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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기본 욕구 가운데 식욕과 성욕 다음으로 강력한 욕구가 독서욕이라는 필자의 말을 실감나게 하는 모처럼 책을 읽는 즐거움과 이 책을 읽지 않으면 후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책이다. 다소 분량이나 내용면에서 호락호락하지는 않았지만 필자가 안내하는 고전속의 여정은 가슴 두근거리면서 그리고 입갓에 웃음을 절로 지우면서 마지막 장을 넘겼을때는 아쉬움으로 남은 책이다. 마치 좀더 뒤 이야기가 있을 것 만 같은 아니 그래야 한다는 아쉬움 말이다.
미국 명문대중의 하나인 컬럼비아대학을 졸업하고 영화평론가로 어느 정도의 사회적 지위를 잡은 필자 데이비드 덴비는 그야말로 우리가 알고 있는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사람이다. 전형적인 중년백인남성이다. 이런 사람이 뭐가 답답해서 졸업한지 3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뒤에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 그것도 다름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이 꺼려하는 인문강좌을 수강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지만, 필자의 선택은 책 제목처럼 정말 위대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필자의 말처럼 이러한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많은 후회감을 안고서 평생을 살아갔을까 할 정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필자는 30여년전 졸업한 자신의 모교에서 1년 동안 대학교향 필수 과목인 인문학과 현대문명강좌를 수강하면서 새삼 느끼게 된 점을 30년전 자신의 모습과도 비교하고 학부 1,2학년들과 수업을 들으면서 그들의 생각과 행동등을 관찰자 입장에서 때론 직접 그 현장에 개입해서 끊없이 토론한 내용들을 가감없이 소개한 일종의 에세이 이다. 특히 고전, 정확히 서양고전에 대한 독서와 토론을 통해서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 지, 그 자신이 30년전 읽었던 당시의 느낌과 지금의 느낌을 통해서 고전이 갖고 있는 엄청난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이러한 고전들을 다름 아닌 위대한 책들이이라고 지칭한 것이다. 호머의 <일리어드>에서 부터 시작한 고전 여행은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로 그 기나긴 여정을 마치게 된다.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는 호머의 대서사시 일리어드와 오디세이, 사포, 소포클레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버질, 어거스틴, 마키아벨리, 홉스, 로크, 단테, 보카치오, 몽테뉴, 헤결, 제인 오스틴, 니체 봐봐르, 콘래드로 이어지는 정말 숨가뿐 인문의 향연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들의 명작들을 다 읽어볼 수 는 없지만 필자를 통해서 간질맛 나지만 꼭 읽고 싶은 충동을 이르키게 하는 일연의 유혹들로 가득차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흔히 고전(동서양 고전을 막론하고)을 상기할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난해하고 지루하고 어렵다는 인식이다. 그래서 그런지 고전은 전문적으로 그 분야를 연구하는 이들의 몫으로 치부해 버리기 일수이다. 하지만 필자를 통한 고전 여행을 하면서 가슴에 와 닿은 고전은 필자의 말처럼 어떨때는 정말 감미롭고 그러다가 격양되고 마침내 흥분감을 감출수 없는 내용들로 가득차 있음을 알게 된다. 물론 고전들이 내포하는 사상은 지금의 시대와는 상당히 동 떨어져 있다고 할 수 있으나 그 시대의 공통적인 경험의 산물이고 또한 한 시대를 혁명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장본인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을 것이다. 지금의 잣대로 고전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잣대로 고전을 읽으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지식의 보고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고전을 통해 우리는 당시대 인물들과 그 저작을 읽었을 독자들과의 교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다름아닌 그네들과의 소통, 이 소통을 통해서 당시인들의 고뇌와 삶을 엿볼 수 있는 매력이 있다. 물론 흔히 말하는 양서라는 개념에서 이러한 고전의 목록에 올라오지 못한 저작들이 그 수준이 떨어 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모든 책은 저자의 사상과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기 때문에 지금 이순간에도 우리가 독서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고전을 통해서 분명, 우리의 철학적 사고와 자아발견을 한 단계 더 끌어올 수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이번 책으로 통해서 고전에 대한 생각을 재정립할 필요성을 느낄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방대한 고전들에 대한 강의가 실현되고 있는 미국의 대학이 다른 한편으론 부럽기만 하다. 또한 그들의 학업진행 방법 또한 많은 점을 생각케 하는 대목들이다. 사실 우리의 대학교육 현실과 비교해 보면 정말 처참할 정도로 그 차이가 많이 난다. 시험점수를 위한 공부가 아닌 진정한 독서를 위한 교육이 그저 부러울 뿐이다. 필자를 따라간 지난 10여일 동안은 모처럼 책을 읽으면서 행복한 감정을 느꼈다. 강의 과목과 저서들을 메모도 하고 소개된 부분들을 다시 한번 음미 하면서 고전에 대한 독서욕이 한 층 더 가슴 깊은 곳으로 부터 쏟아나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할까. 왜 이러한 저작에 대해서 위대한 책이라고 명명하게 되었는지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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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고전과 관련된 강의를 교양과목으로 수강한 적이 있지만, 당시에는 그다지 문학이라던가 고전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무언가 제대로 배워주겠다는 의욕에 넘치고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지나고 보니 그저 학점을 위한 수강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 되고 말았다. 부끄럽지만 당연히 해당 강의에 대해서는 별로 기억에 남는 부분도 없고 지금은 거의 인상에도 남아있지 않다. 단지 강의에서 받은 학점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완전히 무의미한 시간이었다. 뒤늦게 고전에 관심을 가지고 다가가려고 보니 서점에는 관련서적이 무궁무진하다. 공부를 하기에도 충분하고 교양을 쌓으려는 목적을 충족시키기에도 전혀 모자람이 없다. 그렇지만 무엇을 듣고, 무엇을 보든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던 그 시절의, 교수님과 동료들과 함께했던 생생한 강의실의 모습은 그 많은 책들중 어디에도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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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읽기는 생각만큼 쉽지 않다. 표면적인 내용보다는 그 이면의 유기적인 관계와 흐름을 잘 파악해야 하는 이해의 산물이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는 많은 책들이기에 고전은 단순한 '옛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고전은 생소하고 어렵기만 한 케케묵은 옛것이 아니다. 오늘의 우리에게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좌표를 재정립하게 만들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자기 존재의 소중한 면면들을 되찾게 한다. 62p -
고전을 통해 온고지신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생소함과 어려움. 그것은 고전 앞에 놓인 장애물이 아니라 또 다른 매력이 아닐까? 물론 현대적인 문체로 문장들이 눈에 쉽게 들어온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그런 책들은 뚜렷한 차이도 없이 오히려 재미가 없을 것 같다. 어렵다는 것에 부담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앞으로 알아가는 재미가 더 많다는 것이니까. 그래서인지《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이 너무나 반갑다. 고전 읽기의 즐거움으로 안내하는 멋진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는 점에서 큰 점수를 주고 싶다.
책을 순차적으로 읽는 것도 좋지만 자신이 들어봤거나 아는 인물을 중심으로 편하게 다가가는 것도 고전 읽기의 즐거움이라 생각한다. 내 경우는학교 다닐 때 '교육철학 및 교육사' 수업에서 소크라테스, 루소, 듀이, 공자, 석가 등의 교육에 대해 공부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의 목록 중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루소 편을 먼저 펼쳐 읽어 보았다. 그 다음에는 셰익스피어, 홉스와 로크 단테, 흄과 칸트. 이렇게 읽다 보니 호기심이 더욱 커지고 나머지 인물들도 편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지금에도 느끼는 것이지만 그 인물이 말한 주장들, 사상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주변의 것들도 함께 바라보며 이해하면 도움이 된다. 책을 읽다 보면 저자가 받았던 수업 내용, 생각만 가득한 것 같지만 차근차근 들여다보면 저자가 자신의 말로 폭넓게 아울러 전해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 역시 교육 이론은 물론 각각의 인물들이 살았던 시대상이며 대표적인 저서들,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든 것을 훑어야했던 수업시간을 기억한다. 교육 이론만 다뤄도 방대한 양인데 굳이 시간을 쪼개어 그렇게까지 해야했는지 당시엔 의문이었으나 배우고나니 꼭 필요한 과정이었음을 알았다. 그런 시대적 상황이었기에 이상적인 이론을 내놓는 것이었고, 다음 사람들이 한계점을 보완해 더 발전된 생각들을 내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는 만큼 세상이 보인다. 고전을 알기 위해 이 책이 주는 재미는 꽤 쏠쏠하다. 생각을 정리하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스테판슨 교수가 있기에 수많은 사상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다. 학생들에게 던지는 질문에 나 역시 질문을 받은 기분으로 눈빛을 피하고픈 마음이 들기도한다. 지금 현재와 동떨어진 이론들이지만 듣다보면 수긍하게 되는 고전 수업들. 하지만 그것은 저자도 느끼는 것이었기에 기분 좋은 동질감을 느껴본다.
-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흠잡을 데 없이 정확한 방식에 시야가 탁 트이고 그 가르침에 가슴이 벅차 지금 읽고 있는 텍스트의 신봉자가 되었다. 일주일 동안은 말이다. 우리는 합리주의자, 경험론자겸 회의주의자, 헤겔주의자, 맑스주의자가 되었다. 이런저런 정체성을 연속적으로 취하면서 우리는 참으로 행복한 무책임감을 누렸다. 547p -
길을 모를 때 지도가 필요하듯 고전이 막막하다면 이 책을 읽어보면 된다.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이 언제든 나침반, 지도가 되어 무사히 목적지까지 안내해 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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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이라는 매력적인 제목을 가진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960이라는 숫자가 찍혀있었다. 다른 책들에 비해-백과사전 등의 전집류를 빼고- 월등히 두꺼운 색인을 뺀다 하더라도 902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은 결코 한 번에 읽을 분량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거의 전투에 임하는 비장한 자세로 책을 읽었다. 두터운 분량에 결코 질리지 않고, '고전과의 만남'이라는 책의 내용에도 지지 않으리!라는 자세로 출퇴근 길에 짬나는 대로 들고 다니며 읽었다.
처음에는 부담스럽고, 텁텁한 책이었다. 내가 이 책에 제시된 독서목록의 책 한 장이라도 읽었다면 이토록 괴로워하며 책을 읽지는 않았으리라. 영문학에 대해서는 무지한데다, 호머나 플라톤, 니체 같은 이들의 저작들은 나에게는 너무나 '먼 당신'에 지나지 않았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이 나와 같으리라 생각한다. 대학생이든, 성인이든, 일부러 시간을 내서 인문학 서적, 그것도 고전을 읽는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케케묵은 고전을 읽기에는 우리가 읽어야 할 책들이 너무나 많이 쏟아져 나오는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고전'은 언젠가 한 번쯤 꼭 읽어야 할 도서 목록으로 기억된다. 왜일까? 이 책을 선택할 권리가 있는 독자와 달리, 이 책에 소개된 강좌를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하는 학생들이 첫 수업 시간에 듣는 말이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여러분은 무슨 정치적 이유 때문에 여기에 온 게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기적인 이유로 여기에 온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아를 확립하게 위해 여기에 왔습니다. 여러분은 자아를 물려받는 게 아니라 창조하는 겁니다. . p80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할 이유는 '자아를 확립'하기 위해서다. 자아란 물려받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창조하는 것이다. 그 '자아 창조'의 과정에서 바로 고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 하필 고전인가? 필독서로 꼽히는 고전들도 결국은 '개인의 기록'이다. 이 개인의 기록들이, 인류의 지성사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 '영향'이 굳어져 하나의 관습이 되었다. 칸트의 정언명령도, 밀의 자유론, 맑스, 흡스 등등의 사상가들이 당대에 내놓은 '기록'은 하나의 혁명이거나, 무시받는 쓰레기이거나 했었다. 즉, '지극이 개인적인 저작물이고, 개인적인 특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글'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은 어떠한가? 몇 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호머의 [일리아드]를 놓고 격렬한 토론이 벌어지며, 몇 세기 전까지만 해도 존재조차 희미했던 여류작가 울프의 저작들이 '고전목록'에 포함되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생각'들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전 목록들은 결국 이러한 '변화의 기록'이다. 이들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당연시 여겼던 것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으며,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치열한 자기비판을 통해 지금 현재 살아가는 '사회'를 알아가는 것이다.
교육의 목적은 단지 지식이나 사고 양식을 전수하는 게 아니라 인격을 단련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때의 인격이란 결국 힘든 경험이나 심지어는 파국적인 경험에 대처할 수 있는 인격을 말했다. 그런 경험을 그냥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그것에 대처하고 그것을 능히 감당해낼 수 있는 인격 말이다. 컬럼비아 대학이 모든 학부생들에게 [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 [리어왕], [욥기] 같은 극단적인 작품들을 읽으라고 한 것도 부분적으로는 그들에게 인간 능력의 극단을 알려주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책들을 읽으면서 인내와 자부심의 장관을 보고 느꼈다. 이런 자질들 없이는 고상하거나 영웅적인 삶이란 없다는 것을우리는 알았다. 서구의 가장 위대한 작품 몇몇은 적어도 이만큼의 실용적 지혜를 안겨 주었다. 만일 우리가 두려움 때문에 자유를 잃었다면 싸워서 되찾아야 한다고 말이다. p.747
진정한 교육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지식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바로 '인격 수양'이었다. 교수들이 자의적이든, 심각한 토론 끝에 선택한 고전이든 모든 '고전'들은 우리에게 인격을 수양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한다. 이러한 고전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대학의 학생들은 행복하다. 우리보다는 폭넓은 인격 수양의 기회를 제공받으니까 말이다. 우리나라에도 다행이 이 책이 번역되어 우리도 '인격 수양'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두꺼운 책이고, 읽기 힘든 책이다. 그런데 읽다 보면 낯설고, 멀게만 느껴졌던 '고전 도서 저자들'이 가깝게 느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이 바로 '니체'였으니까! 중고교 시절에 '초인'을 읽으면서 대체 이 사람은 뭐라하는 지 도무지 모르겠다! 외쳤던 내가, 데이비드 덴버가 읽어주는 '니체'는 너무나 재미있게 읽고 있었다. 놀랍지 않은가! 이 책은 컬럼비아 대학에서 제공하는 고전 교양 강좌에 대한 '탐방 기록'이다. 데이비드 덴버, 누구보다도 미디어의 축복 속에 살아온 그가 몇 십년만에 모교로 돌아가 '고전'을 향유하며 남긴 기록이다. 이 책에는 현재를 사는 젊은이들이 고전을 읽으며 던지는 의문과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토론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덴버는 때로는 관찰자로, 교수로, 학생으로 위치를 바꿔가며 다양한 각도에서 강좌를 기록한다. 그 점이 이 책의 매력이다. 이 책에 수록된 장장 30여명의 저자들의 책들을 한 권씩 따로 읽으려면 아마 대부분이 고통스러워하며 책을 던져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 저자들의 핵심 저서 중에서 꼭 필요한 구절을 따로 발췌해서 실어주는 자상함까지 보여주었다. 게다가, 그 책을 읽는 방법, 물음을 제기하는 방법등도 함께 제시한다. '고전'은 언젠가 꼭 한 번 읽어야지 다짐했었던 사람이라면 이 책을 먼저 읽기를 권한다. 합본호는 너무 두꺼워서 가지고 다니며 읽기에는 부적합하니, 첫 출간되었던 얇은 책으로 읽는 게 좋겠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멀게만 느껴졌던 서양의 '고전'들이 한결 가까이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책들에 도전하고픈 용기가 솟을 지도 모른다! 나도 그랬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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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교양 필수 강좌 - 호머, 플라톤, 성서, 마키아벨리, 셰익스피어, 헤겔, 울프에 이르기까지 불멸의 고전과 함께 춤추라는 메시지를 담은 책을 말 그대로 기대반, 설레임 반에 뒤섞여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을 시작하였다. 1001년 가을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한 지 30년 만에 학교로 돌아와 열 여덟살 짜리들과 함께 강의를 듣고 그들과 똑같은 책들을 읽는 저자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예전의 그 책들, 예전의 그 강좌들이 변함없이 1961년 컬럼비아 대학 신입생으로 순진하게 멋모르고 처음 수강했던 핵심 교육과정의 두 필수 강좌들이었다. 세월이 흘러 나중에는 이 강좌들이 한편으로는 사악한 압제로 비난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의 보루로 칭송받게 되리라고는 그 시기의 그 누구도 상상치 못햇고 예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책속에 이런 글줄이 있다.
우리가 어른이 되어 피하고자 하는 것 중의 하나가 시험 보는 것이다. 우리는 일단 스물다섯만 넘기면 자신의 약점과 무지는 감추고 강점으로 끌고 나가는 법을 배운다. 본디 모든 어른은 교활한 반칙장이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무엇은 챙겨야 하고 무엇은 떼쳐버려야 할지를, 언제 쉬고 언제 전력을 다해야 할지를 깨친다. (444p)
책속의 글줄을 읽는 순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의 정답을 콕 찍어내지 못했던 것을 발견이라도 한듯이 한동한 그 글줄을 여러번이나 되뇌어 읽었다. 그 도리를 깨우치지 못해서가 아니라면 아마도 그것을 감추고 싶은 마음이였을까? 아이들에게 없는 순수함이 어른이 되면 곧바로 그렇게 영리한? 교활한? 오로지 나를 중심으로 모든것이 이롭게 돌아가겠끔 세상을 지배하려 드는것일까? 여러가지 복잡한 글줄이 한데 얽혀 내 머리속까지 복잡하게 만들었다.
책속에서 이런 질문을 얻었다. <이책을 서양의 정전에서 제외되기를 바란다. 문제는 이런 비인간화를 가리는 소설, 인류의 일부를 비인격화하는 소설을 위대한 작품으로 부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즐겨 읽는 소설분류는 다분히 다양하다. 읽는것만으로도 온 몸에 전율을 가한듯이 찡한 감정을 느끼면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게 만드는 로맨틱한 사랑이야기를 주제로 한 소설들과 살인사건을 추리해나가는 정탐이나 탐정소설, 기타 등등 해서... 그런 소설들을 여러분이라면 양서라고 지적하고 양서목록에 넣겠습니까? 라고 내가 되려 질문을 하고 싶다.
불쾌한 논문이나 책 하나로 서양 문명이 끝장나는 것이 아니며 자유주의 휴머니스트라면 자신과 상치되는 관점들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하고 심지어는 밀이 설파하듯 귀를 기울여야 마땅하다. 다른 많은 정치화된 비평가들을 포함하여 내놓은 것은 단지 이런 저런 작품에 대한 다른 해석이 아니라 문학 자체의 도덕적 정당성에 대한 공격에 해당한다. 물론 문학이 원기 왕성한 건강을 누리고 있다면 그런 읽기들을 대수롭지 않게 넘길수 도 있을것이고, 예술작품에 겨누어지는 분노도 한때의 학문적 유행이나 학술회의장에서 이목을 끌려는 그러한 발언쯤으로 치부할 수 있을것이다. 더구나 문학이 사이버페이스속으로 사라지거나 닥치는 대로 삼키는 대중 문화에 의해 속절없이 주변으로 밀려날지도 모르는 시대에 대학은 문학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여야 한다고 책속에서는 강조하고 있다. 좋든 싫든 문학의 미래는 교수들에게 달려있다, 한데도 근자에 일부 좌파 학자들은 과거에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들을 복원하는데 열중하느라고 과거에 들렸던 목소리마저 깎아내리기 시작했다.
요즈음 대중문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책을 즐겨 읽는 사람들에게마저 사이버스페이스가 미치는 영향은 정말로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심각하게 분석하고 따져본다. 이전에는 공부하려고 책을 뒤적이면서 열심히 읽고 외우고 했다면 요즈음 공부하는 방식마저 순조롭게 검색하고 찾아내는것으로써 그 방법마저 달라져가고 있다. 하물며 대중문학에 가해지는 험난한 영향을 도서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자세히 알아볼 수가 있었으며 인간의 기본 욕구 가운데서 식욕, 성욕 다음으로 독서욕이라고 사람들이 독서를 하는데 그 독서욕을 환기시키기 위해서라도 자연스럽고 우리 삶의 중심으로 되돌아가 즐거움과 독서의 향수를 진정으로 느낄 수 있는 것만이 진정한 양서의 근본이 아닌가 하는 답을 찾을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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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책들과의 만남 – 데이비드 덴비, 씨앗을 뿌리는 사람 마흔 여덟, 영화평론가 데이비드 덴비의 콜롬비아 대학 고전 수업 노트. 우리는 그의 노트를 통해 호머, 플라톤, 성서, 마키아벨리, 세익스피어, 헤겔, 울프에 이르기까지 불멸의 고전을 만나게 된다. 고전을 왜 읽는가. 여기, 내 마음을 콕 집어 내어 표현한 글이 있다. 우리가 문학을 읽는 것은 궁극적으로 즐거움을 얻는 것과 더불어 (중략)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안다는 것을 뜻한다 – 854쪽 고전 읽기는 ‘자기 확장의 약속’ 자기 확장이란 자아 형성을 포함하여 자신의 성장 잠재력을 최대한 키우고 실현하는 것이다. – 898쪽 우리가 울프를 읽는 만큼 울프는 우리를 읽는다. 우리가 울프를 잘 읽을 때 우리 자신도 잘 읽게 된다 -902쪽 짧은 생각하나를 보태자면 ‘사람 읽기’라 할 수 있겠다. 고전에 모든 이야기들은 우리의 가능태 속 이야기들이다. 우리의 몸은 결핍된 영양소를 자연스레 끌어 당기게 하는 능력이 있는데, 어쩌면 우리가 고전을 찾는 것은 현실에 부재에 대한 향상심을 가지는 것, 당연한 일에 대한 영혼의 끌림, 그 발현이기도 하다. 내 속에 갈급한 것들을 고전을 통해 건져 내는 일, 나의 경우는 어거스틴 의 참회록을 읽으면서 기존의 틀이 부서져 내렸다. 내 삶을 고쳐보게 하는 힘, 다시 소유하게 하는 힘. 아마 고전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기도 하리라. 객관의 진실과 객관의 도덕성을 만들어가는 교수와 학생들의 행보는 그런 수업이 존재성만으로도 부러움을 살만하다. 연령 남녀 흑백을 떠난 뒤 끝없는 자유발언, 그들의 Brain storming 식 수업은 나의 아집을 허물고 타인과 소통하는데 좋은 도구라 생각했다. 삼키지 못한 남은 단어 하나. 양가성(兩價性) 그 모호함. 플라톤에 나오는 기게스의 반지가 내게 주어졌을 때 난 정말 ‘정의 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사람’ 이 될 수 있을까. 종교적이든 아니든 자유주의적 기풍은 아이들이 악에 대해 듣더라도 여전히 선을 선택하게 될 수 있다고 여긴다. 사실 그들은 악에 대해 반드시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선을 사랑할 수 없다. 혹은 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 – 157쪽 플라톤 中 여전히 숙제로 남은 사랑. 사랑의 결속은 자애로움과 호의로 굳건해진다. 호의에 근거한 결속은 각자가 의무적인 노력을 기꺼이 준수하는 가운데 사랑과 이끌림의 결속에 가까워진다. – 도덕원리론 내게서도 고전은 저자의 말이 딱 들어맞았다. “고전은 생소하고 어렵기만 한 케케묵은 옛 것이 아니다. 오늘의 우리에게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좌표를 재정립하게 만들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자기 존재의 소중한 면면들을 되찾게 한다. 스스로를 쇄신하고 신장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오래된 새것인 것이다 – 62쪽 900쪽이 넘은 분량의 책이라 읽기에 다소 ‘도전의식’이 필요할지 모른다. 하지만 고전의 정수와 함께 자신의 마음속을 헤아려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책을 덮고 나니 내가 모르고 있었던 세상이 많았구나 라는 생각과 앞으로 읽어야 할 책들의 목록이 새로이 정리된다. 이 또한 고전이 주는 힘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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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나 예일 같은 미국 명문대들이 법학이나 의학, 경영학 전공을 대학원 과정에 둔 것은 전문지식과 기술은 학부에서 인문교양을 충분히 섭취한 뒤 배워도 된다는 판단에서다. 하버드대 케네디행벙대학원의 대통령학 교수 데이비드 거겐은 "시나 소설 같은 문학 강의를 꼭 들어라. 세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고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을 만들어준다."고 말한다. 여기에 더 나아가 시카고 대학은 재학생들에게 강제로 고전 100권씩을 읽혔다. 고전 100권 읽지 않을 경우 졸업할 수 없는 졸업제도 때문에 학생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고전을 읽었다. 하지만 수년, 수십년이 지나면서 시카고대는 3류대에서 명문대로 거듭났고 노벨상 수상자를 100명 이상 배출한 세계가 알아주는 명문대가 되었다.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은 시간이 지나도 의미가 바래지 않고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책, 바로 고전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은 영화 평론가이자 저술가인 데이비드 덴비가 컬럼비아 대학 학부생들을 위한 교양과목인 <현대문명>과 <인문학과 문학> 강좌를 1년 동안 청강한 기록이다.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한지 30년이 지난 후 다시 대학을 찾은 이유는 안정된 직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까닭없이 공허해지는 가슴과 미디어에 매몰되어 잃어가는 정체성, 삶이 고갈되고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라고 밝힌다. 데이비드 덴디는 모교에서 고전작품들을 읽는 교양강좌를 청강하며 고전목록에 수록된 고전들을 읽는다. 이 책은 고전을 읽으며 일어난 모든 사고의 과정을 솔직하게 적어 내려간 독서일기 같은 책이다. 또한 수업을 들으면서 30년전 자신의 모습과 비교하고, 수업에 임하는 학부생들의 생각과 태도, 토론 내용들도 그대로 담았다.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에는 두 가지의 집필원칙이 있다. 첫째는 ‘모든 것을 읽고 정리하되 진정으로 자신을 사로잡은 책에 대해서만 쓴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나 자신의 반응과 강의실에서 다룬 바에 의거하며 2차 자료는 거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스로도 즐겁고 독자들에게도 즐거움을 주려고 전문적인 비평도 피했다고 밝힌다. 데이비드 덴비는 이 원칙을 충실히 지키고 있어 천 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을뿐더러 고전도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예를 보여준다.
미국 대학의 수업 장면은 다른 책을 통해서 이미 느낀바 있지만, 이 책 만큼 생생한 강의 현장감을 전달해주는 책도 없을 것 같다. 컬럼비아 대학 수업은 교수가 일방적으로 설명하지 않는 점과 학생들에게 자기의 생각을 먼저 말하게 한다는 것, 교수는 방향을 제시하면서 깊은 사고를 유발하도록 돕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게 우리와 다르다. 활발한 토론과 논쟁으로 자기 생각을 논리적으로 전달하고 주장하는 학생들이 바로 미국의 저력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는 일전에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후배로부터 들은 경험담과 상반되는 강의실 풍경이라 씁슬하기도 하다. 그 후배에 따르면,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발제를 하는데 발제자들이 하나같이 준비해온 내용을 국어책 읽듯이 '읽는다'고 한다. 진행은 고사하고 자신의 의견조차 제대로, 자연스럽게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토론을 할 때에도 배부분의 학생들이 침묵을 하고 한 두명만 참여한다고 한다. 대학원 강의실 풍경이 이정도이니 대학은 말하나마나 아닐까 싶다. 미국도 학기 초에는 학생들이 머뭇거렸다. 하지만 중반 이후에는 자신감을 갖고 논리정연하게 의견을 말하는 당당한 학생들로 바뀌었다. 이를 보면 꾸준한 교육, 제대로 된 교육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국내 대학들이 지난 3월 신학기에 수강생이 없는 강좌들을 없애면서 폐강의 비운을 맞은 것은 대부분 인문학 강좌들이라고 한다. 순수학문보다는 실용학문을 선호하고, 실용학문이 인기좋은 우리의 대학 풍경은 사람을 키우고 인재를 육성하는 장이 아니라 직업을 갖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고전은 고사하고 인문학을 가르치고 배우지 못하는 사회가 가는 방향은 어디이며,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일까. 많은 대학생들과 대학에 적을 두고 있는 관계자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우선 나부터 미루기만 했던 고전을 차근차근 한 권씩 만나봐야 겠다.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은 지적 저수지에 풍덩 빠지고 싶은 사람을 고전으로 유혹하는 책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유혹에 기꺼이 넘어가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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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짧고 읽어야 할 책은 많다. 무엇을 읽을 것인가? 아니, 그전에 ’읽어야 할 책’이라는 것이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가져본다.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은 읽어야 할 책이 있다고 말한다. ’고전 때문에 고전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는데,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은 다른 말로 바로 [고전과의 만남]이다. 근대와 현대를 지나, ’급변’이라는 말조차도 무색한 세상에서 변화의 주도권을 잃어버린 우리는 매일 적응하기도 급급한데, 매일 신간과 함께 쏟아져나오는 낯선 이론을 섭렵하기도 어려운데, 고전 읽기는 여전히 유효한가, 유효하다면 어째서 그러한가를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다.
아마도, 찬반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예전에 내가 속한 조직에서 정규교육과정을 신설하는데, 커리큘럼을 구성하는 기획회의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회의 과정에서 기본 방침에 의견차가 생겨 자연스럽게 두 그룹으로 나눠지면서 논쟁이 붙었다. 한쪽 그룹은 이론과 기초가 되는 학습에 주안점을 두어 철학과 고전어 등과 같은 수업을 개설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반대편 그룹은 현장에서 바로 활용 가능한 실용적인 수업을 더 많이 개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이었다. 나는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을 읽으며, 이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은 듯 하다.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의 저자 데이비드 덴비는 영화 평론가이자 저술가로 활동하다가 왜 마흔여덟의 나이에 다시 고전읽기 수업을 청강하게 되었는지 책의 머리말에서 아주 길게 설명한다. 그중에서 나의 뒤통수를 한대 후려치는 듯한 그의 고백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미디어가 정보를 주었지만 1990년대의 정보란 덧없고 불안정한 것이 되어버렸다. 정보란 것은 일단 어디든 쓰이게 되면 금방 분해되어, 그 조각들 일부는 가치가 커지지만 나머지는 쓰레기통 속으로 버려진다. 그 누구의 정보도 안성맞춤일 수가 없는데, 그것이야말로 지금 미국인들이 불안과 안달로 반쯤 미쳐버린 듯 보이는 많은 이유 중 하나이다. (...) 금세기 말에, 아니 나아가 이번 천년의 말에 이르러 미디어가 문학의 영역을 통째로 점령하고 문학을 밀어내려 하는 상황에서, 내 역겨움에는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강렬한 감정들, 즉 향수, 회한, 분노, 심지어 절망이 뒤섞여 있었다." 정보를 얻는 것과 정신적 기반의 토대를 다지는 일은 비슷한 듯 보이지만, 전혀 다른 결과물을 낳는 두뇌 활동인 것이다.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은 컬럼비아 대학 학부생들을 위해 개설된 교양필수과목인 <현대문명>과 <인문학과 문학>을 청강한 저자의 강의노트 같은 기록이다. 나에게 신선했던 충격은, 목차에 위대한 책의 제목들이 선별되어 기록되어 있을 것이라는 나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재밌게도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제외한 나머지 목차는 모두 위대한 책을 저술한 인물의 이름이다. 위대한 책 한 권을 지정하지 않고, 위대한 책을 저술한 인물의 대표작을 읽으며 해석하고 토론하는 방식이다. 그들의 접근과 수업방식이 신선하다. 한 권의 책이 아니라, 사람을 지정하여 그의 대표작을 읽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수업에 감탄했다. 그것이 바로 그 한 권의 책을 더욱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의 실마리를 찾아내며, 사고의 중심을 추적해갈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접근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전은 단순히 한 작품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쓴 사람과 그의 사상(이론)과 ’함께’ 읽는 것이다.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은 집필 방식에서 두 가지 큰 특징을 갖는다. 첫째는, 고전을 읽으면서 저자 자신의 두뇌 속에 일어나는 모든 사고의 과정을 그대로 옮겨놓듯 솔직하게 적어놓았다는 것이다. 고전을 읽고 있는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두 번째는, 컬럼비아 대학의 강의 현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생생한 현장감이다. 그들의 수업 중, 유독 나의 흥미를 끈 것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수업 시간이었다. 일단 그 두 권의 책(!)을 모두 정독했다는 자신감이 있었고, 이성을 초월한 믿음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성서를 고전으로 분류했다는 것이 특이했고, 그것을 읽고 어떤 토론이 벌어질 것인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가끔 토론하는 모임에 참여하면, 자신의 문제를 객관화시키지 못하고 또 핵심적인 질문에서 빗나간 주제로 토론이 ’수다’의 수준에 머무는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또한 어떤 책이든지 읽은 것을 정보로 처리해버리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는다고 자랑하는데, 그의 인격과 삶에 그런 ’티’가 전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읽은 것을 입(정보)으로밖에 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독서 그 자체가 사고의 힘을 길러주고, 인격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좌절한다.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은 깊은 있는 책읽기와 함께 그것이 사고와 삶 속으로 스며드는 맛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보여준다.
도서목록을 보면, 그중에서 몇 권을 읽었는가를 세어보는 버릇을 가지고 있는 나는 [고전]도 그렇게 읽었다. 고전 목록을 하나씩 지워가며, 오로지 목록에 오른 책들을 다 읽는 것이 목표였다. 그때를 추억해보면, [좁은 문], [죄와 벌], [인간의 굴레] 등을 읽으면서 왜 이 책들을 훌륭하다고 하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까지 나는 누가 고전을 얼마나 읽었는지 물어보면, 그것을 비밀로 했다. 내 사고의 힘과 인격의 깊이에서 티가 나지 않는 것이 민망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읽어봤다"고 말하는 것을 목표로 읽었던 고전을 다시 읽어야겠다. 이제야 제대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생긴다. 글이 길어졌다. 방대한 분량을 읽는 동안 생각이 많아서였다고 변명하며,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이 더할 수 없이 즐거웠음을 고백하며 글을 맺어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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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 가면 종종 발걸음을 멈추고 들여다보는 책들이 있다. 바로 인문학 분야의 고전들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의식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서점에 가서도 읽고 싶은 고전들 앞에서 멈칫하곤 한다. 인터넷 블로그에도 추천 고전목록들이 스크랩되어 있다. 한 권 한 권 찾아서 읽겠다는 욕심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직 많이 읽지를 못했다. 서점에서 꺼내어 들춰본 고전은 일단 분량부터가 상상을 초월했다. 그 방대함은 선뜻 고전에 다가서지 못하게 한다. 내용의 어려움은 또한 책을 읽을 때 상당히 곤혹스럽게 한다.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기에 앞서 책을 읽어 나가는 데도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고전을 쉽고 편하게 읽을 방법은 없을까? 현재로선 인내심을 가지고 차근차근 읽어 나가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고전을 읽기 편하도록 설명과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책을 사전에 읽는 것도 한 방법일 수는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읽게 된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씨앗을뿌리는사람, 2009년)은 내게 아주 많은 것을 선사했다. ‘고전’의 의미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기회를 주었고, 텍스읽기의 방법에 있어서도 강박관념을 빨리 떨쳐버려야 함을 일깨워 주었다.
먼저, 이 책의 집필동기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인 데이비드 덴비는 미국의 영화평론가이다. 미디어 관련 분야에서 오랜 세월 저술활동을 해온 그는 미디어의 범람으로 인해 혼란스러워진 가치관을 재정립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던 중 고전에 주목하게 된다. 그리하여 컬럼비아대학에 학부생들을 위한 필수교양과목인 ‘현대문명’과 ‘인문학과 문학’ 강좌가 있음을 상기하고 1년간 강좌를 청강한다. 그 결과로 나온 책이 바로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이다. 저자는 이 책을 집필하며 두 가지 원칙을 내세웠다. 하나는 ‘모든 것을 읽고 정리하되 진정으로 자신을 사로잡은 책에 대해서만 쓴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나 자신의 반응과 강의실에서 다룬 바에 의거하며 2차 자료는 거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스로 즐겁지 않으면 적극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소개할 수 없었을 터이다. 그래서 저자는 본인이 만족한 고전 강좌들을 선별하여 강의 과정을 그대로 이 책에 옮겨 놓았다.
“우리는 자기 비판의 통로로서 그리고 힘의 필수적 구성 요소로서 고전을 계속해서 읽어야 한다.” (54쪽)
저자의 이러한 원칙은 글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설명과 해석의 따분한 고전읽기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넘나드는, 이론과 현장이 교차하는, 다른 이들의 생각과 자신의 느낌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라이브 고전읽기다. 해석 위주의 고전 해설서를 읽다보면 그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루하다. 저자는 이러한 점을 철저히 배격했다. 강의의 현장에서 들려오는 교수들의 날카로운 지적과 학생들의 비판적인 질문과 답변들이 그대로 전달된다. 또한 저자가 학부생이었을 당시 고전을 읽으면서 느끼지 못했던 부분들과 청강 중에 들었던 생각들, 자신의 삶 속에서 연상되는 바들이 자연스럽게 서술되어 있다. 그래서 천 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책은 술술 읽힌다. 그리고 고전을 읽으면서 어떠한 관점을 견지해야 할지 스스로 기준들이 정립되어 간다. 책을 읽으며 ‘이런 강좌를 수강한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도 들지만, 저자의 노력 덕분에 고전읽기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하게 된다.
“올바른 책들을 읽거나, 그 책들을 올바르게 읽힘으로써 눈이 머는 것을 피할 수 있을까? 서양의 고전이 그처럼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자실과 성실함은 우리 삶이나 교육에서 단번의 분투로 형성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자유를 제공하는 습관들은 컬럼비아대학과 다른 대학들이 내놓는 독서목록들에, 그리고 지금까지 생명력을 지속해온 수백 권의 책들 속에 오롯이 담겨 있다.” (55쪽)
미국이라는 나라를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미국만의 저력으로 이러한 점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이러한 커리큘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국내 대학들은 미국 대학의 이러한 교양강좌들에 주목해야 한다. 컬럼비아대학은 1920년대부터 이 강좌를 개설해왔다고 하니 그동안 쌓인 노하우만도 상당할 것이다. 인문학 강좌를 이수한 학생들은 또 어떨까? 적어도 자신만의 가치 기준을 설정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으리라 생각한다. 고전이 어렵다 하지만, 천천히 음미하면서 그 뜻을 비판적으로 해석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나간다면 고전은 자기 비판의 통로로서 그 역할을 충분히 해낼 것이다. 다만 인문학 강좌의 서두 부분에서 제기되는 학생들의 지적처럼 이 강좌가 서양의 고전 위주로 짜여 있다는 점은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세계에는 서양 문명 외에도 우수했던 문명의 기록들이 남아 있고, 국내에도 귀감이 될 만한 고전들이 많이 있다. 이 책에는 서양 문명을 위주의 고전들이 기록이 되어 있지만 우리의 고전, 서양 문명 외의 고전에도 충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by 꽃다지, 2009년 5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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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책들과의만남'은 영화평론가 이기도한 저자 '데이비드 덴비'가 1년 동안 두 학기에 걸쳐 컬럼비아 대학 교양학부에서 고전작품들을 읽는 교양강좌를 청강한다. 학생들과 교수들의 토론을 기록하며 저자가 겪은 놀랍고도 풍요로운 지적 모험의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좋은 책, 좋은 글을 잊혀지지 않는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하나의 모티브가 여러 권의 책이 되기도 하고 영원한 모티브가 된 책들은 이미 '고전' 이라 일컫으며 장수해 나간다. 장수한 그 책들은 좋은 책들이 다 거론될 수 없으며 아는 사람만 아는 좋은 책들은 꾸준히 그 역량을 쌓아가는 사람만이 아는 습득된 정보이기도 하다.
호메로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성경, 마키아벨리, 로크에 이르기까지 역사상 위대한 책들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책이다. 인문학은 우리 삶을 살찌우고 세상을 보는 우리 시각을 바로 세우고 우리의 자아를 형성한다. 유희적인 상상력, 시대의 영웅들, 사랑의 신비, 현자들의 말씀, 일상의 마법등 각 주제에 맞게 소설에서 부터 비소설,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 읽히고 읽혀서 헤진 좋은 책들을 하이라이트 부분만을 살려 이 책을 읽음으로서 또다른 책과의 만남을 그는 이어주고 있다. 책 읽기의 즐거움은 책을 만났을 때 늘 존재하지만 좋은 책을 만났을때의 즐거움은 그 이상의 큰 즐거움이 된다. 재미가 있고, 교훈이 있고, 나아가서는 삶의 텍스트가 되는 책과의 만남은 그 이상의 내 삶의 벗이다. 그 벗들을 만나고 싶은 이는 많지만 하루에 쏟아지는 엄청난 양의 책이 쏟아지는 만큼 양질의 책찾기는 늘 어려운 일이다. 이 책과 함께하는 시간동안 어렵고 딱딱하게만 느껴졌던 고전을 쉽고 재미있게 해석함으로써 고전의 깊고 풍부한 멋을 음미해 보는 시간이 되었다. 고전읽기가 두려운 사람들, 고전을 읽고 싶은데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