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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이 두번째로 번역되었다. 첫번째로 소개되었던 [광기의 산맥]으로부터 시간이 꽤나 흐른 것 같은데, 출판사까지 바뀐 걸 보니 이 소설이 나오기까지 이런저런 시련이 있었으리라 짐작이 된다. 삼류 표지에 별 성의없는 편집, 로맨스 소설 전문 출판사라고 알려진 곳에서 나온 러브크래프트의 "한국 데뷔 차기작"은 이렇게 초라하다. 마치 그의 생전 미국에서 처음 받았던 대우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그 유사함에 위안이 될까? 애드거 앨런 포우는 대망의 단편 전집까지 멋드러지게 나오고, 동시대의 양대 산맥이었던 J.R.R. 톨킨은 말할 것 없는 최고의 상승세를 타고 있는 마당에 러브크래프트만은 다시 처음부터 커리어를 쌓아가야 하는 위치에 있는 것 같다. 하긴, 우리나라의 이 계열 시장이 좁기는 좁다. 큰 출판사에서 겨우 체면을 차린 로저 젤라즈니의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를 제외하고는 필립 K 딕이며 아서 클라크며, 영화가 나오기 전의 "반지의 제왕" 까지 제대로 성공한 책은 없었으니까. 어쨌든,
[찰스 덱스터 워드의 비밀]은 러브크래프트의 소설 중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번역된 [광기의 산맥]보다 더 그다운 테마를 갖고 있다. 비밀은 더이상 남극에 숨겨진 채로 저 멀리에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곁에 있다. 동네에 있는 묘지에 대해 들려오는 소문, 괴상한 노인이 뭔가를 연구하는 외딴 농장 따위의 여느 동네에나 흔한 가십거리가 하나씩 밝혀지면서, 정확히는 찰스 덱스터 워드가 자신의 조상인 조지프 커웬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조잡한 단서들은 서로 결합하게 된다. 그 기록마저 산산히 분해되어버린 어떤 광인의 과거를 복원하는 과정은 그것이 사실은 악으로 물들어가는 과정이었다고 하더라도 흥미진진하다. 어린 시절의 한켠에 자리잡은 환상들이 정말로 현실이 되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버려진 흉가의 전설 따위가 '정말로' 거대한 공포의 한 단서였다는 사실을 내내 인정하고 또한 설득하는 이 소설은 우리의 아득한 추억들을 불러와 모두를 이 이야기의 조연으로 참가시킨다.
물론 전작 [광기의 산맥]을 포함해서 러브크래프트의 소설 모두의 근간이 되고 있는 크툴루 신화는 여전히, 그리고 당연히 이 작품에도 짙게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인간의 지각과 사고 모두를 넘어서는 거대한-위대한 존재가 흘끗 모습을 드러내는 것 만으로도 얼마나 독자들을 불편하게 만들는지, 또한 그만큼 매료시키는지는 그의 책을 읽어 본 사람들만이 알 것이다. 그 이름밖에 드러나지 않고서도 소설 전체에 불안함을 드리우는 (마치 영화 '소름'에서 귀신이 차지하는 역할처럼) 요그-소도스의 존재는 놀랍지만, 그 또한 크툴루 신화의 일부에 불과한 것이다. 진실은 저 너머에, 그러나 인정할 수 없을만큼 너무나 거대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 찰스 덱스터 워드는 그 한 사례, 인간이 진실에 마주쳤을 때 힘없이 바스라져 버리는 한 예에 불과하다. 이 소설의 원제를 한번 읽어보라. The case of Charles Dexter Ward. 이 소설은 한글 제목처럼 그의 비밀에 관해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실에 마주친 뒤 수없이 파멸해 간 한 사례, the case, 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찰스 덱스터 워드의 경우". 당신의 주위에, 다른 '경우'는 없는가? Fortune
p.s: 변용란님께 감사드린다. 실력이든 뭐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욕심이기에. 러브크래프트의 시리즈가 아무래도 더이상 이어지기 힘들 것 같은 기분에 더이상의 리뷰를 쓸 기회도 없을 듯 하여 여기에 남긴다... 별 다섯은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러브크래프트와의 조우에 대한 아쉬운 작별인사 포함이다(과장은 아니다 그렇다고). [인상깊은구절] 자신이 발견한 것에 대해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흥분한 워드는 곁에 있던 두 인부에게 그 책을 보여 주었다. 책을 발견한 상황과 상태에 대한 그들의 증언이 완벽했으므로, 윌렛 박사는 젊은이가 맨 처음 기행을 시작할 때만 해도 미치기 전이라는 자신의 이론을 그 인부들의 발언이 뒷받침해 준다고 믿었다. 서류들은 모두가 커웬의 필체로 보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제목이 섬뜩할 만큼 특이했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게 될 지도 모를, 후에 오는 이에게' 라는 제목이었다. |
| 러브크래프트는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작가다. 외국에서의 평가와는 별개로 국내에서는 제대로 번역된 소설집조차 나와 있지 않다. 내가 러브크래프트란 작가를 알게 된 경위도 우연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전까지는 이름조차도 들어보지 못했던 이 특이한 이름의 작가가 현재까지도 하나의 문화 코드로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할 수 밖에 없었다. 공포와 환상의 접점에서 펼쳐보인 그만의 세계는 무수한 영화, 게임, 소설 등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비인간적이고 강대한 악마적 힘이 등장하는 그의 세계관은 얼핏 싸구려 대중 소설의 설정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안에 담긴 무언가가 인간의 근원적 공포심을 건드리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사실 악마적이며 반사회적인, 이른바 금기에 대해 학자적인 태도로 진지하게 섬세하게 접근해 나가는 그의 글쓰기는 독자들의 일반적 세계관을 기우뚱거리게 만들만큼 위력적이다. 거기에는 적절한 은폐와 암시를 통해 대상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작가의 교묘한 서술 방식 또한 한 몫을 단단히 하고 있다. 이 책에서도 공포 소설로서 정작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순간들에 대한 묘사는 직접적인 언급이 회피되고 있다. 공포 소설이되, 유혈도 시체도 보이지 않는 공포 소설. 더군다나 소설이란 매체 특성상 애당초 독자의 상상력이 발휘될 공간이 많을 수밖에 없다. 작가의 은근한 유도에 따라 독서에 집중하던 독자들은 어느 순간 스스로 만들어낸 공포의 환상에게 먹혀버리고 만다. 러브크래프트의 작품과 처음으로 대면한 한 명의 독자로서, 그래서 그만의 고풍스러운 공포로부터 독특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책의 주인공, 찰스 덱스터 워드는 고대 미술품과 건축물에 관심이 많은 청년이었다. 자기만의 연구에 매진하던 그에게 어느 시점부터인가 광기가 드러나기 시작하고, 워드 가문의 주치의인 윌렛 박사는 그 원인을 분석한다. 드러나는 청년의 연구 성과들은 흑마법과 악마술로 수렴되고, 그 정점에는 조지프 커웬이라는 조상이 있다. 논리를 마비시키는 각종 비술과 의식들이 난무하는 과정에서 윌렛 박사는 특유의 직관과 영감의 도움으로 점차 사건의 본질을 향해 접근해 들어간다. 그리고 그 끝에서 마주하게 되는 진실은... 추리 소설적인 구조는 이 소설의 백미라고 할만큼 멋지게 구성되어 있었다. 또한 찰스와 조지프 커웬의 과거를 서술하는 데 있어서도 서술자의 건조한 독백체는 소설과의 거리를 유지하게끔 하면서도 긴장감을 잃지 않게 했다. 소설에 등장하는 악의 존재에 대한 묘사도 단순히 배척하고 퇴치해야할 적이 아닌, 인간과 소통하고 또 다른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존재로 표현되어 있었다. 오히려 그런 존재와의 접촉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 본연의 악마성과 공포심들은, 이 책이 단순히 흥미위주의 대중 소설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동안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러브크래프트란 작가의 행적과 영향력에 꽤 감탄을 했었기에 적지 않은 기대를 가지고 독서에 임했는데, 전혀 실망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색깔이 자극적이고 대중적인 공포 소설 작가로만 한정지어진 것은 아닌가 싶어 아쉽기까지 했다. 작품 가득히 뿜어져 나오는 그만의 저력이 그의 다른 작품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아직 국내에 그의 작품들이 별로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우연한 기회를 통해 재능 있는 작가의 존재를 알게 된 독자의 마음은 조지프 커웬의 존재를 알게 된 찰스의 마음과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