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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는 없다 윤구병 도서출판보리/2001.10.26. “할머니 콩은 언제 심어요?” “으응, 올콩은 감꽃 필 때 심고, 메주콩은 감꽃이 질 때 심는 거여.” 이 말을 듣고 나는 정신이 번쩍 났다. 그래, 책을 보고 날짜를 따져서 씨앗을 뿌리겠다는 내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가!(p19) 지역마다 토양이 다르고 기후도 온도도 다르고 내리는 비도 바람도 다른데, 그래서 지역에 따라 씨 뿌리는 철도 거두어들이는 철도 다를 수밖에 없는데, 마치 몇 월 며칠이라고 못을 박아야 정답인 것 같고, 다른 풀이나 나무가 자라는 시기를 기준으로 대답하면 틀린 것으로 여겨온 내 교과서식 지식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 생각하면 할수록 적어도 내가 사는 곳에서는 그 할머니 대답 이상으로 ‘과학적인’해답은 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글을 통해 과거로부터 경험적으로 알게 된 내용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현대 과학보다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저자는 이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들은 말 가운데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고 한다. ‘오월 단오 때까지는 염소가 즐겨 뜯어먹는 풀은 사람이 먹어도 좋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인데 그 말에 따라 살갈퀴나 씀바귀 잎을 뜯어 쌈을 싸 먹고 칡순을 뜯어 데쳐서 먹기도 하고, 혀로 맛을 보아 독성이 느껴지지 않는 풀들은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먹어보았다고 한다. “현대 문명은 쓰레기 문명이라고 불러도 좋다. 상품경제 사회가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확대재생산하는 거의 모든 상품들이 인류의 지속적인 삶에 보탬이 되기는커녕 장애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당장이라도 삶의 울타리 밖으로 내던져 버려야 한다(p.123)”고 저자는 말한다. 새 것이 아닌 것은 비록 어제 만든 것이라도 기능이 떨어지고, 효율성이 낮고 유행에 뒤진 것이라는 관념을 심어주어 끊임없이 내다버리도록 부추긴다는 점에서도 쓰레기 문명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쓰레기 문명에서 벗어나 건전한 문화 세계를 이루고 살려면 자연을 본떠 무엇 하나 버리지 않고 알뜰하게 챙겨 쓰다가 자연스럽게 자연으로 되돌려 보내는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 쓰레기가 될 만한 것은 아예 만들어내지 않는 슬기가 필요한데 지금은 한나라의 대통령에서부터 구멍가게 주인까지 무한경쟁을 앞세워 쓰레기더미 키우기 시합을 하고 있는 판이니 답답하기 짝이 없다고 심경을 토로한다. 도시사회, 특히 자본주의 상품경제 사회에서는 확대재생산만이 자본을 늘리고 사회가 굴러가는 길인데, 확대 재생산이 이루어지려면 옛 것은 낡은 것, 비효율적인 것이라 하여 끊임없이 폐기처분하도록 갖은 수단을 다 써야 한다. 그래서 새 것이 아닌 것은 사람이든 물건이든 마구 내버리도록 학문, 언론, 광고, 정책…모두가 짜고 들어 국민교육을 시키고 있는 판이라고 개탄한다. “생명의 세계는 본디 이어진 것이고 삼차원에 여러 차원이 중첩되어 살아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분해하면 본질이 훼손되어 영원히 그 비밀을 알 수 없게 된다. 죽거나 상처를 입어 기능의 일부가, 또는 전부가 사라져버리는데 어떻게 그런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P.169)” 라디오를 분해하면 이미 라디오가 아니다. 기능이 사라져 버리니까. 물질도 그러하거든, 하물며 생명체의 경우야 더 일러 무엇 하겠는가. 유전공학? 사이버네틱스? 모두 인간의 오만에서 비롯되는 이 세상의 해체다. 당신들은 무책임한 해체주의자들이다. 당신들이 분해하고 해체해놓은 것을 다시 조립하고 합해서 원래 모습으로 되돌려놓을 길조차 모르고 있으면서 왜 파괴를 일삼고 있는가? 나는, 여러분들에게 무엇인가 새로운 ‘정보’를 하나 더 머릿속에 담아주기 위해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 머릿속에 들어와 의식을 잠들게 하는 쓰레기 정보들을 지울 지우개를 하나씩 마련해 주려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다지도 명쾌하다 여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들이 온통 의심스러운 것이라는 혼돈 상태에 빠지기를 기대하고 여기에 왔다고 카이스트 학생들을 상대로 한 강연회에서 말했다고 한다. 김진탁군의 생각은 “우리 공동체가 지향하는 목표가 뚜렷하지 않아서 믿고 따르기 힘들다는 거야. 공동체의 청사진이라는 게 얼핏 보면 중세의 원시 영농으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비치니 암담하다는 거지. 또 있어. 가난한 민중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어서 가진 사람, 있는 사람이 아니면 이런 공동체 실험을 하기 어렵다는 거야.(P.194)” 이를테면 산청 같은 경우 땅값이 한 평에 천 원 정도인데 여기서는 이만 원을 웃도니 어지간한 경제력이 없으면 이런 곳에서 발붙이고 살 수 없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농촌과 어촌을 아우르는 곳에 자리를 잡고 공동체학교를 건설해서 자연친화적인 삶으로 인간다운 생활을 하려는 계획에 공감하면서도 함께 하기에는 거리감이 있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무조건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설립취지나 생활방식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으로 회원을 구성하여 한 가족처럼 살기 위해 체험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일원이 되어가는 과정을 극복해 나가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추구해가는 과정이 오롯이 이 책에는 담겨 있다. “우리 마을 뿐만 아니라 진짜 농민이 벼농사를 뺀 다른 주곡농사를 내팽개치고 투기성이 강한 환금작물에만 집착하는 까닭은 한마디로 밀, 보리, 콩, 옥수수, 감자, 조 같은 주곡을 밭에 심어보았댔자 ‘돈이 안 되기 때문’이다.(P.229)” 주곡 중심으로 농사를 지어 생활할 수 있고, 자식을 교육시킬 수 있다면 어느 누가 주곡생산을 꺼리랴. 나라의 농업정책이 바로 서려면 주곡을 생산하는 농민이 잘사는 길을 찾아주어야 한다. 영농비가 따로 필요 없는 농사, 생활비가 최소한으로 드는 생활양식, 자연이 큰 스승이 되고 마을 어른들이 작은 선생이 되어 아이들에게 삶에 필요한 정보를 실천을 통하여 얻게 하는 교육, 자급경제의 터전에서 꽃피는 ‘기르는 문화’, 이것만이 기초 생활공동체가 길게 살아남는 길이요. 마침내는 땅도 살리고 그 땅에서 자라는 모든 생명체들과 사람이 더불어 사는 길이라는 생각이 얼핏 보기에 30년 전으로 퇴보하는(?) 농사법, 생활양식을 고집하게 하는 동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글을 읽으며 우리농촌의 현실과 그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너무 시대를 외면하고 자연주의 원칙에 집착하여 유연함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기르는 문화‘에서 묵은 것, 오래 된 것이 좋은 것이라면 ’만드는 문화‘에서는 새 것, 최신의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기르는 문화가 인간의 욕망을 순환하면서 성장하는 자연의 리듬에 맞추어 조절하는 기능을 한다면 ‘만드는 문화’는 자본의 무한증식 욕구에 따라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확대시키고 분화시킨다.(p.241)” 저자가 산과 들과 바다가 어우러진 곳에 내려와 농사짓고 사는 것은 전 인류의 기초살림이기도 한 산살림, 들살림, 갯살림을 튼튼히 꾸려 그 기초 위에 ‘기르는 문화’와 ‘만드는 문화’가 균형 있게 다시 세워져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뜻과 의지가 농업에 반영되면 어쩌면 그것이 넓은 뜻에서 ‘생명을 살리는 농업’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설립초기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흘렀기에 좀 더 보완되고 여러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공동체학교로 운영되고 있으리라 기대되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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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는 없다 윤구병 도서출판보리/2001.10.26. sanbaram
“지렁이가 우글거리는 살아 있는 땅에서 저절로 자라는 풀들 가운데 대부분은 잡초가 아니다. 망초도 씀바귀도 쇠비름도 마디풀도 다 나물거리고 약초다. 마찬가지로 살기 좋은 세상에서는 ‘잡초 같은 인생’을 찾아보기 힘들다.(p.91)” 이처럼 우리 주변에 있는 잡초들은 대부분 잡초라기보다는 약초라고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 <잡초는 없다>저자의 생각이다. 그렇기에 대학교수를 그만 두고 공동체를 만들어 자연농법을 기본으로 하여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하게 된 동기와 그 실천과정을 5개의 장으로 나누어 싣고 있다. 자연친화적인 삶의 터를 가꾸고 개척하는데 기울인 2년여 간의 힘든 과정을 기록한 글들은 대부분 농사일 하는 틈틈이 살림에 보태 쓰려고 이런저런 지면에 팔았던 글들을 모은 것이라고 한다. 거기에 더하여 일기를 간추려 책으로 엮어내고 있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시행착오나 시대적인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저자의 구상은 충분히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저자 윤구병은 서울대 철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뿌리깊은 나무>초대 편집장과 충북대 철학교수를 지냈다. 저서로 <똑같은 것보다 다 다른 것이 더 좋아>, <조그마한 내 꿈 하나> <실험학교 이야기>가 있다.
“할머니 콩은 언제 심어요?” “으응, 올콩은 감꽃 필 때 심고, 메주콩은 감꽃이 질 때 심는 거여.” 이 말을 듣고 나는 정신이 번쩍 났다. 그래, 책을 보고 날짜를 따져서 씨앗을 뿌리겠다는 내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가!(p19) 지역마다 토양이 다르고 기후도 온도도 다르고 내리는 비도 바람도 다른데, 그래서 지역에 따라 씨 뿌리는 철도 거두어들이는 철도 다를 수밖에 없는데, 마치 몇 월 며칠이라고 못을 박아야 정답인 것 같고, 다른 풀이나 나무가 자라는 시기를 기준으로 대답하면 틀린 것으로 여겨온 내 교과서식 지식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 생각하면 할수록 적어도 내가 사는 곳에서는 그 할머니 대답 이상으로 ‘과학적인’해답은 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글을 통해 과거로부터 경험적으로 알게 된 내용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현대 과학보다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저자는 이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들은 말 가운데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고 한다. ‘오월 단오 때까지는 염소가 즐겨 뜯어먹는 풀은 사람이 먹어도 좋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인데 그 말에 따라 살갈퀴나 씀바귀 잎을 뜯어 쌈을 싸 먹고 칡순을 뜯어 데쳐서 먹기도 하고, 혀로 맛을 보아 독성이 느껴지지 않는 풀들은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먹어보았다고 한다.
“현대 문명은 쓰레기 문명이라고 불러도 좋다. 상품경제 사회가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확대재생산하는 거의 모든 상품들이 인류의 지속적인 삶에 보탬이 되기는커녕 장애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당장이라도 삶의 울타리 밖으로 내던져 버려야 한다(p.123)”고 저자는 말한다. 새 것이 아닌 것은 비록 어제 만든 것이라도 기능이 떨어지고, 효율성이 낮고 유행에 뒤진 것이라는 관념을 심어주어 끊임없이 내다버리도록 부추긴다는 점에서도 쓰레기 문명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쓰레기 문명에서 벗어나 건전한 문화 세계를 이루고 살려면 자연을 본떠 무엇 하나 버리지 않고 알뜰하게 챙겨 쓰다가 자연스럽게 자연으로 되돌려 보내는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 쓰레기가 될 만한 것은 아예 만들어내지 않는 슬기가 필요한데 지금은 한나라의 대통령에서부터 구멍가게 주인까지 무한경쟁을 앞세워 쓰레기더미 키우기 시합을 하고 있는 판이니 답답하기 짝이 없다고 심경을 토로한다. 도시사회, 특히 자본주의 상품경제 사회에서는 확대재생산만이 자본을 늘리고 사회가 굴러가는 길인데, 확대 재생산이 이루어지려면 옛 것은 낡은 것, 비효율적인 것이라 하여 끊임없이 폐기처분하도록 갖은 수단을 다 써야 한다. 그래서 새 것이 아닌 것은 사람이든 물건이든 마구 내버리도록 학문, 언론, 광고, 정책…모두가 짜고 들어 국민교육을 시키고 있는 판이라고 개탄한다.
“생명의 세계는 본디 이어진 것이고 삼차원에 여러 차원이 중첩되어 살아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분해하면 본질이 훼손되어 영원히 그 비밀을 알 수 없게 된다. 죽거나 상처를 입어 기능의 일부가, 또는 전부가 사라져버리는데 어떻게 그런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P.169)” 라디오를 분해하면 이미 라디오가 아니다. 기능이 사라져 버리니까. 물질도 그러하거든, 하물며 생명체의 경우야 더 일러 무엇 하겠는가. 유전공학? 사이버네틱스? 모두 인간의 오만에서 비롯되는 이 세상의 해체다. 당신들은 무책임한 해체주의자들이다. 당신들이 분해하고 해체해놓은 것을 다시 조립하고 합해서 원래 모습으로 되돌려놓을 길조차 모르고 있으면서 왜 파괴를 일삼고 있는가? 나는, 여러분들에게 무엇인가 새로운 ‘정보’를 하나 더 머릿속에 담아주기 위해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 머릿속에 들어와 의식을 잠들게 하는 쓰레기 정보들을 지울 지우개를 하나씩 마련해 주려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다지도 명쾌하다 여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들이 온통 의심스러운 것이라는 혼돈 상태에 빠지기를 기대하고 여기에 왔다고 카이스트 학생들을 상대로 한 강연회에서 말했다고 한다.
김진탁군의 생각은 “우리 공동체가 지향하는 목표가 뚜렷하지 않아서 믿고 따르기 힘들다는 거야. 공동체의 청사진이라는 게 얼핏 보면 중세의 원시 영농으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비치니 암담하다는 거지. 또 있어. 가난한 민중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어서 가진 사람, 있는 사람이 아니면 이런 공동체 실험을 하기 어렵다는 거야.(P.194)” 이를테면 산청 같은 경우 땅값이 한 평에 천 원 정도인데 여기서는 이만 원을 웃도니 어지간한 경제력이 없으면 이런 곳에서 발붙이고 살 수 없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농촌과 어촌을 아우르는 곳에 자리를 잡고 공동체학교를 건설해서 자연친화적인 삶으로 인간다운 생활을 하려는 계획에 공감하면서도 함께 하기에는 거리감이 있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무조건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설립취지나 생활방식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으로 회원을 구성하여 한 가족처럼 살기 위해 체험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일원이 되어가는 과정을 극복해 나가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추구해가는 과정이 오롯이 이 책에는 담겨 있다.
“우리 마을 뿐만 아니라 진짜 농민이 벼농사를 뺀 다른 주곡농사를 내팽개치고 투기성이 강한 환금작물에만 집착하는 까닭은 한마디로 밀, 보리, 콩, 옥수수, 감자, 조 같은 주곡을 밭에 심어보았댔자 ‘돈이 안 되기 때문’이다.(P.229)” 주곡 중심으로 농사를 지어 생활할 수 있고, 자식을 교육시킬 수 있다면 어느 누가 주곡생산을 꺼리랴. 나라의 농업정책이 바로 서려면 주곡을 생산하는 농민이 잘사는 길을 찾아주어야 한다. 영농비가 따로 필요 없는 농사, 생활비가 최소한으로 드는 생활양식, 자연이 큰 스승이 되고 마을 어른들이 작은 선생이 되어 아이들에게 삶에 필요한 정보를 실천을 통하여 얻게 하는 교육, 자급경제의 터전에서 꽃피는 ‘기르는 문화’, 이것만이 기초 생활공동체가 길게 살아남는 길이요. 마침내는 땅도 살리고 그 땅에서 자라는 모든 생명체들과 사람이 더불어 사는 길이라는 생각이 얼핏 보기에 30년 전으로 퇴보하는(?) 농사법, 생활양식을 고집하게 하는 동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글을 읽으며 우리농촌의 현실과 그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너무 시대를 외면하고 자연주의 원칙에 집착하여 유연함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기르는 문화‘에서 묵은 것, 오래 된 것이 좋은 것이라면 ’만드는 문화‘에서는 새 것, 최신의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기르는 문화가 인간의 욕망을 순환하면서 성장하는 자연의 리듬에 맞추어 조절하는 기능을 한다면 ‘만드는 문화’는 자본의 무한증식 욕구에 따라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확대시키고 분화시킨다.(p.241)” 저자가 산과 들과 바다가 어우러진 곳에 내려와 농사짓고 사는 것은 전 인류의 기초살림이기도 한 산살림, 들살림, 갯살림을 튼튼히 꾸려 그 기초 위에 ‘기르는 문화’와 ‘만드는 문화’가 균형 있게 다시 세워져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뜻과 의지가 농업에 반영되면 어쩌면 그것이 넓은 뜻에서 ‘생명을 살리는 농업’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설립초기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흘렀기에 좀 더 보완되고 여러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공동체학교로 운영되고 있으리라 기대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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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대학 리포트 숙제로 울며 겨자먹기로 읽게 된 책이었다. 첫 장을 펴들 때 단순히 자연학교 얘기겠지하고 생각했던 나의 생각은 착오였다. 이 책은 직접 공동체를 이뤄 농사를 져가면서 공동체 교육에 대해 점차 밑거름을 이뤄가는 저자의 이야기를 다룬 책이었다.
효소를 만들고, 잡초와 풀을 골라내고, 김을 매면서 서투르지만 저자와 변산 공동체 사람들이 농사를 짓는 과정, 일반 상업적인 영농과 다른 영농 때문에 마을 사람들과 겪어야 했던 오해, 저자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공동체 삶을 이뤄내며 벌여지는 오해, 화해 등의 다양한 삶의 모습... 이러한 모든 것들이 이 책 안에 잘 나와 있었다. 추상적인 대안 학교를 제시하는 사람들에 비해 저자의 태도는 보다 구체적이라 좋았다.
하지만 밑그림만 펼쳐 가는 그의 이상적인 교육을 꿈꾸는 공동체가 전반적인 우리 교육에 어떠한 큰 도움을 줄 수 있을까란 질문에는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 교육에 경종을 울릴 순 있겠지만, 그것이 전반적인 대안으로 서기엔 한계가 있다는 점이 아쉬운 점이었다.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흘리는 땀방울의 열매가 송송 배어있는 책이었다. [인상깊은구절] 교육이 뭐야. 한 마디로 후손들에게 살 길을 일러주어 세상에 사람 씨앗 보존하자는 거 아냐. 그러자면 우선 생맹쳐로서 제 앞가림하는 것 가르치는 게 먼저고, 그 다음에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으니까 여럿이 모여 함께 사는 법을 일러주는 게 교육의 큰 기둥 아닌가 말야, 요즈음 그런 교육이 없어 이거 하자는 거지. 교환가치만 유일한 가치로 믿고 잔머리 굴리는 것만 죽어라고 가르치는 이 상품경제 사회에는 미래가 없어. |
| 1학년 교양필수과목으로 [대학영어]를 들었을때, 담당교수님이셨던 김명렬 선생님께서 추천해주신 책이다. 김 교수님의 절친한 친구(윤구병님)가 쓰신 책이라고 소개해주신 후, 읽고나서 짧은 소감문을 하나씩 제출하는 것이 숙제였었다. 반 억지로 읽게 된 책이라 그 당시에는 뚜렷한 감흥이 없었지만, 후에 [월든]을 읽고 난 후, 이 [잡초는 없다]가 한국판 월든 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월든]과 마찬가지로, 이론상으로는 옳은 삶이지만, 그 삶은 그저 동경할 수 밖에 없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 누가 문명의 이기를 버리고, 절제하는 삶, 고립된 삶으로 돌아가길 자처하겠는가. 우리가 선뜻 하지 못하는 일이기에 그 일을 앞장서서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우러러보고(?) 그들의 삶을 궁금해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아직 어리기때문인지는 몰라도, 여러 모로 아직까지는 '허구'에 불과한 소설같은 이야기이다. |
| 전북 부안군 변산면 운산리.잘 나가는 대학의 철학교수에서 어느날 홀연히 우리 곁을 떠 난 윤구병 선생(?)의 현주소다. 그는 그곳에서 '변산 공동체학 교'를 운영하고 있다. '운영'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표현은 아니 겠으나 딱히 뭐라 표현할 단어가 없는 것은 내가 가진 언어의 부족 때문이리라. 그는 배움의 기쁨을 잊은채 단순 암기에 몰두하는 학생들에게 구구단을 외우는 대신 들판으로 나가자고 말하고 싶었다고 했 다. 학교가보다 더 좋은 배움터가 일터라는 믿음이 그를 용감하 게 만들었던 것이다. 변산 공동체학교의 창설자인 윤구병씨가 낸 산문집 <잡초는 없다="">는 그러한 그의 삶의 저변을 잘 표현해 준 책이었다. 빈 집을 찾아 구들을 들어내고, 밭 갈고 바구니 짜고 거름 만 드는 일상 속에는 삶의 원기를 흡수하는 지혜가 녹아있어 풍요 롭다. 또 괭이 쥐고 밭 가는 아이들의 모습은 도시의 그 어느 아이들보다 옹공차 보였다. 오늘날 우리는 먹을 수 있는 음식도 버리고, 멀쩡한 옷가지며 가구, 심지어는 더 일할 수 있는 사람까지 마구 버리는 데 익숙 해져 있다. 그리고 윤구병 선생은 그러한 현실을 안타까워 했 다. 책 속에서 그는 말하고 있다. 우리는 '정말 버려야 할 것들 을 버리지 못하고'있다고. 그의 책 제목 '잡초는 없다'는 책 내 용만큼이나 참 흥미로왔다. 그와 함께 변산공동체에 사는 이들 은 어른과 아이들 합해서 대략 열다섯명 내외라고 한다. 그들은 지난해 척박한 땅에 농사를 짓시 위해 잡초들과 한판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한가지 교훈을 얻었다고 한다.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눈여겨보면 지렁이 가 우글거리는 살아 있는 땅에서 저절로 자라는 풀들 가운데 대 부분은 잡초가 아니라고 한다. 망초도 씀바귀도 쇠비름도 마디 풀도 다 나물거리고 약초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살기 좋은 세상에서는 누구도 쉽게 '잡초 같은 인 생'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참 설득력 있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책 속에 담겨있는 아무것도 버리지 않고 아무도 버림받지 않는 삶터를 일구면서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변산공동체 사람들의 이야기는, 각박해진 세상에서 갈 곳을 잃은 우리들에게 하나의 돌파구를 보여주고 있다. 커다란 고향집 팽나무 아래에서 여름 밤 쑥불을 피워두고 손수 농사지은 옥수수를 먹으면서 두런두런 세상 사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변산공동체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다. 삶에 지친 이들은 누구라도 여름이 오기전에 책을 통해서나마 변산을 다녀오자. 거기에는 농사꾼 눈에 비친 우리 교육의 모습 도 보이고, 일등도 꼴찌도 없고 학교와 일터의 구분도 없는 새 로운 학교의 모습도 보인다. 그리고 오랫동안 잊고지냈던 자신의 모습도 보인다. 무능력하 다고 더 이상 미워할 수 없는 소중한 자신의 모습 말이다. 잡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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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공동체가 사라졌다 박용범 독서작가(2022)
먹거리의 자급자족 구조를 구축하고자 한다. 농사는 기계를 사용하지 않는 수렵 채취 농업으로 방향을 틀 것이다. 무조건 대량으로 만들어 생산하는 문화와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이 인류와 생명계 전체에 지속 가능한 미래를 보장하리라고 믿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산이 어우러진 곳으로 내려가 수렵 채취 생활을 하는 것이 기초 살림으로 산살림이다. 생명을 살리는 농업으로 화학비료나 농기계를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 전통적 농법에 의존하고자 한다. 영농비가 필요 없는 농사, 생활비가 최소한으로 드는 생활 양식으로 삶이다. 자연을 닮은 삶의 양식은 낭비 없는 삶의 양식, 곧 인간과 자연을 살리는, 다시 말해 생명을 살리는 삶의 양식이라 할 수 있다. 60년대 이전의 농촌 생활양식을 모범으로 삼아 거기서부터 출발해도 좋다. 수천 년 동안 이 땅에서 소농 경제는 자급 경제의 기틀이었다.
참 시인은, 비유하자면 운수 행각을 하는 떠돌이 중이나 농사짓는 농부와 같은 사람이다. 운수 행각을 하는 중들은 이틀 밤을 한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벌써 하룻밤을 지나면 그 자리에 있는 것들이 낯익은 것으로 바뀌어 있고, 그렇게 되면 주변 사물에 관심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늘 낯선 것 사이에서 온몸과 마음을 활줄처럼 팽팽하게 긴장시켜 주위의 모든 것에 주의 깊은 관심을 기울여 접촉하는 자세, 새롭지 않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 늘 자신을 내던지는 것, 그렇게 해서 온몸과 가슴이 새로움으로 가득 차게 함. 이것이 길 걷는 사람의 마음가짐이고 시인의 눈이다. 실제로 밭이나 산과 들에서 자라는 풀 가운데 '잡초'는 없다. 자연은 뭇 생명체들을 살리려고 봄 여름 가을 겨울 밤낮없이 저렇듯이 애를 쓰건만 어찌 사람들은 '잡초'라고 하여, '해충'이라 하여, 돈이 안 된다 하여 이렇게 날이면 날마다 없애고 치워버릴 궁리만 하는지, 그리고 그 부산물로 쓰레기를 산더미처럼 쌓아올리는지. 사는 데 꼭 필요한 사용가치를 지닌 것을 땀 흘려 가꾸거나 만들어서 나누어주는데 그 대가로 사용가치는 없고 교환가치만 있는 돈을 내밀면서 고마워하는 마음도 미안해하는 마음도 없이 사는 사람들이 함께 하는 삶을 지향하라. '만드는 문화'는 내다 버린 낡은 것들의 산더미에 뿌리를 내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속을 들여다보면 '쓰레기 문화'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농촌의 현실은 '농업 자본가'들로 넘쳐나고 있다. 농업은 생명을 다루는 중요한 업인데, 너무나 많은 농민들이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으로 농업에 접근하여 생명 순환 농업을 멀리하고 있다. 그저 돈이 되는 농업에 집중하면서 돈이 되는 만큼의 쓰레기 또한 대량 생산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버리지 않는 삶은 버릴 것이 없는 삶, 검소하고 무엇이든지 아끼는 생활 태도의 반영이다. 하나의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살아갈 수 있다. 두 개의 물건으로 욕심을 부리려고 하지 말아라.
"그 많은 기술 언제 어떻게 배우셨어요?" 하고 물으면 그분들은 "배우고 자시고 할 것 뭐 있어. 그저 살다 보면 몸에 익는 거지." 하고 심상하게 웃어넘긴다. 우리 마을에 사는 예순이 넘은 어른들이 몸에 지니고 있는 기술을 예로 들어보자. 새끼 꼬기, 짚신 삼기, 가마니 짜기, 멍석 엮기, 지붕에 이엉 얹기, 토담 쌓기, 무명, 모시, 명주 같은 온갖 실 짜기, 베 짜기, 옷감에 물들이기, 약식, 약과, 강정, 산자 같은 온갖 한과 만들기, 식혜, 수정과, 술 담그기, 망치질, 톱질, 끌질로 짐승 우리와 사람 사는 집 짓기, 갖가지 김치에, 젓갈에, 장담기, 벌이나 누에를 치고, 닭, 오리, 개, 소, 돼지 기르기, 쟁기질, 가래질, 써레질에 관리기, 경운기, 트랙터, 콤바인 몰기……이렇게 늘어놓다 보면 한이 없다. 농촌 공동체는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처절하게 무너져 내렸다. 귀촌하여 농사꾼들의 정서를 공유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다. 귀촌과 귀농, 모두 어떠한 형태로든 삶의 일부일 뿐이다. 막연한 동경을 버려야 한다. 철학자적 삶을 이어가지 않고서는 농촌에서의 생활고를 이겨 나가기가 어렵다. 현실을 직시하고 농촌을 바라보라.
《잡초는 없다(윤구병 저)》에서 일부분 발췌하여 필사하면서 초서 독서법으로 공부한 내용에 개인적 의견을 덧붙인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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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는 없다 /저자 윤구병/출판 보리/발매 1998.05.15.
잡초는 없다. 코페르니쿠스 삶의 전환점이 다가오고 있다. 읽은 책의 권 수로, 비치된 장사의 양으로 독서 수준을 가늠하려는 어리석은 행동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 권의 책을 읽어도 좋으니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한다. 행동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책 읽기에 몰입해야 한다. 자연농법을 이용해서 곡식이나 남새를 길러 내더라도 그것만으로 먹고살기도 빠듯하다. 가난이 따라오는 것이다.
P64~65 우리가 온전한 밭보다 묵은 밭을 더 반기는 까닭이 있어요. 변산에 들어온 우리 식구들이 모여서 맺은 언약이 있어요. '땅이 살아야 거기에서 사는 생명체들이 건강을 지키고 살 수 있는데 사람도 생명체인지라 죽은 땅에서는 살 수가 없다. 앞으로 농사를 짓되, 땅을 죽이는 제초제나 농약이나 화학 비료 쓰지 말고, 또 항생제가 섞인 사료를 먹여 키운 돼지나 소나 닭똥으로 만든 사이비 유기질 비료도 쓰지 말고, 퇴비와 부엽토를 써서 농사를 짓자.'는 언약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모습을 갖춘 온전한 밭 치고 유기농법이나 자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분들이 되살려 낸 땅을 빼면 땅밑에 지렁이 한 마리 사는 땅이 없어요. 그러니 그 밭에서 키워낸 곡식이나 남새가 온전할 리가 없지요. 산비탈에 몇 해씩 묵혀 놓은 땅은 그동안 자연의 힘으로 되살아나 땅 밑에 미생물들이 다시 살기 시작하고, 그 미생물들을 먹이로 지렁이들이 꿈틀대고 있으니, 조금 힘은 들어도 잘 일구어 농사를 지으면 건강한 식품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생깁니다
토담집을 지어 구들을 놓으면 가까운 산에 지천으로 깔려 있는 삭정이만 주워 모아도 땔감 걱정은 없겠다 싶어 구들장을 찾는데 그게 쉽게 눈에 띄지 않아요. 지렁이가 우글거리는 살아 있는 땅에서 저절로 자라는 풀들 가운데 대부분은 잡초가 아니다. 망초다 씀바귀도 쇠비름도 마디풀도 다 나물거리고 약초다
P146 실제로 밭이나 산과 들에서 자라는 풀 가운데 '잡초'는 없다. 자연은 뭇 생명체들을 살리려고 봄 여름 가을 겨울 밤낮없이 저렇듯이 애를 쓰건만 어찌 사람들은 '잡초'라고 하여, '해충'이라 하며, 돈이 안 된다 하여 이렇게 날이면 날마다 없애고 치워버릴 궁리만 하는지, 그리고 그 부산물로 쓰레기를 산더미처럼 쌓아올리는지.
사는 데 꼭 필요한 사용가치를 지닌 것을 땀 흘려 가꾸거나 만들어서 나누어주는데 그 대가로 사용가치는 없고 교환가치만 있는 돈을 내밀면서 고마워하는 마음도 미안해하는 마음도 없이 사는 사람들이 판을 치는 세상은 온전한 세상이 아니다.
P174~175 참 시인은, 비유하자면 운수 행각을 하는 떠돌이 중이나 제대로 농사짓는 농부와 같은 사람이다. 운수 행각을 하는 중들은 이틀 밤을 한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벌써 하룻밤을 지나면 그 자리에 있는 것들이 낯익은 것으로 바뀌어 있고, 그렇게 되면 주변 사물에 관심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늘 낯선 것 사이에서 온몸과 마음을 활줄처럼 팽팽하게 긴장시켜 주위의 모든 것에 주의 깊은 관심을 기울여 접촉하는 자세, 새롭지 않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 늘 자신을 내던지는 것, 그렇게 해서 온몸과 가슴이 새로움으로 가득 차게 함. 이것이 길 걷는 사람의 마음가짐이고 시인의 눈이다.
옛날 농가주택에 향수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초가지붕, 가마솥이 걸린 아궁이와 부엌 한쪽에 가득 쌓인 땔감, 안채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뒷간과 잿간, 닭장, 돼지우리, 외양간, 장독대, 처마 끝에 매달린 종자용 곡식 모가지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마을에는 그런 농가주택은 없다.
60년대 이전의 농촌 생활양식을 모범으로 삼아 거기서부터 충실하자. 농사짓는 일에 환상을 갖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밭에서 자라는 대부분의 풀들이 약초다. 잡초는 없다.
영농비가 따로 필요 없는 농사, 생활비가 최소한으로 드는 생활양식, 자연이 큰 스승이 되어 자급자족의 경제 터전에서 꽃 피는 '기르는 문화'를 창출해내도록 하자.
자연을 닮은 사람의 양식은 낭비 없는 삶의 양식, 곧 인간과 자연을 살리는, 다시 말해 '생명을 살리는' 삶의 양식이라 할 수 있다. '기르는 문화'의 숨은 주체는 자연이다. 순환하면서 스스로 성장하는 자연이 대지의 품 안에서 '기르는 문화'의 드러난 주체인 '기르는 사람', 농사꾼을 키워냈다. 자연인 산의 품으로 들어가 자급자족 구조를 추구하면서 이 세상 소풍놀이 마무리 잘 하고 가면 된다.
보리, 밀, 콩, 조, 수수, 옥수수, 감자, 고구마, 기장 같은 여러 가지 식품을 철에 맞게 섞어서 고루 먹어야 건강한 몸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이른바 '건강식'을 권장하는 이들의 식단 짜기 목록 같은 데서도 잘 드러난다. 자연에 스며들어 제철 음식으로 살아가는 데에 몸의 균형을 맞추는 조화로운 생활이 궁극적인 목표의 삶이 된다.
《잡초는 없다(윤구병 저)》에서 일부분 발췌하여 필사하면서 초서 독서법으로 공부한 내용에 개인적 의견을 덧붙인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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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는 없다》에서 발췌하여 필사한 내용입니다.
'서태지와 아이들' 이 세 젊은이 가운데 한 사람은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자기가 배우기를 바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여겨 스스로 그만두었고, 한 사람은 아예 대학에 갈 실력이 안 되어 시험공부를 하지 않았고, 또 한 사람은 더 공부하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는 모두 새로 배워야 한다.
"할머니, 콩은 언제 심어요?"
"으응, 올콩은 감꽃 필 때 심고, 메주콩은 감꽂이 질 때 심는 거여."
이 말을 듣고 나는 정신이 번쩍 났다. 그래, 책을 보고 날짜를 따져서 씨앗을 뿌리겠다는 내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지역마다 토양이 다르고 기후도 온도도 다르고 내리는 비도 바람길도 다른데, 그래서 지역에 따라 씨뿌리는 철도 거두어들이는 철도 다를 수밖에 없는데, 마치 몇월 며칠이라고 못을 박아야 정답인 것 같고, 다른 풀이나 나무가 자라는 시기를 기준으로 대답하면 틀린 것으로 여겨온 내 교과서식 지식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 생각하면 할수록 적어도 내가 사는 곳에서는 그 할머니 대답 이상으로 '과학적인' 해답이 없었다.
씨 뿌리는 시기를 몇 월 며칠 식으로 못박으려면 온 나라의 땅과 기후와 온도와 강우량과 바람길, 그리고 강과 들과 산을 모두 획일화해야 한다.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어른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한평생 한눈 팔지 않고 농사만 지었는데 아직도 농사일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아. 해마다 농사일 새로 배우는 느낌이야."
가장 큰 스승인 자연의 가르침을 온몸으로, 생각만이 아니라 기쁨과 슬픔과 아픔의 문까지도 활짝 열고 겸손하게 귀 기울일 때 비로소 지혜가 인도하는 행복한 길로 들어설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광명단을 섞어 반짝반짝 윤이 나는 요즈음 옹기들과는 달리 천연유약인 잿물만 입혀 구운 이 숨쉬는 항아리들은 한 번 깨지고 나면 다시는 구워낼 수 없는 소중한 문화 유산들입니다. 쓸모가 없어서 다시는 구워내지 않기도 하지만 구워낼 기술을 지닌 사람이 남아 있지 않고, 또 그런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장작을 몇 날 며칠씩 떼어서 구워내야 하는데 수지가 맞지 않아 구워낼 엄두를 낼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한 번 없어지면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고구마 넝쿨을 걷어 효소를 담고, 시장에 내다 팔 수 없는 조그마한 감들을 따서 식초를 담고, 바랭이풀과 싸우면서 길러낸 고추대에 매달린 끝물 고추를 따 염장해서 고추김치를 담고, 가뭄이 들어 제대로 여물지 못한 콩을 추수하다 떨어진 콩 한 톨까지 모아 간장과 된장과 고추장을 담고… 이러다보니 빈 항아리가 하나씩 둘씩 채워져 어느새 항아리 백여 개 가까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올해 들어 처음으로 '잡초'로 알고 무자비하게 뽑아 내던져 버렸던 풀들이 약초와 나물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나서부터는 '이 세상에 잡초는 없다.' 생각하고 저절로 밭에서 자라는 여러 가지 풀들을 거두어 마흔 가지 가까운 효소를 담으면서 '풀과 사이좋게 지내는 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쑥, 억새, 칡순, 조뱅이, 소루쟁이, 명아주, 엉겅퀴, 살갈퀴, 한삼덩굴, 개모시풀, 달개비.… 하다못해 지난 해 너무 지긋지긋해서 채머리가 흔들리던 바랭이까지 단지와 항아리 속에서 지금 효소로, 술로 익어 가고 있습니다.
'땅이 살아야 거기에서 사는 생명체들이 건강을 지키고 살 수 있는데 사람도 생명체인지라 죽은 땅에서는 살 수가 없다. 앞으로 농사를 짓되, 땅을 죽이는 제초제나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쓰지 말고, 또 항생제가 섞인 사료를 먹여 키운 돼지나 소나 닭똥으로 만든 사이비 유기질 비료도 쓰지 말고, 퇴비와 부엽토를 써서 농사를 짓자.'
산비탈에 몇 해씩 묵혀놓은 땅은 그 동안 자연의 힘으로 되살아나 땅 밑에 미생물들이 다시 살기 시작하고, 그 미생물들을 먹이로 지렁이들이 꿈틀대고 있으니, 조금 힘은 들어도 잘 일구어 농사를 짓으면 건강한 식품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생깁니다. 망초대를 뽑아내면서 초나라가 망할 때 온 산과 들에 망초대가 하얗게 차이를 치듯이 피었다는 옛 이야기가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땅을 묵혀놓으면 그 땅에서 제 철을 만나는 것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으뜸은 다북쑥과 명아주와 바랭이와 망초 들이지요. 묵히는 햇수가 늘어남에 따라 억새풀과 칡넝쿨과 가시덩굴들, 그리고 요즈음에는 아카시아가 차례로 이사를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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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윤구병 선생님의 "꼭 같은 것보다 다 다른 것이 더 좋아"와 "철학을 다시 쓴다"를 소개한 적이 있는데, 오늘은 "잡초는 없다"를 소개하고자 한다. 며칠전 학교에 교직원으로 계신 윤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아들을 대안학교에 보내셨는데 그것도 높은 경쟁률을 뚫어야 하고 만만치 않은 교육비가 든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렇다면 결국 그건 대안이 아닌 고액 사설학원에 아이를 보내는 것이 아닌가. (물론 자식 사랑과 그에 대한 자신의 헌신을 자랑하며 눈을 빛내는 윤선생님께는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다)
유행처럼 번져가는 대안학교가 결국은 대안이 되지 않는구나.
그렇다면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까. 그런 고민을 하는 학부모가 있다면 윤구병 선생님의 책을 넌지시 건내주고 싶다.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밭귀퉁이 잡초에게도 따뜻한 눈길을 주며 그것이 그것 스스로 소중하다고 말해주는 부모가 되길. 그리고 그런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들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는 시대가 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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