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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카스트제도의 진흙더미에서 피어난 연꽃과도 같은 무신론적 세계종교가 불교다. 처음으로 접한 불교 관련 이야기는 제목이 생각나지 않지만 석가모니와 그의 제자들의 선행과 행적을 이야기로 엮은 아동도서였다. 그리고 독일작가 헤르만 헤세의 《싯달타》 역시 불교에 대한 관심을 크게 고취시켰다. 중고등학교 때는 교과서에 나오는 사성제와 팔정도가 내가 접하는 불교 가르침의 전부가 아니었나 싶다. 텍스트로서의 경전은 난해했다. 처음 접한 것은 《법구경》이었고, 《반야심경》이 그 뒤를 이었다. 철들어서 일행선사의 여러 저작들을 읽어오다 이제서야 참선의 고전이라 불리는 《육조단경》과 연이 닿았다. 《문안의 수행 문 밖의 수행》은 월호스님이 설하는 《육조단경》 강의집이다. 《육조단경》이란 선불교의 6대조 조계남화선사 혜능대사의 경전이다. 혜능이 5대조 홍인대사로부터 법을 전수받는 이야기는 이전에 읽은 최인호의 《유림》에서도 소개된 바가 있어 낯설지 않았고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육조단경의 원래 제목은 《남종돈교최상대승마하반야바라밀경》으로, 핵심은 불시자성작佛是自性作, 막향신외구莫向身外求이다. 다시 말해서 부처는 자기성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몸 밖에서 구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마하는 크다, 반야는 지혜, 바라밀은 지혜의 완성 또는 고통의 이 언덕에서 열반의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는 뜻이다. 즉, 마하반야바라밀이란 큰 지혜로써 저 언덕에 이른다란 뜻이다. 설법을 듣는 청중들이 중생이 아니라 선지식善知識이라 불리는데 이는 우리는 본래 부처라는 보살도와 성품은 한번도 오염된 적이 없다는 불오염수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책에서 거듭 강조하는 내용을 쉽게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도를 깨달을 수 있다. ●자성은 항상 청정하기에 고정불변의 선과 고정불변의 악이란 없다. ●성품은 닦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다. ●가는 곳마다 주인 노릇을 하면 있는 곳마다 모두 진실하다. ●마하반야바라밀을 입으로 염하고 마음으로 행하라. 평상심이 도라는 「열린 참선」과 본성의 청정함과 순수함을 강조하는 성공설性空說 그리고 인간존재를 넘어선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 생본주의가 선종禪宗의 장점이 아닐까 싶다. 선불교는 혜능의 남종南宗과 신수의 북종北宗으로 나뉜다. 남종이 단박에 깨달음을 얻게된다는 돈오돈수를 설파한다면 북종은 천천히 조금씩 깨닫게 된다는 돈오점수를 설파한다. 돈수와 점수의 차이는 다만 차원의 차이다. 성품性의 차원에서 보면 돈수요, 모양相의 차원에서 보면 점수이기 때문이다. 책에는 법신불˙보신불˙화신불 등 부처님의 덕성을 재현한 삼신불三身佛이 나온다. 삼신불은 각각 체體˙상相˙용用으로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법신불은 성품˙본마음˙참나 자리, 보신은 정신적 존재인 마음 자리, 화신은 물질적 존재인 몸 자리를 지칭한다. 삼신불 중에서 최대 관심사는 법신불인 성품으로 집약되는데 성품은 몸과 마음을 가능케하는 순수한 에너지라 할 수 있다. 법신불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로, 보신불은 원만보신 노사나불로 형상화된다. 보신불은 중생구제의 한 생각을 일으킨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같은 평신도의 기도대상이다. 화신불은 천백억 화신 석가모니불로 형상화된다. 삼신불과 더불어 수행도 크게 몸을 닦는 수행, 마음을 닦는 수행, 성품을 보는 수행으로 나뉜다. 몸을 잘 닦고 마음을 잘 닦아 수행을 부지런히 해서 때가 끼지 않게 해야 된다는 신수대사의 게송과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말하며 성품을 바로 보는 것을 강조한 혜능 스님의 게송은 각각 「문밖의 수행」과 「문안의 수행」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문밖의 수행은 아직 돈오를 하지 못하고 마음과 몸의 닦음에 그치는 차원이다. 문안의 수행이란 바로 성품을 보는 견성의 차원이다. 물론 이는 수행의 차원을 보여주는 것으로 옳고 그르다란 이분법으로 분별해선 안 된다. 그리고 좌선이든 화두든 수행방법은 그저 방편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니, 쳐다보라는 달은 안 보고 내 손가락만 쳐다보는 바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참고로 월호 스님이 자주 읊는 게송을 소개해본다. 「보화비진요망연報化非真了妄緣, 법신청정광무변法身清靜廣無邊, 천강유수천강월千江有水千江月, 만리무운만리천萬里無雲萬里天.」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이런 도리를 이렇게 달리 표현한다. 「많은 진리들 중에서도 당신이 가장 자주 상기해야 할 진리가 두 가지 있다. 첫째, 외부의 사물들은 당신의 영혼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고 외부에 조용히 존재하고 있으며, 따라서 혼란을 야기시키는 것은 오직 당신 내부의 생각뿐이라는 사실이다. 둘째, 당신의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은 순식간에 변하고 사라져버려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이다. 당신 자신도 그 변화의 일부로써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라. 우주는 곧 변화이며, 인생은 그것에 대해 이해하는 자의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역시 한 깨달음한 각자라 하겠다. 이제까지 불교관련 서적들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자칫하면 논리적 추상주의와 환원주의에 빠지기 쉽다는 점이었다. 경전을 읽으면 한편으론 매우 논리적이고 체계적이면서도 또 한편으론 두서가 없고 정답이 없거나 하나 이상일 수도 있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리고 마치 맹인이 코끼리를 만지듯 생명의 본래면목 즉 본마음과 참나를 가리키는 수많은 용어들이 나오기에 이런 개념 정리부터 조금 버거웠다. 가령 원각, 본각, 묘각, 자성, 불성, 성품 등등이 바로 그런 술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행히 월호 스님의 강법으로 이런 고충이 덜했고 천천히 알아가는 독서의 즐거움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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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항상 삶의 부채 같은 것이었다. 해야 하는데 여의치 않은. 마흔 줄에 들어서야 시간이 얼마남지 않음을 자각한 후에야 걍 해버리자. 하지만 무엇부터 해야할지 막막한 바다와도 같았다. 다독을 집중적으로 하다가 한동안 책을 온전히 놓는 일을 반복했다. 다독을 집중적으로 할 때는 늘 귀결은 철학이나 종교서적이기가 쉽다. 어렴풋이 이 모든 것의 끝에는 철학과 종교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지만 삶이란 그렇게 쉽게 속내를 드러내보이지 않는다. 철학과 종교에 이르면 여지없이 독서에 지치게 되므로. 특히나 불교는 그 문조차 두드리지 못한 거대한 장벽이었다. 그러다 시절인연이 맞았는지 반야심경을 만났다. 그 전에 무문관을 읽으며 차원이 다른 언어의 세계에 기절했지만 그게 법을 만나러가는 문인지도 몰랐던. 반야심경의 심플함이 충격이어서 금강경을 곧 펼쳤지만 또 하나도 읽히지 않는 이런 증세들은 무엇인지. 그래도 더듬더듬 길 아닌 길을 가다보니 이 책도 만나게 되었다. 물론 이 책도 첨에는 또 생뚱맞게 읽히지가 않았다. 덮어뒀다가 잊힐 만하면 꺼내봤는데 어느 날인가 본래 부처라는 말을 곱씹으며 한 줄 한 줄 살아서 일어났다. 월호스님께서 다 씹어서 떠먹여주시는데 그걸 몰랐다. 이제는 휘리릭 읽지 않고 한 챕터씩 틈날 때마다 가까이한다. 보이지 않던 것이 매번 새롭게 보일 때마다 짧은 탄성을 내며. 찬탄합니다. 모든 길에 스승이 있으시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