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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에 만화광이었던 나는 김종래, 박기정, 추동성(고우영), 임창, 강철수, 김민 화백 등의 작품을 즐겨 읽었다. 그중에 가장 선호하는 작가는 누구인지 헤아려 보았다.
김종래 화백은 선호하기는 했지만 그의 작품에는 특별한 캐릭터가 없었다. 김민 화백의 작품은 강렬하기는 했지만, 다작의 작가가 아니었으므로 읽은 작품이 많지 않았다. 추동성 화백은 아동만화보다 성인만화로 활동한 시기가 더 길었으므로, 아동만화에 대한 기억은 너무 흐릿하다. 강철수 화백은 선호하기는 했지만, 작가에게는 죄송한 표현이지만 최애 작가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는 분은 박기정 화백과 임창 화백인데, 그중에 한 사람을 선택한다면 박기정 화백이다. 임창 화백의 주인공들인 땡이, 숙희, 옥희는 아동만화에 어울리는 캐릭터들이다. 그에 비하여 박기정 화백의 캐릭터인 훈이, 미미, 수경이 등은 현대적인 청소년에 어울릴 정도로 세련되게 느껴졌다.
사흘에 걸쳐 읽으면서 그날그날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해 보겠다.
첫날 1~150쪽까지 읽은 느낌 『폭탄아』는 박기정 화백의 초창기 작품으로 훈이, 미미, 수경이의 캐릭터가 태동할 무렵의 얼굴이 보인다. 탄아는 훈이, 탄실이는 미미로 성장한 듯하고, 그밖에 동추와 구마와 몬도를 연상하는 캐릭터가 보인다. 등장인물들을 보니 옛 친구의 어린 시절을 보는 듯했다. 이 책은 과거의 향수를 느끼고 싶은 그리운 마음에 구입한 책이고, 읽으면서 만족했다.
이 작품은 1964년부터 2년 동안 60권에 걸쳐 발간되었다. 당시에는 만화책 한 권의 분량이 80쪽 내외였는데, 현대의 단행본들과 비교해도 20편 내외가 되는 대작이다. 2016년에 복간을 하면서 80쪽 정도의 원본을 6권씩을 담아서 1부 3권으로 발간했다. 그 무렵까지는 원본 60권을 모두 구하지 못했던 듯하다.
나는 1부 3권 중에서 1편만 구입했다. 모든 작품을 구입하기에는 부담(내 서재에는 소장할 공간이 포화상태)이 되기도 했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내게는 작품의 줄거리가 그리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박기정 화백의 숨결을 느낄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니, 일단 1편만 보기로 한 것이다.
받자마다 반갑게 읽었다. 예전에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라도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어딘가 어색함이 보이는데, 이 책은 그런 점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굳이 단점을 지적한다면 선명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예전의 만화들은 인쇄나 지질이 좋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는 일 일 것이다.
오늘 읽은 곳에서는 일제강점기에 만주에 있는 일본군에 복무하면서 광복군을 돕던 탄아의 아버지 아오끼 중위의 정체가 밝혀지는 장면까지 나왔다. 그로 인해 아오끼 중위는 체포되고, 가족들이 뿔뿔이 헤어지는 수난이 시작된다. 아내는 독립군에게로 무사히 탈출했지만, 아들인 탄아는 일본인의 양자가 되고, 딸인 탄실은 마적단 두목의 손녀로 성장하게 된다.
이 책에서 신기하게 느껴진 것은 '왕따'라는 표현이었다.
"저들끼리 쏙닥쏙닥 나 왕따 시키는 걸. (64쪽)"
1960년대에도 왕따라는 표현이 있었을까? 나의 학창시절은 물론이고, 교사로 근무하던 80년대 전후에도 그런 말을 쓴 적이 없었던 듯하다. ‘왕따’는 1990년대에 일본의‘이지메’가 우리의 학교 사회에 들어와 확산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일본의 ‘이지메’ 현상을 우리 학생들은 재빠르게 ‘왕따돌림’의 준말로‘왕따’라는 은어를 만들어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1960년대의 작품인 이 책에 ‘왕따’라는 말이 나오다니……. 어쩌면 원작에는 다른 말(이지메 등)로 쓰였는데, 복간을 하면서 ‘왕따’로 바꾼 것이 아닌가 싶다. 만약에 이 책의 원작에 ‘왕따’라는 말이 있었다면, 시대를 앞서간 절묘한 표현이라고 할 만하다.
둘째 날 151~358쪽까지 읽은 느낌 오늘 읽은 부분은 원작의 3~5권에 해당되는 곳이다.
독립군의 밀정으로 일본군에 침투하여 일본군 중위로 활동하던 아오끼 중위는 첩보 행위가 발각되어 체포된다. 아오끼 중위의 가족(아내 유끼꼬, 아들 탄아, 딸 탄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유끼꼬는 독립군이 있는 상하이로 무사히 탈출을 하지만, 탄아는 긴다 소령의 집을 거쳐서 일본의 소년 사관학교에 입교하고, 탄실은 만주군 마적 두목의 손녀가 된다.
사실관계를 따지면 이야기 구성에 현실감이 없다. 독립군의 아들이 어떻게 일본의 소년사관생도가 되고, 어린 소녀인 탄실이 어떻게 그리도 영리하게 처신해서 마적 두목의 손녀가 된단 말인가? 그러나 내게 있어서 이 책의 줄거리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어린 시절에 사랑한 캐릭터들을 원본 그대로 만나는 것 자체가 반가울 뿐이다. 반세기 이전의 작품임을 참작하면 내용도 상당한 수준이라서 다행이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는 한국 만화의 전설이라고 할 작품들을 한국만화걸작선 시리즈로 복간하고 있다. 『폭탄아』는 이 시리즈의 24번째 작품인데, 나는 그중에 13종을 구입했다. 13종 중에서 두세 권 정도에서는 큰 실망을 하였다. 이야기 자체가 구성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던 것이다. 이런 작품이 어떻게 한국만화의 전설이라고 할 수 있으며, 어린 시절의 나는 이런 작품에 왜 열광했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였다.
그런 시각에서 볼 때 박기정 작가의 작품은 실망할 정도는 아니었으며, 어느 정도 수준을 유지해준 것이 고마울 정도로 반가웠다.
셋째 날 359~150쪽까지 읽은 느낌 오늘 읽은 부분에는 원작의 6권에 해당되는 곳과 박인하 평론가의 「작품론」이 담겨있다. 또한 권말부록으로 원작의 1부 1권에서 20권까지의 원색화보가 덧붙어 있었다.
이 작품의 무대는 중국 만주의 하얼빈이다. 당시 일본은 한국을 합방하고 중국의 만주를 강탈한 뒤 일본의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세운 상태였다. 저자인 박기정 화백은 1934년에 만주 용정에서 태어나서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월남했다. 초등학교 시기까지는 만주에서 생활했던 것이다. 이 작품에서 만주의 풍경이 사실적으로 그려진 것은 작가가 직접 체험한 무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은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이런저런 허점도 보인다. 다음과 같이 몇 가지가 눈에 뜨인다.
1) 소년 시절에는 미짱(탄아)과 하나꼬의 구박을 받을 정도로 어수룩하던 시하메가 소년사관학교에 가서는 반대로 미짱을 왕따를 놓을 정도로 교활해진다. 인물의 성격이 너무 빨리 변한 것이다.
2) 초등학생 정도의 나이인 요꼬(탄아)는 마적단의 부두목들을 통제할 정도로 탁월한 능력을 보인다. 한 번도 말을 타지 않은 소녀가 마적들보다 더 잘 탈 수 있단 말인가.
3) 일제가 독립군의 스파이인 아오끼 중위의 아들을 소년사관학교에 보내는 것도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참고 자료를 구하기 힘들었을 반세기 전에 이 정도의 대작을 구상한 것은 작가의 능력일 것이다. 나로서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새겼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한 마음이다. 나와 비슷한 시기를 보낸 동년배들이 이 책을 펼친다면 같은 심정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을 누구에게 권할까 화려하면서 밀도 높은 현대의 작품들에 익숙한 젊은 세대는 이 책에서 흥미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박기정 화백을 알고 있는 세대, 1970년대 이전에 만화를 즐기며 학창생활을 보낸 50대 이상의 독자들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그리운 작품이 되리라고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