너무도 급속하게 달려가는 산업적 시간에 적응하느라 내 초조해진 육체가 이런 정신적 경험에 노출 될 여지조차 없었던 때문일 것이지만, 왠지 관조(觀照)라는 여유의 언어가 사치스럽게만 여겨지듯이 한가함과 쌍둥이인 은밀함, 관능성에 대한 위선적 거부의 습관에 절어있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문득 멈추어서 응시하게 되는 그 어떤 것, 내 마음을 붙잡는 그 미지의 대상에 대해 알고자 하는 까마득한 매혹의 순간, 상상만으로도 설레는 그것, 그런 상황에 돌연 서고 싶다는 충동이 인다.


작가‘퍼트리샤 햄플’은 20대의 젊은 시절, 약속 장소인‘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를 지나던 중 우연히 보게 된 ‘앙리 마티스(Henri Emile BenoIt Matisse)’의 <어항 앞의 여인>앞에 시선을 빼앗긴 채 영원처럼 서있었던 영혼의 전환적 순간을 얘기한다. 그림에 대해 아무런 지식도 없었던 그녀를 멈추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테이블에 손을 괴고 어항 속 금붕어를 응시하는 여인, 그리고 그녀의 뒤에 푸른색 아라베스크 문양의 스크린이 있을 뿐인 그다지 관심을 이끌 요소가 없어 보이는, 마티스의 명성을 얻은 작품 군에 속하지도 못하는 그런 그림에도 불구하고.

응시를 버리고 힐끗 보기에 자리를 양보한 현대인의 시선과는 자못 괴리된 한가함, 이국적인 스크린 뒤에 펼쳐질 상상의 방,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욕망이었을까?


색채의 본질성을 굳게 믿었던 화가의 신성한 빛을 향한 여정, 특히 이국적 나른함이 물씬 풍기는 ‘오달리스크’들에 대한 호기심은 삶의 여행, 영혼의 여행과 잇닿는다. 그녀의 말처럼 “인생은 중단 없는 응시의 투명한 빛으로 가득차야 마땅”한 것일 터이지만 어디 우리네 삶이란 것이 그렇던가.  햄플에게 세상을 천천히 응시하며 살도록 영감을 준 마티스는 인생의 은인일 수밖에 없다. 그것도 젊은 나이에 그녀를 붙잡아 주었으니 어항과 어항 속 금붕어, 어항을 바라보는 여인, 푸른 아라베스크 스크린이 어울린 바로 그 구조의 그림은 신의 계시와도 같은 것이었을까?


1919년에서 1929년에 이르는 10년 사이에 하렘의 여자들 - 오달리스크 - 을 그린 마티스의 그림은 무려 50점이나 된다.  서구인들의 눈에 동양의 신비스러움, 이국적 관능의 향기를 물씬 안겨준 오달리스크는 진정 어떠한 의미였을까? 그리고 마티스에게는 또 어떠한 것이었을까? 마티스의 오달리스크의 연원은 그보다 1세기 앞서 하렘과의 짧은 만남에 황홀경에 취해 사악한 오리엔탈리즘을 번득였던 ‘들라크루아’의 오달리스크나, 방구석에 틀어박혀 고작‘레이디 메리’의 터키여인들과의 욕장의 단상에서 심상을 얻어 서구인의 식민지적 왜곡을 덧씌운‘앵그르’의 몽상의 계보를 잇는다. 그러나 마티스의 오달리스크들은 이들처럼 단지 이야기에 불과하고 보이는 대상을 그리는 것으로서의 그림이 아니라“보는 행위를 그리는 그림”, 즉 재현된 게 아닌 창조된 세계, 자신의 정신에 대한 것이 되려는, 인지와 의식에 대한 것이라는 점에서 경계를 짓는다. 마티스에게 오달리스크는 한가함의 미학, 삶의 관조, 오랜 노동 뒤의 안식, 아름다움에 대한 꿈, 사치와 노동자의 자긍심과의 연계...그러한 것들이었다.


햄플의 에세이는 오달리스크들을 쫒아 잠시 동양을 서성인다. 중동지역의 관광여행, 관광여행의 속성이란 살짝은 가벼운 식민주의 아니런가? 공허하며 서성대고 하는 일 없이 종일 킁킁대고 돌아다니고, 별나고 맛난 것, 노천카페에서 거피를 마시고 무지한 눈빛을 하고는 미지의 땅에서 흘끗 본 이미지를 가지고 돌아오는 것.  “소비의 쿵쿵대는 형판(型版) 아래에서 인간의 욕망의 마그마는 계속 끓어오른다.”는 그녀의 표현처럼 왠지 은밀하고 속물적인, 흘끗 보기 속의 덧없는 순간 같은 경박함이 느껴지지만, 바로 이 편안한 겉핥기 관광이 스케치와 기록의 기술을 창출했으며, 이것은 내밀한 자아의 고통을 지탱하는 형식의 기술이라고 연결 짓는다.

 

1920년부터 1905년 <살롱도톤>에서‘야수’로 불리기 시작한 마티스는 소위 야수파의 영지‘폴리우르’, 프랑스 남부의 어촌인‘카시스’를 그의 영원한 예술 공간으로 삼는데, 그 지중해 빛, 낭만적 태고의 시원을 간직 한 곳, 이국의 꿈을 지닌 비현실적 땅이어서 그랬던지, ‘스콧 피츠제랄드’, ‘캐서린 맨스필드’부터, 일종의 문화그룹이었던 ‘블룸즈버리 그룹’의 멤버들이었던 ‘버지니아 울프’, ‘E.M.포스터’, ‘존 메이나드 케인즈’,‘로저 프라이’,‘버네사 벨’등 오늘날 이름만으로도 화려한 문인, 사상가, 경제학자, 화가들의 무대로서 조명되고, 소녀시절의 기억을 다리 삼아  동네친구의 엄마였던‘도리스’라는 여인이 건네준‘캐서린 맨스필드’의 <일기>와 <서간집>, 그리고 실험영화인이자 거부(巨富)였던 ‘제임스 힐’의 <필름 포트레이트>라는 영화의 개인적 교감에 대한 추억들의 에피소드들을 정말 무심한 즐거움으로 묘사한다.


맨스필드의 “자신의 영혼을 발가벗길 수 있었던 사심없는 권위의 글쓰기”와 그녀의 자유분방함,‘버지니아 울프’가 “싸구려에 냉혹하고...파렴치하다.”고 편지글에 남겼던 맨스필드의 인상부터, 결핵으로 단명하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은 “‘자유’시대에 걸린 진단 미확정의 임질”이 죽음의 원인일 것이라고 발칙한 소문도 살짝 퍼뜨린다. “레몬 빛 태양이 내리쬐는 방통의 빌라, 이졸라 벨라”에서의 맨스필드는 마티스의 태양과 신선한 빛과 조우한다. 색채와 빛, 에로티시즘과 오달리스크, 프랑스 남부를 맴돌며 예술의 창조성에 응시한 시선을 멈추지 않는다. 다시 오달리스크, 서양인들의 오만방자한 동양의 왜곡과 서구인의 하렘 바라보기를 뒤집어 놓는다. 오달리스크는 ‘방’,‘학교’의 뜻을 가진 터키어 오다(oda)를 어원으로 하는데, 이를 서양인들이 열을 올리며 상상하는 모든 성 노예의 이미지로 둔갑시켜 ‘타락’,‘순결을 잃다’와 같은 탐욕스러운 상상의 산물로 뒤바꿔 놓았음을‘바이런’, ‘제임스 조이스’까지 일조하며, 마침내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유한여성, 첩으로 왜곡시켜 버리는 여정을 추적한다. 또한 유럽인이 하렘의 여인들을 구속된 성적 노예라는 음탕함으로 변질시켜버린 것처럼, 코르셋을 입은 유럽인을 바라보는 터키의 여자들이 영국 여자들의 예속, 새장 속의 새를 발견하는 모습으로 관찰자의 시선에 따른 역전을 보여준다.


새장 속의 새, 어항 속의 금붕어, 하렘을 바라보는 서구인의 시선은 그런 것이었다는 점은 마티스의 <어항 앞의 여인> 속 여인의 응시는 오히려 서구인의 자기 성찰, 자아에 대한 인식의 촉구가 아니었을까? 기억과 기록, 여행의 여정, 에세이의 종착지는 마티스의 마지막을 지켰던 젊은 간호학교 학생이었던‘모니카 브루주아’, 훗날 ‘자크-마리’수녀가 되어 마티스의 예술적 혼이 배어있는 ‘로사리오 예배당’을 지키며,  마티스적인 얼굴을 한 그녀와의 만남은 허구의 공간을 맴돌던 것 같은 나른한 기분을 순간, 현실로 돌려놓는다. 소설 같은, 회화와 문학을 오가는 햄플의 기억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그녀처럼 성스런 무심함에 젖어든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마티스의 오달리스크들을 그린 회화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예술적 향취 그득한 에세이는 소소한 지적 즐거움과 함께, 아름다움, 열정, 재능,  묵상적 삶의 정수, 인생의 이미지들이 기분 좋게 다가온다. 힐끗 보는 경박한 삶과 세계가 아니라 햄플이 기대하는 인생, “바라보고 생각에 잠기는 것, 혼자 남겨져 끝나지 않는 소설을 읽는 것, 이따금 몇 분씩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는 것, 세계를 응시해 거기서 지나가는 이미지의 문장을 만드는 것”일 게다.

리뷰 총점 종이책
블루 아라베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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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점의 그림으로 시작된 영혼의 여행 <블루 아라베스크>. 이 작품을 한마디로 뭐라고 표현 할 수 있을까. 퍼트리샤 햄플의 <블루 아라베스크>에는 여러 예술가들의 그림이야기와 문학작품이 지은이의 사색과 철학의 여행을 함께 하고 있다. 종교적이면서도 문학적이고 예술적인 퍼트리샤 햄플의 글은 처음 읽었을때는 당황스럽고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읽다보면 빠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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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점의 그림으로 시작된 영혼의 여행 <블루 아라베스크>.

이 작품을 한마디로 뭐라고 표현 할 수 있을까.

퍼트리샤 햄플의 <블루 아라베스크>에는 여러 예술가들의 그림이야기와 문학작품이

지은이의 사색과 철학의 여행을 함께 하고 있다.

종교적이면서도 문학적이고 예술적인 퍼트리샤 햄플의 글은 처음 읽었을때는

당황스럽고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읽다보면 빠져들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마력이 되어 가슴에 녹아든다.

뒤얽힌 식물 모양과 추상적인 곡선을 이용한 모티브가 반복되는 정교한 기하학 형태

아라베스크는 대개 모스크의 벽을 장식하는 데 쓰인 이슬람 예술의 한 요소이다.

아라베스크 무늬는 장식이 화려하지만 영적으로 신의 무한한 위대성을 묘사한다.

바로 이런 깊이있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제목 <블루 아라베스크> 야말로

이 책의 분위기와 의미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듯 하다.

1972년 어느 봄날, 저자는 우연히 친구를 만나러 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운명처럼 약간 우중충한 그림 앞에서 멈춰서게 된다.

영어로는 '어항 앞의 여인'이라는 이름표가 붙어있는 앙리 마티스의 그림이였다.

저자는 그렇게 그 그림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평소 예술에 감동받는 버릇 같은 것은 없었던 평범한 저자의 인생에 불현듯 찾아온

운명같은 경험.

이 그림에 도대체 어떤 매력이 있길래 저자를 그토록 사로잡은 것일까.

우리는 아마 이날 저자가 느꼈던 감정의 소용돌이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같은 음식을 먹어도, 같은 그림을 봐도 가슴속에 느껴지는 감정은 제각기 다 다르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이 마티스의 '어항 앞의 여인'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는다고 해도

이 사람의 감정은 퍼트리샤 햄플이 1972년 어느 봄날 느꼈던 감정과는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림, 문학작품, 음악 등을 보고 듣고

심장이 멎을듯한 영감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도대체 얼마나 될까. 

일반 사람들은 평생동안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더 많은데,

<블루 아라베스크>의 저자는 이런 극소수의 행운을 거머쥔 여인이다.

이때부터 마티스부터 시작해 여러 예술작품들과 함께 저자의 사색의 여행이 시작된다.

블루 스크린 너머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영적인 세계, 그 무한한 이상향의 세계로 나아가는

퍼트리샤 햄플의 영혼의 여행에 한번 동참해 보는것은 어떨까.

아마 여러분은 그녀와 함께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i*****8 2009.06.05.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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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아라베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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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책을 접하다가 가끔 실수를 범하고는 하는데, 그 실수란 바로 책의 표지와 간단한 설명만 보다가 그 책의 분류를 헛갈린다는 것이다. 이 '블루 아라베스크'도 마찬가지였는데, 40여 페이지를 읽어 내려갈 때까지 나는 이 책을 소설(!)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마치 다빈치 코드/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처럼 작가가 영향을 받은 그림을 가지고 상상의 나래를 펴내려간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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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책을 접하다가 가끔 실수를 범하고는 하는데, 그 실수란 바로 책의 표지와 간단한 설명만 보다가 그 책의 분류를 헛갈린다는 것이다. 이 '블루 아라베스크'도 마찬가지였는데, 40여 페이지를 읽어 내려갈 때까지 나는 이 책을 소설(!)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마치 다빈치 코드/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처럼 작가가 영향을 받은 그림을 가지고 상상의 나래를 펴내려간다거나, 또는 그 그림 자체 속에 담긴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거나 하는 소설 말이다. 최소한 이 사진으로 영향을 받은 어떤 여성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라고 생각했었는데, 왠걸. 이것은 한 여성 작가의 마티스에게 바치는 열렬한 연애 편지와도 같은 에세이였다.

 

사실 마티스의 작품은 유명 작품 몇 작품 정도는 스치듯 지나갔을 지도 모르지만, 그 외에는 전혀 배경지식이 전무한 나에게 있어서 이 책은 마치 암호를 풀 듯이 머리속에 난해한 문장들이 핑글핑글 돌아가게 만드는 복잡한 에세이였다. 작가의 자서전이 아니기에, 작가의 생애에 따라 글이 진행되지도 않는다. 처음에는 표지 속의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듯 하더니, 다음에는 마티스가 영향을 받았던 대표적인 그 시대의 유행적인 그림의 기법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그 다음에는 어느 순간 작가가 자리를 이동하여 마티스의 다른 작품을 보러 여행을 떠나고 있다. 분명 그 문장 하나하나는 작가의 필력을 충분히 짐작하게 할 만한 힘을 뿜고 있는데, 이러한 스토리의 구성에 단지 내가 익숙치 않을 뿐이다. (너무 쉬운 책(?)만 읽어온 걸까?)

 

미술 작품에 대한 에세이들은 (한젬마 씨의 책이라거나, 그 외 여러 에세이적인 미술 소개 서적들) 독서와는 또 다른 '그림과 나' 사이의 농밀하고 비밀스러운 개인적인 경험을 엿볼 수 있는 짜릿한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상당히 매력적이다. 나는 이렇게 보였던 그림을(또는 나는 전혀 그렇게 깊히 느끼지 못했던 그림을) 이 사람은 이렇게 보고, 이런 식으로까지 해석할 수 있구나 하는 점을 내게 자극시켜주는 것이다. 이 에세이는 그의 미술사적 지식(본인은 전혀 지식이 전무했다고 주장하나, 아마 마티스의 그림에 빠진 후 상당한 공부를 했음이 분명하다.)과 작가만의 섬세한 감수성과 표현력이 합쳐져 정신없이 화려한 조명 속에서 빙글빙글 돌며 끊임없이 춤을 추듯이 마티스와 그와 관련한 작품들 속을 정신없이 돌면서 여행하게 된다. 나는 그 현기증에 조금 지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매력도와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어쩔 수 없이 뉴 욕 타임즈 서정 '올해의 주목할 만한 책 100권' 시카고 트리뷴 선정 '올해의 베스트북'이라는 권위에 납죽 엎드려서 내 자신을 반성하며, 다시 한 번 미간에 긴장을 잔뜩 준 채 소화시키려고 노력하며 다시 접하게 될 책이 될 듯 하다. 

YES마니아 : 로얄 w********y 2009.06.13.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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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선을 따라서 보게 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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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에서 솟아오르는 마음은 언제나 정신을 맑게 만들고 가슴에 뛰는 설렘은 사람의 마음을 늘 흔들기에 충분하다. 완벽하다는 것, 무언가의 소음이 아닌 조용한 음악 소리처럼 늘 자기 자신에게 의지를 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는 그 무언가가 존재한다. 사설이 길어진 것을 실로 오랜만에 순전히 자신의 힘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의해서 경험을 했고 그 힘은 자신의 힘으로 또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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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에서 솟아오르는 마음은 언제나 정신을 맑게 만들고 가슴에 뛰는 설렘은 사람의 마음을 늘 흔들기에 충분하다. 완벽하다는 것, 무언가의 소음이 아닌 조용한 음악 소리처럼 늘 자기 자신에게 의지를 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는 그 무언가가 존재한다. 사설이 길어진 것을 실로 오랜만에 순전히 자신의 힘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의해서 경험을 했고 그 힘은 자신의 힘으로 또는 자신의 정신을 무장하게 할 수 있다는 말로 바꿀 수 있는 그 무엇을 던져 주고 수수께끼처럼 풀어 가도록 만든다. 지난 일주일 동안 내 곁에서 나에게 많은 힘이 된 책이 있다. ‘블루 아라베스크’, 그동안 힘들었던 내 마음에 오래도록 들어와 다른 책에는 눈도 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평범하게 돌아와 시작을 하면 내가 읽은 책은 에세이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오래된 것에서 진실을 보고 지성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의 마음에 오래도록 남아서 새로운 세상을 보게 만든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내가 지성인인지는 잘 모르겠다.
저자는 그림에서 자신의 영혼을 빼앗겼고 그러면서 자신의 삶이 새로워졌다고 말한다. 그림에서 느낀 감정은 마음에 오래도록 남아서 그림을 그려 놓았고 마음의 버튼을 살짝 누를 수 있을 만큼 새로운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선이 닿고 있는 곳에서는 환상적인 모습과 아름다움이 서려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던진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그 시선은 때론 사치일수도 있겠지만 자신 안에서는 어떤 경우를 마다하고 늘 분명한 목소리를 던져준다.


그림에 의해, 그림으로 인해 자신이 위대하게 느껴지고 새롭게 삶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새로운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것과 어쩌면 같은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던 것을 끄집어내는 길일 것이다.
저자가 눈을 떼지 못했던 마티스의 그림들.
매혹적인 그림에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던 것처럼 나 또한 조금 조금씩 책을 넘기면서 새롭고 신비한 예술의 세계에 풍덩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신비한 예술의 세계 중 그림을 통해서 그리고 그것을 들여다보면서 새로운 상상을 하게 되고 또한 그것을 통해 새롭게 바뀌는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예전의 생각으로 보면 예술의 세계는 겸허하게 보이는 것들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선입관이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서 본다는 것의 의미를 새롭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꿈꾸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물질적인 것인 아닌 정신적인 부분, 그것이 우리의 눈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 나를 새롭게 바뀌게 하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저자가 이야기 하는 새로운 것들은 역사적인 측면에서도 우리가 알 수 있도록 역사적인 측면을 인용해 주기도 했고 그림 속에 감춰졌던 그 이면의 모습을 저자는 자신의 이야기나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보물을 선물하듯 새로운 눈을 가지게 해 주었다. ‘본다’는 의미는 고풍스러운 공간이며 흥미로운 것들로 진정한 참 의미를 안겨 주었다. 저자가 가져다주었던 영감의 실체는 새로운 목소리를 만들었고 거듭 되는 그의 일상의 모습에서 나는 장르를 넘나들면서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는 것이 어쩌면 매혹적인 일일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삶은 개인적인 기록이 아님을 느끼게 되었다. 무심히 보았던 책에서 새로운 세상이 잔잔하게 넘쳐흘렀다!
눈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어 의미 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k*****n 2009.06.13. 신고 공감 0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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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아라베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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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스, 미술시간에 배웠었던 인물이다. 아니 그렇다고 기억을 하고 있었다. 미술에 문외한이긴 해도 이름만이라도 안다는 이유로 선뜻 선택했던 책을 펴며 순간 멈칫한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미술책에서 보았던 작품은 아니기에....... 책을 읽으며 미술 용어에 대해서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음을 감사하며.   1972년, 약속에 늦어 미술관 복도를 잰 걸음으로 뛰다시피 가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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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스, 미술시간에 배웠었던 인물이다. 아니 그렇다고 기억을 하고 있었다.

미술에 문외한이긴 해도 이름만이라도 안다는 이유로 선뜻 선택했던 책을 펴며 순간 멈칫한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미술책에서 보았던 작품은 아니기에.......

책을 읽으며 미술 용어에 대해서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음을 감사하며.

 

1972년, 약속에 늦어 미술관 복도를 잰 걸음으로 뛰다시피 가던, 당시 대학을 갓 졸업한 지은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떤 그림을 보고 그만 발이 묶여버린다.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이미지에 얻어맞은' 것처럼' 그림은 강렬한 힘으로 그녀를 꼼짝 못하게 붙잡아 둔다.

그 그림은 앙리 마티스가 그린 '어항 앞의 여인'이었다.

 

 

마티스의 작품 중에서도 수작으로 꼽히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림에는 금붕어 몇 마리가 헤엄치고 있는 어항과, 그 어항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한 여인이 그려져 있다.

해질 무렵의 나른한 햇빛이 창으로부터 들어와 그녀의 옆 얼굴을 길고 노란 빛으로 비추고,

금붕어는 한가로이 헤엄치며, 여인은 팔에 머리를 괸 채 조용히 어항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내겐 한가롭다 못해 지루해 보이기도 하는 이 그림이 지은이를 그토록 사로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는 그림이 자신에게 무언가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림의 속삭임에 귀기울이며 자신을 온전히 내맡겼다.

그리고 이내 그림 속 여인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고 생각에 잠기는 것'이 자신이 바라는 삶의 모습이었음을 안다.

저자는 결국 이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실은 처음에는 배경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푸른색 스크린과 그것이 가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푸른색으로 무늬 세공이 돼 있는 그 스크린은 마티스가 북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오면서 프랑스로 가져온 것이었다.

지은이는 마티스가 그 스크린 뒤에 숨겨둔 것이 무엇일지를 상상하며, 마티스의 흔적을 좇아 여행을 떠난다.

 

관찰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는 시간도 되었다.

모든 것을 두루뭉술하게 알고 지나치는 나의 습관에 대해 반성을 하는 시간이다.

관심을 가지고 깊이 있게 자세하게 보아야 하건만 대~충 건성으로 보고 다니는 숩관이 어느사이 내게 스며들어있음을....

그 덕에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그림으로 돌아가서 다시 들여다 보아야 했다.

한 점의 그림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내게 그림이든 책이든 내가 관심을 가지고 보는 만큼

또다른 세상을 내게 보여 줄수도 있음을 알려 주는 책이었다.

k*****m 2009.06.13.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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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아라베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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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겉표지를 한꺼풀 벗기고 나면 새파란 표지가 나를 빨아들이는 듯한 느낌이 든다.그림 한 점에서 시작된 여행, 이야기, 삶, 마음 의 이야기가 책 한권으로 빼곡히 채워져 내게 전해지는[블루 아라베스크]. 그 시작은 앙리 마티스의 [어항 앞의 여인] 이였다. Femme et poissons rouges  [어항 앞의 여인]  앙리 마티스 예술에 감동을 받는 경우 따위는 없었다고, 나는 그런 감성적인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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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겉표지를 한꺼풀 벗기고 나면 새파란 표지가 나를 빨아들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림 한 점에서 시작된 여행, 이야기, 삶, 마음 의 이야기가 책 한권으로 빼곡히 채워져 내게 전해지는
[블루 아라베스크]. 그 시작은 앙리 마티스의 [어항 앞의 여인] 이였다.


 Femme et poissons rouges 
 [어항 앞의 여인] 
 앙리 마티스

 예술에 감동을 받는 경우 따위는 없었다고,
 나는 그런 감성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하던 저자 퍼프리샤 햄플을
 그냥 그림 한방에 정지시켜버리고
 그림 앞에서 꽁꽁 묶어버린
  이 우중충해 보이는 그림 한 점
 책을 읽기도 전에 표지의 이 그림을 보고
 [어항 앞의 여인] 으로 이야기가 시작되겠구나~ 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저자의 정신줄을 앗아갈줄은 몰랐다.
 결국 [어항 앞의 여인]이 새겨진 엽서를 사서 
 몇년동안 데롱데롱 달고 다니면서 정신줄을 여전히 멍하니
 놓게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그림앞에서 멍해진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예전에 [그림과 눈물]이라는 책을 읽고 잠시 잠깐 고흐의 자화상이 새겨진 엽서를 빤히 쳐다본적이 있긴했지만,
눈물을 흘리지도 그렇게 까지 멍때리지도 않았던 나로서는 다소 이해가 조금 힘들다.
그림에 대해 무지하면서 그다지 감동을 받는 성격도 아니라는 저자가 한순간 멍때리고.
정신줄을 놓고, 발이 묶이고, 그림앞에서 움직일 수 없는 충격의 소용돌이에 빠졌다는 것이 어쩌면 나도...라는 
상상을 하게 만들어주었다. 나랑 비슷한 저자를 홀린 저 그림의 정체는 무엇일까?
나도 미술관에서 저 그림앞에서 그럴 수 있을까?
아니면 다른 그림 앞에서 멍때릴까?
한껏 상상을 해보지만, 잘 연결은 되지 않는다. 그러기는 쉽지 않음을 잘 알기에......

예술책을 읽다보면 나는 정말 무식하구나. 라는 생각이 꼭 든다.
저자의 박식함에 짜증이 나고, 나는 이렇게 감동을 느끼는데, 왜 너는 그것을 못느끼냐는 그 말투에
책장을 덮으며 투덜거리게 되버리는 나를 발견해버린다.

근데, [블루 아라베스크]는 그런 느낌이 없다.
그냥 나같은 사람이 어느날 그냥 길가다 본 그림 앞에서 든 생각을 그리고 그로인해 관심을 가지게 된
화가나 그림들에 대해 그냥 평범하게 자신의 눈을 본 것들을 조잘조잘 들려주고 있다.
편안하게 그냥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 마음이 전해지며, 
나도 그림여행을 떠나보고 싶다는. 그림 앞에서 멍때려보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키워나가게 해주는 느낌이다.

담백하게 읽으며 그림을 천천히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묘한 매력이 깃든 [블루 아라베스크]였다.
지금까지 읽은 미술서 중 가장 편안했고, 덤덤했으며, 즐거웠던 여행이 아니였던가 싶다.

w*****a 2009.06.10.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한점의 그림에서부터 시작된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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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전에서 감상을 할때 자신에게 느낌을 주는 그림들을 만나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림이 내뿜는 것이 너무 강렬하다거나. 그림의 느낌이 너무도 좋을때 그 자리에 한참동안 서있는 경우가 있다. 그와 같이 책의 저자 퍼트리샤 햄플은 친구를 만나러 전시실을 지나가던 중 마티스의 <어항 앞의 여인> 이라는 그림 앞에 멈춰서게 된다. 그 그림이 바로 이 책 표지에 실린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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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전에서 감상을 할때 자신에게 느낌을 주는 그림들을 만나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림이 내뿜는 것이 너무 강렬하다거나. 그림의 느낌이 너무도 좋을때 그 자리에 한참동안 서있는 경우가 있다.

그와 같이 책의 저자 퍼트리샤 햄플은 친구를 만나러 전시실을 지나가던 중 마티스의 <어항 앞의 여인> 이라는 그림 앞에 멈춰서게 된다. 그 그림이 바로 이 책 표지에 실린 그림이다. 나도 처음 본 그림..

 

사실 마티스라는 화가에 대해서 나는 이름만 알고 있었을 뿐이고 그의 작품은 한두점밖에 알지 못한다. 아마 그림에 문외한 이더라도 그의 그림중 유명한것 몇점을 보면 아아- 이그림~ 하고 말할것이다. 그정도 밖에 몰랐던 그의 그림중 이 책의 표지 그림은 나에게도 무언가의 느낌을 전해 주었다. 어항을 바라보는 여자의 시선이 너무도 특별해서. 아마 저자도 그랬으리라. 저자는 이 한점의 마티스의 그림으로 시작해 세계로 여행을 떠난다. 마티스를 시작해서 피츠제럴드. 맨스필드의 자취를 찾아서 말이다.

 

그녀는 여행을 하면서 인생을 바꾸었고. 그런점에서 이 <어항 앞의 여인>이라는 그림은 그녀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그리고 여행을 하면서 마티스의 존재를 쫒았고 그의 감정을 받아들였다. 한 작품을 만나고 세계속으로 여행을 떠나는 일. 듣기만 하면 정말 감상적이기도 한데, 매일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아직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또한 그녀는 여행을 통해서 그녀 자신을 찾아가는 중이기도 했다.

 

약간 읽어내려가면서 아쉬웠던 점은 오로지 마티스에게로만 향했던 화살들이 여러작가들과 예술적인물들에게로 옮아갔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이것저것 벌여놓은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고. 마티스에게로 쏠렸던 처음의 집중이 점점 흩어져 버렸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흥미를 느꼈던 점은 그녀처럼 나도 이 책의 표지속 한점 그림에 마음이 이끌렸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앙리 마티스의 그림속 여자들에게도..

 

미술관에 가고 싶어졌다. 이런 마음을 끄는 그림들을 감상하고 싶었다. 내 마음이 거기에 닿으면 그 그림을 그렸던 화가를 느낄수 있을것 같았다. 그는 이 세상에 없지만 그의 숨결은 그림을 통해 존재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약간 집중이 흩어지긴 했지만.. 괜찮은 책이었다.

 

 

나는 묵직한 황금빛 액자에 끼워져 있는 커다란, 그리고 약간 우중충한 그림 앞에서 멈췄다. Femmee et possions rouges. 영어로는 <어항 앞의 여인>이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는 마티스의 그림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틀렸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느꼈다. 나는 그 그림 앞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왜인지는 말할 수 없었다. 그냥 거기 묶여 있었다.(p.8)

 

찌그러진 시간을 내가 상처라고, 폭행이라고 이미 느끼는 것은 분명했다. 너무 젊고, 너무 야심찼다(나는 그랬다). 하지만 이미 짓눌리고 숨이 막혀 일정과 직무의 정당한 요구들을 증오하고 있었다. 나는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했다. 원고를 편집하면서 데드라인에 시달리는 존재였다. 하지만 내 자신의 경험으로부터가 아닌 본능으로부터 각인된, 인생이란 어때야 마땅한지에 대한 기억의 자취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인생은 중단 없는 응시의 투명한 빛으로 가득차야 마땅했다. 바라보고 생각에 잠기는 것이야말로 내가 찾던 직업이었다. (p.14)

 

 

t****6 2009.06.04.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블루 아라베스크] 모든 것은 한 점의 그림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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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마티스의 그림 한 점이 그녀의 인생을 바꿨다! 카피는 꽤나 인상적이었다. 사람의 삶은 거창한 사건으로도 바뀌지만 책 속에 나온 한 문장, 한 점의 그림, 한 곡의 음악으로도 바뀐다. 다양한 글을 쓰지만 미술사엔 무지했던 저자는 우연히 마티스의 [어항 앞의 여인] 그림을 보고 얻어맞는 느낌을 받는다. 마티스는 그림엔 화가의 내재된 모든 감정을 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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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마티스의 그림 한 점이 그녀의 인생을 바꿨다!


카피는 꽤나 인상적이었다. 사람의 삶은 거창한 사건으로도 바뀌지만 책 속에 나온 한 문장, 한 점의 그림, 한 곡의 음악으로도 바뀐다. 다양한 글을 쓰지만 미술사엔 무지했던 저자는 우연히 마티스의 [어항 앞의 여인] 그림을 보고 얻어맞는 느낌을 받는다.


마티스는 그림엔 화가의 내재된 모든 감정을 도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림은 보는 행위를 그려야지 보이는 대상을 그려서는 안 된다. 그 대상이 완전히 이국적인 세계를 나타내더라도, 이는 자아의 베일을 거쳐서 실현되어야 한다.(34쪽) 마티스가 가장 이해하고 싶었던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나에 대한 관심 없이 타인과 사물에 대한 관심은 생기지 않는다. 마티스는 끊임없이 자신을 바라본다. 그림 속 여자의 시선은 바로 마티스의 시선이다.


저자가 [어항 앞의 여인] 그림을 보고 얻어맞는 느낌을 받는 것 그림 속 여인에게서 자신을 봤기 때문이다. 화가의 그림을 보고 관람객이 공감하는 건 그림에서 미처 알지 못했던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화가 자신의 모습이 그림으로 표현하고 관람객은 그림에서 자신을 보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공감이라고 말한다.


마티스는 비행기 여행에 대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마음의 평화를 우리가 얻을 수도, 찾을 수도 있게 해준다. 놀라운 것은 부동감, 그리고 커다란 안도감이다. 우리가 추락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50쪽)고 했다. 그의 그림들은 여행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사물을 보면서 완성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빠르게 사람과 사물을 손으로 스케치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본다’는 것에 있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고 대부분의 시간은 경기도 성남에서 지냈다. 어린 시절의 나는 명절 때마다 고향으로 가는 긴 차량행렬에 동참하고 싶었다. 지금은 내가 살고 있는, 오랜 시간을 보냈고 지금도 보내고 있는 이 도시에서 달아나고 싶다. 마티스는 성직자들이 지배하는 북부로 달아났고, 스콧 피츠제럴드는 세인트폴을 떨쳐 버렸고 캐서린 맨스필드는 뉴질랜드를 떠나 런던으로 갔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새로운 곳이 아니라 ‘장대한 내면으로의 귀향(55쪽)’이었다. 나의 내면의 도시는 어디일까?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은 인류 영혼의 숙제다. 마티스는 하나의 아름다움에 정착하지 않았다. 그의 그림엔 여인들이 등장한다. 그녀들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더라고 혼자서는 아무런 빛을 내지 못한다. 방과 디반들, 벽지와 패턴들이 변주했을 때 찬란한 빛을 낸다. 그의 여인들은 블루와 아라베스크의 조화를 통해 빛을 낸다. 블루와 아라베스크의 관심은 그의 부모로부터 이어진 보이지 않는 끈이다. 아버지는 직조공 가계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모자상인으로 도자기 그림을 그렸다. 마티스에게 장식이나 색채는 본질이지 피상이 아니었다. 장식이나 색채는 내면 깊숙이 뿌리박혀 있던 것이다. 피카소에게 그림은 별개의 그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며 삶이다.


피카소는 “여자를 그리고 싶으면 그랬어야지. 디자인을 하고 싶었다면 그랬어야 했고. 이건 그 둘 사이에 있잖아.”(145쪽)라며 비난했다. 저자는 마티스에게 인테리어는 무시할 수 없는 메타포라고 말한다. 벽지와 아라베스크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상징한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때로는 보호가 되고 때로는 위험이 되고 때로는 침묵하며 무심히 바라볼 수밖에 없는 세계. 그 세계 속에서 우리는 오달리스크가 된다. 시간이 지났다. 자리에서 일어날 시간이다. 그녀는 부유하는 물고기들을 바라보길 멈추고 블루 스크린 속 세상으로 사라진다. 삶의 기운을 얻고 다시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리라.

시간을 내서 미술관에 다녀와야겠다. 그림에 얻어맞진 않더라도 좋은 그림을 만나 행복한 마음을 느끼고 싶다.


    


YES마니아 : 로얄 m****6 2009.05.31.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