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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음습한, 서글픈 현실마저 날려버리는,
"여전히 음습한, 서글픈 현실마저 날려버리는," 내용보기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이 두번째로 번역되었다. 첫번째로 소개되었던 [광기의 산맥]으로부터 시간이 꽤나 흐른 것 같은데, 출판사까지 바뀐 걸 보니 이 소설이 나오기까지 이런저런 시련이 있었으리라 짐작이 된다. 삼류 표지에 별 성의없는 편집, 로맨스 소설 전문 출판사라고 알려진 곳에서 나온 러브크래프트의 "한국 데뷔 차기작"은 이렇게 초라하다. 마치 그의 생전 미국에서 처음 받
"여전히 음습한, 서글픈 현실마저 날려버리는," 내용보기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이 두번째로 번역되었다. 첫번째로 소개되었던 [광기의 산맥]으로부터 시간이 꽤나 흐른 것 같은데, 출판사까지 바뀐 걸 보니 이 소설이 나오기까지 이런저런 시련이 있었으리라 짐작이 된다. 삼류 표지에 별 성의없는 편집, 로맨스 소설 전문 출판사라고 알려진 곳에서 나온 러브크래프트의 "한국 데뷔 차기작"은 이렇게 초라하다. 마치 그의 생전 미국에서 처음 받았던 대우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그 유사함에 위안이 될까? 애드거 앨런 포우는 대망의 단편 전집까지 멋드러지게 나오고, 동시대의 양대 산맥이었던 J.R.R. 톨킨은 말할 것 없는 최고의 상승세를 타고 있는 마당에 러브크래프트만은 다시 처음부터 커리어를 쌓아가야 하는 위치에 있는 것 같다. 하긴, 우리나라의 이 계열 시장이 좁기는 좁다. 큰 출판사에서 겨우 체면을 차린 로저 젤라즈니의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를 제외하고는 필립 K 딕이며 아서 클라크며, 영화가 나오기 전의 "반지의 제왕" 까지 제대로 성공한 책은 없었으니까. 어쨌든, [찰스 덱스터 워드의 비밀]은 러브크래프트의 소설 중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번역된 [광기의 산맥]보다 더 그다운 테마를 갖고 있다. 비밀은 더이상 남극에 숨겨진 채로 저 멀리에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곁에 있다. 동네에 있는 묘지에 대해 들려오는 소문, 괴상한 노인이 뭔가를 연구하는 외딴 농장 따위의 여느 동네에나 흔한 가십거리가 하나씩 밝혀지면서, 정확히는 찰스 덱스터 워드가 자신의 조상인 조지프 커웬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조잡한 단서들은 서로 결합하게 된다. 그 기록마저 산산히 분해되어버린 어떤 광인의 과거를 복원하는 과정은 그것이 사실은 악으로 물들어가는 과정이었다고 하더라도 흥미진진하다. 어린 시절의 한켠에 자리잡은 환상들이 정말로 현실이 되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버려진 흉가의 전설 따위가 '정말로' 거대한 공포의 한 단서였다는 사실을 내내 인정하고 또한 설득하는 이 소설은 우리의 아득한 추억들을 불러와 모두를 이 이야기의 조연으로 참가시킨다. 물론 전작 [광기의 산맥]을 포함해서 러브크래프트의 소설 모두의 근간이 되고 있는 크툴루 신화는 여전히, 그리고 당연히 이 작품에도 짙게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인간의 지각과 사고 모두를 넘어서는 거대한-위대한 존재가 흘끗 모습을 드러내는 것 만으로도 얼마나 독자들을 불편하게 만들는지, 또한 그만큼 매료시키는지는 그의 책을 읽어 본 사람들만이 알 것이다. 그 이름밖에 드러나지 않고서도 소설 전체에 불안함을 드리우는 (마치 영화 '소름'에서 귀신이 차지하는 역할처럼) 요그-소도스의 존재는 놀랍지만, 그 또한 크툴루 신화의 일부에 불과한 것이다. 진실은 저 너머에, 그러나 인정할 수 없을만큼 너무나 거대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 찰스 덱스터 워드는 그 한 사례, 인간이 진실에 마주쳤을 때 힘없이 바스라져 버리는 한 예에 불과하다. 이 소설의 원제를 한번 읽어보라. The case of Charles Dexter Ward. 이 소설은 한글 제목처럼 그의 비밀에 관해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실에 마주친 뒤 수없이 파멸해 간 한 사례, the case, 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찰스 덱스터 워드의 경우". 당신의 주위에, 다른 '경우'는 없는가? Fortune p.s: 변용란님께 감사드린다. 실력이든 뭐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욕심이기에. 러브크래프트의 시리즈가 아무래도 더이상 이어지기 힘들 것 같은 기분에 더이상의 리뷰를 쓸 기회도 없을 듯 하여 여기에 남긴다... 별 다섯은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러브크래프트와의 조우에 대한 아쉬운 작별인사 포함이다(과장은 아니다 그렇다고).

[인상깊은구절]
자신이 발견한 것에 대해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흥분한 워드는 곁에 있던 두 인부에게 그 책을 보여 주었다. 책을 발견한 상황과 상태에 대한 그들의 증언이 완벽했으므로, 윌렛 박사는 젊은이가 맨 처음 기행을 시작할 때만 해도 미치기 전이라는 자신의 이론을 그 인부들의 발언이 뒷받침해 준다고 믿었다. 서류들은 모두가 커웬의 필체로 보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제목이 섬뜩할 만큼 특이했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게 될 지도 모를, 후에 오는 이에게' 라는 제목이었다.
s*****d 2003.04.14. 신고 공감 1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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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러브크래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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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크래프트는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작가다. 외국에서의 평가와는 별개로 국내에서는 제대로 번역된 소설집조차 나와 있지 않다. 내가 러브크래프트란 작가를 알게 된 경위도 우연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전까지는 이름조차도 들어보지 못했던 이 특이한 이름의 작가가 현재까지도 하나의 문화 코드로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할 수 밖에 없었다. 공포와 환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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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크래프트는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작가다. 외국에서의 평가와는 별개로 국내에서는 제대로 번역된 소설집조차 나와 있지 않다. 내가 러브크래프트란 작가를 알게 된 경위도 우연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전까지는 이름조차도 들어보지 못했던 이 특이한 이름의 작가가 현재까지도 하나의 문화 코드로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할 수 밖에 없었다. 공포와 환상의 접점에서 펼쳐보인 그만의 세계는 무수한 영화, 게임, 소설 등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비인간적이고 강대한 악마적 힘이 등장하는 그의 세계관은 얼핏 싸구려 대중 소설의 설정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안에 담긴 무언가가 인간의 근원적 공포심을 건드리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사실 악마적이며 반사회적인, 이른바 금기에 대해 학자적인 태도로 진지하게 섬세하게 접근해 나가는 그의 글쓰기는 독자들의 일반적 세계관을 기우뚱거리게 만들만큼 위력적이다. 거기에는 적절한 은폐와 암시를 통해 대상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작가의 교묘한 서술 방식 또한 한 몫을 단단히 하고 있다. 이 책에서도 공포 소설로서 정작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순간들에 대한 묘사는 직접적인 언급이 회피되고 있다. 공포 소설이되, 유혈도 시체도 보이지 않는 공포 소설. 더군다나 소설이란 매체 특성상 애당초 독자의 상상력이 발휘될 공간이 많을 수밖에 없다. 작가의 은근한 유도에 따라 독서에 집중하던 독자들은 어느 순간 스스로 만들어낸 공포의 환상에게 먹혀버리고 만다. 러브크래프트의 작품과 처음으로 대면한 한 명의 독자로서, 그래서 그만의 고풍스러운 공포로부터 독특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책의 주인공, 찰스 덱스터 워드는 고대 미술품과 건축물에 관심이 많은 청년이었다. 자기만의 연구에 매진하던 그에게 어느 시점부터인가 광기가 드러나기 시작하고, 워드 가문의 주치의인 윌렛 박사는 그 원인을 분석한다. 드러나는 청년의 연구 성과들은 흑마법과 악마술로 수렴되고, 그 정점에는 조지프 커웬이라는 조상이 있다. 논리를 마비시키는 각종 비술과 의식들이 난무하는 과정에서 윌렛 박사는 특유의 직관과 영감의 도움으로 점차 사건의 본질을 향해 접근해 들어간다. 그리고 그 끝에서 마주하게 되는 진실은... 추리 소설적인 구조는 이 소설의 백미라고 할만큼 멋지게 구성되어 있었다. 또한 찰스와 조지프 커웬의 과거를 서술하는 데 있어서도 서술자의 건조한 독백체는 소설과의 거리를 유지하게끔 하면서도 긴장감을 잃지 않게 했다. 소설에 등장하는 악의 존재에 대한 묘사도 단순히 배척하고 퇴치해야할 적이 아닌, 인간과 소통하고 또 다른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존재로 표현되어 있었다. 오히려 그런 존재와의 접촉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 본연의 악마성과 공포심들은, 이 책이 단순히 흥미위주의 대중 소설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동안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러브크래프트란 작가의 행적과 영향력에 꽤 감탄을 했었기에 적지 않은 기대를 가지고 독서에 임했는데, 전혀 실망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색깔이 자극적이고 대중적인 공포 소설 작가로만 한정지어진 것은 아닌가 싶어 아쉽기까지 했다. 작품 가득히 뿜어져 나오는 그만의 저력이 그의 다른 작품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아직 국내에 그의 작품들이 별로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우연한 기회를 통해 재능 있는 작가의 존재를 알게 된 독자의 마음은 조지프 커웬의 존재를 알게 된 찰스의 마음과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n*****r 2006.03.23.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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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덱스터 워드의 비밀 The Case of Charles Dexter 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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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체상 경어는 생략했습니다 ───────────────────────────────찰스 덱스터 워드의 비밀 The Case of Charles Dexter Ward────────────────────────────[txt]publishing : 영언 문화사author : H.P. 러브크래프트 / 변용란price : 8,000 원──────────────────────────────────□ 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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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체상 경어는 생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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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덱스터 워드의 비밀 The Case of Charles Dexter Ward

────────────────────────────[txt]

publishing : 영언 문화사
author : H.P. 러브크래프트 / 변용란
price : 8,000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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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는 전반적인 스토리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읽기 전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주십시오.


단지 어떤 기록
이 소설은 기이하고도 어두운 것에 빠져 파멸의 길을 걷게 된 한 청년에 대한 이야기다. 학문에 대한 열정과 그 열정에 상응하는 지성을 지녔던 그는, 그리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였지만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고 남에게는 예의발랐으며 고미술품을 좋아하는 평범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지나친 애착과 필요 이상으로 재능을 발휘한 학구열은 결국 그를 죽게 만들었고 자신의 육신조차 온전히 갖추지 못한 채 한줌의 재로 북부 공원의 가족 묘지에 묻혀 슬픈 안식을 갖게 했다. 그의 이름은 찰스 덱스터 워드이며, 이 소설은 그의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원제 The Case of Charlies Dexter Ward. '객관적이고 사무적인' 느낌의 단어 Case는 마치 경찰서 강철 캐비넷 서랍 속 수많은 사건 보고서 중 하나라는 느낌을 준다. 우리말 제목에서는 '비밀'이란 단어로 번역되긴 했지만 원제의 느낌은, 적어도 나에겐, 일말의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단지 어떤 기록 - 그것이었다. 제목에서의 인상은 본문까지 이어졌다. 신문과 각종 서신, 증언 기록들을 오려 붙이고 때론 제 3자의 관점에서 혹은 전지적 입장에서, 하지만 여전히 담담한 말투로 마치 어쩔 수 없이 엿보이는 인물의 속내를 한치의 가감없이 그저 기술할 뿐이라는 듯 서술한 내용을 여기 저기 덧붙인 것이, 마치 콜라주 작품을 보는 듯 했다.

광인(狂人) 찰스 덱스터 워드가 정신병원에서 탈출해 행방이 묘연하다 - 는 초반의 사건에서 찰스 덱스터 워드가 어떤 인간이었고, 무엇이, 혹은 누가 그를 광기로 몰아넣게 되었는지 조사하는 과정과 조지프 커웬이라는 찰스 덱스터 워드의 사악한 선대에 관한 이야기가 맞물려 단편적인 역사적 기록에서 생생한 이야기를 넘나들며 재구성된다. 이같은 다각적 구성은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과 흥미를 유발한다. 하지만 과장된 구석 없이 건조한 문체와 대사가 아닌 나레이터의 독백으로 일관된 독특한(괴상한) 형식임에도 불구하고 여느 소설 못지 않은 몰입도와 이후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하는 이유는 단지 구성이 주는 매력 때문만은 아니다.

이 소설의 또다른 매력은 역사적인 소재와 고증을 바탕으로 한 '듯한' 치밀함에 있다. 온갖 흑마술과 주술, 가상의 세계관이 혼재하는 완벽한 허구의 세계가 앞서 언급한 각종 서신, 발췌자료, 증언들을 통해 견고한 현실처럼 느껴질 때 단순한 소설 속 공포는 생명을 얻는다. 미친 아랍인 압둘 알하즈레드가 썼다는 책 《네크로노미콘》을 비롯해 이 소설 속에서 언급, 인용되는 책과 인물들은 당시대에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이나 저서들과 동일선상에 위치하므로써 독자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헤매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누군가 '권위있는 저서'라며 둘러대면 누구나(보증된 권위에 약한 본인은 더욱 그렇다) '그런 책이 있나보다'하고 믿어버리는 것 처럼 말이다. 영화로 보자면 가짜 다큐멘터리(모큐멘터리)랄까. [이것이 스파이널 탭이다]와 [마이티윈드]에서 유머를 빼고 [블레어위치]를 스무배 쯤 농축시켜 섞으면 이 작품과 비슷한 느낌일 것 같다. 중간계의 역사, 언어, 문화를 완전히 창조해낸 위대한 작가 J.R.R. 톨킨의 '신화'와는 달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은근슬쩍 자신의 세계관을 끼어놓고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현실 아닌 현실'을 써내린 러브크래프트의 재능은, 그래서 그의 요절을 더욱 안타깝게 한다. 언령(言靈)이라고들 하지 않던가. 그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아서 더 많은 작품을 남겼다면, 그가 꿈꿨던 공포가 정말로 현현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외외로 온세상은 우리 것
왠지 쉽게 읽혀지지 않을 것 같다 - 라는 첫인상과는 다르게, 이 작품은 '의외로' 잘 읽힌다. 사건의 주된 미스테리조차 그 해답을 쉽게 추측할 수 있고 추측은 딱 맞아떨어진다. 예상을 벗어나는 파격도, 불길한 의혹도 남지않고 깔끔하게 종결되는 이야기는 공포소설보다는 차라리 탐정소설에 가깝지 않나 - 하는 생각마저 들게 만든다. 중간 중간 전지적 관점의 해설 역시 지나치게 친절해 어리둥절하기까지 하다. 짐짓 모르는 척 의뭉스럽게 말하고 있지만 모든 사건의 정황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마치 작가의 농담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런 점이 되려 현실에 대한 작가의 진담이 아닐까. 우리 역시 작가처럼 제 3자의 입장에서 여러 사건 '위에서' 볼 수 있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일 뿐 - 눈 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이라면 과연 현명하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인가. 아마 어느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사실을 수긍하지 않고, 이해불가능한 현실을 받아드리지 않을 것이다. 조지프 커웬과 앨런 박사, 그리고 미쳐버린 찰스 덱스터 워드가 동일 인물이란 것을 눈치챈(그것도 엄청 뒤늦게서야) 사람은 같은 사건을 겪고 듣고 본 수많은 사람 중 단 한 명, 윌렛 박사 뿐이었다. 똑같은 필체와 목소리, 어설픈 변장과 뚜렷한 증거, 갖가지 사실 관계가 뻔한데도 '도대체 왜 아무도 눈치 못채는 거야!'라고 말하게 만드는 답답함은 이 소설의 매력인 현실성을 견고하게 해주는 요소다. 동일 인물임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조지프 커웬이 150년 뒤에 환생했을음을 인정해야하고 그 사실을 인정하기 위해서 그와 그 동지들이 벌였던 기괴하고 사악한 주술과 연금술 역시 인정해야 하며 기타 모든 '비현실적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음.. 역시 지금의 미치광이 찰스는 150년 전 처형당한 조지프 커웬이 분명하군'이라고 쉽게 생각해버리는 쪽이 되려 '비정상'적이란 얘기다. 논리에 앞서는 것은 편견이고 분명한 판타지보다는 흐릿한 현실이 더 설득력있는 법. 판타지에 익숙한 독자들은 100년 가까이 된 이 소설에서 낯선 현실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완전히 현실적인 인물들의 사고를 통해 비현실적인 사건이 어떤 식으로 객관적 기록이 되는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하던 얘기를 마저하자면, 조지프 커웬을 위시한 오르니, 허친슨 같은 인물들이 초반의 기괴하고 사악한 존재에서 너무나도 전형적인 악당으로 표현되는 부분 역시 쉽고도 의외인 대목이었다. 웬지 뭔가 좀 더 심원한 이유가 있을 줄 알았던 그들의 야망이라는게 실은

"지하세계의 대군을 모두 불러일으키는 것은 1년 후면 충분할 것이고, 그 때가 되면 온세상은 우리 것이오."
(그들의 서신 중 일부 발췌)

.. 왠지 끝에 '모든 것은 은하제국군사령관 메가데스님을 위해! 음하하하하...'라는 말이 붙어야 될 것같은 느낌이다. 각종 금서와 고대의 잊혀진 주술을 통해 시체의 염분에서 망자를 소환할 수 있게된 자들이 위대한 자들과 현명한 위인들의 무덤을 도굴, 그들을 부활시켜 우주 역사상 누구도 가진 적 없었던 힘과 지혜를 모아 "세상을 우리 것"으로 만들겠다는 야망을 품게 됐다는 이야기는. 소설에 빠져 읽을 때는 전혀 모르고 있다가 이렇게 적어놓고 보면 상당히 유치하고 식상하다. (나 역시 지금 적다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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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che [클리셰] 프랑스어 n.
① (진부한) 판에 박은 문구, 진부한 표현(생각)
② [영국] 스테레오판, 전기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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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여기서 다시금 이 소설이 1900년대 초기에 나온 고전임을 들먹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류의 소설이 이전엔 없었다고 본다면 - 개인적으로도 상당히 궁금하다 - '죽은 사람을 그 시체를 통해 되살리고, 그들을 통해 막강한 힘과 지혜를 얻어 세계 정복을 꾀하는 (지나치게 오래사는) 사악한 집단'은 그야말로 획기적이고 충격적인 내용이였을 것이고, 이후의 수많은 문학, 예술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즉, 모든 클리셰는 진부하지만, 그 클리셰의 원형은 수많은 모방을 낳을 정도로 위대했다는 말이다. 이 작품이 그 시작점이고, 만약 이 작품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엑셀런트 어드벤쳐'(고교생 두 명이 전화부스 타고 과거로 돌아가 역사 숙제를 위해 위인들을 납치해오는 내용의 틴에이저 무비)나 R.O.D.(Read Or Die. 위인들을 DNA를 통해 초능력자로 부활시켜 책도둑 시킨다는 내용(틀립니다)의 일본 애니메이션)는 물론이거니와 "세계는 우리 것이다!"라고 외치는 악당들이 등장하는 모든 작품(어떤 매체든지)들을 접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수많은 작품들이 원형이 되는 걸작들을 답습하는데 그치고 또 하나의 걸작이 되지 못하는 지금, 이 작품에서처럼 모방과 재생산의 진부함 속에서 후일 위대한 식상함이 될 수 있는 새로운 세계가 튀어나와줬으면 한다. (무섭지만)

어둡고 기괴한 분위기였던 터라 '절대 해피엔딩은 안되겠다'싶었던 이 작품은 의외의 '세계정복' 악당만큼이나 의외성 만발의 엔딩을 선보이는데 그건 (나름대로의) '해피엔딩'이다. 아까도 언급했듯이 어떠한 불길한 징조나 의혹 하나 남지않는 깔끔한 엔딩은 권선징악, 인과응보, 일사천리. 원래의 선한 찰스의 시체를 찾아 안식을 찾게 해주고, 커웬의 작업실에서 찾아낸 사악한 주술을 역으로 이용, 사악한 찰스(이자 커웬)을 소멸시키는 전개는 참으로 착하다.

아직까지도 궁금한 것이 마테리아 18번의 정체. 윌렛 박사를 구해주고 수수께끼를 풀 단서를 남기고 프라하와 트란실바니아에서 계략을 획책하던 조지프의 동료, 오르니와 허친슨을 무로 돌려보낸(실은 대폭발로 날려보낸) 그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놓친 것이 있나 다시 한번 책을 훑어봤지만 전혀 알 수 없었다. 7-8세기 경 살았던 초창기 라틴어를 쓰는 영국 남자라니. - 아더왕인가(...)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난 뒤 '어 혹시 그땐 그래서?'라는 생각에 성급히 서두 부분을 펼쳤다. 표면적으로 찰스 덱스터 워드가 병원을 탈출한 뒤, 완독한 독자와 작가 만이 알고 있는 비밀 얘기로는 조지프 커웬이 윌렛 박사의 주문에 의해 망자의 염분으로 화한 뒤- 윌렛 박사의 표정은 "이상스럽게 훨씬 편한 표정"이었고, 경비원들이 방문을 열었을 땐 바람이 "방안 가득 자욱한 청회색 먼지구름을 흩으렸다"고 책의 서두에 쓰여있었다. 작가의 재치랄까. 평면적인 이야기 구조를 벗어나 사건의 전후 관계를 뒤집어 서술하고 트릭 혹은 힌트를 심어놓은 지적인 유희는 이 책을 읽는 기쁨 중 하나이다.

앞에선 '공포소설치고는 너무 깔끔하다'거나 '악당이 너무 전형적'이라는 등 이런 저런 트집을 잡았지만, 그건 배부른 투정일 뿐이고 이 작품은 정말 빠져들어 읽었었다. 대사 하나 제대로 쓰여있지 않은 단지 어떤 기록같은 느낌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생생한 현실감과 흥미를 지닌 점은 감탄할 만 하다. 어둠 속에서 꿈틀대는 인간과 다른 어떤 것의 욕망, 한 젊은이의 지나친 집착이 낳은 파멸로의 행보를 담은 이 책은 햇볕이 드는 곳에 사는 어느 누구도 봐서는 안될 책이며, 동시에 누구라도 봐야할 책이다.
러브크래프트의 모든 작품들은 그가 세운 거대한 세계관을 바탕에 두고 있다고 한다. 거대한 신들은 인간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고 다만 무신경하거나 적대적이며 인류는 그저 심술난 아이의 발밑에 있는 연약한 개미에 불과하고 전능한 아이의 관심 밖에서 언젠가 뭉개질 날만 기다리며 아둥바둥 생존해 있을 뿐이라는 그의 절망적인 우주관은 섬뜩하기 그지 없다. 맞서기는 커녕 이기적인 신들의 존재 끝자락과 마주치는 것 만으로도 정신이 붕괴되어버리는 인간들이 각각의 시대, 공간에서 보여주는 이야기들 - 이 그의 작품 세계라고 하는데 러브크래프트의 작품 중 이 [찰스 덱스터 워드의 비밀] 말고는 접해 본 적 없는 나로서는 '그런가보다'할 뿐이다. 그의 다른 작품들 역시 [네크로노미콘]처럼 허구의 필모그래피인지도, 이것이 유일한 그의 저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없는 세계를 창조해 그 안에서 또다시 창작활동을 한 러브크래프트는 확실히 '혼자만의 세계에 갇힌' 불행한 인물일지 모르나 수많은 후학 작가들과 독자들에게 없었을지도 모를 세계의 면면을 창조해 보여줌으로써 소설 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보인 위대한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조지프 커웬에 관련된 옛 편지 중엔 이같은 인용문이 있었다.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까? 나는 나의 싸우는 모든날 동안을 참고 밝은 날이 오기를 기다리겠나이다』 - 욥기 14장 14절

H.P. 러브크래프트는 인간으로써는 47살의 나이로 불행한 생을 마감했으나 작가로써 영원히 사는 법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작가란, 그의 글이 읽히고 또 읽히는 동안에는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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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03. 14

[소비전대 ~Mad Tea Party] all rights reserved.

 

s*******l 2008.05.17.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