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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개인적으로 허수경 시인을 좋아한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녀가 내 고향 진주출신이라 그런지, 가난한 시인의 생활이 그러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의 혼자가는 먼 집을 읽고 한동안..그냥 너무 외롭고 가슴이 저려 .......... 결국엔 블로그 이름마저 혼자가는 먼 집으로 바꿀 정도로 마음이 쓰였다..
지금은 고고학을 배우느라 독일로, 이라크로 가 있지만... 여전히 작은 에세이집과 시집을 열심히 내고 있는 그녀를 책으로 그렇게 만난다.. 언젠가 진주 박물관으로 돌아와 일하고 싶다는 그녀를 나도 꼭 만나고 싶다..
이책은 그녀를 알수 있는 아주 적절한 책이다. 진주 곳곳의 추억과 낭만과 아픔과.. 가난이 그려져 있고, 작가로서의 참담한 생활과 때로는 넘치는 지적 갈등도 읽을만 한 책이다. 이 책에 나오는 짧은 글하나는 나에게 참 많은 생각을 해준것을 옮겨본다..
교양부족
서울에 들렀을때, 이름만 들어봤을 뿐 단 한 번도 . . .
이 글은 참 그녀다운 글이다.. 나의 잘못된 모습도 보이고 혹은 저런 사람들을 본적도 있고.. 이 글을 있고, 얼마나 웃었든지.. 가볍게 그녀을 알고 싶다면 꼭 필독하시길.. |
| 사무치게 생이 간절해질 때, 아니 잃어버린 꿈에 연연해하며 서성거릴 때, 이 책을 만났다. 그 날은 온종일 집에서 게으름을 피울 수 있는 날이었다. 하늘은 회색 빛으로 낮게 드리워져 있고, 금방이라도 흰 눈이 펑펑 내릴 것 같았지만, 하늘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아서 내 젖은 가슴만 조바심 치던 날, 난 시인 허수경의 외로움과 다시 만났다. 「슬픔 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로 처음 그녀를 만났고, 「혼자 가는 먼 집」, 「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까지 오면서 나도 모르게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먹어도 먹어도 늘 허기져 있는 외로움에 함께 동화되어 갔는지도 모르겠다. 낯선 땅에서, 낯선 공부를 하면서도 시를 쓰고 싶어하는 마음만이 간절한 세월이었다고 한 시인은, 적어도 시를 쓰거나 짧은 글이라도 쓰는 동안만큼은 한국어라는 바다에서 머물고 있어서 행복하다고 했다. 그리고 난, 그녀의 시를 읽으며 이유 없이 아파했었다. 아픔의 근원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지금 그녀는 지구의 반대편에서 땅 속에 파묻힌 고어들, 죽어간 유물들, 수천 년 전에 사라져간 것들을 복원하는 고대 근동 고고학 공부를 하고 있다. 시인의 삶을 잠시 접고, 낯선 이국의 땅에서 고고학을 공부한다는 그녀의 행보에 그녀의 시를 사랑하고, 그녀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은 당황해 했었다. 그러나 사막의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곳에서 발굴을 하면서도 그녀는 ‘아직도 아가인 사람의 마음 냄새’를 느끼는 시 한편에 행복해 하는 어쩔 수 없는 시인이다. 백 서른 아홉 개의 짧은 이야기와 아홉 개의 조금은 긴 편지가 실려 있는 이 책엔 시인의 고향인 진주의 이야기, 서울에서 생활했던 일과 독일 터키 시리아 등에서 공부하고 일하는 자잘한 일상 등이 군더더기 없이, 그러면서도 아릿하게 다가온다. 그녀는 소통의 부재를 겪어야 했던 사춘기 시절, 뚱뚱하다는 신체의 콤플렉스는 그녀를 골방으로 몰아 넣었고, 그 골방은 문학을 시작할 수 있는 모퉁이라고 했다. 그 외로움의 시간들은, 낯선 땅에서도 불쑥 불쑥 찾아온다. “함께 말을 나눌 사람이 없던 나날동안 그러니까, 내가 ‘이름 없는 나날’이라고 부르는 이 나날 동안 나는 혼자서 먼먼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난 지구 반대편에서 속삭이는 그녀의 말을 말없이 들어 주었다. 그녀는 또한 시시때때로 불안을 느낀다.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살갑게 대해 주시는 한인교회 목사님이 “공부하시느랴 힘드시지요?”하고 묻는 말에 “잘 모르겠어요. 저는 저를 위해서만 사니까..... 불안해요.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라고 대답한다. 그 불안은 단지 ‘저를 위해서만 사니까’도 아니고, 낯선 땅에 있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인간은 어디에 있든, 어떤 모습이든 깊이만 다를 뿐 누구나 고독하고 불안한 존재니까... 몸이 아픈 날이면 좀 호사를 누리고 싶어서, 있는 돈을 다 털어 길모퉁이의 중국식당을 찾는 그녀. 그 식당에서 마늘이 많이 들어간 중국 음식을 시켜 먹으면서, 어느새 그녀의 상념은 대륙을 넘어 친근한 벗들이 있는 모국으로 향한다. 그런 추억들, 함께 정을 나눈 사람들과의 기억이 그녀를 다시 일어서게 하는 것이겠지. 그 날... 낮게 내리 깔린 회색 하늘 탓일까? 내 마음도 그녀를 따라서 낯선 이국 땅에서 모래바람을 맞으며 수 천년 동안 땅속에서 숨죽여 있던 유물들을 끄집어내고 싶은 충동을 느낀 것은... 아니, 그 처절한 고독 앞에 홀로 서 있고 싶었던 것은... |
| 나는 허수경을, 허수경의 시를 좋아한다. 그녀의 시적 행보와 삶의 행보가 늘 궁금해지고, 멀리 독일로 날아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마냥 머물고 있는 것에 막연한 동경을 느낀다. 한 사람이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자리를, 지우와 선생과 모국어를 그토록 가까이 한 사람일수록 더더욱 두고 떠나기 어려울 터인데 그녀는 떠났고 지금도 떠나 있다. 그러니 그 먼 곳에서 전해온 전언들이 무엇이었을까 궁금하지 않았겠는가. '길모퉁이...'는 그래서 내게 왔다. 그래서 그녀의 마음결은 내게 닿았으나, 무릇 시집보다 더 공력을 들여야 하는 산문들일 터인데, 그녀의 글들은 내 마음결을 더이상 건드리지 못했다. 한편 한편 읽으면서 왜 이리 화가 나는가, 그녀에 대한 나의 기대와 믿음이 그리 컸던가 자꾸만 되집어 보게 되는 것을. 허수경에게 산문집은 다른 문학인들에 비해 뒤늦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시가 말해주는 것의 반에 반도 말 못하는 산문이라면, 시의 행간을 건너뛰기 일쑤인 독자들에게 마저 전해주지 못한 그 행간을 대신하는 것이 산문이라면, 그저 수십 편의 노트에 지나지 않는 이 산문집의 글들은 오히려 일부러 애쓴 듯이 태평하다. 허나 내용의 밀도가 이렇게 떨어지더라도 그녀의 시를 좋아하므로 애써 감싸안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여백이 많은 편집, 그것이 산문의 행간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을 화나게 한다는 것, 간혹 등장하는 삽화가 참 유치하다는 것, 하나의 그림으로써의 의미를 갖지 못할 뿐만 아니라 글까지 망치고 있다는 점, 한 문장 안에 같은 부사와 지시대명사가 문법을 무시하고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는 것, 그녀는 왜 이리 급하게 다시 살펴보지 않고 무턱대고 글을 출판사에 넘겼을까. 출판사의 편집 방향을 책이 나오기 전에도 그녀는 알고 있었을까. 그렇다면, 볼륨이 안 되는 원고를 왜 애써 그 먼 곳에서 이 먼 곳으로 보냈을까. 나는 아직도 이 책을 소화하기 위해 애쓰고 있으면서 이 글을 쓴다. 괜히 슬프고 안타깝고 화가 난다. 적어도 못다한 시인의 마음결을 어루만지고 싶어 이 책을 집은 독자라면 화가 나 마땅할 것이다. |
| 이 책의 짧은(채 열줄이 넘지 않는 산문들도 있다) 글들에선 허수경 시인이 오랜 이국 생활을 하면서 삶의 일부분으로 끌어안았을 외로움과 향수와 마음의 허기가 묻어난다. 그러나 소설가의 산문보다 더 개성적으로 빛날 수도 있고, 또한 그러리라 기대하기 마련인 시인의 산문집으로서의 매력은 그다지 찾을 수 없다. 이 리뷰에 쓰려고 머릿속에 정리해두었던 대부분의 감상이 먼저 독자리뷰를 올린 분이 이미 지적한 것과 일치하므로 반복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굳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책의 편집인데, 단행본의 편집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은 없으나 그저 일독하면서 느끼기에도, 어떻게 적은 원고 분량으로 책 한권 뽑아내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해 보였다. 예를 들어 열줄 분량의 산문을 반으로 나누어 왼쪽 페이지에 제목과 다섯줄, 오른쪽 페이지에 다섯줄, 그리고 드문드문 뻘쭘하게 자리잡고 있는 삽화...산문이라기 보다는 노트에 흘겨쓰고 스스로 잊었을 법한 메모같은 글도 상당수 그대로 실려있고, 시인 자신도 다섯줄, 여섯줄짜리 산문(?)을 책에 올리기 민망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어쨌든 이 책은 너무 아깝다. 책값도 아깝고 시인의 글솜씨가 한껏 빛나지 않았다는 것이 아깝다. "백서른아홉 개의 짧은 이야기, 아홉 개의 조금은 긴 편지"라고 표지에 솔직하게 적어놓기는 했지만 수첩의 일부, 일기장의 몇 페이지를 옮겨놓은 듯한 이 책을, 그렇다고 결코 거부하고 싶지는 않은 시인의 깊고 진실한 목소리를 마음 속으로 흡수해버리기에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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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못된 생각일테지만, 아니 조금 많이 못된 생각이지만 이상하게 내가 알지 못하는 분의 에세이집은 잘 찾지 않게 된다. 누군가가 선물을 해준다거나하는 것과 같은 우연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좀처럼 스스로 찾아보게 되는 경우가 없다. 여기에는 왠지 모르게 소소한 거부감이 있기 때문이랄까. 내가 알고,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유명하신분들의 에세이집이 아니면 좀처럼 읽지를 않게 되니..굳이 이유를 찾자면 소설에 푹 빠지기전에 읽었던 몇 권의 에세이에서 큰 감동과 재미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고, 그로 인해 거리를 좀 두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때만 해도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첫번째 이야기에서 그만 맥이 탁 풀려버렸다. 우박으로 망가져버린 채소들 앞에서 울어버렸다는 글을 읽고는 사전에 품고 있던 경계심이 탁 하고 무너져 버렸다. 비유를 하자면 소개팅 따위는 나와 맞지 않는다며 조금은 뚱한 마음으로 나간 자리에서 상대방에게 첫눈에 반해버린 느낌이랄까. 상대는 나를 잘 모르고 있겠지만 나는 상대방이 좋아지는, 덕분에 앞으로의 이야기를 기대하게 되는 설레임을 ’마당 있는 집’이라는 짧은 글에서 느끼게 되었다. 허수경이라는 이름은 내게 참 낯선 이름이었다. 그렇지만 내게만 그럴 뿐 이분은 이미 시인으로 이름을 알리셨고, 라디오의 작가로 활동을 하셨다 한다. 그렇게 많은 글들을 쓰시다가 본인이 세상에 내놓은 글들에게 갇혀버리면 어쩌나 싶어 작가로의 삶을 잠시 접어두시고 늙은 학생이 되셨다. 것도 고고학이라는 낯선 분야의. 잠깐일줄 알았던 늙은 학생의 생활이 길어지고, 그러면서 고향에 대한, 고국에 머물고 있는 지인들이 그리워 그들에게 쓰신 글들을 모아 엮은 이 책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자꾸보다보니 제목에서부터 왠지 ’정’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길모퉁이..길모퉁이..왠지 발음을 하면 할 수록 정이 가는 단어인 것 같다. 조금은 허전해 보이는 작고 얇은 책 속엔 허수경님의 많은 ’말’들이 담겨 있다. 정확히는 그녀의 삶이라고 해야할지도 모를. 우선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림움이 담겨 있었다. 섬처녀에서 뭍으로 시집와 검소한 생활을 하셨던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 어머니와 함께 꽃밥을 먹던 이야기, 아버지의 임종을 홀로 지킨 동생에 대한 이야기..이상하게 가족이란 존재가, 가족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 당시에는 일상의 한 부분일 뿐이다가도 시간이 지나서 돌이켜 보면 마음 한 켠이 살짝 아파오는 것 같다. 아마 내가 효녀보다는 불효자에 더 가깝기 때문이겠지만. 그리고 그녀가 늙은 학생으로 머물렀던 독일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녀가 고고학이라는 학문을 배우면서, 발굴을 다니면서 만나게 되었던 사람들과의 이야기가. 발굴이라고 하면 단순히 땅속에 묻혀있는 유물들을 현재의 세상으로 드러내놓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글을 읽다보니 그게 다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 단순한 줄 알았던 일에 ’역사’가 있었던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지금의 독일이 독일을 이끄는 문화의 깃발 아래 서야 한다는 어느 독일 정치인의 발언 때문에 독일의 정계와 문화계, 언론계가 시끌시끌해지는 것과 같은. 그리고 발굴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환경에서는 절대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고, 경험할 수 없는 삶의 모습이기에 글로 접하는 그들의 생활이 조금은 신기했다. 그러면서 사람이 살아가는 곳은 어디든 조금씩은 비슷비슷 하구나 싶었고. 한 번 무너진 경계심은 회복될 줄을 몰랐고, 좋았던 첫인상은 마지막까지 갔다. 누구보다 조금은 외롭고 고된 삶을 사는 것 같지만, 누구보다 많은 경험을 하면서풍부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허수경님의 삶에 조금은 질투심이 일면서 소박하고 진실한 글들을 읽으면서 행복했다. |
![]() 우르르 시인의 삶이 쏟아졌다. 나는 어느 것부터 정성들여 받아야 할지 몰라 한동안 우왕좌왕했다. 그러다가 노란 포스트잇이 붙은 종이와 안 붙은 종이로 시인의 이야기가 나뉘었다. 감동 받은 이야기. 아닌 이야기. 시인이 떠돌이 길에서 주웠던 많은 생각들이 순식간에 쪼개졌다. 내 마음에 들어온 허수경 시인은 아마도 그녀 그 자체와는 조금 다른 사람일 것 같다. 내 속에 있는 허수경 시인은 내가 공감한 이야기를 주워든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는 사람이다.
한 달 생활비(214쪽)
우리 모두는(76쪽) 우린 모두 사실은 신화적인 존재지요.
하마 이야기(114쪽)
날틀(75쪽)
죽음을 맞이하는 힘(119쪽)
우연히 많은 시인들의 산문집 몇 권을 보게 되었다. 손이 갔던 것도 아니고 책이 내게로 찾아온 것이 계기였다. 대개의 산문집이 하나의 어휘로부터 연상되는 시인의 단편적인 사유가 담겨 있었다. 일상이 담겨있기도 했고 내가 보기엔 조금 특별한 작가로서의 삶도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너무 재미있었고 도리어 작가의 사유로부터 나의 생각까지 솔직하게 살필 수 있어 좋았다. 모든 산문집이 그렇기에 특별했고, 허수경 시인의 ’길 모퉁이의 중국식당’은 넓은 세계를 볼 수 있었고 더 넓은 작가의 생각과 깨달음을 배울 수 있었기에 더 값졌다. 허수경 시인의 시를 읽어보지 못하고 산문집부터 보게되어 도리어 편견없이 책을 읽게 되었다 좋아했었는데, 산문집을 읽고 허수경 시인의 시집을 읽을 때 편견에 사로잡힐까 걱정이 들었다. 허수경 시인이 글이라면 무조건 반해버릴 것 같기 때문.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말은, 글 드문드문 유쾌했던 그래서 어쩔건데? 덧. 허수경 시인의 산문집 앞뒤로 이병률 시집 '찬란'(문학과지성사, 2010)을 읽었다. 본 시집에 대해 해설을 하였던 허수경 시인의 이름이 보이지 않다가 <길모퉁이의 중국식당>을 읽고 색다르게 읽히는 마법에 걸린 순간 나는 이 기막힌 우연에 껌뻑 놀라고 말았다. 너무 반가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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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과 마음속에 등불을 간직한다는 것은 어쩌면 두 개의 같은 이름이 아닐까, 라는 생각해 봅니다. 외로운 사람은 마음속에 등불을 켤 수 있다. '마음속의 사진기'를 꺼낼 수 있는 '길모퉁이의 중국식당'을 찾는 그이, 허수경 시인이 제게 그렇게 속삭이는 것 같습니다. 함께 말을 나눌 사람이 없던 나날, 그이는 그 나날을 '이름 없는 나날'이라고 부릅니다. 《길모퉁이의 중국식당》은 그 이름 없는 나날 동안 그이가 혼자서 말을 건, 짧은 또는 긴 이야기들을 담아 놓았다고 합니다. 이름 없는 나날에는 그이를 느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이 녹아있습니다. 그이가 시인으로 우리에게 다가와서 그럴까요, 이름 없는 나날은 때때로 마음을 편하게 하며 다독거리는 시가 됩니다.
무엇보다 저는 '이름 없는'에 마음이 몹시 쓸쓸해져 버렸습니다. 컴퓨터, 인터넷 시대에 너무 동떨어지지 않게 컴퓨터와 인터넷을 써먹어야 하는 한 사람으로 새로운 이름을 찾기 일쑤였지요. 이미 길들여진 이름이 아니라 마음의 어떤 상태를 잘 드러낼 수 있는 이름을 갖고 싶은 것입니다. 모두가 그러하겠지요. 그런데 이름이란 누군가 불러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누구도 불러주지 않는다면 또, 그 이름이 담고 있는 마음을 읽어주지 않는다면 그 이름은 제 몫을 다하고 있다고 할 수 없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름이 불려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순간 덧없는 생각들이 지나갑니다. 어쩌면 이름은 욕망이 아닐까하고 말이지요. 이름이 없다는 것은 욕망을 지운다는 것이 아닐까, 저도 모르게 쿡쿡거립니다. 욕망 없이 삶을 산다는 것은 아직 제겐 힘에 부치는 일이지요. 그렇지만 시인인 그이는 마음 가득한 등불과 빛을 담은 집(책)을 지었고, 저는 어느 인터넷 동호회에 '이름없는날'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나의 욕망을 지우는 것입니다. [인상깊은구절] 어느 날 저녁, 시간이 없어서 저녁밥은 못 하고 당근 오이나 잘라 먹자, 하고 당근 껍질을 벗기다가 녀석들을 보았다. 나는 당근을 던져주었다. 오물오물 단방에 먹어치웠다. 그후로 자주 나타나서 내가 당근을 던져주면 오물오물 먹었다. 이제는 당근이 집에 없는 날에도 나타나서는 내 방 앞 잔디밭을 어슬렁거렸다. 따로 당근을 사들고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나를 기다리지 않는 기숙사로, 비록 당근 때문이지만 찾아오는 녀석들이 참 예뻐서 나도 모르게 욕심을 내고 말았으니…… 녀석들 중 두 마리의 목에다 리본을 달아준 거다. 한 녀석에게는 푸른색을 한 녀석에게는 붉은색을. 여름 내내 우리는 참 친해졌다. 용하게도 녀석들은 언제나 리본을 달고 나에게로 왔다. 껑충거리면서도 잃어버리지 않았나 보다. 어느 날 나는 기숙사 주차장에서 차에 치인 토끼를 보았다. 그리고 푸른 리본도 보았다. 나는 또 욕심을 내다가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이다. 내 것이라고 표시하기, 얼마나 가소로운 욕심이었는가. 마치 누군가를 사랑할 때, 내 것이라고 표시되기를 바랐던 그때의 눈먼 나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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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자란 곳을 떠나 살고 있는 이들의 마음에는 어떤 아픔이 남아 있을까. 돌아가고 싶어도, 혹은 돌아갈 수 있어도 돌아가지 않는 그 숨겨진 의지에는 어떤 그리움이 병이 되어 있을까. 허수경의 이번 산문집을 읽으면서, 이건 그녀의 시집으로서의 또다른 모습이다 여기면서 그녀가 애써 숨기려 하는 깊은 병을 엿보았다. 어쩌면 그 병이 내게도 아주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하면서. 작가는 지금 독일에서 고고학을 공부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시인이 무슨 이유로 고고학을 공부하는 것일까 의문이 생길 수도 있겠으나 그 공부로 인하여 나는 그녀가 더 넓고 더 깊은 시들을 쓸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번 산문집만 보더라 해도 일상적인 삶 속에서는 건질 수 없을 것 같은 귀한 느낌들이 알알이 담겨 있었으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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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모퉁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만, 이 계절에 만나지 않았더라면 잠시 미뤄두었을 책이다. 따뜻한 차 한 잔이 그리워지는 날들, 소식이 끊긴 지인의 짤막한 소식이라도 들었으면 좋을 날들이다. 작가가 독일이라는 먼 타국에서 어려운 공부를 하면서 기록했을 소소한 일상들, 가족이 있는 고국의 그리운 이들을 생각하며 썼을 편지글들은 지금, 읽기에 안성맞춤이다.
혼자라는 외로움에 빠져들 때, 누군가와 말을 하고 싶어진다. 어떤 이라도 좋으니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하는 바람, 막연하지만 무슨 이야기라도 다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왜 이 책에서 나는 그런 소리를 들었을까. 그것은 혹, 깊은 밤, 홀로 깨어 있었던 경험이 떠올라 그랬을까. 몇 줄 되지 않은 짤막한 글에서는 일부러 긴 호흡을 끊은게 아닌가 싶었다. 생각이 길어지면 정작 무엇을 생각하는지도 모르고 상념에 잠기게 되니까.
문학이라는 공통 분모로 살아왔을 지인들에게 쓴 긴 장문의 편지글, 그네들이 보고 싶어 사무치게 그리우면서도 차마 그립다 말하지 못하는 그녀를 본다. 어찌 그립지 않으며 어찌 눈물이 나지 않겠는가. 낯선 이방인들과의 점점 동화되어가는 삶, 아무리 타국 생활이 길다하여 내 고향 같을 리 없지 않은가. 한국에서 걸려온 친구의 전화에 이런 저런 수다를 털어내는 모습, 그것은 먼 거리를 떠나지 않더라도 나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곳으로 온지 4년을 채우는 동안, 지인을 만나러 친구들을 만나러 나간 적이 없다. 그저 녀석들과 길고 긴 목소리로의 만남 뿐.
시인이라는 삶이 시작된 건 아마도 말로 세계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겠지만, 인위적으로 그 삶을 목 졸리고 싶었던 이유는 아마도 말에 대한 애증 때문은 아니었는지. 독일은 우리말을 쓰는 나라가 아니고, 난 그게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나는 입을 자동적으로 다물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그 무렵 나에게는 말을 멈출 수가 없는, 혹은 이대로 가다가는 말에 갇혀버리고 말 것 같은 ‘말 공포’같은 게 마음 깊숙한 어느 곳에 도사리고 있지는 않았는지. 말이 나를 부패시키고 말 것이라는 공포. 이런저런 이유로 근원을 알지 못하는 말을 해야만 하는 것은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이 겪어야만 하는 거지만, 그 시절 나는 그런 걸 잘 받아들일 수 없었다. 161쪽
시인의 삶은, 고고학자의 삶은 어떠할까 라는 기대감도 많았지만, 막상 이런 글을 대하고 보니 가슴이 탁 막히는 기분이 듣다. 비단 말 공포뿐일까. 세상 공포, 사람 공포, 심지어는 그저 산다는 것에 대한 공포까지 이어지지 않을까. 그리하여 자분자분 이야기하는, 아니 꼭 들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시인의 말들은 이제 마음이 울적한 날, 햇살을 받아낼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드는 날들에 간절한 글이 될 것이다. 눈이라도 온다면, 추적 추적 비라도 온다면 더 그리운 구절들이다. 이 계절을 잘 견뎌내고 씩씩한 움이 트는 봄 날이 면 시인의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로 시작하는 그녀의 또 다른 노래를 들어도 좋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