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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들어보았지만 그 구체적인 모습은 아직까지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는 신자유주의. 이 책은 그 모호한 신자유주의에 대한 입문서로서 적절한 책이다. 내가 보기에,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특징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탈정치의 외피를 뒤집어쓴 정치기획’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우선 한국 사회에서 신자유주의의 탈정치가 정치적인 기획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서술할 것이다. 그리고 그 ‘정치적 기획’이 ‘경쟁’과 ‘도덕’을 어떻게 왜곡하여 이용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1. ‘탈정치’를 내세우는 신자유주의
이명박 대통령은 7일 논란이 되고 있는 세종시 수정 계획과 관련, “실질적 국가발전과 지역발전 관점에서 볼 뿐 정치적 논리는 없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신자유주의는 ‘탈정치’를 고수하며 ‘경제논리’의 지배를 선언한다.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클린턴이 내세웠던 캐치프레이즈는 ‘It's the Economy, stupid!’였다. 미국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북풍이니 총풍이니 색깔론이니 하는 말들이 나돌던 기존 대선의 양상과는 차별적으로, 지난 17대 대통령 선거의 유일한 키워드는 ‘경제’였다. 그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든 없든, 국정에 대한 비전이 무엇이든 상관이 없었다. 유권자들은 경제만 살린다면 모든 것을 눈감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실제로 현 대통령은 ‘불도저 정신으로 각종 사업을 일으킨 CEO’라는 이미지로 당선이 되었다. 이제 정치는 경제와 완전히 분리된 영역일 뿐만 아니라, 경제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대통령의 지지도가 주가가 얼마인가에 달려있다는 말이 그저 농담일 수만은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허준영 사장 등 코레일(한국철도공사) 경영진과 정부는 이번 노조의 집단행동에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철도노조는 ‘원칙을 지킨 힘’에 손을 든 것이다. 코레일은 파업을 주도한 199명을 경찰에 고소했고 민사상 손해배상도 청구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1일 이번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한 데 이어 다음 날 이명박 대통령이 코레일 비상상황실을 직접 방문해 엄정한 대응을 강조했다. 정부가 쌍용자동차 파업에 이어 철도노조 파업에서도 원칙을 무너뜨리지 않은 것은 우리 사회 일각의 잘못된 노동운동 관행을 바로잡는 중요한 전기(轉機)가 될 수 있다.
위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사후 처리도 경제적 방법(민사상 손해배상)으로 압박을 가하는 방법이 선택된다.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것이 ‘경제논리’라는 교의를 바탕으로 평가되며 처리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서 ‘정치’는 소외된 것으로 보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탈정치의 시대’에 살고 있는가?
신자유주의적 글로벌리즘은 '경제적 탈규제' 모델이 전혀 아니며, 그것은 일반적으로 '민간 주도'[모델]를 촉진하는 것도 아니다. 비개입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베일 하에서 신자유주의는 모든 사회적 영역에 광범위하고 치명적인 개입을 하고 있다.
2. 신자유주의의 ‘정치논리’
질문에 답하기 전에, 앞서 언급했던 ‘사영화’라는 단어부터 살펴보자.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사영화’라는 단어보다는 ‘민영화’라는 단어가 주로 사용된다. 왜 그러한가? 이것은 하나의 정치적 수사다. 영어를 번역하였을 때 오히려 ‘사영화’가 걸맞지만, ‘民’이라는 가치중립적이지 않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그것이 ‘전체’에게 이익을 줄 것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언어의 문제만이 아니다. 최저임금을 예로 들어보자. 경제논리로만 따지자면 노동에 대한 합당한 임금은 시장이 결정할 것이기 때문에 최저임금 같은 것은 국가가 나서서 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아니, 간단하게 생각해보자. 한 개인의 10시간 노동이 어떻게 화폐와 1:1로 교환될 수 있는가?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노동과 화폐의 교환은 경제적인 논리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문화적/정치적 맥락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정치경제학의 논증은 직관과 주장보다는 엄격한 분석에 기초하게 되었지만 정치경제학의 힘은 그들의 분석적 엄격함보다는 이데올로기적 호소에 의존한다.
신자유주의는 경쟁을 강조한다. 대내적으로는, 시장에서의 공정한 경쟁을 통하여 우수한 개체들이 살아남는 것이 결국 전체 사회에 도움이 된다는 논리를 펼친다. 그에 비해 대외적인 무역의 차원에서는, 모든 국가들이 집단적으로 국제무역으로부터 이익을 얻을 것이라고 주장한다(이 책의 4장). 하지만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이것은 자체 모순을 가진 신화에 불과하다. 만약 모든 국가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로 이익을 얻는다는 주장이 옳다면, 2004년 기준 전 세계 186개국 중 세계무역의 80%를 차지하는 것이 단 25개국이라는 ‘현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경쟁이 전체 사회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 옳다면,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도입한 영국에서 불평등 지수가 가장 커졌다는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때문에 신자유주의자들은 이론적 분석 속에서조차 ‘계급’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꺼린다. 그들이 그것을 인정한다면 ‘공정한 경쟁’이라는 시장의 ‘도덕성’이 훼손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주류경제학적 비판들은 자본주의 경제의 사회적 측면을 인식하면서, 자본주의 시장의 약점에 재주목하는 데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들 중에서 가장 급진적인 것조차도 전형적으로 자본주의적 계급 분할과 권력의 함의를 인식하는 것을 꺼린다. 그들은 이론적 분석 속에서 사회계급에 대한 단순한 언급조차도 꺼린다. 그리하여 신자유주의자들은 ‘경쟁’이라는 정치적 수사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것을 개인의 몫으로 환원시킨다. 사회에는 다양한 변수-외부요인-가 존재함에도, 그것을 무시한 채 모든 것을 개인의 능력 탓으로‘만’ 돌린다. 취직이 되지 않으면 ‘스펙’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성적이 오르지 않으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게으르기 때문에. 그리고 신자유주의자들의 이 든든한 방패는 다시 매우 효과적인 무기로도 사용된다. 즉 모두 개인의 능력에 달린 일이기 때문에 복지는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세금낭비’는 형평성에 어긋나는 것으로 몰아갈 수 있는 것이다. 최근 경기도지사의 “학교가 무료 급식소는 아니다”(연합뉴스, 김문수 "학교 무료급식이 대표적 포퓰리즘", 2009. 12. 2)라는 발언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비난은 ‘도덕적인 영역’으로 확대된다. 미국과 영국의 경우, 미혼모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 전통적인 가정을 수호하려는 신우파의 공격에 의해 축소되었다. 물론 이들 신우파가 모두 신자유주의자들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의 공격이 경제 ․ 복지정책과 연결되는 경우, 도덕적 타락은 경제적 궁핍의 원인으로 왜곡되고, 복지는 개인의 책임과 의지를 무력화시키는 것으로 비난받게 되는 것이다.
신우파는 무엇보다 핵가족을 방어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도덕개혁조직들은 이 논쟁에서 성도덕의 문제를 중심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시도했다. 낙태에 반대하는, '도덕성' 정치는 '도덕성'의 문제가 신우파의 경제/복지정책과 명확한 연결점을 찾는 경우 신자유주의적 의제의 중심으로 들어온다. 이는 대서양을 넘나들며 싱글맘을 복지도둑이라고 매도하는 데서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이런 도덕적 비난은 젠더의 영역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앞서 언급된 ‘게으름’ 또한 도덕적 비난과 연결된다. 보수언론들이 여전히 가난한 자의 성공기를 대서특필하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것과 연관이 있다. 노년층 부양 또한 이런 방식으로 개인에게 떠밀어질 수 있다. 즉 ‘효’라는 도덕적인 가치를 내세워, 일정 부분 사회가 맡고 있던 노년층 부양을 개인에게 밀어버리고 그것을 맡지 않을 때 도덕적인 비난을 가하는 것이다(위에 언급한 경기도지사의 발언과도 연관이 있다. ‘밥은 집에서 먹이는 거지 학교에서 먹이는 것이냐?’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국가 생산력을 위해 아이를 낳자고 캠페인을 벌인다. 모순처럼 보이지만 이것이야말로 신자유주의 본연의 모습이다). 이것은 앞 장에서 언급한대로, 경제적인 논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이 부분은 뒤에 포스팅할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의 주요 내용이기도 하다).
도덕적 타락은 경제적 퇴보의 원인으로 비추어졌고 복지 혜택은 개인의 자발적 노력과 책임을 질식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시민이 소비자가 됨에 따라 집산주의와 사회적 책임감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도덕적 비난이 부조리한 사회조건에 대한 비판의 싹을 잘라버린다는 데에 있다. 이 양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로 ‘공정한 시장’과 ‘도덕적 비난’을 성공적으로 세뇌시켜 모든 책임을 ‘알아서’ 자신에게 돌리게끔 만드는 경우이다. 그리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정치적 권리조차 자신에게 유리하게끔 행사하지 못하게(혹은 그럴 의지가 없도록) 만든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의 ‘탈정치’ 전략과 그 맥락을 함께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두 번째 양상은 더욱 심각한 것이다. 사회 혹은 정치에 비판적인 태도를 없애버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거의 동일한 계급 속에서 적을 찾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전체 파이가 부족하다는 위기의식을 (무한 경쟁이라는 수사를 사용하여) 한껏 고양시킨 뒤에 ‘분할’의 방법을 사용한다. 이 방법은 노동계에 가장 적극적으로 사용된다. 취업 여부에 따른 분할, 국적에 따른 분할, 직종에 따른 분할, 고용안정 정도의 차이에 따른 분할, 중소기업과 대기업에 따른 분할, 성별에 따른 분할, 지역 분할 등이 그것이다(김태권 지음, 우석훈 해제, 『어린왕자의 귀환』, 돌베개, 2009, 170~181쪽). 노무현 정권 때부터 사용된 ‘귀족 노동자’와 같은 표현은 직종에 따른 분할, 최근의 쌍용자동차 사태는 고용안정 정도를 이용하여 분할의 방법을 사용한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분할 전략의 예는 수도 없이 많다.
4. 전망
그렇다면 앞으로의 전망은 어떠한가? 사실 그 전망이 밝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제 ‘대의’가 설득력을 가지는 시대는 끝난 것으로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의 ‘혁명’은 기대하기 힘든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비관적인 상황일수록 ‘국지전’이 중요하다. 우선 자신의 ‘계급’을 명확히 인지하고 그것을 정치적인 행동으로 실천할 필요가 있다. ‘행동’이라고 해서 그렇게 거창한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강남에 거주하는 최상위 계층들이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 보수정당에 표를 던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보수정당이 내세우는 것들과는 무관한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에게 표를 던져서는 안 된다. 무엇이 자신에게 유리한지 정말 제대로 ‘이기적’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서른 명에 가까운 학자들이 각자의 관점과 주제를 가지고 신자유주의를 비판/분석한 것이다. 그 비판의 방향이 모두 제각각이라 혼란스러울 수도 있지만, 다양한 분석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고무적이다. 번역자가 후기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신자유주의의 비판자들 중에도 포스트 케인즈주의자, 칼레츠키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 등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며, 이러한 입장차는 신자유주의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완전히 판이하게 만든다. 어쨌거나, 모두 안다고 생각하는 '신자유주의'를 한 번쯤 '공부'해본다는 생각에서, 이 책은 한 번쯤 읽어볼만한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각 글의 호흡이 짧은 것이 좀 걸리지만, 입문서로서의 기능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읽어보자. 다음과 같은 각 저자들의 결론에 당신이 동의하느냐 마느냐는, 일단 당신이 '안다'는 것을 전제로 한 후에야 가능한 일이니까.
신자유주의에 대한 경제학적 비판은 반복적으로 신자유주의적 모델이 얼마나 제한적이고 비현실적인지를 드러내 왔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모델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은 다소 초점이 빗나간 것이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적 모델은 세계를 묘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세계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이루어져야할 세계를 다루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문제는 현실세계에 더 적절한 모델을 만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모델에 맞게 적절하게 현실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지적인 환상인 것이 아니며, 현실적 프로젝트이다.
무관심과 회의주의는 진보적 정치가 극복해야 할 것이다. 정치적 행위에 다시 개입하는 것, 대안을 상상하는 것, 그리고 개혁의 언어를 다시 되찾아 오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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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9. 네오리버럴리즘 – 그린비 자유주의. 경제에 있어서 자유주의는 전체주의나 공산주의의 정부통제에 의한 생산과 대비되는 개념입니다. 아담 스미스부터 시작된 자유주의는 국가가 인간의 모든 경제활동을 통제하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올바르지 않다는 전제하에 시작되었으며 일부는 분명 옳습니다. 공산주의의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한정된 자원의 정부의 인위적 통제라는 것이었으니까요. 보다 공정하고 합리적인 통치자와 분배자가 있어서 분배를 좀 더 효율적이고 공정하게 하였다고 하더라도 한계가 있었을 듯 싶습니다... 거기다, 대표적인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의 경우, 공정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았기 때문에... 실패는 더욱 더 컸던 것입니다. 그리고, 유럽의 수정사회주의. 인간의 행복을 중시하는 복지 중심적인 정책에 의한 사회주의 체제는, 80년대에 고난을 겪습니다. 지나친 복지에 의하여... 재정은 고갈되고, 일자리는 없어지고 – 일자리를 잃어도 복지가 보장되어서 일자를 적극적으로 찾으려는 노력도 적었던 부분도 분명 있습니다. - 그러다보니, 이 것에 대해서 대안을 찾게 되었습니다. 자유주의의 폐해는 30년대 대공황에서 확인되었고, 이 문제는 2차 세계대전에 의하여 풀렸지만, 문제는 문제다.. 라는 것이죠. 결국 수정사회주의 노선을 밟는 국가들이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국가의 적절한 통제와 국민복지에 치중하는 그런 느낌 하지만, 이 수정사회주의의 정부에도 문제가 보여서... 다시 신자유주의..... 역사는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반-합의 순환을 통하여 보다 발전하기를 기대하는 것이 유물론적 가치겠죠... 발전하기를 기대한다고 쓴 이유는 꼭 발전하지 않고, 합의 시기에 제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오히려 쇠락하는 경우도 생긴다는 점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이런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살펴보는 책입니다. 이론, 지형, 세계사를 통하여 어떻게 신자유주의가 세상에 퍼졌고, 쇠락해 가는가를 보여줍니다... 8~90년대 자본주의국가의 주요 이념이었지만, 다시 자유주의의 고질적인 문제와 한계를 보이며, 내려앉고 있는 듯 합니다....... 대처가 이렇게 말했다죠? 대책은 없다. 없긴 뭐가 없나요? -ㅁ- 제가 학교를 다닐때는 한참 신자유주의가 유행이던 시절이라... 복지정책의 폐해와 지유주의의 필요성에 대하여 열심히 교육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항상 주장하지만, 적당한 것이 제일입니다. 적당한 것이 가장 어려울 지도 모르겠지만, 지속적으로 안정적인 재정과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 적당한 선을 잘 찾는 것이 필요할 듯 싶습니다. 요즘은 개나 소나 복지 ㄱㄱ 외치고 있는 게 이것도 올바른 게 아닙니다. 장기적인 국가재정에 대하여 생각하고 움직이는 게 필요하겠죠. 이 책은 경제적 좌파의 입장에서 쓴 책입니다. 보수적인 경제학 지식만 쌓은 분이라면 이 책을 참고하셔서 균형감각을 잡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하지만, 좌파가 답이고, 우파는 틀리다. 그런 방향으로 너무 치우치진 않아야.. 올바른 경제감각을 기르는 방향이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