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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라서 다행이야 원장님을 만날 수 있었잖아.” 책 속의 구절이다. 이 책이 남긴 여운이기도 하고... 모든 동물은 양육이 중요하다. 생명을 유지해야 하니까. 그러나 본능에 해당하는 먹이 사냥 중심으로 만 양육하는 동물과는 다르게 인간은 다양한 감정과 지능이 있기에 그 양육 방식은 더욱 중요하다. 이미 가지고 온 유전자는 어떻게 할 수 없을지라도 양육과정에서 얼마든지 다르게 자라기 때문이다. 양육은 부모가 담당을 하고 아이들은 부모의 울타리 속에서 불완전한 세상에서 불안과 공포를 모르고 성장한다. 그렇다. 아이의 우주는 부모다. 우리는 모두 부모를 가지고 그 우주에 태어난다. 나도 그렇게 태어났고 다행히도 부모에게 버림받지도 타박 받지도 않고 자랐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모든 게 다 우울한 밤에>의 주인공 ‘나’는 태어나자마자 그 우주에서 쫓겨나 고아원에서 자란다. 그래도 운이 좋은 남자라 좋은 ‘고아원 원장’ 덕에 잘 컸다. 그렇지만 버림을 받았다는 그 자체로 우울한 남자다. 그 우울함은 세상에 대해 분노로 표출되고 그 때문에 직업인 교도관 생활이 위태위태하다. 그럼에도 범죄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은 이유는 원장이 주인공 ‘나’에게 보여준 세상이 그를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자살과 범죄는 이 세상에 지는 것이라고!” 원장이 자살하려는 꼬마를 잡으며 한 말이다. 그리고 인간이란 존재를 이렇게 알려준다. “너는 아메바 같은 거였어, 알기 쉽게 말하자면 ...” “이건 엄청난 기적이야. 아메바와 너를 이어주는 수십억년 세월의 끈, 그 사이에는 무수한 생물과 인간이 있어 어딘가에서 그 끈이 끊겼다면, 뭔가 일이 터져서 그 연속이 끊겼다면, 지금의 너는 없어.....” “ 현재라는 건 어떤 과거도 다 이겨버리는 거야. 그 아메바와 너를 잇는 무수한 생물의 연속은, 그 수십억년의 끈이라는 엄청난 기적의 연속은, 알겠냐. 모조리 바로 지금의 너를 위해 있었단 말이야.” 또 그는 “너는 아무 것도 모르지” “베토벤도 모르고 바흐도 몰라, 셰익스피어를 읽은 적도 없고, 카프카나 아베 고보가 얼마나 천재였는지도 알지 못해, 빌 에반스의 피아노도” “너는 아무것도 알지 못해, 이 세상에 얼마나 멋진 것들이 많은지. 내가 방금 말한 건 전부 다 보도록 해라” 주인공 ‘나’를 키운 원장의 양육 태도는 ‘나’가 버림받은 것에 대한 반항으로 세상에 대해 나쁜 사람이 되고 싶은 것과 잘 살아서 세상에 지지 않으려고 하는 두 갈래 길의 방황을 끝내고 안착하도록 만든다. ** 그러나 부모가 있다고 다 행운은 아니다. 주인공 ‘나’의 친구 ‘마시타’는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다 결국 자살을 한다. <모든 게 다 우울한 밤에>는 인간의 문제를 가족의 문제로만 보지 않고 이 사회에 속한 모든 인간들의 문제로 본다. 주인공 ‘나’와 미시타를 통해 아이는 좋은 부모를 만나야 하겠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아이를 키워내는 사회 속 구성원이 좋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싶어 한다. 아이를 잘 키워낼 수 있는 양육자가 훌륭한 사회 말이다. 훌륭한 사회 속에 속한 주인공 ‘나’는 원장에게 받았듯 그 받은 것을 실천한다. 두 사람을 살해한 고아이자 사형수인 18세의 ’야마이’ 야마이는 주인공과는 다른 양육 속에 살았다. 처음 태어날 때부터 얻어터지는, 그래서 얻어터지는 것을 피하면 또 다른 폭력이 그를 기다린다. 결국 약자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나쁘다는 인식도 못한 채 범죄의 길로 가게 되는 그런 삶. 사람들의 질타와 비난을 받은 야마이는 사형을 선고받고 그대로 죽기를 기다린다. 그런 야마이에게 ‘나’가 원장을 통해 얻은 따뜻한 인정을 건네다. “분명 네 말이 맞아. 네가 살아 있으면 괴로워할 사람이 있어. 네가 죽는다고 해도 원래대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유족들이 내기 죽기를 원한다면, 최소한 그 사람들을 더 이상 불행하게 만들 필요는 없겠지. 너는 죽는 게 마땅할 거야, 그래도, 그래도 너는 이 세상에 태어났잖아? 너는 이어져 있어. 너희 부모 따위는 아무려나 상관없어. 나도 아버지 어머니가 없어. 겨우 한세대 이전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그렇다고 그런 것에 신경 쓸 필요는 없어” ** 저자는 인간의 문제를 깊은 통찰로 따뜻한 시선을 가지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불행한 조건에 속해 있는 인간의 심연을 파헤쳐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의 책에는 쓸 만한 말로 가득 차 있었다. ‘나카무라 후미노리’. <쓰리>라는 작품에서도 볼 수 있었던 그리고 이 책 속에서도 느낀 세상의 그늘 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후미노리가 보여주는 따뜻한 사랑에 존경을 보낸다. 후미노리 덕에 우울함을 걷어내고 밝은 햇살을 만끽하는 오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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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에서 병사들이 곧잘 정신병에 걸리듯이 사형 임무에 참가했던 교도관 중에도 정신에 이상을 일으킨 사람들이 적지 않아. 하지만 그래도 나는 할 거야. 법치국가로서 당연한 집행이니까. 아니, 그런 것보다 피해자가 있고 유족이 있으니까. 만일 내 딸이 살해당했다면 그 범인을 정말 죽이고 싶을 거야. 그런 유족의 증오를 조금이라도 풀어주기 위해서는 역시 나라에서 대행하는 수밖에 없어. ......잘 들어. 우리가 하는 일은 죽인 자와 죽임을 당한 자의 중간에, 이러니저러니 할 것 없이 개입하는 거라고. 이게 우리 일이야. 근데 말이지, 이게 영 불확실하다는 게 견딜 수가 없는 거야. 극중 주인공은 교도관이다. 그는 청소년 시기에 친구 마시타의 자살을 경험했다. 본인 역시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고아원에서 살았고, 알 수 없는 과거로 힘겨워하다 초등학생 때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다. 어릴 적 잃어버린 남동생을 아직도 못 찾고 있고 교도관으로서 믿고 도와줬던 죄수에게 배신을 당하는 쓰라림도 겪었다. 잔혹하게 부부를 죽이고 들어온 야마이도 관리하고 있는데 기한 내에 항소를 하지 않는다면 야마이는 곧 사형을 당하게 될 것이다.
살인자는 왜 살인자가 되는가, 라는 질문. 폭력의 대물림이나 가정폭력의 심각성 같은 것. 어릴 적 받은 학대로 인한 트라우마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 같은 것들. 폭력이나 범죄자에 대한 사회적 책임 같은 것들. 결코 쉽게 다룰 수 없는 무거운 주제들이다. 결국 이들은 ‘출구 없는 방’에 갇혀 있다. 어떤 관계의 가능성도 없을 때 타인은 지옥이 된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명제를 증명한다. 그러나 작가는 이 명제에 의문을 제기한다. ......밤, 나는 점점 더 괴로워진다. 잠들지 못하는 밤. 어떻게도 할 수 없는 밤. 자살은 이른 아침 시간에 많이 발생한다고 한다. 이해할 수 있다는 마음이 든다. 그 밤을 무사히 넘긴다면 다시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잠이 오지 않아 괴로운 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모닥불을 둘러싸고, 한자리에 있으면 된다. 한밤중부터 이른 아침까지. 이 사회가 모두 잠들어버린 가운데, 모닥불 불빛아래 무수한 그림자가 한자리에 모여 있으면 된다. 그렇게 시간을 보낸다.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은 이야기하고, 듣고 싶은 사람은 듣고, 이야기하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은 사람은 입을 다물고, 그냥 그곳에 있으면 된다. 모닥불은 언제까지나 타오르리라. 모든 게 다 우울한 밤이라도. 어떤 관계의 가능성도 없을 때 타인이 지옥이 되는 것이라면, 인간 사이에 어떤 관계를 형성하는 게 가능하다면 그 지옥을 벗어날 수도 있는 걸까? 없는 출구를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그 곳이 지옥이 되지 않게는 할 수 있지 않을까, 뭐 이런. 주인공이 스스로의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다른 소설의 주인공처럼 '괴물'이 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자살을 하려던 바로 그 순간 자기에게 손을 내밀어준 원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네 사람의 인생을 등에 지고 가면서도 버거워하거나 남을 원망하며 그것을 내려놓으려 하기보다는 그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었던 것은 타인의 고통과 슬픔, 상처를 공감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 역시 어릴 적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주었던 원장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게다. 그런 기억이 있기에, 그리고 원장의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이 있었기에 교도관인 주인공은 괴물이 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연쇄살인범으로 사형을 앞둔 야마이에게까지 손을 내밀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세 사람이 모두 아직도 어리고 한창 성장중인데나 혼자만 나이를 먹는 것 같았다. 야마이는 구치소에 수용되었고, 마시타는 강에서 죽었고, 행방불명 사건에 휘말린 남동생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걸으면서, 움직이고 있는 내 팔다리를 생각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이곳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다시 그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모든 게 다 우울한 밤에도 살 수 있는 것은 결국 타인의 온기 때문이다.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소통할 수 있을 때 '출구 없는 방'에 갇혔어도 타인은 지옥이 되지 않을 수 있다. 그 믿음, 혹은 그 경험만 있다면 마음 속에 품은 칼로 타인을 해치지도, 나를 상하게도 하지 않고 살 수 있지 않을까? 작가가 하고 싶은 건 아마 이런 이야기인 듯하다.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만, 그 보다는 건조하고 메마르다. 그러나 감성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사형이라는 제도에 대해 좀더 진지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한다. [덧붙임] 1. 작품에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방점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 C. S. 루이스가 이런 말을 한 걸 읽은 적이 있다. 강연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어서 강연 중 강조했던 내용을 볼드 처리하거나 이탤릭체로 표기했었는데, 생각해보니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그 부분이 강조될 수 있도록 글로 쓰는 게 맞겠다 싶은 생각이 들더란다. 그래서 그 부분들을 다시 다 수정했단다. C. S. 루이스의 말대로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그 부분이 강조될 수 있도록 글로 풀어 쓸 수 있는 게 작가적 역량이라는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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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남자. 그는 9년차 교도관이다. 적당한 밥벌이로 선택한 직업에 적당하게 적응하고 있다. 조직의 일원에겐 적당히 눈 감을 줄 알고, 순종적인 수감자를 오히려 다그치고 싶은 심리가 일기도 하는. 가끔씩 수감자의 갱생을 돕기도 하지만 도움이 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터득하기도 하는. 십대 시절에 성에 눈뜨게 한 게이코를 한참 후에 다시 만나왔으나 덜컥 결혼 소식을 알려도 태연하게 들을 줄 아는. 존재 자체가 의심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도 없어 동생을 버릇처럼 찾는. 13년 전에 죽음을 선택한 친구 마시타에 대한 애증이 여전히 기억의 한구석에 움트는. 허름한 유년의 기억을 윤기 나게 닦아준 보육원 원장에 대한 고마움이 여전히 가시지 않는. 서른의 남자. 교도관 10년차가 되면 사형 집행 임무가 떨어질 수 있는데, 갓 스물의 사형수를 알게 된. 범행을 저질렀을 때의 나이가 열여덟을 넘겨 사형 면제를 받지 못하는 어린 사형수 야마이가 자꾸 걸리는. 자기에게만 조금씩 마음을 여는 야마이가 부담스러우면서도 안타까운. 타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전혀 모르는, 그런 환경에서 자라온 야마이에게 사람의 정을 알려 주는. ‘사람을 죽인 사람인데 이런 인간이 책을 읽어도 괜찮은가 하고 생각하는 일이 있’었다는 깡마른 소년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야마이에게 기꺼이 형이 되고 싶어지는. 그러나 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는, 이미 지났을 수도 있음을 눈치 채는. 더 이상 교도관일 수 없을 것 같은 서른의 남자가 있었다. 지난번에 주임과 간수부장이 특별히 CD를 듣게 해주었습니다. 당신이 준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것을 들으며, 꼼짝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흐라는 사람의 <눈을 뜨라고 부르는 소리가 있어>. 이 세상에는 훌륭한 것이 많다고 했던 당신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 P. 186 (야마이가 교도관에게 보낸 편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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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로 남기지 않는 책들이 늘어나고 있다. 읽다 만 책들이 늘어나고 있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간은 독서가 어렵다. 심신의 부조화, 안에 머물고 싶은 몸과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의 부조화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책이 얇다고 해서 독서가 쉬운 건 아닌데 얇은 책들에 눈이 간다. 읽지 않은 책들을 모아놓은 책장에서 『모든 게 다 우울한 밤에』를 발견했다. 죽는구나, 생각했어. 열이 올라서 몸이 타는 것 같고, 하지만 추워서, 의식이 희미해져서, 벌렁 누워버렸어. 자꾸 눈앞이 흐려지고, 뭔가 말을 하고 싶었어. 그때, 자동차 너머에, 달이 있었어. 책을 꺼냈지만 제목 때문에 독서가 쉽지 않을 것 같아 다시 꽂아두려다 뒤표지에서 윗글을 읽었다. ‘그때, 자동차 너머에, 달이 있었어.’의 문장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읽지 않았을 것이다. ‘나’가 처음으로 의식했던 죽음은 어린 시절 길렀던 붉은 새가 새장으로 들어온 뱀에게 물려 죽은 것이었다. 새는 뱀을 감당하기엔 어렸고(어미새였다 해도 갇힌 새장에선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새를 가뒀음에도 새장을 관리하지 못했고, 뱀은 생존하기 위해 새가 필요했다. 다른 목숨을 탐했으니, 그것도 어리고 약한 생명을 탐했으니 뱀의 징벌은 마땅한 것일까? 뱀은 애초 그렇게 살아가도록 태어난 존재 아니던가. 그렇다면 잘못은 뱀이 아니라 뱀을 이 세상에 있게 한 신의 잘못 아닐까? 새를 보호하지 못한 인간이 뱀을 벌할 자격이 있을까? 뱀이 악하다면 인간은 선할까? 어리고 약하게 태어난 새를 닮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모든 게 다 우울한 밤에』는 숱한 질문들이 쏟아지는 소설이었다. 그 사람, 보육원 원장은 그 시절 ‘나’에게 “자살과 범죄는, 이 세상에 지는 거라고!”, “보란 듯이 성공해서 이 세상에 되갚아주면 돼. 순수한 사람 같은 건 안 돼도 괜찮아!”라고 말했다. 곧 서른 살을 앞둔 ‘나’가 교도관으로 근무하는 구치소엔 스무 살로 항소하지 않으면 사형이 확정되는 야마이가 있었다. 악한 것과 약한 것은 발음은 비슷해도 의미는 대조적인데 ‘나’와 친구들, 야마이를 보며 약한 존재로 태어난 것을 감추기 위해 악에 기대는 것이 인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둘 중 누군가가 저지른 일이 마음에 들지 않고 용서할 수 없어도 끝까지 한편이 되어주기로 한다면……. 누군가 그런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살아가기가 쉽거든.(92쪽) ‘나’는 “나 같은 사람도 사회에 복귀할 수 있을까?”라고 말했던 사쿠마를 신뢰했지만, 사쿠마는 ‘나’를 배반했다. 예전에는 모든 인간은 선을 갖고 태어나는데 환경이 인간을 악하게 만든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선은 없고 악만 갖고 태어나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적어도 사람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면 누군가 때문에 변할 수 있기를 바란다. 보육원에서 자랐던 ‘나’가 혼란 속에서도 같은 고아였던 야마이와 달리 범죄자가 되지 않았던 건 ‘나’의 선택을 존중한 원장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도망친 야마다가 어둠과 추위 속에 혼자 있지 않았더라면 그는 다른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야마이가 ‘나’처럼 어린 시절 원장을 만났더라면, 우울한 밤의 시간은 계속됐을지라도 폭력에 무감각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야마이에게 달은 너무 멀리 있었다. 사형제는 찬성과 반대의 이분법으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잘못된 판단으로 범죄자가 아닌 사람을 범죄자로 만든 경우와 사형으로 범죄를 확정할 범위를 어디까지 두느냐가 남는다. 소설 속 주임의 대사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오지만, 피해자나 피해자의 가족 처지에서 가해자는 모두 뿌리 뽑아야 할 악의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현재라는 건 어떤 과거도 다 이겨버리는 거야. 그 아메바와 너를 잇는 무수한 생물의 연속은, 그 수십억 년의 끈이라는 엄청난 기적의 연속은, 알겠냐, 모조리 바로 지금의 너를 위해 있었단 말이야.”(157쪽) 어지러운 세상이 악을 가져온 것이지 애초 나라는 존재가 원래 악을 갖고 태어난 것인지 혼란스럽다. 나라는 존재는 분명 존재하는데 이게 정말 나인지 확신할 수가 없다. 존재에 대한 믿음마저 흔들린다. 하지만 ‘나’라는 존재는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부모가 나를 길렀든 버렸든. 부모가 나를 사랑했든 사랑하지 않았든.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가족과 사회에 대한 불만은 자살이나 범죄로 나타난다.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말거나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는 것은 지금은 행복하지 않다는 뜻이다. 욕심이 많아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닐 것이다. 우울한 밤만 계속되지만 그렇다고 분노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상투적인 충고일지 모르지만 아래 인용문을 믿으며 살고 싶다. 자동차 너머의 달은 잡을 수 없지만, 해가 지면 눈비 오는 날을 제외하곤 대부분 볼 수 있다.
“생각하는 것으로 인간은 어떻게든 될 수 있어. 이 세상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해도 인간은 그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거야.”(161-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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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원초적 자문자답을 하게 될때가 있다.과연 먹고 살기 위해서인지 사랑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권력과 명예,부를 쫓기 위해 허덕거리며인지는 각자가 처해 있는 입장과 생각,가치관,실천력에 의해 달라지리라 생각을 한다.이미 물신이 팽배되어 있고 자신의 욕구,욕망이 달성되지 않을 때엔 도덕과 윤리는 안중에도 없이 자신의 사리사욕을 먼저 챙기는 것을 흔히 보고 듣고 있으며 그 만큼 현대라는 사회는 지식과 산업,자본은 발달되어 있지만 정작 인간답게 살아가는 모습은 오히려 산업이 덜 발달된 사회가 그나마 옹기 종기 모여 정답게 살아가며 자급자족으로 욕심을 내지도 않고 평화로운 모습을 견지했고 그 시절이 그리운건 나만의 사치스런 기억은 아닐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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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가와 수상 작가의 작품이란 말에 살짝 긴장은 했지만, 가벼운 책의 무게와 얇은 페이지에 좀 만만하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짬짬히 시간내서 후딱 읽어내리란 결심을 무색하게 활자와 내 머리속의 이해의 터널은 접속을 거부했다..... 결론만 얘기하자만, 이 책 좀 무겁고, 어렵게 느껴졌다. 책 자체의 물리적인 무게는 가볍기 그지없는데, 그 안에 실린 무게는 실로 한없이 무겁게 느껴졌다. 특히 '사형제도'에대한 의견이 그러했고, 인간의 불안정한 심리상태가 내겐 퍽 무거웠다. 막연히 느껴오긴 했지만, 사형제는 상당히 곤혹스런 문제라 생각한다. 심정적으로 극악무도한 범인때문에 사형제를 찬성하지만, 그것이 악용될 소지가 다분한 현실에선 껄끄러운 뒷맛이 남는달까...... 그런 문제에 대해 화자의 입을 빌어 직설적이고 예리한 비판을 내놓은 작가의 역량에 박수를 보낸다. 이어서 주인공의 심리가 상당히 불안정하고도, 때때로 폭력적인 부분은 내겐 좀 난해하게 여겨졌다. 나름 내공을 지닌 작가이니 그 안에 많은 은유와 상징 그리고 기타 장치들을 깔았으리라 예상되지만, 내겐 막연히 어렵고, 난해하게만 여겨진달까..... 이 책도 접때 읽은 '안드로메다 남자'에 이어서 해설서가 나왔음 하는 바램이다. 좀 쉽게 설명을 해줘야 난 이해할 수 있을만한 작품이라 생각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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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다 우울한 밤에.. 요즘 출판되는 책들과는 조금 다르게 책의 표지와 띠지에 책에 대한 설명이나 광고 문구가 전혀 없어 궁금함으로 읽기 시작한 책... 200여 페이지의 많지 않은 분량이라 빨리 읽을 수 있을거라 생각한 저의 예상과는 달리 오랜 시간동안 책을 들고 있어야 했습니다. 짧은 분량이지만 버려지는 아이들, 살인, 아동학대, 성, 자살, 범죄심리, 사형제도, 방황등 쉽게 접근하기 힘든 아주 많은 것들을 이야기 하고 있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 쉽게 진도가 나가지 않았습니다. |
![]() 주인공은 어린 시절 보육원에서 자랐다. 부부를 무참히 살해한 스무살짜리 사형수도 마찬가지다. 그런 잔인무도한 범죄자에게도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형'이 있으면 좋겠다는 단순한 사실이다. 사형수가 바라는 것은 감형도, 자유도, 탈옥도 아니다. 너무나도 빈약한 소원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사는 '사회'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개인은 가족의 구성원이고 사회는 그 가족의 모둠이다. 휴머니즘을 상실한 사회, 가족이 해체된 사회, 개인이 해체된 사회.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해체된 개인이 모여 있는 사회.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러한 모순이 어떻게 정상이라 말할 수 있는가? 그런데도 우리들은 이 같은 모순을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믿으며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살아가고 있다. 더구나 정체불명의 사회가 던져주는 기능에만 만족하며 자각이나 윤리 따위는 박제로 만들어버렸다. 단지 '형'이 있으면 좋겠다는 사람을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사형이라는 제도로 간단하게 제거해버린다. 고장난 물건은 버리시오. 백화점에 가면 더 좋은 물건이 폭탄세일 하고 있으니 말이오.
[모든 게 다 우울한 밤에]에서 말하고 있듯이, 사형이라는게 얼마나 웃기는 산물인가? 사형이 법으로 금지된 나라에서 교도관이 죄인을 사형시키면 교도관이 범죄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 걸 생각하면 정말 미치겠다니까."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교도관들조차도 자조 섞인 웃음으로 사형제도를 비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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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냥 개미들처럼 살기만 해. 우리가, 사회가, 전체가 페르몬을 팍팍 뿌려줄 테니 말이야. 항우울제도 있잖니? 그저 멍하니 오락프로그램만 봐. 그럼 행복해질 거야.
윤리나, 자각은 휴지통에나 던지라지. 사회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 개인은 개인도 아니다.
이 소설에서 오직 깨달은 자는 오히려 사형수 야마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사람을 죽인 사람인데 이런 인간이 책을 읽어도 괜찮은가 하고 생각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런 밤에 책을 읽으며 지내도 되는가 하고 생각하면 지금 바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어떤 인간이라도 예술을 접할 권리는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편지는 잊어주십시오. 나에게 형제는 없지만 당신이 형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건 내 생각만 하는 말입니다.
모든 게 다 우울한 밤이다. 정말, 지독히도 가슴 아픈 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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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 나는 교도관이다. 어느날 주임이 술집으로 불러내어 사형집행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자신, 딱 두 번의 사형 집행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유족들을 생각하면 당연히 죽어 마땅한 살인자를 사형시키는 것이니 해야할 일인 것 같았지만 막상, 교도관으로 생활하면서 그 사형수랑 아침까지도 함께 대화하던 그 장면들이 생각나서 살려달라고 몸부림을 치는 사형수의 마지막을 집행하는 일이 무척 큰 트라우마로 남는다는 말을 한다. 주인공 역시 자신이 맡은 범죄인 중 이번에 사형을 언도받은 소년이 있다. 젊은 부부를 무정하게 살해한 야마이, 그는 사형수다.
야마이는 어린시절 부모에게 버림을 받고는 보육원 앞에 버려졌다가 친척의 손에 입양되어 자라게 된다. 하지만 아동학대 속에서 우울한 인생을 살았던 야마이는 소년원을 들락여야 했는데, 열 여덟을 며칠 앞둔 폐렴으로 지친 몸이 되었던 날, 어둠 속의 달은 멀리에만 있고, 자신은 아파서 홀로 쓸쓸히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하던 그 밤, 야마이는 한 젊은 여인을 죽였고, 곧바로 그 여인의 남편도 죽였다. 모든 세상이 자신과는 동떨어진 채, 움직이고 있는 듯한 느낌, 자신만이 외따로 있는 듯한 느낌, 원래 자신은 쓸모없는 쓰레기같은 존재니깐 그래서 그 자신도 무심해져버린 감정 속에 자신을 내동댕이 쳐버린 야마이, 물론 그는 죽어마땅한 살인범이었다. 사람을 죽이고도 그 어떤 미안한 맘을 전혀 갖지 않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가 열 여덟이 되지 않았다면 그는 사형을 면할 수 있는 나이였고, 그 시기에 열광적인 여론몰이 속에 그가 있지 않았다면 역시 그는 사형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형 제도라는 것이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누구에게는 이루어지고, 같은 죄임에도 누구는 무기징역으로 살아가게된다면, 그건 좀 아니지 않느냐고 이 책은 처음을 그렇게 시작한다. 사형 제도에 대한 화두를 던져주는 것이다. 사형 제도를 찬성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반대를 적극적으로 피력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잔악무도하게 사람을 죽이고도 양심의 가책따위를 전혀 느끼지 못 하는 무정한 살인수들을 어떻게 옹호할 수 있다는 말일까. 물론 그런 너그러움이 나는 생겨나지 않는다. 하지만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고, 사람은 누구나 선하다는 성선설을 나는 잊지 않고 있다.
주인공 나는, 어린시절을 보육원에서 보냈다. 고아인 그는 사춘기 속에서 죽음으로 자신을 내던진 친구 마시타의 자살을 기억하고 있고, 자신 역시도 자살을 시도하려고 했던 적이 있다. 그때 보육원 원장의 말은 내가 이 책을 좋은 책이라고 손꼽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너는 아무 것도 모르지." -중략- "베토벤도 모르고 바흐도 몰라. 셰익스피어를 읽은 적도 없고, 카프카나 아베 고보가 얼마나 천재였는지도 알지 못해. 빌 에반스의 피아노도." -중략-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도, 펠리니 감독의 영화도 본 적이 없어. 교토의 절도 안 봤고, 고흐도 피카소도 아직 모르지?" -중략- "너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해. 이 세상에 얼마나 멋진 것들이 많은지. 내가 방금 말한 건 전부 다 보도록 해라."/158쪽] 주인공은 사형을 언도받고 항소하지 않는 야마이에게 바로 원장에게 들었던 이 말을 실천하게 된다. 물론 야마이는 사형수고 항소한다고 해도 결국 사형을 언도받는 일이 변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는 야마이의 마지막 편지를 받으며 그 자신이 한 일이 무척 소중한 결실을 맺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세상에는 훌륭한 것이 많다고 했던 당신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다양한 인간의 인생 뒤편에서 이 곡은 항상 흐르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사실은 큰 파이프오르간으로 좀더 크게 연주된다고 합니다. 그것을 들을 수 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훌륭한 것을 감상할 기회를 빼앗아버린 것도 나입니다. 그 사람들의 모든 것을 빼앗은 것은 나이고,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지금 바로 죽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는 죽을 때까지의 기간 동안 내가 얻지 못 했던 것들을, 내가 사실은 어떤 마음으로 살았고, 어떻게 하면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걸을 수 있었는가를 알고 난 뒤에 죽자고 생각합니다./185쪽]
삶이 우울하여, 세상에 대한 불만투성이만의 사춘기를 보내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그 표출이 자살이거나 타인을 향한 분노와 원망의 살인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 꼭, 잊지 말고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우리의 인생이란 멋지고 훌륭한 것들이 많아서, 그것들을 다 알지 못 한 채, 죽는다는 것은 억울한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어둡고 힘든 시기의 길을 걷고 있어 혼란스러워하며 자신을 포기한 채 내동댕이 치는 인생을 살아갈 것이 아니라, 그래서 극단적인 선택들인 자살이나 혹은 살인과 같은 나쁜 행동을 하여 사형제도가 있는 나라에서는 사형수가 될 것이 아니라 말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역시 자살을 생각하던 힘든 사춘기를 보냈다. 그의 친구는 아예 자살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야마이라는 소년은 사형수가 되었다. 하지만 인생이란 그 힘겨움에 무릎꿇기에는 아직 하지 못 했던 너무나 멋진 일들이 있다. 아직 심금을 울리는 베토벤의 음악도 듣지 못 했고, 유명 작가들의 책도 읽어보지 못 했고, 언젠가는 만나게 될 온전히 자신의 편만이 되어줄 사람을 만나지도 못 했지 않은가. 지금의 힘겨움과 맞바꾸기 위해 자신을 포기하기에는,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밑지는 거래이지 않은가.
이 책은 이렇듯 사형제도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도 있지만, 힘겨운 사춘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선택한 인생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 젊은이들에게 극단적인 선택이 아닌 삶을, 자신을 더 사랑해보라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지금의 섣부른 행동은 아직 하지 못한 인생의 멋지고 훌륭한 일들을 스스로 놓치는 후회막급의 피눈물을 흘리게 하는 선택이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이런 느낌으로 이 책을 읽었고, 그러하기에 이 책이 무척 맘에 들었다. 인생이란 어떤 어려움과 절망 앞에서도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감동적이라는 것을, 그 감동을 느껴보지 못 하고, 살인자가 되거나 비행청소년이 되거나 자살을 하기에는 너무 억울하지 않냐고.. 굳이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이 안겨주는 곳곳의 감동을 담아내기 위해서 말이다. 사랑하는 이를 만났을 때의 감동도 느껴보고, 눈부신 햇살의 아름다움에 감동도 느껴보고, 누군가를 위해 눈물 흘릴 수 있는 감동도 느껴보고 말이다. 사람과 사람이 소중하다는 감동도 느껴보고 말이다. 메마른 슬픔과 절망만을 기억하면서 사라진다는 것은 너무 억울한 일이니깐...언제나 분노하고 있기만 한 삶을 살다 사라진다는 것은 너무 억울하니깐...아직 삶은 감동하고, 감동을 줄 많은 일들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기억하기를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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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읽으면서 내내 기분이 울적하고 진지해 지는 소설이었다. 제목에서 풍기는 것처럼 불안전하고 정신적으로 상처를 받은 이들이 나와 우울하고 어두운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주인공인 나는 ’교도관’ 을 직업으로 갖고 있고, 그들은 때로 사형을 집행하기도 한다. 교도관은 사형이 집행될 때 죽기 싫어 발버둥치는 사형수를 끌고 사형대에 올려 형을 직접 집행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선 살인을 직접 한다고 말 할 수 있다. 또한 친한 친구 마시타의 자살을 경험했고, 타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살인자들을 감시하는 게 그의 일이다. 어렷을 때 자살을 시도하려다 고아원 원장의 큰 손에 이끌려 실패로 끝난 뒤 그에게 죽음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존재한다. 이 책은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자꾸 떠오르게 하는 책이었다. 사형제도에 대해 반대도 찬성의 편도 서 있지 못하는 내 가치관에 회의가 오기도 한다. 공지영의 책을 읽으면서도 고민을 했지만 끝내 내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다. 사형제도에 대한 무지와 여러 다양한 사례들을 알지 못한다는 핑계로 생각정리를 끝내 마무리 짓지 않았다. 신의 영역인 인간의 생명을 법을 집행한다는 이유로 같은 인간인 누군가가 사형을 선고한다는게 아이러니 하기도 하고, 사회라는 집단으로 보더라도 처벌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살인을 저지른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아무리 사람같지 않은 사람이라도 우행시의 강동원처럼(극 중 이름이 생각나질 않는다. ㅠㅠ) 성장과정에서 받은 상처 때문에, 불완전한 정신세계로 인해 저지른 살인은 충분히 교화하고 치료를 통해 정상적인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들로 사형제는 폐지해야 한다는 반대론에 살짝 발을 들여놔 본다. 그러다 이내 도리질. 인권이라는 게 뭔가. 사람의 권리인데, 죽임을 당한 피해자들은, 또 그들을 사랑하는 가족들은 두 눈 시뻘겋게 한 채 고통에 신음하며, 한 순간도 같은 하늘아래 같은 공기를 마시는 자체가 치욕이라 말하는 그들앞에서, 그 고통을 모르는 제 3자인 내가 우리가 인권 운운하며 살인자들을 두둔할 필요가 있을까? 연쇄 살인범이나 아이를 죽인 죄질이 나쁜 악인을 굳이 살려 둘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사형제도는 필요하다는 쪽으로 발을 또 들여놓는다. 사형을 집행하는 교도관들의 정신적인 상처와 스트레스도 문제점으로 떠오른다. 사형제도가 없는 나라의 관점으로 본다면 이들이 바로 살인자인 셈이다. 반면 사형을 폐지하게 되면 종신형이 선고될 텐데, 종신형자들을 먹이고 재우고 감시해야 하는 관리자 등의 사회적인 비용부담이 늘어날 수 있겠다. 참 어렵다. 진범과 억울한 누명을 쓴 경우는 논외로 치고, 살인이 벌어졌다 해도 경우수가 모두 틀릴거고 사연도 가지각색일 거다. 복잡하고 어려운 주제를 던져준 작가가 원망스럽다. ㅠ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