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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렌마트) 판사와 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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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에 따라 판결을 내리는 판사들이 아직은 더 많을게다.그러나 국정농단 사태 이후 사법부의 민낯이 거침없이 드러나면서 부터 법을 집행하는 이들을 절대적으로 믿는 날이 과연 오게 될까,회의적인 물음이 따라온다."노수관은 랑부잉의 가스트만의 집에 들를 합법적 수단을 요구할 작정이었다.하지만 루츠(예심판사)는 오후에 처리하자고 미루었다."/65쪽 노수수관을 만나기전 가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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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에 따라 판결을 내리는 판사들이 아직은 더 많을게다.그러나 국정농단 사태 이후 사법부의 민낯이 거침없이 드러나면서 부터 법을 집행하는 이들을 절대적으로 믿는 날이 과연 오게 될까,회의적인 물음이 따라온다."노수관은 랑부잉의 가스트만의 집에 들를 합법적 수단을 요구할 작정이었다.하지만 루츠(예심판사)는 오후에 처리하자고 미루었다."/65쪽 노수수관을 만나기전 가스트만의 대리인격인 인물,폰 슈벤디의원과의 루츠 만남을 통해,소위 거물급 인사들에 관한 수사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단적으로 보여준 장면 되겠다.<판사와 형리>,단편에서 판사의 역활을 중요하게 따져 물은 건 아니지만,결과적으로 보면 범인이 분영해도,그가 범인이란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죄라는 것도 손쉽게 빠져나갈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살인사건이 발생했다.그런데 무슨 일인지 사건을 극비리에 수사하려고 한다.이유는 언론을 믿을수 없기 때문에.그런데 더 이상한 건 범인으로 추정될 만한 인물에 관한 수사가 적극적으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범인으로 추정될 만한 인물이 예사롭지 않아서일수도 있다는 분위기를 연출하려는 듯한 그림이다.그런데 소설의 재미는,앞서 읽었던 '물리학자들'처럼 범인이 누구인지 어느 정도 예상이 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무언가를 찾게 만든다는 점이다.그러니까 이 소설은 처음부터 살인자가 누구인가를 묻고 싶은 것이 아니였는지도 모른다.선악의 문제에 대해 더 집요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누구도 범인이 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해야 할까? 범인이란 심증이 있어도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기각되는 경우를 너무 많이 보아서일까?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베르라하 경감의 말은 너무 무섭다."나는 자네가 저지른 범죄를 유죄로 입증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네.그렇지만 이제 나는 자네가 저지르지 않은 범죄를 유죄로 입증할걸세."/108~109쪽 인간의 죄는 사법부에서 판결한다.그러나 미심쩍은 판결을 마주할때면,이 소설처럼 스스로 범죄자를 찾아 처단하고 싶은 마음도 생길수 밖에 없지 않을까? 베르라하와 함께 수사를 했던 찬츠의 캐릭터는 다소 힘이 약해 보였다는 생각이 들었지만,베르라하의 시선을 따라가는 지점은 재미있었다.살인 살건이 벌어졌고,범인을 추적해가는 과정인데,누가 범인가보다 다른 질문들이 더 많은 재미를 주는 신기한 소설이다.

 

"누구든 정의를 거론하려면 그가 오로지 빵 광주리에 매달린다는 혐의에서는 벗어나야 합니다.당신의 불행에서 당신이 지금 걸친 해진 바지에서 빠져나오시오"/203쪽

 

<혐의> 는 <판사와 형리>보다 더 구체적이고,직접적이며,집요하게 선과악에 대해 물어온다.<판사와 형리>와 다른 성질의 이야기일줄 알았는데,스토리도 이어진다. 하나의 사건을 마무(?)한 노수관은 수술을 받기 위해 의사친구인 병원을 방문하게 된다.거기서 우연히 보게된 라이프지에 실린 사진 한장.단순한 사진이 아니라,나치시럴 강제수용소에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살인하고 실험을 한 의사 엠멘베르거.그의 정체는 다른듯 같은 인물과 혼선을 주기도 하고,그러나 과학적 기술보다 자신의 직관을 믿는 수사관은 본능적으로 엠멘베르거의사에게서 나치의 냄새를 맡게된다.해서 그가 있는 병원으로 돈키호테처럼 들어가 정의에 대해,선악의 문제에 관해 설전을 벌인다.조금 당혹스러웠던 지점은 의사를 도와주는 또 다른 의사가 쏟아 내는 열변인데,그녀의 말이 구구절절 옳지만,소설의 흐름이 조금 매끄럽지 않게 느껴졌다.날것 같은 구성의 서먹함만 빼고 보면,이 작품 역시 연극으로 만들어도 흥미롭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엘렉트라로 인해 '정의'라는 문제에 집중하고 있어서인지,요즘 벌어지는 뉴스를 보면서 가장 많이 하고 있는 생각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궤변을 늘어 놓는 엠멘베르거의 논리도 절대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정의와 선악에 대한 딜레마... 수많은 사람을 죽인 전범을 그 피해자 가운데 한사람이 그를 죽였을때,그럼에도 살인은 허락될수 없다는 논리에서 자유로울 없음이 답답했다.법대로 처벌 받을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참 좋을텐데...<판사와 형리>는 범인을 추적하는 재미와 함께 법이 법대로 처벌되지 못함에 대해 생각하는 재미가 있었다면 <혐의>는 추리물이란 느낌보다, 정의와 선악에 관한 철학적 담론을 이야기로 풀어 놓은 수만가지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은 생각을 했다.그러니까 소설 읽는 재미는<혐의>보다 <판사와 형리>가 좀더 있었다는 말이다~^^

w*******i 2018.05.17.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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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판사이고, 누가 형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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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작가로만 알고 있었던 프리드리히 뒤렌마트를 추리소설로 만나다니. 작은 설렘과 기대 속에《판사와 형리》를 펼쳤다.소설은 정차된 벤츠 안에서 젊은 형사 슈미트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시작된다. 죽음을 앞둔 노수사관 베르라흐는 동료 찬츠와 함께 사건을 추적하며, 40여 년 전부터 이어져 온 숙적 가스트만과 다시 마주한다. 터키의 한 술집에서 시작된, “결코 입증할 수 없는 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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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작가로만 알고 있었던 프리드리히 뒤렌마트를 추리소설로 만나다니. 작은 설렘과 기대 속에《판사와 형리》를 펼쳤다.

소설은 정차된 벤츠 안에서 젊은 형사 슈미트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시작된다. 죽음을 앞둔 노수사관 베르라흐는 동료 찬츠와 함께 사건을 추적하며, 40여 년 전부터 이어져 온 숙적 가스트만과 다시 마주한다. 
터키의 한 술집에서 시작된, “결코 입증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겠다”는 가스트만의 도발은 베르라흐의 평생을 지배해 온 약속이 된다.

이 작품의 반전은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누가 범인인가에만 몰두하던 독자에게, 뒤렌마트는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무엇이 정의인가.

법이 닿지 못한 악을 마주했을 때, 개인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 베르라흐는 스스로 가스트만에게 “나는 자네를 이미 심판했네”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자신이 고른 ‘형리’가 그를 처형할 것이라 말한다.

수사관이 판사가 되고, 또 다른 이를 형리로 세우는 순간, 정의는 여전히 정의로 남을 수 있을까. 소설은 그 경계가 생각보다 쉽게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악인이 처단되는 장면에서 느꼈던 안도감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작가는 통쾌함 대신, 그 통쾌함의 근원을 묻게 만든다. 정의를 향한 갈망과 폭력의 그림자는 어쩌면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가스트만의 죽음 이후 남는 것은 승리의 환희가 아니라 고요한 공허다. 베르라흐는 그의 시체 앞에서 망각의 기도를 드린다.
“망각이야말로 분노의 불길에 타오르는 심장을 달랠 유일한 은총 아니랴.” (p.119)

오랜 집념 끝에 도달한 자리가 단죄가 아니라 잊힘이라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우리는 과연 정의를 원하는가.
아니면 정의의 이름으로 심판하고 싶은 것일 뿐인가.
v*******7 2026.02.2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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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단죄의 문제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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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일견 문학과 대립되는 듯 보이지만, 양자 사이에는 교차하는 지점도 있다. 문학은 세계의 인식에 관한 문제를 주제로 다룰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 인간들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갈등과 규범의 문제를 다룬다. 그 때문에 이에 해당하는 법과 도덕은 문학의 중심주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법학자가 동시에 작가로 활동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며, 수많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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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은 일견 문학과 대립되는 듯 보이지만, 양자 사이에는 교차하는 지점도 있다. 문학은 세계의 인식에 관한 문제를 주제로 다룰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 인간들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갈등과 규범의 문제를 다룬다. 그 때문에 이에 해당하는 법과 도덕은 문학의 중심주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법학자가 동시에 작가로 활동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며, 수많은 작품에서 법 자체가 테마로 다루어지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물론 법이 문학작품에서 다루어질 때는 주로 부정적 맥락에서이다. 법이 갖고 있는 현실적 한계를 문학이라는 허구적 공간에서 성찰하고 그 에 대한 개선가능성 내지 대안을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이때 필연적으로 도 덕담론이 함께 등장하며 정의의 문제가 같이 논의되곤 한다. 뒤렌마트 역시 법과 정의의 관계에 대해 그 누구보다 많은 관심을 보인 작가이다. 특히 <판사와 형리>에서는 법적으로 체포할 수 없 는 살인범을 처단하기 위해 신의 대리인을 자처하며 실정법을 자연법으로 대체 하려는 인물의 행동, 즉 정의추구에 담긴 광기와 폭력성이 비판된다. 또 다른 작품인 <사고>에 서는 은퇴한 법조인들이 모의재판 게임을 통해 도덕적으로 문제 있는 한 인간을 자살하게끔 만드는 상황을 통해 또 다른 법의 폭력성을 고발한다. 하지만 이 두 작품이 법이라는 주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기보다는 비유적 차원이나 유희적 차원에서 다루는데 반해, "법"에서는 현직 변호사, 검사, 범인이 등장하며 보다 구 체적인 법의 영역이 다루어진다. 뒤렌마트가 현실과 허구, 삶과 미학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메타적인 차원에서 성찰하며, 그리고 현실과 허구, 삶과 미학의 문제에 대한 또 다른 입장은 어떠한지 작품을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i**********s 2019.01.29.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