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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가 쥘 베른 서거 100주년이라고 한다. 사건사고로 얼룩졌지만, 나름대로 휴가를 맞아 들른 서점에서 쥘 베른 선집 한 무더기를 발견하곤 잠시 황홀해했다. '로마인 이야기'의 역자 김석희씨가 맡아 20권을 발간한다고 하고, 12권 정도가 이미 고개를 쳐들고 있더군. 갖고 싶은 마음과 휴가 중 읽을 만큼 사이에서 방황하다 두 질을 골랐다. 그중 첫째가 '80일간의 세계일주', 그리고 '15소년 표류기'다.
어린 시절, 계몽사 문고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 읽었던 기억, 들리는 소문의 칸트마냥 러시아인형처럼 정확한 생활습관의 필리어스 포그, 우왕좌왕 좌충우돌 열혈남아 파스파르투, '사티'라는 인도의 순장 풍습, 그곳에서 구출되는 인도 여인 아유디?, 은행절도범으로 오인하고 포그를 주야창창 쫓고 또 쫓는 런던경시청 순사 픽스... 이들 모두 되살아났다. 아, 감동감동.
'15소년 표류기'는 조금 달랐다.
원제는 '2년 간의 휴가'. 뉴질랜드의 체어맨 학교에 다니는 학생 14명이 휴가를 맞아 3주간 선상 유람을 즐기고자 계획됐다가 사고로 인해 남아메리카 인근의 하노버 섬으로 떠내려가 2년을 지들끼리 지내다 귀환한다는 게 대강의 줄거린데,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의 발췌 중역판 때와는 자못 다른 감흥에 휩싸이더라고.
미국인 고든, 프랑스인 브리앙과 자크, 영국인 도니펀, 백스터, 서비스, 가넷, 웨브, 윌콕스, 크로스, 돌, 쟁킨스, 아이버슨,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아무개, 이렇게 14명에 견습선원이자 모두의 딱까리 니그로 모코. 짜증이 좀, 확 밀려오는데...(물론 나 자신도 종 차별주의자가 아니라는 확신은 없다. 외국 한번 나가본 일 없는 생에서 외국인과의 조우조차 내게는 드문 경험. 조금씩 나이가 들면서 "아이들은 모두 예쁘다"는 명제에 십분 공감하게 되고, 전번에 만났던 방글라데시 사람들과 거리낌없이 접촉하고 아이들을 안아줬기에 안도했던 그 정도랄까.)
14살 이하 소년 15명이 모였는데(2년의 세월이 흘러 16살 이하가 됐지만), 설정 자체 탓에 19세기, 세계를 주름잡던 강대국 세 나라 국민들이다. 그네들은 조난당해 외딴 섬, 무인도에 다다르게 됐음에도 3주 떠나는 여행치고는 어이없게 호화찬란한 각종 생필품 덕분에 문명 생활을 고스란히 유지한다. 좀더 일렀던, 설정의 선구자 '로빈슨 크루소'에 비하면 이 얼마나 사치스럽냐는 말이다. 삽화에 의존해 볼작시면, 섬을 떠나는 그날까지 이 예비 신사들은 모자까지 챙겨 쓰고 있지요.
하는 짓들은 더하다. 미지의 섬에 머무르게 됐다는 순간의 공포가 가시자마자, 이들은 섬을 식민지로 삼는다. 식민지 개척에 관심없어뵈는 프랑스인 말고 숫적 우위를 앞세운 영국인들은 자연스레 섬을 식민지로 여기고 미국인은 영토 확보에 실패한 걸 서운해한다. 소년들은 1년 임기의 지도자를 뽑고 이전 생활들을 달라진 환경엔 아랑곳하지 않고 답습하며 선거를 앞두고 적전분열 양상과 암투까지 벌이는데...
좀더 어린 소년들이 바라는 새 지도자의 환상적인 모습에서는 좀 실소라도 나올까. "브리앙이 지도자가 되면 잔소리많은 지도자 고든 때보다 달콤한 과자를 많이 먹을 수 있을꺼야" 따위의...
(그러고 보니, 로빈슨 크루소도 프라이데이라는 주민 1명을 거느리고 섬의 총독으로 자처했지...쳇)
'어린이'라는 말에 담긴 함의로서의 '어린이'는 개념에 불과하다는 지적에 고개 끄덕였던 기억이 난다. 순진무구, 천진난만, 세상의 때라곤 묻어있지 않고, 아껴주고 사랑해주고픈 우리 '어린이'들은 '어린이'날에 기사 속에만 있다는 말씀. 어린이가 어른이의 판박이가 돼버린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고 해보지만, 어찌나 영악하고 그악스러운 존재가 그들인가요. 쥘 베른이 그린 세계 속의 소년들도 세상을 좀 덜 살았고, 힘이 약하고 경험이 박할 따름이지, 악당들에 대항해 거침없이 권총으로 심장을 쏴대는 모습은 결코 '어린이'스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징그럽더라는 게 요점.
'로빈슨 크루소'의 또다른 버전을 미셀 투르니외가 창조해냈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인데, 청교도주의가 만연했던 전작, 문명에 감화된 야만인과 야만세계를 그렸던 원작을 '방드르디...'는 뒤집어버린다. 시대 흐름상 그렇겠지만, 내겐 투르니외의 전복이 더욱 끌린다. 15소년 표류기의 또다른 버전이라고 할 수 있을 '파리대왕'에서 그려진 모습이 끔찍한 만큼 더 그럴 듯하듯이. '생존게임'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된 일본 만화도 그런 맥락으로 거들 수 있겠다.
뭐 어쨌든, 이럭저럭하여 재밌긴 재밌다. '해저 2만리'나 '달나라 탐험' 등등 다른 작품들도 땡기는 대로 읽어볼 작정인데,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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