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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돌아가는 세상을 보면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할 수 가 있다. 특히 나라를 통치하는데 있어서 국민과
혹은 다른 정파와의 소통은 그 나라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는지 여부를 결정짓는다. 말로는 소통을 앞세우지만
실제로는 오만과 독선으로 전횡을 일삼을 때, 그 자리에 끼어들 수밖에 없는 것은 호가호위 하는 자 들이다. 결국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은 물론 나라 전체를 혼란에 몰아 넣음을 우리는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다. 그렇다면 전통시대의 군주들은 어떤 방법으로 소통을 하였을까?
조선은
우리가 알다시피 문치국가였다. 이는 공론을 얻기 위해서는 말 또는 글을 통해서 정치담론을 형성하고 사대부들의
동의를 얻는 과정이 필요했음을 뜻한다. 이를 문자정치라 하는데, 문자라는
말은 조선시대 시문과 저술을 총칭하는 개념으로 쓰인 용어이다. 이러한 문자정치를 가장 확실하게 실행했던
군주가 바로 정조라고 한다. 정조가 즉위한 후, 그의 기반은
확고하지 못했다. 정조가 통치하는데 있어 근간이 되는 두 가지 문제,
즉 영조가 정한 정통의 문제와 생부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개인적인 입장은 언제든지 당쟁으로 발화할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이처럼 갈등의 소지가 있는 현안을 군주의 권위나 물리력이 아닌 정치적 담론 형성과 소통을 기반으로 해결하려
했다고 한다. 척신과 권신에 의지하지 않고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하여 문학을 이용한 것이다.
정조는
자신의 학문적 능력을 바탕으로 글을 통해 담론을 생산하여 신하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그들을 자신의
정치적 이상에 맞게 변화시키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군주가 문자정치를 펼치려 해도 이에
호응하는 신하가 없으면 헛일이다. 다행히도 정조시대에는 신하들 역시 국왕의 담론에 호응하여 자신들의
정치담론을 형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정에 참여했다고 한다. 이
책은 정조의 이러한 문자정치에 중요한 역할을 한 신하들이, 어떻게 정조와 정치담론을 형성하고 또 공유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정조의 정통성을 수호한 김종수, 사도세자의
숭봉사업을 실행한 채제공, 정조의 문치를 글로 보필한 이복원 등이 바로 그들이다.
정조
즉위에 큰 공을 세운 김종수는 정조의 정치적 정당성을 대변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자신이 속한 노론
청류의 정치적 입장을 강경하게 견지하면서도 척신을 배제하고 청류에 바탕을 둔 정치를 주장한 그는, 정조의
국정에 협조하면서 정조의 정통성을 수호했다. 특히 정조 즉위를 방해한 세력을 척신으로 규정하여 그들을
징토한 기록인 [명의록]을 편찬하는데 이론적 뒷받침을 제공했다. 정조는 조정에서 의리를 천명할 일이 있을 때마다 김종수의 글을 활용했으며, 김종수
역시 정조의 정통성을 수호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원칙론을 주장했다고 한다.
채제공은
갑술환국과 무신란을 겪으면서 남인이 정파로서의 세력이 미약해졌을 때, 시사를 결성하고 청남담론을 형성하여
남인세력의 재건에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영남 남인과 결속하여 영남 만인소를 이끌어 내
정국전환의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채제공이 영의정에 제수되자 사도세자를 무함한 역적에 대한 처벌과
의리제방을 엄격히 할 것을 상소하자, 정조는 이를 공개하지 않고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는 채제공이 사도세자 숭봉의 의리주인 역할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이후 채제공을 화성성역의 총책임자로 임명하여 화성 성역과 사도세자 숭봉작업을 추진하도록 했다. 정조는 그러면서도 의견이 다른 신하를 보호하는 데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채제공의
처벌을 주장한 김종수의 상소에 금등문서를 공개하여 채제공과 김종수 모두를 보호한 것이 단적인 예이다.
이러한
정조의 문자정치는 전문관료들이 있었기에 가능하기도 했다. 정조가 자신의 구상을 간단한 글로 남기면 신하들은
이것을 더욱 구체적으로 구현하였는데, 이복원과 그의 아들들이 이러한 역할을 담당한 대표적인 신하들이었다고
한다. 이원복이 속한 정파는 소론이었지만, 그는 소론 본류의
정치담론을 생산하지 않고 전문관료의 길을 선택하여 정조의 문자정치를 구현했다.
정조는
신하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한 군주이다. 그는 국정을 운영하며 어찰을 통해 양반사대부의 동의를 얻으려 했으며, 정조의 신하들은 이러한 정조의 뜻에 따라 적극적으로 정치담론을 생산했다. 아마
이것이 조선후기 문화의 꽃을 피우고 실학이 융성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정조시대의 이러한 문자정치는 현재 우리가 처한 현실을 돌아보게 만들기 충분하다. 현대사회는 각 계급 혹은 정파의 이익이 다른 가운데서 뜻을 하나로 모아야 국정을 원활하게 운영할 수 있다.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우리사회는 소통이 불통된 지 오래이다. 정치인들은 말로는 소통을 외치지만 소통이란 말로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독선과 오만을 내려놓고 상대방의 의견에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소통은 시작될 수 있다. 지금의 우리는 소통이 가로막힌 나라가 어떻게 되는지를 두 눈으로 보고 있는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