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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부엌 한 구석에서 그녀가 소리 없이 우는 것을 보았다 그날 저녁 된장국은 매우 짰다.
큰언니의 간의 마지막 연은 독자를 끝내 감성 포텐을 요구한다. 그저 간단히 표현한 한구절을 못내 읽지 못 할만큼 공감이 가는 건 누구나 그런 형제애나 자매애를 이젠 느낄 수가 없어서인지도 모른다 부럽다 그런 언니의 간을 우려먹고 살수있는 시인의 사랑이.. 점을 빼면 마돈나가 아니다 소재부터 독특하다 다른 시에서 찾을 수없는 풍자마저도 느껴진다 요즘 천경자의 미인도 진위여부가 궁금하기도 한데 어쩌면 점하나로 세상사를 대변해 냈는지도 모른다. 점하나만 찍으면 아니어도 되는세상! 그럼에도 마지막 연은 무척이나 긍정적모드로 마무리 삶이 밋밋하고 슴슴하면 내가 아니다 뒤뚱댄다고 걷지 않으면 내가 아니다 고단하고 빡빡하다고 그만두면 우리 싦이 아니다 겨울 환벽당은 그녀 시집의 백미다 청각적,시각적,시공간적 표현이 다채롭다 작가가 어떤 시를 지향하는지를 단연히 보여준다 '푸르름이 두른 잡' 1연 첫줄에 정의부터 내려놓고 풀어가는 방식이 위험한데도 멋지게 멋진 환벽당을 아름답게도 그려냈다. 벌써 2집이 기다려지는건 소재가 너무 많아서 일까 아직 할 얘기가 많은 작가가 등장한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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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성숙의 첫 시집 날마다 결혼하는 여자(지혜, 2016)에는 지금은 사라진 존재들을 향한 시인의 애틋한 마음이 세심하게 드러나 있다. 그런데 그녀의 시에서 사라진 것은 죽은 것이 아니다. 「차꽃-모자 상봉수」에서 시인은 “지난해 핀 차꽃이 차씨가 되어/ 벙근 차꽃을 바라보고 있다”라고 이야기한다. 지난해 핀 차꽃은 차씨가 되어 올해 핀 차꽃의 ‘엄마’가 된다. “엄마의 눈동자로 환생한 그 언저리에/ 차꽃이 다시 피어나고 있다”라는 시구에 드러나는 대로, 시인은 돌고 도는 생명의 순환구조에서 ‘엄마’라는 “삶이란 기다리고 견디다 피어나는 거라고/ 아픔을 삼키는 저 묵묵”한 존재를 발견하는 것이다. 엄마는 삶의 아픔을 묵묵하게 받아들인다. 차꽃이 차씨가 되고, 차씨가 다시 차꽃이 되는 생명의 순환과정의 이면에는 이렇듯 아픔을 아픔으로 인내하는 엄마의 생명성이 내재되어 있다. “나는/ 비바람 속에서도 열매를 품은/ 차.꽃.이.다.”라는 시인의 선언은 그러므로 그녀의 시가 나아가는 길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비바람 속에서도 열매를 품는 어미의 마음으로 그녀는 이 세상의 모든 차꽃들을 바라보려고 한다. 그녀에게 차꽃은 차꽃일 뿐이다. 더 나은 차꽃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어느 해 여름, 왼쪽 몸의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난 후부터 기우뚱거린다. 외줄이라도 타는 듯이 좌우로 휘청대며 걷는다 그녀는 넓은 땅을 걸어가면서도 남사당 패의 외줄타기 부채 대신 사람 손을 의지한다 날마다 결혼식장을 들어가듯 딴딴따따 걸음을 떼야만 한다 오른쪽에 선 이의 왼손이나 팔을 잡고, 날마다 결혼하는 여자가 되어 다소 슬픈 듯, 기쁜 듯, 천천히, 조심해서 걷는 것이다 날마다 결혼하는 그녀, 오늘은 누구의 팔을 잡고 불편해진 생의 건널목을 건널 것인가? - 「날마다 결혼하는 여자」 전문
날마다 결혼하는 여자는 왼쪽 몸의 중심을 잃고 쓰러진 후 “외줄이라도 타는 듯이 좌우로 휘청대며 걷는” 여자이다. 몸이 아픈 이 여자는 왜 날마다 결혼하는 여자가 되었을까? “사람 손을 의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우뚱거리며 걷는 그녀의 손을 누군가가 잡아준다. 그녀는 자신의 오른편에 선 이의 손을 잡고 “다소 슬픈 듯,/ 기쁜 듯, 천천히 조심해서 걷는”다. 결혼식장에서 신부의 손을 잡는 사람은 아버지 아니면 신랑일 것이다. 시인은 신부-딸을 바라보는 아버지-신랑의 마음으로 그녀의 손을 기꺼이 잡는다. 누가 잡으라고 해서 잡은 손이 아니다. 휘청대며 걷는 자식의 손을 마다할 부모라면 그는 이미 ‘부모’라고 할 수 없다. 부모의 마음은 차마 그럴 수밖에 없는 측은지심으로부터 뻗어 나온다. 불쌍해서 그녀의 손을 잡는 게 아니라, 마음이 그리로 가기 때문에 시인은 그녀의 손을 잡는 것이다.
곽성숙의 시는 이렇게 ‘날마다 결혼하는 여자’를 보듬어 안는 시선으로 이 세상의 존재를 바라본다. 거기에는 기꺼이 손을 내밀어 잡아야 할 무수한 손들이 있다. 이를테면 「큰언니의 간」에서 시인은 인생의 고비마다 부활할 수 있는 힘을 주던 큰언니가 어느 날, 부엌 한 구석에서 소리 없이 울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입맛을 다시게 하는 손,/ 꿀꺽 침 넘어가게 하는 손,/ 콩나물을 무치던 손,”이라는 큰언니의 이미지는 그렇다면 허상에 불과했던 것일까? 시인은 이 시의 말미에서 “그날 저녁 된장국은 무척 짰다”라고 적고 있다. 큰언니의 손맛이 변했을 리는 없다. 큰언니의 울음은 어떻게 보면 그녀의 일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운다. 울지 않고 세상을 산다는 건 상처 없는 삶만큼이나 무미건조하다.
큰언니의 울음을 통해 시인은 저마다의 생명들이 지니고 있는 저마다의 고통에 주목하게 된다. 큰언니의 울음은 「아버지의 지게등」에 이르면 “오르고 올라도 끝내 오르지 못하는 산”인 “아버지의 등”으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이제 지게를 질 수 없을 만큼 굽은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며 시인은 문득 “지게도 수십 년을 업힌 그 등에 나는 단 한 번도/ 업혀 본 기억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아버지는 지게를 지고 수십 년을 살아왔다. 그것이 아버지의 인생이라면 인생이었다. 지게등이라는 이면에 아버지의 등에 한 번도 업히지 못한 딸의 슬픔이 깃들어 있지만, 그것을 아버지의 탓으로만 돌릴 수도 없을 것이다.
부엌 한 구석에서 울고 있는 큰언니처럼 아버지 또한 지게를 등에 진 채 딸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을 지도 모른다. 곽성숙은 바로 지게등으로 굽은 아비의 이런 삶으로부터 저마다의 생명들이 감당해야 할 생의 몫을 발견한다. 지게등은 아비의 몫이다. 기우뚱거리는 삶이 날마다 결혼하는 여자의 몫이고, 부엌의 한 구석에서 우는 게 큰언니의 몫이라면, 시인의 몫은 과연 무엇일까? 시인은 차꽃을 말한다. 아니, 차씨를 말한다고 해도 상관없겠다.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마다 감당해야 할 몫이 있다면 시인은 기꺼이 차꽃에서 차씨를 낳는 엄마의 마음을 자신의 몫으로 선택한다. 그리고 이러한 엄마의 마음이 무엇보다 그녀의 시에 서정성을 부여하는 궁극적인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