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5)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60%
  • 리뷰 총점8 40%
  • 리뷰 총점6 0%
  • 리뷰 총점4 0%
  • 리뷰 총점2 0%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0.0
  • 30대 0.0
  • 40대 8.0
  • 50대 8.0
리뷰 총점 종이책
근대 100년은 길들이기와 편가르기의 시대??
"근대 100년은 길들이기와 편가르기의 시대??" 내용보기
아무런 생각 없이 한국근대 100년을 말한다기에 선택한 책이다. 이 책에서 논쟁을 벌이는 두 사람, 박노자교수는 나도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허동현교수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아니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2003년부터 한국의 근대에 대한 논쟁을 시작하여 벌써 두 권의 책이 나왔고,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한다. 책을 읽는 동안 그들의 주장이나 색깔이 어떠
"근대 100년은 길들이기와 편가르기의 시대??" 내용보기

아무런 생각 없이 한국근대 100년을 말한다기에 선택한 책이다. 이 책에서 논쟁을 벌이는 두 사람, 박노자교수는 나도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허동현교수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아니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2003년부터 한국의 근대에 대한 논쟁을 시작하여 벌써 두 권의 책이 나왔고,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한다. 책을 읽는 동안 그들의 주장이나 색깔이 어떠한지를 떠나, 지향하는 이념이 서로 상반되는 두 사학도가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가운데서의 논쟁을 이어가는 것을 보고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깨닫는다. 진정으로 민족과 국가를 생각하는 보수와 계급과 민중을 생각하는 진보는 서로의 적이 아닌 역사를 이끌어가는 두 축이란 것을 알 수가 있다.

 

흔히 왜곡이란 사실과 다른 서술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중심적인 역사해석의 관점에서 보면 왜곡이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두 저자는 역사는 해석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해석은 늘 서술주체의 현실적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된다. 따라서 서로가 다른 성향의 차이를 인정할 경우 총체적 역사쓰기는 가능하다고 말한다.

 

책은 지식인과 친일, 여성, 대중문화, 종교, 그리고 한국근대 100년의 성격에 대해 두 교수가 논쟁을 벌인다. 먼저 박노자교수가 화두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허동현교수가 이에 반론을 제기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을 같이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이 대척점에 서있거나 아니면 관점을 달리하여 생각하는, 이분법적으로 이야기하면 한 명은 내편이고 한 명은 분명한 적이 된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기 때문에 논쟁은 그 마지막까지 계속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먼저 지식인과 친일에서 두 논자는 일제강점기의 일그러진 근대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이광수와 그의 민족개조론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박노자교수에게 있어 이광수는 두 얼굴을 가진 지식인으로 표현된다. 사랑예찬과 같은 개인의 애정에 몰두하는가 하면, 황인종의 단결과 같은 일제파시즘을 예찬하기도 한다. 또한 그의 민족개조론은 우리민족이라는 이름으로 행하여진 지적 사기라고까지 말한다. 이광수가 말하는 민족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그 당시 9할 이상의 조선민족은 민족개조론 에서 이야기하는 민족과는 아주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며, 그가 말하는 민족은 누구인지를 묻고 있다. 이에 대해 허동현교수는 이광수가 일관되게 추구한 것은 민족과 국가였다고 주장하며, 그의 민족개조론도 도산 안창호가 설립한 흥사단 강령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친일에 대한 것도 처단에 앞서 정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당시 친일파들이 주장하던 민족을 위한 친일이라는 것은 자신의 친일을 포장하기 위한 기만에서 나온 것 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여성문제에 대해서도 두 논자는, 매춘여성에서부터 신여성에 이르기까지 논쟁을 이어간다. 박노자교수는 매춘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2004년 성매매방지법을 제정하고 공권력이 집창촌을 없앤다고 할지라도, 성매매 여성들이 신자유주의의 최하층민에서 벗어날 방도는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결국 또 다른 성매매의 방법을 찾게 될 것이라고 한다. 매춘의 역사를 볼 때 이들은 남성주의와 지배층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이는 개화기의 신여성들도 이러한 예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고 말한다. 남성의 욕망은 당연한 것이며, 여성은 현모양처가 되어야 한다는 굴레를 거부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허동현교수는 이에 반하여 성노동자로써 그들을 평가한다.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은 매매춘을 하는 여성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매춘여성들이 성노예이어야 하며, 그래야 자신들이 그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부각하는데 의미를 둘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대의 매매춘 여성들은 성노동자이자 시민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으려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그는 힘있는 자가 눈높이를 낮추기를 희망한다고 말한다.

 

대중문화 편에서는 한류와 영화에 대한 담론을 이어간다. 박노자교수는 서구사회에 불고 있는 한국영화나 태권도의 붐은 한국의 문화가 아닌 동아시아의 문화로써 소비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단지 서구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을 자극한 것 이라고 한다. 또한 영화는 대중의 의식 속에서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을 지워버리고 세상을 즐기는 태도를 심어준다고 하면서 영화인들의 각성과 시대의식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허동현교수는 아시아지역 문화의 흐름에 대해 이야기한다. 예전에는 중국에서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전파되는 동류가 있었다면, 근대화 이후에는 역으로 진행되는 서류가 있었다고 말한다. 문화는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지만, 동류와 서류는 모두 일방적 전파의 오만함을 보였다고 한다. 문화의 쌍방통행이 가능할 때, 그리고 우리가 이를 받아들일 때 1990년대부터 나타난 한류의 미래가 보장된다고 주장한다.

 

근대 100년의 세월 속에서 종교는 어떠했을까? 박노자교수는 기독교와 불교의 명암을 이야기한다. 과거를 돌이켜볼 때 부끄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마취제판매와 다를 바 없다며 판매업자들의 상도덕 준수를 말한다. 반면 허동현교수는 비록 그들의 부정적인 면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국민의 50%가 넘는 사람이 종교를 가지고 있을 때, 그들의 긍정적인 면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 한다.

 

근대 100년을 뒤돌아볼 때 박노자교수는 우리가 잃은 것이 너무나 많다고 말한다. 그 세월동안 우리는 오로지 길들여졌다고 평가한다. 국가의 목표에 따라 국민으로 길들여진 우리가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일이다. 허동현교수에게 지난 100년은 편가르기 시대였다고 한다. 친일이냐, 반일이냐, 민족이냐, 아니냐를 놓고 너와 나로 구별하던 편가르기를 이제는 넘어설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누구의 의견이 옳고, 누구의 의견이 그름을 떠나 - 이건 읽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르다 - 한국 근대 100년의 여러 모습들을 상이한 시각으로 볼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책을 읽은 기쁨을 느낀다. 각 주제에 대한 내 생각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시각으로 볼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고, 그것과 내생각의 차이를 인정한다면 굳이 서로 편을 가를 이유도 없지 않나 싶다. 그러나 그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사실과 다른 서술을 하는 그들이 있어 근대 100년이 우리에게 교훈이 되지 못한다는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한다.



k*****1 2010.06.22. 신고 공감 7 댓글 17
리뷰 총점 종이책
나의 입장은 어떠한 입장인가?
"나의 입장은 어떠한 입장인가?" 내용보기
'우리 역사 최전선'과 '열강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에 이은, 박노자 교수와 허동현 교수의 격론을 담은 책. '열강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는 사놓고 아직 읽지를 못해서 잘 모르겠지만, '우리 역사 최전선'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우리 역사 최전선'은 쟁점이 분명치 않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는데, 이번의 책은 그 단점을 최대한 보완한 것 같다.   그만큼
"나의 입장은 어떠한 입장인가?" 내용보기

'우리 역사 최전선'과 '열강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에 이은, 박노자 교수와 허동현 교수의 격론을 담은 책.

'열강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는 사놓고 아직 읽지를 못해서 잘 모르겠지만, '우리 역사 최전선'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우리 역사 최전선'은 쟁점이 분명치 않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는데, 이번의 책은 그 단점을 최대한 보완한 것 같다.

 

그만큼 양 쪽 학자의 입장이 조금 더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는데, 이 첨예함이 오히려 이 책의 취지에 맞는 것 같다.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담론으로서의 역사는 "해석"일 뿐이다. ……

  계급적 갈등이 존재하는 이상 좌우가 "하나가 되어" 서로 같은 역사 서술을 생산하는 일은 불가능하기도 하고 불필요하기도 하다. 하지만 서로가 좌우 성향의 차이를 인정할 경우 미래를 항해 같이 나아가야 할 "시민" 모두를 위한 "총체적" 역사 쓰기는 가능하다. 현재적 이해관계와 이념의 차이를 숨기고 호도하는 역사가 아니라, 바로 이 차이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토론을 통해 시민 스스로에게 "선택"의 권리를 주는 그런 "다원적" 역사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예전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도 두 학자가 서신을 주고 받는 형태로 되어있는데,

아무래도 두 학자의 성향상 박노자 교수의 글로 화제가 시작되고 있다.

때문에 논쟁의 형식적 구조상 박노자 교수가 불리한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긴했지만,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니 이해는 갔다.

창 없이 방패부터 등장하는 것은 왠지 어색할테니.

 

조금은 거시적인 이야기가 중심이 되었던 앞의 두 책과는 달리, '근대화'라는 큰 주제를 중심으로 주제가 세분화 되어 있다.

'지식인과 친일', '여성', '대중문화', '종교' 등. 때문에 독자들은 앞의 두 책과는 달리, 자신의 입장도 함께 정리해나갈 수 있을 듯 하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박노자 교수의 어휘 선택이나 관점 등이 조금은 과격해 보일 수가 있기 때문에

허동현 교수의 논지가 훨씬 더 안정적으로 보이기도 한다(물론 이것은 앞서 얘기했듯이, 서신을 주고 받는 순서의 문제를 무시할 수 없다).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칼날 같은 기준을 들이대던 박노자 교수가,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포옹하는 '관용'을 보이는 것,

그리고 마르크스와 레닌을 '현대의 보살', 사회주의의 실천을 '보살행'으로 보는 것에 대한 허동현 교수의 지적은 '합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불편했던 것은 박노자 교수의 논지가 아니라 오히려 허동현 교수의 논지였다.

나는 허동현 교수의 주장 중 몇몇 '표현'들을 정확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광수를 '일관된 민족주의자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주장에서 '합리적'이란 단어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광수의 '민족'은 무엇인가? 그리고 민족주의자는 제국주의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인가?

('민족'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그렇게 물고 늘어지는 '자유주의자'들이, 오히려 이럴 때는 '민족'이라는 말을 아주 편하게 사용한다.)

나는 오히려, 이광수의 민족이 '집단적 '우리'에 대한 수사'라는 박노자 교수의 견해가 더 합리적인 것 같다.

 

가장 거슬렸던 부분은 허동현 교수가 자주 사용하는 '시민'이라는 단어였다.

 

이광수의 시대에 자본은 노동을 착취하고 국가는 개인을 억압하는 폭력만 행사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오늘 우리의 시대에 존재하는 자본과 국가를 그렇게만 보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꿈꾸는 사회는 자본가와 노동자, 도시민과 농민, 남성과 여성, 정규직과 비정규직, 그리고 시민권자와 이주노동자처럼 지향과 이해를 달리하는 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다원화된 시민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이광수의 시대에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이는 '민족'이나 '민중'과 같은 집단이었지만, 오늘 제국에 맞서 우리의 양심을 지킬 이는 각성된 개체이자 주체로서 시민이 아닐까 합니다.

 

  냉전 붕괴 후 들이닥친 신자유주의의 세상에서 살안마기 위한 우리 정치세력의 해법은 너무도 다릅니다. 좌파는 민족을 방패로 민중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아직도 꿈꿉니다. 허나 우리 사회는 이미 생각과 지행과 이해를 달리하는 이들이 함께 살아가야 할 다원화된 시민사회로 진화했습니다.

 

허동현 교수의 견해에 의하면 계급 담론은 이제 낡고도 낡은 구시대의 유물이라는 것인데,

여기에 대한 나의 견해는 지난 번 책의 리뷰에 간단히 언급을 해놓았으니 생략한다(http://blog.yes24.com/blog/blogWriteReview.aspx?blogid=10ispain&goodsno=3295975)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허동현 교수가 '현상'과 '당위'를 착각(혹은 의도적 혼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에 있다.

2009년 대한민국 사회가 현상적으로 다원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우리 사회가 '다원화된 사회'라고 볼 수 있는가?

그리고 집단이 아닌 '개체이자 주체로서의 시민'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가? 우리 모두? 그렇다면 '민중'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물론 자유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개인'의 중요성, 그리고 집단의 폭력성을 간과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허동현 교수가 이야기하는 시민은 오히려 '개인'의 중요성을 부각시키지 못하는 모호한 개념일 뿐만 아니라,

합리적이고 양심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이들을 간단하게 배제해버릴 수 있는 폭력적인 개념이 될 수도 있다.

경제적인 문제로 기본적인 인성교육마저 받지 못한 사람은, 그렇다면 시민인가, 시민이 아닌가?

(간단하게 예를 들 수 있다. 가장 최근 부각됐던 용산의 일을 보자. '합리적' 시민의 입장이라면 그들은 화염병을 들고 옥상으로 가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들을 합리적이지 않게 만든 이들은 또 누구인가? 맞다. 계급은 낡고도 낡았다. 하지만 '낡았다'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분명 다른 말이다.)

 

서신을 주고 받는 이런 형식에는 일장일단이 있다.

여러 주제에 대해 서신을 주고 받는 형식이기 때문에 한 주제로 서로의 주장을 깊게 논박하는 것까지 기대하기는 힘들다.

이것이 일단.

반면 여러 주제에 대해 입장이 다른 이의 근거와 주장을 들어보고, 양 쪽의 의견 차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해볼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일장.

그러나 '길들이기와 편가르기'가 만연하는 오늘, 이 책의 일장이 일단을 충분히 상쇄시킬 수 있음은 분명한 것 같다.

1******n 2009.03.03. 신고 공감 2 댓글 1
리뷰 총점 종이책
토론이 '가능한' 사회를 위해
"토론이 '가능한' 사회를 위해" 내용보기
한국 사회를 흔히 토론이 없는 사회라고 일컫는다. 내 말을 부정하거나 반박하는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고, 나와 ‘다른’ 의견을 ‘틀린’ 의견으로 매도하는 분위기 때문이리라. 다른 나라라고 아집 강한 사람들이 없을까마는, 배울 대로 배웠다는 식자계층에서까지 반대편의 주장을 앞뒤없이 ‘깔아뭉개려’ 드는 모습을 볼 때마다 부끄러움이 앞서는 것은 사실이다.   그 중에서
"토론이 '가능한' 사회를 위해" 내용보기

한국 사회를 흔히 토론이 없는 사회라고 일컫는다. 내 말을 부정하거나 반박하는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고, 나와 다른의견을 틀린의견으로 매도하는 분위기 때문이리라. 다른 나라라고 아집 강한 사람들이 없을까마는, 배울 대로 배웠다는 식자계층에서까지 반대편의 주장을 앞뒤없이 깔아뭉개려드는 모습을 볼 때마다 부끄러움이 앞서는 것은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진보와 보수 진영을 둘러싼 논쟁은, 언제나 논리도 예의도 없는 막가파식 인신공격으로 더러워지기 마련이었다. 저마다의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이 신문이나 방송 매체를 통해 수구꼴통이니, 좌빨이니 하는 값없는 단어들을 내던질 때면 대한민국의 지적 수준이 의심스러워지기도 했다.

 

박노자와 허동현의 [길들이기와 편가르기를 넘어]는 그런 의미에서 참 값진 결과물이다. 진보와 보수 진영을 대표하는 학자들이 점잖게’, ‘논리적으로자신들의 의견을 제시하고 반박하고 또 그에 응답하며 토론을 이어나간다. 한국 근대사라는 동일한 소재를 놓고 박노자는 철저히 반자본주의, 혹은 반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반면, 허동현은 우직한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생각을 펼쳐 나간다.

이들의 토론 속에서 춘원 이광수는 힘의 논리에 따라 이리 빌붙고 저리 빌붙는 박쥐가 되기도 하고, 민족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불운한 애국청년이 되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 두 입장 모두 나름의 근거와 논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박노자와 허동현은 상대의 주장을 존중하지만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도 않는다. 한국 근대사라는 소재를 통해 두 사람의 가치관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판단은 독자에게 일임한다. 자신의 입장만이 진리가 아님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진보와 보수, 반민족주의와 민족주의의 양 극단에 서 있는 두 학자들 간의 제대로 된토론을 엿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차고 넘친다. 다만, 뒷부분으로 갈수록 초반의 팽팽한 토론 구도가 사라지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잃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책이다

s***a 2011.02.05.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길들이기'를 더 넘어야 할 우리 사회
"'길들이기'를 더 넘어야 할 우리 사회" 내용보기
역사는 쓰여진 자의 관점에 따라 존재했던 Fact가 다르게 전달된다. 이는 Fact가 바뀐 것이 아니라 평가 방법론 차이에 기인할 것이다. 결국 역사 쓰기에 ‘절대적 진실’ 추구는 어렵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누가 어떤 관점에서 출발하느냐에 따라서 재료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면 역사를 어떻게 봐야 할까. 여기 두 학자 박노자와 허동현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근대사 100년을 조명했다
"'길들이기'를 더 넘어야 할 우리 사회" 내용보기

역사는 쓰여진 자의 관점에 따라 존재했던 Fact가 다르게 전달된다. 이는 Fact가 바뀐 것이 아니라 평가 방법론 차이에 기인할 것이다. 결국 역사 쓰기에 절대적 진실추구는 어렵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누가 어떤 관점에서 출발하느냐에 따라서 재료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면 역사를 어떻게 봐야 할까. 여기 두 학자 박노자와 허동현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근대사 100년을 조명했다. 이들은 일전에 열강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라는 책에서 대담 형식으로 서로 다른 관점을 나눈 적이 있다.

길들이기와 편가르기를 넘어라는 이 책의 제목부터 다시 곱씹어 보면 두 교수의 관점을 대략 어림짐작 할 수 있다.
박노자 교수는 진보성향의 좌파학자로 주로 길들이기를 넘자고 주장하며 허동현 교수는 우파성향의 학자로 편가르기를 넘자고 주장한다. 이 두 학자는 역사에서의 절대적 진실은 없다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자기 주장을 통해 독자들에게 논쟁을 이끌어 내고 싶어 한다. 기실 우리 사회에서 논쟁이나 토론이라는 것은 익숙지가 않다. 그간 근현대사에 있어서 이데올로기나 이념으로 인한 얼룩진 피 빛에 대한 공포 때문일까. 과격한 역사의 흔적으로 인하여 너죽고 나살기식 기세 등등한 큰 목소리만 난무했다. 합리적 목소리마저 반대편의 마이크에서 새어나오면 큰 목소리로 제압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슬픈 근현대사

 

그 둘의 엇갈리는 논지 중 인상 깊었던 하나는 다음과 같았다.

책 첫머리에서 박노자 교수는 춘원 이광수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다.한때 톨스토이의 비폭력을 숭배하는 평화주의자로서의 모습을 지니고 민족주의자로서 조선의 독립을 외쳤던 이광수가 어찌하여 사회진화론에 빠져서 1930년대 일본이 일으킨 전장에 조선의 젊은이들의 참전을 독려했는가. 그의 입장 변화가 변절 내지는 훼절로 보아야 하는가에 관해서 두 학자의 의견은 갈린다. 박노자는 애초에 이광수는 변절이라고 할 절개가 있었는지 의문을 품으면서 조선의 예속 부르주아였던 계급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지적한다.즉 생존을 위한 실리적 계산은 있었으나 조선 시대 유교 정신을 표상하는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는 절개라는 측면은 존재하지 않았음을 주장한다. 결국 변절이라는 그 논의 자체를 처음부터 제지하는 보다 강력한 입장에 서 있다.
그러나 허동현 교수는 이광수를 일관된 민족주의자로서 봐야 한다고 한다. 이는 당시 국제정세 및 국내 상황을 고려한 이광수의 판단은 민족을 위한 친일(친일 내셔널리스트)’이 되어 일본을 배워서 결국 조국의 번영을 꾀한다는 논리를 갖고 있다는 것에 방점을 두려 하는 것이다.박 교수는 이런 이광수를 확신범이라고 칭한다. 즉 자기가 생각하는 바가 매우 굳건했음을 말한다. 어차피 역사가 갖고 있는 컨센서스는 이광수가 친일했다는 것이고 이에 대한 심증을 굳히는 역할을 하는데 있어서 박노자는 쉬운 입장이었을 것이다. 반면 허동현은 특정 인물의 친일이다 아니다라는 이분법적 잣대 자체가 당시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포괄적 역사 해석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나는 친일 행적의 이광수를 씻겨 내는데 있어서 허동현 교수의 논지에는 빈약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의 부속화 및 국가의 신격화와 같은 파시스트적 논리를 극복하지 못한 지식인 이광수를 당시 상황 논리로 애써 감싸 안겠다는 허 교수는 동일한 사안이 또 다시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똑같은 논리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냐는 중대한 오류를 낳게 된다. 허교수는 또한 박 교수의 엄격한 잣대로 이광수를 꾸짖듯이 변절한 공산주의자 김명식에 대해서도 준엄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광기의 시대를 산 지식인은 속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고 슬쩍 뭉치듯이 얘기한다. 맞는 말이다. 그 시대는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광수가 친일 자본의 주요한 광고매체가 되었음을 그 자신도 몰랐을까? 당시 대다수의 민중이 일제 및 조선의 자본계급에게 피를 빨릴 대로 빨렸다.그리고 나서도 모자라 민족을 위한 친일이라는 명목으로 개인들을 전장으로 가라고 독려하는 일에 그의 글재주를 마음껏 뽐낸 것은 제대로 된 양심적 지식인일까?

속도가 어찌되었든 역사는 개인의 인권이 신장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민족이나 국가라는 개념이 과연 개인의 행복을 담보해 주었던가. ‘국민이라는 개념을 미처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외세에 나라를 빼앗기고 허둥지둥 되던 시절.그 당시 지식인들이 개개인의 소중함을 인지 못했을 것도 가능하다. ‘국가가 있고 나서 개인이 있을 수 밖에 없던 시절. 당시 지식인들은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는 강한 국가의 모습을 먼저 떠올렸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인식의 한계를 백 번 인정하더라도 침략자가 일으킨 또 다른 전쟁에 내 자식, 내 이웃에게 미사여구에 불교사상까지 동원하며 출전 독려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지식인의 굴절된 펜은 정신을 멍들게 하므로 더 엄히 다스려야 하는 것이다.

뒷 부분의 논의도 이와 비슷하다. 국가와 민족의 개념이 우선이냐 아니면 우리 개개인의 인간적 권리가 우선이냐에 따라 두 교수는 매춘 여성의 문제, 대중문화의 문제, 종교의 문제 등등에서 다른 목소리를 낸다.

강대국이 민족주의 간판을 내리지 않는 상황에서 약소국인 우리가 먼저 내릴 수 없다는 허교수의 현실론적 관점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우린 그 반대편에 인간의 기본적 권리에 대한 부분은 상대적으로 너무도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한 면 때문에 100년 전 이광수가 보였던 확신범들을 내부적으로 잉태하고 있는 건 아닌지 두렵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허 교수의 우려보다는 박 교수의 목소리가 더 필요하다.다시 말해서, 길들이기'를 훌쩍 뛰어 넘어야 균형점을 찾아가지 않을까 싶다.편가르기의 우려는 아직도 우리에겐 기우다.



h***3 2010.01.16.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만나야 서로간의 생각을 전하고 이해하는 노력을 할 수 있다!
"만나야 서로간의 생각을 전하고 이해하는 노력을 할 수 있다!" 내용보기
현 대한민국은 이념,지역,계층 등 다양한 분류체계로 나누어져 있다. 이쁘게 그리고 좋게 말해 나누어진 것이지 갈기갈기 찢겨있는 모습이다...인간 본연의 분열주의도 있겠지만 일부 정치가들의 선동질에 놀아난 아픈 역사. 이는 단지, 과거의 기억에 그치지 않고 현재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국민들이 아직까지도 놀아나는 모습이다.남과 북이 만나야 서로 이야기하고 평화체제를 유지
"만나야 서로간의 생각을 전하고 이해하는 노력을 할 수 있다!" 내용보기

현 대한민국은 이념,지역,계층 등 다양한 분류체계로 나누어져 있다. 이쁘게 그리고 좋게 말해 나누어진 것이지 갈기갈기 찢겨있는 모습이다...인간 본연의 분열주의도 있겠지만 일부 정치가들의 선동질에 놀아난 아픈 역사.


이는 단지, 과거의 기억에 그치지 않고 현재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국민들이 아직까지도 놀아나는 모습이다.남과 북이 만나야 서로 이야기하고 평화체제를 유지하듯
또한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고 표현해야 남녀가 한걸음 진일보 할 수 있듯이 말이다. 박노자교수(이하 박노자),허동현교수(이하 허동현)두 학자가 주고받은 서신형식의 '길들이기와 편가르기'를 넘어서는 우선 그 자체로 유익을 줄 수 있다. 서로간에 대화파트너로서 인정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이전에 나온 우리역사 최전선 ,열강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 등의 서로간에 주고받은 저작물이 있었다.

 박노자의 글을 몇 권 보는데 조금은 자극적이고 자기규정적인 언어사용이 눈에 띈다. 언어사용 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생각 및 태도를 어느정도는 인지할 수 있는데 박노자의 글에는 아마도 '길들이기'로 바라보는 시선에서 나오는 '길들이기'를 거부하고픈 마음에 기인한 몸부림이아닐까? 이 정도로 이해하고자한다.

 

특히 이 부분은 두 교수가 처음 제기해서 서로간에 주고받은 '지식인과 친일'부분에 이런 제목을 쓴 의도를 알 수 있다. 아직까지도 대한민국에서는 친일에 대한 인식이 뭔가 불분명하고 자기 방식대로의 역사쓰기로 인해 서로간에 으르렁거리고 있는 실정이다. 과거가 비단 과거의 모습이 아닌 현재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전제로 박노자입장에서는 '길들이기'란 단어로 현 대한민국이 지나온 길을 규정하고 있는데 반해 허동현은'편가르기'란 단어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책에 대해 살펴보면 각기 다른 시선으로 한국역사를 바라보는 두 인물이 서로 서신을 주고 받으면서 한국근대사의 부분을 이야기 전개하고 있다.

박노자가 먼저 issue된 부분에서 자기의 생각을 밝히고 뒤이어서 허동현이 답신하는 형식이다. 박노자가 몰아치듯 공격하는데 시간의 간격을 두고 여러자료를 참고하여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허동현의 글에서는 뭔가 시원함 및 공격성은 없지만 차분하게 박노자가 제기한 것에 친절하게 설명하면서 안정적으로 자신의 논지를 이끌고 있다. 뭔가 형님이 아우에게 대하는듯한 느낌도 든다.

두 저자의 나이를 보니 박노자는 30대 허동현은 50대이니 글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세월의 지남과 깊이에서 나오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듯 하다.


박노자의 나이가 아직 30대라는 것이 흥미롭다. 2002년 '당신들의 대한민국1'을 읽었는데 그러면 당시 나이가 20대후반에서 30대초반이었을 텐데 그의 글을 읽다보면 참 많이 공부하고 많이 고민한 흔적들을 엿볼수 있다.

이 둘의 글을 통한 만남이 계속 유지되어 앞으로도 여러 글들을 통해 다양한 생각을 하게하는 장(場)을 마련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E

 

m*****e 2009.10.01.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