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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전까지는 볼링을 열심히 쳐서 나름 회사의 대표선수로 전국대회에 출전도 해보았습니다. 부서 직원들의 친목도모에 많은 도움을 얻기도 했습니다. 볼링이 좋은 점은 다 같이 즐길 수도 있지만 혼자서도 즐길 수 있는 운동이라는 점입니다. 혼자 볼링장에 가는 경우 레인사정에 따라서는 모르는 사람들하고 어울려 칠 수도 있는데 그게 싫으면 레인이 비는 시간에 가면 됩니다. 그래서 저도 밤 10시 경에 볼링을 치러 다닌 적도 있습니다. 이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나 홀로 볼링>이라는 제목만으로 읽기로 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볼링 얼론 사회적 커뮤니티의 붕괴와 소생’이라는 부제에 관심을 주었더라면 다시 생각해보았을지도 모릅니다. <나 홀로 볼링>은 정치학자 로버트 퍼트넘이 변하고 있는 미국 시민사회의 모습을 조망하고, 그런 변화가 일어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건강한 시민사회를 재건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설파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민사회의 변화란 정치참여, 단체 활동, 종교적 참여, 심지어는 직장은 물론 일상생활에서의 사회적 연결고리가 느슨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혼자서 볼링을 치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것인데, 이를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개인이 원자화되고 있다‘라고 비유합니다. 저도 점점 그런 성향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만, 이런 변화는 미국사회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나타나고 있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자는 미국사람들의 사회적 연결고리가 취약해지고 있음을 다양한 사회학적 조사의 결과값이 어떻게 변해왔는가를 통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려 719쪽에 걸쳐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하여 방대한 자료들을 인용한 점도 대단하다고 보았습니다. <나 홀로 볼링>은 모두 5부로 구성되었습니다. 1부 서론에서는 미국사회의 성격변화를 사회적 자본이라는 개념으로 분석하는 것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사회적 자본이라는 것은 인적, 물적 자원에 더하여 사회적 네트워크가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이런 사회적 자본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를 측정하는 연구를 말합니다, 2부 ‘시민적 참여와 사회적 자본의 변화경향’은 가장 공적인 영역이라 할 정치와 공공업무에서의 미국인의 참여도가 어떻게 변해왔는가를 살피는것에서 시작하려 클럽과 지역사회 단체, 종교단체 그리고 노동조합과 같은 공동체에서의 활동, 그리고 일상적인 삶에서의 인간적인 유대 등의 변화를 논합니다. 20세기 중반까지는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미국시민들이 후반들어 시나브로 흐름이 역전되어 공동체에의 참여가 시들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3부 ‘사회적 참여의 쇠퇴 원인 ’과 4부 ‘사회적 자본의 기능’에서는 원인을 분석하고, 쇠퇴의 결과를 정리하였습니다. 마지막 5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는 이런 현상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우선은 1. 문제를 정확하세 파악하고, 2. 역시 교육이 변화의 첫걸음이 될 수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3. 작은 커뮤니티가 되는 직장에서의 변화를 모색하고, 4. 필요하다면 도시설계를 수정할 필요도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5. 종교 역시 변화가 필요할 것이며, 사회적 참여가 쇠퇴하는데 기여한 바 있는 매스 미디어와 인터넷을 활용하는 방법도 모색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문화와예술, 정치와 정부까지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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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에 처음 출판된 이후로, 아니 그 전에 저자가 ‘사회적 자본’과 관련된 논문들을 발표하면서부터 학계와 사회운동 진영에서 읽히던 책이 '드디어' 한국에서도 번역이 되었다. 지난 10여년 간 시민사회의 부흥과 침체를 경험해온 한국에서는 이미 한국 시민사회의 기형성(abnormality)에 관한 논의들이 계속 있어 왔지만, 이번에 퍼트넘의 『나홀로 볼링』이 번역, 출판됨으로써 다시 한 번 이 문제를 되돌아보는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것같다. 이 책은 뒷 표지에 소개된 바와 같이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다. 쓰인지 얼마 되지 않은 현존 학자의 책이지만, 그만큼 풍부하고 통찰력 있는 저작이다. 내 생각에 이 책은 제러미 리프킨의『유러피언 드림』과 같이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유럽과 비교했을 미국 사회의 가장 큰 차이점으로 흔히 꼽는 것이 개인주의이다. 미국 역사의 시작이 본국에서 쫓겨난 순례자들이 광활한 북미 대륙에 정착하면서 시작된 것이고 보면, 자기 것에 대한 이들의 애착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좁은 땅에서 아웅다웅 살아온 유럽인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데서 자신의 존재감과 안전을 확인했다면, 넓은 땅에 울타리를 치고 그곳을 넘어오는 자들을 적으로 간주하는 미국인들은 남에게 간섭 받지 않는 데서 그러한 느낌을 찾았다. 그렇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미국 사회를 이끌어온 힘은 그러한 개인주의였다. 그리고 그러한 개인주의 때문에 사회적 참여라는 것이 큰 의미를 갖게 되었다. 미국 사회를 보면, 커뮤니티를 empower할 수 있는 각종 소규모 자생단체들이 잘 조직되어 있는 듯하다. 이 책에서 상세히 다루는 PTA(parent-teacher association, 학부모회)는 두말 할 것도 없고, 성, 성적 취향, 직업, 공통의 관심사 등으로 조직된 크고 작은 사회조직들이 잘 발달되어 있다. 직접 참여가 불가능한 사람들은 후원금을 통해 이러한 사회활동에 참여한다. 미국의 NPO들은 주로 대기업, 중소기업, 재단, 지역단체, 개인 등의 후원금으로 운영된다. 후원금을 내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NPO들도 많고, 직접 서비스를 제공하는 복지기관들도 후원금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홈리스 무료급식 같은 기초적인 서비스뿐만 아니라 전문 헬스케어 서비스까지도 말이다. 한국 같으면 정부가 할 일을 미국에서는 사회단체에서 맡는 것이다. 물론 이 책에서 다루는 사회적 참여는 NPO 같은 다소 거창한 활동뿐 아니라 동호회까지 망라하는 매우 넓은 개념이다. 그런데 지난 30-40년간 미국인들의 사회적 참여는 점점 줄어들었다. 전후 미국인들의 교육 수준이 더 높아지고 인구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회 참여도의 감소는 더욱 현격하다. 예컨대 낮은 투표율이 그렇고, 사회단체 회원 수 감소가 그렇다. 특히 후자와 관련하여, 어떤 볼링 클럽이 젊은 회원을 계속해서 충원하지 못한다면 조만간 나이 많은 회원이 ‘나홀로 볼링’을 치는 모습이 그려진다. 사회적 참여 혹은 사회적 자본의 감소 원인에 대해서 퍼트넘은 속시원한 대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다만 몇 가지 논란이 될 만한 요인들을 분석하기는 한다. 우선 그는 이혼율 상승, 자녀 수 감소, 독신 가정 증가 등으로 비롯되는 가족 관계의 변화는 사회적 참여의 변화에 약간의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인권운동 이후 흑인의 사회 진출이 백인의 이탈을 가져온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서구의 사례를 볼 때 복지국가(큰 정부)가 사회를 수동적으로 만들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탈지역화된 거대기업의 성장이 지역에 근거를 둔 사회적 참여를 어느 정도 쇠퇴시키기는 했다고 말한다. 도시의 팽창으로 인한 출퇴근 시간의 증가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매체의 발달로 인한 개인주의화된 여가수단은 이보다 조금 더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렇지만 퍼트넘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꼽는 것은 세대 교체이다. 즉 과거에 사회활동에 열성적이었던 세대가 이제는 일선에서 물러났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세대 교체는 도시화, 통신기술의 발달 등과 관련지어서 고려해야 할 것이다. 퍼트넘은 인종과 사회적 자본의 관련성을 다룰 때 1960년대 인권운동 이후 흑인의 사회적 참여에 주목한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는 흑인뿐만 아니라 다른 인종들도 봐야 할 것 같다. 흑인의 사회참여가 백인의 이탈을 가져오지는 않았을지는 모르지만, 이민 인구의 증가가 미국인의 전반적인 사회적 참여에 끼친 영향이 없었을까? 요즘 사회학자들이 즐겨쓰는 샐러드보울이라는 용어가 암시하듯 미국에서 다양한 인종은 쉽게 섞이지 않는다. 어떤 말장난 좋아하는 이가 이 용어를 처음 만들어냈는지 모르겠다. 굳이 이 용어를 활용하자면 미국 사회는 각종 샐러드 재료들이 각자 고유의 맛을 지키면서도 전체적으로 좋은 맛을 내는 샐러드보울이라기보다는 싸구려 식당에서 대충 만들어서 재료들이 골고루 섞이지 않은 샐러드 같지 않은 샐러드이다. 딸기는 딸기대로 한 구석에 뭉쳐 있고, 양상추는 양상추대로, 바나나며 건포도며 처음 넣은 그대로 끼리끼리 뭉쳐 있는 샐러드. 한 사회의 주체라고 자부하던 사람들이 다른 지역에서 몰려와서 자기 동네를 조금씩 잠식하는 타인들을 본다면 그 사회에 대한 애착심이 줄어들지 않을까? 지난 1960-1999년간 미국에서 전체 인구 대비 백인 인구 비율은 13% 포인트 줄었다. 같은 기간에 흑인 인구는 채 2%도 늘지 않았지만, 히스패닉은 7.5%, 아시안은 3.2% 포인트 늘었다. 사회의 이질성의 증가가 사회적 참여를 감소시킬 거라고 직관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특히 점점 늘어나는 이민자 층이 기존 사회에 녹아들어가기보다는 끼리끼리 뭉쳐 산다면 전체 사회성원들 사이에서 방어적 성향을 더욱 강화시킬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매체의 발달과 결부되면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아마도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기존 미국사회에 적대적인 이민사회일 것이다. 퍼트넘은 초기 입장에서와 달리 이 책을 쓰면서 사회적 자본의 반사회적 형태에도 주목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테러리스트가 여권, 폭발물, 교통통신수단 등을 얻기 위하여 자신이 가진 사회적 자본을 활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 뉴욕 타임스퀘어 폭발물 테러 시도 사례나 『벼랑 위에 선 미국』에 인용된 사례들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회적 자본은 양보다는 방향과 질이 중요할 것 같다. 즉 사회적 자본은 크기만 있는 스칼라(Scalar)가 아닌 벡터(Vector)로 보아야 할 것이다. [덧붙임] 번역과 관련하여. 이 책은 읽기에 다소 딱딱하다. 저자가 꽤나 상세한 통계들을 많이 인용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경직된 번역투 때문이다. 오역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지만, 번역투와 직역투가 많이 발견된다. 역자나 독자들이 흔히 놓치는 번역투는 바로 물주구문이다. 예를 하나 들겠다. 미국 독립전쟁이 시작된 그날 밤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설명한 역사가 데이비드 피셔의 책은 미들섹스 마을에는 주민 네트워크가 있었기 때문에 영국군이 몰려온다고 알려준 폴 리비어의 경고가 성공을 거두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29쪽). 아마도 “David Fisher’s book informs us of…” 같은 문장을 번역한 것 같다. 그렇지만 물주구문은 원래 국어에는 바람직하지 않은 표현이다. 우리말에 더 어울리게 번역하려면, 다음과 같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가 데이비드 피셔는 미국 독립전쟁이 시작된 밤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설명했는데, 그가 쓴 책을 보면 미들섹스 마을에서 영국군이 몰려온다는 폴 리비어의 경고가 제대로 전달될 수 있었던 것은 그곳에 주민 네트워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공을 거두어’를 ‘제대로 전달될 수’라고 번역할지 아니면 다른 어떤 표현으로 번역할지는 그 ‘성공’의 의미가 원래 무엇이었냐에 달려 있다. 데이비드 피셔의 책에 대한 배경 지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또 다른 예. 이 노력에는 기부금을 접수한 후에 선물을 보내는 방법에서 비회원에게 공짜 선물을 준 다음 기부금을 요청하는 방법으로의 전환도 포함되어 있다(81-82쪽). 다음과 같이 바꾸는 편이 훨씬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기부금을 접수한 후에 선물을 보내는 방법에서 비회원에게 공짜 선물을 준 다음 기부금을 요청하는 방법으로 전환한 것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보다 더 낯선 직역투도 있다. 1년 동안 미국인 1백 명 중 1명도 채 안 되는 사람이 공직에 출마했던 것이다(60쪽). 아무리 원문이 그렇게 되어 있었다 해도 우리말에 더 어울리게 번역하자면 다음과 같이 하는 편이 나았을 것같다. 1년 동안 공직에 출마한 미국인은 백 명 중 한 명도 채 안 되었던 것이다. 지명을 잘못 표기한 경우도 있었다. 한 가지만 예를 들겠다. 미시간 주 ‘안아버’(37쪽)는 역자가 조금만 신경써서 검색을 해보았더라면 통상적으로 ‘앤아버’로 불린다는 걸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런 것들이 독해를 크게 방해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런 글에 익숙치 않은 독자들이라면 약간 애를 먹을 수는 있을 것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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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개약진 공화국과 좀비의 탄생
강준만 교수는 한국사회의 특징을 "각개약진 공화국"이란 말로 표현했다. 자세히 설명하면, "공적 영역과 공인에 대한 불신이 워낙 강해 사회적 문제조차 혼자 또는 가족 단위로 돌파하려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국사회에는 모든 분야에서 각개약진 성향이 나타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서 파업이라도 할라치면 기업이나 정부의 반대를 위한 반대, "경제가 어려워 진다. 귀족 노조의 파업이다."는 마녀사냥 식 헛소리를 마구잡이로 신뢰하며 불타는 애국심으로 노동자들의 기본권 행사에 대해서 비난을 퍼붓는다.
한국민은 공적 영역과 공인에 대한 불신이 워낙 강하다는데 왜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기업과 정부를 향해서 그렇게 신뢰를 보내면서 자신들의 동료들을 억압하는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런 비난의 기저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기에 "각개약진"이라는 특성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일까? 노동자들이 서로 연대하기 위해서 만든 노조라는 조직이 자신들의 각개약진 성향에 맞지 않아서? 어짜피 각개약진하는 마당에 누군가 연대를 하던 말던 무슨 상관이라고.
아니면 노조라는 연대를 통해서 자신들의 권리를 찾아가는 노동자들을 보고 배가 아파서? 이게 중요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보통 노조의 힘이 강한 곳은 대기업에 고용된 노조이고, 그들의 연봉 또한 일반 노동자에 비해서 높은 편이다. 하지만, 그들의 연봉이 과연 귀족이라고 불릴 정도로 높은가? 사실 그들의 연봉이 과장된 측면이 많다. 사측과 정부가 퍼트리는 거짓정보를 같은 이익을 추구하는 쓰레기 언론이 가세하면서 부풀려진 사실이라는 것이다. 보통 사측은 퍼트리는 평균연봉이라는 것도 실제로 노동자들이 받는 연봉이 아니라 인건비를 직원수로 나눈 것이다.(참고 나무님 블로그)
결국, 강준만 교수가 말한 한국사회의 특징인 "각개약진"은 노동자의 권리 앞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그 때만큼은 그들이 불신해야 될 대상에 대해서 신뢰를 보내고, 그들이 신뢰를 보내야 될 대상에 대해서는 저주에 가까운 불신을 보낸다. 그렇게 배가 아프면 그들도 노조를 조직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찾아서 나서는 것이 더 올바른 방향이라는 발상의 전환은 하지 못하고, 정부와 기업이 퍼트리는 거짓정보를 맹신하며 그들이 원하는 생각 없는 좀비가 되어간다.
착취 당하는 좀비
그 좀비들은 성공을 돈으로 계산하고, 돈 많이 버는 것이 최고의 삶의 목표다. 그래서 도덕적 결함은 그냥 묻어버리고 돈 벌어준다면 좋다고 살랑 살랑 꼬리를 흔든다. 그런데 그 돈 벌어준다고 하는 인간이 추구하는 정책이나 목표는 그 좀비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와 이 정권 딴나라당이 추구하는 것은 전경련을 비롯한 경제 5단체, 강남으로 대표되는 집단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것이다. 정권의 출범에서 시작해서 정책의 지침서가 된 것도 전경련에서 발행한 백서라는 것을 우선 알 필요가 있다. 그리고 경제 5단체들의 구성원이 누구인고, 강남으로 대표되는 집단의 특징이 무엇인지 알아둔다면 더 쉽게 우리가 왜 좀비이고, 그들에게 어떻게 조종당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종부세가 세금폭탄이라고 하지만 2%의 국민들 외에는 아무 상관 없는 세금이다. 오히려 그 세금이 있음으로써 재정이 약한 지방자체 단체들은 더 많은 재정을 확보할 수 있는 상황이다. 결국 수도권에 있지 않는 지방의 식민지인들에게 경제적 관점으로 봤을 때, 더욱 이익이 되는 정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에서 종부세의 반대여론이 높았다는 기이한 현상을 보면, 경제적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참정권을 행사한 이들의 논리에 심각한 모순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역균형발전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가지고 시작한 세종시의 경우도 그렇다. 기본적인 발상은 거대한 블랙홀이 되어버렸을 정도로 비대해진 수도권으로 인해서 지방은 점점 낙후되어가고 있는 현실에서 출발했다. 뿐만 아니라, 계속 비대해지는 수도권에 인구가 몰림으로써 혼잡도와 오염도가 증가하고 그럼으로써 오히려 국가 전체의 경쟁력을 상실하게 된다는 이유가 포함되어 지역균형발전 정책이 추진되고, 세종시 계획이 만들어 진 것이다.
그런데 지방 식민지를 더 식민지화 시키고 황폐화 시키는 세종시 수정안에 대해서 충청민을 제외한 다른 지방에서는 반발이 심하지 않다. 오히려 어떤 곳은 수정안을 지지하는 여론을 높을 정도니 얼마나 좀비 같은가?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 당연한 거 아니냐고? 그 국가를 얼마나 생각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지. 당신들은 공적 영역과 공인에 대해서 불신해 각개약진하는 좀비들이 아니던가? 자신의 이익도 생각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국가의 이익을 생각한다는 것도 우습다.
좀비와 사회적 자본
지방은 식민지이고, 가지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좀비로 변해버린 현실, 왜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이 무엇인지도 생각하지 못하고, 소수의 권력자와 재력가들에게 끌려 다니는 것일까? 책 "나 홀로 볼링"은 아주 재미있는 분석으로 그 이유를 설명해 준다. 사회적 자본이라는 관점에서 사회적 네트워크와 유대의 붕괴를 설명하는데,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이 논문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직접 저자를 백악관에 불러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할 정도니 처음 발표 되었을 때부터도 상당히 설득력을 갖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책 "나 홀로 볼링"은 저자의 논문을 보강해서 후에 책으로 출간한 것이다.
그럼 우선 사회적 자본이라는게 무엇인지 알아야 되지 않을까. 사회적 자본이란 "개인들 사이의 연계, 그리고 이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네트워크, 호혜성과 신뢰의 규범"을 가리키는 용어를 말한다. 사회적 자본은 포괄적 호혜성을 바탕으로, 사회에 정직과 신뢰라는 가치를 확신시킨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사회적 자본이란게 미국 사회에서 점점 붕괴되고 있다는 현상이 발생하면서 많은 전문가들이 그 이유를 연구하기 시작한다. "나 홀로 볼링"이라는 책 제목은 사회적 자본이 붕괴되어 가면서, 개인화 되어가는 미국인의 삶의 단편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책은 비단 미국의 모습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모습도 보여준다. 그렇게 좀비가 된 우리들은 스스로가 사회적 자본을 붕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 5단체와 노조
사실 노조보다 더 사악한 사회적 자본은 소위 말하는 경제 5단체다. 그들은 기업의 이익을 대표하는 집단들로 그 파워가 날로 커져서 지금은 정치에도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한다. Mb정권의 통치백서가 전경련에서 발행한 백서라는 사실을 보더라도 mb정권의 출현과 함께 이미 경제5단체들은 막강한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튼튼한 기반을 다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각개약진 하는 노동자들을 향해서 한 없는 공격을 퍼 붙는다. 정부와 경제 5단체의 거짓말과 선동 그리고 같이 죽자는 도둑놈 심보로 노조라는 사회적 자본을 스스로 망가뜨린다. 결국, 기득권층의 사회적 자본은 튼튼하고 강력한 반면에 가난한 노동자나 서민들의 사회적 자본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폴 크루그먼은 노조의 붕괴를 분배정책의 붕괴로까지 설명할 정도인 것을 보면, 노조라는 사회적 자본이 가지는 커다란 성격과 의미에도 불구하고 좀비들을 스스로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결국 스스로 좀비들은 자신의 이익을 부정해 버린다. 이상한 거시적 담론으로 국가의 이익이라는 대먹지도 않은 논리와 주장을 따름으로써 결국 스스로가 하류를 지향하게 된다. 그렇게 그들은 점점 하류화 되면서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점점 종속되어간다. 정부를 신뢰하지 않아서 각개약진하는 국민임에도 불구하고, 거시적인 경제적 결정이나 정책에 대해서는 정부와 경제 5단체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노예가 되어가는 것이다. "노예제는 사회적 자본을 무너뜨리는 시스템"으로 우리는 스스로가 사회적 자본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결국 경제 양극화는 물론 사회적 자본의 양극화도 야기하면서, 우리는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그리고 사회적 자본이라는 관점에서도 모두 가지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사회적 자본과 88만원 세대 그리고 44만원 세대
그래도 아직까지는 이런 붕괴의 현상이 기성세대에게는 크지 않다. 그들은 그나마 기존에 가지고 있는 다른 사회적 자본이나 경제적 기득권을 여전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경제5단체와 mb의 사탕발림에 일말의 기대나 희망을 가지고 견디고 견딜만하다. 하지만, 88만원 세대라고 불리는 젊은 세대들은 전혀 그런 사회적 자본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그들이 사회에 진출하면서 가장 약한 사회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 정권과 경제단체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연봉을 삭감한 것도 그들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그런 파괴적인 행위에 대해서 어떠한 저항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오히려, 직장이라도 구한 것이 어디냐는 자조적인 소리를 하면서 점점 현실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이나 힘을 잃어버리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우석훈 박사 같은 사람들은 그들이 명랑하기를 꿈꾸면서 사회적 자본을 건설을 제안했고, 당사자 운동을 제안했다. 20대 스스로가 그들을 보호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그런 것이 필요하다는 시각에서 시작된 주장은 결국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적 자본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20대는 성인으로 자기결정권을 가진 하나의 인격체로 취급 받고 있고, 그들이 사회적 자본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이라도 있는 반면, 더 법의 사각지대라고 할 수 있는 10대들은 20대보다 더 한 44만원 세대라고 불리는 현실을 본다면, 착취의 수직화는 점점 더 강해지고 넓어질 것으로 보인다. 20대에서 사회적 자본으로 이런 폭력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사회적 구조는 고착화 될 수 밖에 없어 보인다.
사회적 자본의 효과(경제와 정치)
그럼 도대체 사회적 자본이 어떤 효과를 가지기에 사회적 자본, 사회적 자본이라고 반복해서 말하는 것일까? 이 책에서는 사회적 자본의 효과에 대해서 다양한 예들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경제와 정치적 관점에서 사회적 자본의 효과에 대해서 알아보면. 사회적 자본이 약한 지역에서는 정치의 무관심이 확산된다고 한다. 투표율의 저조, 권력 감시 기능의 약화, 권력의 독주, 민주주의 파괴, 정치 무관심과 혐오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한다. 결국 정치라는 것도 자기이익을 실현하는 도구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익 실현을 위한 정치적 반영의 길이 막히게 되어 버린다. 결국 사회적 자본이라는 것은 정치분야에서는 자기이익을 실현시키는 수단이요, 권력의 독주를 막으며 민주주의를 지키는 행위인 것이다. 사회적 자본이 약해진 지역에서는 이런 효과가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경제적으로 사회적 자본은 좋은 효과를 발휘한다. 흔히 경제는 경쟁을 통해서 많은 발전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회적 자본이 잘 갖추어진 지역에서는 오히려 수득이 높았다고 한다. 경쟁이 아니라 사회적 자본을 바탕을 둔 협동으로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 했을 뿐만 아니라, 그 효과도 마을 사람들에게 골고루 흘러가 마을 전체가 풍요로운 경제혜택을 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효과는 주거환경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 범죄가 감소하고, 주변환경도 쾌적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효과들로 볼 때 각개약진하는 좀비들 보다 단단한 사회적 자본을 형성한 사람들이 경제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보다 많은 이득을 얻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적 자본의 효과(교육과 삶)
사회적 자본은 교육에서도 큰 효과를 발휘한다고 한다. 실제로도 PD수첩에서 취재해 보여줬던 작은 학교이야기들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효과들이다. 더 자세히 설명하면, 사회적 자본이 튼튼한 학교에서는 학부모의 참여가 높으며, 후원금도 많아져 학교 환경 개선에 좋은 역할을 한다. 그러면서 학생의 비행이 줄어든다고 한다. 이런 학교들은 결국 학업성취도도 높은 편이고, 아이들의 학교 만족도 또한 높다. 특히 작은 학교에서 사회적 자본의 효과가 높다고 하는데, 작은 학교는 사람의 대면기회를 높이고, 책임 질 기회를 장려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PD수첩에 소개된 작은 학교들을 보면 이런 주장은 상당히 근거가 있으며 설득력도 높아 보인다. 결국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교육의 문제는 성적경쟁몰두와 촌지와 같은 비리, 학부모와 교사와 학생들 사이의 불신으로 인한 사회적 자본 붕괴의 단면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결국 우리가 교육을 개혁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사회적 자본의 회복 또는 강화가 아닐까
개인 삶의 측면에서 사회적 자본 또한 많은 영향을 발휘한다. 사회적 끈을 가진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경제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사회적으로 고립된 환경에 있는 사람은 빈곤할 경향이 높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들은 우리가 이미 경험적으로 충분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이런 경험이 나쁜 방향으로 작용하면서 학연과 지연 같은 것에 집착하는 사회현상을 충분히 볼 수 가 있다. 일부러라도 사회적 끈을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인간관계가 이해관계로만 얽히는 현상이 일어나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살문제에서 사회적 자본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살론을 쓴 에밀 뒤르캠은 "자살이란 구성원 통합을 예측하는 지표"라고 했다. 결국 우리 사회의 높은 자살률과 각개약진이라는 단어를 조합해 본다면 에밀 뒤르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을 반대로 생각하면 사회적 자본은 행복지표를 상승시킨다는 말도 된다.
우리 사회와 사회적 자본
점점 사회가 삭막해져 가고, 삶의 점점 빠듯해지는 상황에서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조금씩 극단주의적인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상대방에 대한 논리와 이유가 없는 분노를 맹목적으로 표출하는 집단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면서 묻지마 살인이나 범죄 같은 잔혹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고, 사회에 대한 민심은 점점 흉흉해지는 것 같다. 지난 정치심리학 분야의 연구들은 "공동체, 직업, 단체와 단절된 사람들은 극단주의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 속한다."고 보여준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가 사회적 자본을 포기함으로써 수 많은 문제에 자신을 던져 놓은 꼴이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토크빌의 이 말("사람들이 서로 주고받는 협력 행위에 의해서 감정과 생각이 새로워지고, 마음이 넓어지며, 이해 능력이 계발된다.")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ps> 책 마지막의 번역자의 글을 통해서 사회적 자본에 비판적인 내용도 잠깐 소개하고 있다.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나 같은 사람들에게도 조금은 균형을 잡아줄 수 있는 정보, 즉 사회적 자본에 대한 저자의 주장이 모두 옳거나 완벽하다는 것이 아니라는 정보를 역자는 제공해 조금은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도록 도움을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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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사회 과학 서적을 많이 접하다보면 "사회적 자본"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거기에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용 서적이 바로 이 책이다. 비단 사회 과학 서적 뿐만 아니라 현 시대를 진단하고 비판하는 다양한 교양 서적에서도 역시 이 책의 저자와 특이한 제목의 이 책이 빠지지 않고 인용된다. 개인적으로 지난 몇 년 동안 사회적 자본에 대한 여러 권의 책을 읽으면서 본 바로는 이 책의 저자를 천재로 극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의 번역판이 있는지 몇 번 찾아보았으나 없어서 나중에 원서로라도 읽어야 되는게 아닌가 생각하던차에 얼마전에 우연히 번역본이 나온 사실을 알고 잽싸게 읽게 되었다.
푸트남, 또는 퍼트남(Robert David Putnam)이라고 번역되는 저자의 특이한 이름을 처음에 듣고는 어디 베트남이나 동남아 출신인줄 알았지만, 그가 하버드 대학 교수로 있다는 사실과 1941년 미국 출생이라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알게 되었다. 게다가 얼마전 하버드 케네디 스쿨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의 저자가 하버드 케네디 스쿨의 전직 학장이었다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또한 이 책의 저자 소개를 통해서 그가 미국 정치학계의 거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여간에 저자의 명성 만큼이나 이 책의 주요 내용들은 여기저기서 엄청나게 인용되면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사실 이 책은 부록 등을 다 빼고 본문만 완역했다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거의 700 페이지 가까운 내용들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방대한 분량의 책이 전해주고자 하는 내용은 거의 한 가지 주제에 대한 것이다. 이 책의 부제인 "The Collapse and Revival of American Community(사회적 커뮤니티의 붕괴와 소생)"라고 볼 수 있겠다. 즉, 미국 사회에서 지난 수십년간 사회적 자본이 급격히 사라지고 있으며, 이에 대한 원인과 전망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Bowling Alone"이라는 멋진 제목은 말그대로 미국 사회에서 사회적 커뮤니티, 즉 사회적 자본의 붕괴를 보여주는 단적이 사례인 것이다.
이 책에서 사회적 자본이라고 이야기 하는 부분은 바로 개인들 사이의 연계, 그리고 이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네트워크, 호혜성과 신뢰의 규범을 가리키는 말이라 한다. 사회적 자본 이론의 핵심은 사회적 네트워크가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라면서, 사회적 접촉 역시 개인과 집단의 생산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사회적 자본이 쇠퇴하면 그 영향력과 파급 효과가 매우 크다는데 있다. 공동체의 유대가 헐거워지면 우리의 학교와 이웃간의 관계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며, 우리의 경제, 우리의 민주주의, 심지어 우리의 건강과 행복조차 사회적 자본이 적절하게 쌓여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 책은 20세기 마지막 수십년 동안 미국 전역의 많은 지역 사회단체들이 모두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현상에 대한 서술로부터 시작한다. 이 현상은 나이 많은 회원들이 사망과 함께 자연 탈퇴되면서 생긴 일이 아니라면서, 과거와 달리 신입회원들이 새롭게 충원되지 못하면서 수많은 지역 사회 단체들이 더 이상 활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 진단한다. 이 책은 학술서적 답게 구체적인 통계 자료들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지난 20년 혹은 30년 동안 미국에서 투표율은 4분의 1, 공공 업무에 대한 관심은 5분의 1이 줄었다고 한다. 지금의 미국인들은 모든 분야의 시민 활동에서 20년 전보다 실질적으로 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민적 참여의 여러 형태들 중 감소 폭이 가장 큰 부분은 서로간의 협력이 필요한 부분, 즉 시민을 하나로 모으는 활동, 사회적 자본을 가장 분명하게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활동들이라 한다. 또한 지난 30년에서 40년 동안 자기가 교회 신도라고 주장하는 미국인은 10퍼센트 줄었으며, 예배를 비롯한 종교 활동에 실제로 참여 혹은 관여한 경우는 약 25~50퍼센트 감소했다고 한다. 한편 식사 시간 외에도, 가족이 함께 하는 모든 형태의 모임은 20세기의 마지막 사반세기 동안 더욱 뜸해지고 있다면서, 가족과 함께 휴가는 53퍼센트에서 38퍼센트, TV시청은 54퍼센트에서 41퍼센트, 종교 예배 참석은 38퍼센트에서 31퍼센트, 그냥 앉아서 이야기 하기는 53퍼센트에서 43퍼센트로 줄었다고 한다.
기혼과 미혼을 통틀어 미국인이 바, 나이트클럽, 디스코클럽, 선술집 등의 업소에 가는 횟수는 지난 10년 혹은 20년 동안 40~50퍼센트 감소했고, 1970년에서 1988년 사이 인구 10만명당 고급 식당의 숫자는 4분의 1 줄었으며, 간단한 식사를 제공하는 작은 식당과 바는 절반으로 줄었다고 한다. 또한 기혼자와 독신자를 통들어서 축하카드 보내기는 약 15~20퍼센트 하락했으며, 1980년에서 1993년 사이 미국 볼링 인구는 10퍼센트 늘었지만, 팀에 가입해서 서로 어울려 치는 리그 볼링 인구는 40퍼센트 이상 줄어 들었다고 한다. 아울러 1960년 미국인은 여가 활동에 2달러, 자선에는 1달러의 비율로 지출했지만, 1997년에는 여가 활동에 2달러, 자선에는 50센트의 비율로 지출했다고 한다.
이보다 더 재미있는 통계자료들이 많다. 이를테면 정지 신호 앞에서 운전자의 행동을 관찰한 바에 의하면, 1979년에는 자동차, 모터사이클 등 모든 종류의 차량 운전자들 중 37퍼센트가 완전 정지를 했으며, 34퍼센트는 브레이크를 밟으며 눈치를 보았고, 29퍼센트는 전혀 정지하지 않았다고 한다. 1996년에는 똑같은 교차로에서 97퍼센트의 운전자가 전혀 정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호간의 얕아진 신뢰와 호혜성의 하락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에서 1970년대 이후 인구당 변호사 비율이 갑자기 폭발하여, 그 다음 25년 동안 거의 2배로 치솟았고, 그 결과 국가적 거래비용 항목에 이 부분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고 한다.
1970년의 경우 미국에는 의사보다 변호사가 3퍼센트 적었지만, 1995년이 되면 변호사가 34퍼센트 더 많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보면 법률 업무의 수요가 그동안 가장 크게 늘어난 곳은 예방적 법률 업무라고 부르는 부문이라는데, 이것은 미국의 사회와 경제 전반을 통틀어 서류로 남기지 않고서도 상호 이해와 신뢰에 입각하여 약속을 지키던 옛 방식은 이제 더 이상 적절하지도 사려 깊지도 않은 행위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 한다. 또한 미국인의 TV시청 시간은 1965년 이후 약 3분의 1 늘어났는데, 1965년과 1995년 사이 늘어난 주당 6시간의 여가 시간을 거의 모두 TV시청에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여러 형태의 사회적 자본이 시대를 거치며 어떻게 변화했는지, 매우 다양하지만 불완전한 자료들을 가지고 분석하고 있다. 정치, 공공업무, 클럽과 지역사회단체, 종교단체, 노동조합이나 전문직 단체 같은 공동체, 카드놀이 모임과 볼링 리그, 스포츠 클럽, 피크닉과 파티, 자선과 자원봉사, 소규모 단체 운동의 참여도 변화 등 각종 사회적 변화들의 단초들을 찾으려 하고 있으니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모든 사회적 변화들에서 거의 공통적인 특징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미국 사회에서 공동체 참여와 활동의 성장과 쇠퇴의 흐름이라고 한다.
즉, 대공황과 제 2차 세계대전 기간을 제외하고 20세기 초에는 완만하지만 꾸준한 성장, 1945년과 1965년 사이의 폭발적 성장, 1970년대 말까지 침체, 그리고 20세기 마지막 20년 동안 수직하락이라는 경향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20세기 최초 3분의 2 동안 미국인들은 자기 공동체의 생활에 진지하게 참여하도록 만든 강력한 흐름이 있었던 반면, 수십 년 전 아무 경고도 없이 이 흐름이 역전되어 미국인은 반대 방향의 거센 물살에 휩쓸리게 되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저자는 이러한 흐름이 생긴 이유를 과도한 노동시간, 교외 지역으로의 주거지 확장, 복지국가, 여성혁명, 인종주의, 텔레비젼, 잦은 이사, 이혼율의 증가 등의 요소들에 따라 하나씩 점검하고 있다.
하지만 딱 부러지게 단일한 요소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게 저자의 주장이다. 1960년대 까지 사회적 커뮤니티가 폭발적으로 성장된 배경에는 제 2차 세계대전이라는 집단적 기억 혹은 그 세대의 성장 경험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지적하고 있다. 제 2차 세계대전은 애국심과 집단적 유대를 방대하게 분출시켰으며, 전쟁이 끝나자 사람들은 그 에너지를 공동체 생활에 쏟아 넣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통의 역사적 시기를 겪으며 형성된 공동체의 유대감, 타인에 대한 배려, 호혜성과 신뢰, 활발한 참여, 고통을 나누고 슬픔을 같이 하는 공감대가 바로 미국 역사에서 시민들의 공동체 참여를 가장 활발하게 촉진시킨 가장 큰 원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사회적 커뮤니티 붕괴의 원인으로는 그러한 참여 세대들이 사라지고 세대 교체가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며, 그 밖에 남성뿐 아니라 여성의 직장 생활참여와 업무시간 과중이나 도시 팽창 등에 따라 사회적 커뮤니티에 참여할 시간과 기회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오늘날 사회적 커뮤니티의 쇠퇴와는 반대 방향의 흐름도 몇 가지 관찰할 수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복음주의적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 전개되고 있는 풀뿌리 활동의 활발한 성장, 자조 단체의 증가, 인터넷의 성장 등을 들고 있다. 이들은 시민 참여를 부활시킬 믿음직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나 아직 좀 더 지켜봐야 할 대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미국 사회에서는 세대 변화가 문제라고 하지만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와 X세대만이 문제라고 볼 수도 있다고 한다. 이 세대들은 부모 세대보다 시민 활동에 계속 덜 참여하는 경향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자식 세대보다도 참여율이 더 적다고 한다. 즉, 1990년대의 청년 미국인들, 이른바 밀레니엄 세대에게는 그 앞 세대들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자원봉사에 대한 책임감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 젊은 자원봉사 정신이 성인이 되어서도 지속되고 개인적 선행을 넘어 사회적, 정치적 문제와 폭넓게 접합되어 확장되기 시작하면, 미국은 이제 시민적 활력이 새롭게 재생되는 새 시대의 출발점에 설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섞인 발언을 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소개된 많은 자료들과 그 해석들 중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는 것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를테면 미국에서 전국 규모의 단체들 중 요즘 한창 뜨고 있는 대부분의 신생 단체들의 본부는 워싱턴의 14번가와 K가의 교차로에서 열 블록 이내에 있다고 한다. 미국에서 급속히 늘어나고 있는 신생 단체들은 지역에 뿌리를 두고 회원 중심으로 움직이는 조직이 아니라 전문 인력들이 배치되어 자신들의 주장과 이익을 선전하는 조직이라는 것이다. 새 단체들은 풀뿌리 단위에서 개별 회원들 사이의 정기적 접촉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전국적인 정치토론에 자신의 정책 견해를 표출하는 데 활동의 초점을 두기에 완벽한 로비 단체라는 것이다.
또한 경제적으로 곤궁하다고 느끼는 사람들과 저소득층은 잘 사는 사람에 비해 모든 형태의 사회생활과 공동체 생활에 훨씬 덜 참여한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재정적 불안과 경제적 궁핍이 공식적, 일상적인 사회 참여에 심각할 정도로 악영향을 끼쳐왔다고 한다. 그리고 정규적 직업은 시민적 참여에는 양날의 칼이라면서, 기회는 더 많이 만들지만 시간은 부족하기 때문이라 한다. 그 밖에 매일 출퇴근 시간이 10분 늘어나면 공동체 업무의 참여는 10퍼센트 떨어진다던지, 뉴스 시청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수록 공동체 활동에 더 적극적이며, 멜로드라마, 게임쇼, 토크쇼를 많이 볼수록 적극성이 떨어졌다는 통계 분석 내용은 공감이 갔다.
그리고 미국에서 19세기 전반부 노예제가 특히 심했던 주일수록 시민 참여가 현재 더 낮다면서, 이것은 노예 해방 이후에도 남부의 지배 계급은 수평적인 사회적 네트워크가 형성되지 못하게 막는 데 강한 이해관계를 계속 갖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 한다. 또한 어린이의 발전은 사회적 자본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면서, 사회적 자본은 착한 아이들에게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말한다. 그 외에도 수많은 연구들은 사회적 응집력은 조기 사망의 예방 뿐 아니라 질병의 예방과 빠른 회복에도 중요하다는 의학관계 연구자들의 직관을 지지해주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이러한 사회적 자본을 다시 활발하게 생성하기 위해 여러가지 방안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중 눈길이 가는 것은 학교에서의 활동과 문화 예술활동의 활성화이다. 학교에서의 정규 교과목 이외 활동의 참여가 나이 들어서도 시민 참여와 사회참여를 확대시켜준다면서, 소규모 학교가 대규모 학교보다 정규 교과목 이외의 활동에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더 장려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거대 학교의 분산 혹은 학교 내 소규모 학교의 설립은 시민적 참여의 바탕을 만들어 낼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문화와 예술활동은 인종이나 정치적 배경 등과 무관하게 다양한 동료 시민 집단들을 불러 모으는 원동력이란 사실도 언급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이 책의 역자가 책의 뒷마무리에서 지적하듯이 자료의 처리 방법, 동원된 자료의 신뢰성, 결론에 대한 반박 논의 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하지만, 이 책이 미국 사회에 준 영향력은 대단히 큰 듯 하다. 우리나라 역시 미국 사회와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사회 분위기는 나름 비슷한것 같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감탄했던 것은 광범위한 연구자료들을 바탕으로 한 거대 미국 사회 전반의 연구와 분석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연구를 바탕으로 한 책이 없는것일까? 내가 본 대부분의 사회 과학 또는 시사 교양 서적들은 이념논쟁과 편가르기에 치중된 느낌이다. 우리 사회를 사회학자 한 두 사람의 시각으로 분석하기 보다는 통계자료나 종합적인 분석자료를 통해 고찰하는 책은 없는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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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사회의 사회적 자본의 약화와 쇠퇴, 그리고 그 결과 혹은 상관관계로 나타나는 여러가지 문제점을 쉽게 해석해 내고 있다. 한 가지 요인을 가지고 상관관계를 비교적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인과관계가 아니라는 차원에서 비판의 여지는 존재한다. 그리고 텔레비전, 세대간의 교체라는 변수가 사회적 자본의 약화를 가져오는 가장 큰 요인이라고 든 점은 전자는 너무 단순화 시킨 것 같고, 후자는 너무 막연하다. 그럼에도불구하고 퍼트넘은 미국 사회의 문제점을 잘 지적하고 그것에 대한 원인을 '사회적 자본'으로 보면서 다양한 통계 분석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 한다. 20세기의 막바지에 정리된 책이고, 그 바람을 2010년에 이뤄지기를 소망했지만, 그의 희망가는 2016년이라는 현시점에서 이뤄지지 않았다. 그리고 사회적 자본을 형성하기 위한 노력은 앞으로도 요원할 가능성이 큰 것 같다. 역자는 인터넷 공동체와 같은 환상에 가까운 기대를 가지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지만, 인터넷이 발전해서 원거리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고 해서 공동체가 확립되고 더 많은 사람을 신뢰하게 되는 일은 적어도 현시점에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익명성을 활용한 범죄들이 증가하지 않았을까? 모니터 앞에서 연결된 관계의 지속성, 혹은 그 결속력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 여가 혹은 취미로 관계 맺음을 하게 될지 모르지만, 분명 한계가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퍼트넘의 대안은 막연하다. 이 책이 대안을 만들지 못했고, 현상만 해석하고 원인을 고찰하는데 머물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한계다. 그저 진보의 시대(progressive era)의 선조들의 문제인식과 해결을 위한 노력이 하나의 모범 사례가 되어 그 시대와 전혀 다른 세대가 살아가는 시점에 비슷한 일을 바라는 것은 저자의 대안을 위한 노력의 허술함이 보인다. 사회적 자본이 무너진 미국, 그리고 한국은 서구식의 사회적 자본을 말해 볼 겨를도 없이(한국은 시민이라는 개념이 정착되지도 못한 상태에서 여러 시대적인 역경을 겪으면서 그 싹조차 거센 모래바람에 휩쓸려 버렸다.) 해체의 시대를 맞이해 버렸다. 퍼트넘의 진단을 한국 사회에 적용하는 것은 피케티의 자본세를 한국의 현실에 도입하는 것과 다름이 아니다. 그러나 논의의 방법론은 한 번 적용해 볼 필요가 있다. 근시안적인 방법이 아니라 있는 자료들을 통시적으로 고찰해서 분석하는 방법이 그래도 보다 명확하게 한국 사회를 분석하고 그 대안을 만들어 가는 일환이 될 것이라 여겨진다. 여담으로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저자의 인용은 역사적 통찰력을 가진 토크빌의 혜안을 엿보게 해주는 부분이며, 청소년에 대한 관심과 교육이 그나마 한국 현실의 미래를 위해 한 번 해볼만한 사업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정도는 갖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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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독식이 판을 치고 있는 지금 이 시대, 어린 아이들부터 경쟁에 과정속으로 내 몰고 그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도구들을 준비시키는데 혈안이 되어 가고 있는 이 시대, 과연 누가 신뢰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는가? 누가 공동체의 담론을 이야기 할 수 있는가? 신영복 선생의 담론과 함께 로버트 퍼트넘의 나 홀로 볼링은 우리가 잊고 있는 중요한 담론들을 생각하게 하는 좋은 책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