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는 공포 영화 매니아라고 자처한다. 와이프와 아이들이 잠든 밤 늦은 시간에 방안의 불을 모두 꺼놓고 공포영화를 볼 때 스멀스멀 느껴지는 소름을 즐긴다. 그런 관계로 이 책의 전작인 ‘링 스파이럴’을 읽고 나서, 이 책 ‘링 루프’는 한여름 밤 가족들이 잠든 사이에 읽으려고 아껴두었는데, 최근에 스트레스가 하도 심해서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계획보다 조금 일찍 책장에서 꺼내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상상과는 달리 소설은 공포를 이야기하지 않고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라진 공포 공포의 헤로인 ‘야마무라 사다코’ 언니(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자웅동체인데 언니라고 불러도 되나?)가 사라졌다. TV 밖으로 기어 나오는 기적을 행하시어, 후대의 많은 귀신들이 직립보행을 포기하고 기어 다니도록 엄청난 영향력을 행하신 ‘사다코’ 언니가 사라졌다. 후반부 어디에선가는 등장하겠지 하는 기대를 가지고 책을 읽어 나갔지만, 끝끝내 나의 기대를 져버리고 ‘야마무라 사다코’는 등장하지 않았다. 소름 끼치도록 스멀대는 공포감으로 나를 흥분케 해줄 것이라는 기대감도 ‘사다코’ 언니의 부재와 함께 여지없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시리즈물에서 메인 캐릭터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마무라 사다코’를 배제시킨 것은 작품이 아닌 상품의 관점으로 이 책 ‘링 루프’를 볼 때, 작가로서는 매우 큰 모험이었을 것이다. ‘링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인 ‘링 바이러스’, ‘링 스파이럴’, ‘링 버스데이’ 모두가 영화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링 시리즈’의 완결편이라고 할 수 있는 ‘링 루프’가 영화화되지 않은 이유는 ‘사다코’ 언니의 부재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존재에 대한 회의 사라진 공포의 자리를 존재에 대한 회의가 대신하고 있다. 과감하게도 철학적인 문제 가운데에서도 가장 머리 아픈 주제 가운데 하나인 ‘존재에 대한 회의’를 책의 주제로 선택한 것이다. 존재에 대한 회의에 대한 대중적 논의를 촉발시킨 작품은 누가 뭐라 해도 ‘워쇼스키 형제’를 스타덤에 올려 놓은 1999년 작품인 ‘매트릭스’일 것이다. 책을 읽으며 몇 가지 영화들의 장면이 자꾸 떠올라 작가가 다른 작품의 세계관을 도용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책 말미에 있는 ‘작가의 말’을 읽어보니 작가가 이 책 ‘링 루프’를 탈고한 것은 1997년 12월경인 것으로 되어 있다. 내가 떠올린 몇몇 영화들보다 앞선 시점에서 이 책의 탈고가 끝난 것이다. 작가인 ‘스즈키 코지’ 아저씨의 엄청난 상상력에 압도되었다. 나의 존재와 내가 속해 있는 세계의 존재에 대한 회의가 어려운 철학적 명제의 형태가 아닌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대사 등의 형태로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어 잘 정리되어 있어, 철학적 문제에 대한 작가의 식견에 대해서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회의론적인 관점에서 본 작가의 세계관은 책의 내용 일부를 발췌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연구소 스태프에게 있어서 이 가상 세계 ‘루프’는 인지 가능합니다. 하지만 ‘루프’에 살고 있는 지적 생명이 창조주인 우리를 인지하는 건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우린 실로 신 그 자체겠죠. 루프의 내부에 있는 한 그들은 세계의 구조까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외부로 나오는 것. 그것밖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특별히 과학에 취미가 있는 아이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이런 식의 상상을 하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 물질의 기본인 원자의 구조가 태양계의 모델과 똑같은 것으로부터 원자나 소립자 역시 하나의 우주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고, 그 작은 세계에도 우리와 마찬가지인 생명이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생명의 고리지. 루프라고 명명한 의미는 여기에 있네.” “네, 초등학교 시절, 저도 아버지에게 얘기했던 적이 있습니다.” 극소의 세계만이 아니다. 극대의 세계에서도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태양계는 어떤 원자를 구성하고, 은하계는 원자가 모인 분자 같은 것으로, 소우주는 하나의 세포가 되고 우주 전체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이 된다. 생명의 뱃속에 또 다른 생명을 품고, 그 생명 속에는 좀더 작은 생명을 품고 있다는 구조는 예로부터의 종교관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전세, 현세, 내세로 이어지는 생명의 순환과도 비슷하다.」 링 루프(Ring Loop) vs. 13층(The Thirteenth Floor) 디지털 정보의 재합성을 통해 구축된 링 루프의 세계는 ‘조지프 러스낙(Josef Rusnak)' 감독의 1999년 작인 영화 ‘13층’의 세계와 거짓말처럼 똑같다. 워낙 오래 전에 본 영화이기 때문에 그 줄거리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디지털 정보의 재합성으로 구축된 가상현실의 사이버캐릭터가 그 세계의 외부를 경험하게 되고, 그로 인해 가상현실 세계와 사이버캐릭터의 존재 구조를 밝혀내는 식의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같은 해에 발표된 영화 ‘매트릭스’의 성공으로 진가를 발휘하지 못하였지만, ‘존재에 대한 회의’를 꽤 진지하게 논했던 영화로 기억된다. 매우 인상적으로 본 영화라 몇 개 가지고 있는 외장형 하드 어딘가에 저장해 두었던 것 같은데, 언제 시간 있을 때 다시 한 번 꺼내 보아야겠다. ‘링 루프’는 전작인 ‘링 바이러스’와 ‘링 스파이럴’ 두 편의 ‘링 시리즈’를 아우르는 완결편이다. 2편 격인 ‘링 스파이럴’에서 가지를 치고 나와 다른 한 편의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제목(Loop : 고리, 올가미)처럼 1편 ‘링 바이러스’와 2편 ‘링 스파이럴’의 고리 역할을 하면서 ‘링 시리즈’ 3부작을 자연스럽게 완성시킨다.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말끔히 정리해 버리는 작가의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1, 2편과는 달리 이야기의 소재가 되는 첨단 과학기술에 대한 설명이 조금 상세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소설이 너무 길어지는 것을 염려한 것일까? 아니면, 작가 역시 첨단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 제대로 독자에게 설명해 주지 못한 것일까? 하지만, 개인적으로 무엇보다 아쉬운 점은 잔뜩 기대를 하고 읽은 공포소설이 생각지도 못한 SF소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야마무라 사다코’ 언니의 빈자리가 이렇게 클 줄이야.
(BOOK : 2010-032-0036) |
|
읽은기간: 20148.9 - 2014.8.11
<줄거리 있음. 미리니름 있음. 스포일러 있음>
"어린시절부터 다방면에 천재성을 나타낸 후타미 가오루. 그의 아버지는 '루프'라고 하는 컴퓨터 속 인공세계 창조 시뮬레이션의 우수한 연구원이었으나, 어느날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병상에서 지내는 운명을 걷게 된다. 아버지의 병을 고치겠다는 생각으로 의대생이 된 가오루는 아버지의 옛 동료 연구원들이 모두 전이성 암 바이러스에 의해 사망했다는 사실을 토대로 아버지의 연구에 대해 조사해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아버지의 연구는 컴퓨터 속 가상세계 속에 생명의 탄생을 시뮬레이션 해보는 것으로... 미생물에서부터 시작해서 인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컴퓨터로 시뮬레이션 해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스템이 암화하여 연구는 종료되고 말았는데.. 가오루는 인간 전이성 암 바이러스와, 가상세계 '루프' 속의 링 바이러스가 유사한 염기배열을 갖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또한 연구에 참여했던 연구원은 마지막으로 「인간 전이성 암 바이러스의 비밀은 다카야마가 갖고 있다」고 말하고 행방불명 되었다는 것이다. 링 바이러스는 '루프'속의 가상 인물 '다카야마', '아사카와', '야마무라'에 의해 탄생한 바이러스로. '루프' 암화의 결정적 역할을 한 바이러스. 가오루는 이제 가상세계 루프에 대해 조사하면서 인간 전이성 암 바이러스의 해독제를 찾고자 미국 애리조나로 떠나게 된다"
링시리즈 완결판 '루프'. 이 시리즈를 통해 '라센'의 이야기가 한층 완벽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라센'에서 조금은 의아스러웠던 점들이 전부 해명되는 느낌이랄까. 게다가 1,2편에서 정이 들만큼 들었던 등장인물들이 가상세계 속의 컴퓨터 개체라는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이내미는 작가의 천연덕스러움에 조금 놀랐다. 처음부분을 읽으면서 이것은 야마무라 사다코가 사는 그 세계인가 했더니, 야마무라 사다코가 태어난 세계가 가상현실이고, 가오루가 사는 세계가 상위세계라는 것이다.
사실 이런 설정은 얼마 전에 최재천, 정도일의 <대담>이란 책을 읽고 좀 익숙해진 참이었다. (이것도 우연일까?) <대담>에서 최재천 교수님은 현재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생태계의 진화과정을 모의 실험해보고, 진화의 과정, 분기점 등을 설명하려는 연구가 한창 진행 중에 있다고 언급했다. 어느 과정에서 인간의 의식, 마음이라는 게 생겨났는지 연구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루프' 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상당히 '그럴 듯 하게' 다가왔다.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이 10년 전에 쓰여진 책이라고 생각하니.. 당시에는 상당히 충격이 아니었을까 싶어지기도 한다. "으읭?? 이게 뭔 소리?" 하고.
그러고보니 영화로 찍은 내용은 전부 가까운 시일내에 이루어진다 라는 말이 갑자기 생각난다. 달 착률, 화성 탐사, 심지어 911테러까지. 모든 게 영화를 통해 이미 한번 '가상 체험'한 것이다. 게다가 최재천 교수님은 가상 세계를 시뮬레이션하는 연구가 진행 중에 있다고 한다. 뭔가 전율하게 되는 거다;
1,2편과는 또 달리 굉장히 스케일 큰 소설이 돼 버렸는데. 중간에 이미 '눈치'를 챘다는 점에서 나의 촉도 상당히 좋아졌다는 걸 느꼈다. 다카야마 류지와 가오루의 관계. 어느 순간 이미 살짝 눈치채게 만드는 저자의 서술법. 후반부도 상당히 속도감 있게 전개되어서 "아아 그렇군... 그런가보군" 하게 되어버렸다.
그래도 이번 편에는 무언가 태클을 걸만한 부분이 있긴 했는데. 어떻게 류지는 비디오 화면 속 주사위를 보고 상위세계에 전화를 할 수 있었는지; 아니 상위세계에 전화를 한다는 거 자체가 너무 뜬금없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그 주사위 번호를 보여주는 것은 '야마무라 사다코'의 의식 아닌가.... 대체 야마무라 사다코는 언제 그런 걸 알아차렸다는건지... 이런 부분은 좀 억지(...)스러운 느낌이 들었지만 그것만 제외하면 그런대로 완성도가 높다. 이야기는 모두 가오루가 필연적으로 '그곳으로 가게' 만들어주고 있다는 느낌이다. 게다가 가오루의 '회귀'는 '일주일만의 성장'을 잘도 설명해줬고...
다양한 소재를 가지고 공포 소설에서 SF소설로 변화를 거듭해나간 링 시리즈. 외전에 <링 0>도 있고, 아직 번역되지 않은 <에스> 등도 있다고 하니.. 기대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