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대학시절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 한 권을 뽑으라면 단연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다. 저자가 언급한 사상의 깊이를 다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인간의 삶의 태도를 두 가지 양식으로 나누어 고찰하고 인간답게 사는 존재양식을 취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신선하고 뭉클하게 다가왔다. 이번에 독서모임을 통해 다시 읽으며 무한한 인류의 진보에 회의적인 사람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담은 이 책의 진가를 비로소 알게 됐다. 특히 여성해방운동의 당위성을 역설한 점은 여러모로 진행중인 페미니즘 운동의 전망에 고무적이다.
기계중심의 산업사회가 시작된 이래 자연을 능동적으로 지배하게 된 인류는 무한한 진보와 역사의 발전을 믿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심화와 과학,기술의 끝없는 변신은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단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통제되지 못하고 있다. 모든 생활 영역에서 소유양식을 극대화해온 가부장제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을 참다운 인간성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사회다. 이제 인류는 인류의 생존과 전 지구적 생태계와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소유양식에서 존재양식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다. 저자는 새로운 사회건설을 위한 반(反)권력의 대표자로서 여성해방운동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될 것으로 내다본다.
저자는 인생의 위대한 스승인 예수와 부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마르크스의 사상에 심취해 전념하며 그들이 전하는 공통된 메시지를 소유와 존재양식의 삶으로 구분해 전한다. 그는 존재와 소유의 개념을 다음처럼 풀이한다. "존재"라는 말로 나는 어떤 것을 "소유"하지도 않고 또 "소유"하려고 갈망하지도 않으면서 즐거워하고 자기의 재능을 생산적으로 사용하며 세계와 "하나가 되는" 삶의 양식을 표현하고 있다.
저자는 '학습과 기억, 대화, 독서, 권위의 행사, 지식의 소유와 인식, 신념, 사랑' 등의 일상경험에 있어서도 우리의 태도는 소유와 존재양식으로 나누어진다고 한다.
사랑하는 것은 생산적인 능동성이다. 그것은 인물, 나무, 그림, 관념을 존중하고 알고 반응하고 긍정하고 향유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생명을 주는 것을 의미하며, 그의 생명력을 증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신을 갱신하고 자신을 증대시키는 하나의 과정이다. (74p)
하지만 "사랑이 소유양식에서 경험될 때 그것은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을 구속하고 감금하고 또는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압박하고 약화시키며 질식시켜 죽이는 행위이다." 데이트 폭력과 가정폭력으로 나타나는 남성의 일방적인 권위의 행사가 사랑이 소유양식에서 경험되는 행태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는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자기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지 의문이라고 말한다. 결혼한 부부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랑에 의해 결혼했든, 과거의 전통적인 결혼처럼 사회적 편의나 관습에 의해 결혼했든 간에 진짜로 서로 사랑하고 있는 부부는 예외처럼 보인다. 실은 사회적인 편의, 관습, 상호의 경제적 이해, 자식에 대한 공동의 관심, 상호의존, 또는 상호증오나 공포 등이 의식 위에서는 '사랑'으로 경험된다 -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고 있지 않으며, 지금까지 서로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부부의 어느 한쪽, 또는 양쪽이 깨달을 때까지. (75p)
저자에 의하면 "사회적 기능을 조절하는 규범은 그 구성원의 성격(사회적 성격)까지도 형성한다"고 한다. 산업사회에 있어서는 재산을 취득하고 늘리고 지키겠다는 소망이 재산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나타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가장 가진 것 없는 계급의 남자라도 아내와 아이, 동물 등 살아있는 존재를 소유하는 것은 가장 큰 즐거움이다. 남성의 주도권으로 대표할 수 있는 가부장제적 질서는 대략 6천 년에서 7천 년 사이에 나타나 조금씩 줄고 있으나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아이를 낳는 모든 고통이 여자의 것임을 고려할 때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이를 만든다는 것은 여성에 대한 노골적인 착취라는 것을 거의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편 어머니는 어머니대로의 독자적인 형태의 소유권, 즉 어린 시기의 자식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있다. 이 공전은 끝없는 악순환을 이룬다. 남편은 아내를 착취하고, 아내는 어린 자식을 착취하며, 청년기의 남자는 이윽고 연상의 남자들에 끼어 여자를 착취하는 등등으로.
저자는 소유양식에서 존재양식으로의 변화는 개별적으로 흩어져 있는 극소수의 인간이지만, 소수자가 역사적 발전의 방향을 보여주는 것은 역사상 최초는 아니라고 말한다. 이러한 희망이 더욱 현실적인 것은 새로운 태도의 출현을 가능하게 만든 몇 가지 요인이 역사적인 변화들이며 그것들을 되돌리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 변화란 여자에 대한 가부장의 지상권의 붕괴이며, 자식에 대한 어버이의 지배권의 붕괴이다. ... 금세기의 성공적인 혁명으로 비록 초기단계에 있기는 하지만 여성 혁명, 어린이의 혁명, 성(性)의 혁명을 들 수 있다. 이들 혁명의 원리들은 이미 수많은 사람들의 의식을 통해 받아들여졌으며, 옛 이데올로기는 날마다 점점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어가고 있다. (112p)
저자는 산업사회에서 인간을 숫자로 환원해 버리는 관료적인 태도는 모든 인간관계에 스며들어 감정이입과 동정의 대상으로서의 인간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관료제를 극복하고 모든 개인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참여 민주주의로의 전환은 새로운 사회건설에서 필수다. 특히 가부장제로부터 여성해방의 필요성과 당위성에 대한 프롬의 인식은 매우 근본적임을 알 수 있다.
가부장제 지배로부터 여성의 해방은 사회가 인간화되는 데 있어 기본적인 요인의 하나다. 남성에 의한 여성 지배는 지금으로부터 약 6천년 전에 세계의 도처에서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농업의 잉여생산물로 말미암아 노동자의 고용과 착취, 군대의 조직화, 강력한 도시국가의 건설이 가능하게 되었을 때였다. 그 이래로 중동과 유럽 사회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세계문명이 여성을 굴복시킨 '남성 연합'에 의해 정복되었다. 인류에 있어서의 남성의 여성에 대한 이러한 승리는 남자의 경제력과 그들이 만든 군사기구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양성 간의 투쟁은 계급간의 투쟁만큼 오래된 것이지만 형태에 있어서는 한결 복잡하다. 왜냐하면 남성은 여성을 일하는 동물로서뿐만 아니라 어머니로서, 애인으로서, 또 위안자로서도 필요로 해왔기 때문이다. 이 투쟁의 형태는 때로는 공공연하고 잔인하지만 대부분은 은폐되어 있다. 여성은 보다 우월한 힘에 굴복하지만 여성 특유의 무기로써 반격했다. 그 주된 것은 남성을 조롱하는 일이었다.
인류의 절반이 다른 절반에 의해 정복되었고, 아직도 정복되고 있다는 것은 양성 모두에게 막대한 손실이 되고 있다. 남성은 승리자의 특징을 띠고 여성은 피해자의 특징을 띠고 있다. ... (252p)
마지막으로 저자는 "존재적 사회의 확립'을 위해 몇 가지 제안을 한다. '광고와 정치선전에 쓰여지는 최면술적 방법은 비판적인 사고와 정서적 자주성에 아주 위험"하기에 중지되어야 한다는 것, 국민의 빈부격차를 줄여야 하고 '사회적 의무'에 관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연간 보증 수입'을 제공할 것, 여성이 가부장제로부터 해방되어야 할 것, 또 '최고문화회의'를 설립하여 정부, 정치가, 국민에게 지식을 필요로 하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조언을 해주는 것을 그 직무로 삼도록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효과적인 정보를 효과적으로 보급하는 체제를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십 년 전에 쓰여진 글이지만 오늘날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존재적 삶의 태도의 필요성과 절실함에 공감할 수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사회와 개인이 겪는 갈등의 문제를 소유와 존재의 양식을 통해 사유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됐다. 사회학자이자 사회심리학자인 프롬의 다른 책들 <자유에서의 도피>, <정신분석과 종교>, <사랑의 기술>, <희망의 혁명> 등도 널리 알려진 명저들이다. 기회가 닿는 대로 오래 전에 읽은 책은 다시 읽고 새롭게 알게 된 책들도 한 권씩 읽으며 사유의 폭을 넓히고 싶다. |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 서문에서 이기심을 인간의 본성이 아닌 사회적 환경의 산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하는 모든 행동들, 심지어 사랑까지도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만족 즉,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하는 것이라 생각해 왔던 나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에리히 프롬은 아담과 하와의 죄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복종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이기심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선악과를 먹은 후 서로 부끄러워했던 것은 원래는 '하나'로 창조된 그들이 이기심으로 '둘'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최초의 사람들인 아담과 하와가 이기심을 가졌다면, 인간의 이기심이 본성이라 말해도 무리가 아니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또한 이기심이 사회적 환경의 산물이라면 그때의 어떠한 사회적 환경이 그들에게 이기심을 갖도록 했을지도 의문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창조를 '하나'인 것으로, 또 인간의 원래 창조의도는 이기심이 아님을 믿을 수 밖에 없는 것은, 아니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은, 지금까지 이기심으로 살아온 나에게 참된 기쁨과 완전한 만족이 없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에리히 프롬은 이기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허한 현실 모습을 말하고 그 해결책으로 존재양식으로 사는 삶을 설명한다. 존재양식의 삶은 능동적이며 현실을 사는 삶, 또 안정감과 기쁨을 얻으며 나아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극복하는 삶이라고 말한다. '자신'이라는 사람을 소유한 것 또는 소유하려는 것, 또 보이는 것으로 정의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그 자체로써 자신의 삶의 이유, 목적, 정당성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존재양식의 삶이다. 존재양식의 삶은 행복을 욕구의 만족이 아닌 자신의 존재 그 자체에서 오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또한 자신의 존재 자체도 소유하려 하지 않음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과연 존재양식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이 책에서 몇 가지 일상 속 에서의 존재양식의 삶의 예를 들기는 했지만, 나의 삶 자체를 그렇게 살수 있을까? '나'라는 존재 자체를 소유하지 않는 다는 것의 의미도 모호하지만, 과연 '나' 자신 조차도 내가 소유하지 않을 수 있을까? 존재양식대로 살아가려면, 즉, 이 책의 주장을 인정하려면 전제 되어야 할 것은 인간이 무엇을 소유하려는 욕구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자기자신의 존재자체도 말이다. 내가 가진 것, 내가 앞으로 가지려 하는 것, 나아가 나 자신까지 소유하려 하지 않는 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기심을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고 믿는다 해도 이것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의 사회적 환경은 이기심으로 살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경제체제 안에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경쟁할 수 밖에 없다. 남들을 이겨야 자신이 더 많은 부와 명예와 권력을 얻는다. 사람들은 이타심을 가장하여 돈을 벌기도 한다. 다른 사람을 위하는 듯 하면서 더 많은 돈을 쓰도록 유도한다. 이타심을 가진 사람들이 손해를 보고 바보소리를 듣는 것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사회적 환경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 남을 밟고 올라 서며, 자신의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남을 위해준다. 또 직장의 승진을 위해서 신을 믿는다. 에리히 프롬은 마지막 장에서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사회체제까지도 제시해 놓고 있다. 존재양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회의 지도자 층이 되어 사회체제가 바뀌게 될 것이라는 것이 그의 소망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은 나에게 큰 고민 거리를 안겨주었다. 분명 이기심으로 살아 갈수밖에 없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환경과,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존재양식으로서의 삶은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존재양식으로 삶을 산다는 것은 사랑으로 삶을 산다는 것이라 생각한다. 분명 사랑으로 사는 삶에는 기쁨이 있고, 완전한 만족이 있으며, 진실과 정의가 있다. 회의감, 상실감, 고독감, 외로움, 나아가서는 죽음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 소유는 아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했는가에 따라 얼마나 더 성공했는지를 판단한다. 사람이 소유한 정도에 따라서 평안을 아니더라도 편안함을 가져다 주고, 기쁨은 아니지만 즐거움을 준다. 편안함보다 평안이 더 중요하고, 순간적인 즐거움 보다 기쁨이 더 좋은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소유를 요구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소유를 포기하고 존재만을 바라보고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분명 인간은 사랑으로 살아갈 때에 참으로 존재할 수 있다. 만족을 추구하며 사는 삶에는 절대로 기쁨이 없다. 만족에는 만족이 없기 때문이다. 죽어라 일해서 죽어라 사고, 죽어라 버리는 삶의 반복이 만족을 위한 삶, 즉 소유를 위한 삶이다. 존재로써의 삶은 사랑으로 사는 삶이다. 하지만,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랑을 찾아서 그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려 한다면, 그것은 사랑도 소유함으로써 만족을 얻으려 하는 것이다. 사랑으로 산다는 것은 사랑을 소유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 속에 종속되는 것이다. 그때에 만이, 자신의 존재자체로써 자신에게 완전히 만족될 수 있고, 이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소유한 것으로 표현하려는 것을 멈추게되고, 나아가 남에게 주는 것으로 표현하기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남을 밟아야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존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즉, 오직 온전한 사랑 속에서 사랑의 종이 되어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행복한 삶, 존재의 삶, 우리모두가 사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내게 인간은 먹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먹는가 라는 질문을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하게 한다. 아직도 어떤 사람들은 살기 위해 먹지만 어떤 이들은 먹기 위해 산다. 그것이 가장 기본적인 소유냐 존재냐의 갈림길일 것이다. 한끼의 밥과 한 개의 빵이 그리운 사람이 있는 반면 더 맛있고, 더 좋고, 더 비싼 음식을 먹기 위해 사는 미식가들도 있다. 가난한 자와 부자들의 생활 양식인 것이다. 문제는 가진 자는 더 가지기 위해 가난한 자의 배고픔에 눈을 돌리지 않고 자신들의 부의 유지와 더 많은 부의 창출을 위해서만 애를 쓴다는데 있다. 그것은 작가가 이 작품을 썼을 때와 지금, 나아가 인간의 문명이 시작된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는데 있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우리 속담에 벼 99섬 가진 자가 1섬 가진 자 것을 탐낸다는 말이 있다. 더 많이 가진 것으로 인간을 평가하지 말자고 말하지만 그것은 단지 인간 머리 속의 몇몇 사람, 학자들이나 종교 지도자, 사회 개혁자, 시민 단체만이 주장하는 것이고 실질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부자들에게는 공염불이다. 지금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했다. 왜? 단지 그들이 가진 석유가 탐이 났기 때문이다. 세상은 아무리 99명의 선한 이가 있어 더 나은 세상과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꾼다 해도 단 1명의 악한 이로 인해 꿈만으로 끝나게 된다. 그것이 인간사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막스즘에 대해 생각을 했다. 그들도 시작은 모두가 잘 사는 세상에 대한 염원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상을 이용한 스탈린, 마오쩌뚱, 김일성, 카스트로 등 공산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은 어떠했는가... 그들 안에서 그들이 말하는 인민들은 다 같이 잘 살았는가... 왜 공산주의는 사라지고 말았는가... 지금 북유럽의 사회보장제도가 잘 이뤄지고 있는 나라들이 왜 그 사회 보장제도를 줄이려고 애를 쓰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은 언제나 나는 더 갖고 싶고 남은 덜 갖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교육이나 제도 개혁, 시민 단체들의 운동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 존재 자체가 그렇게 생겼기 때문이다. 아마도 작가의 소망이 이뤄진다면 그것은 교육의 성과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인간 자체의 개념이, 인간이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미국의 이라크 침략에 얼마나 무력했는지, 그러면서도 각 나라가 자신들의 실리에 얼마나 순간 순간 머리를 쓰고 우리 자신들도 이라크 사람들의 아픔보다 주가의 등락과 경제 침체에 얼마나 더 신경을 썼는지 생각해 보라. 우리가 과연 어떤 인간인가, 에리히 프롬의 말이 실현될 수 있을 가능성이 단 1퍼센트라도 있는지 각자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아줌마가 이런 말을 했다. 전세를 살 때는 못 가진 자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소외된 처지가 서러웠는데 집을 마련하고 보니 집 값이 더 올랐으면 하는 생각이 들고 전세를 더 올리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 아마 이 말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소위 서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럴진대 모든 이런 이야기들은 단지 이야기일 뿐이고 공연한 공염불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서구가 변한다면 이제 다 가져 봤기 때문에 색다른 것이 하고 싶다는 생각에서일 뿐이고 그것은 절대 나아짐이라고 변화라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서구에서 벌어지는 환경 운동을 생각해 보자. 이제 쓸 것 다 쓰고 파괴할 거 다 파괴하고 나서 그들은 다 가져 봤기 때문에 잘난 척 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뿐이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도 소유하지 않음으로 모든 것을 갖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다. 방식이 다를 뿐 인간의 멸망이 없는 한 언제나 인간 사회에 소유나 존재냐의 고민은 계속될 것이고 고민해 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왜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가 베스트셀러 되었는지 그것만으로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러니 결론적으로 에리히 프롬도 머리만 쓰고 고민만 많이 했을 뿐이라는 생각이다. 인간은 그렇게 많이 생각해 줄 필요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노력한다고 달라지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
인간은 왜 사는가? 이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에리히 프롬의 책은 읽어봤음직 하다. 그는 '사랑의 기술'이란 책과 함께 '소유냐 존재냐'라는 유명한 책을 남기고 사상서가운데 길이 남을 이름을 장식하게 되었다. 생각해보자.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 그러면 먼저 인간의 존재양식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행위는 무엇을 지향하고 지양하는가? 무엇을 목표로 하는가? 사람마다 -너는 왜 사느냐? 라고 물으면 그 대답은 천차만별이다. -편하게 살기 위해서. -돈을 많이 벌려고. -유명한 무엇이 될려고. 그러면 왜 편하게 살려고 하니? 왜 돈을 많이 벌려고 하니? 왜 유명한 무엇이 될려고 하니? 설마 우리들은 비싼 냉장고와 컴퓨터를 사기 위해 먹고 사는 것인가? 우리의 일상을 생각해 보면 인간이란 거의 모든 삶-생명-을 물질에 의지하여 이어가고 있다. 숨쉬고 움직이려면 음식물이 필요하다. 어딘가로 갈려면 자동차가 필요하고, 집도 살아가는데 필수요소다. 핸드폰이 없으면 원시인 취급을 당하기 일쑤다. 하지만 -왜 자살하지 않고 삶을 선택했나?-라는 질문으로 좀 비슷하게 바꾸면 대답은 달라질 수 있다. 우리는 단순히 빵이 있기 때문에 죽지 않고 사는 것은 아니다. 이렇듯 인간을 존재하게 하는 것은 손에 잡히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들이다. 혹자는 그것을 사랑이라 말하고, 명예라고도 말하고, 의무라고도 말한다. 하지만 이것들은 사실 우리가 하루하루를 존명해 나가는데 '아무런'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닌, 일명 '쓸데없는 것들'이다. '소유냐 존재냐'란 책은 일명 그 쓸데없는 것들에게로 관심을 갖게 하고 애착을 갖게 할 수 있는 책이다. 이미 고전이라 불릴만큼 오래전에 씌여져서 이 첨단 테크놀러지의 시대에 뒤쳐지는 듯한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읽히는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까? 현대는 어떤 소설의 제목처럼 상실의 시대일지도 모른다. 왜 그 상실이 생겨나는가? 소유가 없으면 상실도 없다. 하지만 지금의 세상은 소유를 위한, 소유에 의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지금처럼 소비가 권장되고 중요한 아이템으로 작용한 시대가 있었던가? 프롬은 그 시대에 한 권의 책으로 강한 경고의 메세지를 남기고 있다. 사상서라서 어려운 느낌도 있고, 확실히 딱딱한 면이 있긴 하지만, 중고생이 읽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내용도 아니고, 읽으면 누구나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진정으로 존재하고 싶은 욕구가 들 때, 이 책을 읽으면 해결책은 보이지 않으더라도 마음 한켠 훈훈한 어떤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같이 읽으면 좋은 책으로는 소로우의 -월든-을 추천한다. |
![]()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는 독일의 석학 에리히 프롬에 의해 쓰여졌으며, 그가 사망하기 4년 전인 1976년에 출간되었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양식을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으로 나눈 뒤, 우리의 사회는 존재양식을 근거로 출발하였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소유양식이 지배적인 사회로 변하고 있음을 비판하며, 존재양식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먼저, 각각의 양식에 대해 설명하고, 존재양식으로 돌아가기 위한 제언으로 끝을 맺는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양식이 변화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라고 말한다. 책의 내용 중에서 인간의 성격의 변화 혹은 사회의 변화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의하고 있다. 이는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소유양식에서 존재양식으로 변화 혹은 책의 서술방식과도 닮은 점이 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존재한다면 인간의 성격이 변혁될 수 있다고 본다. 1) 우리는 고통받고 있으며, 그리고 그것을 알고 있다. 2)우리는 불행의 원인을 인식하고 있다. 3)우리는 불행을 극복하는 방법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4)우리는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생활규범을 따라야 하며, 현재의 생활관습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용인하고 있다. -P224-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위대한 약속, 그 좌절과 새로운 대안 2. 소유와 존재의 차이에 대한 이해 개관 일상경험에 있어서의 소유와 존재 구약·신약성서 및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저작 3. 두 가지 생존양식의 기본적 차이에 대한 분석 소요양식이란 무엇인가 존재양식이란 무엇인가 소유와 존재의 새로운 측면 4.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사회 종교·성격·사회 인간변혁의 조건과 새로운 인간의 특색 새로운 사회의 특색 에리히 프롬은 존재양식에서 출발한 현대의 사회가 소유양식이 지배적인 사회로 변모되었음을 개념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그 설명의 과정에서 여러가지 비유와 인용, 그리고, 그가 교사라고 이야기하는 여러 석학, 예를 들어, 프로이트, 마르크스 등을 언급하고 있다. 이 같은 과정에서 에리히 프롬은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이라는 하나의 스펙트럼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사실들 혹은 생각들에 대해 이야기 함으로써, 단순한 존재양식과 소유양식에 대한 소개의 글 이상의 의미를 던지고 있다. '나는 너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사랑은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며, 사람이 그 주체가 되는 내적 능동성이다. 나는 사랑할 수 있다. 나는 사랑하고 '있을' 수가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데 있어서 내가 '가지고'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P45- 명사는 이와 같이 존재양식에서 소유양식으로 변화되는 사회상을 반영하는 좋은 사례라고 이야기한다. 지금까지는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언어 습관에서도 이러한 변화양상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것을 표현할 때, 그 변화나 행동의 양태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대신, 그것을 대상화하여, ~가진다. 라는 식으로 표현을 하는 법에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존재양식에 있어서 최적의 지식은 '더 깊이 아는 것'이다. 그러나 소유양식에 있어서의 그것은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다. -P69- 존재양식과 소유양식에는 무수한 대척점들이 존재한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지식과 기술 마져 소유화해 버렸다. 우리들은 얼마나 많이 생산하는지에 몰두한 나머지,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에는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 세상은 유한한하다. 그 무엇도 무한할 수 없다. 하지만, 소유에 대한 욕구는 무한한 것이다. 따라서, 유한한 것에 대한 무한한 소유는 결국은 파국으로 치닫을 수 밖에 없다. 서구인들이 선과 같은 동양적 체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인간이 재산과 탐욕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 않은 사회의 정신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P41- 우리는 지금까지도 서구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에 이분법적 잣대를 들이대고 있지만, 그것은 더이상 옳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지금에는, 서구적인 것은 현대적인 것을 대변하고 동양적인 것은 과거를 대변하는 것처럼 되어 있다. 더불어, 최근에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여행을 여가를 즐기는 하나의 유행이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여행이 가지는 본래적 기능과 장점은 퇴색하여 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더이상 서울 거리와 도쿄 거리 또는 타국에서 느낄 수 있는 정취는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여행을 떠난다. 그 무엇이 아닌 여행이란 경험을 소유하기 위해서 떠난다.
이 모든 것은 문제가 인식되고 있어 해결을 위해 무엇이 행해지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행해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P30- 선견지명인 것일까 아니면 달라진 것이 없는 것일까? 의문이 든다. 변화의 속도를 강조하는 지금의 세상은 모든 것에 해마다 다른 명칭이 붙는다. 하지만, 우리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한다. 그것은 새로운 이름을 붙이고 나오는 것이고, 미디어에서 새로운 것이라고 이름을 모아 이야기하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데자뷰를 느끼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아이러니 자체이다. 지구의 역사에 비하면 인간의 역사란 순간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런 인간의 역사에 비추어 현대인의 시간은 역사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하다. 그런데, 만약 지금과 같이 해마다 모든 것의 명칭이 변한다면, 심지어 그것이 같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면, 100년 뒤에는 오히려 모든것이 뒤죽박죽이 되어, 현대인이 소유했던 것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되어 버릴 지도 모른다. 온갖 것으로 가득하던 현대에는 오히려 텅 빈 시간만이 남을 가능성이 있다. 사회가 멈포드가 명명한 것처럼 '거대한 기계'로 변모된다면 결국은 파시즘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첫째 사람들은 순한 양이되고, 비판적 사고능력을 상실하고, 무력감을 갖게 되고, 수동적이 되고, 필연적으로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를 - 그리고 그 밖에 '그들'이 모르는 모든 것을 - '알고' 있는 지도자를 동경하게 되며, 둘째 이 '거대한 기계'는 거기에 접근할 수 있는 어떤 사람이라도 그저 필요한 단추만 누르면 작동해 버리기 때문이다. -P243- 마지막으로 에리히 프롬은 존재양식의 사회로 지양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나열하고 있는데, 그 면면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들이다. 이 책이 출간된 것이 40여년 전이라고 하나, 마치 오늘자 신문 논설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이야기들이 적혀 있다. 윗 문단을 보아도 그렇다. 마치 지금의 상황을 빗댄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글을 마치면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것들을 알고 있어도 실천하는 일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고 말한다.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아직도 제자리 걸음이다. |
이미 나는 자본주의 사회에 깊숙히 빠져서 생활하고 있구나 라고 느끼게 해 준 책이다. 인간의 생존에는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이 있다는 것과 우리가 알고 있는 ‘소유’의 의미가 저자가 말하는 개념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일반적으로 지식은 소유하는 것인가? 라는 물음에 모두들 당연히 그럴것으로 생각하지만 지식은 소유할 수 없으며 소유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소유하는 지식은 소유는 강의 노트를 간직하거나 책을 보관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며, 존재하는 지식이란 자신의 의견과 창의력에 깊이를 더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누구나 한번쯤은 들었을법한 쉬운예로써, 들판의 꽃을 사랑하는 방법에서도 존재양식과 소유양식을 볼 수 있다. 꺾어서 ‘가지는’ 것과 그냥 두고 ‘느끼는’ 것으로. 휴머니즘에 기초하여 물질만능의 배금주의에 휩쓸리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존중하고 지켜가기 위해서는 저자가 말한 두가지 양식에 대한 이해와 균형감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청년시절에 향후 인생의 올바른 가치관을 갖고자 한다면 반드시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인상깊은구절] 소유양식을 가지고 있는 학생은 단 한 가지 목표밖에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을 즉 ‘배운 것’을 고수하는 일이며,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그것을 단단히 기억하고나 노트를 소중히 보존한다. 그들은 어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거나 창조할 필요가 없다. |
한 사람의 인생에 커다란 줄기로 작용하는 책을 만난다는 것은 그렇게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 아닐것이다. 이 책은 만난것은 군대복무 시절인데, 이 책을 한번 다 읽어 보는 것이 2년이 걸렸다. 물론 군대에서의 제한된 시간동안 10분 5분 이렇게 조금씩 읽은 것이지만. 이 책은 사람의 생활 양식을 크게 두가지로 대별하고 있다. 소유의 양식과 존재의 양식. 소유의 양식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 지식, 자동차, 집. 에 의해서 자신의 삶을 평가하는 것이다. 얼마나 멋지고 비싼 자동차와 집을 소유하느냐가 그 사람의 삶을 평가한다.그러나 존재의 삶은 이러한 것들에서 자신을 분리시키고 자신이 살아가는 살아있다는 그것 자체가 삶의 평가 기준이 된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모두가 소유의 양식을 지니고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무척이나 살벌하고 냉혹한 현실이 되고 말 것이다. 자신의 재산이 바로 자신이라면 남을 돕는 자선금을 내거나 구호품을 보내는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책의 내용처럼 소유하려고만 하지 말고 자신의 필요분만을 소유하고 나머지는 존재의 삶의 양식으로 살아갈 때 세상은 무척이나 밝고 살 맛 나는 곳이 되리라. |
이책을 처음 본 건 도서관에서 빌려서이다.에리히프롬이라는 유명한사람의 소유냐존재냐라는 유명한 책. 한번쯤읽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쉽게 잡히지 않은 책이다. 하지만 첨 이책을 읽었을때는 정말 사랑의 기술을 읽었을때보다 더한 감동(?)을 가져다 주었다.그래서 결국에는 책을 사서 여러번 읽고있다.
소유냐 존재냐. 인간의 소유양식과 존재양식... 에리히프롬의 인간의 이러한양식에 대해 분석하고있다.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 우리는 소유하기 원하고 그건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당연한건 아니다. 그러한 생각들은 우리가 산업화하기 시작하면서 우리에게 들어온 하나의 사상이다. 남보다 많이 갖고 싶고, 소유하고싶고.... 집과 자동차 그리고 사랑이나 친구조차도 소유하려는 우리의 소유양식... 저자는 소유양식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우리는 소유양식을 버리고 존재양식을 추구해야한다. 인간의 존엄성... 나의 존재뿐만아니라 타인의 존재까지도 존중할줄 알아야 한다. 빈부의차가 생기고 범죄가 늘어나고 더많이 갖고 더 편리하게 생활하면서도 그리 행복하지않은 건...
우리가 소유양식을 버리고 존재양식에 따라 생활한다면 이 생은 더 아름답고 행복할 것이다. 세상사람들 서로가 사랑하며 살것이다. [인상깊은구절]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과감히 현상에 직면하라... 인간은 초인이 되었다. 그러나 초인간적인 힘을 지닌 이 초인은 초인간적인 이성의 수준에 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그의 힘이 커짐에 따라 점점 그는 가련한 인간이 된다. 초인이 되면 될수록 자기 자신이 비인간적으로 된다는 사실에 우리는 각성해야만 한다." |
우리의 모든 일상 사건들은 단 두개의 개념으로 분류할 수 있다. 나도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나니 그 어떤 것이라도 단 두가지로 표현할 수 있었다. 즉 우리의 일상은 "소유" 아니면 " 존재" 로 그 모든 이유가 밝혀지는 것이다. 존재양식과 소유양식은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존재양식을 가진 사람은 어떤 개체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만족감을 느끼고, 소유양식을 가진 사람은 그 개체를 소유했을 때 비로소 기뻐한다. 예를 들어 어떤 꽃이 예쁘게 피어있는 것을 보고 기쁨을 느끼는 사람은 존재양식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그 꽃을 꺾어서 자기 방에 꽂아두어야 기분이 좋은 사람은 소유양식을 가진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꽃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 꽃이 시들어서 존재가 사라지더라도 일단은 제 손으로 잡아꺾어 소유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성서에서 소유냐 존재냐의 의미를 찾은 부분도 인상깊었다. 악마는 물질적 소비와 자연, 인간에 대한 힘의 대표자이고, 예수는 '존재'의 대표자요 소유하지 않는 것이 '존재'의 전제가 된다는 사상의 대표자이다. 에크하르트는 "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것도 '갖고있지' 않은사는 가난한자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에크하르트가 "내면의 빈곤"의 미덕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내면은 충실해야한다." 고 말한다. 그리고 내면이 빈곤하다고 하면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나도 이 부분을 읽을 때 조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특히 아무것도 알지 못해야 한다는 부분은 더더욱!! 평소에 흔히 '무지'는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던가! 하지만 여기에서 '지식을 버려야한다'는 것이 '알고있는것' 을 버린다는 이유가 아니라 '알고있다는 사실 자체' 를 잊어버려야 한다는 의미로 생각할 때 모든 의문은 해결된다. 읽느라 고생했다. |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으로 크게 둘가지 삶의 양태를 제시하고, 둘의 역사와 견해들을 꽤나 다양한 방면에서 제시해주고 있다. 휴머니즘적 입장을 견지할 때, 존재양식에 따르는 삶이 보다 더 바람직하다는 명제에는 큰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그는 결정론의 함정에도 걸려들지 않고 잠재성을 인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상적인 상태를 제시하고 있고, 그러한 정도까지 현실화하는 것이 적어도 근시일 내에는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그에 이르는 절차상의 논의에 대해서는 너무나 소홀한 느낌이다. 그에 의하면 존재양식이 우선시 되는 사회는 현재 지구 전체 사회의 체제에 있어 헤게모니를 갖고 있는 자본주의를 상당부분 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급진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회의 구동기제를, 그리고 사회 성원들의 가치관과 의식을 개조해야 하는데 이를 위한 어떠한 현실적인 과정으로서의 중간단계나 방법론도 제시되어 있지 않다 물론 미래를 예지할 수 있는 능력은 가질 수 없기에 그가 모든 단계를 마치 결정론적으로 논의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공허하고 고답적인 논의 말고도 현실에서 어떻게 실현해나갈 것인가의 문제 역시 중요하다. 자본주의 산업사회가 갖고온 동전의 이면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준다는 것 만으로도 일독의 가치는 충분하지 않나 싶다. 시간이 없다면 3장만 읽어도 핵심적인 내용은 볼 수 있을법하다. [인상깊은구절] 진실은 생존의 소유양식과 존재 양식 둘 모두 인간성의 잠재성이라는 것이다. 생존을 향한 우리의 생물학적 충동은 소유양식을 촉진시키려는 경향을 갖지만 이기심과 나태가 인간 생래의 유일한 성벽은 아닌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존재하고 싶다는 욕망이 날 떄부터 깊이 뿌리박혀 있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을 표현하고 능동성을 갖고 타인과 관계를 맺고 이기심의 감방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욕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