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런 생각 없이 한국근대 100년을 말한다기에 선택한 책이다. 이 책에서 논쟁을 벌이는 두 사람, 박노자교수는 나도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흔히 왜곡이란 사실과 다른 서술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중심적인 역사해석의 관점에서 보면 왜곡이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두 저자는 역사는 해석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해석은 늘 서술주체의 현실적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된다. 따라서 서로가 다른 성향의 차이를 인정할 경우 총체적 역사쓰기는 가능하다고 말한다. 책은 지식인과 친일, 여성, 대중문화, 종교, 그리고 한국근대 100년의 성격에 대해 두 교수가 논쟁을 벌인다. 먼저 박노자교수가 화두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먼저 지식인과 친일에서 두 논자는 일제강점기의 일그러진 근대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여성문제에 대해서도 두 논자는, 매춘여성에서부터 신여성에 이르기까지 논쟁을 이어간다. 박노자교수는 매춘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2004년 성매매방지법을 제정하고 공권력이 집창촌을 없앤다고 할지라도, 성매매 여성들이 신자유주의의 최하층민에서 벗어날 방도는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결국 또 다른 성매매의 방법을 찾게 될 것이라고 한다. 매춘의 역사를 볼 때 이들은 남성주의와 지배층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이는 개화기의 신여성들도 이러한 예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고 말한다. 남성의 욕망은 당연한 것이며, 여성은 현모양처가 되어야 한다는 굴레를 거부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대중문화 편에서는 한류와 영화에 대한 담론을 이어간다. 박노자교수는 서구사회에 불고 있는 한국영화나 태권도의 붐은 한국의 문화가 아닌 동아시아의 문화로써 소비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단지 서구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을 자극한 것 이라고 한다. 또한 영화는 대중의 의식 속에서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을 지워버리고 세상을 즐기는 태도를 심어준다고 하면서 영화인들의 각성과 시대의식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근대 100년의 세월 속에서 종교는 어떠했을까? 박노자교수는 기독교와 불교의 명암을 이야기한다. 과거를 돌이켜볼 때 부끄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마취제판매와 다를 바 없다며 판매업자들의 상도덕 준수를 말한다. 반면 근대 100년을 뒤돌아볼 때 박노자교수는 우리가 잃은 것이 너무나 많다고 말한다. 그 세월동안 우리는 오로지 길들여졌다고 평가한다. 국가의 목표에 따라 국민으로 길들여진 우리가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일이다. 누구의 의견이 옳고, 누구의 의견이 그름을 떠나 - 이건 읽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르다 - 한국 근대 100년의 여러 모습들을 상이한 시각으로 볼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책을 읽은 기쁨을 느낀다. 각 주제에 대한 내 생각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시각으로 볼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고, 그것과 내생각의 차이를 인정한다면 굳이 서로 편을 가를 이유도 없지 않나 싶다. 그러나 그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사실과 다른 서술을 하는 그들이 있어 근대 100년이 우리에게 교훈이 되지 못한다는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한다. |
|
'우리 역사 최전선'과 '열강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에 이은, 박노자 교수와 허동현 교수의 격론을 담은 책. '열강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는 사놓고 아직 읽지를 못해서 잘 모르겠지만, '우리 역사 최전선'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우리 역사 최전선'은 쟁점이 분명치 않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는데, 이번의 책은 그 단점을 최대한 보완한 것 같다.
그만큼 양 쪽 학자의 입장이 조금 더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는데, 이 첨예함이 오히려 이 책의 취지에 맞는 것 같다.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담론으로서의 역사는 "해석"일 뿐이다. …… 계급적 갈등이 존재하는 이상 좌우가 "하나가 되어" 서로 같은 역사 서술을 생산하는 일은 불가능하기도 하고 불필요하기도 하다. 하지만 서로가 좌우 성향의 차이를 인정할 경우 미래를 항해 같이 나아가야 할 "시민" 모두를 위한 "총체적" 역사 쓰기는 가능하다. 현재적 이해관계와 이념의 차이를 숨기고 호도하는 역사가 아니라, 바로 이 차이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토론을 통해 시민 스스로에게 "선택"의 권리를 주는 그런 "다원적" 역사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예전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도 두 학자가 서신을 주고 받는 형태로 되어있는데, 아무래도 두 학자의 성향상 박노자 교수의 글로 화제가 시작되고 있다. 때문에 논쟁의 형식적 구조상 박노자 교수가 불리한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긴했지만,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니 이해는 갔다. 창 없이 방패부터 등장하는 것은 왠지 어색할테니.
조금은 거시적인 이야기가 중심이 되었던 앞의 두 책과는 달리, '근대화'라는 큰 주제를 중심으로 주제가 세분화 되어 있다. '지식인과 친일', '여성', '대중문화', '종교' 등. 때문에 독자들은 앞의 두 책과는 달리, 자신의 입장도 함께 정리해나갈 수 있을 듯 하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박노자 교수의 어휘 선택이나 관점 등이 조금은 과격해 보일 수가 있기 때문에 허동현 교수의 논지가 훨씬 더 안정적으로 보이기도 한다(물론 이것은 앞서 얘기했듯이, 서신을 주고 받는 순서의 문제를 무시할 수 없다).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칼날 같은 기준을 들이대던 박노자 교수가,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포옹하는 '관용'을 보이는 것, 그리고 마르크스와 레닌을 '현대의 보살', 사회주의의 실천을 '보살행'으로 보는 것에 대한 허동현 교수의 지적은 '합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불편했던 것은 박노자 교수의 논지가 아니라 오히려 허동현 교수의 논지였다. 나는 허동현 교수의 주장 중 몇몇 '표현'들을 정확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광수를 '일관된 민족주의자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주장에서 '합리적'이란 단어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광수의 '민족'은 무엇인가? 그리고 민족주의자는 제국주의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인가? ('민족'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그렇게 물고 늘어지는 '자유주의자'들이, 오히려 이럴 때는 '민족'이라는 말을 아주 편하게 사용한다.) 나는 오히려, 이광수의 민족이 '집단적 '우리'에 대한 수사'라는 박노자 교수의 견해가 더 합리적인 것 같다.
가장 거슬렸던 부분은 허동현 교수가 자주 사용하는 '시민'이라는 단어였다.
이광수의 시대에 자본은 노동을 착취하고 국가는 개인을 억압하는 폭력만 행사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오늘 우리의 시대에 존재하는 자본과 국가를 그렇게만 보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꿈꾸는 사회는 자본가와 노동자, 도시민과 농민, 남성과 여성, 정규직과 비정규직, 그리고 시민권자와 이주노동자처럼 지향과 이해를 달리하는 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다원화된 시민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이광수의 시대에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이는 '민족'이나 '민중'과 같은 집단이었지만, 오늘 제국에 맞서 우리의 양심을 지킬 이는 각성된 개체이자 주체로서 시민이 아닐까 합니다.
냉전 붕괴 후 들이닥친 신자유주의의 세상에서 살안마기 위한 우리 정치세력의 해법은 너무도 다릅니다. 좌파는 민족을 방패로 민중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아직도 꿈꿉니다. 허나 우리 사회는 이미 생각과 지행과 이해를 달리하는 이들이 함께 살아가야 할 다원화된 시민사회로 진화했습니다.
허동현 교수의 견해에 의하면 계급 담론은 이제 낡고도 낡은 구시대의 유물이라는 것인데, 여기에 대한 나의 견해는 지난 번 책의 리뷰에 간단히 언급을 해놓았으니 생략한다(http://blog.yes24.com/blog/blogWriteReview.aspx?blogid=10ispain&goodsno=3295975)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허동현 교수가 '현상'과 '당위'를 착각(혹은 의도적 혼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에 있다. 2009년 대한민국 사회가 현상적으로 다원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우리 사회가 '다원화된 사회'라고 볼 수 있는가? 그리고 집단이 아닌 '개체이자 주체로서의 시민'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가? 우리 모두? 그렇다면 '민중'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물론 자유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개인'의 중요성, 그리고 집단의 폭력성을 간과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허동현 교수가 이야기하는 시민은 오히려 '개인'의 중요성을 부각시키지 못하는 모호한 개념일 뿐만 아니라, 합리적이고 양심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이들을 간단하게 배제해버릴 수 있는 폭력적인 개념이 될 수도 있다. 경제적인 문제로 기본적인 인성교육마저 받지 못한 사람은, 그렇다면 시민인가, 시민이 아닌가? (간단하게 예를 들 수 있다. 가장 최근 부각됐던 용산의 일을 보자. '합리적' 시민의 입장이라면 그들은 화염병을 들고 옥상으로 가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들을 합리적이지 않게 만든 이들은 또 누구인가? 맞다. 계급은 낡고도 낡았다. 하지만 '낡았다'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분명 다른 말이다.)
서신을 주고 받는 이런 형식에는 일장일단이 있다. 여러 주제에 대해 서신을 주고 받는 형식이기 때문에 한 주제로 서로의 주장을 깊게 논박하는 것까지 기대하기는 힘들다. 이것이 일단. 반면 여러 주제에 대해 입장이 다른 이의 근거와 주장을 들어보고, 양 쪽의 의견 차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해볼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일장. 그러나 '길들이기와 편가르기'가 만연하는 오늘, 이 책의 일장이 일단을 충분히 상쇄시킬 수 있음은 분명한 것 같다. |
|
한국 사회를 흔히 토론이 없는 사회라고 일컫는다. 내 말을 부정하거나 반박하는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고, 나와 ‘다른’ 의견을 ‘틀린’ 의견으로 매도하는 분위기 때문이리라. 다른 나라라고 아집 강한 사람들이 없을까마는, 배울 대로 배웠다는 식자계층에서까지 반대편의 주장을 앞뒤없이 ‘깔아뭉개려’ 드는 모습을 볼 때마다 부끄러움이 앞서는 것은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진보와 보수 진영을 둘러싼 논쟁은, 언제나 논리도 예의도 없는 막가파식 인신공격으로 더러워지기 마련이었다. 저마다의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이 신문이나 방송 매체를 통해 수구꼴통이니, 좌빨이니 하는 값없는 단어들을 내던질 때면 대한민국의 지적 수준이 의심스러워지기도 했다.
박노자와 허동현의 [길들이기와 편가르기를 넘어]는 그런 의미에서 참 값진 결과물이다. 진보와 보수 진영을 대표하는 학자들이 ‘점잖게’, ‘논리적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제시하고 반박하고 또 그에 응답하며 토론을 이어나간다. 한국 근대사라는 동일한 소재를 놓고 박노자는 철저히 반자본주의, 혹은 반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반면, 허동현은 우직한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생각을 펼쳐 나간다. 이들의 토론 속에서 춘원 이광수는 힘의 논리에 따라 이리 빌붙고 저리 빌붙는 박쥐가 되기도 하고, 민족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불운한 애국청년이 되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 두 입장 모두 나름의 근거와 논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박노자와 허동현은 상대의 주장을 존중하지만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도 않는다. 한국 근대사라는 소재를 통해 두 사람의 가치관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판단은 독자에게 일임한다. 자신의 입장만이 진리가 아님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진보와 보수, 반민족주의와 민족주의의 양 극단에 서 있는 두 학자들 간의 ‘제대로 된’ 토론을 엿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차고 넘친다. 다만, 뒷부분으로 갈수록 초반의 팽팽한 토론 구도가 사라지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잃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책이다. |
|
역사는 쓰여진 자의 관점에 따라 존재했던 Fact가 다르게 전달된다. 이는 Fact가 바뀐 것이 아니라 평가 방법론 차이에 기인할 것이다. 결국 역사 쓰기에 ‘절대적 진실’ 추구는 어렵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누가 어떤 관점에서 출발하느냐에 따라서 재료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면 역사를 어떻게 봐야 할까. 여기 두 학자 박노자와 허동현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근대사 100년을 조명했다. 이들은 일전에 ‘열강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라는 책에서 대담 형식으로 서로 다른 관점을 나눈 적이 있다. ‘길들이기와 편가르기를 넘어’ 라는 이 책의 제목부터 다시 곱씹어 보면 두 교수의 관점을 대략 어림짐작 할 수 있다. 그 둘의 엇갈리는 논지 중 인상 깊었던 하나는 다음과 같았다. 책 첫머리에서 박노자 교수는 춘원 이광수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다.한때 톨스토이의 비폭력을 숭배하는 평화주의자로서의 모습을 지니고 민족주의자로서 조선의 독립을 외쳤던 이광수가 어찌하여 사회진화론에 빠져서 1930년대 일본이 일으킨 전장에 조선의 젊은이들의 참전을 독려했는가. 그의 입장 변화가 변절 내지는 훼절로 보아야 하는가에 관해서 두 학자의 의견은 갈린다. 박노자는 애초에 이광수는 변절이라고 할 절개가 있었는지 의문을 품으면서 조선의 예속 부르주아였던 계급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지적한다.즉 생존을 위한 실리적 계산은 있었으나 조선 시대 유교 정신을 표상하는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는 ‘절개’라는 측면은 존재하지 않았음을 주장한다. 결국 변절이라는 그 논의 자체를 처음부터 제지하는 보다 강력한 입장에 서 있다. 뒷 부분의 논의도 이와 비슷하다. 국가와 민족의 개념이 우선이냐 아니면 우리 개개인의 인간적 권리가 우선이냐에 따라 두 교수는 매춘 여성의 문제, 대중문화의 문제, 종교의 문제 등등에서 다른 목소리를 낸다. |
|
현 대한민국은 이념,지역,계층 등 다양한 분류체계로 나누어져 있다. 이쁘게 그리고 좋게 말해 나누어진 것이지 갈기갈기 찢겨있는 모습이다...인간 본연의 분열주의도 있겠지만 일부 정치가들의 선동질에 놀아난 아픈 역사.
박노자의 글을 몇 권 보는데 조금은 자극적이고 자기규정적인 언어사용이 눈에 띈다. 언어사용 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생각 및 태도를 어느정도는 인지할 수 있는데 박노자의 글에는 아마도 '길들이기'로 바라보는 시선에서 나오는 '길들이기'를 거부하고픈 마음에 기인한 몸부림이아닐까? 이 정도로 이해하고자한다.
특히 이 부분은 두 교수가 처음 제기해서 서로간에 주고받은 '지식인과 친일'부분에 이런 제목을 쓴 의도를 알 수 있다. 아직까지도 대한민국에서는 친일에 대한 인식이 뭔가 불분명하고 자기 방식대로의 역사쓰기로 인해 서로간에 으르렁거리고 있는 실정이다. 과거가 비단 과거의 모습이 아닌 현재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전제로 박노자입장에서는 '길들이기'란 단어로 현 대한민국이 지나온 길을 규정하고 있는데 반해 허동현은'편가르기'란 단어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책에 대해 살펴보면 각기 다른 시선으로 한국역사를 바라보는 두 인물이 서로 서신을 주고 받으면서 한국근대사의 부분을 이야기 전개하고 있다. 박노자가 먼저 issue된 부분에서 자기의 생각을 밝히고 뒤이어서 허동현이 답신하는 형식이다. 박노자가 몰아치듯 공격하는데 시간의 간격을 두고 여러자료를 참고하여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허동현의 글에서는 뭔가 시원함 및 공격성은 없지만 차분하게 박노자가 제기한 것에 친절하게 설명하면서 안정적으로 자신의 논지를 이끌고 있다. 뭔가 형님이 아우에게 대하는듯한 느낌도 든다. 두 저자의 나이를 보니 박노자는 30대 허동현은 50대이니 글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세월의 지남과 깊이에서 나오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듯 하다.
이 둘의 글을 통한 만남이 계속 유지되어 앞으로도 여러 글들을 통해 다양한 생각을 하게하는 장(場)을 마련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