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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뿐만 아니라, 표지의 느낌까지도 음침하기 그지없는 이 책을 읽기로 선택한 것은 저자 ’후지와라 신야’에 대한 자자한 명성 때문이었다. 무엇 때문에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에게 열광하는지 알고 싶었다. 처음 접하는 ’후지와라 산야’의 글을 읽으며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의 문체이다. 그의 글은 쉽다! 그는 횡으로, 종으로 예리하게 도려내 듯 시대의 단면을 날카롭게 읽어낸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지식이나 사상을 자랑하려는 허영이 전혀 없다. 현란한 묘사를 남발하지도 않는다. 단순한 문장과 단어의 적확성이 그의 예민한 통찰력을 더욱 빛나게 해준다. 과장이나 꾸밈이 없는 그의 문체는 그의 지식이 아니라, 사람됨과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인터넷 서점에서 확인하니 [황천의 개]는 여행과 기행으로 분류되고 있다. 내가 읽기에 이 책은 칼럼과 에세이(특수한 주제에 관한 논설) 같은 성격도 강하다. 그의 여행은 유희가 목적이 아니다. 그의 기록은 주관적인 깨달음과 감상을 넘어, 사건과 사람과 세대와 시대를 분석하고 추적하는 삶의 긴 여정이다. [황천의 개], 나는 그가 추적하는 소재에 당황한다. 그가 현미경을 들여다보듯 관찰하고, 추적하는 대상은 ’옴진리교’ 라는 일본의 신흥종교이다. 인도의 힌두교에서 파생되었다고 주장하며, 현세에의 절대 부정을 추구하는 ’옴진리교’는 청년들이 조직한 신흥종교이다. 그런데 1995년, 이 사이비 종교의 신도들이 도쿄 시내의 전동차 다섯 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사린 가스 테러를 감행하는 희대의 사건이 벌어진다. 후지와라 신야는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잡지인 <주간 플레이보이>를 선택하여 1년간 이 ’옴진교’에 관한 글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주간 플레이보이> 1995년 7월 18일호부터 1996년 5월 28일호까지 ’세기말 항해록’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된 글을 모은 것이다. 그가 이 잡지를 선택한 이유는, "옴진리교의 젊은 신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 젊은이들의 여행이 점차 나약해지고, 쉽사리 신앙 등에 빠지는 위험을 지적하기 위해서"라고 밝힌다. 그의 글은 젊은이들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책 속에서 그는 실제, 삶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부유하는 한 젊은이와 만난다. 풍경과 햇살이 좋은 창가 자리를 주로 찾아 앉았던 젊은 날의 자신과는 달리, 창가 자리를 두고도 어두운 자리에 앉아있는 한 젊은이를 보고 그가 읽어낸 것은 오늘날의 젊은 세대는 외부라든가 풍경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창밖이란 외부이며, 타자이며, 사회이며, 풍경이며,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자연이다. 그는 "미디어를 통해 가상 환경에 생존을 의지해온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은 그 시작부터 현실과 자연으로부터 단절되었다"고 본다(p .99). 외부 세계는 그들에게 돌아갈 고향이 아니다. 젊은 세대들도 외형적으로는 눈에 보이는 바다, 혹은 산을 찾지만, 그것은 삶의 터전이 아닌 일시적인 유희의 대상임을 짚어낸다. 불현듯 요즘 젊은이들은 월급보다 더 많은 휴가를 원한다는 통계자료가 담고 있는 의미가 내 머릿속에서 해석되어진다. "이처럼 외부 세계에 대한 단념이 오늘날의 젊은 세대가 인생을 살아가는 생존 양식이 되었다면 호텔 레스토랑에서 어두컴컴한 테이블을 선택하는 것은 그들이 보여주는 그들만의 생존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p. 100) 후지와라 신야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가장 오래도록 머물러 서 있었던 지점은, 인도 여행에서 체험한 ’시체 태우는 장면’에서이다. 나는 그 느낌을 축약하여 전달할 자신이 없어, 여기에 그대로 인용해본다. "처음 그 광경을 봤을 때는 정말 이렇게 해도 상관없단 말인가, 하고 생각했어. 이렇듯 아무렇지 않게 보여줘도 괜찮다는 건가, 하고. 그때까지 내가 자라난 일본에서는 인간이 좀 더 귀한 대접을 받아왔다고. 인간의 목숨은 지구보다 무겁다는 말을 자네도 알고 있을 거야. (...) 목숨을 중히 여기는 것은 당연하지만, 인간의 목숨이 최우선이라는 과대평가 때문에 과보호와 에고이즘이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얼마나 나약하게 만든 것인지 우리는 알고 있잖아.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과 시체를 금기로 여기고 철저히 은폐해왔지. 어리석은 선택이었어. (...) 우리는 지나치게 목숨을 과대평가했고, 죽음이 우리 곁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믿어왔지. 그 믿음이 살아 있다는 존재감을 희석시킨 주범이었어. 부모의 기대와 과보호에 노출된 아이들이 커갈수록 자신의 소중함을 증명하려고 초조해하듯,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살아 있다는 진실 앞에서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게 된 거야."(p. 132) 살아 있다는 진실 앞에서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게 된 거라는 그의 설명처럼, 그래, 나도 그랬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자꾸 초조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자꾸 초조해진다. 그것이 내가 가끔 불면의 밤을 보내는 이유이다. 후지와라 신야는 사회가 발전할수록 이 같은 경향은 확대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 초조함 때문에 인도로 갔다고 한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출산율이 감소되면서 부모와 사회는 하나뿐인 자식을 과잉된 기대와 과보호 속에서 키우고 있는데 인간은 우리가 그토록 많은 기대와 희망을 걸 만큼 대단한 존재가 아냐. 동물이나 곤충과 다를 게 하나도 없는 거야." (p. 144) 후지와라 신야는 점점 더 가상화되는 현실 속에서 젊은 청년들은 자신의 신체 감각을 조금씩 상실하고 있다고 말한다. 요즘 우리의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리얼리티에 의해 잠식 당하고 있는데, 그는 TV가 보여주는 리얼리티는 진정한 리얼리티가 아니라, 현실을 반쯤 픽션화시킨 가상 리얼티라고 설명한다. 갑자기 매트릭스 안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스며들며 섬뜩해진다. 실제와 가상의 모호한 경계에서 내가 삶을 사는지, 시간이 나를 좀먹고 있는지 정신이 차려지지 않는다. 출근 길에 창 밖으로 보았던 목련꽃에 오늘 나는 슬퍼졌었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씨름하는 나의 반복되는 일상이 갑갑하게 조여오며, 문득 깨달아지는 진실은 이 좁은 사무실 공간 안에서 내 젊은 날이 다 가고 있다는 것이다. "외관만 기능하는 도시 문명의 인간들로부터 공감을 얻어내려면 허망한 연기를 계속해야 하는 법"이라고 했던 후지와라 신야의 통찰처럼, 인간 조직 안에서 마음을 속이며 웃고, 끊임없이 벗어나고 싶은 충동을 통제하며 허망한 연기를 계속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상과 신념과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후지와라 신야는 오늘날 젊은이들의 여행이 점차 나약해지고 있고, 쉽사리 신앙에 빠지는 위험을 지적하고자 이 글을 썼다고 하는데,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과대망상에 가까운 정신 행동이지 신념이나 신앙이 아니다. 우리는 저마다 무엇인가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간다. 지위를 믿기도 하고, 지식을 믿기도 하고, 돈을 믿기도 하고, ’너’를 믿기도 하고, ’나’를 믿기도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은 내가 존재하는 목적에 대한 신념이다. 이제는 때때로 나를 괴롭히는 초조함과 결판을 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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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황금기를 고도 성장하는 일본을 떠나 원시의 자연 속으로 들어간 후지와라 신야를 이틀에 걸쳐 만났다. 막연한 인도여행을 꿈꿨던 나에게 그는 보란듯이 다디던 대학을 중퇴하고 인도를 선택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의 결단과 용기를 흉내낼 수조차 없었던 나의 나약했던 20대가 주마등처럼 스친다. 돌이켜 보니 그때 나는 아무런 시도도 못하고 주저하고 망설인 겁쟁이였다.
20대 중반부터 30대 중반까지 인도를 여행한 저자에게 듣는 인도는 한마디로 낯섦이며 충격이다. 이제껏 내가 알고 있던 인도와 다른 낯선 인도를 저자는 가감없이 담담하게 들려준다. [하늘호수로 떠난 여행]을 읽고 가졌던 환상과 낭만이 절반쯤 무너졌다고나 할까.
그랬다. 갠지스 강의 화장터에서 시체를 불태우는 장면은 후자와라 신야처럼 내게도 충격이다. 그리고 화장터 주변을 배회하던 들개들이 불탄 시체를 뜯어 먹는 장면, 이 광경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인도 사람들, 화장터 주변에서 벌어지는 결혼식 행렬, 후지와라 신야를 먹잇감으로 알고 달려드는 개떼들, 점입가경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목숨이 지구보다 무겁다고 생각했는데 쓰레기 소각하듯 시체를 태우는 것을 보고, 화장터를 지나는 떠들썩한 결혼식 축하 행렬을 보고 그는 깨닫는다. 죽음과 삶을 경계 지을 수 없다고. 또한 인간의 목숨이 다른 생물의 먹이삼이 될 수도 있다는 발견은 그의 삶에 커다란 전환점이 된다.
후지와라 신야는 여행을 선택한 이유 같은 없다고 말하지만 여행의 목적만은 분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내부를 비우고 세계의 정보를 새롭게 담아내기 위해서,자신이 살아 있다는, 존재하고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감각을 되찾고 싶어서, 리얼리티를 회복하기 위해 인도로 눈을 돌렸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인도 여행은 '신체'와 깊은 연관이 있더고 덧붙인다. 20대 초반에 신체의 존재감이 사라지고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인 저자가 인도를 방문한 것처럼 힌두교에서 파생된 사이비 종교 집단인 옴진리교 교주 아사하라 쇼코도 같은 이유로 인도를 방문한다. 두 사람에겐 인도 방문 외에 신체적인 불안감 이라는 공통 항목이 존재하는 것이다.
아사하라는 어렸을 때 왼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상살했고, 오른쪽 눈은 약시이다. 아사하라의 신체적 결함의 원인은 마나마타의 수은에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로 인정받지 못한 채 방치되었다. 사회와 체제를 향한 원한은 타인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와 증오를 분출하게 했고 급기야 1995년 옴진리교 가스 테러 사건을 몰로왔다. 한 사람의 신체적 결함이 몰고 온 파장을 생각하면 너무 끔찍하지만, 아사하라를 그렇게 만든 사회와 정부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는 1960년대 이후 아시아 최고의 경제성장을 이룩한 일본이 현대 사회에 남긴 병폐 중 하나이다.
옴진리교 신도들은 창문이 가려진 건물에서 눈가리개를 착용하고 어두 컴컴한 지하실의 밀폐된 방에서 외부와 차단된 생활을 했다. 저자는 스스로 어두운 세계에 갇히려고 했던 원인을 아사하라의 신체적 병리를 타인에게 강요하는, 일종의 굴절된 자기보복 현상에서 기인한 것으로 추측한다. 옴진리교 특징인 현실에 대한 자폐성은 아사하라 개인의 신체적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나 이와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도시의 평범한 청소년들이 너무나 쉽게 옴진리교에 빠져들고 그 어둠의 도가니에서 열광적인 정열을 발산한다. 이는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성장한 청소년들의 내면에도 현실 사회에 대한 자폐성이 껄려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컴퓨터와 텔레비전이 친구인 세대들이 겪는 고독감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다를 게 없다. 자연이나 외부의 풍경보다는 가상공간에 익숙하고 그것들과 친한 청년과의 인텨뷰에서 저자는 인도의 경험담을 이야기해준다. 현대 문명에 괴리감과 소외감을 느끼는 청년에게 그는 재생과 갱생을 위한 파괴와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한다. '재생과 갱생을 위한 파괴'는 일본인들의 지혜를 엿보는 대목이다.
같은 이유로 동일한 나라를 방문한 두 사람의 판이하게 다른 인생은 결국 '선택'에 있다고 나는 결론 짓고 싶다. 몰매를 맞으면서도 종교 의식을 거부하기로 선택한 저자의 선택과 힌두교를 선택한 아사하라의 선택은 같은 인도를 방문하고, 같은 장소를 가고, 같은 경험을 하지만 결국 동상이몽을 한 것이다. 저자의 선택은 삶이고, 아사하라의 선택은 죽음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황천의 개]는 이야기 거리와 생각할 거리를 많이 제공해준다. 여행서라기 보다는 가벼운 철학서 분위기를 짙게 풍기고 있어서 그렇다. 살아 있는 존재감이 사라지는 날이나, 등 떠밀려 사는 기분이 드는 날 이 책을 다시 펼쳐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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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 신야의 '황천의 개'
그의 책을 얼마 전에 다 읽었는데, 이제서야 글을 쓴다. 오래 전에 그의 '인도방랑' 책을 읽었고 이어 티베트 방랑을 읽었었는데, 이번에 나온 '황천의 개'는 인도 방랑에서 나왔던 장면들도 나온다.
옴 진리교의 교주었고 독가스 살인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던 아사하라 쇼코에 대한 얘기에서 시작해서 일본 청년들이 인도에 그토록 심취했던 이면에 서린 고도 성장의 부작용, 운동권 학생이었던 사람들의 허약함... 그리고 명상이니 하는 세계를 아무 의식없이 쫒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 등이 있고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 작가로서의 예리한 감성 등이 어울어진 책이다. 인도방랑에서도 그랬지만, 나는 저자의 글을 읽으며 감탄을 했다. 인도 방랑에서는 사진과 글로...그리고 이번 책에서는 글만으로.
(사진 작가인데, 사진 한장 없다. 글만으로 상상력과 긴장감을 돋군다. 역시 글에는 사진과는 다른 글의 힘이 따로 있다.)
알고 보니 사진 작가였는데, 지금은 소설도 썼다. 대단하다.
그는 인도를 현실로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명상이니, 환상이니...하는 것도 극도로 싫어한다. 얼마나 종교라는 제도를 싫어했는지, 힌두교도들의 축제에서 물감을 뿌리는 것을 극도로 거부하다가 싸움이 붙어서 힌두교도들에게 흠씬 얻어 맞기도 한다.
또한 신비주의니, 마술이니, 깨달은 척 하는 자들에 대한 증오심은 대단해서 직접 찾아가 그들의 속임수를 파헤치며 싸울 정도다.
그는 1960년대와 70년대에 약 10년간...20대, 30대의 세월을 인도에서 보낸 이였지만 자신의 부분적인 경험과 지식에 너무 기대어 오만하게 인도의 현실을 단정하며 아는 척하지도 않는다.
그는 철저히 제도와 관념과 종교를 거부하고, 동시에 잡다한 현실적 지식을 외면하면서 철저히...reality와 대면하는 자신을 직시한다.
여기서 realrity란 잡다한 현실의 지식과 경험, 누구나 다 말하는 정형화된 의미- 예를 들면 인도에서 깨달음을 얻는다든지 빈부 격차, 모순, 고통에 동참 등등 혹은 누구나 다 말할 수 있는 휴머니즘 등에 기대는 현실이 아니라
그런 것 다 떼어버린 벌거숭이의 자신, 시간, 공간을 의미한다. 그러니까...철저히 아티스트로서 벌거숭이가 된 의식으로서 바라본 reality다.
특히...그는 60년대 일본 운동권 들의 좌절과 그들이 인도로 도피하게 되면서 신비주의에 빠지게 되는 과정, 연유, 그리고 그것에 대한 연민, 비판을 하는데 이것을 보면서, 아 일본에서 이런 현상이 이미 일어났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우리도 양상은 다르지만, 비슷한 현상을 보았으니까.
이책은 그의 나이 60세 무렵에 쓴 것으로 아는데 그래서 깊이와 연륜이 더욱 돋보이는 책이다.
60이 넘어서 이 황천의 개를 썼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희망으로 다가온다. 어떤 길에서든 오래 남아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모습은 아름다워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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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의 사건, 한 장의 사진. 이야기는 거기에서 시작된다.
고통과 절망을 느낀 사람이, 약자에 대한 그 느낌도 이해할 수 있다 생각한다. 물론 이해는 하지만, 거기에 대한 반발로 부유하게 산 자신을 긍정하며 과거를 외면하고 능력의 부족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존재할 거라 생각한다. 인도에서의 동일한 경험도 누가 경험했느냐에 따라, 삶의 변화의 계기가 되기도 하고, 파괴의 시초가 되기도 하는 것이니까. 단순한 여행에서, 만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인간사회, 인간 존재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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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표지에서부터 음산함이 느껴진다. 후지와라 신야의 작품이란 것을 알았을 때 제목만 알고 있던 동양기행이 떠올랐고 사진과 글이 함께 담긴 여행기쯤으로 생각했었는데 내 예상은 보란듯이 빗나갔다. 1995년 일본에서 일어났던 '옴진리교' 사건과 관련된 내용들과 인도에서 겪었던 낯설고 신비로운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 이 책은 1995년 7월부터 1996년 5월까지 <주간 플레이보이>에 '세기말 항해록'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된 글들을 모은 것이라고 한다.
처음 후지와라 신야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오늘날 젊은이들의 여행이 점점 나약해지고, 쉽게 신앙에 빠지는 위험성을 지적하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과거 여행을 통해 그 시절 청년들이 인도에서 어떤 삶을 보냈는지 확인시켜줌으로서 신앙에 깊이 심취하다보면 자기 상실의 위험성이 있음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도여행을 연재하게 된 계기가 옴진리교 사건에 있음을 밝히기 위해 우선 교주였던 아사하라 쇼코를 언급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1995년 3월 20일 오전 8시, 일본 열도를 경악케한 사건이 벌어졌다. 인도의 힌두교에서 파생되었다고 주장하는 사이비 종교 단체의 신도들이 도쿄 시내의 전동차 다섯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사린 가스 테러를 감행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약 5,000명의 무고한 시민들이 병원에 실려 갔고, 열두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 역사상 희대의 테러 사건으로 불리는 '옴진리교 사건'이다.
저자와 옴진리교 교주였던 아사하라 쇼코 모두 인도를 여행했지만 그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었다. 인도라는 땅은 정치 이상으로 종교가 인간 생활의 규범으로 대접받고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데 저자는 종교와는 거리를 둔 여행을 했지만 옴진리교 청년들은 인도에 도착하자마자 집단 명상에 빠졌고 일본에 대해서는 세상의 모든 현상과 체제를 믿지 않는다는 태도를 취하면서 종교에 귀의해버렸다. 그러면서 신앙보다는 과대망상에 가까운 정신행동을 보이는 이들이 나타났고 이는 인도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해 망상속으로 도피함으로서 자신을 보존하는 일종의 현실도피라고 여겨진다.
길 위에서 쉽게 삶과 죽음을 접할 수 있는 곳, 인도는 모든 여행자들이 한번쯤 가보길 원하는 이상향 같은 곳이 아닐까 생각한다. 갠지스강 근처에 가면 시체 태우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다고 하는데 저자는 모래섬으로 배를 저어 간 후 그곳에서 사람의 시체를 먹는 '황천의 개'를 만나게 된다. 그 순간은 나의 손에도 땀이 날만큼 급박하게 느껴졌다. 무섭기도 했지만 무언가 인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신비로움 같은 것이 느껴졌다고 할까. 책을 읽는 동안 꿈꿔왔던 인도를 여행한 느낌이었고 알지 못했던 옴진리교 사건에 대해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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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다는 존재감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다!!
<동양기행>, <아메리가기행>의 작가 후지와라 신야의 <인도방랑>완결편 사실 나는 후지와라 신야의 책은 처음 접해본다. 그래서 이작가가 어떤 글을 섰는지 잘알지 못하는데 일본에서는 유명한 작가라고 한다. 다시한번 나의 얇은 지식의 한계를 들어내고 있다.. 이책을 통해서 후지오라 신야를 다 알수는 없겠지만 어떤 작가인지는 한번 알아보고 싶다. 그래서 이책을 다 읽을 때쯤에는 작가의 다른 책들도 읽어 볼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처음 이책을 접했을 때 보통의 여행 에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그건 큰 착각이라는 것을 알았다. 물론 여행에 관한이야기도 있지만 삶에 대해서 생각하는 자전적 에세이의 경향도 좀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읽으면서 조금 아리송 했던 것 같다.
처음에 책 제목을 봤는데 멀까?라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 개 짖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는데 어느날 저녁이 되자 갑자기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보고 싶다는 충동이 생겼지. 발길을 옮길 때마다 개들의 짖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군. 잠시 후에 멀리서 몇마리 개들의 모습을 발견했어. 망원렌즈로 녀석들을 살펴보았지.처음에는 강물에 떠내려온 나무토막이라고 생각했어. 그렇게 한동안 녀석들을 관찰하다가 좀 더 다가가보기로 했어. 그리고 다시 망원렌즈를 들여다보았지. 순간 내눈을 의심했어. 개들이 먹고 있는게 사람처럼 보였던 거야... 내가 살던 곳에서 '지구보다 무겁다'라고 말하던 인간의 목숨이 아귀 같은 들개들에겐 한낱 먹이감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개에게 먹힐 만큼 자유롭다. -책속에서...
황천의 개는 한장의 사진으로 나와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개들 사진이네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책을 읽을수록 소름이 쫙돋았다. 알고보니깐 강에서 타가가 만 시체였고 그것을 뜯어 먹고 있는 개들이 었다. 진짜 잔인할 정도였다. 하지만 작가는 덤덤히 이야기하고 있고 그냥 모든것을 다 해탈한듯 이야기 하고 있었다. 나는 책을 읽고 다시 한번 사진을 보는데 왜 이렇게 인생 허무가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책을 읽으면서 저자는 우리가 삶에 직접 부딪쳐서 느끼면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 같다. 나는 그냥 여행을 떠나면 놀러간다 일상에서 벗어난다가 다였는데 이제부터는 여행을 통해서 내안에 숨겨진 나를 발견할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든 부딪혀보고 열심히 살아가야겠다는 강한 삶의 의지도 생기는 것 같다. 더불어서 여행도 좀더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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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에 처음으로 일본을 대표한다는 사진가 후지와라 신야의 전설 같은 여행에세이 <동양기행>을 읽었다. 예의 책을 읽고, 같이 수록된 사진들을 보면서 보통의 사진들과는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낯선 이국의 풍경만이 아닌, 인간사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번에 <황천의 개>란 묘한 제목의 책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번에는 또 어떤 책일까 하는 호기심이 샘솟았다. <황천의 개>의 구성은 낯설다. 우선 이야기는 일본의 패전 50주년인 1995년 3월 20일에 발생한 도쿄 지하철의 사린 가스 테러로 시작한다. 사건의 주범은 신흥 사이비 종교집단인 옴진리교를 믿는 신도들과 그들의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 일본에서는 같은 해 초에 발생한 한신대지진(고베대지진)과 함께 한 시대의 종언처럼 받아들여진 큰 사건이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비중 있게 다뤄지진 않았었다고 한다. 포토 저널리스트인 후지와라 신야는 공업화와 수출입국의 기치 아래, 성장과 경쟁 일변도의 삶을 달려온 일본인들의 병리적 심리상태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옴진리교의 교주의 고향인 구마모토 현의 야쓰시로를 방문해서, 미나마타병으로 알려진 수은공해와 아사하라 쇼코의 원념에 찬 사회에 대한 복수의 실마리를 풀어 나간다. 그러다가 갑자기, 글은 작가가 20대에 부모와 연인 그리고 대학마저 죄다 포기하고 찾았던 인도로 공간이동을 한다. 마치 작가의 이전 작품인 <인도방랑>의 후속편인 것처럼. 후지와라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인도의 갠지스 강가에서 소멸하는 인간의 육신을 날마다 지켜보면서 개인의 번뇌의 화살을 소진하고, 진아(프르샤)를 찾는 수행에 들어간다. 후지와라는 그 과정을 굳이 여행이라고(혹은 방랑) 부르는데, 이 여정 가운데 많은 가짜 구루지(도사)들을 만나게 된다. 계급적인 종교에 대해 계속해서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 작가는 명상과 수행이라는 미명 하에 서구의 소위 깨인 지식인들로부터 금전과 성을 갈취하는 얼치기 구루지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특히 4번째 장인 <히말라야의 할리우드>에서 눈속임과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이들이 벌이는 할리우드 쇼같은 공중부양의 허상, 다시 말해서 환영(마야)을 폭로하고 있다. 그 다음 장에 등장하는 같은 일본인 여행자 출신의 Y와의 만남에서는 1960년대 말 일본에서 학생운동의 실패에 좌절하고, 티베트, 중동 그리고 인도를 찾은 수많은 여행자들의 부질없는 환영을 다루고 있다. 이는 역시 비슷한 모습으로 인도를 찾았던 아사하라 쇼코와 그의 추종자들의 그릇된 종교관과 진리는 전혀 담겨 있지 않은 옴진리교의 모래성 같은 이데올로기들을 분석해낸다. 이 책을 읽게 되면 자연히 알게 되겠지만, 후지와라가 갠지스 강에서 우연히 만난 “황천의 개”와의 조우는 가히 충격적이다. 책에 실린 같은 제목의 사진을 한참을 보면서 도대체 이게 무슨 사진이가 하고 한참을 지켜봤다. 천부인권사상에서 비롯된 현대사회 인간의 존엄은 죽음이 일상생활에서 분리되지 않은 채, 삶의 리얼리티와 병존하고 있는 인도에선 생로병사의 근원적 진리 앞에서 너무나 보잘 것 없게만 느껴졌다. 구루지들의 사기 행각에 대한 설명은 예전에 봤던 할리우드 영화 <구루>(2002)의 그것과 내 기억 속에서 오버랩되고 있었다. 인도의 신비주의에 현혹된 미국의 부유층과 구루 행세를 하면서, 그들의 돈을 뜯어내는 사이비 구루의 작태가 <황천의 개>에 등장하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환각제를 먹이고 공중부양 쇼를 벌이는 프랑스 청년의 패러디처럼 느껴졌다. 얼치기 구루들이 사람들을 속이는데 써먹은 문구가 계속해서 화두처럼 머리에서 맴돌고 있다. 우리는 모두 환영이고, 우리가 사는 이 사회 역시 환영이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린 모두 미아가 되어 버리고 만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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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대전 패전국이 된 일본은 1960년대 근대화, 공업화를 표방하며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 하지만 그 부작용으로 물질주의와 몰개성화가 만연하게 되었으니, 1960년대 말에 대학생이 된 저자 후지와라 신야는 존재 가치를 화두로 스스로와 치열하게 투쟁하던 중 인도행을 결정한다. 그것은 뚜렷한 목적 의식이 이끈 여행이라기보다는 막연히 인도라는 나라가 주는 정신적 신비로움 덕분이라고 할수있다.
그는 인도에서 치열하게 정신적 가치를 찾고자 노력했다. 스스로가 '존재'하고 있다는 엄연한 진실을 '체험'하길 원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강가 여기 저기에 쌓인 시체들과 이 시체들이 화장되는 모습을 몇날이고 구경하게 된다. 처음에 그것은 무섭고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색다른 무언가로 의미있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불이 활활 타오르고 시체의 수분이 지글거리며 끓고 증발하여 결국엔 재만 남는 과정들을 보는 것이야말로 통쾌하고 명쾌한 존재의 유,무를 알려주는 사실이자, 재를 혀끝에 올려놓는 그 자신이야말로 존재하고 있는 '유'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황천의 개들과 대치했던 그의 에피소드는 읽는 것만으로도 오금을 저리게 만든다. 강을 따라 쌓여있던 시체들 중 몇구는 물살에 휩쓸려 하류로 떠내려 가기도 했는데 언젠가부터 개 짖는 소리가 그의 관심을 끌게 된다. 급기야 그는 배를 이용해 하류로 내려가 시체를 먹고 있는 개들을 발견하게 된다. 거리를 둔채 카메라로 녀석들만 담을 의도였지만 일이 커지고 말았다. 갑자기 한 무리의 개들과 맞딱뜨린 것이다. 순간 녀석들의 눈에서 살의를 본 그는 살아야겠다는 단단한 의식이 떠오르는것을 느꼈다. 그는 주변에 널린 뼈와 해골을 양손에 각각 들고 녀석들의 기를 꺾으려 노력하며 강가로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 살을 에는 듯한 물의 감촉이 정신을 더욱 예리하게 만들었고, 그렇게 5분가량 대치하던 중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자신의 이가 부딪히며 내는 달그락 소리를 들으며 그는 삶과 죽음의 기로에 놓였던 스스로를 떠올린다. 모든 생물 위에 군림하는 인간의 존재가 한낱 개의 먹이로 전락할수도 있고, 누군가의 뼈는 누군가의 목숨을 구하기도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그는 간절히 살고 싶었다.
1995년 일본 열도를 뒤흔들었던 옴진리교 사건을 기억할것이다. 도쿄 전동차 다섯대에 사린 가스 테러를 감행한 사이비 종교의 만행으로 5000명이 병원에 실려가고, 12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다. 이 종교의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가 인도에서 수행을 거쳐 옴진리교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후지와라 신야의 이 인도 여행과의 접점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 접점은 인도를 매개로 한다는 단순한 사실에 그치지 않고, 아사하라 쇼코에 대한 후지와라의 새로운 분석에까지 이른다.
규수의 미나마타를 중심으로 발병한 미나마타병(질소 공장의 폐수에 함유된 메탈수은 중독)이 아사하라 쇼코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하는 추론에 이어 그의 형을 만나 진위를 확인함으로서 후지와라 신야는 확신에 이른것이다. 결국 아사하라 쇼코가 미나마타병으로 시력을 완전히 잃고, 내적 불만과 우울감으로 대중과 국가에 대한 반감을 품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반감은 인도 수행을 통해 더욱 견고한 단계로 발전하게 되고, 인도 사회의 계급이라는 도구를 그의 종교에 차용했을테다. 처음에는 동등한 이들이 순수하게 연구 목적으로 모임을 결성했다가, 내부적으로 계급이 생기고 힘이 분화됨으로써 큰 조직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통해 이를 확인할수 있다.
나는 동양기행에 이어 후지와라 신야의 작품을 두번째 접한다. 동양기행에서 발견했던 그의 남다른 통찰력이 이 책에서는 실로 놀랍게 깊이를 더하고 있다. 동양기행이 여행에 중점을 두었다면 이 책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일본 젊은이들이 고뇌하고 품었던 문제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는 후지와라 개인의 철학을 뛰어넘어 실존철학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는 의의를 가진다.
오랫만에 숨죽이고 몰입했던 책으로 기억될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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