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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말 소련의 붕괴, 동·서 독일의 통일로 사회주의가 몰락하였다. 오늘날 거의 모든 나라는 자본주의를 기본체제로 선택하여 경제활동을 한다. 그동안 자본주의는 많은 다른 경제이론들과 싸워왔다. 결국 자본주의는 승리하였고 다른 경제체제보다 그 우월성을 입증하였다고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해서 자본주의가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현재에도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그 목소리를 잃지 않고 있으며 이를 반박하는 의견도 여전하다. 위의 두 책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칼 마르크스와 막스베버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옹호로 볼 수 있다. 이 두 학자는 영국에서 시작된 자본주의가 유럽대륙으로 확산되어 제국주의 시대로 나아가는 시기에 자본에 관한 글을 남겼다. 21세기가 시작된지 10년이 넘게 흘렀지만 두 지식인의 저서는 그 시대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언급된다. 이들 저자는 역사와 인간에 대한 통찰력으로 당대의 ‘자본’을 바라본 것이다. 마르크스와 베버는 자본주의의 결과로 나타나는 ‘부의 집중’을 모순으로 본다. 하지만 부의 집중을 해결하는 방법이 달랐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부의 집중을 인간(자본가)의 탐욕의 결과로 보았고 결국은 “수탈자가 수탈당하는”(1050쪽)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 부가 ‘공동에게 분배’되어 해결될 것으로 보았다. 반면 베버는 프로테스탄트의 윤리로 자본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하였다. 자본가가 자본을 올바르게 사용한다면 혁명을 통한 부의 공동배분이 아니더라고 충분히 부의 이익이 모두에게 돌아가게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베버는 자본을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하는 윤리인 청도교의 금욕주의의 필요성을 언급하였다. 마르크스와 베버의 논의의 차이는 ‘정신’으로 ‘제도’의 통제가능성에 기인한다. 즉,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라는 ‘물질적 생산 제도’가 정신보다 상위에 위치한 개념으로 보아 제도가 정신보다 선행하므로 윤리로 자본주의를 제어하는 것이 어렵다고 보았다. 이와 달리 베버는 제도보다 정신이 앞선다고 보고 윤리로 자본주의의 부작용을 해결가능하다고 보았다. 두 학자의 상반되는 관점은 궁극적으로 ‘실제의 도덕 규범’이 되는 윤리가 어느 위치에 있으며 사회문제의 해결가능에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에 물음을 던진다. 다시 말해 윤리가 시장의 도덕적 한계를 극복하여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작년(2010년)의 우리 사회의 화두는 ‘정의로운 사회’였다. 마이클 센델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베스트셀러였고, 이명박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언급한 ‘공정사회’도 도덕의 기준과 역할에 관한 것이었다. ‘정의’에 대한 열풍은 우리나라도 더불어 잘사는 사회에 고민하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베버가 제시한 윤리(도덕)로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것은 확실한 해결책으로 보기 어렵다. 자본주의 맹주 격인 미국은 1·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대국이 되었지만 레이건 정부 이후 사회적 통합을 해칠 정도로 빈부격차(지니계수의 지속적 증가가 보여주듯)가 커졌다. 빌 게이츠나 웨런 버핏같은 일부 자본가들의 기부는 이러한 문제점을 희석시키지만 자본주의의 문제를 자본가의 윤리에 맞기기는 불안하다. 마르크스의 주장처럼 혁명으로 부를 공동에게 배분하는 것도 옳지 않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등장한 소련은 부를 공동에게 분배한 것이 아니라 혁명에 동참한 주요 간부나 당에 충성하는 소수의 당원에게 집중적으로 분배했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인간’ 존스를 몰아낸 동물들이 ‘돼지’ 나폴레온에게 더 심한 대우를 받았듯이, 대부분 인민의 상황은 혁명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마르크스가 인간을 바라보는 통찰력은 결과적으로 베버보다 훌륭했으나 사회주의 또한 인간의 욕심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소련의 ‘사회주의 실험’에서 보여주었다. 자본주의 병폐를 해결하는 것은 자본가도 아니고 혁명도 아니다. 존 롤스의 '정의론'이나 센델 교수의 책은 우리에게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정의를 구현하는 방법)으로 시민들 간의 ‘사회적 합의’를 제시한다. 롤스가 말한 ‘무지의 장막’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더라도 “사람들은 제각기 사회 전체의 복지로도 짓밟을 수 없는, 정의에 근거한 불가침성”으로 “정치 교섭이나 사회적 이익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마이클 센델'왜 도덕인가'159쪽) 정의에 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사회적 합의는 공정한 규칙아래에서 대화와 토론이 필요하다. 시민의 기준이나 합의의 방식 등은 사회적 쟁점이지만 분명한 것은 마르크스나 베버의 시기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으며 진지한 토론들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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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도 말했지만 개인의 역량으로 운명을 개척해 나간다 어쩐다 하는 스탠스가, 이를테면 계몽주의라든가 문명의 진보와 연결되기 십상이라 이를 놓고 근대의 탄생으로 연결시키기가 쉬울 듯한데, 근세를 열어 젖힌 두 동력 중 하나인 "종교개혁"은 적어도 칼뱅의 교의만 놓고 보면 오히려 문언상으로는 그 반대인 듯합니다. 구원을 받고 안 받고는 신이 이미 다 정해 놓았다는 "예정설"은 그 외피만 보면 아주 쌀쌀맞은 문지기의 퇴짜를 대하는 듯한 느낌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 실상은 많이 다르며, 오히려 어설픈 자선의 시늉, 진심 없는 회계의 "제스처" 따위가 신을 상대로 펼치는 어설픈 속임수가 될 수 없다는 준엄한 꾸짖음에 가깝다고나 해야겠습니다. 하긴 원죄를 갖고 태어난 인간이 아무리 회심하고 거듭난다 한들 더러운 때를 깨끗이 씻을 수가 없다는 결론이, 오히려 더 앞뒤가 맞아떨어지는 신학적 이론 체계를 구성하기도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