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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그것에 대해 물어보면 단편적인 지식만 알고 있는 경우가가 많다. 그런 지식 중에 하나가 바로 위인에 관한 것이리라. 어린 시절부터 들어온 위인들에 대해 설명하려 하면 몇 가지 키워드만 맴맨 돌 뿐이다.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신앙의 위대한 인물들 역시 그렇다.
설교 시간이나 공과 공부 시간에 익히 들어왔던 사람, 칼빈. 중․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도 소개되는 인물이기에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도 그의 이름을 알고 있다. 종교개혁, 예정설, 직업 소명설 등으로 칼빈은 기억된다. 나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말할 수 있는 칼빈은 그게 다였다.
<칼빈 이야기>라는 제목과 ‘칼빈 탄생 500주년 기념’, ‘<기독교강요> 저자의 위대한 삶’이라는 책 표지 문구는 이 책이 무겁지 않을까 하는 오해를 하게 했다. 가뜩이나 신학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주는 중압감과 500주년이라는 기념비적 타이틀 때문에 장황한 신학 내용과 알 듯 모를 듯한 난해한 말들과 주석이 줄줄이 달린 책일 거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그러나 소설식 구성으로 차분하게 전개되는 칼빈의 이야기는 가볍고도 친숙한 문체로 대학자이며 종교 개혁가였던 칼빈의 진면목을 다루고 있었다.
용기! 변혁! 결단! 진보! 이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단어들이었다.
사실 나는 이런 단어들을 들으면 불편해진다. 이제 기성세대로 접어드는 나이이기 때문에 이런 단어들은 나를 사로잡기보다는 그와 거리가 멀게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할 비애감을 맛보게 한다. 세상을 바꾸기 보다는 안주해서 살아가고 싶은 욕망, 앞에 서서 무언인가 책임지기 보다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덕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강해지는 것이 바로 내 나이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칼빈의 책을 읽는 것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지금의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일들이 과거에는 금기시 된 일이었으며 기득층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그 특권을 무너뜨리고 보통 사람들에게까지 보편화 시킨 것은 누군가의 선지자적인 행동 때문이었다.
“라틴어를 몰라도 된단다. 우리 나라 말로 찬양할 거야.”
“프랑스어로 성경을 읽어봅시다.”
이 책 속에 나오는 말들이다. 지금 들으면 그저 아무렇지 않게 하는 말이지만 당시에는 아주 조심스럽게 은밀하게 하던 말들이었다. 누군가 들어서는 안 되는 말, 긴장감이 돌게 하는 말이었다.
이처럼 자기 나라 말로 성경을 읽는 것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성경책은 어느새 집집마다 몇 권씩이 있다. 믿지 않는 가정에도 있다. 자동차에도 성경을 두고 나니는 사람들이 있다. 예전을 생각하면 이만한 축복도 없다. 그러나 과연 그 시절만큼 역사가 있는 시대라고는 말할 수 없다. ‘툭탁 교인’이란 말이 있다. 주일날 성경책을 꺼내면서 일주일 동안 쌓인 먹지를 “툭”하고 털어낸다. 그리고 다시 예배를 마치고 돌아와 “탁”하고 성경책을 책상 위에 놓는다. 성경을 보는 시간은 아예 없고 주일 날 예배 시간에만 말씀을 찾기 위해 성경책을 뒤적여 볼 뿐이다. 자동차에 놓인 성경은 마치 부적이 되고 하루의 안전을 책임져 주는 상징물이 되었다. 성경을 읽고 성경이 나를 가르쳐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그 자리에 있어서 마음이 놓이고 나쁜 일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칼빈 이야기>가 내게 준 메시지 중 하나는 바로 성경에 대한 자세다. 라틴어와 헬라어로 된 성경을 목숨을 걸고 번역했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성경 말씀 한 글자 한 글자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 모른다. 지금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우리말로 성경을 보고 우리말로 찬양을 부를 수 있는 것이 사실은 누군가가 흘린 숭고한 피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평범하게 누리는 것들에 감사하게 된다.
자기 상황을 돌아보며 책을 읽고 그 책의 내용이 현재의 자신의 문제를 치유해 주는 테라피적 기능을 발휘하는 책을 나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칼빈의 전기는 나의 현실의 문제를 바로 보게 해 주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발견하게 해 준 책이었다. 이 책에서 나를 움직였던 몇 가지 문구들을 소개한다.
“평탄한 길로 인도하시기를 바랄 뿐”이라는 칼빈의 말에 “하나님의 길이 최고의 길이란다”라고 엄숙하게 말한 올리베땅의 말. 우리 대다수는 축복을 평탄한 것, 고생과 고난이 없는 삶, 풍요로운 물질적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길을 가지 않아도 하나님이 보내시는 길을 가는 것이 최고의 길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늘 현세의 만족만을 바라는 삶이 사실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얼마나 보잘것없고 누추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비록 칼빈은 현세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많은 것을 누리는 삶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을 망명자로 살아야 했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그가 간 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가치 있는 길이었으며 후세 신앙인들을 위해 길을 내는 일을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자가 아니라 치료하는 자로 세우시기 위해서다.”
존 칼빈의 말은 하나님께서 이 책을 통해 나에게 가장 하고 싶으셨던 말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까지 나는 가슴을 치며 억울해 하던 일이 있었다. 그 고통의 시간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렇게 살다가는 암에 걸릴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그 고통까지도 하나님은 선용하신다. 그 고통이 체험이 바로 나를 치료하는 자로 세우시기 위해서라는 것을 통해서 위안을 얻기도 했다. 내 슬픔과 억울함과 아픔이 바로 누군가를 치료하기 위해, 누군가를 도와주기 위해서라면 그런 감정들을 기쁘게 넉넉히 받아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고통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의 자리에 한 발자국 나를 인도한 셈이다.
‘내가 제일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다.’
테오도르 교수에게 들었던 말을 가슴속에 품었던 존 칼빈처럼 나 역시 이 말을 책을 덮으며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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