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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류지향"을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이번 책도 출간하자 마자 구입, 소장했는데, 겨울에 배움의 공동체 일본 지성 탐방 일정이 잡혀 있어서 읽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일본에 들고 갔다. 사인도 받을 겸, 여행 중에 생생하게 읽을 겸. 저자가 자신의 몸과 입을 가지고 말을 하는 장면을 보는 와중에 그가 쓴 책을 읽는 경험은 항상 짜릿하다. 개풍관에서 이야기 들을 때 나이에 비해 해맑은 표정과 젊은 외모를 보여주셨고 말씀 하시는 중간에 입을 독특하게 움직이셔서 인상 깊었다. "하류지향" 때 소비주의에 물든 아이들이 배움에서 왜 무기력해지는지를 납득 가게 설명해주신 점은 좋았으나, 사노 요코 할머니처럼 우치다 타츠루 할아버지 선생님의 원인 파악과 대안 제시 내용 또한 어른 세대 특유 다음 세대 삶의 방식을 못 마땅해하는 보수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던 점은 아쉬웠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확실히 알았다. 우치다 타츠루 샘 본인 스스로 자신을 보수(우익 아님)에 가깝다고 생각한다는 점, 그래서 문제 많은 사회를 '혁신'하기보다는 지금 가지고 있는 점들을 바탕으로 '수선'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아래와 같은 내용을 읽을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이번 정권에서 드러난 망가진 시스템을 떠올린다. 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 사회적 약자들에게 먼저 닥치는 각종 죽음과 고통들. 나는 2016년에 환경 봉사 업무를 하면서 내 업무이기 때문에 아침, 점심, 저녁으로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를 주웠다. 이번에 일본 여행에서는 아침마다 자신의 집 앞과 상점을 쓸고 닦는 모습이나 시골빵집 돗토리현에 갈 때 마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집집마다 나오셔서 눈을 쓸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 꾸준함과 성실함은 쓰레기 줍는 공간이 내 공간이라는 주인 의식이 있어야 나온다고 생각했다. 그건 분명 누가 시켜서 매뉴얼이나 업무분장표에 입각해서 하는 일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주변 사람들을 보며 존경할 만한 진정한 어른스러움이란 무엇인지 작년 한 해 내내 생각했다. 진정한 어른을 찾기가 참 힘든 사회라고 생각했다.
좋은교사운동에서 교육대통령을 위한 연속 정책토론회에 참석하면서,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하는 교육운동들을 옆에서 보면서 '영화관에서 모두가 일어나서 영화보는' 소모적인 교육 경쟁이 유독 한국에서 왜 심각한지 생각할 기회가 많다. 원인은 대부분 '불안감'에서 온다. 이번 주에 창비에서 주최한 '대학교육사용설명서'에서 최재천 교수님 말씀처럼 사실 배움을 일으키기 위한 교육은 방임할 때 가장 큰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자주 부모와 교사는 아이의 생활 전반을 틀어쥐고 사소한 지점까지 '관리'하려고 한다. 담임 교사로서 나 역시 그러한 비판에서 절대 자유롭지 않다. 다른 반보다 결과에서 피해보지 않도록 치밀하고도 성실하게 돕는 과정에서 교육 본질을 놓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른 세대가 보기에 다음 세대가 하는 일은 부족하고 못 마땅해보이게 마련일 테지만, 더 잘 만들어주어야겠다는 욕심을 내려놓아야 할 듯하다. 결국 아이의 삶은 아이의 것이기에, 불안해하는 시선을 보내며 졸졸 따라다니고 "왜 그것 밖에 못했어?"라고 말하기보다는 "괜찮아. 수고했어. 최선을 다했구나. 하고 싶은 일 해."라고 말해줄 수 있는 교사가 되고 싶다. 내 성향상 어려운데 그래서 더 노력하고 싶다.
"하류 지향"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른' 다운 인간이 없어지는 사회 현상을 이야기하기 위해 저자는 그 인간을 기르는 '교육' 문제에 매스를 들이댄다. 논조가 비슷하다. 교육 상품을 좀 더 싸게 구입하기 위해 노력을 최대한 덜 들이려는 학생을 실제로 교실에서 흔히 만날 수 있다. 노력 하나 안하나 어차피 결과가 불만족스러우리라는 생각 때문에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적고 낮은 자존감을 가진 학생일 수록 일부러 노력을 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듯하다. 비평준화 지역 고교 입시에서 3년 간 상을 8개 받아야 남들 다 받는 만점을 받고 진학할 수 있지만 상을 수십 개씩 휩쓰는 1등 친구를 보며, 하나라도 받아 보려고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하나도 받지 못한 학생은 3학년 쯤 되면 "열심히 해봤자 받지도 못하잖아요."라고 말한다. 그럴 때마다 수상 같은 외적 보상 제도가 학생 개개인의 잠재력을 발달 시키거나 성실한 경험에서 스스로 배움을 일으키는데 전혀 방해가 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아래 내용에 접목시켜 본다면 공공성을 추구하는 학교라면 노력을 결과로 환산해 그에 걸맞는 산술적(서열, 경쟁적)인 외적 보상은 최대한 없애야 한다. 그래야 아이를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책임질 줄 알며 살아갈 힘이 있는 진정한 어른 답게 기를 수 있다.
개풍관에서 가장 감동적인 경험 중 하나는 강연과 사인회 끝나고 보여주었던 합기도 시범이었다. 다다미 바닥 위에서 이 두 분이 했던 합기도를 통한 몸의 언어 소통, 우치다 타츠루 선생님께서 자랑스럽게 강조하셨던 조용한 소리도 울리게 만들어주는 개풍관 공간 구조를 확연히 보여주었던 '몸과 몸, 몸과 공간'이 맞부딪칠 때마다 나는 소리들에 할 말을 잃은 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도덕과 교사이지만 강압적으로 세뇌 시켜 습관으로 만드는 예의 바름보다는 인간 스스로 납득하고 타인을 존중해서 우러나는 예의 바름을 길러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번 정권에서 '인성교육'을 강조하는 방향을 보면 (도덕과로서는 우리 교과에 대한 비난일 수도, 거꾸로 생각하면 기회일 수도 있지만) 그에 담긴 철학이나 의도 자체를 보았을 때 자기 배려를 통한 윤리라기보다는 중세적인 외적 윤리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문제가 많음이 드러난 철 지난 교육관으로 보인다. 아래 내용에 의하면 일본 역시 무술을 도구로 사용하여 예의 바름을 주입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는 모양이다. 특히 그런 의도로 무술이 학교에 들어온다면 필연적으로 무술을 서열화, 경쟁의 도구로 사용하게 되리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는 무술의 원래 목적을 왜곡하는 그러한 움직임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무술이 말할 수 없는 것, 알 수 없는 숭고한 존재(자신과 타인 포함)에 대한 경외심(feat. 레비나스)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 무술이 지향하는 몸 사용 법이나 생활 방향 자체가 '살아갈 힘'을 길러주므로 무술 자체에 집중해야지 다른 목적을 위해 도구화하여 강압적으로 시키거나 경쟁시키거나 점수화하면 안된다는 점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어서 공감했다.
우치다 타츠루 선생님 언행에 대해 우리 모두 감동했던 점 중 하나는 우리 같은 방문자를 시종일관 존중하는 자세, 특히 사인회할 때 내내 무릎을 꿇고 고개 숙여 사인해주시던 모습을 보여주셨던 점이다. "종이에 자신의 이름을 한자로 적어주세요."라고 말씀하시고 속표지에 손수 이름을 써주셨다. 본인 사인에 고양이가 있는 이유는 고양이를 몹시 좋아하시기 때문이란다. 오해균 샘 말씀대로 강의 시작하는 줄도 모르게, 우리가 개풍관에 책상을 펴고 자리를 잡자 마자 근황 묻듯이 가볍게 이야기를 시작하시더니 어느 새 자연스럽게 '공간' 이야기로 넘어가 줄줄줄 본인의 생각을 겸손하게 들려주셨던 우치다 타츠루 샘이시다. 선생님께서 어떤 사고 기반을 두고 책을 쓰고 강연을 하시는지 더 깊이 듣고 읽을 수 있도록 돕는 소중한 탐방이었다. 이제 더 최근에 출간한 "곤란한 성숙"을 구입해놓았고 조만간 읽으려고 한다. 2017년에는 좀 더 어른스럽고 성숙한 내가 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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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엄마한테 뭐 사달라는 말 하지마!!"
"아~~ 왜요? 왜 안되요? 갖고 싶은데..."
결국은 아이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상황이 종료되었다. 이런 대화는 늘 끝이 뻔하다. 아이의 성화에 항복해버리거나, 부모의 권위로 일방적으로 제압해버리거나. 결국은 끝까지 버티는 쪽이 승자가 되는 이 유치한 싸움이 부모 자식간에 빈번하게 발생한다.
넘쳐서 더 문제인 육아
아이들과 이렇게 한바탕 하고 나면 옛날 생각이 난다. 내가 어렸을 때는 풍족하지 못했다. 그나마 밥은 거르지 않고 살 만한 딱 그 정도 살림살이에서 아이들에게 장난감은 호사였다. 장난감은 생일이나 크리스마스처럼 특별한 날 받는 대단히 특별한 선물이어서, 몇 개 안되는 인형이 너무나 소중했고 친구처럼 오랫동안 곁에 두었었다.
굳이 장난감이 많이 없어도, 그럴싸하게 지어진 놀이터가 없어도 아이들이 노는데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냥 아이들이니까 어떤 공간에서도 놀 줄 알았고, 빈터에서도 귀신같이 놀이감을 찾아냈다. 게다가 무척 재미가 있었다. 해가 저무는 줄 몰랐고 헤어짐이 아쉬울 정도로 맘껏 놀았다. 장난감이 없어도 놀이는 충분히 가능했다.
우리집 거실 한켠에는 대형 장난감 상자 네 개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상자안에는 각종 장난감들이 가득 들어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장난감을 사 달라고 야단이다. 태어나면서부터 특별히 부족함을 모르고 커 왔으니 아끼는 법도 잘 모른다. 아이들이 장난감들 속에서 뒤엉커 놀고 있는 너머로 TV에서는 방학기간 배를 곯는 아이들, 엄동설한에 난방도 안되는 방에서 힘겹게 겨울을 나는 아이들의 사연이 흘러나온다.
이 극단적인 풍경 앞에서 "내가 과연 아이들을 올바로 키우고 있는걸까?" 자책감이 밀려든다. 아이들에게 새로운 무언가를 사줄 때는 무척 신중하고 때로는 단호하게 거절도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쉽지 않다. 소비는 신중하게, 돈은 가치있고 어렵게 써야 한다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배워줄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나의 어린 시절에는 따로 배우지 않아도 삶으로 체득할 수 있었지만 요즘 세태는 그렇지 않으니까.
"공생능력을 기르는데 게을렀다"
일본의 사상가 우치다 타츠루는 책 <어른 없는 사회>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경쟁적인 소비로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감을 증명하는 사회에서 교육받고 자라난 아이들은 자라도 '덜 자란' 어른이 될 것이다. 어른답지 않은 어른들이 정책을 만들고 국가를 경영하며 경제를 움직이고 아이들을 교육하는 세상은 불행할 것이다. 인간이 인간다우려면 돈을 숭배해서도 안되고, 돈에게 삶을 지배할 절대권력을 주어서도 안된다. 법정스님의 말씀처럼 진짜 문제는 이것이다.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
저자는 "일본인은 타인과 공생하는 능력을 기르는 노력을 게을리했다"고(49쪽) 개탄한다. 그는 "다른 사람과 같이 살 수 없거나 다른 사람과 물건을 공유할 수 없는, 뭐든지 전적으로 사유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은 상당한 재력이 없는 한 보통 수준의 생활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반면 다른 사람과 편하게 공생할 수 있는, 서로 집이든 물건을 공유할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을 갖춘 사람은 그다지 많은 것을 소유하지 않아도 꽤 쾌적한 생활을 누릴 수 있을 것"아라고(121쪽) 본다.
소비능력이 아니라 공존공생의 네트워크에 소속되어 있느냐 아니냐가 생활 수준의 차이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미래 교육의 화두도 마찬가지다. 소통의 능력은 경쟁관계보다는 협력관계 속에서 더 크게 발현되고 발전하는 법이다. 관계하고 소통하는 능력, 연대하고 협동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교육 시스템과 내용을 만들어야 한다. 무한 경쟁 사회속에서 남보다 더 많이 가질 수 있는 방법과 남을 밟고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는 교육은 아이들의 미래를 망치고 결국 공동체의 운명을 위태롭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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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타츠루 성찰적인 태도를 통해서 현재 일본과 비교해서 대한민국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진정한 어른 노릇을 하고 있는지도 생각하게 됩니다. 올해 한국의 어른들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아이 들을 대하고 있었는지 생각하고 새해에는 진정한 어른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우 치다 타츠루의 다른 책을 통해 어른으로서의 성찰적 태도를 배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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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일단은 가볍게 읽을수는 있었지만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했다. 특히, 저자는 결국 기성세대는 미래세대의 성장을 도울 책임이 있고, 미래세대는 기성세대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어른이 어른답지 못한 사례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때 필요한 것은 어른과 젊은이의 종적 연대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어느정도는 인정하지만, 내용을 보면 일부가 성 대결화를 시키는 내용이 있어서 너무 극단적으로 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젊은 여성들이 찾고 있는, 뒤따라가고 싶은 사람의 조건은 직감에 근거한 것입니다....그녀들이 선택하는 것은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 당연하겠지요" p227 라는 부분에서 왜 굳이 여성을 강조해서 말하는지 이해가 안갔다. 윗 문단에서는 젊은 사람이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그리고 저자가 페미니스트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도 이러한 서술이 너무 남/녀를 구분지어서 극단화시키는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