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때가 되고, 사물의 아름다움을 주시하게 되면, 모르던 사람들은 서로 알게 되고 똑같은 감정에 젖게 될 것이다. 어느 날 아마, 이 지도 앞에서, 이 백자 항아리나 이 의자 앞에서, 이 수수하고 투명한 유리 귀걸이 앞에서, 사람들은 열심히, 바로 이런 것 때문에 유명해질, 사라진 화가의 혼을 이해하려고 애쓸 것이다. - 131쪽
나는 영화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를 보고서 베르메르라는 네덜란드 화가를 알게 됐다. '우유 붓는 여인' '창가에서 편지 읽는 여인'과 같은 화가의 대다수 작품들은 화폭의 왼쪽 창에서 쏟아지는 빛이 사람과 사물들에 부딪히는 순간을 재현하고 있다. 이 공간은 화가의 방이다. 이 책의 제목 <베르메르, 방구석에서 그려낸 역사>도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지어진 듯하다.
베르메르의 그림들은 당대에는 주목받지 못하다가 후세에야 어두운 방구석에서 기어나왔다. 그에 대한 기록 역시도 거의 남지 않았기에, 이 빛을 매만질 수 있는 화가는 수수께끼에 가려져 있다. 자화상조차 남지 않아 그의 얼굴조차 알 수 없다.(다만 '화실'이라는 작품-이 책의 표지에 쓰였다-을 통해서 그의 뒷모습만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베르메르의 육체와 정신과 일상을 글로써 그려내려면 모조리 상상력에 크게 기댈 수밖에 없다. 귀스타브 반지프라는 작가는 20세기 초반까지 발굴된 자료를 통해 베르메르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유려한 문체로 새겨 보여준다. 베르메르가 만질 수 없는 빛을 만졌듯이 반지프는 허공에 맴돌던, 사라진 화가의 영혼을 불러와 정성들여 매만진다. 수많은 베르메르 관련 저서들이 이 책에 빚을 지고 있는 이유는 바로 그것일 터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는 '화실'에서 등을 보이고 있는 베르메르의 어깨 위에 다정하게 손을 얹는다.
|
|
지금 이렇게 인기 있는 베르메르가 사후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잊혀진 화가였다는 사실은 믿기 어렵다. 그의 그윽한 인물들과 조용한 공간이 영화로 소설로 우리 주위에 있었기 때문에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이지만 그가 친숙했다.
이 신간은 잊혀졌던 그를 세상에 다시 내 놓기위해 애쓴 미술사학자들을 소개한다. 베르메르가 아닌 산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수수께기 같이 의문 투성이이고 당시의 화풍에서도 독특한 스타일을 취하는 베르메르를 어떻게 추적하고 감상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차근차근 설명하고 있다. 제목을 풀어 보자면 <두발로 뛰어다니면서 방구석에서 그림만 그리던 베르메르를 세상으로 끌어 낸 역사> 라고나 할까.
17세기 네덜란드 그림을 렘브란트거나 아니면 (시장바닥의 -- 조금 과한 나의 표현임) 솜씨와 주제가 많이 떨어지는 풍류화이거나로 나눠서 생각하는 반지프의 시선에는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만큼 이름이 가려진 상태에서도 베르메르가 돋보였다는 데에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풍속화에대한 "내려보는" 눈길은 역자의 주에서도 슬쩍 슬쩍 보인다. '바니타스'를 단순히 '풍속화의 일종인 정물화'로 설명했고(63쪽) 드라뚜르를 카라바조와 연결해서 설명한다.(178쪽)
책 앞 부분 칼라인쇄 그림들은 괜찮은 편이지만 책 본문 사이사이에 나오는 흑백 그림들은 너무 어둡게 인쇄되어서 보기가 어렵다. 그림책 답지 않게 가벼워서 들고 다니기엔 좋았지만, 그만큼 그림화질을 포기한 셈이다. 본문에서 그림을 인용할 때 그림번호를 매겨놓아서 찾아 볼 수 있게 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담담하고 퍽퍽한 번역에 읽기가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인문서로 보기에는 참고도서 목록이나 그림 목록이 빠져있고 번역한 책의 원서에 대한 정보도 (원어로) 표시않았고, 교양서로 보자니 재미가 떨어진다.
|
|
다니엘 아라스는 『베르메르의 야망과
비밀』를
장
루이
보두아이예의 <베르메르 수수께끼>라는
글로
시작한다. 그리고 뒤에 그 전문을 덧붙여 놓았다. 그
글에는
또
한
권의
책이
소개되어
있다. 바로 귀스타브 반지프의 저서. 『베르메르, 방구석에서 그려낸 역사』가 바로 그 책이다. 1925년에 씌여진(첫
판은
그
이전에
나왔지만) 이 책은 베르메르에 본격적인 전기로서 최초의 것이다. 길지
않은
글이다. 그리고 다른 책에서 읽은 바에 따르면 여러 부분이 반박되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 글이다. 베르메르의
그림에
대한
제목도
낯선
것들이
많다(베르메르는 그림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기 때문에 경매에 나올 때마다 그 때 그 때 제목이 붙여졌고, 소장자들이
나름대로
붙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제목이 조금씩 다르긴 하다). 그림에
대한, 그림에 등장하는 기법과 여러 소품에 대한 상징 등에 대한 분석은 그리 정교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선 모든 책들이 반지프의 책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의미다. 말하자면
이정표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이정표를 근거로 베르메르를 탐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 말고도 반지프는 철저하게 베르메르와 베르메르의 작품에 흠뻑 젖어 있다. 그러니까
베르메르와
베르메르의
작품에서
멀찍이
떨어져
감상하고
분석하겠다는
자세가
아니라
그
속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그래서 좀 과하다 싶은 감정적 격찬이 이어진다. 때로는
베르메르라는
화가에
대한
이해를
방해할
정도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나의 작품이 아니라 그의 작품 모두에 대한 감정 이입. 이것이
바로
『베르메르, 방구석에서 그려낸 역사』라는 책의 정체다.
부록으로는 앙드레 블룅이 쓴 <베르메르의
부활>이라는 글이 실려 있다. 바로
베르메르를
부활시킨
토레
뷔르거라는
인물과
그
인물이
베르메르를
어떻게
찾아냈으며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쓴
글이다. 뷔르거라는 이름도 베르메르에 관한 책을 읽으면 절대 건너뛸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다. 완전히
무명은
아니었지만, 지금과 같이 인정받지는 못하던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얀
베르메르를
세상에
알린
게
바로
토레
뷔르거라는
사회주의
작가였다. 1848년 혁명 이후 프랑스에서 브뤼셀로 쫓겨나 망명 생활을 하던 중 베르메르를 찾아냈고, 그를
세상에
드러냈다.
지금의 베르메르는 베르메르라는 화가의
존재에서
시작했지만, 토레 뷔르거라는 인물이 찾아낸 19세기
중엽, 20세기 초 반지프의 전기 등을 기점으로 변곡점을 찍으며 세상에 알려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베르메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책이라기 보다는 베르메르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세상에 등장했는지에 대해 의미를 갖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실수로 올렸던 리뷰를 다 날리고, 이전에 썼던 리뷰를 다시 올립니다.) http://blog.yes24.com/document/826419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