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은 저자의 20대 시절 이야기로 시작된다. 바람 하나 불지 않는 평화롭고 전형적인 미국 동네인 보스턴 외곽 지역, 그 따분하고 무미건조한 일상에 지쳐있던 저자는 무작정 미국 대륙 횡단을 하겠다며 히치하이킹을 떠난다. 여행 도중 그는 어느 마을 어귀에서 행색이 남루한 수상한 남자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발견하고 의심스럽게 바라본다. 남자는 그에게 다가와 어디로 가는 중인지, 먹을 것은 얼마나 가졌는지를 물어보았고, 저자는 캘리포니아로 가는 중이라고 대답하면서 혹시나 식량을 빼앗길까봐 그냥 치즈만 조금 있다고 둘러댄다. 그러자 남자는 치즈 조금 가지고는 캘리포니아까지 갈 수 없을 거라 말하며 자신이 갖고 있던 도시락을 저자에게 건네주었다. 원래 탄광에서 일거리를 구하며 살아가는 일용직 노동자였던 그는, 마침 그날은 탄광에서 대체인력이 필요하지 않은 날이어서 도시락이 필요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 남자의 친절에 충격 아닌 충격을 받게 되었고, 이후 그 남자의 친절함은 저자의 마음속에 깊이 남아 맴돌게 된다. 생전 처음 보는 젊은이에게 혹시나 도와줄 것이 있지는 않을까 싶어 마음을 써 주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었다. 그 인상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남았고, 왜 현대사회에서는 이런 정서가 희귀하고 소중한 것이 되었는지, 그리고 이런 정서가 결핍되면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를 계속 고민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주제다. 저자는 자신이 그 남자에게서 느꼈던 인간성의 기원을 인디언 원주민 사회에서 발견한다. 미국의 역사에서 건국 초기의 정착 시기에, 인디언 원주민 사회로 이탈하는 미국인이 꽤 많았다고 한다. 인디언 원주민 사회의 생활 방식에 매력을 느꼈던 것이다. 이처럼 문명사회에서 인디언 사회로 빠져나가는 사람은 많았지만, 인디언 사회에서 문명사회로 들어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 사실은 벤저민 프랭클린과 같은 당대의 계몽적 지식인들을 침통하게 하고도 남았다고 한다. 이는 인간의 합리성이 만들어낸 도시와 정부가 인디언 사회보다 못하다는 암시로 충분했고, 분명 지식인들에게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도대체 문명 시민들은 무엇이 아쉬워서 위생적이고 안전한 도시를 떠나 위험하고 예측하기 힘든 야생으로 떠났던 것일까. 저자는 도시사회가 주지 못하는 인간의 갈망을 인디언 사회가 충족시켜주었다고 보았다. 인디언의 삶은 다채롭고 흥미로웠으며, 사회관계는 권위적이지 않았고 자율적이며 평등했다. 또한 인디언 사회는 규모가 작고 밀접하게 상호작용했기 때문에 공동체에 대한 각자의 기여가 즉각적이고 선명하게 드러났다. 반면 도시 생활은 뻔하고 틀에 박혔으며, 복잡하고 멍청해 보이는 절차와 권위가 가득했고, 복잡거대한 사회 속에서 자신의 역할과 기여를 확인하기도 힘들었다. 심리학의 자기결정이론에 따르면 인간이 만족하며 살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자신이 맡은 일에 유능함을 느낄 것. 둘째, 자신의 삶에 진정성을 느낄 것. 셋째, 타인과 유대감을 느낄 것. 도시인들은 과연 유능함과 진정성과 유대감을 얼마나 느끼며 살아갈까. 일주일을 잡고 세어보아도 손에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반면 모든 구성원이 함께 수렵채집하는 것이 일상인 인디언의 삶은 일의 시작과 끝이 분명했고, 자신의 성과가 눈에 드러났으며,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평등하게 나누었으므로 공동체에 대한 기여감과 유대감이 강했다. 사실 인디언은 한 곳에 정착하지 않기 때문에 다 먹지 못하는 것은 나누어주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기도 하다. 또한 인디언의 사회관계는 대체로 평등할 수밖에 없다. 그야 한 개인이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해도 다른 사람 몇 명이 뭉치면 쉽게 제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인의 의도에 반하여 무언가를 강제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러한 인디언의 생활상은 고대 인류의 심성과 생활 방식을 대체로 온전히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고대의 인간 공동체는 살아남기 위해서 긴밀하게 상호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무리 지어 사냥했던 인류에게 있어서 무리에 속하지 못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인간을 비롯해 사회성을 지닌 영장류가 외따로 남아 살아남은 사례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사냥활동이나 천재지변과 같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는 항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공의 문제였다. 이러한 상황은 인류가 서로를 긴밀히 배려하고 협력하도록 이끌었다. 너의 위험은 곧 나의 위험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인류는 유대감과 이타심을 본성으로 체득하게 된다. 고대 인류 공동체가 항상 사이좋았던 것은 아니다. 공공의 수확물을 나누는 데에는 항상 무임승차자의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노력에 늘 기생하기만 하거나 수확물 대부분을 독점하려는 행태는 극단적으로는 그 공동체의 존속을 위태롭게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인류는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사람을 감시하고 처벌했으며, 이러한 감정은 현재 공정심이라는 형태로 남아있다. 같은 맥락에서 저자는 인류학자 크리스토퍼 보엠의 말을 인용하며 인류의 양심이 덩치 큰 먹잇감을 사냥해 온 결과로써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집단 수준의 상호협력을 유지하고 발달시키는 데에는 그런 정서적 기제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인류는 사피엔스 이전의 기간을 포함해 백만 년에 가까운 시간을 그렇게 함께 부대끼며 살아왔다. 반면 지금처럼 제대로 된 옷가지를 걸쳐 입고 문명인 노릇을 시작한 지는 1만 년이 채 되지 않았다. 10년 동안 몸에 익힌 습관을 단 한 달 만에 바꾸려 하는 셈이다. 당연히 잘 될 리가 없다. 하지만 게임의 규칙은 바뀌었다. 한 번 시작된 농업 혁명은 멈추지 않고 문명으로 이어지면서 공동체의 규모는 점차 팽창했다. 정착 생활을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각자 재산을 모아둘 수 있었다. 곡식이 고기보다 좋은 점은 썩지 않고 훨씬 오래 간다는 것이다. 이제 함께 사냥하지 않더라도 평소 모아둔 식량으로 충분히 혼자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세상은 함께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단지 개인이 열심히 노력해야 성공하는 곳이라는 신화는 이때부터 생겨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근대 산업혁명 이후 이러한 경향은 현대인인 우리가 더 잘 알다시피 더욱 심화되었다. 물론 고도로 발달한 현대 기술문명은 사람들의 생활수준을 중세의 왕보다 낫게 만들어주었고, 개인에게는 정부와 집단의 간섭과 압력으로부터 독립과 자유를 무척이나 많이 가져다주다. 사실 그런 간섭과 압력도 야만의 소산이 아니라 문명의 소산이긴 했지만 말이다. 이와 동시에 고도로 발달한 정보통신기술과 인프라 및 사회복지제도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매개하며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조금씩 서로가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되었다. 사람과 사람이 마주해서 해결해야 했던 협동과제들이 이제는 혼자서 클릭 몇 번이면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사회생활이 서툴고 부담스러워 실내로 숨어버린 히키코모리들이 유독 많아지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기술과 제도가 매개하게 되면서 많은 현대인들은 소외와 우울, 급기야는 높은 자살률로 내몰리고 있다. 이것은 명백한 결핍의 징후다. 저자가 짚어낸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현대 문명사회는 줄 수 없지만, 인디언 공동체는 줄 수 있는 것. 그것은 사람들 사이의 긴밀한 유대감이었다. 저자는 현대에 나타난 부족사회를 발견하는데 그것은 바로 전쟁이다. 전쟁이나 자연재해가 닥치면 사람들은 통념과 달리 패닉과 무정부상태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뭉치고 협력하며 공공의 문제에 대응하게 된다. 비록 현대사회는 계급과 소득수준과 인종과 종교와 성별로 사람들을 갈라놓았지만, 전쟁과도 같은 거대한 재앙은 그런 사사로운 경계를 간단하게 무시하도록 만들어버린다.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은 주의를 한 곳으로 모으게 되고, 이러한 집단적 몰입은 마치 자신이 보다 거대한 존재의 일원이 된 것과도 같은 깊은 참여감과 유대감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실제로 1차세계대전 독일의 런던 대공습 당시 런던은 자살과 정신장애가 급감했고, 심지어 그 난리통에 범죄률도 감소했다고 한다. 전쟁은 사회의 벽을 허물었고, 정신병 환자와 같이 역할과 의미가 없던 이들에게도 사회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었다. 어쩌면 자신의 역할과 삶의 의미를 찾아내기 힘든 무기력한 도시생활이야말로 정신건강을 위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저자는 전쟁을 옹호하지 않는다. 단지 전쟁이 아니고서야 실존적 운명을 서로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없게 되어버린 현대사회를 애석하게 여길 뿐이다. 저자의 고민은 어떻게 해야 부족(tribe)정신을 되살릴 수 있을지로 이어진다. 저자는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흔해 빠진 대립 구도는 아마도 영영 끝나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그야말로 고대 수렵채집 인류가 형성해온 두 가지 주요 부족정신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 서로 배려하고 약자를 도와야 했던 동시에, 마찬가지로 공동체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배신자와 무임승차자를 식별하고 처벌해야 했다. 가난하고 아파하는 이웃을 그냥 지나치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리고 중산층의 세금만 축내는 상하류층의 모습은 얼마나 분노를 자아내는 일인가. 이 둘 중 어느 하나를 포기하는 것은 인간성의 절반을 억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대신 저자는 공공의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지키려고 하는 기풍을 만들어감으로써 부족정신을 되살리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와 내가 본래 다르지 않다는 인식, 즉 만인이 공유하고 있는 인간성을 실감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본래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함께 살아왔고 또 함께여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와 동시에 공동체는 구성원들을 단순히 수동적인 수혜자나 공급자로 전락시키기보다는 그 모두에게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그들의 기여를 공히 인정해주는 기풍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지속적으로 유능감과 진정성, 그리고 유대감을 모두 확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인류는 오랜 세월 동안 천적과 사냥감과 재해에 공동으로 맞서왔다는군.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전략이 협력과 연대이다보니, 아무래도 서로 돕고 배려하는 마음이 인류의 뿌리 깊은 본성으로 남았나봐. 그러는 와중에 공동체의 노력에 무임승차하려는 구성원이 생겼다고 하는군. 그런 녀석들은 집단을 위태롭게 했을 테지. 바로 그런 식충이를 식별하고 처벌하는 습성이 공정심이라는 본성으로 남았다더군. 흥미롭지 않니? 보수주의 마음과 진보주의 마음의 근원이 이렇게 맞닿아 있다니. 아마 두 가치관의 충돌은 인류가 존속하는 동안은 사라지지 않을 거야. 인류는 애착에 대한 갈망을 포기하지 않을 테지. 동시에 무임승차 역시 굉장히 달콤한 유혹이기 때문에 그 틈새를 공략하려는 시도는 늘 공동체 안에 도사리고 있을 거야. 아무도 보는 사람 없고 증거도 남지 않는다면, 눈앞의 부당한 이득을 마다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래서 눈먼 돈이 그렇게 쉽게 사람들 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이겠지. 멀쩡한 돈을 일부러 눈먼 돈으로 만들기도 하는 것이겠고. 아마도 가장 먼저 솎아져야 할 무임승차자들은 멍청하고 가난한 사람보단 똑똑하고 부유한 사람 중에 더 많을 거야. 아무튼, 저자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우리가 다시 연대를 형성해야 한다는 건데, 그 방법은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인간성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실감해야 한다는 거야. 말은 좋지. 눈물 날 것 같아. 하지만 막연하기 짝이 없어. 지금은 기술과 제도 덕분에 너무도 안락하고 안전한 일상을 누릴 수가 있게 되었어. 사람들에겐 타인이 필요하지 않아. 여러 경우에 말이지. 솔직히 나도 이런 세상이 너무 편해. 하지만 고작 벽 하나 때문에 아파트 이웃이 데면데면하다니, 고대인의 심성으론 도무지 이해 못 할 현상인 거야. 달리 말해 그 정도로 가까이 붙어살면서도 서로가 영향을 주지도 받지도 않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경이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말이겠지. 이 상황에서 재앙이나 전쟁도 없이 무슨 수로 우리 모두가 인간성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는 걸까 고대 수렵채집인의 공동체는 기껏해야 50명, 아무리 많아도 150명을 넘지 않았대. 그 정도 규모라면 충분히 이해해. 서로의 이름, 얼굴, 성격, 취미, 가족관계, 심지어 러브시그널 작대기도 다 머릿속에 집어넣을 수 있었을 테니까. 무임승차자도 금방 탄로 날 테니 상호견제도 아주 확실했겠지. 하지만 아뜩하리만치 새까만 인간 무더기로 구성된 현대 도시사회에서 모두가 모두에게 인간성이라는 의미를 '실감'한다는 게 도대체 가능할까? 복잡하기 짝이 없는 정신없는 대도시에서, 하다못해 초고층 빌딩에 여객기가 처박히는 사건이라도 터지지 않는 이상, 생생한 연대를 기대할 수 있을까? 어림도 없지. 길가에 지나치는 사람들 얼굴이나 다 기억할 수 있을까? 우리는 나의 들숨이 너의 날숨이었다는 사실을 잊었지. 이건 감상주의적인 헛소리가 아니야. 가감 없는 현실이지. 하지만 머리로만 알 뿐 가슴으로 느낄 수는 없어. 시인이 아니고서야. 이 책의 마지막 장 제목은 이래. ‘이제 부족으로 돌아가자.’ 나쁘지 않은 제안이지만, 나는 비관적이야. 우리는 부족으로 돌아갈 수 없어. 게임의 규칙이 바뀌었어. |
|
최근 수년 간, 아마 현재의 박근혜 정부가 들어 뉴스나 사람들의 입을 통해 가장 많이 들었던 사자성어가 있다. 바로 '각자도생'이다. 말 그대로 '각자가 살길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민족이니 혈족이니 하는 말은 교과서에서나 찾아야 할 것이다.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연일 뉴스를 가득 채운다. 세월호 사고, 지진 그리고 최순실 국정농단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한시도 위험과 위협에 노출되어 있지 않은 적이 없다. 국가는 제 역할을 못하고 있고 사고가 나면 수습에도 정신이 없다. 우리가 믿고 있던 국가의 위기 대처 능력은 실제 상황에서는 무력하다. 위급한 상황에서는 그저 각자가 알아서 살 궁리를 모색해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현실 속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의 밑바닥에는 경쟁이라는 두 글자가 있는 것이니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각자도생'이라는 단어는 이제 우리나라를 넘어 전 세계가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며칠 전 미국의 4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미국 우월주의와 신고립주의를 주장하던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이 되었다. 그는 그간 전 세계 방범 대장 노릇을 하던 미국의 모습을 이제는 거두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글로벌화 되고 있는 시점에 반기를 든 것이나 다름없다. 과연 이러한 행동들이 진정으로 미국의 국익을 위한 길일까? <트라이브, 각자도생을 거부하라>는 제목에서와 같이 각자도생을 거부하라고 한다. 저자 시배스천 영거는 위기 상황에 봉착 했을 때 우리가 보여준 집단문화와 그 속에서 개인이 위안을 받고 사회문제가 줄었던 사례들을 보여주며 각자도생이 결코 우리의 바른 길이 아님을 이야기한다. 아메리카로 건너간 유럽인들이 원주민이었던 인디언을 정복하지만 살아가면서 되레 인디언식의 삶을 동경하고 그들처럼 살고 싶어한다. 사회가 복잡 다양해지고 농업과 공업을 통해 개인의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길은 확대 되었지만 오히려 개인이 느끼는 고립과 외로움은 우울함이나 자살 위험 증가라는 현상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반면 재난이나 전쟁 속에서 인간은 결속하고 연대를 하면서 공동체를 만들고 이것들을 이겨내왔다. 이런 현상들은 과거에서 현재까지 꾸준히 나타나고 있다.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집단을 만들었던 본능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속에서 우리는 자발적으로 서로에게 의지하고 더욱 가깝게 느낀다. 트라이브(Tribe)는 단어 뜻처럼 꼭 '부족'만을 지칭하는 말은 아니다. 저자는 '마지막 남은 내 음식을 나눠 먹어야겠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경쟁이 팽배하여 각자의 살길을 찾아야 하는 현실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위기에 나를 안아주고 그 속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공동체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국가의 위기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국민들이 전국 각지의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하야와 탄핵을 부르짖는 것 아니겠나. |
|
2016년 11월 12일은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현 정권의 전대미문의 국정 농단 사태에 많은 시민들이 광화문 광장을 넘어 종로 3가에서 을지로까지 가득 매웠습니다.
분노한 사람들의 물결은 장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더 놀란 것은 이 거대한 인파 때문만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비폭력을 외치면서 폭력을 시도하는 사람들을 막아섰고 경찰들에게도 수고한다고 다독였습니다. 2008년 광우병 사태 때도 시위에 참가했지만 당시보다 더 성숙한 시민의식에 놀랐습니다. 100만 명이 모인 시위는 시위가 끝난 후 쓰레기를 치운 사람들 덕분에 말끔하게 치워졌습니다. 이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이게 바로 연대의식이자 모두가 이웃이라고 느꼈습니다. 1987년 6월 10일 민주화 항쟁 이후 가장 많은 사람이 모였지만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연대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럼에도 한국의 미래는 밝다는 확실한 느낌을 받았고 그 느낌 속에서 미소를 지으면서 집으로 향했습니다. 인간성 회복을 위해서는 연대하라고 외치는 <트라이브 , 각자 도생을 거부하라>
<트라이브, 각자도생을 거부하라>는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ABC특파원으로 전 세계 주요 뉴스를 전하면서 '내셔럴 매거진 어워드', '피버디 상'을 수상ㅎ나 저널리스트인 '시베스천 영거'가 쓴 책입니다. 또한, 아프칸 파병 미군 부대의 생생한 전장을 기록한 <레스트레포>와 <전선으로 가는 길>을 제작한 다양한 영역에서 활약하는 이야기꾼입니다. 특히 <전선으로 가는 길>은 EBS의 EIDF 다큐멘터리 축제에서 보고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나네요. '시베스천 영거'가 쓴 책 <트라이브, 각자도생을 거부하라>는 그 수많은 전쟁터에서 느낀 경험과 자신이 가진 현대사회의 높은 자살률과 돈이 많은 사람이 꼭 행복하지 않고 오히려 전쟁터에 있는 병사와 전쟁과 대형 재난 속에서 오히려 행복감을 느끼는 이해가 안 가는 일들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한 아주 간단한 물음과 그 해답을 담은 책입니다. 이 책은 아마존 30주 연속 종합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25주에 올랐던 베스트셀러입니다. 베스트셀러 책 중에는 딱딱하고 두꺼운 책들이 꽤 있지만 이 책은 아주 얇고 쉽습니다. 또한, 주제가 아주 명료해서 책을 많이 읽지 않는 분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문턱이 낮은 책입니다.
트라이브(TRIBE)라는 '부족'이라는 뜻입니다. 부족? 무슨 이야기를 풀어갈지 책장을 넘겼습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1753년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면서 탄식을 합니다. 인디언이라는 원주민들과 영역 다툼을 하던 18세기 미국은 강력한 무기를 바탕으로 원시 부족 사회인 인디언들을 몰아내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월등하게 앞선 서구 문명은 인디언들의 원시 문명과 비교가 될 수 없고 인디언들을 미국 전역에서 몰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치열한 전투 속에서 서로에게 포로가 발생했는데 이상하게도 인디언 포로들이 된 미국인들은 다시 인디언 사회로 돌아가려고 하고 미군의 포로가 된 인디언들은 다시 인디언 사회로 돌아가면 미국 사회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영국에서 나고 자란 성인들도 인디언 사회를 경험하고 나서는 다시 인디언 부족들에게 돌아가는 현상을 보입니다. 이런 모습에 미국의 지성인 '프랭클린'은 개탄을 합니다. 우리 미국 사회가 인디언보다 물질 문명은 앞서지만 정신적인 면은 인디언이 높은지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면서 긴 한 숨을 쉽니다. 무엇이 인디언 사회로 돌아가게 했을까요? #빈부격차가 없고 더불어 사는 부족사회의 가치가 현대 문명을 이기다
자기결정이론이라고 부르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이것은 인간이 만족하면서 살기 우해서는 세 가지의 기본 조건이 필요하다는 이론으로 첫째, 맡은 일에 있어서 자신이 유능하다고 느낄 것, 이러한 가치들은 인간의 행복에 '내재한' 본질적 요소이며, 외모나 돈, 신분처럼 '외재적인'가치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 간주된다. <트라이브, 각자도생을 거부하라 53페이지 중에서> 인디언 사회로 백인 포로들이 돌아가는 이유는 크게 2가지입니다. 먼저 인디언 사회는 평등 사회입니다. 백인 사회처럼 여자와 아이들을 하대하는 백인 남성주의 사회가 아닌 모두가 평등합니다. 또 하나는 가진 것이 많지 않아서 빈부격차가 없습니다. 힘쎈 젊은 남자가 먹을 것을 독차지하려고 하면 부족은 생존의 문제라고 여기고 잔혹한 엄벌을 처할 정도로 철저하게 재산을 공동 분배하는 공동 사회입니다. 쉽게 말하면 원시 시대의 공동 보육, 공동 사냥, 공동 분배의 초기 공동체 사회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고 그 매력에 다시 인디언 부족으로 돌아갑니다. 저자는 이 초기 원시 공동체 사회가 엄청난 부의 축척을 이룬 현대 문명 사회를 사는 우리들이 배워야 할 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빈부격차가 심한 사회일수록 각종 정신병과 총기 난사와 같은 무책임한 행동, 높은 자살률을 기록했다면서 미국 사회와 가난한 나라의 자살률 비교를 통해서 왜 미국 사회가 병든 이유를 사라진 연대의식 또는 공동체 의식과 높은 빈부격차에서 찾습니다. 이런 시선은 신선한 시선일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제 경험을 돌이켜 보면 80년대만 해도 마을이라는 개념이 아주 강했습니다. 가난했던 80년대였지만 모두가 가난해서 이웃과의 비교를 크게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또한, 가난했기 때문에 이웃 간의 왕래도 지금도 더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집에 톱이 없으면 이웃 집을 돌아 다니면서 톱을 구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소비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반대로 우리 집에 있는 망치를 빌리러 오는 이웃도 많았죠. 이렇게 모든 것을 구비하고 살지 않아도 이웃에서 빌릴 수 있었습니다. 이런 왕래 속에서 물건만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닌 마음과 답례가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요? 집에 톱이 없으면 오픈마켓에서 구매를 합니다. 그리고 거의 쓰지 않죠. 쓸모없는 소비가 늘었습니다. 또한, 아파트가 보편화되면서 이웃과의 왕래도 크게 줄었습니다. 예를 들어 층간 소음으로 수시로 싸우는 존재이자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밀다가 살짝 긁혀도 돈을 달라고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서로 안면이 있고 아는 사이였다면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웃으면서 해결할 일을 경찰에 신고한다는 협박으로 마무리 합니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이런 삶이 과연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책의 저자는 한국 사회를 봤으면 이 책은 미국인이 아닌 한국인의 예를 더 추가했을 것입니다. 미국 못지않게 높은 빈부격차, 세계 최고의 노동강도와 경쟁만이 살길이라는 경쟁지상주의자들이 가득한 나라. 이러니 세계 1위의 자살률을 기록하죠. 저자는 이런 문명 사회의 독을 마을 공동체 같은 부족사회의 지혜에서 해법을 찾으라고 합니다. 이 시선은 새로운 시선은 분명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정도 알고 있는 혜안이니까요. 문제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시스템적인 구조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자는 왜 부족 사회의 지혜가 현대 문명사회의 해독제인지를 다양한 사례로 설명합니다. #전쟁과 대재앙과 재난 속에서 느끼는 공동체 의식
독일은 2차대전 당시 런던을 폭격합니다. 일명 '런던 블리츠'라는 작전으로 하늘에서 대규모 폭격을 했습니다. 영국 정부는 절망 속에서 하루 하루를 사는 영국민들의 마음 상태를 조사하고 기록합니다. 당연히 영국 정부는 런던 시민들의 마음이 피폐해져서 자살자가 많아지는 등 자포자기하는 사람이 많을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런던 사람들은 밤에는 오줌냄새가 가득한 방공호에서 지내고 낮에는 교회로 직장으로 출근을 했습니다.이런 일은 대재앙이나 재난을 겪은 지역에서도 보입니다. 대형 지진이 일어난 곳에서도 사람들은 묵묵히 자기 일을 찾아서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줬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죠. 큰 홍수가 난 재난 지역에서 우리 국민들은 정부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돈을 들여서 찾아갔습니다. 지난 태안 앞바다 기름 유출 사건을 떠올려보세요. 사고를 낸 대기업은 뒷전에서 피해액을 줄이려고만 계산기 두들기고 있었는데 우리나라 국민들은 바닷가에서 기름이 가득한 바위를 닦았습니다. 이 책에서 가장 놀랐던 부분은 보스니아 내전을 취재한 내용입니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보스니아 사람들은 각자가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면서 지냈습니다. "정말 사태가 드럽게 나빴을 때가 훨씬 더 좋았어" 많은 어르신들이 50~60년대의 궁핍한 삶을 말하면서 지금은 먹고사는 것이 해결된 살기 좋은 세상이라고 지청구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과연 먹고사는 것이 해결된 지금이 더 살기 좋은 세상일까요? 저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좀 화가 납니다. 먹고 사는 것 즉 굶어죽는 사람이 없는 사회지만 연대의식이 끊어지고 더불어 사는 유대감이 없는 현재가 더 좋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모두가 가난하게 살았지만 서로 서로 돕고 살던 마을 공동체가 남아 있던 그 시대가 더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기억나네요. 80년대 학교에서 선생님이 일본은 자살왕국이라서 조롱하고 비난하던 모습이요. 일본은 자살문화가 있는 나라라고 하던 것도요. 그런데 지금은 어떻죠. 일본보다 한국이 더 자살을 많이 합니다. 왜 이럴까요? 왜 우리는 이렇게 많이 죽을까요? 자살하는 사람들이 기댈 어깨가 없어서 그렇지 않을까요? 죽기 전에 누군가에게 하소연을 하고 싶은데 그걸 못하는 사회가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아닐까요? 자살자 줄이겠다고 마포대교 난간을 높여서 기어오르지 못하게 하겠다는 발상이 더 세상 살기 힘들게 하는 것 아닐까요?
저자는 아프칸과 이라크 같은 전쟁터에서 근무한 미군들이 본국으로 돌아온 후 자살하는 전직 군인이 많다는 것이 날조라고 주장합니다. 흔히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하는 PTSD가 흔히 엄혹하고 참혹한 전장터의 충격 때문에 자살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퇴역 미군들의 자살률은 일반인과 비슷하다는 점과 자살하는 이유가 PTSD가 아닌 전쟁터에서 느낀 끈끈한 유대감의 상실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은 좀 놀랍고 충격적입니다. 전쟁터라는 특수한 환경에서는 전우라는 끈끈한 유대감이 생깁니다. 그 유대감은 윈시부족사회의 모습에서 느낀 강력한 유대감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그 유대감이 없는 미국 본국에 온 후 냉혹하고 각자도생을 하는 현대 미국 사회에서 단절감을 느끼게 되고 그 단절감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 퇴역 미군의 자살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소속감이 사라져가는 한국 사회의 해독제는 공동체 의식 사람 각자는 약합니다. 그래서 선사시대부터 공동체 생활을 했고 공동체 생활 속에서 힘이 더 쌘 맹수들을 물리쳤습니다. 인간의 장점은 연대하는 공동체 의식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점점 솔로잉을 하는 늑대와 호랑이처럼 변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행동입니다. 페이스북을 통해서 깨진 공동체 의식, 소속감을 느끼려고 하지만 허한 마음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혼술, 혼밥 등 혼자 행동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가 사람들의 정신병을 증가시키고 마음을 병들게 한다고 강력한 어조로 말하는 책이 <트라이브, 각자도생을 거부하라>입니다. 이번 100만 시위에서 10,20대들은 함께 하는 공동체 의식을 제대로 느꼈을 것입니다. 2002년 응원을 경험하지 못하거나 기억에서 희미한 10대들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거대한 공동체를 제대로 느꼈을 것입니다. 함께 만들어가는 세상! 이 흔한 말이 우리 사회를 해독 시켜주는 가장 강력한 도구입니다. |
|
트라이브 각자도생을 거부하라가 주는 메세지 이 사회가 황폐해져가는 이유가 담겨져 있다. 우리는 외 우울증, 자살율이 증가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가..... |
![]() '트라이브(TRIBE), 각자도생을 거부하라 - 당신은 원래 혼자가 아니다!',
원제 'Tribe: On Homecoming and Belonging',
시배스천 영거 저, 베가북스 출판, 인문/사회과학 도서 리뷰입니다.
먼저 제목만 놓고 본다면,
'트라이브(Tribe)'는 '부족', '종족', '집단'을 의미하는 단어이고,
'각자도생'은 '각자 산다', '홀로 산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풀이해보면, '혼자 살려 하지 말고 함께 살아라'가 되겠네요.
왠지 '핵가족화', '혼술', '개인주의' 등 개인의 삶이 중요시되고 있는 현 시대에 있어,
그에 반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 듯해 제목에서부터 흥미가 갑니다.
![]() 험난한 세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각자도생이 아니라 연대와 소속을 느낄 수 있는,
공동체 트라이브를 만들어야 한다라는 얘기에서부터 이 책의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 이 책을 집필한 '시배스천 영거 (Sebastian Junger)'는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다큐멘터리 연출가로 알려져 있는 사람입니다.
특히 아프카니스탄에 파병된 미군 부대를 따라 다니며 전장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나,
리비아에서 지뢰 파편으로 숨진 동료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바로,
위험 지역이나 그 위험 지역내 역경 속에서 트라이브의 중요성을 체험하고 깨달은 듯 하네요.
![]()
차례는 간단하게 구성되어 있는 듯이 보이지만,
간단해 보이는 차례에 비해서 내용은 전혀 간단하지 않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작가 자신의 경험담을 넘어서 다양한 이론과 사실, 그리고 이야기를 토대로 내용이 복합적으로 진행되죠.
이에 따라 서서히 읽다가, 술술 읽게 되면서, 사실적으로 설득을 당하는 느낌이 듭니다.
![]() 역사를 비추어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 가면서 이야기를 펼쳐가는 것도 그 설득에 한몫하고 있죠.
![]() 특히 '집단에 순응해서 살아라'가 아니라,
'집단 안에서 서로 경쟁하면서도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찾을 수 있는 법' 같은 글의 맥락들은,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주는 계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자기결정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
- 맡은 일에 있어 자신이 유능하다고 느껴야 하고,
자신의 삶에 진정성을 느껴야 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유대감을 가져야 한다.'
알고 있지만, 깨닫지 못했던 얘기 같은 거죠. ![]() '각자도생' - '내 일은 내가 알아서 도모해야 한다'가 아니라,
내가 일을 하다 실패를 해도 걱정해주고 다른 일을 찾을 수 있다 격려해줄 수 있는 사회를 목표로 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보다보면 이런 격려를 해줄 수 있는 개인들이 모인 트라이브가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끼게 되죠.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지 모르고,
주변에 아무도 없이 순간순간의 결정에 망설이며 살아가는 무한 경쟁의 삶과 다르게,
다른 사람들과의 유대 속에서 나라는 존재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트라이브의 필요성이 새삼스레 절실해 집니다.
전체적으로,
'트라이브(TRIBE), 각자도생을 거부하라 - 당신은 원래 혼자가 아니다!',
제목 그대로를 가지고 설득을 당할 수 밖에 없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 추가적으로,
책의 뒷 부분에는 앞에서 언급했던 참고문헌들이 무지하게 많이 나오는데,
논문 저리가라로 많은 문헌들을 참조(레퍼런스)했습니다.
이러한 참조들은 이 책이 단순히 개인의 구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실에 기반한 제안이라는 것은 입증하는 자료라 할 수 있겠네요.
'본 포스팅은 베가북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