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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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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촛불집회 1주년'을 맞은 5월 2일. 서울 도심에서 열린 집회 현장에서는 서울역과 서울광장·청계광장 등에서는 경찰의 원천봉쇄가 이루어 졌으며 봉쇄하려는 경찰과 시위대간의 충돌도 잇따랐다. 또 일부 시위대의 무대 점거로 '하이서울페스티벌' 봄 축제 개막 행사가 전면 중단됐으며 이 과정에서 시위 참가자 가운데 112명이 연행됐다는 씁쓸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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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촛불집회 1주년'을 맞은 5월 2일. 서울 도심에서 열린 집회 현장에서는 서울역과 서울광장·청계광장 등에서는 경찰의 원천봉쇄가 이루어 졌으며 봉쇄하려는 경찰과 시위대간의 충돌도 잇따랐다. 또 일부 시위대의 무대 점거로 '하이서울페스티벌' 봄 축제 개막 행사가 전면 중단됐으며 이 과정에서 시위 참가자 가운데 112명이 연행됐다는 씁쓸한 기사를 접했다.  이 책은 “1987년 이후 가장 강렬하고 심지어 화려했다 할 정치적 동원인 ‘촛불시위’가 정작 아무런 정치적 효과도 만들어내지 못한 것에 대해서 더 이상 정치엔 희망이 없다는 체념적이고 반동적인 유혹에 굴복하지 않으려면, 고통스럽지만  '촛불시위'에 대하여 사유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이 책은 '당비의 생각'이 두번째로 펴낸 시대의 담론을 엮은 책으로 모두 3부로 구성되어졌다. 1부는 '운동의 사회학을 넘어 민주주의의 정치학'에서는 촛불을 '운동의 정치'로 분석하고 있다. 섣부른 낙관론에 투항하는 것을 넘어서는 비평도 담고있으며  그것은 무엇보다 촛불을 민주주의적 사태로 무조건적으로 단언하려는 암묵적인 주장에 거리를 두려는 시각이다. 2부는 촛불의 '문화정치학'적인 해석으로 다양한 문화적 감성과 의례, 상징과 지식들이 동원된 실천이었다고 본다. 애매하고 막연한 불만과 공감을 통해 형성된 촛불이 효과적인 정치적 행위로 이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물론 거기에 참여하는 주체가 자신을 지배받는 주체로 스스로를 의식화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3부는 촛불에 참여한 주체들의 정체성을 보다 섬세하게 짚고 있다.

 

 

“…촛불집회를 분석하는 이론들이 보여주는 ‘낙관주의’는 매우 우려스럽다. 이론은 촛불집회에서 나타나는 대중의 자율성의 낙관적 측면을 강조하기보다, 그 자율성이 넘어서지 못하는 경계들을 적극적으로 지적하고 그 한계를 드러내는 입장을 채택했어야 했다. 그런 점에서 이론은 늘 오히려 ‘비관주의적’이어야 하며, 대중에 대한 상찬으로 가득한 이론적 낙관주의는 결국 대중 스스로 환상에 빠져들게 하고 정세의 엄혹함을 회피하게 만드는 알리바이에 불과할 수 있다. 더욱이, 정세에 대한 잘못된 판단에 기초해, 절망 속의 대중들이 표출하는 탈정치화의 전망을 대중적 봉기로 오해해서는 안 되는 시점에 등장하는 이론적 오해는 대중에게 독이 될 수 있을 뿐이다.”(p.49. 경계를 넘어서 연대로 나아가지 못하다 -촛불의 낙관주의에 대한 어떤 우려, 백승욱)

 

촛불은 확실히 기존의 정치에 대한 반발로 등장했다. 초장집이 말허고 있는 대의제 민주주의 위기가  촛불을 발생시킨 것이다. 촛불이 기성 정치권을 부정하는 양상을 띤 것은 여기에 참여한 세력이 지금까지 정치에서 배제 당해왔던 이들이었다. 보수도 진보도 수렴할 수 없었던 요구가 분출한 것이다.  이런 "이례적 현상"을 만든 이들은 바로 10대들이었다. 촛불 이전까지 한국 사회에서 10대들은 보이지 않는  '투명 인간'이었다. 그러나 이런 규정은 10대들이 한국 사회에서 중요하지 않다거나 필요 없는 존재라는 뜻이 아니다. 10대 들은 어른들의 분신으로 존재했을 뿐이라는 뜻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10대들은 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닌 어중간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어른들의 입장에서 보면 10대들은 '보호'를 필요로 하는 연약한 존재이거나 아니면 '머리에 피도 안마른 주제'에 어른 흉내나 내는 건방진 존재였다.(p.57 ~ p.58)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지난해 5월 2일부터 본격적으로 점화되었던 촛불집회는 국민주권시대를 열었던 신화창조의 신호탄이었다. 시작은 이명박 정권이 국민의 생명을 볼모로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를 전면 수입 개방함으로써 촉발되었지만 그 저변에는 민심을 거역한 독재회귀 정권에 대한 강한 분노와 불신이 촛불로 승화된 것이다.
초기 촛불집회의 주연은 분명 10대 청소년들이었다
. 촛불의 상징과도 같았던 10대 청소년들은 분명, 20대 대학생들보다 훨씬 사회 참여적이었다. 학교에서는 난리가 났다. 장학사와 선생님이 동원돼 학생들 집회 참여 못하게 막으려고 청계광장에 배치되었고 경찰은 촛불집회에 참여 했다가 검거당한 학생들에게 다시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반성문을 쓰게한  처사나 모두 비판받아 마땅한 어른들의 행동이었다. 그들에게도 인권은 분명 있다.  그러나 청소년들에겐 선택권이 없다. 0교시 부활이나, 미국 쇠고기 급식이나, 일제고사 응시여부를 청소년들이 선택할 정치적 통로는 사실상 막혀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학생들이 강력한 상실감에 거리로 나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혐오의 감정은 휴머니즘과 민족주의와 웰빙 정서가 묘하게 섞여 있었다.

k****0 2009.05.1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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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촛불을 끄지 않았다.
"나는 아직 촛불을 끄지 않았다." 내용보기
2008년 나는 왜 촛불을 들었던가? 매주 주말이면 왜 서울 행 버스에 몸을 실어야 했던가? 그리고 그토록 빨리 촛불을 내려놓고 일상으로 돌아온 이유는 뭘까? 채 일년도 지나지 않아 그 뜨거웠던 촛불의 열기가 식어버린 나에게 다시금 그날을 추억하게 만든 책이 있다. 바로 당대비평에서 출판한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였다. 책은 뭔가 부족하고 뭔가 아쉽다는 느낌을 지울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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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나는 왜 촛불을 들었던가? 매주 주말이면 왜 서울 행 버스에 몸을 실어야 했던가? 그리고 그토록 빨리 촛불을 내려놓고 일상으로 돌아온 이유는 뭘까? 채 일년도 지나지 않아 그 뜨거웠던 촛불의 열기가 식어버린 나에게 다시금 그날을 추억하게 만든 책이 있다. 바로 당대비평에서 출판한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였다. 책은 뭔가 부족하고 뭔가 아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촛불시위(이하 촛불)에 관한 기억들을 정리하는데 꼭 알맞은 내용을 담고 있다. 촛불의 의미와 촛불의 한계 그리고 각기 다른 스펙트럼으로 정리된 촛불의 미래까지, 여러 필자의 글은 촛불의 다양성만큼이나 다채롭게 전개된다.

촛불이 가진 한계에 대해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역동성을 동반한 강력한 정치적 힘으로 발전하지 못함.
-단순 먹거리인 쇠고기 문제에만 초점이 맞춰져 촛불이 사회적으로 심각하게 부각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사회 최약자들과 연대한 거국적인 사회운동으로 진화하지 못함.
-제도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지 못한 채 축제로만 끝나버린 촛불로 말미암아 이후 전개된 공안정국과 용산 참사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촛불정신의 한계.
-일상의 대대적인 변혁을 주도하지 못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는 사실만으로 스스로 만족한  촛불주체들의 한계.


이외에도 다양한 의견들과 주장들이 책에 담겨 있다.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많고 생소한 학자들의 이름도 빈번하게 등장하는 글도 있다. 그런 소소한 부분을 떠나 이 책은 촛불이 가진 한계를 나름대로 충실하게 파고들었다. 그래서였을까? 기존 언론들이 보낸 촛불의 잠재력이니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새롭게 진화했다느니,  다중지성이 어떠니 하는 등의 찬사에 익숙해졌던 나에게 책은 꽤나 독한 약으로 작용했다. 입에 쓴 약이 몸에 좋다고 했던가? 책은 그만큼 나를 꽤나 진지한 고민 속으로 이끌었다.


나는 왜 그렇게 쉽게 촛불을 끌 수밖에 없었을까? 나약하고 비겁한 그리고 너무도 쉬운 일상으로의 회귀는 촛불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일까?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금 시대가 급진적인 혁명을 필요로 하는 시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거 사회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생각하던 프레임은 지금의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시대의 변화는 사람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르고 다양하다. 2008년 촛불의 시작이 청소년들이란 사실은 시대의 변화를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는 증거이다. 그렇기 때문에 촛불의 의미를 탐색하고 그 미래를 점쳐보는 일 또한 쉬운 작업은 아니리라. 촛불의 미래가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더욱 희망적인 방향으로 진화하리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을 내려본다. 그래서 성급하게 촛불의 한계를 이야기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아니 촛불은 한계가 없이 발전할 것이라 생각한다. 인류가 지금껏 발전해 온 것처럼 말이다.



파울 클레의 그림이 있다. 앙겔루스 노부스라고 하는, 천사 하나가 그려져 있다. 마치 그의 시선이 응시하는 곳으로부터 떨어지려고 하는 듯한 모습으로. 그의 눈은 찢어졌고, 입은 벌어져있으며, 그의 날개는 활짝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는 아마 이런 모습이리라. 그의 몸은 과거를 향하고 있다. 거기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우리 눈앞에 제 모습을 드러내고, 그 속에서 그는 단 하나의 파국만을 본다. 끊임없이 폐허 위에 폐허를 쌓아가며 그 폐허들을 천사의 발 앞에 내던지며 펼쳐지는 파국을, 아마 그는 그 자리에 머물러 죽은 자를 깨우고, 패배한 자들을 한데 모으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한줄기 난폭한 바람이 파라다이스로부터 불어와 그의 날개에 부딪치고, 이 바람이 너무나 강하여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가 없었다. 이 난폭한 바람이 천사를 끊임없이 그가 등을 돌린 미래로 날려 보내고 그 동안 그의 눈앞에서 폐허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아만 간다. 우리가 '진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이 폭풍이리라.     -발터 벤야민『역사의 개념에 관하여』


우리가 생각하는 파라다이스가 어쩌면 공허한 꿈에 불과할는지 모른다. 현실의 수많은 문제들을 촛불로 모두 해결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은 희망을 잃지 않고 날개를 접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현실이 파국으로 치닫고, 폐허에 폐허가 쌓이더라도 말이다. 촛불이 아직 꺼지지 않았음은 우리의 희망이 꺼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천천히 돌아서 가더라도 갈 수 있다는 희망까지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 희망을 부여잡기 위해 난 아직 촛불을 끄지 않았다.

j*****c 2009.05.09.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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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내용보기
이제 솔직히 고백하건데, 1년전쯤 세상의 곳곳을 환히 밝히던 촛불들의 행진이 있었을 때 나는 가끔 기도할때 초를 켜던 것조차 하지 않고 촛불집회에도 가본적이 없었다. 아니 솔직한김에 정확히 얘기하자면 한 두어번쯤 간절한 소망을 담고 그들과 함께 하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내 방에 촛불을 켠적은 있다.이렇듯 내가 생각한 촛불은 소망의 발현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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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솔직히 고백하건데, 1년전쯤 세상의 곳곳을 환히 밝히던 촛불들의 행진이 있었을 때 나는 가끔 기도할때 초를 켜던 것조차 하지 않고 촛불집회에도 가본적이 없었다. 아니 솔직한김에 정확히 얘기하자면 한 두어번쯤 간절한 소망을 담고 그들과 함께 하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내 방에 촛불을 켠적은 있다.
이렇듯 내가 생각한 촛불은 소망의 발현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런데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는 무척이나 많은 생각을 하게 했나보다. 어쩌면 내가 갖고 있던 소박한 '소망'의 발현이라기보다는 좀 더 강한 우리의 의지를 보여준 대중의 힘을 보여준 승리였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개인적 이기주의의 일종으로 자신과 자신 가족의 먹거리 안전에 대한 불안때문에 거리로 나온 이들이 대다수였는지도 모르겠고 억압되고 억눌린 십대들의 분화구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는 그러한 모든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사실 작년 한 해, 촛불과는 무관하게 그렇게 무심하게 살았던 나로서는 이 모든것이 익숙하면서도 낯설기만 하다. 이렇게 무심한 나에게 촛불시위에 대한 담론은 때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맞장구를 쳐보게도 하고, 때로는 심장을 후벼파는 듯한 아픔의 각성을 느끼게 하기도 했다.

이 책은 촛불시위를 '운동의 정치'의 위기 속에서 사유할 필요를 절감하고, 이는 한국 민주주의와 정치의 관계를 사유하기 위한 필수적인 질문을 구성하며, 1부에서는 촛불을 '운동의 정치'로 분석한다. 내가 어렴풋이 느꼈던 것처럼 촛불을 민주주의적 사태로 단정짓는것에 거리를 두고 촛불의 주체를 정치적 주체로 반성하는 것이다.
2부에서는 촛불의 문화정치학을 짚는다. 통속적인 괴담과 전문적인 과학지식과 정보들이 오가며 학술적 논쟁이 공존하고 직접적인 욕구가 분출하면서도 공동체적인 열광을 조직하는 도덕적인 열기가 뒤덮기도 하는 복잡한 문화적 역학이 촛불이었음을 떠올리며 촛불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관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3부에서는 촛불에 참여한 주체들의 정체성을 보다 섬세하게 짚어보려고 시도한다.

촛불 시위의 시작과 결집력은 대단했지만 그것의 결과가 어떻게 이어졌는가에 대한 비판은, 촛불시위에서 한참이나 떨어져 있으면서 산너머 불구경하듯 바라봤던 나의 관점에서 봤을 때 좀 정당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촛불이 꺼져버리고 있는 이유는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고 있다고 믿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중산층의 인식을 하고 있는 이들이 개인과 가족 이기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탓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거리로 나온 수많은 이들이 광우병에 대한 염려와 걱정으로 수입소 반대를 외쳤지만, 그러한 외침이 좀 더 구체적이고 주체적인 삶의 모습을 바꿔야한다는 것에 대한 공동체의식으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한 탓일 것이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 나는 솔직히 '배운여자'라는 표현이 맘에 들지 않았고, 그렇게 말하는 이들의 내면에는 오로지 '내가 좀 배워서 아는데, 내게 나쁜것쯤은 알고 있고 그걸 거부할만큼의 자의식은 있어'일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오로지 자기자신만이 중심인 것이다. 조금은 마음 아픈 이야기이긴 하지만 숫자로 본 결집력과 성과만을 바라보지 않고 이처럼 촛불에 대한 반성과 비판 담론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수 있고 또 한편으로는 조금 늦긴 했지만 이제 새로운 촛불을 밝힐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일일 듯 하다.

내게 있어 촛불은 기도할 때, 혹은 정전되었을 때 켜는 것 이상의 의미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의미는 내 안에 담겨있는 소망을 간절히 바랄 때, 그리고 어둠이 덮쳐올 때 세상을 환히 밝혀주는 것이기에 우리가 수많은 촛불을 켜기 시작하는 것은 더 깊은 의미를 상징하고 있다. 촛불이 사그라들고 이미 꺼져버렸다고 하지만, 여전히 지금도 촛불은 하나둘 살아나기 시작하고 켜지고 있다고 믿는다.
촛불집회와 관련하여 대법관의 하향식 이메일이 공개되어 논란이 되고 있고, 사법부 자체의 개혁움직임이 조금씩 보이고 있다. 촛불집회가 우리의 삶의 방향과 무관할수는 없는 것처럼 사법부의 거취 역시 우리와 무관할수는 없으며 이 모든 연관성 안에서 우리가 세상을 밝히는 촛불을 든 주체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r***2 2009.05.1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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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이 보지 못하는 그림자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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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한 해는 의미심장한 한 해였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하여 경기도에 사는 한 고등학생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던 촛불집회(이하 촛불집회는 2008년 봄부터 시작된 그해 촛불집회와 관련한 모든 사건과 집회를 아우르는 의미로 사용합니다)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광장으로 시민들을 불러내었다. ‘촛불소녀’, ‘유모차부대’, ‘명박산성’ 등 신조어를 쏟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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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한 해는 의미심장한 한 해였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하여 경기도에 사는 한 고등학생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던 촛불집회(이하 촛불집회는 2008년 봄부터 시작된 그해 촛불집회와 관련한 모든 사건과 집회를 아우르는 의미로 사용합니다)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광장으로 시민들을 불러내었다. ‘촛불소녀’, ‘유모차부대’, ‘명박산성’ 등 신조어를 쏟아내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에서 시작하여 이명박 정부의 일방통행적이고 총체적인 부실 정책에 대한 항의로까지 이어져, 1987년 이후 새로운 시민운동과 의미심장한 민주주의의 실험 혹은 실천으로 이어지는 듯 했다.


하지만 촛불은 생각보다 의외로 빨리 꺼지고 말았다. 지금은 언제 그런 일이 있기나 했던가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오히려 이명박 정부의 법치주의를 가장한 국민들에 대한 압박은 날로 거세지고 있고, 우리의 현실은 더욱 악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우리가 촛불집회에 대한 너무 많은 낙관과 찬사에 익숙해져 있어서 우리만의 천국안에 갇혀있엇던 것은 아닐까. 냉철한 비판의식과 촛불집회를 되집어보는 시간을 가지지 못한 채 앞으로만 나아간 결과가 아닐까.


지금 이 시점에서 촛불집회를 되돌아본다는 것이 시간적으로 조금 늦은 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촛불집회에 대한 날카롭고도 면밀한 반성과 사유없이는 촛불집회는 한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아직도 촛불집회는 현재진행형이다. 촛불이 계속 타올라 계속 진화하여야 한다는 점에서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회과학적 연구는 의미심장하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제1부 ‘운동의 사회학을 넘어 민주주의의 정치학으로’ 에서는 촛불집회를 ‘운동의 정치’로서 분석한다. 이는 촛불집회의 주체가 민주주의의 정치적 주체로서 발전하지 못한 태생적 한계를 가졌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부르조아적 욕망의 구조와 동일시한 시민 주체가 자아낸 욕망의 환등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촛불은 권력을 향한 선택을 할 수 있는 대안을 만들어내지 못한 채 오히려 현존하는 질서를 옹호하는 사태로 전락해가고 말았다. 이러한 견해들은 촛불집회가 가진 낙관주의를 비판하는 것이다.


제2부 ‘순수와 공포의 시대, 촛불의 문화정치학’ 에서는 촛불집회가 가진 다양한 문화적 스펙트럼을 분석한다. 촛불집회는 도덕적으로 순수성에의 집착이라는 모랄을 내세움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효력을 제한하는 한계성을 보였고, 광우병에 대한 담론은 과학이 괴담과 진실의 프레임 아래 어떻게 사회적 쟁점을 탈색하고 제거하는 일이 발생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정치적 주체로 도약하기 위한 계기를 탈근대적 종교 현상으로서 촛불의 시민종교적 특성에서 찾고자 하는 견해도 있었다. 


제3부 ‘새로운 질문들, 촛불을 든 새로운 주체는 누구인가’ 는 어떤 면에서는 1부의 연장선상에 있는 논의로서, 촛불집회에 참여한 주체들의 정체성에 대해서 짚어본다. 촛불집회의 70퍼센트를 차지했다는 여성 주체와 IMF 이후 보수화의 길에 접어 든 중산층, 그리고 배제된 사회적 주체들 속에서 구성된 촛불집회 주체의 보수적인 정체성에 관하여 분석한다.


사회과학적 연구에서의 분석은 구체적인 현장 연구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그리고 연구의 대상이 되는 특정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현장에 적합한 개념과 이론적인 틀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에서 언급되는 내용들은 기존의 촛불집회에 대한 여타의 책들과는 차별화된 느낌이었다.


다만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여러 명이다 보니 글의 편차가 느껴지기는 한다. 그 중에서도 은수미의 ‘촛불과 한국 사회 중산층의 자화상’은 단연 돋보이는 글이었다.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인 내용을 담은 글과 현장을 직접 발로 누빈듯한 이야기들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다. 그에 반해 몇몇 글은 너무 감성적이었고 다소 현학적인 느낌을 받아 실망스럽기도 하였다.


솔직히 이 글을 다 읽고 난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았다. 무리 속에 섞여 있을때는 나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없고, 그 무리에서 빠져나와 바깥에서 바라보면 좀 더 객관적으로 문제에 접근해 볼 수 있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촛불이 밝혀진 언저리는 보이지만 그 그림자 주변은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이다. 배제된 사회적 주체들과 관련한 이랜드 노조부위원장의 글과 연대성 상실에 대한 이야기는 폐부를 찌르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낙담할 필요는 없다. 지나간 일을 되돌아보는 것은 좀 더 나아가기 위한 반성과 사유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지은이들도 이야기하는 것처럼 촛불집회에 대한 논의는 촛불이 더 많이 더 빨리 그리고 더 밝게 타올라 주기를 바라는 염원인 것이다.


경제 현실은 날이 갈수록 더 힘들어지고 있다. 높은 실업률, 높은 자살률, 불안한 부동산 시장, 실물경제 위축 등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결이 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작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폴 크루그만이나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저자인 장하준 교수는 경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정치가 안정되어야 한다고 한다.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정치를 반성하고 비판할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기회를 가진다면 그보다 더 값진 일은 없을 것이다.


c*****1 2009.05.10.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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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랖 넓은 촛불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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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라는 제목을 보고 가만히 생각해 봤다.대외적으론 촛불은 꺼진 거처럼 보인다. 왜 그럴까?그리고 내 안에 촛불은 어떤 상태인가?나는 촛불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여러 면에서 분석하고 있는 책의 내용보다는 촛불에 관한 내 생각을 말하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며 내 안에 촛불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어졌다.4.19, 5.18, 10.26 이 숫자들이 뜻하는 바는?민주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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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라는 제목을 보고 가만히 생각해 봤다.
대외적으론 촛불은 꺼진 거처럼 보인다. 왜 그럴까?
그리고 내 안에 촛불은 어떤 상태인가?
나는 촛불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여러 면에서 분석하고 있는 책의 내용보다는 촛불에 관한 내 생각을 말하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며 내 안에 촛불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어졌다.

4.19, 5.18, 10.26 이 숫자들이 뜻하는 바는?
민주화를 위한 자의적인 발현으로 결국 전국민을 하나로 묶은 결과물이였다는 것이다.
군사정권과 독재정치에 신음하던 민초들이 하나로 모여 결국 거대한 세력을 굴복시켰던 거국적이면서 민주화의 꽃을 피웠던 날이였다. 적어도 10.26 이 지난 후에는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민초들의 손으로 이룬 민주화였기에, 민주화의 힘은 계속 될 줄 알았다. 적어도 세계 경제 불황이라는 회초리를 든 계모가 있었지만 의연히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경제 대통령을 표방하는 현 대통령을 뽑을 때까진 말이다.
물론 그는 말한다. 내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다고!! 난 정권교체의 희생양일 뿐이라고!!
지금은 오히려 그 주장에 더 힘을 쏟고 있을 것이다. 보아라~ 민주화의 꽃이네 어쩌네 하며 정치권에 뛰어 든 그 민권변호사는 결국 대통령이 되었지만, 지금 최대의 부패스캔들의 핵이 아니지 않느냐. 그런 그가 FTA를 주도했고, 난 그에 대한 엄한 희생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민초들은 바보가 아니라는 것이다. 힘으로 거대 권력으로 누르기만 하면 그저 죽은 척하고 지내는 그런 완전 바보가 아니였기에, 민초들은 또 한번 민주화의 꽃을 위해 분연히 떨치고 일어섰다. 그것이 촛불시위이다.
촛불시위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효순이 미선이를 위해 든 촛불이 있었다.  인간의 탈을 뒤집어 쓴 후안무치한 자들의 세치 혀로 꽃다운 나이로 세상여행을 일찍 끝내게 만든 죄를 그저 덮으려고 했던 그놈들을 향한 순수한 분노와 왜 제대로 된 목숨값마저 보장할 수 없게 만드는지하는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값의 부재에 대한 무력감에 민초들은 촛불을 밝혔다.
그러나 이때의 촛불은 개인적으로 촛불의 시초라고 생각되는 동학이나 형평사와 같은 대외적이고 확고한 명분이 부족했다고 본다. 순수한 분노만으로는 귀 닫고 입 닫고 사는 정부에게는 혹은 우방국이라는 되지도 않는 갑옷을 두른 미국에게는 통용되지 않았다. 그저 어중이 떠중이 모여 추모집회를 여는 걸로밖에는  인식되지 못했다.
그리고 FTA와 함께 쇠고기협상에 또 한번 촛불은 자신의 의지를 밝히기 시작했다.
이번엔 확실한 정치적이고 합리적인 명분을 함께 갖고서 말이다.
그리고 효순이때와는 달리 전국적이고도 거국적인 관심을 지피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없이 아니, 정치라는 단어만 알지 실제가 뭔지 모를 것이라고 무시했던 10대에서부터 시작된 촛불에 정부는 잠깐 기가 찼다라고 표현했으리라.
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뭘 안다고 그 시간에 국영수 중심으로 더 파야 좋은 대학 갈텐데, 요즘 것들은 저렇게 배 부르니까 딴 짓거리나 한다고 비야냥거렸다.
그러나 의외로 10대들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배운 20대나 30대보다 더 집요하고 강한 면모를 보여줬다.
난 이것이 그들의 순수함에서 비롯한 힘이라고 생각했다. 취업을 생각해야 하는 머리 복잡한 20대, 가장이 돼 토끼같은 마누라와 새끼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머리는 물론 마음까지도 복잡다단한 30대, 정년이 바로 코앞이라 노후보장에 가슴 떨리는 40,50대들은 잠자코 있을 때,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떤 것이 정말 미래적인 구상이 뭔지배운 대로 실천하는 아직은 순수한 10대들의 반란이였던 것이다.
그렇게 순수함이 만든, 강한 바람 한번이면 곧 꺼질 듯 미약하게 보였던 촛불은 곧 다른 이들에게도 퍼져 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배운 녀자가 등장하고, 예비군 부대가 나오고 아직은 뜨거운 심장을 지니고 있노라며 소리치며 거리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나는 이런 촛불이라면 현 정권에게 따끔하게 매질을 해 줄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했다. 적어도 국민들이 뽑아 준 대통령이라면,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국회라면 그래, 적어도 최소한의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렇게 모인 사람들의 뜻을 전부는 아니겠지만, 최소한 오해하지 않고 듣을 수 있는 귀는 가졌겠지라고 생각했던 나의 마음은 아직도 세상을 모르는 철부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나라경제 좀 살려 보라고 뽑아 준 그 대통령은 국민이 준 힘으로 국민을 억압하는 데 사용하기 시작했다. 촛불시위를 폭도들로 규정하고, 명박산성이라는 거대한 산성을 국민들에게 선보이고,  전쟁 앞에서는 남자도 여자도 없다는 전쟁영화가 단순히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걸 음대생 여학생을 군화발로 무참히 찍어 누르는 장면으로 적나라하게 보여 줬다. 그것뿐이랴. 언론을 교묘히 조작하여 진실을 감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라 일 잘하라고 뽑아 준 브레인들을 이용하여 촛불을 와해하는데 사용했다.
나는 명박산성이 나왔을 때 이때쯤이면 이젠 촛불도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유토론과 하나의 세력이 주도하는 그런 집회가 아니라 모두의 마음을 담기 위해 노력하는 촛불은 보기 좋다. 그것이 대의민주주의로써 실패한 현 정권을 위한 새로운 대안으로 보여줬다.  그러나 너무 사공이 많았던 탓일까. 아니면 서로 다른 곳을 바라 보는 동상이몽의 꼴이였을까. 확고한 무언가를 만들어야 할 갈림길에서 촛불은 갈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갈등을 보며 억압하는 그들은 확신했다.
아, 얘네들은 아무 것도 아닌 그저 거리로 뛰쳐 나온 이들일 뿐이다.
이들에겐 이 '다음'이 없다!!
그렇다, 촛불에겐 다음이 없었다. 고시철회를 외치기는 했으나, 어떤 식으로 어떻게 라는 방법론의 부재가 문제였던 것이다. 여러 가지 방향성을 갖자 의견에서 확고한 머리가 없는 상태의 촛불은 어떠한 문제도 확실하게 끌어 안고 고민할 수 없었다. 
내겐 아마 이때쯤부터 촛불이 미약해지기 시작했다.
명박산성에, 현 정부가 폭도로 규정하고 폭력으로 촛불을 누를 때 적어도 정권에 강한 가르침을 주고 싶다면 난 촛불이 어느 정도 무력을 행사했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 인도 간디는 그랬지. 무저항 무폭력이야말로 진정한 승리를 이끌어 낸다고.
그러나 특수성을 생각했어야지.
4.19나 5.18이 무저항으로 챙긴 훈장이였던가?
적어도 현 정권에는 그런 고차원적인 저항은 듣지 않았다.
그리고 때리는 사람에게는 장사없다는 속설은 맞아 들어갔다.
끝도 없이 때리는 데 촛불은 그만 지치고 말았다.
더 이상 고시철회 혹은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라는 대의는 촛불 내에서도 먹히지 않았다.
내 안에 내가 너무나 많아 라는 유행가 가사가 딱 맞아 떨어졌다.
그렇게 대외적으로 촛불은 사그라들었다.

왜 촛불을 끄셨냐며 정중하게 묻는 어투 뒤에는 왜 촛불이 꺼질 수 밖에 없었는지, 앞으로 어떤 촛불을 기대해야 하는지 이야기한다.
어떤 이는 민주화를 위한 새로운 담론이라고 이야기하고, 또 어떤 이는 촛불의 태생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래, 촛불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나타내는 하나의 계기가 되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과연 촛불은 꺼진 걸까?
아니, 아직 꺼지지 않았다.
촛불은 횃불이 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횃불이 되기 위해서는 정말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하나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난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당시에는 몰랐다.
왜 촛불은 한번도 비정규직이나 당시 떠들썩했던 철도노조나 이랜드나 혹은 외국노동자에 대해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을가? 책의 저자들처럼 정말 먹고 살만한 중산층들만의 촛불이였기에 다른 없는 사람들의 마음은 들여다 볼 여유가 없었던 것일까?
그럼 촛불은 명박산성을 준 이와 무에가 다른 건가?
결국은 자기 밥그릇 챙기기 위해 그런 거잖아. 안 그런가?
앞으로 촛불은 자기 밥그릇은 물론 건너 마을 사는 삼돌이네 밥그릇도 건너다 볼 수 있는 오지랖을 좀 키운 촛불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진정한 촛불이 되는 거겠지.
결국은 옛날 말 하나 그른 게 없다.
남의 맘 모르는 놈들은 하나같이 싸가지 없다고 하지 않던가.
싸가지 없는 촛불보다는 오지랖 넓은 촛불이 되자.
그것이 책의 저자는 물론 나의 생각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지금은 꺼진 듯 보이는 촛불은 곧 타오를 것이다.
그때 부디 오지랖 넓은 촛불이 되길 바란다.
s*****u 2009.05.05.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소나기가 장마로 변하기를 기다리며
"소나기가 장마로 변하기를 기다리며" 내용보기
촛불집회에 우리가 ‘모자람’을 느껴야 한다면, 그 까닭은 ‘고시 철회’를 이뤄내지 못한 것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합법적이고 정상적 시민’으로 안도했던 기억만으로 ‘타인의 고통’에 대해 눈 가린 우리의 태도에 있다.         1. 요약 。。。。。。。                                                                    작년 여름을 환하게 밝혔던 촛불집회에
"소나기가 장마로 변하기를 기다리며" 내용보기

촛불집회에 우리가 ‘모자람’을 느껴야 한다면,

그 까닭은 ‘고시 철회’를 이뤄내지 못한 것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합법적이고 정상적 시민’으로 안도했던 기억만으로

‘타인의 고통’에 대해 눈 가린 우리의 태도에 있다.

 

 

 

 

1. 요약 。。。。。。。                                                            

 

     작년 여름을 환하게 밝혔던 촛불집회에 관한 이론적 분석을 담고 있는 책이다. 목차에 나와 있는 것처럼, 여러 저자들은 각각의 눈으로 본 촛불집회에 관한 소회를 쓰고 있는데, 1부가 촛불집회의 정치적 의미에 집중하고 있다면, 2부는 그에 담긴 미학적 의미에, 3부는 실천적 함의에 관해 주로 논하고 있다.

 

     다양한 저자들의 촛불집회에 관한 평가는 서로 다르지만, 그들은 일관되게 ‘촛불’은 단순한 사회 현상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데 동의하고 있으며, 그 영향력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데에도 의견을 같이 한다. 하지만 지난 여름의 '촛불'이 가시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는 현실 앞에, 그 이유와 대안에 대해서는 약간 다른 관점을 제시해주고 있다.

 

 

 

 

2. 감상평 。。。。。。。                                                         

 

     지난여름, 우리나라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시간을 내서 차분하게 되 집어 보는 것은 결코 낭비가 아닐 것이다. 연인원 수 백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전국에 걸쳐서, 수십 일 동안 모여 같은 구호를 외치는 경험은 지난 2002년 월드컵 이후로 그리 드문 장면은 아닌 것이 되었지만, 지난여름의 그것은 단순한 유희나 즐거움을 위한 희구가 아니라 좀 더 실제적인 삶의 필요를 위한 투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아는 후배들에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잘 지켜보라’고, ‘우리는 지금 역사의 중요한 기점에 살고 있는 거라’고 말하고 다녔던 기억도 난다.

 

     하지만 그 결과는 딱히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이라는 게 우리 시대가 접하고 있는 슬픈 현실이다. 정부는 소나기만 피하고 보자는 식으로 한창 시위가 고조되었을 때는 입을 다물고 있다가 시간이 지나자 자신이 가진 칼을 동원해 가차 없이 반대했던 시민들을 잡아 보복하고 있고, 그토록 반대했던 고시는 강행했으며, 여전히 전국토를 파헤쳐서 국민 세금을 건설사들에게 퍼주겠다는 계획은 포기하지 않은 듯하고, 세계적인 경제위기는 사람들이 광장으로 모이는 것을 주저하도록 만들고 있다.

 

     ‘도대체 왜’라는 탄식이 저절로 나오는 상황에서, 이 책은 잘 조직된 결론은 아니지만, 여러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당시의 상황에 대한 이론적 분석을 제공해 주려는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을 해냈다. 특히 1부에서 이 작업은 촛불의 정치학적 의미를 분석해 내는 흥미로운 작업으로 정리되었고, 3부에서는 촛불이 부족했던 점과 나아가야 할 지향점에 관해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결과를 제시해주고 있다.

 

     내가 불만인 것은 이 책의 2부에 해당하는 몇 개의 글들인데, 지나치게 미학적 분석으로 치달아 ‘무식한 일반인들’(나도 여기 포함된다)은 알아듣지 못할 학자들의 책에서 인용한 구절들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며, 결론적으로 그저 좀 삐딱하게 보는 것 이외의 다른 결과물들을 내지 못한 글들이 제법 보인다. 서동진은 물론 클로드 르포르나 알튀세르와 같은 사람들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도 많다는 걸 모르는 지, ‘신뒤르케임주의 문화사회학’이니 ‘뒤르케임주의적 종교사회학’이 뭐니 하는 것들은 그들의 리그에 가서 떠들며 즐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이런 평가는 어디까지나 내가 ‘무식한 일반인’이기 때문이고, 그 중에서도 촛불집회에 관한 건전한 인식에 현대인들의 ‘과학주의’ 혹은 ‘증거주의’가 끼친 악영향에 관한 것처럼 쉽고 유익한 글도 있긴 했다.

 

 

     몇 달간 쏟아졌던 소나기는 지나갔다. 비록 그것이 몇 달에 걸쳐서 일어났긴 했지만, 난 아직 장마가 오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국지성 호우는 그저 우산을 챙기거나 장화를 꺼내도록 만들 뿐이지만, 장마는 외출에 대한 의사 자체를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만든다. 이 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외출에의 의지를 버리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외출은 좀 더 많은 사람들을 집에 주저앉힌 대가이자, 더 많은 사람들을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만드는 원인이기 때문에 문제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그 소나기를 분석하고, 어떻게 장마를 기다릴 지에 관한 여러 방법들을 제시하는 것은 꼭 필요한 작업이리라. 이 책이 그 모든 것에 대한 대안은 분명히 아니지만, 일단 이 책에 담긴 다양한 시각으로 그 때의 일을 한 번 정리를 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참, 사족을 붙이자면, 책의 제목은 나름 매혹적이지만, 책의 내용과는 딱히 ‘밀접한 관련’까지는 없는 것 같다



p*********n 2009.05.09.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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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을 왜 켜셨나요?
"촛불을 왜 켜셨나요?" 내용보기
2008년 촛불시위를 돌아보는 내용을 담은 책들을 찾아 읽고 있는 참이란 말씀은 드린 바 있습니다.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는 당대비평 기획위원회에서 엮은 책입니다. 인터넷 논객인 한윤형님의 “왜 우리는 무력한 촛불이 되었나”를 시작으로 13분의 필진이 촛불시위에 대한 나름대로의 소회를 펼쳐놓고 있습니다.   이 책을 기획한 계원디자인예술대 서동진교수가 쓴 ‘기
"촛불을 왜 켜셨나요?" 내용보기

2008년 촛불시위를 돌아보는 내용을 담은 책들을 찾아 읽고 있는 참이란 말씀은 드린 바 있습니다.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는 당대비평 기획위원회에서 엮은 책입니다. 인터넷 논객인 한윤형님의 “왜 우리는 무력한 촛불이 되었나”를 시작으로 13분의 필진이 촛불시위에 대한 나름대로의 소회를 펼쳐놓고 있습니다.

 

이 책을 기획한 계원디자인예술대 서동진교수가 쓴 ‘기획의 말’의 첫귀절이 “이명박정권의 패악이 날로 더해가고 있다. 이를 낱낱이 꼽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그저 우리가 할 말은 ‘더 말해 무엇해’ 정도일 것이다. 이에 더해 우리는 현정권의 무능에 마치 숨이 멎을 것 같은 기분이다.”라고 적고 있는 것으로 보아 책의 전반적인 기조는 현정부에 대하여 날선 비판의 시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예단이 가능합니다. 주제별로 3부로 나뉘어져 있는 글들은 1부에서 “운동의 사회학을 넘어 민주주의의 정치학으로”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촛불시위를 운동의 정치학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2부에서는 “순수와 공포의 시대, ‘촛불’의 문화정치학”이라는 제목으로 문화적 관점에서 촛불을 읽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굳이 문화와 정치를 한 바구니에 담을 필요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3부에서는 “새로운 질문들, 촛불을 든 ‘새로운 주체’는 누구인가”에서는 촛불시위에 참여한 주체들의 정체성을 살펴보는 글로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촛불이 사그라지고 지배권력이 대대적인 반격에 나선 지금 우리에게 ‘촛불’을 제도권 정치에 ‘되먹임’해야 하는 과제는 더욱 절실하다. ‘촛불’로 구현된 인민의 직접발언과 직접행동은 분명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빛나는 약속이지만, 현실의 특수한 국면에서 한정된 힘만을 발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촛불’ 주체들의 의지가 투표로, 일상적인 조직행동으로, 시민단체에 대한 지원으로, ‘순수하지 않은 시위들에 대한 지지로, 그리고 ’시민도 못되는 사람들에 대한 연대로 나타난다면, 촛불은 새로운 의미로 타오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우선 ‘불결한 것으로서 정치’, ‘오염된 것으로서 현실 정치’라는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의 경계를 옮겨놓는 작업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라는 요약글에서 처럼 필자들은 소멸된 촛불에 대한 아릿한 향수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촛불시위가 시작됐던 것도 벌써 2년이 되었습니다. 촛불에 대한 다양한 시각에서의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평가마저도 촛불시위 때와 마찬가지로 극명하게 색깔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필자들은 2008년 촛불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에 대하여 한없는 애정과 관용을 보이고 있지만, 정권에 대해서는 그다지 호의적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 책의 필자들은 글의 색깔로보아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신 분들로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촛불시위를 통하여 달성하고자 했던 목표에 이르지 못하고 촛불이 사그라든 것에 대하여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윤형님의 “왜 우리는 무력한 촛불이 되었나”, 백승욱님의 “경계를 넘어선 연대로 나아가지 못하다”라는 제목에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촛불시위를 통하여 반보수세력의 대결집을 이루어 막 들어선 보수정권을 무너뜨리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라는 제목을 달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지만 이명박정부는 분명 2007년 대통령선거를 통하여 확실한 표차이로 지지를 받은 정부입니다. 물론 대선 당시 지지했던 유권자들이 지난 해 촛불시위과정에서 실망을 하였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소수가 다수의 결정을 뒤엎을 수도 있다는 것은 군사쿠테타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진보와 개혁의 기치를 들고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참여정부가 집권기간 내내 얼마나 국민을 실망시켰으면 정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압도적인 표차로 정권재창출에 실패하였겠습니까? 그렇다면 참여정부를 지지했던 분들은 다수의 국민들의 선택을 받아들이고 국민이 원하는 그 무엇을 준비하여 다음 선거에 임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촛불시위가 일어난 계기가 특정 프로그램에서(의도적이었는지의 여부는 앞으로 밝혀질 것으로 보여집니다만)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을 지나치게 부각시켰고, 광우병에 대한 과학적 사실들이 왜곡된 채 인터넷을 통하여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지나친 공포감을 느낀 일반국민들까지 시위에 가세하면서 촛불시위의 규모가 커졌지만, 시간이 지나가면서 점차 냉정하게 진실을 돌아보게 되면서 진정국면에 접어든 것이라고 평가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도 블로그를 비롯하여 신문지상 등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만, 글을 쓸 때는 누군가 피해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에 사실여부를 꼭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신뢰할 수 없는 글이 넘쳐나고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글을 올리는 사람들이 사실여부보다는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 있는 무언가에 집착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제전망에 대하여 비관적인 전망을 인터넷에 올려 대중적인 관심을 끌었던 분이 그 뒤에 뚜렷한 회복세를 보이는 우리 경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반년 혹은 일년 뒤에 상황이 어떻게 될 것을 예측하는 일이 어렵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특히 미래를 예측하는 글을 쓸 때는 어려울 수밖에 없기 때문에 글쓰기가 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냐고 묻고 있는 기획자에게는 <그대는 왜 촛불을 켜셨나요?>라고 되묻고 싶습니다. 촛불을 켠 이유가 있어야 촛불을 끈 이유도 나올 것 같아서입니다. 사실 제목을 보고서는 조용필씨의 ‘촛불’이라는 노래를 생각합니다. “그대는 왜 촛불을 키셨나요?”(‘키다’가 아니라 ‘켜다’라고 해야 한답니다.)라고 묻고 있지만 답은 없는 듯 보이는 노래입니다. 그러면서 철없고 외로운 촛불이라고 꾸짖는(?) 가사가 이어지고, 촛불을 지키기 위해서 바람이 멈추어지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2008년 촛불시위에 촉매를 했던 사람들이 촛불을 켠 이유가 확실한 근거로 뒷받침되지 못했기 때문에 슬그머니 촛불현장에서 몸을 뺀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y*****2 2010.05.05.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