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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형식의 ‘말테의 수기’
너의 절정이 눈앞에서 ‘곤드레만드레’로 펼쳐질 때 나는 길바닥의 젖은 낙엽처럼 끈적끈적하게 살아왔어 - 「여의도역․ 2」中 한 세기 전 릴케는 파리 빈민가의 음습한 골방에서 건조한 시선으로 도시의 이면을 관찰한 <말테의 수기>를 적었다. 벨라 에포크 시기의 아름다운 파리에서 릴케는 불안의 징후를 읽는다. 그의 눈에 비친 파리는 '불안의 냄새'를 풍기는 환자의 생채기와도 같았다. 퇴폐, 혼돈, 빈곤과 죽음, 공포를 은폐한 채 도시는 낙오된 개인의 결락감 따위에는 무심하다. 지금-여기의 도시와 그 안에서 숨쉬는 인간들을 응시하는 시인들의 행위도 릴케의 시대와 다르지 않음을, 우리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김재홍의 첫 시집 『메히아』(2009, 천년의 시작)는 릴케가 근대 도시 파리를 관찰하듯이 도시 속의 인간들을 응시하고 있다. 단지 응시하는 대상이 달라졌을 뿐이다. 릴케가 파리 뒷골목에서 평범하고 비루한 이들을 응시한 것에 비해서 김재홍의 시선은 브라운관을 거쳐 보다 광범위한 인간들을 관통하고 있다. 21세기의 릴케는 뒷골목을 돌아다니면서 다리품을 팔고 힘들게 자신의 아픈 기억들과 대면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을 관찰하려면 TV를 통해 스포츠를 시청하거나 방송국(김재홍 시인은 실제로 방송국에서 근무하고 있다)에서 마주치는 앵커, 사장과 부사장, 퇴임을 앞둔 부장, PD들을 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TV는 연예인과 운동선수를 비롯한 특별한 사람들을 주로 보여준다. 대개 TV 속에서 재현되는 현실은 대부분 ‘구라’이거나 ‘설정’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즐기고 안도하거나 열광한다. 김재홍은 이런 단순한 사실들을 담담하게 제시한다. 특히 사람들을 즐기고, 안도하고, 열광하게 만드는 TV 속 인물들과 그들이 등장하는 화면을 직조하는 사람들을 직설적으로 호명한다. 이런 식이다.
중남미의 어느 공화국 시민인 그는 동란과 쿠데타를 딛고 선 아시아의 작은 공화 정부의 취업비자를 받아 뜨끈뜨끈한 잠실야구장 타석에 섰다 - 「메히아」中 연봉으로 실력을 평가받는 메이저리그는 시즌이 끝나면 짐을 싸는 선수가 많다 가까운 다른 팀으로 옮기기도 하고 대륙을 횡단해 낯선 리그로 가기도 하고 아예 마니어리그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다 이미 짐을 세 번이나 쌌던 알 마틴은 (중략) 그러던 그가 태평양 건너 한국까지 왔다 남들이 수천만 달러 짜리 다년 계약을 할 때 알량한 마이너리거나 벤치 멤버보다 아시아 정상에 서고 싶었을지 모른다. -「알 마틴」中
메히아와 알 마틴은 실제 국내 프로야구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선수들이다. 국제화된 우리의 프로리그에 외국인 선수들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TV 중계방송 속에서 볼 수 있는 그들이지만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은 ‘숫자’와 ‘이력’이지 개인의 삶에 내재된 사연이 아니다. 간혹 드러나는 사연들도 ‘흥행’과 ‘가십(gossip)’일 경우이다.
시「포돌스키」를 보자. 이 시에 등장하는 독일 축구선수 포돌스키가 폴란드계 독일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폴란드 출생인 포돌스키가 모국인 폴란드의 골문에 골을 작렬할 때마다 관중들은 ‘폴스카’를 외치며 환호한다. 환호 속에서 1933년부터 75년동안 한 번도 독일을 꺾지 못한 폴란드와 독일 사이의 축구 A매치 역사, 세계대전 때 독일에게 침공당했으며 동구권의 몰락 속에서 경제적으로 낙후된 폴란드의 슬픈 역사는 외면당한다. 폴란드의 역사와 포돌스키라는 개인의 사연들은 흥밋거리일 뿐이다. “골은 있었지만 세레머니는 없었다”(「포돌스키」) 라는 식이다. 또한 우리에게 폴란드는 2002년 월드컵에서 첫 승을 안겨준 ‘제물’로 기억될 뿐이다. 시인은 숫자와 이력, 환호가 가득한 스포츠 중계를 지켜보면서 TV라는 무대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연들을 ‘담담하게’ 서술한다. 메히아와 알 마틴과 같은 '마이너‘들과 축구스타 ’포돌스키‘의 사연에 대하여 시인은 아무렇지않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무런 동정이나 연민, 동일시가 개입하지 않는다. 릴케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 우회적인 답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가장 귀중한 것을 그것보다도 먼저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될 잡무 때문에 잠시 동안 밀쳐두었던 거지요. 그처럼 바쁜 장소에다 두어서는 안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렇게 긴 세월이 흐르다 보니 잡무는 우리의 습관이 되어버렸습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말테의 수기』中
습관이 되어버린 잡무. 팍팍한 일상 속에서 TV 속 인물들이 안고 있는 사연들에 동정하거나 연민하기에는 사람들은 너무나 바쁘다. 방송국 사람들에게 “음악과 개그는 우리의 기간산업”(「열린음악회를 먹자」)일 뿐이며 “연인원 일백 만 명이 꿈틀꿈틀 유동하는 건물”(「Hairtail Hardboiled」)에서 부대끼고 살면서 그런 것들에 관심을 가질 ‘여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시장바닥 같은 세계를 응시하면서 시인은 동독에서 헤어진 남편을 40여년 만에 만나러 온 ‘레나테 홍’ 할머니에게 “기자들 앞에 왜?”(「베델의 젊은 사진」) 왔느냐고 묻는다. 특종을 건지려는 시선 속에서 레나테 홍의 아픈 삶 또한 가십으로 묻혀버릴 것이다.
개인의 역사에 무관심한 타인들이 섞여 살면서 만들어내는 담담한 세계에 대한 응시는 이제 ‘공간’으로 확장된다. 남태평양의 해변가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여자들과 보드를 타는 아이들이 밟고 있는 백사장은 과거에 “비쩍 마른 죄수 40만 명”(「포트 스테판」)이었던 곳과 동일한 공간이다. 관광 명소가 된 영국의 거대한 탑에는 아시아의 코끼리와 유럽의 황소와 아메리카의 숫양과 아프리카의 낙타가 문양을 이루고 있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면서, “한갑에 만원이 넘는 담배를 피우며 / 탑의 네 기둥에 새겨진 아이사의 manufactures를 생각/ 하고 / 유럽의 ariculture와 아메리카의 engineering과 / 아프리카의 commerce를 베껴 쓰고 있”(「앨버트 公」)다. 아마도 ‘나’는 시에서 언급되었듯이 “농협에서 거금을 들여 어린 학생 십수 명”을 보낸 연수단의 일원이었으리라. 침략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추억하는 제국의 탑 앞에서 ‘나’는 영어 단어나 읊조린다. 중요한 것은 ‘어륀지’(오리지널 영어발음)를 익히는 것이지, 과거 따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외국의 지하도를 걸으면서는 영화 「irreversible」을 떠올리며 “모니카 벨루치가 여기서 가차없이 / 강간을 당하고 도륙”(「Asian Spirit」) 당한 곳이라고 기억할 뿐이다. 시인이 세계를 돌아보면서 응시하고 기록하는 공간들은 나름의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사람들에게는 관광상품, 영화촬영지, 휴양지의 의미 외에는 모두 탈색된 채 다만 존재하는 곳일 따름이다. 공간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에서도 역시 분노와 연민, 계몽 따위의 전언은 보이지 않는다. 감동이라거나 열정 따위는 거세된 채 휴일에 남아도는 시간에 TV 리모콘을 쥐고 이리저리 돌려보듯이 풍경들을 다만 바라볼 뿐이다. 이것이 바로 21세기형 ‘말테’가 취하는 형식이다.
우리는 TV와 신문, 잡지, 인터넷을 통해서 수많은 세계의 풍경들을 알고 있다. 사각형의 형식을 통해서 들어오는 풍경들은 동시에 다가온다. 풍경의 잉여 속에서는 내면을 발견하거나 자기 고백을 행하기 어렵다. 시인의 응시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시인의 응시는 단순히 채널을 돌리는 행위와는 다르다. 시인은 이미 알고 있다. 시인은 자신이 세렝게티 초원의 치타처럼 “이빨도 없이 그저 혼자 떠”(「세렝게티의 치타」)나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아울러 혼자가면서도 가로막힌 길을 뚫기 위해 “길을 묻지 않겠다”(「길을 묻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이 선언의 유효성은 ‘자발성’에 기인한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대개 통과의례를 거친다. 외부를 응시하기 전에 자신의 내력을 고백하면서 배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김재홍 시인은 그러한 통과의례를 바로 건너버렸다. 방송국이라는 공간 속에서 수없이 직조된 현실을 목격한 것이 한 이유일 수도 있으리라. TV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우리들이나 내밀한 사연을 지닌 채 살아야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러므로 '나'의 고백은 특별하지 않다. 지금-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고백’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응시’라는 자각이 아마도 자기-고백이라는 형식을 생략하게 한 동력이 아니었을까.
듣지 않고 보지 않는 이들이 가득한 세계에서는 어떠한 외침도 울림이 되기 어렵다. 타인을 응시하지 않고 그들의 사연을 듣지 않는다면 ‘나’의 진실한 고백도 소음에 불과하다. 시인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듯하다. 이 사실을 인식한다면 리모콘을 돌리듯이 세계의 풍경을 바라보는 행위는 무책임한 습관이 아니라 값싼 자기위안을 거부하는 자발적 행위로 전회(轉回)될 수 있지 않을까. 이 전회의 어려움을 견딘 이후에야 시인은 자신이 바라보던 대상들과 비로소 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이르는 과정은 타인에게 길을 묻지 않고 홀로 가야 하는 외로운 행위임이 자명하다. 이 자명한 사실은 21세기의 시인들이 릴케의 시대보다 더 외롭고 아파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도 세계의 비참을 수용하려고 하지 않을 때 그것에 대하여 말하고 그것과 함께 머물며 그것을 응시하는 것이 그들의 책무이기 때문이다.
- 계간 <문학수첩> 2009년 가을호 수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