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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받드는 일에 대하여 <침묵>을 읽고 특정 종교를 신앙하진 않으나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은 늘 갖고 있다. 살아오면서 중요하거나 다급한 일을 맞닥뜨릴 때 모성(母性)에 기대어 ‘엄마야’ 다음으로 터트리곤 하는 음성(音聲)이 바로 영성(靈性)을 바라는 ‘신이시여’다. 종교에 관한 역사는 지적, 영적 흥미와 함께 갖가지 논쟁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가 쓴 <침묵> 역시 출간 당시에 세간의 이목을 끌었는데, 나 또한 새해 첫날을 맞아 경건한 마음으로 이제서야 이 책을 읽으면서 ‘믿고 받드는 일’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침묵>은 실제 사건과 인물을 바탕으로 쓴 종교소설이자 역사소설로 알려져 있다. 17세기 일본(에도 막부시대) 관리들의 가톨릭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 속에서 ‘순교(殉敎)’와 ‘배교(背敎)’라는 갈림길 위에 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로마 교황청으로 일본에서 수십 년 동안 선교해오던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를 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자, 그와 사제(師弟)지간인 ‘로드리고 신부’를 포함한 사제(司祭)들이 진상을 확인하고 선교를 이어가기 위해 어렵사리 일본에 도착하나 현지 사정은 녹록하지 않다. 로드리고 신부는 산속에 숨어 지내다 끝내 붙잡혀 옥살이하게 된다. 감옥 안팎에서 끔찍한 고문을 받아 순교하는 주민들, 밥 먹듯 그리스도의 얼굴이 그려진 성화를 밟아 배교하는 ‘기치지로(는 성경 속 ‘유다’와 닮아있다)’, 그를 회유하고 다그치기를 반복하는 박해자 ‘이노우에’를 비롯한 추종자들과의 만남이 거듭될수록 한결같던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갈수록 더해지는 고통의 순간에 신은 왜 침묵하기만 하는 것인가 묻지만 그저 묵묵부답이다. 과연 그가 내린 선택으로 죽(음과 같)은 삶에서 자신과 이웃들을 구원할 수 있을까. 그의 생사(生死)가 궁금하다면 소설을 통해 직접 확인해보시기 바란다. 갇힌 사람들 가운데 누가 죽었음에도 낮에는 관리들과 파수꾼들이 웃거나 지껄이고, 밤에는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멈추지 않는 걸 지켜보면서 로드리고 신부는 생각에 잠긴다. 한 세계가 소멸했음에도 타인에게 무관심한 인간과 더불어 바깥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계속 움직이다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죄란, 인간이 또 한 인간의 인생을 통과하면서 자신이 거기에 남긴 흔적을 망각하는 데 있었다(136쪽).”는 그의 말에 신앙과 양심의 복잡미묘한 관계를 되짚어보게 된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신앙 앞에서 목숨을 바치거나 부지하려는 까닭은 저마다 다르다. 로드리고 신부를 중심으로 닮은 듯 다른 배교자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각자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면,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는 ‘오죽하면’ 그랬을까 싶기도 하다. 먼저 습관적(이라 쓰고 기질적이라 읽는다) 배교자 기치지로는 의지가 강한 자는 순교할 수 있지만, 자신처럼 마음이 약한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해 괴롭다고 주장한다. 만일 박해가 아닌 평화의 시대에 태어났다면 자기도 정상적인 신도로 살 수 있지 않았겠냐며 개인의 성향뿐 아니라 환경도 영향을 끼친다고 덧붙인다. 다음으로 박해자인 동시에 (일찍이 세례를 받은 적 있는) 배교자이기도 한 이노우에는 종교라는 나무가 잘 자라기 위해서 풍토가 중요한 법인데, 가톨릭교는 이국과 달리 여러 신들을 믿는 일본 사람들에게서 뿌리내리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한다. 마지막으로 그토록 믿었던 페레이라 신부마저 갖은 고문당하는 신도들의 고통을 멈추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배교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는다. 그러고 보니 세 사람 모두 입장은 다르지만, 그들에게 배교란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무언가’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책을 덮으며 예전에 읽었던 두 권의 책이 떠오른다. 하나는 김훈 작가이 쓴 『흑산(黑山)』이다. 소설의 배경은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난 19세기 초로 천주교가 신자들의 피땀을 양분 삼아 조선 땅에 뿌리내리려 하던 때이다. ‘천주교’라는 굴러온 돌이 오래전부터 단단히 박혀있던 ‘유교’라는 돌을 빼내기란 여간 어렵지 않았다. 그 돌 밑에 깔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새로운 세상에 대한 믿음을 져버리지 않은 황사영(순교자)과 돌들이 쌓여 만들어진 현실의 벽 앞에서 뒤돌아서거나 주저앉았던 정약전(배교자)이 <침묵>의 여러 설정과 겹쳐 보인다. 다른 하나는 박완서 작가의 에세이 『한 말씀만 하소서』이다. 저자는 교통사고로 젊은 아들을 잃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의 나날들 속에서 절규한다. <침묵>의 기치지로처럼 신에게 나쁜 짓을 하지 않았음에도 무엇 때문에 인간에게 고통을 안기는지 연신 묻고, 로드리고 신부와 마찬가지로 아무 대답 없는 신의 ‘침묵’에 분노한다. 결국, 신으로부터 서로 다른 메시지를 전달받게 되는 저자와 로드리고 신부에게서 어떤 존재를 믿고 섬기는 일의 기쁨과 슬픔을 엿본 것 같기도 하다. 결코, <침묵>은 침묵하지 않는다. 쉽지 않았고 쉽지 않으며 쉽지 않을 신앙의 세계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화두를 독자에게 던져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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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일본에 파견된 선교사 중 가장 신앙심이 깊고 가톨릭 전파에 힘을 쏟았던 페레이라 신부의 배교 소식으로 시작한다. 페레이라 신부의 제자였던 로드리고 신부는 동료들과 함께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리스본에서 출발하여 인도, 마카오를 거쳐 마침내 일본에 도착한다. 그들의 목적은 페레이라 신부의 배교가 사실인지 만약 그렇다면 왜 배교한 것인지 혹시 죽은 것은 아닌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 있고 그 인물을 찾으러 가는 모험담이라는 점에서 이 소설은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과도 닮았다.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 주인공의 내면의 어둠을 상징하고 마침내 그 인물과 조우하여 베일을 벗김으로써 자기 어둠의 핵심과 조우하게 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로드리고는 독실한 신앙심으로 무장되어 있었으나 그 무장 속에는 정말 신은 존재하는가 라는 물음이 있었다. 말하자면 로드리고의 일본행은 페레이라 신부를 찾는 여정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을 찾는 여정이기도 한 것이다. 자기 자신을 찾는 여정은 대개 성장 소설의 형식을 따른다. 스스로 완성되어 있다고 믿는 주인공이 있고 어떤 계기로 주인공은 원래 있던 자리에서 아득한 밑으로 추락한다. 그리고 다시 올라오면 그곳은 처음에 있던 곳과 전혀 다른 풍경이 비치는 것이 성장 소설의 일반적인 형식이다. 이 소설의 경우 독실한 가톨릭 신앙으로 무장한 로드리고가 있고 일본에서 겪는 여러 가지 사건은 그의 신앙에 균열을 낸다. 그리고 최후의 선택을 통해 그는 자기 자신을 재정립하게 되지만 그것은 처음의 그와는 같지 않다. 로드리고는 오직 신앙심 하나만으로 포르투갈에서 일본까지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항해를 해온 사람이므로 아무리 많은 고난이 닥쳐도 자신의 믿음을 쉽게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믿음에 결정적으로 금을 낸 사건이 있는데 바로 나가사키 관헌에 체포되어 오물로 가득한 방에 갇혔을 때의 일이다. 소변으로 가득한 방에 있는 것도 참기 힘든 일이고 내일이면 고문이 시작되거나 혹은 사형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도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로드리고를 가장 괴롭게 한 것은 바깥에서 들려오는 코골이 소리였는데 밖을 볼 수 없어서 상상에 의존할 뿐이지만 로드리고에게 그 소리는 술에 취해 늘어진 관리가 기분 좋게 잠들어서 내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 소리가 마치 모든 각오를 마친 그를 조롱하는 것처럼 여겨져 모욕감을 견디지 못한 로드리고는 관리를 부르는데 그 관리가 한 말은 로드리고의 혼을 빼놓는다. 술에 취한 관리의 코골이라고 생각했던 그 소리는 사실 고문받는 신도들이 내는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였던 것이다. 나는 이 장면에서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이 생각났다. 영화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벽 안에서 여자의 신음 소리가 들리고 여러 명의 남자들이 벽에 귀를 댄 채 자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카메라가 움직이면서 그 소리의 실체를 보여주는데 그건 흥분해서 내는 교성이 아니라 통증으로 고통을 참는 신음 소리였던 것이다. 복수는 상호적인 것이 아니라 나의 것, 즉 타인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나의 일방적인 행위라는 제목처럼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자기라는 틀 안에 갇혀있는 지이다.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이해할 수 있을 뿐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결국 이 영화가 말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이다. 코골이라고 생각했던 소리가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라는 것을 알았을 때 로드리고가 느낀 것도 이와 같은 게 아니었을까. 이노우에와의 문답에서 로드리고는 가톨릭이 유럽의 특수한 종교가 아닌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선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보편적이고 믿었던 그 신앙은 사실 보편적인 선도 유럽의 선도 아닌 오직 자기 자신만의 선이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로드리고는 신도들을 살리기 위한 최후의 선택을 하면서 자기 자신만의 신앙을 지키는 대신 아가페적인 사랑을 실천한다. 그러나 만인을 위한 사랑을 실천한 결과로 로드리고가 받게 되는 것은 만인의 멸시와 조롱이다. 이 아이러니가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졌으나 바로 그 인류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되는 예수의 아이러니를 상징한다는 사실은 명백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만약 이 소설을 한 사람의 성장기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성장이란 아이러니를 품을 줄 알게 된다는 뜻일 것이다. 강인한 의지와 굳은 심지로 온갖 고난을 헤치고 마지막 순간에 다다랐으나 그곳에 있는 것은 기대했던 보상도 뜻밖의 선물도 아닌 감당하기 어려운 아이러니라는 사실은 맥이 풀린다. 하지만 최후의 보상이 아이러니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이러니를 이해할 수 없다면 우리는 끝내 자기 자신 외에 어느 누구도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도저히 사랑하기 어려운 인물이 있다. 바로 기치지로다. 그는 가톨릭 신자였으나 형과 누나가 화형당하는 와중에 혼자만 배교해서 살아남았고 이후에도 다시 가톨릭 신자임을 자처하다가도 목숨이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면 망설임없이 신앙을 버린다. 말하자면 그는 신앙과 목숨 중에 어느 한 쪽을 선택하지도 포기하지도 못하는 인물이다. 아마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기치지로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들었을 것이다. 양극단에 놓인 두 개를 붙잡고 어느 한 쪽도 놓지 않는 것을 일러 아이러니라고 한다. 요컨대 로드리고가 예수가 되기 위해 싸웠다면 기치지로는 온몸으로 인간은 이런 것이라고 웅변한 셈이다. 예수가 되기를 그만두고 인간을 살리기로 결정한 로드리고가 기치지로에게 고해성사를 해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인간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이러니를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2024년 11월 29일부터 2024년 12월 4일까지 읽고 생각하고 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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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왜 당신은 계속 침묵만 지키고 계십니까?' 포교를 위해 멀리 일본에 건너왔던 한 포르투갈 신부는 이렇게 되묻고 있지만 바다조차 어둡게 침묵한 채 잠잠하기만 했다. 배교와 순교의 갈림길에서 그는 인간의 진실과 신앙의 진리 그 어느 것도 저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진실한 인간의 사랑 앞에 서 있었다. '밟아라, 성화를 밟아라.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하느니라' 시커먼 발가락의 흔적으로 패이고 닳은 성화를 보고 작가 엔도 슈사쿠는 그 성화를 밟은 이들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헤아려 이 글을 저술했겠구나 싶다. 이 소설을 통해, 믿음이란 단순한 맹종이 아니라 넓게 포용하고 받아들이는 따뜻한 인종과 순응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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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엔도 슈사쿠의 책. 이 책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영화 침묵을 통해서이다. 영화 침묵을 통해 이 책이 과연 어떤 책인가 궁금해서 찾아보게 되었다. 엔도 슈사쿠. 역사 인물에 대한 하나의 고뇌가 어떻게 한편의 아름다운 글이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정말 훌륭한 책이다. 일본에 선교갔던 신부들이 어떻게 고통을 느끼고 있는지, 사람들의 수많은 모습을 보면서 과연 자신은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깊이 고민하게 하는 책이다. 과연 정의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깊이 고민하였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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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믿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만한 질문을 묵직하게 던지는 소설입니다. 특히 소설 속 순교, 배교의 갈림길에서 인간의 믿음이란 것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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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스콜세지의 <사일런스>를 보고 읽고 싶어 접하게 되었습니다. 작가가 무덤 속에 들고 간 두권의 책 중 하나인 만큼 신앙이란 죽을때까지 생각해 볼 과제인 것 같습니다. 믿음을 죽을때까지 고집해 순교까지 가지않아도 사는동안 계속 되물을 정도 가슴에 품는다면 그 자체로 신앙속데 산다는 것을 보여준 책이라 생각합니다. |
| 신앙심 깊은 신부가 배교하는 과정을 통해, '순교'라는 화려한 포장지를 뜯어내고 종교의 민낯을 드러낸다. 작가는 신이 고통의 순간에 철저히 침묵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주인공이 성화를 밟는 행위는 타락이 아니라, 신의 침묵을 견디지 못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생존 방식이자 타인을 위한 희생으로 재해석된다. 서양의 종교가 동양이라는 늪에서 어떻게 변질되거나 실패하는지 구조적으로 파악한 수작이다. |
|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세상은 왜 이토록 고통스러운가 왜 응답하지 않으시나 내 안의 궁금증과 혼란속에서 붙잡게 된 책이였다 충분히 생각할 가치가 있고 재미도 있는 책이였다 신앙을 강요하거나 종교적인 책으로 치부할만한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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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에도 막부 시대 포르투갈의 로드리고 신부가 포교활동을 위해 도착한다. 소와 닭같은 삶을 사는 화전민들에게 신부의 세례와 고해성사는 단비같은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종교박해의 참상은 인간의 희망도 믿음의 새싹도 허용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왜 그들의 어린양이 고통에 빠졌을 때 침묵하는가? 인간 실존과 종교의 관계는 무엇인가? |
| 엔도 슈샤쿠의 유명한작품으로여러번다른사람에게추천을받아서읽게되었다.이미지가인상적인것같다.특정한상황에놓였을때나라면어떻게했을지생각해보는시간이었다.신앙인이든아니든한번쯤읽어보면인생에는도움이될것같은책.다만좀힘든부분도있었다.읽기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