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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를 가지고 있는 학생들이라고 꼭 숏버스를 타야해? 그들과 소위 우리가 말하는 정상이라는 사람들을(학생들) 나누는 기준의 산유물. 이런 숏버스를 타고 장애를 극복한 영웅이라고 칭송받는 저자가 장장 4개월간의 긴 시간을 여행한 기록, 여행만 한게 아니라 그 여행 속에서 자신과 같은 장애를 가진 혹은 자신의 장애보다 더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만나고 웃고 즐거워하며 왜그토록 자신이 '정상'에 집착했는지 느끼고 알아가는 기록.(사회가 항상 그에게 정상을 강요하기 때문에 그는 정상적이어야 한다는 것에 상당한 집착을 가지고 있다.) 사실 저자는 자신도 어렸을적 읽기장애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현재도 백퍼센트 완전히 치유되었다고 말은 할수 없지만) 읽기장애,주의력결핍장애,다운증후군 등을 가진 사람들을 보고 정상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말할때가 간혹 있으니, 건강이 약간(?) 더 좋은 우리가 그 단어를 가지고 그들을 비정상이라고 간혹 부르는 사람들을 막무가내로 싸잡아 뭐라할 수도 없는것 아닐까?.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장애인을 보고 정상적이지 않아보일때가 있다는데..왜그리 정상/비정상, 장애인/비장애인 이런 단어들로 싸워대는지..
저자는 초등학교 3학년때 읽기장애 판정을 받았으며 초등학교 6학년때 학교를 그만두었고 자살결심을 했다고 한다. 자살계획을 종이에 적으면서도 필기체를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고 하니...주위 시선들로부터의 고통과 편견이 얼마나 견디기 힘겨웠을지 다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짐작이 간다.(그런데..자살계획이라니..계획성은 철저하군!) 그 어린나이에 자살 결심이라니..납득이 쉽게 되진 않았지만, 그와 같은 장애를 가진 많은 사람들이 어린나이에도 수없이 자살을 결심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마음이 조금 아프기도 했다. 그들을 비정상인으로 보는 친구들의 시선,심지어 선생님까지 그들을 보고 '멍청이,얼간이'라고 부르는걸 보며 그런 차별을 받아왔던 그들을 보며, 저자가 소리높여 장애의 문제는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 자체가,그들을 수용하지 못하고 비정상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기준을 정하고 그에 합당하지 못하면 특수한 사람들로 몰아가는 사회 자체가 문제라고 역설하는 모습에서, 뿌리부터 썩어있으니 잎이 튼실하게 자라날수 없다는 것에 한탄스럽기도 했다. 이런 그의 곁에서, 모두의 놀림,멸시를 받는(심지어 선생님에게까지) 그가 학교라는 작은사회를 멀리하고 걸핏하면 학교를 빼먹는 그를 나무라기는 커녕 '정신건강일'이라고 칭하며 동물원에 데리고 가곤 했다는 어머니의 얘기를 들으니, 어머니의 자리가 얼마나 대단하고 없어서는 않될 신성한 존재인지 다시한번 깊게 새기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장애를 가진 사람을 보면 처음 느끼는 감정이 대개 동정인 것 같습니다.우리와 틀린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조금 다를 뿐인 사람들인데 말이죠. 동정 어린 시선으로 그들을 보는것이 그들에게는 얼마나 상처가 될지는 알고 있을까요? 그리고 간혹 보면 정상인과 비정상인, 장애인과 비장애인 이런 단어들로 이게 맞다 저게 맞다 왈가왈부 하는걸 보면 전 잘 이해가 않됩니다. 그들을 보고 비정상인이라고 말하는게 꼭 잘못됐다고도 생각지 않고요, 그들도 저희를 보고 비정상이라고 할수도 있는거 잖아요. 않그런가요? 모든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봅니다. 그들의 몸이 불편하니까 '아, 저사람은 저건 못할거야. 이런건 내가 해줘야겠지?' 이런 시각과 생각 자체가 그들을 더 도태되게 하는거라고 전 생각합니다. 왜 할 수 없습니까? 그들도 할 수 있습니다. 몸이 불편하니 처음부터 그들은 못할것이라는 시선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누구든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도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더라도, 몸이 불편하지 않은 우리들보다 약간의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그들도 할 수 있습니다..전 그렇게 생각해요.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우울하고 암울한 시각으로써 써내려간 이야기가 아닌, 밝고 유쾌하게 자신의 여정을 써내려간 이야기 같아 읽어보고 싶습니다. 그를, 그들을 보며 저도 함께 웃고 울고 싶네요!(맨정신으로 읽어보니...조금 이상하긴 하다..)
2011년 2월 9일 새벽 세시가 가까워 오는 시간(정확히는 2시 42분경) 난 이런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지금 생각나는건 그때 내가 술이 약간 취했다는것 정도.. 무슨 생각으로 그러고 가서 저런 댓글을 달았는지는 모르겠다. 신청할까 말까 며칠을 망설이다가(그때는 멀쩡한 정신이었지만!) 도전해보자 하고 글을 남겼던거 같다. 그 전에 몇몇 댓글들을 읽어보았지만(거듭 말하지만 정신이 말짱할때!) 읽으면서 장애인, 비장애인, 정상, 비정상 이런 기준을 나눈다는 것 그자체도 난 잘 이해가 가지 않았고 그런걸로 왈가왈부 하는것도 솔직히 좀 별로였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지 저 사람은 장애인이니까 장애인으로써 바라보고, 어 이사람은 장애가 없네..그러면 비장애인..이런 기준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을까? 시선의 잣대를 이렇게 저렇게 바꿔가는 것 자체가 다른사람들에게는 어떨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무의미하다. 우리들은 길을 걷다가 종종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마주치곤 한다. 그러면 난 항상 이해가 되지 않는게 몸이 좀 불편해보이는 그 사람들을, 또는 정신이 조금 온전하지 못해보이는 그 사람들을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을 간혹 볼수가 있다. 특히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 더욱 그렇게 집요하게 바라보시는걸 가끔 목격하곤 하는데, 그러면 난 오히려 몸이 불편한 그사람들에게보다도 그사람을 바라보는 그분들을 의아하게 바라보곤 했다. 왜? 그냥 사람인데? 왜 저렇게 특이한것 보는듯이 쳐다보실까? 라는 생각을 가지며 말이다. 비단 이것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어느나라에서든 거의 그런가보다. 이책에서도 장애를 가진 그들을 요상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으니 말이다. 그것은 도대체 장애를 가진 그사람들이 문제란 말인가, 아니면 그사람들을 이상하게 쳐다보고,또는 이상한 사람처럼 대우하는 그사람들의 문제인가? 난 후자라고 생각한다.(어디까지나 저만의 생각입니다!!) 아니, 왜 장애가 없는 사람들 보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그래? 라고 물으신다면, 자기 자신의 가슴에 가만히 손을 얹고 눈을 지그시 감아보시고 잘 생각해보시라고 말씀 드리고 싶다. 그 이상 무슨말을 해드릴까? 이렇고 저렇고 이러니 저러해서 어떻고 저렇다~라고 장광설로 말씀드려야 하나?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세상을 기준을 정하고 나누려는 잣대 자체가 참으로 골통같은 짓인거 같다. 그것만큼 어리석은게 또 있을까.(어디까지나 제 기준이니 오해는 없으시길.)
생각처럼 유쾌하기만 한 책은 아니었다. 표지디자인처럼 조금은 우스꽝스럽기만 한 책도 아니었다. 에세이라고 명명되어있지만 그것보단 좀 무겁다. 내 삶과, 아둥바둥 살아가고 있는 모든 현대인들에게 여느책에서나 보아왔지만 다 알고있지만, 그들만만의 이야기로 또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나를 각성시켜주는 메세지가 있었던거 같다. 그리고 신파적이지도 않다.(그래서...크게 웃지도 못했지만 울지도 못했다...)그런거 난 좋다. 조금은 아프고 슬플지도 모르는 얘기이지만 읽다보면 오히려 머리가 조금 지끈거릴때가 있을 정도로 그들의 병에 대한 전문적인 이야기도 많다. 꼭 장애를 가진 사람이 한번쯤 이책을 읽어볼 필요는 없다. 그리고 장애가 있는 자녀를 가진 학부모들이 읽을 필요도 없고, 그런데 난 학부모님들이 이책을 한번쯤 읽어보셨으면 하는 바램을 가졌다. 그냥, 그러면 참 괜찮을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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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4학년 때였던 것 같다. 나에게는 장애를 가진 친구가 있었다. 그 아이는 어린 시절 앓은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에 다소 무거워 보이는 철로 된 보조 장비를 낀 채 힘들게 걸어야 했던 아이였다. 마침 우리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그 아이의 집이 있었고 하교 길에는 친구 몇 명이서 모여, 한 친구는 그 아이의 가방을 들고 다른 친구는 도시락 가방을 들어주면서 항상 친구 집에 바래다 주었다. 체육 시간에 그 아이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하지 못했다. 운동장 한 모퉁이에 앉아서 체육 활동을 하는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보는 그 아이가 참 많이 불쌍했고 그래서 더욱 더 잘 대해주었던 것 같다. 올리버 색스의 <색맹의 섬>을 읽다 보면 H. G. 웰스의 소설 <눈먼 이들의 나라>에 대하여 소개되어 있다(<눈먼 이들의 나라>를 읽어보려고 하였으나 아쉽게도 우리나라에는 아직 번역되어 있지 않다). 간단한 내용은 이러하다. 어느 길 잃은 여행자가 남아메리카의 외딴 마을에 도착한다. 그 마을 사람들은 아주 오래 전 마을 전체에 돌았던 병 때문에 모두가 장님인 채로 태어나게 되고 세월이 흐르면서 무언가를 본다는 개념 자체가 사라진다. 이 여행자는 처음에는 마을 사람들이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을 불쌍한 장애로 여겼다. 하지만 이러한 처지는 얼마 안 가서 바뀌게 되었는데, 그 마을 사람들이 오히려 눈이 보이는 이 여행자를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보이는 눈이 만들어내는 헛것에 지배당하는 실성한 사람으로 여기더라는 것이다. 그는 결국 그 마을의 한 여자와 사랑에 빠져서 그녀와 결혼하여 그 마을에 정착하고자 결심한다. 마을의 원로들은 회의를 거쳐 그의 눈을 제거한다는 조건하에 그들의 혼인을 허락한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사회라는 하나의 커다란 공동체에서 눈먼 우리가 정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닐까. 보편적인 것이 정상은 아닐 것이다. 미니스커트가 유행인 시대에 긴 스커트를 입는다고 비정상인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뒤에서 쑥덕거리고 다른 이들과 달리 눈에 띄는 옷 때문에 얼굴을 찌푸릴 수도 있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행동이 부산스럽고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다고 해서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라고 장애의 낙인을 찍어버리는 것. 눈에 띄고 색다른 사람을 두고 너는 보편적이지 않아 정상이 아니다라고 낙인 찍어 버리는, 즉, 진정한 장애란 각기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이미 경직되고 뻣뻣하게 고정되어 버린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있는 건 아닌지 다시금 생각해 볼 일이다. 나는 숏버스의 의미를 깨달았다. 숏버스는 사회적 기능을 위해 쓰인다. 장애인이라는 범주가 설정되자 그것을 근거로 우리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관념이 만들어졌다. 장애란 본질적으로 부정(否定)이다. 우리 문화에서 장애인은 어떤 사람이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아니냐(정상적이지 않다. 온전하지 않다 등)를 뜻한다. 여기에서 반대 개념인 ‘정상’이 출현했다. 정상이라는 개념은 우리의 삶 전반을 지배하면서 불가능했던 목표에 조건부 가능성을 내건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특정 상품을 사면’ ‘운동을 하면’ ‘치아를 교정하면’ 된다는 식이다. 숏버스가 감시하는 것은 그 영역이다. 숏버스는 무엇이 건강한 것이고 무엇이 병든 것인지, 무엇이 수용 가능한 것이고 무엇이 일탈인지를 가르는 인위적인 사회적 경계를 순찰하면서 정상이라는 개념을 우리에게 강요한다. (48쪽) 이러한 보편적인 사회 규범을 수용할 수 없거나 단지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들을 장애라 일컫는 일은 참혹한 일인 것 같다. 장애인이라고 일컬음을 당하는 사람들은 많은 상처를 입게 된다. 그리곤 자신이 무엇을 잘못한 걸까 끊임없이 생각하며 고통스러워 한다. 그리고 최대한 보편적으로 소위 정상으로 보일 수 있도록 자신을 채찍질 한다. 그러나 그 노력이 결실을 맺지 못하면 괴로워한다. “나쁜 것에서 좋은 것이 올 수도 있어. 난 아직 그 좋은 것을 못 찾았을 뿐이야.” (193쪽) 특히 우리나라처럼 장애에 대한 배려가 없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예전에 어느 방송 프로에서 휠체어를 타고 대중교통 이용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실험하는 내용이 있었다. 실제로 거리를 걷다 보면 보도 볼록 중에 노랗고 더 올록볼록 한 부분들이 있다. 이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이들을 위해서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가로수에 부딪히거나 중간에 끊기거나 해서 도저히 그들이 이용할 수 없는 상태이다. 물론 지금은 많이 개선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사항이 있다. 우리 모두가 장애가 없는 몸을 ‘일시적으로’ 갖고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자신의 빌 외삼촌에게 숏버스를 타고 4개월 동안 돌아다니면서 가졌던 의문인 ‘정상’이라는 개념에 대해 묻자 정상이라는 것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범위가 넓은 거라고 대답하는 그의 말에 해답이 있는 것 같다. “병이 아주 정상적이라는 걸 배웠다. 병은 건강의 한 부분이지. 정상이라는 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범위가 훨씬 넓다는 걸 배운 거야.” (390쪽) “병이 정상적이라는 걸 깨닫게 될 때 넌 자유로워질 거다. 그때는 네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되고자 하는 걸 멈출 수 있겠지.” (391쪽) 이전까지 나는 장애인에 대하여 잘 대해주고 보호해주어야 할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면서 장애에 대한 나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이미 장애와 비장애를 두 가지로 나누어 구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배운 것은 장애에 대한 관념은 사회적 구조물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결함이 있거나 어디가 고장 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다양성과 차이에 관한 이야기였다. (15쪽) 나는 이 책을 읽고 생각한다. 그냥 우리는 그냥 다양할 뿐인 거라고. 그저 다수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사회적 규범에 조금 어긋난다고 해서 그들을 장애인이라고 규정짓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그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고, 서로의 차이를 보듬으면서 서로를 배려하면서 살아가면 되는 거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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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초등학교 3학년 끝 무렵에 주의력 결핍(ADD)으로 인한 학습 장애 진단(읽기 장애)을 받았고 숏버스를 타고 다니며 특수교육을 받았다. 흔히들 특수 교육이라고 하면 신체 장애, 다운 증후군, 정신 지체를 말한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헌데 중요한 것은 그들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정상" 이라는 말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단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게 되었으니 말이다.
중학교 때 나와 같은 반 학생이 선생님이 책 읽기를 시키면 더듬 더듬 읽는 아이가 있었다. 띄어 쓰기도 전혀 되지 않고 영어 시간은 이루 말할 필요도 없었다. 헌데 수업 시간에는 어찌나 집중을 잘 하는지 교과서, 노트 필기는 또 어찌나 잘해 놓는지 모른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 아이를 많이 안타까워 했다. 왜냐면 열심히 한 만큼 성적이 오르지 않았으니까. 물론 지금까지 왜 그런지는 모른다. 그냥 간단하게 머리가 안 따라주나 보다 생각했었다, 그 당시에는.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영어도 띄엄띄엄 읽고 국어 시간에 다른 교과 시간에 일어나서 책을 읽는 것은 정말 그야말로 이제 막 말을 시작한 아이처럼 상대로 하여금 답답증을 일으켰다. 헌데 그것도 하나의 장애라는 것을 이젠 알 것 같다. 오랜 세월 속에서 잊고 지냈었는데 그 아이 역시 저자처럼 읽기 장애를 겪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나와 같은 사람인데, 나와 별반 다르지 않는데 왜 난 그들을 다르게 보게 됐을까. 그들을 보는 시선이 나는 왜 다른 것일까. 정상인으로서의 우습지도 않은 우월감일까, 아님 웃기게도 그들이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결론을 내린 것일까. 비장애인인 내가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장애인이 날 바라보는 시선 또한 생각을 나는 해 봤을까? 생각해 보지 않았다. 만약 이 세상에 비장애인보다 장애인이 더 많이 존재하는 세상이라면 나는 장애인이 겪었을 낭패감과 좌절감, 무력감을 똑같이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장애인이라서 못하는 것이 더 많은 그들에게 멸시와 천대가 섞인 시선까지 보태는 것은 나가 죽으라는 말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버스에는 노란색 옷이 입혀진 좌석이 있다. 그곳은 임산부와 노약자 석이다. 그리고 신체가 불편한 사람들의 자리다. 그리고 지하철에도 있다. 주차장에도 장애인의 자리는 엄연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 자리를 장애인이 차지 하기란 쉽지 않다. 정상인들의 배려가 없기 때문에 장애인은 이 세상에서 제대로 된 장애인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분명 장애인이라고 치부하며 나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면서도 그들을 위한 배려 따위는 하지 않는 것이 오늘 날 우리이다.
이것은 너무나 모순적인 일이다. 내가 그들을 장애인으로 봤다면 그들을 철저히 장애인으로 대접해야 한다. 하지만 우린 그렇지 않다. 장애인이 아닌 배려를 해야 될 수 많은 일상 속에서 나와 다르지 않게 그들을 대한다. 시선은 장애인이라는 것을 제대로 인식한 듯이 바라보면서 말이다.
이 책은 정상과 비정상인이라는 말 자체가 웃기다고 말한다. 나 역시 이 책을 통해서 그리 느꼈다. 단지, 나와 다를 뿐 그들은 비정상도 장애인도 아니다. 그냥 나와 조금 다를 뿐이다. 그러니 나와 다르니 조금만, 조금만 더 배려를 해 주면 어떨까, 조금만 더 다정하게 그들을 대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에게도 다짐을 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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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선정 도서로 나와 무턱대고 신청 하긴 했는데, 막상 리뷰어로 선정되니 ’이 책을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했다. 영화 ’숏버스’의 원작인 줄 알고 관심이 많이 갔는데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책이었다. 물론 영화와 일맥상통하는 부분도 없진 않지만 굳이 책으로까지 어둡고 불편한 얘기를 읽어야 하나 고민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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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의 숏버스에 타고서, 나는 멀찍이 떨어진 안전한 곳에서 우리가 정신이상자 혹은 지체장애인으로 분류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었다. 글로 정리되어 있으면 깔끔하고, 논리가 정리되어 있어 좋다. 누군가의 흥분된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입냄새를 맡지 않아도 깔끔하게 논지가 전달되고 그 과정에서 여러가지 이유로 얼굴을 붉힐 필요도 없는 것이다.
조너선 무니는 읽기장애를 극복하고 브라운 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자신의 장애극복담을 강연하며 살아가는 성공한 '장애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극복해야할 대상으로 생각하고 계속 불만족한 자기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완벽한 정상이란 것이 과연 획득할 수 있는 대상인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의 불안과 초조를 이해하게 된다. 자신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욱이 노말에 집착하게 된 것이다.
그는 그러한 강박에 못 이겨, 숏버스를 구입해 미국을 여행한다. 그의 목적지에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 있다. 그는 다양한 유형의 정신지체자로 분류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처음에는 그들의 다른 의사소통방법에 짜증과 혼란을 느끼지만 그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조너선은 또한, 정상과 비정상이 생겨나게 된 과정을 풀어 나가는데, 이러한 개념들이 최근에야 생겼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어느 곳보다 자유의 이미지가 강한 미국에서 우생학의 개념이 먼저 생겨났고, 히틀러는 그러한 개념을 효율적으로 받아 들였을 뿐이라는 것도 놀라웠다. 노인과 장애인, 그리고 유태인을 세상에서 쓸어버리고 더 좋은 세상에서 살게 하는 것 말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야 말로 멋진 신세계가 아니던가. 장애인들은 모두 특수학교로 보내고, 학습장애가 있는 ADHD 증후군을 가진 아이들은 자신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책상 앞에 앉아 얌전히 있어야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고 물어보면 '남들 하는 만큼만' 이라는 대답이 돌아오는 우리 사회야 말로 '정상'이 깊게 뿌리 내린 곳이 아닌가.
이 책에서는 뿌리깊게 내린 편견을 깰 수 있게 하는 명문들이 많이 등장한다.
사회는 일탈적 행동을 비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병으로 간주한다. (중략) 가난한 사람들은 병자다. 창녀들은 병자다. 동성애자들은 병자다. 슬픔에 잡긴 사람들은 병자다. 그렇게 해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아이들도 병자가 되었다. -106p 에서.
사실 19세기 이전에는 정신적 결함이 병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공동체에서 돌봐주어야 하는 사람인 것이다. 예전에 우리네도 동네에 거지가 있으면, 남은 밥을 가져다주듯이 말이다. 어린아이들이야 특유의 잔인함으로 돌을 던지고, 놀리더라도 공동체 전체에서는 그의 존재를 기꺼이 생활의 일부분으로 받아 들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물론 사회가 커짐에 따라, 우리 사회에 어떤 구성원이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란 면죄부를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옆집에 정신이상자가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옆집을 쫓아내고 싶지 않은가. 그가 깔끔하지 않거나, 트렌스젠더이거나, 말을 제대로 발음 못하고 늘어지게 한다든가 하는 경우에 말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서 더 많은 집세를 칼같이 받으며, 그들을 정신적으로 학대한다. 설령 당신이 아니라고 해도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렇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는 수많은 고쳐야 할 것으로 가득하다. 우울하지 말아야 하며, 흥미가 없어도 자신을 억누르고서라도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우러져야 하며, 아이들은 공부만 해야 한다. 정신과 의사가 사람은 누구나 정신병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배경에는 이러한 것이 있지 않을까. 우리는 정상의 개념에서 조금이라도 일탈하게 되면, 그것을 병으로 인식하고, 고치고 극복해내야 하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물론, 때로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어떤 사람들인가에 대해서는 조너선도 책의 마지막까지 고민하다. 다른 사람들과 다른 행동양식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 자신으로서는 논리를 가지고,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에 상처받는 것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켄트는 SAT 점수를 통해 자기도 정상적이 될 수 있다는 (그의 표현을 빌면 "완벽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정상적이 되려는 노력 때문에 녹초가 되어 버렸으므로 계속 그렇게 밀고 나갈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121p.
마음에 상처를 가진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기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로 가시를 세우고, 때로는 자기 자신에게 가시를 세워 안으로 곪아 들어가기도 한다.
조너선은 켄트를 통해 정상이란 것이 과연 자신을 미워하고, 자신을 포기하면서까지 만들어야 하는 모습인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사실 그전까지 그는 과거의 자신을 싫어하고 극복해야 할 모습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점차 자신을 받아드릴 수 있게 된다.
그가 과거의 사진을 태우기 위해 버닝맨 축제에 참가했으나, 그는 마지막 순간에 그 사진들을 태우지 않는다. 그가 태운 것은 종이쪽지 였다. '좀 가만히 있어라.' '대체 왜 그러니?' 바로 그가 그 자신을 몰아붙이면서 했던 얘기들이다. 우리도 그런 말을 자신에게 던진 적이 꽤 되지 않은가.
하지만 조너선을 확신을 갖지 못한다. 사람이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부의 확신만이 아니라, 외부의 인정도 함께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이 제대로 살아가는 가를 확인하기 위해, 외부의 지표를 이용한다. 돈과 집과 같은 객관적인 지표도 있고, 다른 사람의 애정과 같은 주관적인 지표도 있다.
원래 여행을 끝내고 나서도, 자신이 여행을 통해 무엇이 바뀌었는지 알기란 쉽지 않다. 끝은 언제나 아쉽고, 때로는 후회로 가득하니까. 그래서 조너선은 쉽게 여행을 끝내지 못한다. 여행을 하면 깨달음이 있다는 것은 환상이다.
그의 발걸음을 가볍게 한 것은 아버지의 전화 한 통이다. 이제껏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았던 아버지가 '여행은 어땠니?'라고 물어본 한 마디. 그는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 의례적인 말로 오해를 하고, 이 얘기들이 좋은 책으로 묶어나오길 바란다며 진취적인 자세를 갖추지만, 아버지는 그런 것과 관계없이 어떤 여행이었는지를 다시 묻는다.
항상 결과를 내야만 한다는 생각에 시달리던 조너선은 그제야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까운 사람의 애정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놀라움과 관심이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의 작은 인정. 우리는 늘 그것에 고파하는지 모른다.
장애 아이를 갖게 되는 부모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이 아이를 만나게 되면서, 나는 세상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이 책도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던져 줄 것이다. 그동안 당연시해 왔던 것에 대한 의문과 함께 어떤 것이 바른 것인지에 대한 생각의 재고 말이다.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책이라 리뷰도 매우 길어졌지만,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이제야 종이 너머로만 들여다보는 세상이 아니라, 진짜 세상에 한발을 디딜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정리된 얘기만을 읽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과 함께 마주하고, 그들의 다양함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를 더 성장시키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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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버스 중학교때.. 2,3학년.. 같은 반 친구를 한 아이중에.... 일반인들과는 다른, 보통은 장애인이라고 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하얗고 뽀얀 피부에 마른 친구였는데.. 말이 많이 어눌었어요. 신체상의 아픔은 없었고 언어와 듣기가 힘든 친구였어요. 입 모양을 보고 이해를 하고 말하는 친구였지요. 부모님의 생각으로 일반 학교에 보내셨는데..... 몸도 약했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업적인 면에서.. 정상적인 친구들에 비해서 많이 못 따라가니.. 결국 3학년때.. 특수 학교로 전학을 갔던 친구랍니다. 다른 친구들이 이 친구를 무시하거나 따돌리거나 하진 않았어요. 그냥.. 대부분이.. 완전히 도움은 못줘도 항상 관심은 가지고 도울 준비는 하고 있던 친구들이었지요. 그 중에서 제 베프가 이 친구를 참 많이 도와주고 이끌어줬었답니다. 덕분에 저도 같이 자주 지냈었었답니다.
숏버스 여행은 4개월 가량 진행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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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너드 데이비스의 [정상강요]에 의하면, "정상"이라는 단어는 1860년대까지영어에 없던 개념이다. 그 전까지는 "이상; 누구도 현실적으러 도달하지 못한 상태에 대한 관념"만 존재했는데, 미국의 도시 인구가 불어니고 세계 도처에서 이민자들이 몰려와 국가가 통제할 필요성이 생기면서 정상이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출현했다. 그 후, 우리는 정상에 도달하기 위해 문화속에서, 가장 속에서, 삶 속에서 정상을 쫒아야 하게 되었다고 한다. - 읽기장애를 극복한 '조너선 무니'가 정상이 되기 위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찾아가는 여행을 다룬 [숏버스]에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