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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 소리를 들어본 지 오래되었다. 어디선가 우연히 들은 노랫가락이 가야금이라고 해도 바로 같은 공간 안 내 눈 앞에서 들리던 가야금 소리를 들은 지가 오래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가야금 소리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아무리 가야금 명인이라도 책 안에 가야금 소리를 마치 귓가에 바로 울리는 것처럼 쓸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게 있다. 가야금 명인이라고 불려진 황병기 그 자체다. 초년기, 청년기, 음악활동으로 나누어 따라간 황병기의 시간은 단지 예술만 있지는 않다. 가야금도 있지만 황병기도 있다. 어느 하나에 구애받기보다 가야금 타는 사람냄새가 나는 책이다. 예술인인 가야금 명인 황병기와 친구들. 또 다른 예술, 각자의 예술에 종사하는 그들을 친구로 두고 있는 황병기의 이야기. 다양한 친구들이 황병기의 친구다. 첼로를 켜는 장한나도 46년의 나이차를 극복한 친구이며, 읽으면서 황병기의 상식을 깨었고 나의 상식도 깨주는 이야기였던 故백남준 씨도 황병기의 친구였다. 들려주는 친구들의 이야기에는 예술이라는 단어가 보이기도 했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예술을 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보는 데 있어서 정말로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예술이다. 그 예술의 느낌을 다양하게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다양한 예술가를 친구로 둔 또 다른 예술가의 입에서 듣는 예술가의 이야기는 조금 더 다른 맛이었다. 그리고 이 책도 한 예술가가 쓴 자신의 얘기지만 왠지 모르게 나는 다른 맛을 느꼈다. 유쾌한 기분이었다. 특별히 유머가 눈에 보이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읽고 있으면 괜히 기분이 좋다. 이것이 첫 번째 다른 이유다. 가야금에 대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도 독서하는 나에게 줄곧 따라다녔다. 그 느낌이 나쁜 게 아니다. 가야금이 들려주는 우리의 소리. 손가락으로 튕기며 줄로 내는 우리 현악기 소리. 그럴 때면 내가 서양의 음악을 들을 때와는 다른 느낌을 받는다. 가슴 속을 채우는 따뜻한 느낌이랄까? 그 느낌이 고스란히 책에 베여있었다. 두 번째 다른 이유. 두툼하게 준비된 부록에서 더 많은 느낌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부록에서는 대화를 나눈 것, 음악세계, 해외평론, 작품연보가 다루어지고 있는데 한 예술가를 알기에 충분할 정도의 이야기가 준비되어있다. 오동천년, 탄금 60년. 그 시간을 느끼는 데에 따로 자격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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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생 서울토박이로 서울에서 태어나 6.25전쟁으로 부산으로의 피난을 제외하곤 평생토록 서울에 터전을 묻고 사셨던 가야금 명인 황병기선생.
집 전화번호도 나라에서 행정상의 이유로 국번만 바뀐 것 외엔 전화번호 또한 바뀌지 않을 만큼 진득하니 오랫동안 사사로운 것들을 바꿀 줄 몰랐던 선생에게 1951년 부산 피난 중에 처음으로 가야금을 만난 것은 그에겐 그의 삶을 가야금과의 인연으로 58년간 이어지게 해온 선생의 삶으로선 역사적인 변화였다. 또한 다섯살 연상인 소설가 한말숙선생과도 국립국악원에서 같은 가야금 선생으로부터 배워 알게 되어 그 인연으로 결혼까지 이어져 슬하에 2남2녀의 자녀를 두고 백년해로를 하시니 말이다.
지금이야 국악이나 가야금을 하는 것이 한 예인으로서의 대접을 받는 시대가 되었지만 오래전 1960년대만 해도 국악을 한다는 것은 천인들이나 하는 것으로 치부된 계급적 성격이 뚜렸해 국악인들이 마치 무속인인 것처럼 천시당했었던 시대였다. 그런데 경기고교를 나와 서울대 법대를 나온 엘리트였던 황병기 선생이 국악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 당시로선 지식인들 사이엔 큰 이슈로 떠오를만큼 참 대단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황병기선생의 가야금에 대한 사랑은 '가야금이 오직 좋아서' 예술은 좋아서 해야지 밥먹기 위한 수단으로 살아서는 안된다는 순수한 생각으로 가야금 연주를, 작곡을 하신 가야금에 대한 뜨거운 열정은 그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만큼 '가야금이 오직 좋아서' 하셨다.
가야금을 시작하게 된 작은 동기부여를 받게 된 계기는 학교에서 사극을 하게 되었다고 당시에 같이 살고 황병기선생의 공부를 도와주고 말벗도 되어주었던 외당숙에게 말하니 그렇다면 우리의 전통적인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며 국도극장에 데려가 춘향가 창극을 보여주었다. 물론 황병기선생은 남녀간의 사랑도 몰랐었고 창극이 재미없고 지루했었으나 외당숙은 집에 와 창극을 따라하고 재연하며 “정말 좋은 구경을 했다. 네가 이 맛을 알려면 한참 있어야 할 거다.” 라며 재밌다고 하는 모습을 보며 뭐가 그리 재밌을까? 라고 신기해 하다가 국악에 대한 것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또한 그 외에도 나중에 황병기 선생이 알게 되었지만 아버지가 판소리 명창 김소희씨와 박규희씨를 오랫동안 후원했을 만큼 흥을 즐길 줄 아는 핏줄을 타고 난 것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가야금을 처음 배우기 시작했던 것은 1951년 부산에 피난가서 배우기 시작했는데 부산 대신동에서 성화라는 친구와 함께 대구출신의 가야금 선생 김철옥 노인에게서였다. 전쟁 후 서울에 올라와서도 학교를 파한 후 국립국악원에 가서 매일 가야금을 연습하고 집에 가는 것이 매일 일과로 그러다보니 KBS 주최 전국 국악콩쿠르에서 1등도 하고 라디오도 상품으로 받는 등 음악계에서도 주목을 받는 사람으로 서게 되었다.
그리고 1958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는데 서울대 음대 학장 현제명 선생이 불러 1959년 서울대 음악대에 국악과가 생기는데 가야금 시간강사로 나와달라는 권유를 받게 된다. 하지만 황병기선생으로선 가야금으로 밥벌이를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거니와 법공부를 하는 사람이 음악대 강사를 어떻게 하겠냐며 권유를 거절했으나 현제명선생이 “미스터 황은 지금 법공부를 하고 있지만 법하는 사람은 길거리에 나가면 산더미같이 많다. 굳이 너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 법공부보다 가야금하는 게 얼마나 보배로운 것인줄 아느냐. 네가 시간이 없으면 일주일에 한 시간만 나와라. 음악대에 적만 두어도 내가 영광으로 알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강의 시간표를 받았는데 10시간이 넘는 강의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뻘 되는 분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 결국 4년간 음악대 강사를 맡기로 하고 1959년 한국의 국악과 첫번째 가야금 선생으로 탄생하게 된다.
그렇다면 가야금을 하지 왜 법공부를 했을까? 법대를 가게 된 이유는 중학교때부터 가야금을 시작했었는데 부모님이 가야금 배우는 것을 반대하진 않았지만 학생이 시간이 뭐가 있어서 가야금을 배우겠느냐?는 부모님의 만류에 아인슈타인이 세계적인 과학자이지만 그의 바이올린연주는 프로급 수준이었다고 말하며 가야금을 배우되 학교공부에는 지장을 주지않겠다고 부모님을 설득하여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황병기 선생은 가야금도 매일매일 학교 끝나면 꼭 국립국악원에 가서 연습하고 집에 가는 등 열심히 했지만 그는 공부 또한 잘 했었다. 다른 아이들이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하듯이 황병기 선생은 아이들이 노는 시간에 남들이 잡기를 하는 시간에 가야금을 했었던 것이다. 가야금을 전공이라 생각하기 보다 오로지 좋아서 했던 것이다.
4년간 가야금을 학교에서 가르키고 난 후 학교교직 생활을 그만두고 황병기 선생은 명동극장 지배인으로 들어간다. 당시의 극장은 예술을 할 수 있는 공간이라 판단하고 명동극장을 선택한 것이다. 그 후에도 그가 했던 것은 참 많았다. 화학회사의 기획일도 했었고 영화수입, 영화제작(다큐멘터리), 출판사 등 많은 일을 한 후 그가 평생 가야금과 함께 할 역사적인 1974년을 맞았다. 그리고 그로선 1974년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된다.
1962년 가야금 배운지 11년 만에 그는 전통음악이 좋다하더라도 예전의 음악만 고집하면 골동품으로 밖에 남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우리시대의 음악이 나와야 살아있는 전통음악이 된다고 생각하고 우리시대의 음악을 만들기로 마음먹고 가야금 작곡을 하게 된다. 창작의 차원에서 가야금을 바라보게 되면서, 1962년 창작곡 '숲'을 가야금 작곡의 첫 작품으로 만들기 시작하면서 '가을', '석류집' 등이 탄생되었고, 그리고 그 녹음된 것이 릴테이프로 만들어져 미국에 하와이 대학, 동서문화센터 등에 알려지게 된다. 당시 그곳엔 '금세기 음악예술제'가 매년 열렸는데 동양작곡가와 서양작곡가를 초청하여 두 작곡가의 음악을 중심으로 연주하며 청중들과 음악으로 대화하는 프로젝트였다. 당시의 황병기 선생은 작곡가로서의 경력이 3년에 불과했고 국내에선 국악을 백안시했던 분위기였는데 작곡가로서의 자격으로 초청을 받아 미국에 가게 되어 그 어느 것보다 무척 고마웠다. 그리고 1965년 4월 호놀룰루에서 두 번 무대에 선 것이 첫 해의 연주였는데 연주를 마칠 무렵이 되니 동서문화센터의 출판국에서 음반을 내자고 제안을 했다. 앨범 타이틀은 '뮤직 프롬 코리아-더 가야금'이었다. 당시 미국에서 같이 음악을 연주할 사람이 없어 고심했지만 당시에 외국에선 작곡가가 이중주도 혼자 하는 것을 알게 되어 장고와 연주된다는 가정하에 이어폰 꽂고 가야금을 연주하고 장고를 혼자 연주하여 1965년 미국에서 첫 음반을 내게 된다.
가야금과 함께 뜨겁게 열정적인 삶을 살았던 황병기 선생에게 고비가 있었다. 바로 1998년말 서울대병원에서 대장암 수술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가야금작곡에 대한 열정은 끊이지 않아 대장 25센티미터를 잘라내고 회복을 하기에도 힘들었던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병원에서 링거병을 건 수레를 잡고 장이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운동을 밤에 하다가 서울대 병원의 시계탑을 문득 바라보니 그 시계탑이 너무 멋있어 보여 작곡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때 만든 곡이 선율이 아름답던 시계탑이었다. 고통스럽고 비참한 처지에서 한밤중 창문 밖으로 보였던 병원의 시계탑이 무척 아름답게 보여 베토벤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의 마지막 악장을 떠올렸다.
음악의 맛을 알았던 가야금의 명인, 황병기선생의 일대기를 그린 『오동 천년, 탄금 60년』은 1951년의 부산 피난 시절, 가야금 소리에 첫눈에 반해 연주를 시작한 이후 평생을 가야금을 동반자로 삼아 가야금 인생을 살아온 저자의 삶을 옴니버스식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되돌아본 책이다. 백남준과의 일화를 비롯, 존 케이지, 장한나, 홍신자 등 국내외 수많은 현대 예술가들과의 교류와 한국 문화예술계의 숨겨진 이야기들이 범상치 않은 고집과 흔들림 없는 자아, 전통의 계승과 파격을 넘나드는 사고의 확장 등을 지켜봄으로써 가야금 연주가에서 작곡가로, 연주에서 창작으로 범위를 넓혀가며 열정과 땀이 어린 황병기선생의 예술세계를 이 책을 통해 예술의 참 맛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음악이라는 것, 그것은 기쁘기도 하면서 고통스럽기도 한 것 이었다" "그리고 그 맛은 기가 막히다"
"서양음악이 벽돌이라면 동양음악은 소리 하나 하나를 정원석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서양곡은 벽돌을 쌓아가듯이 작곡하지만, 동양곡은 정원에 돌을 배열하는 기분으로 만들지요. 돌 하나 하나의 모습, 즉 소리 하나 하나가 어떻게 오묘하게 변하는가에 귀가 열려야 우리음악의 묘미를 알 수 있습니다."
가야금연주가 황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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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기 라는 이름은, 사실 내겐 그리 친근한 이름은 아니다. 평범한 회사원인 나로서는 신문이나 잡지의 한면을 장식하는 자랑스런 한국인 정도의 인식이었달까. 우리 전통악기인 가야금을 고집스레 지켜온 장인이자, 과거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선구자, 국악의 원로... 이런 정도의 정보가 황병기 선생님에 대해 가지고 있던 정보의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분의 전기가 새로이 출간되었을때 주저없이 책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예전에 어느 책에선가 이분의 인터뷰를 읽었을 때 느껴졌던 단단하고 굳건한 소신의 근원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었다. 그리고 왠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멀고 어렵게 느껴지는 이 분께도 당신의 딸보다 한참 젊을 천재 첼리스트 장한나와 음악인으로서 특별한 우정을 나눈다는 기사를 보고 내가 느낀 의외성도 한몫한 것 같다.
어쨌든, 잘은 모르지만 조금은 더 깊이 알고 싶은 황병기 선생님의 삶을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내내 두 가지 감정을 번갈아 느끼곤 했다. 하나는, 첫인상이 그러했던 가야금에 대해서는 타협하지 않고 최고의 것을 추구하려 일생 노력했던 진정한 예술인으로서의 고집과 장인정신을 보며 역시, 국악계의 큰 어른이며 세계의 격찬을 받기에 조금도 부족함 없으신 분이구나 하는 무한한 존경심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틀안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라 때론 괴상하게 여겨질만큼 실험적이고 자유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는 데 대한 경이였다. 일상의 생활에서든, 가야금 연주와 작곡에서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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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황병기 선생님의 곡을 나는 몇 곡 들어보지 못했다. 기껏해야 이분의 대표곡인 침향무, 비단길, 그리고 제목은 생각나지 않지만 황병기 선생님이 연주하셨던 몇곡 정도... 그것도 실황이 아니라 녹화방송을 본게 전부였다. 이분의 음악을 들으면서 사극이나 다큐멘터리에서 듣고 보았던 가야금에 대한 내 고정관념이 산산히 부서졌고, 그와 더불어 황병기 선생님의 음악이 듣고 느끼기엔 그리 만만치 않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아마 귀에 익숙치 않은 실험적인 면이 많아서였나보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 곡들에 대한 숨은 이야기들과 작곡의도, 황병기 선생님의 애착을 서린 이야기들을 보니 다시 한번 찾아 그분의 곡들을 음미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책 마지막에 친절하게 정리되어 있는 황병기 선생님의 곡 목록을 유심히 읽으면서 꼭 들어봐야겠다 결심히 제목에 밑줄을 그어놓기도 했다. 그만큼 <오동 천년, 탄금 60년>은 황병기 선생님의 삶과 음악에 대해, 국악이나 가야금에 전해 문외한인 나에게조차 관심과 애정을 쏟아붓게 만들어준 책이었다.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표지를 봤을때는 사실 큰 어른의 삶을 다룬 내용이니 무겁고 철학적이고 뭔가 심오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다. 그렇지만 걱정과는 달리 나는 이 책을 다 읽어내려가는데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단락단락 짧은 에피소드로 묶여진 장들이 그리 길지 않았다는 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글 자체가 가식도, 교만도 없이 소설처럼 쉬운 문체로 씌여져 있어서 읽는데 전혀 부담이 없었다. 책 머리에 보니 이 책을 오랜동안 황병기 선생님이 <중앙일보>에 2007년부터 연재하시던 이야기를 묶어 정리한 책이라고 하던데, 그런걸 보면 편집진의 손질이 있었겠지만 황병기 선생님이 참 달필이시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만큼 잔잔하고 격의없는 문장들은 황병기 선생님의 삶과 생각에 더 친근하게 다가가게 해주었다. 아마 한참어린 장한나 씨와도 깊은 친분을 나눌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소탈함과 겸손함, 그리고 음악에 있어서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 선생님의 열린 마음 때문인것 같다.
어릴적의 에피소드, 처음 가야금을 잡게 된 이야기, 다양한 작업에의 참여와, 국악을 일으키기 위해 마음을 모았던 이야기들을 읽는데 괜히 가슴이 울렁거리기도 했다. 개인의 삶을 다룬 책이라고 하기엔, 우리것, 우리 음악에 대한 황병기 선생님의 애정과 비전이 문장 곳곳에 스며있어 때론 경이로움마저 느껴졌다. 그만큼 이분의 삶은 단지 음악을 하는 음악인으로서가 아니라 음악이 아예 삶속에 완전히 밀착되어 개인의 삶과 가야금을 분리할 수도 없을 정도의 경지에 이르르게 된 것 같다.
책 마지막에 수록되어 있는 황병기 선생님과의 인터뷰는, 꽤 시간을 들여 읽긴 했지만 그만큼 더 깊이 황병기 선생님에 대해 알수 있어 너무 좋았다. 그리고 책 전반에 산발적으로 나왔던 가야금 음악에 대한 여러 용어나 상식들도 오히려 잘 정리 되어 있어서 상식을 넓히는데도 도움이 된 것 같다.
단지, 국악의 어른이라 느꼈던 황병기 선생님을 존경하는 시대의 한 사람으로 내 마음에 각인시켜준 책을 만나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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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 우륵, 미궁, 황병기......!!! ’가야금’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그 정도, 너무 단순하다. 가야금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음악이란 것, 우리 일반인들에게는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니다. 듣고 느낌이 좋으면 그만이다. 서양음악이든 동양음악이든 상관없다. 느낌이 와닿는 음악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가야금, 거문고...그 차이점이 무엇인가? 줄의 갯수가 다르다는 것 정도가 전통음악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이었다. 우리가 태어나서 어린 시절, 가야금보다는 피아노를 먼저 접하고, ’궁상각치우’ 보다는 ’도레미파솔라시도’를 먼저 배운다. 성인이 되어 혼례를 치룰 때에도 전통혼례보다는 궁전 모양의 예식장에서 웨딩드레스를 입고 서양악기의 연주에 박자를 맞춰 행진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서울대학교에 국악과가 나중에 생겼다는 것을 보고 속상한 생각이 들면서도 어쩔 수 없는 현실에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그래도 남들이 의미를 두는 길보다는 자신이 의미를 두는 길로 긴 세월을 향하셨고, 앞으로도 향하실 것이 정말 존경스럽다. 남들과는 다른 예술인의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존경스러웠다. 그 열정이 정말 부럽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리뷰에 쓸 말이 떠오르기 보다는 그저 생각에 잠겼다. 남들과 다른 길을 가면서 자신을 돌아보며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황병기 선생님이 부러웠다. 그 나이가 되면 나는 어떤 말을 할 수 있을 지 생각해보게 된다. 황병기 선생님의 곡들을 찾아서 다시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책 한 권의 이야기로 그 분의 삶을 살펴보았다면, 음악으로 그 분의 삶을 더 깊이 있게 느낄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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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 천년 탄금 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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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가야금에 대한 기억이 있던가? 다행이 있다. 고등학교 때 재수생 형이 한 명 있었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그 형도 재수를 하고 나도 재수를 할 때 만난 적이 있다. 그 당시 창원에 케이블티비가 막 보급되기 시작한 시점이었고 나는 마산학원 재수생 반을 일주일만에 접고 케이블티비의 교육채널 3개로 공부를 했다. 케이블의 교육채널을 믿고 학원을 그만 둔 것은 아니었고, 학원을 그만두고 나서 차선책으로 찾은 것이 케이블티비의 교육방송 채널들이었다. 그 이전에는 교육방송이 EBS밖에 없던 시절이었는데 교육방송이 한꺼번에 3개나 늘어난 것은 학원도 안 다니는 백수같은 재수생에게는 거의 축복이었다. 대부분 본방사수보다는 녹화를 해서 여러번 봤는데 이것이 당시 학원강의보다 훨씬 훌륭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그 프로그램들을 그 형한테 권했고 그 집을 놀러 갈 일이 있었다. 부모님이 상당히 호탕한 분이셨는데 집에서 소주도 한잔 했었다. 술잔 기울이고 있는데 가야금 소리가 나는게 아닌가? 웬 가야금 소리냐고 물어보니 여동생이 가야금을 배우고 입시를 준비한다고 했다. 한참 우리 것에 관심 기울이며 재수 공부보다는 다른 것들에 더 관심이 많던 시절이라 그 소리가 그렇게 운치가 있을수가 없었다. 술 배운지 1년 남짓이었지만 술맛이 절도 든다는 생각도 들었다. 95년도 재수생 시절 이야기다.
94년은 '국악의 해'였다. 당시 집에서 받아보던 신문에 '국악의 해'에 관한 기획기사가 실렸는데 국악의 해 준비위원장을 소개한 기사도 크게 실렸다. 그 때 준비위원장이 '황병기' 교수님이었다. 학력을 보니 서울대 법대다. 당시 국악계의 원로들은 가방끈이 긴 사람이 거의 없었다. 큰 스승 밑에 문하생으로 들어가 사사받는 경우가 많았고 '소리'나 '국악연주'가 아주 대접 받던 시절은 아니었다. 가야금 연주에 관한 한 최고요, 학벌도 최고요 그러니 관에서는 황병기 교수님을 위원장으로 앉힌 것이 이상할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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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 천년, 탄금 60년. 이 책은 중앙일보에서 기획한 사회 명사들의 이야기 [남기고 싶은 이야기]의 88회분의 연재물을 손봐서 나온 책이다. 연대 순으로 배열해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고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생활이 오롯이 담겨 있어 '황병기'교수님의 자서전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다. 대가의 70년 인생이 녹아 있는 책이다. 46년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음악 친구'라는 호칭을 붙이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고 말한 첼리스트 장한나의 소개글이 머리말보다 더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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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라는 것을 가르쳐 준 외당숙 김소열과 함께
황병기 교수님은 '국악의 해' 준비위원장을 하시면서 그 해 간간히 티비에 모습을 보여주셨다. 김동건이 사회를 보는 프로그램에도 나왔고 다른 문화프로그램이나 국악을 다룬 프로그램이면 출연하셨다.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으면 예의 질문은 가야금을 하시면서 학벌에 대한 것으로 모아졌다. 어릴 때 세상이 알아주는 개구장이였는데 집안 어른이 선생의 집에서 하숙을 하면서 준 가르침을 빼 놓지 않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이 책에는 외당숙 김소열 아저씨로 소개되었는데 저자에게 공부라는 것을 가르쳐 준 평생의 은인이다.
이 책은 저자의 음악 인생과 함께 우리 국악계와 예술계를 동시에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개인의 자화상이지만 그 개인이 범인凡人이 아니여서 독백의 범위가 넓다. 국악계는 물론이요, 방송이나 문학, 서양음악, 미술, 무용등을 아우른다. 가야금을 최고의 자리에 올랐지만 30대 후반까지도 가야금을 천직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 특이했고, 국악에만 몸 담았는 줄 알았는데 출판사도 경영하고, 영화사도 경영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그렇지만 그는 천상 악인樂人이였다. 1974년 이화여대 교수로 발령나면서 그는 죽을 때까지 음악만 해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한다. 그 이후의 업적은 우리가 주지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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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쪽 오른편의 남자가 장남 황준묵이다. 현재 대한민국 최고의 수학자중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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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바다의 기별],[현의 노래]
김훈의 [바다의 기별]의 '말과 사물'에 있는 내용을 옮깁니다.
내가 쓴 [현의 노래]는 가야금을 만든 우륵이라는 예술가에 대한 소설입니다. 우윽의 시대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준비하면서 고구려와 백제를 부수기 이전에 신라 주변에 있던 가야의 여러 부족국가를 쳐부수던 때입니다. 우륵의 조국은 작은 부족국가였습니다. 대가야, 신라의 군사력에 비하면 약소한 나라였지요. 대가야에서 우륵은 지위가 매우 높았어요. 궁중악사였다고 하니까. 예술가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벼슬에 도달한 것이죠. 그런데 신라가 자기 조국 대가야를 쳐들어오니까 우륵은 악기를 들고 신라에 투항을 했지요. 진흥왕의 포로가 되어서 진흥왕을 위해 음악을 연주합니다. 진흥왕은 하림궁이라는 궁궐을 지어놓고 그곳에 우륵을 데여와 가야금을 연주하게 하지요. 나는 우륵이 조국을 배반하는 대목이 아주 맘에 들었어요. 악기를 들고 조국을 배반한다는 것은 예술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륵의 악기에는 그 당시 가야금이라는 이름이 없고 그냥 금이었는데, 그 악기에 자기 조국의 이름을 붙여서 가야금이라는 이름으로 천년만년 전한 것이죠. 우륵은 사실 진흥왕을 이긴 사람일 수도 있어요. 가야금은 신라 최고의 악기, 최고의 음악이 되었습니다. 그 이름이 가야금으로, 자기가 배반해버린 조국의 이름을 거기다 붙여 천년만년 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승부라는 것은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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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며 느낀 점이 너무나도 많다.
황병기 님의 가야금 60년 인생과 그 분의 인생을 돌아보는 책이었다.
처음의 가야금을 친구로 인해 접하게 된 이야기부터 해서 그분의 사진들이 실려 있어서 읽는 내내
빠져들어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지금의 우리는 가야금의 명인.. 예전에도 가야금은 여러사람이 접하기
힘든 분야의 음악이었나보다. 가야금이라는 것은 황병기님의 어린시절에도 고지식한 음악이라고 말하셨다.
막내로 자란 황병기님은 평범하지 않은 가야금 명장들을 계속 만나오셨고^^; 어렸을 적부터 노력을 많이
해오신 흔적들이 엿보였다. 나라면 한 분야에 끊임없이 도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중간에 다른분야로 발걸음을 옮기고, 좌절하고 그런 삶을 반복했을 것 같다.
가야금의 명인을 떠나서 한 사람의 인생을 본 훌륭한 책 이었다.
우리네 삶은 과연 돈만 생각하고 살지 않은가?! 자기의 적성보다는 돈의 초점이 맞추어진 현실이 가슴이 아프다.
적성과 꿈으로만은 살아가기 힘든 현실..
누구 한 사람으로 바뀔 수는 없지만. 열심히 해서 좋은 삶을 살고 모두가 자기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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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우리 가락을 듣는 건 과연 어떤 때였던가.. 인사동에 갔을 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을 때... 어린이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음악 감상을 할 때.. 그리고... 그리고.. 정말 미안하지만.. 없는 것 같다. 그렇게 우리 국악에 대한 미안함 마음 때문에라도 국악계의 명인이신 황병기 선생님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평생.. 한길만 걸으신 우리시대의 명인. 예전에 KBS 방송에 ‘국악 한마당’이란 프로가 있었다.(물론 지금도 있다) 본방이 아닌,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 재방송을 보곤 했는데, 대금이면 대금, 가야금이면 가야금 이렇게 한가지만을 연주하는건 왠지 처량맞다는 느낌으로 항상 피했고, 서양 악기들과의 크로스 오버적인 무대만 주로 골라서 봤던 기억이 있다. 아무래도 듣기 편한 것으로만 골라 듣는 나쁜 버릇이었던 듯 하다. 그러다가 숙명여대 가야금 합주단의 공연을 봤다. 가야금으로 아리랑뿐만 아니라 비틀즈 음악이든지 서양음악을 연주하는데, 괜시리 좋아서 음반까지 구입했다. 이게 나의 가야금에 대한 기억.. 이 책 < 오동 천년, 탄금 60년 >은 가야금에 취해 평생을 가야금과 함께 하신 황병기 선생님의 이야기다. 나는 잘 몰랐는데, 후학 양성에도, 가야금의 세계화에도 많은 일을 하신 분이라는 걸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운명과도 같은 가야금과의 만남, 그리고 가야금을 놓치 않으면서도 당시의 분위기에 따라 서울대 법대를 진학했다가 결국은 가야금으로 돌아가게 된 사연, 당신의 가족들 이야기.. 등등이 시간의 순서에 따라 담겨 있다. 원래 중앙일보에 기고하시던 글 <남기고 싶은 이야기> 를 책으로 엮은 것이라고 했다. 그때 그때 기억에 남았던 것을 담았는데, 솔직히 글은 좀 투박하다. 마무리짓지 않고, ‘그랬더라’ 식으로 그냥 끝나는 글도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담담하면서 맛깔나게 다가온다. 누군가의 인생을 들여다보면서 감동을 받을 때가 많다. 보통... 들여다보게 놔두는 인생이야기는 진지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것일 때가 많으니까..^.^ 이 책을 읽고 나서... 해야할 일이 생겼다. 그 분의 음악을 찾아보는 것. 책의 마지막에 고맙게도 작품 목록이 수록되어 있다. 한 사람의 일생이 모두 담겨 있는 음악을 들으며 어떻게 느껴야 할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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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 한가지에 빠져 그것과 함께 평생을 함께 한다면 무엇보다 행복한 일이 아닌가 싶다.. 아 직도 무엇을 해야 행복한지 뭐가 내가 나아갈 길인지 인생의 30년 정도를 살아왔지만 아직 알지 못한는 나로써는 이 책을 읽어나
가면서 황병기 선생님의 삶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오동 천년, 탄금 60년
이 책은 가야금과 함께한 황병기 선생님의 일평생을 담고 있는 책이다..
올해로 가야금 연주를 시작한지 58년이 되었다니 정말 대단하신 분 같다..
약력을 보니 서울대 법대를 나오셨다고 하는데 법과 가야금 왠지 잘 안어울리는 조합같지만 황병기 선생님과 가야금은 참으로 잘
어울린다..
이책은 어렸을 때 장난꾸러기였고 공부를 그렇게 싫어했던 소년이 외당숙의 도움으로 공부를 잘하게 되는 일화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그런가
황병기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보면 존경하는 음악가는 없어도 존경하는 사람은 외당숙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우연히 중학생 때 친구와 함께 가야금을 처음 접한 그가 그 계기로 평생을 함께한 가야금 이야기.
이 책에는 어렸을때 일화부터 가족, 그리고 친구 가야금과 함께한 인생이 들어있다....
연상이고 게다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믿지 않는 아내 이야기와 나이차가 많이 나지만 음악적 교류를 나눈 장한나씨와의 일화는
재미있는 부분이었다.
처음에는 연주를 하고 작곡을 하고 황병기 선생님의 음악은 현재 해외에서 더욱 인정을 받게 되었고, 세계적인 예술가들의 교류
로 담고 있다...
아직 대중적인지는 않은 국악
그리고 가야금
황병기 선생님은 우리만의 것은 세계로 알리고 그 혼을 널리 전파하는 그야말로 장인 이신것 같다.
책을 읽어나가는 내내 귓가에 가야금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