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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전과 내시인가 한때 ‘역사’라고 하면 지배자의 역사, 즉 정치사가 중심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왕이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가 중요했다. 그러나 경제발전단계론을 제시한 독일 역사학파의 창시자인 프리드리히 리스트(Friedrich List, 1789~1846), 사적유물론(史的唯物論) 주장한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 등의 영향으로 경제사나 피지배자들의 역사가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에서 지배를 받으면서 지배하기도 하는 사람들의 행동은 상대적으로 외면당해 왔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상 지방행정을 좌우했던 아전[吏]나 국왕의 총애를 배경으로 권력을 행사했던 내시의 행태를 연구한 이 책은 온전한 역사를 위한 디딤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왕의 남자, 내시
중국의 경우에는 황제의 총애를 배경으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한 환관(宦官)들이 많았다.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고사를 남긴 진(秦) 2세 황제때 조고(趙高, B.C. 258~B.C.207),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등장하는 후한(後漢) 영제(靈帝)때 장양(張讓, ?~189)을 비롯한 십상시(十常侍), 명(明) 영종(英宗)때 왕진(王振, ?~1449)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조선의 경우에는 환관의 수도 적었고 국정에 참여할 길도 사실상 차단되어 있어서 역사의 전면에 나서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왕실 측근정치의 핵심채널이자 치명적 변수의 하나인 내시는 스스로를 한껏 낮춤으로써 하염없이 높아지고 군왕과 격의 없이 가까워짐으로써 시나브로 막강해진 조선의 대표직능.1)”이라는 저자의 주장과는 달리 조선왕조에서의 내시는 국왕이라는 권력에서 파생되었지만 상대적으로 약한 보조 권력에 머물렀다.
물론 여기에는 예송(禮訟) 논쟁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국왕-왕실도 하나의 사대부 가문에 불과하다는 서인-노론 계열의 사고방식과 이들이 정계(政界)의 주류(主流)로 활약했던 것도 작용했으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시가 누리는 권력은 자신이 모시는 국왕의 총애에서 오는 것인데, 국왕의 권력이 약할 경우 내시가 판치고 다닐 여지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필연적으로 ‘왕의 남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내시들은 궁궐 안 청소[尙除]나 궁궐 문을 지키는[尙門] 등 왕의 생활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왕실의 사유재산을 관리하는 내수사(內需司) 소속이거나 왕과 왕비의 명령을 전달하는 승전색(承傳色) 정도를 제외하고는 큰 소리치기도 쉽지 않았다.
지방행정의 실질적 주인, 아전
아전, 즉 리(吏)는 중앙과 지방관청의 업무를 보조하는 중하급 관리직이다. 그 뿌리는 신라 말 지방호족에 있다고 하지만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는 중인(中人)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지방행정관의 밑에서 일체의 실무를 담당하면서 민폐를 끼쳤다. 여기에는 지방관의 출신지나 연고지를 근무지에서 제외하는 상피제도(相避制度)와 무보수가 큰 작용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행정제도에서 이들을 배제시키지 못한 것은 지배층에 있어서 이들의 존재가 유용했기 때문이다. 지배층 입장에서는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무보수로 자신의 손발이 되어주는 이가 있는데 굳이 자신의 몫을 나눠가면서 다른 이들을 고용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면종복배(面從腹背), 전략적 굴종
여기서 생각해볼 것은 왜 아전과 내시가 자발적인 굴종과 낮춤을 행하는 보조권력이 되려고 했을까 하는 점이다. 언뜻 내시와 아전의 행동은 비루해 보인다. 하지만, 이들의 행동이 국왕과 지방관이라는 권력자의 신임을 바탕으로 실질적인 이득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라면, 전략적인 선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종의 면종복배(面從腹背)인 셈이다.
따라서 이들 보조권력이 표면적으로 보이는 자발적 굴종에 취하다 보면, 어느새 권력자 스스로가 일종의 얼굴마담으로 전락해버린 것을 발견하게 된다. 편안한 꽃신에 길들여진 원숭이처럼.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에 대한 리뷰입니다.
1) 박종성, <아전과 내시>, (인간사랑, 2016), p.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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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전과 내시>라는 제목만 보면 재밌게 보던 사극이 떠오른다. 수없이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희한한 목소리를 내던 내시와 관아의 문 앞에 서서 출입을 하는 사람들을 견제하고 통제하는 아전. 여기서는 사극에서의 재미와는 좀 거리가 멀다. ‘조선조 정치적 복종의 두 가지 형식’으로 정치적 상황에서의 ‘아전과 내시’의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백년 넘도록 왕조국가체제를 지탱한 힘의 근본은 뭘까. 가장 가까이 꼽는 이유는 유교의 막강한 저력이었고, 정치체제를 강고히 지탱한 정치적 기운은 견제와 균형을 중심으로 한 제도적 긴장이나 힘의 균형을 도모하려는 지배 권력과 민중 부문의 길항이었다.’(p6~7)
단일 성씨로 세습군주체제를 이어 간 예는 세계역사에서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그 시대의 정치미학은 ‘변화’를 지향하지 않고 ‘보존’과 ‘유지’에 초점을 맞추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하나의 체제가 그것을 오래도록 유지하기 위해서는 법제도를 비롯한 많은 것이 있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지배하는 자가 믿을 수 있는 심복을 두는 것이 우선일 게다. 자신들의 손과 발이 되어주고, 자신들이 할 수 없는 (또는 하기 싫은) 궂은일을 도맡아 할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아전은 지방행정의 일을 내시는 왕명의 출납을 맡아, 왕이 눈과 귀가 되어 줌으로서, 서로 공존하고 공생할 수 있는 관계가 형성된 셈이다. 신분상으로 말하면 ‘중인’이라 하였지만, 형식적인 말이었을 뿐 엎드려 조아리는 자에게 더욱 불공평이 존재하는 채로.
두 가지 모두가 역사에서 들여다보면 부정적인 편견이 많은 편이다. 아전에게는 공식적으로 급여를 주지 않았으며 이것을 당연시 했다. 이것은 그들의 불안정한 경제적 처지를 빌미로 부정부패가 끊이지 않았음을 대변해 준다. 내시는 군왕과 내시, 양반관료 사이의 긴장의 삼각구도를 이용하여 삶이 유지되는 직군이었다.
‘바닥 찧도록 머리 조아린 채 곁눈으로 세상을 향하면 가없이 너른 땅일랑 그리고 잘 보이고 저리도 키 큰 이가 아니건만 어찌하여 그처럼 높이 보이나 희한하였다. 그 이치인 즉 아전이나 내시에게도 매일반이었다. 굽히라는 명을 받아 하는 수 없이 엎드린 땅이라면 도저한 눈길이야 같을 리 없었을 터다. 복종의 미덕은 기나긴 세월 물려받은 법도요, 습관보다 더한 관행으로 몸속 깊이 배어든 운명이었다. 굳이 천직이라 이름붙이지 않아도 굽힘의 자세는 그들에게 굴욕도 수모도 아닌 일상의 생활이자 체화한 삶, 바로 그 자체였다.’(p174)
이처럼 아전과 수령, 내시들에게는 임금이 그들의 삶을 지탱할 수 있는 ‘빌붙기’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봉급이 없는 아전들의 부정부패와 타락을 보면서도 집권세력은 어쩌지 못하는 무능은 왕조가 해체되는 결말을 보게 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다. 자신의 비리를 알고 있는 자를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러한 역사 속에만 있는 일은 아니다. 현 시대에도 그러한 사례는 넘친다. 감추고, 눈감아주는 비굴함의 반복. 수 세기가 흘러도 그런 일이 되풀이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강자에게 빌붙어 힘을 얻고자하는 삶의 몸부림으로 치부하기엔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과제일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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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정치적 복종의 두 가지 형식'이라는 부제의 <아전과 내시>는 권력에 초점을 맞춘 종래의 관점을 탈피하여 거꾸로 복종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특히 이러한 저자의 생각을 조선의 역사에서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로 인식되던 아전과 내시를 통하여 이끌어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조선은 우리 역사에서 단일 왕조로는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기에 조선의 체제 지탱의 원동력에 대한 연구는 다방면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종래에는 군주의 통치역량과 유교체계, 전쟁의 과소성을 조선의 체제 유지의 원동력으로 보는 견해가 많았지만, 저자는 민중의 자발적 복종과 신료 집단의 의도적인 굽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세습과 충성으로 제도 권력의 외형과 잠재력이 확장되고 있다며, 깍듯한 추종과 가식으로 윤색된 자발적 복종은 보조권력의 외연과 저력을 키우는 역설의 힘이었다. 여기서 이른바 알아서 기는 유교국가의 반어법적 통치 메커니즘이 생성, 유지된다." - p. 16 - 이 부분에서 저자는 보조권력, 즉, '아전'과 '내시'에 대하여 주목하는 이유를 피력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약자 앞에서 강자가 빛나는 법이라면 힘 없는 자 또한 바로 그 힘 없음으로 인하여 도드라지는 이치 또한 예서 분명해지지 않을까'라는 저자의 자문은 조선 왕조의 역사를 복종의 관점에서 조준하려는 시도를 다분히 보여주고 있다. 이는 복종을 권력의 대척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전략적인 정치행위로 볼 수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또한 아전과 내시가 단순히 생존을 위하여, 그리고, 독특한 정치적 직업군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 전략적인 굴신과 나름의 동기를 갖고 있는 정치복종의 주체들로 조선 왕조의 지탱과 체제 유지에 필요한 존재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결국 저자는 미시적인 관점에서 아전과 내시의 복종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왕조의 권력과 체제 유지에 대한 부분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탐관오리 곁에서 백성들을 수탈하거나 불완전한 남성이라는 이유로 그저 침묵의 존재로 생각되던 아전과 내시를 통하여 과연 저자는 무엇을 이끌어내려는 것일까? <아전과 내시>가 총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 아전과 내시에 대한 부분의 목차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II. 조선조 지방행정권력의 왜곡과 분열 : 아전의 굴신정치학 III. 조선조 중앙정치권력의 방임과 조종 : 내시의 복종정치학 앞서 저자가 아전과 내시를 미시적인 관점에서 다루고자 한 부분을 떠올린다면 이들 부분은 크게 중앙과 지방으로 나누어 조선의 권력 체계와 연관지어 복종을 다루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부분을 먼저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구체적인 사례를 먼저 접하고 난다면 저자가 의도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기 수월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아전의 굴신은 언뜻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취하기 위하여 행해지는 것으로 보여지지만, 이는 중앙의 상대적 풍요와 지방 재정의 압도적 긴축이라는 불평등에 기인하고 있음을 이끌어낸다. 지방 수령은 현지 사정에 밝다는 이유로 이러한 불평등에 의한 부조리를 아전에게 전가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이들의 고질적인 악행이 역사에 도드라져 보이게 한다. 이는 전담해야 할 역할을 제도 권력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조선의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사례이다. 아전조차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상전의 정체성이 모호해지는 이 순간은 바로 조선의 지배계급의 역설로 비춰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아전의 의도적인 굴종은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합리적인 판단과 전략적인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생각해본다면 결국 조선의 정치적인 복종은 어떻게든 살아남아 자지 거점의 확장과 정치적인 영향을 확대하려는 작은 세력들을 끌어안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내시의 굴종은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아전과 달리 중앙정치 권력에서 그 이유를 찾아봐야 하는데, 이는 측근 정치의 주요 단위가 '군주'와 '내시', '양반 집권세력'이라는 삼각 구도가 형성 및 지탱되는 과정에서 '내시'의 처신인 굴종이 바로 그러한 관계의 긴장성을 설명하고 있다. '내시'가 무조건 '군주'에게 충성을 한 것이라 볼 수 없으며, 그렇다고 '군주'와 거리를 두고 '양반 집권세력'에 기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이들의 굴신은 생존과 더불어 측근정치의 유지를 위해 필요하였음을 보여준다. 내시권력은 자신이 모시는 군왕과의 물리적 거리에서 배양된다. 일단 숙성된 권력을 유지하는 능력은 그 자체로 치열한 정치행위였다. 복잡한 국면 돌파는 물론 치밀한 판단과 민첩한 계산 없이 힘의 지탱은 지난했다. 하지만 전에 없이 강력한 복종 의지로 왕을 움켜잡을 기운은 그에 앞서는 필생의 자원이었다. 굽히며 엎드리지 않곤 설 수 없었다. - p. 236 - 이러한 보조 권력의 굽힘은 통치 세력에 대한 일방적인 굽힘이 아님을 이 책을 통하여 배울 수 있었다. <아전과 내시>는 그동안의 관점과는 달리 어찌보면 다소 수동적이거나 패배를 상징하는 복종을 통하여 조선 왕조의 체제 유지의 원동력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어 보인다. 또한 이러한 분석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떠올릴 수 있다는 점에서 생각할 부분이 많아 보인다. 비선실세와 그들에 의하여 농락된 통치자의 민낯은 과연 아전과 내시가 오히려 복종을 극대화하여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복종이 권력을 뛰어넘은 새로운 사례로 보아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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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박종성교수의 저작 [사랑하다 죽다]와 [퇴폐에 대하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리고 저자의 글쓰기에 반해 버렸다. 딱히 뭐라 꼬집을 수는 없지만 그가 풀어나가는 이야기
방식이, 그리고 주제에 접근하는 방법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주제에
대해 인문학적으로 풀어나가는 그의 글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지만, 그렇기에 두 번, 세 번 읽으면서 그의 글을 이해하려 했고, 그렇게 이해한 글은 마음속에
와 닿았다.
이
책 [아전과 내시] 역시 처음엔 쉽게 읽혀질 책이라 생각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아전과 내시라면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 결코
딱딱한 이야기가 나올 주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조
정치적 복종의 두 가지 형식'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전설의
고향이나 사극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님을 프롤로그를 읽으면서 감지했다. 정치적 복종이라는 관점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 낸다는 것은 tv에서 방영하는 연속극이 아니라 교양강의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그의 전작들을 읽으면서 느꼈던 생각들을 이 책을 읽으면서도 똑같이 느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만큼 어렵게 읽히기도 했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이런 방식으로 접근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유교국가
조선은 세계사에 유래가 없을 정도로 긴 시간 동안 왕조가 성립하였다. 그런 조선의 정치체제와 왕조사회의
내재적 틀을 지탱한 힘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조선왕조의 정치미학이 변화대신 보존과 유지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한다. 거기에 민중부문의 자발적 복종과 신료집단의 의도적인 굽힘이 있었기에 그것이 가능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자발적 복종과 굽힘에 대해, 왕조사회를 지탱한
수많은 직책들 가운데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에서 공생한 내시와 아전이라는 특정존재들을 통해 살펴보고 있다. 조선시대의
아전과 내시는 조선사회질서 유지와 유교권력의 동원과정에서 독특한 복종을 통해 자신들의 힘을 길러온 제도직종이었다.
군왕과 지방관아의 수령이라는 권력에 대한 보조권력의 속성을 공유한 그들은 약하지만 강했고, 잠재적으로
튼튼하였지만 현실에서는 취약한 신분정치의 거점을 잃지 않으려 애쓴 권력주변부의 일원이었다.
먼저, 아전은 중앙과 지방 관아업무를 보조하는 다양한 행정직종들을 감싸는 용어이다.
그런 아전에도 직급은 엄연하여 위아래가 있었고, 신분위치는 중인이었다. 즉, 신분제 사회에서 예외적인 중간지대로 자리매김했는데, 이것은 아전 자신들의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지배세력의 제도적 고려와 합리적인 선택의 결과라고 한다. 이는 행정적 보좌와 실무적 보완 일망정 배려와 위민차원이 아닌 단지 지배세력이 편하기 위해서, 혹은 상급자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고려에서 비롯된 산물이라는 뜻이다. 아전의
행적들을 둘러싼 역사적 편견은 대부분이 부정적이다. 저자는 그 이유의 한가지로 그들의 경제적 처지를
들고 있다. 아전에게는 정식적으로 급료가 지급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의 수탈과 부정부패는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생존을 위한 방편으로 그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위치를 활용하여 삶의 대안을 찾았고, 가능한 빠른 시일 안에 이익을 최대화하려 하였다. 아전들의 의도적인 굴종은 자기이익의 극대화를 위한 전략적 사고의 결과인 셈이다. 그럼에도 집권세력이 그들을 축출하지 못한 이유는 그 힘을 이용하려는 정치적인 계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아전은 지방행정권력의 말단에서 중추에 이르는 언로는 물론 자원과 정보 전반을 장악하고 배분한, 역설의 실질권력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 결과 지방행정권력은 아전들의
농락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런가
하면 내시는 성적 열등감을 딛고서 군왕과 가까이 지낼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왕실공간에서
군왕의 명을 떠 받들되, 그것을 출납 집행하며 공식, 비공식
지시사항을 수행하는 보조권력의 핵심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권력은 자신이 모시는 군왕과의 물리적 거리에서
생겨난 것이기에 일단 형성된 권력을 유지하는 능력은 그 자체로 치열한 정치행위가 되었다. 그것이 그들을
군왕과 관료들 사이에서 정치적 삼각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끔 만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들은 강력한 복종의지로
왕을 움켜잡을 수밖에 없었고, 그러기 위해선 굽히며 엎드리지 않고는 설 수 없었을 것이다. 저자는 이를 '왕실 측근정치의 핵심채널이자 치명적 변수의 하나인 내시는 스스로를 한껏 낮춤으로써 하염없이 높아지고 군왕과 격의
없이 가까워짐으로써 시나브로 막강해진 조선의 대표직능' (161쪽) 이라고 표현한다.
조선의
국가시스템은 엎드리면 피할 수 있고, 꼿꼿하면 금세 다치는 체제였다고 한다. 아니 이는 전근대사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회에서 아전과
내시는 '한결같이 독특한
정치적 직업군을 이루되, 생계와 호구만을 위해 동물적으로 생존한 독자적 직능이 아니다. 직능자체로는 보잘 것 없지만 전략적 굴신과 이유 있는 정치복종의 주체들로 왕조사회의 지탱과 국가적 정치행정
질서를 담보한 중요한 존재들 이기도 했다.' (52쪽)고 저자는 말한다. 이들을 고용한 권력은 편안하였고, 이들은 굴종과 낮춤으로써 그 대가를 고스란히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도 이러한 굴종과 낮춤은 여전하다. 권력의 자원은 부리려는 자 본인의 능력이나 기세로만 국한되지 않고, 아주 가까이 있는 타자 혹은 주변인의 복종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물론 그것이 전부 불필요하고 전근대적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통제와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말이다. 그렇지만 오늘 우리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권력에게 굴종과 낮춤을 통해 자신들의 사익을 추구하는 그들은 자신들이 내시인줄 알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 그런 그들과 공모하고 농락당한 권력은 아마 지금이 봉건시대인줄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현대에 있어서 자발적 복종과 낮춤은 국민을 향한 것이어야 함을 그들은 꿈에도 모르는 것 같다. 아님 판단능력이 없는 무뇌 충이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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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패자와 약자를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역사란 한 치의 가감도 없는 청정한 사실 자체의 모음이라기보다, 결국 살아남은 자, 또는 강자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고 미화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오늘날 정부가 국정 교과서를 강행하는 이유가 소위 올바른 역사 인식을 고취하겠다는 고상한 명분을 내세우고는 있으나 실상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역사를 서술하고 그런 역사관을 암묵적으로 강제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숨겨져 있다는 의식이 팽배하고 거기에 의혹이 제기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주장이나 관점은 지나치게 편파적이고 극단적이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지만, 오늘날 진행되는 대부분의 역사 연구나 역사 서술이 주로 권력의 분배나 이동의 추이를 중요한 척도로 삼는다는 현실을 감안하면, 그리고 현재 정치권에서 몰두하는 최종 목표가 국가의 안위나 국민의 행복보다 정권의 찬탈이나 창출임을 보면, 이러한 주장이나 관점에도 진실의 일면이 담겨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런 현실 속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역사의 주제를 다룬 책이 눈에 띄는데, 그것은 바로 『아전과 내시』다. ‘아전’이나 ‘내시’라는 단어를 듣고 그런 부류의 인물들을 머릿속에 그릴 때면, 우리는 통상적으로 ‘비리’, ‘아첨’, ‘복종’ 등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친숙한 역사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묘사하는 이들의 모습이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림자 같은 존재이거나 권좌에 앉은 사람들 곁에서 그들을 보좌하는 도구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특히 역사를 강자의 기록이라는 통념적 시각으로 이해할 경우, 권력의 전면부에 결코 부각될 수 없는 이들의 존재란 우리에게 말 그대로 역사적 배경 정도의 가치만 지닐 뿐이다.
하지만 저자는 우리의 이런 상식적인 통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아전’이 비리와 부정의 장본인이라는 인상을 우리에게 강하게 각인시키게 되는 원인은 왕조의 무능과 아전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 아전은 양반이나 권력층이 손대기조차 꺼리는 온갖 잡다한 업무에다 심지어 군역까지 담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막중한 노동에 상응하는 정당한 대가가 지불되지 않았다. 그러니 아전이 자신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해 비리와 부정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쩌면 조선의 사회 구조에 생래적인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이런 구조적 결함은 결국 왕조의 쇠퇴와 몰락을 초래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그에 비해, 내시의 경우는 최고 권력의 최측근에서 보좌하면서 왕과 관료 사이를 중재하는 독특한 역할을 수행한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사극에서 자주 목격하는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내시는 왕과 관료 사이에서 양자 간의 마찰과 이해관계를 살펴 교묘하게 줄타기를 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넓히고 영향력을 발휘할 여지를 마련했다. 하지만 이것은 양날의 검이다. 잘못하면 내시는 왕과 관료 양측 모두의 눈 밖에 나게 되어 경계와 혁신의 일차 대상으로 내몰리게 된다.
결국 아전과 내시는 왕과 관료의 권력을 보조하는 의사(擬似) 권력으로서, 자신의 몸을 한없이 낮추는 복종과 굴신을 통해 스스로의 생존을 담보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렇게 할 경우에 상대방은 자신이 상대적으로 누리는 우월한 지위를 더욱 분명히 자각하게 되어 방심하게 되고 자신 앞에 머리를 조아린 대상들에 대한 경계를 늦추고 그들에게 아량과 관용을 베풀 여유를 즐기게 된다. 아전과 내시는 이를 놓치지 않고 그 틈새를 파고들어서 자신이 취할 수 있는 바를 최대로 취하는 반대급부를 누린다.
하지만 한계와 경계는 명확하다. 그들이 존재하는 조선 사회가 철저한 계급 구조를 특징으로 하므로, 그 위계를 마냥 무시하고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다. 따라서 그들은 현명하게 균형을 잡아야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이루는 동시에 생존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여담이지만, 이렇게 이해할 경우에 오늘날 권력의 최측근으로 군림하며 불법적으로 국정을 농단하는 부류의 인물들과 과거 왕정 국가에서 합법적으로 권력을 보조하는 역할을 수행한 아전과 내시를 동급에 놓거나 비교하는 일 자체가 어불성설이다(물론 민주 공화국인 대한민국과 왕정 국가인 고려나 조선이라는 시대적 배경의 극단적 대조는 제쳐두더라도 말이다).
이렇게 볼 때, 『아전과 내시』는 지금까지 단순히 보조적 계층이나 집단에 불과했던 아전과 내시를 조선 왕조가 유구한 세월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중요한 하나의 축으로서 새롭게 재조명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을 가져온 작품이라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우리의 상식적인 편견 때문에 부정적으로 착색된 아전과 내시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도 『아전과 내시』를 통해 일정 부분 극복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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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유럽의 형성"이라는 책에서 근대의 사전적 정의를 '오래되지 않은' 혹은 '말하는 사람과 동시대'라고 설명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먼 과거와 어떻게 다른가'를 강하게 의식한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근대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글에 비추어 보면 2016년은 한국역사에서 새로운 근대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여 하나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 주장을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가 사는 이시대는 과거와 다르다는 것이다. 과거처럼 비선조직이 공식조직을 억누르고 권력을 행사하는 비정상적인 인치가 아니라 예측 가능한 실질적인 법치를 원하는욕망이 촛불집회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원하는 근대의 모습 이전에 비정상적인 인치는 어떠했을까? 이보다 좋은 시의적절함은 없을만큼 2016년 가을에 "아전과 내시"라는 책이 나와 과거의 비정상적인 인치를 보여준다. 바로 비정상의 대표적인 직업이며 최근에도 자주 등장하는 아전과 내시가 책의 주인공이다.
아전과 내시라는 양반기준에서 보면 미천했지만 권력을 가까이서 공유하는 비정상적인 권력을 다룬 책이다. 최고 권력이었던 왕 옆에선 내시, 지방권력자였던 수령의 옆에선 아전은 권력자원의 핵심으로 복종내세웠다. 저자는 '높아서 높은 자는 본디 없으며 낮아서 낮은 사람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높고 낮음은 자발적 굽힘, 아니면 강제적 복종없이 따지지 못한 사회적 허상이며 정치적 환영이 만든 허구적 결과'라고 표현한다. 즉, 자신이 복종함으로써 상대방에게 권력을 주고 자신은 그 권력을 공유 또는 향유한다는 것이다. 과거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왜 최고 권력자가 그런 사람을 가까이 했을까 이해 가지 않아 과연 그랬을까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실시간 중계로 접하고 보니 현재가 역사를 증명해준다.
이 얼마나 무서운 예언인가.... * 저자의 글은 약간 감성적이고 웅변조라는 특징이 있다. 처음 접할때는 많이 어색했다. * 흔히 볼 수 있는 생활사처럼 아전과 내시의 모습을 그린 책이 아니라 정치철학책이다. 다른 때였으면 딱딱했을 책인데 시대를 잘 태어나 시각적 이미지가 또렷해진 활기찬 책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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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정치적 복종의 두 가지 형식 [아전과 내시]
머리털이 숭숭 빠지고 등은 굽은 채 헐벗은 모습의 '골룸'은 한때 희화화 되어 표현되었다. "마이 프레셔스"를 외치며 기이한 늙은이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뭔가에 매료되어 묘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판타지 소설 혹은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는 모든 종족이 이른바 '절대반지' 하나를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배신을 일삼는다. '절대반지'의 속성이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권력'과 많이 닮아 있단 생각이 든다. 그것 하나만 있으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을 것만 같고 남의 위에 군림할 수 있다는 것이 사람의 마음 속 욕망을 그렇게 자극하는 것일까.
예전 봉건사회 혹은 중세에는 '왕'이 있어 절대권력을 행사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네 고려, 조선을 보면 알 일이다. 왕세자 책봉 이후 쭈욱 일생동안 한 나라를 책임지는 왕의 자리란 위엄 있고도 고독한 것이어서 주위에 살뜰히 보필하는 신하가 있는가 하면, 전복을 꾀하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배반의 세력이 득시글거리기도 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를 남발하는 신하들이 왕과 뜻을 같이하면 좋겠지만 그들은 언제고 왕의 대척점에 서서 한사코 반대의견을 내며 왕을 견제해 왔다. 아~ 피곤한 왕의 일생이여. 그리하여 왕은 일신의 안위를 위해 가까이 있는 종복, 내시를 '편애'하기 시작한다. 왕과 신하, 내시 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구조가 부득불 생기게 된다.
[아전과 내시]에서는 조선조 정치적 복종의 두 가지 형식으로 "아전"과 "내시"에 주목한다. 유교국가 조선. 전대미문의 세월이 흐르도록 단일 성씨를 중심으로 세습군주체제를 이어간 조선의 정치적 에너지를 탐구대상으로 삼은 저자는 조선의 정치체제와 왕조사회의 내재적 틀을 지탱한 힘의 정체에 골몰한다. 왕조는 변화의 수단보다 보존의 방법을 강구하는 데 치열하게 집착하여 '보존'과 '유지'을 이루어냈다. 27명의 왕이 지배하던 조선조를 훑어보고 저자는 "강자의 강함이란 본디 그들의 노력이나 자질 때문이라기보다 약자의 의도적 굽힘과 자발적 복종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조선에서 독특한 복종을 통해 자신의 힘의 기반과 저력을 이어간 제도 직종인 '아전'과 '내시'의 정치적 존재양식에 주목하는 것은 지금껏 쉬이 접하지 못했던 방식이다. 권력을 부리는 주체인 '강자'에 집중해서 권력의 특성과 전개양상을 살피는 것이 일반적인 양상이었다. 하지만 약하나 강하고 잠재적으로 튼실하였으나 현실에서는 취약한 신분정치거점을 잃지 않을 애쓴 권력주변부의 중요 자원에 눈을 돌리니 '권력'의 실제 모습이 달리 보인다. 보이지 않을 만큼 '작다'고 하여 '없다'고 인식하는 잘못은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저자의 말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과거의 역사를 살펴 현재를 통찰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 역사공부의 진의일 터. 이제까지의 정치연구가 주로 제도 권력의 중심과 교체에 초점을 맞춰왔다면 저자는 '높은 곳', '밝고 환한 곳'에서 벗어나 정치적 그림자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권력과 위세에 눌려 없는 듯 존재했고 여간해선 드러나지 않는 '아전'과 '내시'를 끌어내자 권력의 속성이 ,어두운 골목을 또다른 방향에서 서치라이트를 비추자 가리워진 구석에 숨어있던 그림자를 드러내듯,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굳이 천직이라 이름붙이지 않아도 굽힘의 자세는 그들에게 굴욕도 수모도 아닌 일상의 생활이자 체화한 삶, 바로 그 자체였다. 가없는 존경과 한없는 우러름에서 솟구치는 아연한 굽힘보다 위장된 복종이나 고의적 굴종이 한층 정치적인 이유다. -174
환관의 정치개입은 당연히 억제되어야 하지만 그 업무의 특성상 왕의 가장 측근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정치적 사건과 불가분의 관계였다. -장희홍, 182
지금은 현대적인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는데, 어째서 몇 백년 전의 행태가 그대로 지속되고 반복되고 있는 것일까. 데자뷰라 하기엔 너무나 끔찍한 겹침이 아닌가. 국정농단 사태의 주역이 드러나고 대통령은 여러가지 이유로 '탄핵'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예전에는 '환관'혹은 '내시'란 직책이라도 맡은 자가 왕의 옆에서 권력의 상관관계에 힘입어 굴종의 대가로 단맛을 보았다면, 지금의 국정농단은 정치와 관련 없는 일반인의 손에 의해 행해진 바, 더욱 공분을 사고 있음이다. 참담하고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이 대목에서 '권력'의 속성이 다시 한 번 예전의 법칙과 그대로 맞아떨어짐을 확인하고 보니 아연할 따름이다.
아전과 내시의 자원은 의외의 '굴신성'이었다. 자존과 긍지만으로는 권력의 정치적 거점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과거도 추천도 꿈도 꾸지 못할 정치적 호사였던 세상에서 기왕의 좁디좁은 신분상승통로를 단숨에 헤집을 역량이란 좀체 우러나기 힘든 '굽힘'과 '꺾음' 이었다. -261
아전과 내시는 오늘도 얼마든지 부활한다는 저자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요 몇 달간의 국정은 혼란 사태를 빚고 있다.
몸 생김새로 확인 가능한 기인이나 악마가 아니라 누구라도 천연스레 변모할 일상 속에서 제 모습을 갖추니까. 스스로 변하여 그처럼 바뀌는 존재일 뿐, 누가 시키거나 만들어 생겨나는 타율의 창조물은 더더욱 아니니까. -265
기이하게 모습을 바꾸어 현실에 나타나고야 만 '아전'과 '내시'는 최소한 '복종'의 메커니즘 조차 지니고 있지 않다. 변형에 변형을 거듭한 끝에 백신조차 만들 수 없는 유전자를 가지게 되었다고나 할까. 이들의 힘이 너무도 강력해서 '슈퍼'라 이름붙기 전에 현명한 눈으로 이들을 꿰뚫어 볼 지혜로운 지도자의 손에 나라를 맡겼으면 한다. 현대판 아전과 내시의 이름은 또다시 역사의 한페이지에 뚜렷하게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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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궁중과 관청에서 실무적인 일을 하지만, 그들의 역할에 대해서는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존재들이 바로 아전과 내시이다.
예컨대 이들은 <춘향전>과 같은 소설에서 수령들의 옆에서 시중을 드는 역할이나, 궁중을 배경으로 하는 사극에서 왕의 옆에서 모사를 꾸미는 존재로 접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조선조 정치적 복종의 두 가지 형식’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권력 주변에서 ‘기생’하고 있던 아전과 내시들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
저자는 이들의 정치적 위상에 주목하여, 때로는 복종하는 대상으로 때로는 그와 반대되는 역할을 행했던 기록들에 주목하고 있다.
‘호가호위(狐假虎威)’라는 고사성어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자신이 모시고 있는 존재의 힘에 비례하여 그들의 역할도 비례한다.
이들을 ‘보조 권력’으로 위치시킴으로써, 권력과의 작용과 반작용의 문제에 대해서 다양한 각도로 분석하고 있다.
그것을 일컬어 ‘자발적 복종’의 시각에서, ‘아전의 굴신정치학’과 ‘내시의 복종정치학’이라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그 결과 때로는 ‘큰 힘’을 지배하는 ‘작은 힘’으로 역할을 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조선시대 정치사에서 무시하지 못한 존재들이지만, 대다수의 연구자들에게는 단지 보조적인 역할에 머무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존재들이 이들 내시와 아전이었다.
나 역시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그런 고정 관념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에 관한 다양한 기록을 통해, 소외되었던 존재인 아전과 내시에 대해서 역사적 의미를 찾고자 하는 저자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차니) * 개인의 독서 기록 공간인 포털사이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