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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내려 놓으면서 처음 든 생각...아니 오프라가 왜??? 였다. 왜 이 책을 추천한 것일까? 가끔가다 엉뚱한 책을 추천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는 작품성이 있는 책을 선정하고 했었는데, 도무지 이 책은 아니올씨다였다. 오프라가 작년 키우던 개 소피가 죽는 과정을 겪더니 아무래도 좀 감정적으로 흐른 모양이다.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도무지 왜 추천작에 올랐을지 추측이 불가해 보였다. 흠. 작년 오프라 쇼를 시청하진 못했지만 이 책에 대해 난리를 친 것만은 알고 있었는데, 책을 다 읽고보니 그들의 뜨거운 반응들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실은 무안할 지경이었다. 한마디로 딱 데뷔작스러운 엉성한 소설이었는데...이 책에 뭔가 있다고 떠들어 대던 사람들은 다 정신이 어디로 갔던 것일까? 물론 이렇게 방대한 책을 단숨에 일필휘지로 끌고가던 탁월한 문장력만큼은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이야기 전개가 부자연스러웠다. 그닥 재미있지도, 흥미진진하지도, 아귀가 딱딱 맞지도,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이해되거나, 이야기 전개가 상식적이거나 개연성 있거나 하진 못했으니 말이다. 통찰력은 논할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그저그런 통속소설에 불과했다. 오프라가 앞에 나서서 떠들지 않았다면 아마도 있는지도 알지 못하고 넘어갔을 책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그다지 애석해 필요가 없다고 봐지는 것이, 그러니까 전반적으로 지루했다. 하, 어찌나 지루하던지...(특히나 2부) 결론을 보겠다는 일념하게 인내심을 갖고 본 2부, 드디어 끝장을 넘기는데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내가 개를 키우지 않아서 이 책이 별로인 것일까 머리를 굴려 봤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냥 잘 쓴 소설이 아닐 뿐이다. 역자분이 존경스러웠다. 나라면 지루해서 도저히 마감을 못 했을테니 말이다.
<줄거리> 대대로 개를 키우는 농장을 하고 있는 소텔 집안에 에드거라는 농아 아이가 태어난다. 듣긴 하지만 말을 못하는 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소텔 부부, 하지만 에드거의 입과 손과 발이 되어 주는 것은 애완견인 엘먼딘이다. 개를 돌보면서 잔잔한 일상을 보내고 있던 소텔가족에게 오랫동안 떠나있던 에드거의 삼촌이 돌아오면서 소설은 전화점을 맞게 된다. 아버지 못지 않게 개를 잘 돌보지만 개에 대한 견해차이로 사사건건 아버지와 대립하던 삼촌 클로드는 결국 아버지를 살해하고 만다. 아버지의 죽음에 삼촌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에드거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릴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엄마마저 삼촌의 청혼을 받아 들이자 비탄에 젖게 된다. 그 사태를 사람들에게 알리려던 에드거의 노력은 또다른 살인을 불러오고, 에드거는 엄마의 명령에 따라 가출을 하게 된다. 자신이 기른 개 네 마리와 함께 길을 나선 에드거는 결국 종결을 위해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 책에서 가장 그럴 듯했던 것을 꼽아 보라면 (사람들이 존재를 의심하는) 유령을 들고 싶을 정도로 내용에 신빙성이 떨어졌다. 우선 형을 죽이고 형수와 결혼을 하는 삼촌 클로드가 왜 그런 일을 벌이는지에 대해 설명이 부족했다. 그냥 악한 사람이라서? 형의 설명에 따른 "겐 자신이 원하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가져"라는 말로는 삼촌의 악랄함이 이해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에드거를 파멸시키는 계략까지 세우는 삼촌의 말을 모든 사람들이--심지어는 에드거의 엄마까지---의심하지 않고 다 믿어 준다는 것은 좀 놀랍지 않은가? 거기에 세상을 다 돌아다닌 삼촌이 촌 구석에 짱박혀 있는 형 집에 기어들어와서 형을 파멸시킨다는 설정도 우스웠다. 햄릿의 아버진 그래도 한 나라의 왕이기라도 하지. 겨우 농장 하나 차지하겠다고 형을 죽인다는게 말이 되나? 그리고 아무리 내성적이라 속을 잘 알기 힘들다지만 그래도 아들인데, 아들의 말을 믿지 못하는 엄마는 또 어떤가? 거기다 남편이 죽어 좀 경황이 없다고는 하나, 남편이 죽은 뒤 4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시동생과 동거를 시작하다니... 것도 남편이 생전에 그렇게 싫어한 시동생과 말이다. 이해되지 않았다. 결말은 또 어떤가? 에드거를 굳이 죽일 필요가 있었을까? 그 과정은 또 얼마나 엉성한던지...아버지를 왜 죽였는지 물어봐야 한다면서 보안관이 벙어리 소년을 납치하는 바람에 일이 커져 버리는데, 그냥 대낮에 소환해서 물어보면 되는 일을 그렇게 멍청하게 처리하다니, 다분히 어색했다. 이 책에서 유능한 사람이라고는 살인을 감쪽같이 해낸 삼촌뿐이었는데, 그닥 설득력있게 악인같지 않던 삼촌만이 유능하다는것도 영 석연잖았고... 아, 한도 끝도 밀려드는 단점들. 구멍 숭숭 뚫인 듯 치밀하지 못한 전개에 대한 성토는 이쯤에서 접기로 하는게 낫겠다. 비추천작으로 넣어도 그닥 아쉽지 않을 책이긴 하지만, 어쩜 내 취향에 문제가 있는게 아닐까 싶은 노파심에 애매작으로 넣는다. 혹시 개를 아주 좋아하신다거나, 개와의 교감에 대한 설명하다 만 듯한 리포트라고 얻으실 요량이시라면 한번 들어보심도 좋을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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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마음이... 심란하다. 너무너무 재미있다는 열화와 같은 다른 이들의 서평만큼 흡인력이 뛰어났던 것이 아니어서일 수도 있고...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특히 개와 소년의 교감이 이 이야기의 다일거라고 생각했다.)일거라고 기대했던 예상과는 달리, 음모와 배신, 죽음이 잇따라 등장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내가 좋아하는 해피엔딩이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결국은 끝까지 클로드가 왜 가르를 죽였는지 알아낼 수가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재미 없게 읽은 것도 아니고, 감동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조금 두꺼운 이 두 권의 책을 2주도 넘게 들고 읽었고 잠시 내려놨다가 다시 들 때마다 심란했다. 이 책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1권을 읽고 있을 땐... <가을의 전설>이라는 오래된 영화가 생각났다가, 2권 중반을 들어서니 왜 이 책을 <햄릿>에 비하는지 갑자기 이해가 되기도 한다. 처음 시작은... 소텔가의 붕괴를 예고라도 하듯, 어떤 한 남자가 독성을 지닌 어떤 물질을 구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그 장소가 1952년, 한국 부산의 어느 골목이라는 것부터가 참... 마음에 안 든다. 왜? 보통 그런 약품들은 중국 아닌가? 어쨌든... <<에드거 소텔 이야기>>는 소텔견이라는 새로운 견종을 만들어낸 소텔가의 소년 에드거의 이야기이다. 에드거의 할아버지서부터 만들어진 이 소텔견들은 아버지를 거치며 더욱 탄탄해지고 에드거는 이 대에서 대로 물려지는 소텔견들의 훈련과 이들의 정신을 물려받는다. 소텔견들은 사람들의 완벽한 반려견으로서 훈련받고 개량된 개들을 말한다. 주인의 눈빛과 작은 몸짓에도 반응하고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개들을 만들려는 게 그 목적이었지만, 에드거는 많은 경험을 겪으며 그들에게 해 오던 "명령"을 해제하고 그들 나름대로의 의지대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해 준다. 작가가 바란 반려견이란 그러한 관계를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런지... 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각자의 의지로 소통하는 그런 관계 말이다. 에드거 소텔과 엘먼딘을 비롯한 소텔견들과의 교감이 한 축을 이룬다면... 또다른 축은 에드거의 아빠 가르와 클로드의 관계이다. 아주 오랜 부재 끝에 클로드가 소텔가에 돌아오면서 어느날 갑자기 가르는 죽고, 소텔가는 조금씩 파국으로 치닫는다. 가르의 죽음에서 무언가 자연스럽지 않은 기운을 깨닫는 에드거가 그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고 도망친다. 하지만 그 도망 중에 에드거는 몸도, 마음도 자라고 그 도망 끝에야 비로소 에드거는 자신을, 아버지의 죽음을, 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에드거가 자신의 강아지들을 교육시켜 어떤 죽음을 연상케하는 장면은 <햄릿>의 연극 부분과 매우 닮아 있다. 하지만, <햄릿>에서처럼 결론은 쉽게 나지 않는다. 에드거는 그 연극을 통해 밝혀졌음에도 망설이고 도망친다. "에드거에게, 자신이 하려던 일은 지혜와 어리석음의 문제도, 용기와 만용의 문제도, 통찰과 무지의 문제도 아니었다. 소년이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을 분리할 수 없을 따름이었다. 피할 수 없는 의무 중에서 선택할 수가 없었다. 부활할 것인가 복수할 것인가. 싸울 것인가 돌아설 것인가."...2권 431p 에드거는 돌아와 그만의 방법으로 맞서지만 결과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방법으로 끝을 맺는다. 그래서 아쉽다. 언제나 예측 가능한 결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 시원스런 결말이 아닌것만 같다. 클로드는 그냥 오랜 애증의 관계를 견디다 못해 가르를 죽인 것인지, 트로디는 결국 진실을 알아냈을 것인지, 에세이는 앞으로 어떤 선택들을 할 것인지.... 많은 것들이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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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깊은 삶의 교감을 말하는 현대판 고전
얼마 전에 영화 역사상 가장 이례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무명 배우, 저예산, 적막한 스토리, 다큐라는 가장 최악의 조합인 한 영화가 일대 파장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바로 <워낭소리>이다. 산골에서 살고 있는 한 노부부와 그들의 늙은 일소의 우정과 감동을 그린 이 영화는 특별한 스토리 전개도 없고, 대단히 화려한 장면이 없음에도 관객들의 마음속에 오래 잠들어 있는 ‘진정한 인간애’를 자극하였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대박’을 터뜨렸다. 이 영화가 관객들을 울릴 수 있었던 것은, 인간과 동물이라는 관계 속에서 형성될 수 있는 ‘말없는 눈빛 우정’을 정말 제대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나 역시도 먹먹한 가슴을 잠재울 수 없어 울었다. 동물은 아니지만 애니메이션 <월,E>도 그런 맥락이었던 듯하다. 그런데, 이 영화와 같이 ‘말없는 감동’을 선사해주는 작품이 또 하나 탄생했다. 바로 이 소설인 <에드거 소텔 이야기>이다.
아마존, 뉴욕 타임즈 종합 베스트 1위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보다가도 단순히 인간과 개에 관한 우정이라고 쉽게 판단해버려서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표지 디자인에 민감한 나로서는 표지에 만점을 넉넉히 주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들었다. 뛰어난 색감에서 오는 감동과 한 남자와 그 옆에 나란히 걸어가는 개의 애틋함은 책에 손이 여러 번, 아니 늘 가지고 다니고 싶을 만큼 아름답다. 조심스럽게 펼치는 순간, 나의 머리와 가슴으로 다가오는 이 놀라운 소설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처음엔 속도가 잘 나지 않았다. 마치 들녘에 몰아 붙은 한 어린 시절의 목가적 추억이라 할까. 그런 느낌으로 소텔 가족들을 소개하고, 에드거 탄생을 말하며, 앨먼딘이라는 충실한 개 이야기를 물 흐르듯 읊는다. 정말, 읊는다는 표현이 적합한지도 모르겠다. 나는 문장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씹으면서 읽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 소설도 엄청난 두께와 양에 비해, 씹을 거리가 너무나도 많았다. 그만큼 문장력과 문체 자체가 상당히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뚜렷한 배경묘사는 물론이거니와 삶과 운명에 뒤흔들리는 등장인물들의 심리 묘사는 독자들이 이 한 소설, 아니 ‘에드거 소텔’ 이란 캐릭터에 미친 듯이 빨려 들어가도록 만들어 준다. 따뜻하면서도 차갑고, 감동적이면서도 냉정하다. 아, 이러다 정신이 혼미해질지도 모른다.
‘하느님의 비밀’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말 못하는 아이가 된 주인공 에드거와 그의 충견 앨먼딘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인 것 같다. 손으로 표현하는 그만의 세계에서 그는 주변의 모든 것을 깊이 이해하고 탐닉한다. 오히려 그런 능력을 타고났기 때문에 더 괴롭고 힘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중후반에 갈수록 갑자기 급변하는 전개는 그가 얼마나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그리고 이해하기 싫은 휘몰아치는 폭풍 같은 느낌이지만 끝까지 난 그의 편이 되어주었다. 데뷔 소설에서 이런 캐릭터를 창조하다니, 그저 작가의 능력이 탐날 뿐이다.
이 책을 소개할 때 현대판 <햄릿>이란 수식어가 끊임없이 붙어있다. 뭐, 그렇게 볼 수 도 있겠지만, 내게는 그저 에드거 소텔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의 이야기의 중심에는 가족과 가족 이상의 우정을 가진 개들이 있다. 인간의 끊임없는 애정의 결핍이 모든 것의 시작이 아닐런가한다. 날카로우면서 치밀한 구성력과 부드럽고 다정한 말투 속에서 오랜 교감의 끝을 맛보았다. 이렇게 깊이 있는 작품들은 우리가 늘 상 찾고 있는 명품 고전들처럼 오래도록 독자의 기억 속에서 살아 숨 쉴 것이라고 믿는다. 그 믿음에서 나는 또 다른 깊이를 찾는 여행을 계속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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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 보여? 어때? 뭔가 훈훈한 느낌이 들지 않아? 뭐랄까, 약간 목가적이면서 서정적인 느낌이 물씬 배어나오지? 그래 맞아. 책도 그런 분위기야. 내용 자체는 그와 좀 다른데 아이러니하게도 소설을 이끄는 분위기는 서정적이야. 서정적이고 서사적이지. 차분하고. 그러니까 작품을 잘 이해하고 있는 제대로 된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지. 게다가 말이야. 제목도 그렇잖아? 스토리란 말이야. 대체로 무엇무엇 스토리, 그러니까 이야기라는 제목을 가진 소설들은 서사적이라는 느낌을 주곤하지. 좀머씨 이야기 빼고. 아, 뭐. 좀머씨도 분량이 짧긴하지만 굉장히 서사적인 작품이긴 하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제목이 아주 마음에 들었어. 딱 필이 왔다고나 할까? 저자에 대한 기본 정보가 없을 땐 제목이 아주 중요하거든.
이 리뷰엔 1권에 대한 얘기만 적을 거야. 책이 두 권짜리거든. "한 작품의 리뷰를 책이 두 권이라고 두 번 쓰는 거야?" 라고 질문하는 인간들 더러 있었어. 그때마다 내가 말했지. "넌 그럼 도쿠가와 이에야스 32권 읽고 달랑 리뷰 하나에 내용을 담을 수 있겠냐?" "그건 다르지." "다르지 않아."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지. "이 멍청아." 나는 늘 그런 식으로 말하니까. 재수없게. 그런데 말이야, 분권되는 책에는 조건이 하나 있어. 두 권, 혹은 그 이상으로 분권이 되는 경우에는 그만한 이야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거지. 개뿔 이야기랄 것도 없는 쓰잘데기 없는 내용만 잔뜩 담겨서 두껍기만 한 소설을 분권 해놓으면 뚜껑이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는 거야. 알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는 뚜껑. 다 죽는 거야. 자, 그런 면에 있어서 이 소설은 두 권으로 분권되는 게 옳아. 으흠, 내용이 아주 풍부하거든. 이야기가 개미떼처럼 기어가지.
개 좋아해? 나는 말이야.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어. 어떤 때는 좋고 다른 때는 아니니까. 아무튼 한가지 확실한 건 나는 개나 고양이가 노는 몬양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걸 좋아한다는 거야. 게네들 좀 어이없이 놀잖아? 혼자 자빠지고 뒹굴다가 미친듯이 뛰어다니고 말이지. 난 이상하게 그거 보고 있는게 좋더라. 하루 종일 보래도 보고 있을 수가 있지. 그러다가 물론 발을 틱, 걸어서 자빠트리는 재미도 놓치지 않고 말이야. 아무튼 내가 개랑 좀 잘 놀아. 나도 개 같이 놀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게네를 키우지 못하는 건, 게네가 보는 것만으로 자라지는 않으니까. 이 작품의 첫 번째 매력이 그거야. 개가 나오지. 작가가는 개에 대해서 잘 알기도 할 뿐더러 개의 몸짓 묘사가 아주 좋아. 그 묘사를 보고 있노라면 개들이 하는 꼴통 짓들이 선하게 떠오른다니까? 기분이 묘해. 목구멍 안쪽이 간질간질해지기도 하고 말이야. 이히히. 일단 소설의 초중반엔 다른 무엇보다 그 점에 푹 빠졌던 거 같아. 목가적이고 나른하며 행복하고 따뜻한 느낌의 소설이라고 생각했어. 이야기는 한동안 그렇게 차분하고 나긋나긋하게 진행이 돼.
삼대에 걸친 이야기야. 물론 주로 에드거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래도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어 내려오니까 삼대가 맞긴 해. 이 책의 두 번째 매력은 바로 그 에드거 라는 녀석이야. 아우, 이 녀석. 아주 매력적인 캐릭터인거야. 이 소설에서 가장 성공적이라 보여지는 요인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뚜렷하고 선명한 에드거라는 인물이거든. 이 녀석을 탄생시켰다는 점 하나만 두고 보더라도 작가의 데뷔 소설이라는 게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잔상이 강한 녀석이야. 그래. 작가의 데뷔작이래. 이 소설이. 그런데 말이야. 이 작품을 읽고나면 데뷔작이라는 말 자체가 별로 의미가 없다고 느껴져. 백 편을 써 놓았다가 처음 발표한 게 이 작품이라도 데뷔작이 되는 걸 테니까. 혹은 한 작품으로 10억 번 정도 퇴고하면 세련된 작품이 탄생하듯이 말이야. 그러니까 내 말은 아마추어 솜씨가 아니라는 얘기야. 일단 앞서 말했듯 캐릭터가 살아있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솜씨가 좋아. 자연스럽고 매끄럽지. 가장 중요한 건 완급 조절을 하고 있다는 거야. 천천히 흘러가다가 갑자기 확, 독자를 끌어당기지. 그리고는 그 몰입으로 한동안 끌고가다가 또 탁, 풀어준다니까. 이런 건 말이야, 초짜 작가에게서는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기술이거든. 특히, 그럴만한 사건이 아닌 걸로 그렇게 만드는 건 정말 대단한 필빨이야. 대작가들의 공통점 중에 하나가 그거잖아. 요란 법석할 만한 사건이 아닌 걸로 마치 지구가 멸망할 것처럼 긴장감을 증폭시키는 재주 말이야. 게다가 1권만 480쪽에 이르는 분량이야. 적지 않지. 2권도 비슷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쓸모없는 부분이 없다는 게 또 처녀작이라고 믿을 수 없는 이유지. 대체로 초짜 작가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주체를 못하는 데 이 양반은 그게 잘 통제되어 있다는 말이야. 바로 그때문에 작품 전체가 잘 정리된 느낌을 주는 거고 그래서 안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거 같아. 또 있어. 작가의 센스가 감각적이야. 볼까?
<요즘은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는 받아들이는 게 더 많은 듯 보이는, 슬프고 근심 어린 눈빛이었다.>
이건 앨먼딘이라는 강아지의 눈빛을 설명한건데 강아지가 나이가 들어서 어릴 때의 또렷한 눈빛이 변한 걸 저렇게 표현했어. 어때? 굉장이 깊이가 있는 문장 아냐? 맞아. 이야기가 매끄럽게 진행될 뿐만 아니라 이야기에 실린 내용이 제법 깊이가 있다니까. 표현자체가 조심스럽고 사려깊지. 또, 조금 아마추어적으로 까놓고 드러낸 문장이긴 해도 이런 것도 있긴 해.
<사람이 사랑에 빠졌을 때 그 시간의 절반은 사랑의 현실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생각으로 보내는 거야.>
통찰력있는 말쌈이지. 상당히 많은 부분이 개들의 행동과 묘사에 할애되는 데 말이야, 가끔 저게 개들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 그러니까 뭐랄까, 우의적인 표현이랄까? 그런데 이건 작가가 그런 의도를 쓴 건지 아닌지가 확실하지 않아서 꿈보다 해몽이 될 소지가 다소 있어. 그래서 그 얘긴 관두자. 각자가 읽고 느끼는대로 생각하는 게 가장 좋을 거 같아. 어쨌든 순문학적인 견지에서 보자면 저렇게 다각적인 해석이 가능한 소설들을 좋아라들 하시니까 말이지. 그래야 평론가들이 호평을 할 때, 날개를 백 개쯤 달아서 공중에 날려 보내거나, 작가도 몰랐던 철학적인 해석을 줄줄이 비엔나 소세지처럼 달 수 있으니까. 같이 먹고 사는 거지 뭐. 피식.
중후반부를 넘어가면서는 드디어 평범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해. 그리고 그 사건이 작품의 전체를 지배하게 되는데 말이야. 이 양반 참, 대단하다고 생각되는 건, 그것도 확 뒤집는 분위기로 가는게 아니라 찬찬히 마치 물속에서 잉크 풀어지듯 서서히 색깔이 달라지는 거야. 이야기들이 막 앞으로 달려나가고 싶어서 낑낑대는 걸 뒤에서 잘 붙잡고 조절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조금씩 끈을 풀어주지. 그러니까 1권의 끝에 도달하면서 마치 옛날 자동차처럼 라디에이터 앞에 크랭크를 걸고 서서히 시동을 거는 거지. 그 다음 달려주시는데 그건 2권에서도 이어질 거야. 그리고 말이야. 보통 나는 1권을 읽고 2권을 읽기 전에 리뷰를 쓰는데 이 책은 그냥 2권까지 다 읽었어. 뭔 말인지 알지? 2권은 1권하고 또 분위기가 달라.
자, 그런데 문제가 없는 건 아냐. 내 생각엔 번역의 문제가 아닐까 싶어. 만약, 이 책의 원서가 정말 매혹적인 대서사"시"라면 말이야. 내가 종종 리뷰에서 번역 문제를 거론하잖니. 그건 말이야. 말도 안되는 문법을 구사하는 쌈마이 번역가들이야 당연히 욕 좀 먹고 반성해야 하는 거지만, 이 소설의 경우는 좀 다른 부분이야. 가령 코맥 매카시의 작품이 그렇지. 김시현이라는 번역작가는 그 작품을 번역하면서 그야말로 개고생을 했다고 털어놓았는데 딱 봐도 고생했을 것 같았거든. 매카시 할배의 문체가 그러니까. 이건 말이지 단지 영어를 한글로 변환하는 과정의 문제가 아니거든. 원서의 느낌을 잘 살리면서 전달하는 문제에 해당되는 거니까. 이건 영어 실력이라기 보다 문장력, 혹은 번역가의 센스에 해당되는 문제니까. 결국, 번역자의 번역 실력은 기본이고 한글로 구사해내는 문장력이 뒷받침 되어야 소화 가능한 작품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게하는 작품이라는 거지. 매카시의 작품이 말이야. 그런데 이 작품도 약간 그런 냄새가 나. 대체로 매혹적인 문장을 구사하는 영문 원서를 한글로 번역할 때 겪는 어려움이라고 추측되지. 이 작품은 그게 불행히도 완성도가 높다고 느껴지진 않네 그랴. 다소 난해한 문장이 좀 있어. 뭔가 생략된 느낌이랄까? 건너뛰는 느낌이랄까. 확실히 쉬운 문제가 아니야. 말하자면 네이티브와 같은 독해력을 지닌데다가 오정희같은 문장 이해력을 지녀야 하는 걸테니 말이지. 어쨌든 간에 재미있어. 이 책. 적어도 두께가 실감나지 않는 정도는 돼. 내가 말하는 모든 좋은 소설이 그렇듯이 이 작품도 이 작품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어. 그래서 마음에 들어. 그런 면에서 역시 번역의 공을 높이 사야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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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마다 강한 색깔들과 큼지막한 글씨들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려고 노력하고 있다. 서점에도 상업주의의 물결이 뻣치지 않을수 없고, 저마다 입양되기를 원하는 책들은 새부모를 기다리는 아이들만큼이나 열정적인 눈망울로 서점가를 지나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사람들은 그런 강렬한 열망을 담은 눈망울에서 아름다움을 느낄지 모르지만, 나같이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들은 그런 눈망울에서 부담감을 느낀다.
에드거 소텔이야기라는 지극히 평범한, 전혀 자극적인 단어가 포함되지 않은 제목의 책을 발견했다. 은은한 목가적인 풍경이 담겨 있는 눈에 잘 뜨이지 않는 표지를 단 책이다. 두권. 한권당 거의 500페이지. 약 1000페이지에 달하는 두툼한 분량이다. 상당한 서사적 구조가 담겨있을만한 책이기도 하다. 차분한 제목과 표지. 그리고 두툼한 두께와 좋은 질감이 읽고 싶은 마음을 당기게 한다.
책을 열자 놀랍게도 첫머리에 우리나라의 이름과 낮익은 우리나라의 도시명칭이 나온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에필로그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출판사가 우리나라 독자들의 관심을 끌려고 내놓은 판매전략은 아니었다. 이 책의 전반적인 이야기 구조와 이 책이 서술하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할때 우연히 선택된 미국인의 관점에서 볼때 충분히 이해가 가는 선택이었을 뿐이다.
책은 매끄럽지만 기교를 부리지 않고, 평범한 이야기들로 연결되는 느린 템포로 진행된다. 너무 많은 자극적인 문체에 적응해 있던 독서문법이 이 책에 적응하기까지 한 100page 가량이 걸렸다. 그리고 그 뒤로는 이 책이 나를 이끌어가는대로 편안한 마음으로 이 책이 들려주는 이야기 여행을 듣기로 마음먹었다. 흥미위주의 사건들이 거의 없는 이 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랄만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다.
책을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1000페이지에 달하는 내용을 시종 흥미진지한 내용으로 가득 채우는 것은 단순한 글 재주나 반전을 동원한 흥미위주의 책으로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바로 그런 일을 해낸다. 그 비결은 책이 전하는 감동과 무게에 있다. 이 책은 극히 느린 템포로 아주 제한된 등장인물만이 등장한다. 나머지 잠시나타났다 사라지는 소품같은 엑스트라들... 근본적으로 가족에 관한 이야기. 그래서 가족으로 구성하는 몇몇 사람들간에(그리고 그들이 키우는 개)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그런데도 할말이 이토록 많고, 사람의 관심을 끝까지 붙잡아 놓는 매력을 가진다는 것은 이 책이 그만큼 탄탄하다는 말이다. 현대소설에서 보여지는 흥미를 돋구기 위한 매끄러운 문체, 극적인 반전, 이야기가 배배 꼬이는 비밀스러움, 다양한 에피소드들 같은 것을 전혀동원하지 않고도 무척 흥미롭고 무척 재미있다. 느린 호흡으로 천천히 끝까지 다 읽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게 만드는 책이다. 그제서야 이 점잖은 책의 표지에 써여있던 평소 눈여겨 보지 않는 그 칭찬의 글들이 다시 생각난다.
"'선택' 과 '운명'에 관한 매혹적인 대서사시." 이 책은 바로 그런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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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거 소텔 이야기
역자 후기를 먼저 읽은 개와 깊은 교감을 나누는 이야기
책이 출간된다는 이야기는 이미 오래 전에 들었다. 오프라 북클럽에도 선정되고 아마존 뉴욕타임스 종합 베스트셀러 1위 등등 오늘날 미국에서 출간 된 책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칭찬]하는 형용사가 따라다니는 책이다. 내심 기대하던 차에 블로그를 돌아다니다 역자의 블로그를 만났다. 캐나다사는번역가아지매집(http://blog.naver.com/crisol). 이 곳이 이 책의 번역가 권상미님의 블로그다. 이미 "오스카와오"로 폭풍이 지난 지 얼마되지 않은 터에 우리는 또 다시 행복한 책읽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번역을 끝내자마자 "이 감동이 다하기 전에 - 북클럽을 만들어 토론하고 싶은 이야기 (http://blog.naver.com/crisol/10041878036)"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이 책은 인간과 개에 관한 이야기다. 대를 이어 개농장을 하면서 훈련이 된 성견을 분양한다. 그 집안에 말을 못하는 아이(에드거)가 태어나고 집을 나가 따로 생활하던 삼촌(클로드)이 돌아온다. 아이의 아버지가 죽으면서 한적한 농장의 평화는 깨어진다. 이 책의 매력은 줄거리나 구성보다 감정의 세세한 부분을 놓치지 않는 묘사력, 개의 눈과 마음을 빌어 물 흐르듯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표현력에 있다.역자의 말대로 저자 로블레스키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웅변하지 않는다. 담담하게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동물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만이 가능한 동물과의 교감을 잘 그려낸 소설이다. 개를 키워본 적은 없지만 고양이와 함께 생활하는지라 그 아이들과 함께 부대끼며 생활한다는 것은 그들과 생각을 나누는 행위(교감)라는 것을 안다. 서로 도움을 주고 받고 서로 위안받는 일이지 사람이 그 아이들을 키운다 라고 하는 일방적 통행이 아니라는 것을.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이 "그래 맞아, 그런 느낌이지" 라며 동물과의 교감을 충실히 표현한 부분들에 대한 감탄이었다. 내가 개를 좋아할 거야 라는 상상만으로는 그런 글이 나올 수 없다. 작가의 어린시절 어머니가 작은 농장을 사서 개를 키워 개와 함께 보낸 시간들이 소설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어린 시절의 경험 이상의 생활이 이 소설을 가능하게 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선택의 문제를 아직 어리고 말도 못하는 아이가 겪기에는 버거워 보인다. 말 못하는 아이 옆에 항상 개가 있었고 아이의 깜냥이 닿지 못할 것 같은 문제도 헤쳐나간다. 표지 사진의 넓은 들판을 개와 함께 걸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은 이 소설의 주제를 담고 있다. 그 그림속의 아이는 앞을 보고 걸어가고 개는 아이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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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라 북클럽이 선택한 소설. 에드거 소텔의 할아버지는, 위스콘신의 시골에서, 자신만의 소신과 안목으로 골라낸 개들을 교배해서 인간을 배려하는 마음이 특출난 명품견을 만들어낸다. 에드거는 청각을 포함한 다른 부분은 모두 정상이나 태어날때부터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수화로 부모님이나 개들과 의사소통을 해오고 있다. 가업을 이은 아버지와 트레이닝을 담당하는 어머니에게 사랑받으며 평화롭게 살아 왔지만, 아버지의 남동생인 클로드가 갑자기 돌아오고 나서부터 조용하던 집안의 평화가 깨지기 시작한다. 아버지가 급사하고 나서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약해져버린 모자의 생활속으로 클로드가 비집고 들어온다. 에드거는 삼촌인 클로드가 아버지의 죽음에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의심하지만, 그것을 폭로하려던 계획이 실패하고 비극을 낳게 된다. 에드거는 충성스러운 세마리의 개와 함께 도망자가 된다. 더 이상 상세하게 설명하면 내용을 다 이야기하게 되므로 그만두지만, 70년대의 미국이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문호들의 작품이나 햄릿을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책이다. 때때로 문학적으로도 매우 뛰어난 부분도 있고, 마음을 빼앗길듯한 디테일한 풍경의 묘사도 있다. 특히 인간과 개와의 교감이나, 명견에 대한 이야기들을 그리고 있는 부분을 보면 작가가 소텔가의 명품견들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오랜 세월에 걸쳐서 준비와 구상을 해왔음을 엿볼수 있다. 이 가상의 혈통을 이어받은 개들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이것은 인간과 개와의 교감에 대한 이야기이다. 다만, 스토리, 문장, 감동적인 묘사등 훌륭한 부분이 많고 개의 성격 묘사 쪽이 뛰어나 감정이입하기 쉬웠던 데 반해서는, 등장 인물이 이면적이어서 그다지 매력이 느끼지 않는 다. 그리고 결말을 포함한 수많은 사건의 필연성을 완전히 납득시켜 주지 못했던 것 같다. 초대형 작품이 되는 요소가 모두 갖추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면에서는 조금은 욕구불만이 남는다. 훗날 도스토예프스키, 셰익스피어, 카미유, 카프카등의 대문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수 있는 작품이 될 수 있을까. 위대한 책이라는 인상은 강하게 남는다. 감동적이기도 하다. 그래도 역시 엔터테인먼트로서는 어떨런지, 흥미로운 소텔가의 개들의 이야기에 집중해서 스토리를 단단히 조였으면 더 좋았을거라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