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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에 대한 논의의 실효성은 인간 삶에 대한 믿음의 근원을 휘저어 그것의 유무에 따라 완전히 새로운 가치체계를 수립하여야 하는 것과 같은 혼돈의 문제를 안고 있다는 점에 있다. 과연 인간은 자유롭게 자신의 의지를 행사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해서는 일말의 회의(懷疑)조차 갖지 않았으며, 오히려 어떠한 외부의 조건이나 억압으로부터도 양보할 수 없는 인간 최후의 가치이자 존엄성에 대한 방호막이라 여겼던 나에게는 황당하기조차 한 것이었다 할 수 있다.
내가 어떤 사고나 행동을 하는 것이 내가 의식적으로 의도한 결정의 결과가 아닐 수 있다는 의혹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궁극적이고 본원적인 불신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내가 오늘 그녀(그)와 데이트 약속을 하기위해 전화번호를 누르는 것이 나의 주체적인 의지의 발현이 아니라는 말인가? 바로 이 저술은‘아니다!’라고, 단지 자신을 보호하여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환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마치 자신의 의지에 의해 스스로의 행동을 결정한다는 환상이 진화에 의해 선택된 인간 종(種)의 형질일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을 정신과 육체로 분리하는 이원론적 오류, 인간의 뇌에 정신과 영혼이라는 별개의 장치가 육신과는 분리되어 따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식 발상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는 함정이 있다는 것으로 근본주의적 종교관을 지닌 사람들 이외에는 오늘의 우리들은 모두 동의하는 지식이다. 결국 인간의 정신이란 것은 뇌의 화학적, 물리적 반응의 결과와 분리된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다. 일례로 만일“우리가 심장, 간, 소변을 의식적으로 조종해야 한다면 우리는 몇 분 안에 죽고 말 것이다.”라는 지적처럼 우리의 기관들이 자율적으로, 즉 우리가 의식 및 의지라고 부르는 것과 독립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인간이란 종은 아마 오래전에 자연선택에서 배제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이러한 환상을 진화의 과정에서 키워나갔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단지 뇌의 반응 결과에 불과한 것을 자기의지의 결과로 인식하는 것처럼, 인간이 도저히 통찰 할 수 없는‘설명의 곤경’에서 출현한 신(神)과 종교라든가, 인간에게 미리 허락된 수명이 한정된 것이라면‘이 세계’가 아니라‘저 세계’에서 계속 살수 있다는 환상은 인간 생존에 있어 전적으로 유용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 저술의 핵심 논지는 인격체로서의 인간과 그의 인격을 어떻게 정의할 것이냐의 여부는 “뇌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우리의 자의식, 욕망, 기대, 기쁨, 두려움, 공포, 꿈은 결국 진화에서 인류를 오늘날의 인류이게끔 만들어준 기관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현대의 신경생물학적 지식의 배경에서 정신현상은 뇌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바로 뇌의 표현 혹은 뇌의 발현에 불과하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유의지의 이념은 우리 뇌가 만든 것이며,‘자유의지’가 독립적 실재라고 가정할 만한 어떤 불가피한 근거도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 저술의 주장을 전개해나가기 위해 인용되고 등장하는 철학과 과학을 종횡 누비며 증거하는 이야기들은 지적 재미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책에 붉은색 밑줄을 긋다보면 전체가 붉은색으로 변할 정도가 되어버리니 말이다. 재미있는 인간 사고의 모순 례를 하나 소개하면, “‘나’의 다리가 아프다”라거나 “‘나는’ 두통이 있다”라고 우리는 말한다. 이는 생각하는 나와 다리 또는 두통을 느끼는 두뇌가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표현이다. 어떻게 나와 다리가 다를 수 있을까? 즉 “다른 모든 기관이 복종하는 사고와 느낌과 의지의 중심지인 상위의 ‘나’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이원론적 사고의 예인데, 인간은 이처럼 자신을 기만하는 거짓 프로세스를 진화시켜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식이란 뇌의 특정한 물리적, 화학적, 생리학적 과정에 완전히 속박되어 있다는 것인데, 여기에 책임이란 도덕적 의무의 논리를 들이댈 수 있는가하는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만일 살인자가 단지 뇌의 속박에 의해 다르게 행동할 수 없었음 주장하고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오늘 대다수의 인류사회가 수호하는 형법은 물론 사회의 기간시스템을 유지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일례로“소녀를 강간하고 죽인 살인자가 자신은 어떤 자유의지도 갖고 있지 않았고, 자신의 행동은 유전자와 뉴런과 호르몬에 의해 결정된 것일 뿐”이라 항변한다. 그럼 살해당한 소녀의 아버지는 살인자를 똑 같은 이유로 살해 할 수밖에 없었다고 강변할 것이고 이는 살인의 연속으로 이어질 것이다. 소위 ‘피의 복수’가 계속 될 것인데, 우린 무슨 근거로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자유의지 없음을 그것은 단지 진화적 유익론에 의한 환상이라고 주장하면서 어떻게 이를 해결할 것인가? 우리의 도덕관과 법제도를 지탱하는 논리가 설 수 있는 토대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이를 뒤집으면 인간은 다른 사람에 죽임을 당하지 않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살인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지만 그들로부터 살해당하지를 원치도 않는다. 그래서“우리는 제재를 통해 그 자신이 요구하지 않을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인간사회에서 공동생활을 하는데 필수불가결한 도덕을 발전시켜왔다는 것이다. 이러함에도 역시 인간이 야기하고자 하지 않았던 일에 대한 처벌은 여전히 인간의 무기력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결국 인간의 뇌는 여전히 원시적 단계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자유의지라는 실용적인 환상의 그늘이 해소되지 않았음을 반증하기도 한다. 그러함에도 자유의지는 단순히 우리가 삶을 꾸려나가는 데 도움을 주는 가설에 불과하지만, 온갖 종류의 트릭을 적용해 의미없는 우주에서 우리 존재의 무의미성을 잊게끔 해준 것에 대해 행복하다고 말해도 좋을 듯싶다는 저자의 자유와 존엄성의 저편을 그리는 긍정의 희망을 지니기도 한다. 이 저작은 사람의 이해와 관계에서 빚어지는 현상들, 사회제도와 도덕적 규범, 나아가 정치와 문화의 현상들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다각적인 모습을 성찰케 해주고, 보다 겸허하게 우리, 아니 나의 존재에 대해 사유하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미래의 인간사회와 제도의 방향을 새로이 궁구(窮究)케 하는 계기와 기반을 제공하기도 하며, 진화론의 계통발생사적 인간 본성에 대한 지적 탐구도 가능케 하는 진화론적 과학철학의 진수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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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이성을 넘어선 형이상학을 필요로 하는 호모 메타피지쿠스(Homo Metaphysicus)다. 근대 계몽 이성에 의한 주술의 소멸과 망상의 파괴는 결국 '미션 임파셔블'로 드러났다. 인간은 환상을 필요로 하는 동물이다. 뇌과학과 신경생물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인간의 본성은 상상과 환상과 믿음을 필요로 한다. 뇌는 행동하기 위해 진화했지 생각하기 위해 진화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뇌는 생존을 위해 진화했지 진리를 위해 진화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뇌는 물리적 증거가 없는 것들을 상상하고 믿기도 한다. 인간에게는 무척 유용한 믿음들과 긍정적인 환상들이 존재하는데 뇌는 이런 믿음과 환상을 좋아한다. 가령 '인간은 평등하다'와 '세계는 공정하다' 등과 같은 착한 믿음이 그러하다. 평등과 공정은 인간의 고안물이지 자연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반면에 '종교 유전자'나 '신 유전자'가 있다는 주장은 막연한 낭설에 불과하다. 오스트리아 진화생물학자 프란츠 M. 부케티츠는 자유의지가 환상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고 믿는 환상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결과이고, 인간의 생존에 기여하기에 인간에게 유용한 환상이라는 얘기를 들려준다. 자유의지가 없다는 말은 인간에게 자율적인 행동 능력이 없다는 얘기로 들린다. 하지만 저자는 자유의지가 환상이라는 사실을 밝혔을 뿐 자유의지라는 환상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저자 부케티츠는 '비과학적 사상은 결단코 사절!'이라는 모토로 살아가는 자연주의자다. 그런 저자가 자유의지가 삶의 의미와 자율성의 가치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기에 자유의지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모습은 공리주의자의 입장과 닮았다. 내 추측대로 저자는 공리주의자의 면모답게 인간의 본성을 강조하고,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도덕 시스템과 이데올로기와 종교가 우리 본성의 특수한 발현이라고 설명한다.
의지가 곧 자유의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의지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특정한 상황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태도 충동을 의미한다. 자유의지는 의지의 자율성을 부각한 개념이기에 기본적으로 책임 의식과 책임 능력의 바탕이 된다. 자유의지와 책임의식은 인간 사회의 도덕철학과 법률 체계와 연관되어 있다. 인간이 자율적인 판단으로 도덕 원리를 해치는 잘못된 행동을 했다면 사회는 그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이처럼 처벌과 형법 시스템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관념에 근거해 있다. 저자는 책 말미에 별도의 '용어 설명'에서 자유의지를 이렇게 정리한다.
"자유의지: 의지의 자율을 의미한다. 다양한 옵션 가운데 어느 하나에 대한 결정, 즉 내외적 요소들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고유한 의지에 의한 결정을 의미한다. 그러나 의지 그 자체가 아주 복잡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복잡한 생물·심리학적 요소들의 협력 작용의 결과이기 때문에, 좁은 의미에 있어서 자율적인 결정이란 환상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자유의지에 대한 생각은 환상적인 사고의 영역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그 생각은 도덕철학과 법률 시스템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221쪽)
나는 자유의지가 이른바 '적극적 자유'의 토대가 된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소극적 자유는 무엇을 해야만 한다는 외적 강제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즉 제약과 방해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삶을 의미한다. 반면에 적극적 자유란 자율적인 주체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실천적 자유를 의미한다. 자유에 대해선 그동안 수많은 이론들이 있어왔다. 가령 주관적 자유나 객관적 자유란 구분도 있었지만 나는 이런 표현과 구별이 그냥 무용지물이라고 본다. 아쉽게도 저자가 말하는 자유의 세 가지 지평도 그런 무용지물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생각의 자유, 결정의 자유, 행동의 자유라는 세 가지 자유를 언급하지만, 저자의 논의는 정치철학이나 윤리학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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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유의지를 위해 오늘도 어김없이 포지션을 만들어나간다. 그리고 말한다. 내게는 자유의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제도적 규제에 익숙한 현재의 우리들은 이 자유의지를 의심한다. 그리고 확신한다. 자유의지는 개인의 노력으로 거머쥘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자유의지의 정체성에 대해 의구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사유와 행동의 그 책임은 각 개체에게 있다는 것도 신뢰할 수 없다. 그럼, 우리 모두는 자유에 대한 의지를 어떻게 봐야 할까? 시대를 대표하는 비판정신 부케티츠는 <자유의지, 그 환상의 진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세상 모든 생물체에 비해 인간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다. 하지만 이것이 그저 환상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그는 이 책에서 자유의지를 주목성이 강한 무대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진화생물학적 잣대로 접근해간다. 부케티츠는, 자유의지가 사실은 환상이었다는 것이 진실로 판명된다 하더라도, 인류의 공생은 아무 문제없이 유지될 것이라고 말한다. 아니 어쩌면 환상은 생존에 유용한 도구가 되기도 한다고 한다. 더욱이, 인간의 의지가 무엇인지 명백히 하는 과정은 오히려 자기이해의 중요한 초석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항상 새로운 것에 적응해야 하며 창조적으로 행동을 취해야 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자기이해에 따라 도덕적 결정과 결과는 수시로 달라진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는 인간의 삶과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시작을 부정으로 했지만 끝은 긍정의 역할론을 부케티츠는 제시한다. 진화생물학과 사회학, 철학으로 설명되고 있는 ‘자유의지’의 정의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를 다시금 생각게 한다. 자유의지를 꿈꾸는 자, 그 자유 그리고 의지는 내가 아닌 제도에 의한다는 자, 이 모든 것들이 진정 환상에서 비롯됨인가를 확인하고 싶은 자에게 이 책을 권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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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free will)의 사전적 의미는 자신의 행동과 결정을 스스로 조절·통제할 수 있는 힘·능력이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전적으로 가지는지, 부분적으로 가지는지,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는지에 대해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자유의지에 관한 문제는 인과 관계에서 인간 자유와 자연 법칙의 비중을 얼마로 볼 것인가와 관련돼 있다. 서양 철학은 자유의지와 관련해 크게 양립가능론(compatibilism), 양립불가론(incompatibilism)으로 나뉜다. 양립가능론은 기본적으로 자유의지와 결정론이 동시에 성립될 수 있다는 입장이고, 양립불가론은 자유의지와 결정론 중에 어느 한 가지만이 성립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양립불가론은 다시 결정론(determinism), 비결정론(indeterminism)으로 나뉜다. 양립불가론적 결정론자는 이 세계는 애초에 모든 것이 결정됐고, 인간에게 자유선택의 여지는 없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자유의지에 관한 문제는 종교적, 윤리적, 과학적 함의를 품는다. 예를 들면, 종교 영역에서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것은 전지전능한 신조차 인간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윤리 영역에서 자유의지는 행위에 책임을 지우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과학 영역에서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것은 물리적 인과 관계가 인간의 행위와 정신을 전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 된다. 권위 있는 위치에 있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떻게 한 가지 일이 한편으로는 자신의 뜻에 부합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어긋날 수 있는지 알 것이다.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오늘 밤부터 너희 공부방을 정리해 주지 않을 거야. 이젠 너희도 스스로 방 정리하는 법을 배워야지"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지각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공부방에 가보니 곰인형이며 잉크며 불어 문법책이 온통 어질러져 있다. 이것은 어머니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다. 어머니는 아이들이 방을 잘 정리하길 더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볼 때, 아이들에게 방을 어지럽힐 수 있는 자유를 준 것 역시 어머니의 뜻이다. 이 우주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들을 창조하셨다. 자유 의지를 가졌다는 것은 옳은 일을 할 수도 있고 그른 일을 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자유 의지를 가졌으면서도 그릇 행할 가능성은 전혀 없는 존재를 상상하는 이들도 있지만, 저로서는 그런 존재를 상상할 수가 없다. 선해질 수 있는 자유가 있다면 악해질 수 있는 자유도 있는 법이다. 악을 가능케 한 것은 바로 이 자유 의지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사람들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을까? 악을 가능케 하는 것도 자유 의지지만, 사랑이나 선이나 기쁨에 가치를 부여하는 유일한 것 또한 자유 의지이기 때문이다. 자동기계의 세계는 창조할 가치가 없다. 하나님이 가장 고등한 피조물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행복은 사랑과 즐거움의 절정에서 자유로우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나님과 연합하며 이웃과 연합하는 데서 생겨나는 행복으로서, 거기에 비하면 지상에서 남녀가 나누는 가장 황홀한 사랑조차 물 탄 우유처럼 싱거울 것이다. 바로 이런 행복을 누리기 위해 인간은 자유로와야 하는 것이다. 몰론 하나님은 인간들이 자유를 잘못 사용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신 것이 분명하다. 만약 하나님이 지금 이 우주의 전쟁 상태를 자유 의지를 위해 - 즉, 하나님이 줄을 잡아 당겨야만 움직이는 꼭두각시들의 세상이 아니라, 자유 의지를 가진 피조물들이 진짜 선을 행하거나 해를 끼칠 수 있는 세상, 진짜 중요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 살아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 치러야 할 대가로 생각하신다면, 우리 또한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자유 의지가 어떤 것인지 이해한다면, 전에 어떤 이가 제게 던졌던 것과 같은 질문, 즉 "하나님은 왜 이처럼 쉽게 부패하는 재료로 피조물을 만드셨는가?"라는 질문이 얼마나 어리석을 것인지 알 것이다. 좋은 재료로 만든 피조물일수록 - 더 똑똑하고 강하고 자유로운 피조물일수록 - 옳은 길로 가면 그만큼 더 선해지지만, 그른 길로 가면 그만큼 더 악해지는 법이다. 소는 선하든 악하든 거기에서 거기이다. 어린아이는 소보다 더 선해질 수도 있고 악해질 수도 있다. 평범한 성인은 더 그렇다. 천재적인 성인은 더 그렇다. 초인간적인 영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선해질 수도 있고 악해질 수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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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자면 가장 큰 차이는 ‘정신’ 혹은 ‘의식’에 있을 것이다. 인간은 ‘정신적 존재’이며, 시간과 공간을 의식하고 구별하며 그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이러한 의식과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면 온전한 인간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통찰해보면 많은 부분에서 변화와 발전을 해왔지만, 그 가운데 개인의 ‘자유’를 확보하고 확대해 왔던 것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적어도 문명화된 사회의 현대인 대부분은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러한 생각은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철학자의 사유 대상이었고, 심리학의 주제였다. 현재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수 십 억년에 걸친 진화의 결과물이다. 이 점에 있어서 인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인체의 한 부분인 ‘뇌’ 역시 진화를 통해서 발달한 것이며, 뇌의 현상인 ‘정신’ 역시 진화로 인해 나타난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정신’이란 온전히 뇌 활동의 결과물에 불과한 것이며, (저자가 직접 언명하지는 않지만) 인간 정신의 궁극이라고 할 수 있는 ‘영혼’도 ‘실재적 존재’가 아니라 ‘이념’이며 ‘환상’일 뿐이다. 따라서 육체와 구별되는, 육체보다 상위에 존재한다고 여기는, 불생불멸의 정신적 실체인 ‘영혼’이라는 개념에 근거한 종교 역시 하나의 문화적 현상일 뿐이지 실제로 ‘신’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진화를 통해 생긴 능력에서 기인한 것이다. ‘문화’는 인간 행위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의 모든 행위가 진화의 결과로 생긴 본성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문화 역시 본성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문화는 인간 ‘본성적’ 능력의 표현이며, 그 능력은 인간이 수백만 년에 걸쳐 유전자와 환경 요소의 상호 작용을 통해 획득한 것’(p.47)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자유의지’가 문화적 산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저자는 인간의 ‘자유의지’라고 불리는 것의 실체는 없으며, 이것은 하나의 이념, 하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과학적으로 이미 다 밝혀졌으며, 단지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생물학은 정신 현상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결과물임을 설득력 있게 밝혀낼 수 있다는 의미에서 ‘정신’과학이 되었다.’(p.114)고 말한다. 우리는 항상 무엇인가를 ‘결정’하고 ‘선택’한다. 그리고 그 결정과 선택은 오직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랐다고 생각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자신에 대한 존엄성과 가치를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는 그렇게 ‘자유롭게’ 결정, 선택했다고 하는 것도 결코 자유롭게 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내면의 본성과 외부의 환경의 상호 영향과 조율에 의해 그렇게 ‘결정되고’, ‘선택되었다’고 말한다. 다만 이미 결정되고 선택되어진 후에 스스로 자신이 자유 의지로 했다고 의식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주장은 현실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것이다. ‘우리의 형법이 자유의지에 대한 이념에 의거해 있다는 사실’(p.27)을 보자.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결정권이 자신에게 있으므로 그 결과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개념에 근거해서 ‘형법’이 존재한다. 현재 법 체계에서는 자신의 행위를 자신의 의지로 결정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어린이나 정신이상자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만일 ‘정상적’인 정신의 소유자가 강간이나 살인을 저질렀다면 현 법 체계에서는 그에게 그것에 합당한 책임을 묻고 형벌을 가한다. 그런데 만일 자유의지가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자신의 범법행위가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라면 과연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저자는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비록 그것이 강간이나 살인과 같은 중대한 범죄행위라도 예외는 없다. 그러한 범죄행위도 내적 충동과 외적 상황의 결과일 뿐이지 자유로운 의사 결정에 따른 결과는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책임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책임을 사람들에게 묻는 것은 어떤 해결책도 될 수 없다.’(p.197) 또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인간의 문제들을 법률적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은 위험을 초래한다.’(p.197)고 저자는 주장한다.
‘우리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우리의 ‘사회성’은 도덕과 부도덕의 기본 조건을 제공해준다. 오직 사회적 존재로서만 우리는 책임을 질수 있다.’(p.184) 인간은 타인으로부터 범죄의 대상이 되지 않기를 원한다. 따라서 자신에게 해를 가하는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권리가 있다. ‘이제부터 우리는 강간범이나 살인범(도둑 등)에게 어떤 책임도 물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들로부터 괴로움당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p.191) 이 부분에서 저자의 논리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사회성’에 근거한 ‘도덕규범’이나 ‘법체계’에서 제제를 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범죄행위에 대한 이러한 저자의 생각은 범죄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묻기 이전에 '그를 압박한 ‘사회적 상황’을 고발해야'(p.199)고 말하는 데 이르며, ‘사형제도’가 왜 부조리한지 설명한다. 그렇다면 ‘자유의지’가 전혀 불필요한 것인가? 자유의지 역시 진화의 결과물이라고 했다. 진화를 통해서 발달한다는 것은 그것이 생존에 도움이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도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자유의지의 효용성까지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어떤 사회적 문제를 그것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시스템이나 상황을 살펴 따져보려고 하지 않고 손쉬운 방법으로서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그 근거로 ‘자유의지’를 핑계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우리의 의지가 자유롭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결코 모든 책임을 면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인 존재로서 우리는 도덕적 행동과 비도덕적인 행동에 대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p.209) 또 ‘비록 자유의지가 환상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를 주관적으로 어떤 감독관청보다 훨씬 더 나은 상태에 있게 할 것이’(p.212)라고 말하면서 전적으로 자유의지의 효용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범죄행위자’로부터 어떤 ‘형식’을 통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할 것인가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저자의 주장은 대단히 충격적이다. 인간의 결정과 선택이 행위 이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행위 후에 그 행위를 합리화하고 변명하기 위해 자신의 의지로 결정하고 선택했다고 말한다는 결론을 이끈 ‘리벳의 실험’은 다른 책에서 익히 읽었기 때문에 쉽게 납득이 가지만, 과연 그 실험에서와 같은 단순한 행위를 가지고 인간의 모든 행위에 확대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혹을 버릴 수가 없다. 또 강간이나 살인과 같은 범죄 행위가 자신의 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의 충동과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이끌려 벌어진다는 것에 대해서도 이것을 우발적 범죄에 적용하는 것에는 긍정하지만, 과연 수년, 수개월 동안 범죄를 계획하고 결국 실행한 경우에도 적용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역시 의혹을 버릴 수가 없다. 이 책은 200여 페이지 정도의 분량이 많지 않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 의식뿐 아니라 관계된 철학, 종교, 진화론 등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때문에 서술 형식이 압축적이고 때로는 뛰어넘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결코 쉽지 않은 책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독자는 필히 읽어봐야 하는 책이 아닌가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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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유의지를 '전혀' 갖고 있지 않으므로 어떤 결정을 내리는데도 전혀 자유롭지 않다."
함부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말을 글 첫머리에서 당당하게 들이밀고 있다.
우선 반항심에 책을 집어들고 호기심에 책장을 넘겼다.
입시위주의 교육을 받았으면서도 자율적인 생각과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자세를 무의식적으로 강요받아온 내게는 꽤나 반신반의하며 아니, 오히려 불쾌감을 느끼며 잡아 든 책이다.
정밀하게 꾸며놓은 환상의 세계에서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가 아닌 꿈을 꾸고 있는 거라는 사실을 대중적으로 인식시켜 준 영화, 매트릭스의 세계가 이 책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인생을 살면서 해온 하나하나의 선택이 자신의 의지가 아닌 사회에 순응을 위해 조작된 명령이라니... 기막히고 슬플뿐이다.
아직 이 책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과연 이대로 인간에게 앞으로도 자유의지가 없다면, 존재조차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결국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과연 자신안의 네오를 발견하여 매트릭스 세계를 통찰하고 벗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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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철학자이자 생물학자인 프란츠 부케티츠가 진화론적 관점에서 밝힌 자유의지에 대한 환상 - 다소 어렵게 들릴지 모르나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다는 점에서, 과학으로 신학을 반증했다는 점에서 고마운 책이다.
- 책 속에서 - 저자가 강조하는 결론은 바로 환상의 유용성이다. 그것이 단지 자기기만일 뿐일지라도 ‘환상은 전적으로 유용하다’는 것이다. 신은 만들어졌지만 그 만들어진 신은 인간에게 쓸모가 있다. ‘인간은 자유롭다’는 환상 역시, 인간의 삶에 유용하다. 반대로 말하면, 그 유용성 덕택에 현재의 인간은 그러한 이념을 갖고 사는 것이다.
핵심을 말하자면 이렇다. 진화의 화살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만일 그런 것이 존재한다 해도 그것은 어느 특정한 방향을 향해 날아가지 않을 것이다. 인류를 포함해 지구에 있는 생명의 역사는 직선이 아니라 “지그재그 모양”이다. 진화에서는 ‘우연’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화가 전적으로 “무법칙적으로”, 전혀 비인과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 가끔 특정한 방향이 강제될 수는 있지만 그래도 이후의 진행 과정을 미리 예측할 수는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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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으며, 뇌가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라는 얘기를 담은 책. 사실 유물론적 세계관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면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는 귀결이다. 뇌의 단백질 구조에 의해서 의식이 형성되는 것이니, 의식의 일종인 자유의지는 단백질의 물리 및 생화학 법칙에 종속될 테니까. 벤저민 리벳의 그 유명한 실험에 대한 얘기가 여기서도 등장한다. 사실 이렇게 길게 풀어서 할 얘기는 아니지만..... 이 책은 자유의지 역시 진화의 결과물이라고 얘기하고 있지만... 그것에 대해 정치한 이론을 보여주고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직관 뿐.... 아직 뇌과학이 그 정도 수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