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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춘씨는 언제나 젊은 가슴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 책 전반에 걸쳐 열심히 노력해서 전개해나간 그의 이상적인 스토리가 그보다 훨씬 젊은 내게 일종의 경외감같은 걸 일으키게 한다. 솔직하고 치열하게 사유하는 사람. 인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 깊은 애정을 가지고 몸짓하는 사람. 사실 이 작품, 유령의 사랑은 소설이라는 장르로 보았을 때 그렇게 훌륭하지는 않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전혀 입체적이지 못하고, 의도가 너무 빤히 드러났으며, 중간중간에 펼쳐지는 여러가지 토론들은 거의 작가가 독자들에게 강론하는 것 같은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젊은 작가 손석춘의 인류에 대한 애정에 감동받았다. 기자 출신의 작가가 보통사람들의 가슴에 더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열심히, 정직하게 써내려간 소설. 나는 여느 잘 씌여진 소설보다 애정을 품고 이 책을 읽어나갔다.
칼 마르크스, 이 사람처럼 인류의 뇌리에 커다란 자국을 남긴 사상가가 또 있을까. 나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에 크게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인데도 세월이 갈수록 이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된다. 문학, 역사, 사회학, 경제학, 인간을 둘러싼 어느 학문에 접근하더라도 결국 어느 한 모퉁이에는 그가 서 있었다. 인간에 대해 진정으로 애정을 품고 있는 사람, 즉 약자에 대한 배려가 있다고 보여지는 이들은 모두 이 사람을 연모했다. 그것도 열렬히. 그가 많은 이들의 가슴에 던져놓은 불씨, 공산주의. 그것은 과연 다시 살아날 것인가? 민중은 가진자들의 억압에서 과연 진정으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손석춘씨가 소설을 통해 마르크스를 변호하고 그의 항변을 세상에 던지는 것이 어쩐지 안쓰럽고 조마조마하다. 그 불씨가 이어지게 될까.
한가지, 그의 소설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남성우월주의의 냄새가 나를 아프게 한다. 하인리히 마르크스, 칼 마르크스, 그리고 그의 사생아인 하인리히 데무트로 이어지는 마르크스 삶의 연계성. 그리고 한민주의 아버지, 한민주, 한혁으로 이어지는 한민주 삶의 연계성. 아들에서 아들로만 이어지는 삶. 오로지 아들과 아버지가 있을 뿐이다. 이 소설에서 여성은 언제나 헌신적인 내조자로 등장할 뿐이며-공산당원, 사회주의자라고 저자가 의도적으로 이름지워주긴 했어도 소설에 등장한 그들의 삶, 특히 헬레네 데무트의 삶은 절대헌신. 그 자체였다. 물론 딸들의 존재는 말 그대로 그저 존재했었다는게 전부이며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갔고 그것이 마르크스에게는 어떤 의미가 되었는지는 단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주인공이 막스에게 우리나라의 제사를 '죽은 조상과 교감하는 아름다운 전통'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실소를 금할수 없었다. 역시 저자도 남자이기에 남자의 조상을 위해 여자만 하녀처럼 일하는 행사를 아름다운 전통이라고 생각하게 되나 보다. 여자인 내가 볼땐 안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굉장히 추한 여성억압행사인데. 하지만 무엇보다고 압권인 것은 저자가 막스의 입을 빌어 성혁명에 대해 이렇게 말한 부분이었다. '그러한 의식을 가진 남자,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남성과 여성, 그들의 어린시절과 그들의 삶이 걱정스럽다...' 결국 양육을 위해 직업을 포함한 다른 많은 것들을 희생하려 하지 않는 현대여성들을 겨냥한 말이 아닌가. 이 부분은 거의 국민작가 이문열이 조선시대 여인의 입을 빌어 한국의 파렴치한 현대여성들에게 호통을 쳤던 명작 '선택'을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손석춘씨처럼 훌륭한 사회주의자의 뇌리에도 남존여비사상은 뿌리깊게 박혀있다는 사실이, 본인이 안 그럴려고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굉장히 아프게 했다. 이문열이 그러는건 하나도 안 아픈데, 손석춘씨는 아프다. 수천년에 걸쳐 이루어진 부르조아의 프롤레타리아 억압과 남성의 여성 억압은 조금도 틀리지 않다. 이 소설을 읽고 나는 그 사실을 더 아프게 깨달았다. [인상깊은구절] 더구나 그 '식민지'가 '해방'된 다음에 여성은, 그리고 그 여성의 몸에서 태어나는 남성과 여성들의 어린 시절은, 그리고 그들의 삶은 무엇이 될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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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것을 적어! 칼 마르크스! 그 위대한 노동계급의 혁명가는 자기 하녀를 평생 월급 한 번 주지 않고 착취했어. 게다가 하녀를 임신시켰지. 성적 착취까지 감행한 거야. 화대조차 주지 않은 지능적인 오입이지. 아니, 이데올로기적 축첩이지. 뿐만인 줄 알아. 하녀에게 태어난 아이를 친구 엥겔스의 아들로 은폐하며 평생 동안 모르쇄했지. 바로 그런 자를 존경한다구? (후략)"(31쪽)
이것은 극중 화자 한민주의 대학 후배이자 보수 신문사에서 일하는 류선일이 한 말이다. 이 소설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렇듯 오해로 인해 비판받는 맑스의 사생활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왜 맑스인가? 5월 한 달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국가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작품의 완성도로 봤을 때는 아쉬움이 많지만, 새롭게 형상화해낸 인간으로서의 맑스는 그 자체로서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진보적 신문사의 논설위원인 '나'가 우연한 기회에 대학 후배였던 류선일을 만나는 것을 계기로 맑스의 무덤이 있는 영국으로 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1부는 '나'가 사는 현실과 '나'가 느끼는 회의에 대한 것이다. 형식으로 보면 황당하기도 하나(이런 걸 굳이 포스터모던이니 하면서 옹호할 마음은 없다), 읽다 보니 이 장치보다 더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할 방법은 없겠다 싶기도 하다. 주제 전달의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갈등들이 너무 쉽게 해결되고, 프롤레타리아와의 사랑에 방점을 두면서 예니와의 관계가 소홀하게 된 것처럼, 함께 학생운동을 하면서 만난 아내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는 게 아쉽기는 하다. 암튼... 류선일과의 관계, 고수련과의 관계, 아들 혁과의 관계를 통해 지식인으로서 '나'가 해야 할, 할 수 있는 일들을 모색한다.
이전 세대와 이후 세대의 중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란? 이런 것들은 나의 질문이기도 하다.
암튼 '맑스 평전'을 기대하고 읽는다면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자신의 역할을 점검해볼 기회가 될 수는 있을 거라 생각한다.
다음은 나 자신에게 주는 메시지. "그리고 허무주의가 지배하고 있다고 했소? 천만에! 그렇지 않겠지요. 스스로 허무를 즐기는 사람들은 인류의 모든 시대를 '관통'하고 있어요. 그러나 언제든 허무주의가 한 시대를 온전히 지배하기란 불가능하오. 허무를 즐기는 부류 못지않게 인류의 내일을 열어가려고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간 사람들이 늘 존재했기 때문이오. 지금도 마찬가지라오. 누군가 허무주의에 몰입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면 되오. 다만 허무주의에 몰입하면서 공산주의는 결국 공상이었다는 따위를 명분으로 내걸지는 제발 말았으면 하오. 문제를 제기할 새로운 출발점은 왜 자본주의가 무르익은 국가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라는 점이오. (후략)"(289쪽)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소. 21세기는커녕 20세기 삶의 풍경도 난 모르오. 그러나 아직 인류가 자본주의 체제에 살고 있다니 하나만 묻겠소. 왜 당신들은 나를 밟고 가지 않으려는가. 왜 당신들은 내가 걸음을 멈춘 그곳에서 단 한 걸음도 더 전진하려고 하지 않는가. 왜 앞으로 걸어가지 않고 자꾸 뒤를 돌아보는가?"(322-323쪽)
[덧붙임] 이 책에 나오는 맑스 주변 인물들은 꽤나 정형화되어 있는 모습이다. 최하층 프롤레타리아에 속하는 그녀이지만, 공산주의자들이 생각하는 혁명적인 프롤레타리아는 아니다. 하긴 당시 여성노동자는 남성노동자에 비해 부차적인 존재로 여겨졌을 터이다. 특히 자본가에게 그렇게 여겨졌으므로, 아동노동과 여성노동은 모두 저임금을 면치 못했다. 사실 여성노동에 동정적인 당시 혁명가들조차 여성노동자에 대해 온정주의 이상의 무엇을 찾아보려 했는지 의문이다.
『자본』에서 불불노동(unpaid labor) 운운하며 노동자가 받아야 할 응당한 몫에 대해서 말할 때, 작업장에서 대우가 많이 좋아지긴 했어도 집에서는 그때 이후로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면, |
| 마르크스가 그의 비판자들에게 크게 흠 잡힌 게 하나있다. 그가 자신의 이상주의적인 사고와는 다르게 실제로는 하녀인 데무트를 경제적으로, 그리고 성적으로(!) 착취했으며,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까지 사생아로 만드는 도덕적 파탄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마르크스의 옹호자들은 상식적이게도, 그 자체로 자세히 서술되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맑시즘이라는 사상을 논박하는데 피상적으로만 알려져 있는 개인의 사생활 따위를 들먹여 공격하는 것은 비열한 짓이라고 대응해왔다. 그런데 평소에 사회주의적인 신념을 갖고 있고 마르크스를 너무나도 사랑한 저자 손석춘은 감정적인 비난마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제는 두 번째여서 쓰는데 자신이 붙은 소설을 통해 개인 도덕적인 차원의 마르크스까지 옹호하려 한 것이다. 그가 전공이라 할 수 있는 논리적인 글쓰기가 아닌 소설이라는 매체를 통해 이러한 대응을 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성적으로는 무시하는 게 최고인 감정적 대응을 똑같이 감정적으로 반박하는 데는 소설만한 것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으리라. 이왕 시작한 김에 저자는 소설적 장치를 십분 활용하는데 마르크스와 헬무트의 사랑이라는 실제 증명할 수 없는 로멘스를 만들어낸 것을 넘어서 죽은 마르크스를 불러내 자신을 강하게 옹호라며 작가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기교까지 부리까지 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고 싶은 말, 해야 될 말이 많은 데 비해 손석춘의 작가적 역량은 이를 뒷받침해주지 못하는 것 같다. 세부적으로는 인물묘사가 낯 뜨거울 정도로 평면적이고 전형적인데다가, 중간중간에 저자의 강론적 개입이 너무 심하며, 구성은 판에 박혀 있어서 고소설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그의 장기인 ‘따뜻한 순 우리말’ 글쓰기는 허술한 소설적 구성과 묘하게 뒤틀려, ‘아침 인사’ 같은 소설처럼 모자란 글을 기교로 때워보려는 가식적인 느낌을 풍기게 하고 말았다. 소설의 부실한 하부구조는 결국 저자가 의도하지 않았던 전체적인 가치관마저 무너뜨리는 경우가 많다. 이 소설이 딱 그러해서 작가가 평소 강하게 옹호했던 남녀평등의 가치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는 아들에 의해서, 헌신하는 어머니와 아내를 통해서 은밀히 부정된다. 소설이 작가를 배신하는 것이다. 특정 유명인의 팬이 그의 사생활, 특히 러브스토리를 다루는 주제로, 우연적이고 치밀하지 못한 구성과 자신의 신분이 그대로 드러나는 문체와, 그 집단이 원하는 어휘로 쓴 소설을 가리켜 ‘팬픽’이라고 한다. 이 소설은 '소설이 죽었단다.' 는 자조로 시작하는데, 손석춘이라는 괜찮은 기자이며 글쟁이가, 소설이라는 것을 써서 이런 부정적인 면만을 보여준다면 그것이 오히려 소설을 두 번 죽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마르크스도, 손석춘도 좋아하기에 읽는 것이 너무 괴로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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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쓰여진 손석춘의 글은 사실 소설이라기 보다는
그의 개인 체험이 녹아 있는 실화같다.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가끔씩 들다가도, 망설여지는 이유가 내 글을 읽고, 혹여라도 내 주변사람들이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로 비쳐질 까봐 걱정되어서 인데...
<유령의 사랑> 초반부에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리고 전문소설가가 아니라는 느낌이 드는 소설의 구조가 그러한데, 내용이 좋아서(특히 칼 마르크스, 데무트, 그리고 하인리히 마르크스의 일기들 부분은 그것만 가지고도 하나의 소설이 되겠다)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었다.
또 다른 손석춘의 소설인 <아름다운 집> 도 주인공이 연희전문학생으로 나온다. 그도 연대 출신인데...
나 나름대로 그의 이력과 소설속의 공통점을 찾아가며 읽고 있다. |
| 이렇게 말 할 권리가 나에게는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또한 도망치고 싶을 것이다. 그렇지만 저자가 이 두번째 소설을 통해서 용감하게 드러낸 현실처럼, 나도 쓰고 싶다. '아름다운 집'을 통해 드러낸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용서라는 저자의 면죄부가 다시 한번 여기서 발휘된다. 또 다시 너무 쉽게 용서한 것은 아닌가 싶다.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유령의 사랑'만큰 더 이상 어떻게 현실적으로 마르크스와 레니, 데무트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을까? 혁명적으로 사상적으로 얼마나 원대한 꿈을 꾸었던 사람이건, 사람이기때문에 또 그런 관계로 만들 수 밖에 없었고 그리고 또 자신을 자책하면서도 아무 행동도 취할 수 없는 나약함까지, 이것은 정말로 우리가 매일 볼 수 밖에 없는 현실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쉽게 용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가 현실이기 때문에, 인간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정당화 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 순간 진실이었다는 것은 명백한 현실이지만, 그렇다고 합리화의 명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책까지도 그들의 몫이다. 그렇다고 그의 정당한 고민의 결과들 조차 마르크스처럼, 그의 개인적 치부로 인해 평가절하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언제나 남에 의해 소설의 내용을 얻는다고 밝힐 수 밖에 없는 저자의 현실에 위로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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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학교에 손석춘씨가 와서 강연을 하신 적이 있었죠. 질의응답 시간에 누군가가 '마르크스주의를 접할 수 있는 쉬운 책을 소개해달라'라는 질문을 했었는데, 손석춘씨는 '멋적지만 유령의 사랑을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라는 답을 했었습니다. 자신의 소설을 추천하는 것이었으니 멋적었겠죠. 예전부터 제목과 내용은 들어 알고있었는데, 어떤 책이길래 스스로 추천한 것인가가 궁금해져서 읽어봤습니다. 처음 가졌던 기대는 '소설의 형식을 취한 마르크스주의 입문서'이길 바란 것이었습니다. '자본론'에서 볼 수 있는 경제학 비판이나 숫자들의 행렬은 나오지 않더라도,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적인 이념이나 기초를 소개해주는 그런 것이었죠.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기대는 완전히 어긋났습니다. 마르크스주의 입문서라기보다는 아직 우리 사회를 점하고 있는 레드 컴플렉스를 벗고 마르크스를 마르크스로 볼 수 있도록 이끌어줄 수 있는 소설이라고 보는 게 더 맞겠더군요. 어쩌면 그런 과정을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될 수도 있으니 입문서라 해도 그리 틀리진 않을 거 같기도 합니다. 어찌보면 자전적 소설이 아닐까싶기도 합니다. 주인공이 50대 신문사 논설위원으로 있는 사람이거든요. 30년 만에 만나 감정적 좌파짓은 집어치우라고 하는 대학 후배의 독설과 사랑인지 불륜인지 알 수 없는 청년노동자와의 인연, 신념과 현실이 부딪히는 것 같은 일상 속에서 주인공은 그 의문을 해소해 줄 수 있는 실마리를 찾기 위해 마르크스를 찾아 갑니다. 런던에 있는 그의 무덤 앞에서 끊임없이 마르크스와의 교감을 시도하던 중 운명처럼 소련 출신 소설작가 블라디미르를 만나게 되고, 그로부터 마르크스와 그가 사랑했던 헬레네, 그리고 그의 숨겨둔 아들인 하인리히가 썼다는 원고를 받아보게 됩니다. 이 소설의 2부는 그 세가지 원고를 번역해 옮기는 형식인데요. 마치 칼 마르크스의 일대기를 그리는 자서전인 듯한 인상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괴팍하고 급한 성격이었다고 왜곡된 마르크스의 인간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게 되지요. 중간중간에 혁명이나 자본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이 소개되기도 합니다만, 아주 미미한 수준이기 때문에 그리 의미를 둘 수는 없습니다. 3부에서는 귀국하기 전날 다시 마르크스의 무덤을 찾아간 주인공이 마르크스의 유령을 불러내어 그와 나누는 대화부터 귀국 이후 빨치산이었던 자신의 부모님을 재발견하고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가 여전히 유효함을 확인하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공상과학처럼 보이는 마르크스 유령과의 대화가 이 책의 핵심 주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실사회주의권이 붕괴한 이후 사회주의가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나 인간성과 사회성 사이의 갈등, 현 시대를 살고 있는 사회주의자들이 해야할 일 등등을 바로 이 장면에서 마르크스의 입을 통해 말해 주고 있거든요. 결국 이 책에서 손석춘씨는, 후배로 등장하는 류근일과 아들인 혁의 입을 통해서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주변에서 제기받은 문제일 수도 있는, 현 사회주의자 또는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그 해답을 주인공과 마르크스 그리고 마르크스 주변인물들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죠. 초반에 갈등을 겪었던 주인공과 아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혁명투사였던 선조들을 다시 찾아내고 같이 호흡을 하는 것으로 갈등을 해소하는 것은, 아마도 손석춘씨가 젊은 세대들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손석춘의 칼럼을 봐도 그가 사용하는 순우리말이 아름답게 보이는데, 이 소설에서 역시 쉴 새 없이 나와 읽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가끔은 너무 낯선 말이라 주춤거려지기도 하지만요. 자칫 SF처럼 보이고 지루해질 수도 있는 내용임에도 작가의 부드러운 문체와 공상과 현실을 이어주는 장치 덕분에 호흡을 끊지 않고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다만 마르크스와의 대화 부분이 너무 장광하게 이어지는 부분은 불편한 감이 있습니다. 주제를 극명하게 드러내보여주기 위하여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분명 소설로서의 긴장감이나 인물 사이의 갈등과는 관계가 없었거든요. 그래서인지 이 때쯤부터 이 책이 소설인지 사상 입문서인지 헷갈리기도 합니다. 어쨌건 마르크스를 알고 싶긴 한데 그의 평전을 읽는 것은 너무 부담스러울 때 또는 사회주의자들이 어떤 것을 해야하는가에 대한 고민의 단서를 얻고 싶을 때 읽어볼만한 책입니다. [인상깊은구절] 배고픈 가난뱅이들은 부자들이 빵 부스러기를 눈곱만큼 나눠주더라도 인생의 은인으로 여기게 마련이라오. 자신이 가난한 근본적인 이유가 부자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나눠주는 빵부스러기는 본디 자신이 마땅히 가졌어야 할 몫의 극히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기는 쉬운 일이 아니오. |
| 마르크스... 나 역시 Red 콤플렉스에 쌓여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사회운동에 대한 좌파적 냄새만을 풍기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마저도...말이다. 데무트와 예니를 사랑한 마르크스. 사랑에의 다른 형태라거나 그의 모순적 사랑으로 인해 그의 혁명과 사상에 대한 폄하를 할 의향은 나역시도 없다. 하지만... 마르크스를 사랑한 두 여자는 또 얼마나 힘든었을지, 두여자를 사랑한다고 했던 마르크스 역시 그러하겠지... 귀족의 딸에 대한 사랑과 프로레타리아에 대한 사랑을 상징하는 데무트. 조선시대 양반 아버지가 있어도 어머니의 신분으로 인해 사회적 승격을 하지 못했던 서얼들처럼 데무트와 마르크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나는 이순간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의 삶이 과연 그의 혁명적 사상과 맞아 떨어지는가...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진정성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말로만 외치는 사상의 공허함을 모르지 않았을 그에게 나의 어리석은 물음을 던지고 싶다. 민주와 선일로 대표되는 80년대 학생운동권. 여전히 좌파적 냄새를 풍기며 사회 편리에 편향하려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켜가지만... 외로움에 몸서리치는 민주, 우익신문사에 정치부 기자를 하면서 이제는 사회의식보다는 호의호식이 더 편리하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선일. 사회라는 구조가 누구에게나 다 편리하지는 않다. 누구나 다 적응해야 할 듯... 엄청난 규모와 억압으로 다가와 모두들 순응하고 살아가지만... 모두들 조금씩은 다른 꿍꿍이들을 품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이제 우리는 대화를 해야 한다. 좌파와 우파의 대화가 아니라, 사상에 대한 검증이 아니라 이 사회에 대해서, 그리고 그 속을 살아가는 우리에 대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