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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읽는 일은 즐겁다. 작품을 읽으며 작가를 아는 듯한 느낌을 갖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 나오면 나도 몰래 메모를 하고, 리스트에 넣어두었다가 구매를 하게 된다. 책이 오면 바로 읽어보지 않고는 못배기는 그런 감정을 갖게 되는 일.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는 일이다. 이승우 작가의 책이 좋다. 그의 작품을 읽은 건 고작 두 편 뿐이지만, 그의 작품은 나를 감동케 했다. 그의 전작읽기를 하고 싶을 정도다. 작가의 신작인 『신중한 사람』을 읽고도 그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려 제목을 꼽아보고 있을 정도다. 나는 신중한 사람인가, 라는 질문을 해 볼 책을 읽었다.
나는 신중한 사람인가, 라고 질문을 해본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신중한 사람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신중하지 못하고, 때로는 즉흥적이기도 하다. 내가 감성적이어서 이성적인 사람이 부러웠다. 그런데 이성적인 사람과 살다보니 그게 다는 아니었다. 이성과 감성의 특성을 골고루 가지고 있는 사람이 더 나을것이란 생각을 했다. 너무 신중한 사람과 살아보라면 나는 '글쎄'라는 대답을 할지도 모르겠다. 신중한 사람은 어떻게 보면 너무 답답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단편집 『신중한 사람』에는 여덟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책 속의 단편에는 거의 신중하다 못해 소극적인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너무 신중해서 안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첫 번째 작품 「리모컨이 필요해」를 볼까. 취직을 해야하지만 그 나이에 제대로 취직을 못한 주인공은 선배가 주선한 일주일짜리 강의 자리를 위해 4시간 기차를 타고 왔다. 강의료가 얼마가 나올지 알수 없는 상황에서 비용을 아낄겸 그는 여관에 머물기로 했다. 자다가 시끄러운 소리에 깨어보니 TV가 켜져 있었고, TV를 끄기 위한 리모콘을 찾을 수 없었다. 강의를 나가는 길, 여관집 주인 남자에게 리모콘에 대해서 물어보려 하지만, 그의 조심스러운 성격탓에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한다.
「신중한 사람」은 너무 신중해서 안타까운 사람의 이야기이다. 시골에 집을 짓고 꾸며 정원생활을 하고 싶었던 Y라는 그. 애지중지 가꿔왔던 주택을 뒤로 하고 외국으로 발령이 나 이웃집 남자에게 얼마간의 수고비를 주며 집을 관리해달라고 외국으로 떠났다. 3년이 지난후 딸아이는 그곳에 공부하겠다고 남았고, 아내 또한 딸아이와 함께 남았다. 비싼 학비를 대기 위해 한국에 와서는 직장을 그만둘 형편도 되지 않았다. 서울에서 살고 있었던 아파트도 팔아버렸고, 그는 정원이 딸린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곳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더군다나 3년전의 관리가 잘된 집의 외양은 형편없어져 버렸고, 그 집에 살고 있었던 사람은 이웃집 남자에게 집을 전세로 얻은 사람이었다. 그는 갈 곳이 없었다. 또한 자신의 집을 찾으려하지만 그의 신중한 성격은 마음대로 하지도 못한다.
단편집에서의 주인공들은 저자의 직업처럼 글을 쓰는 이가 많다. 「리모컨이 필요해」에서도 그렇지만, 「오래된 편지」에서 스승인 J선생의 사후 유고집을 내기로 하고 집필실을 정리하는 제자인 윤의 직업도 그렇다. 오래전 아직 등단하지 못했을때 선생에게 보냈던 오래된 편지를 발견하면서 선생이 자신을 바라보았을 시선이나 해묵은 감정들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습작기의 글들은 어쩌면 피하고 싶었을 글들이고, 누군가의 등단작이 누군가의 글을 베껴 쓴 것이라 바로잡고자 했던 치기어린 감정이 배어있는 글이었다.
「딥 오리진」의 주인공은 세 편의 소설을 쓴 작가이다. 그는 동네 커피전문점을 돌아다니며 주로 글을 쓰는데 카페 '딥 오리진'에서는 일주일에 두 번쯤 방문하는 곳이다. 그곳을 다시 찾아갔을때 한 여성으로부터 한 달 열흘 만에 그 곳을 방문하였다며, 그가 한 달 열흘 동안 오지 않았던 것도, 그 곳에서 글을 쓴것도 자신 때문이라는 한 여성의 말을 들어주며 일이 꼬이게 되는 작가가 또한 주인공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자신의 책을 읽고 있을 것이라는 망상을 하게 되었던 작가, 그 사실을 점점 깨닫는 작가의 마음은 누구나 바라는 마음일수도 있겠다.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의 책을 읽어주는 기쁨, 즐거움, 이 모든 것은 작가들이 가장 바라는 바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자기가 가진 것을 팔아, 혹은 빚내어서라도 여자의 마음을 얻고 싶었던 한 남자. 그가 집 보증금과 카드 빚, 사채까지 써서 모든 것을 날리고 '칼'을 배달해 주는 일을 하는 남자의 이야기가 있는 「칼」을 읽노라니 사람이 말을 하고 산다는 것과 말을 하지 않고 산다는 것에 대한 상념이 생겼다. 말을 하고 있으면 말을 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말을 하지 않고 있으면 말을 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94페이지, 「칼」 중에서)
우리는 해야 할 말과 하지 않아야 될 말도 하는 사람이 있다는걸 알수 있었다.. 해야 할 곳과 하지 않아야 할 곳을 제대로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냐만, 우리는 실수하는 인간이기에 종종 말실수를 하게 된다. 주변에서 가까운 사람들이 말 실수 때문에 서로 상처받고 토라지고 하는 걸 보면서, 이승우 작가의 제목처럼 '신중한 사람'이면 얼마나 좋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마디 말을 뱉을때도 신중을 기해, 이 말을 꼭 해도 될 것인가, 만약 이 말을 하면 상대방이 상처받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 아, 그러고보니 나부터도 말을 할때는 신중을 기해야 겠구나.
윗 글에서 신중한 사람은 어떻게 보면 답답하다고 느껴질수도 있다고 했다. 리뷰를 써오면서 나름의 느낌을 적다보니 부주의한 사람보다는 신중한 사람이 훨씬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답답할수도 있다는 말을 취소하고 싶어졌다. 신중함이 무엇인지 신중한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지 알수 있는시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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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나는 단편을 그닥 즐겨읽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돼먹지 못한 내 관점에서 볼때, 현대 단편들의 특징은 어떤 모호함을 통해 돼먹지 못한 진실을 숨기고, 나 찾아봐라는 듯이 독자를 농간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명쾌하고 또렷하기만 하다면 그게 무슨 문학이겠느냐만 지나친 상징성과 모호성은 문학이라는 것이 나를 문학으로부터 소외시키고, 열등감을 주기도 한다.<리모컨이 필요해>에서는 여관방에서 매일 새벽 다섯시 반마다 알람처럼 켜지는 TV와 다섯시 반에 일어나야 한다는 윤락녀와의 관계가 그렇다. <신중한 사람>에서는 귀에 이상이 생겼는데 알 수 없는 이유로 그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과 정말로 미칠것 같은 순간 그 증상이 한 번 나타나는 일이 그렇다. 이미를 떠나 어디로 가려고 여관방을 잡고 물가를 산책하는 <이미, 어디>의 사람들이 안개속으로 사라져간 곳은 어디일까.<딥오리진>의 망상속의 그녀는 자기 자신일까, 다행히 <신중한 사람>에 실린 단편들은 때때로 몽환적 암시를 통해 무언가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들도 있지만, 대개는 어떤 사람들, 특히 그가 '신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내면을 형성하는 그 배경과 사건들에 집중한다. 속터지고 억울하고 재수없는 일의 연속이다. 이야기
속의 개인에 집중해보자. 신중한 신형철은 단편을 진실을 발견하는 순간이라고 했다. 나 나름대로 이승우 단편에서 발견되는 진실이라면 어떤 개인,
어떤 타자를 통해 투영되는 나 혹은 나의 일부, 혹은 나의 가능성의 일부일지 모르겠다. 결국 문체의 이야기로 되돌아온다. 진실을 끝까지 탐구하는
그의 해부적인 문체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 속의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지켜질 자존심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허물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지켜질 자존심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허물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반복)(반복)(반복).이승우는 초라한 시간강사의 내키지 않는 하루하루의 일상을 통해 나에게 말을 건네고 그것을 반복한다. 쳇 자존심 따위. 허물어진 자존심 따위.... 소설집에 수록된 여러 단편들이 이승우 특유의 문체 외에 주목할만한 점이 또 있다. 표절과 망상에 대한 주제 의식이 그것이다. 한 일년 되었나 그의 소설 지상의 노래가 자신의 작품을 표절했다고 주장하는 기사와 소설이 등장했었다. 표절이 심각한 사회 이슈가 되고 sns가 자극적인 이슈라면 티클 하나라도 순식간에 세계 곳곳을 덮치는 세상임에도 그것은 큰 이슈가 되지 않았었다. 다행히도 정말로 다행히도 표절이라 주장하는 사람이 자신의 원소설에 프레임을 몇겹 입혀 쓴 소설을 통해, 그가 표절의 원본이라고 '주장'하는 원소설을 읽어볼 수 있었다. 이승우 작가를 향했던 의혹과 실망감이 일소에 해소되었다. 이승우 작가는 그 일을 통해 엄청나게 마음 고생을 한 듯, 이 소설집에 그 일과 관련된 내면과 인간의 본성을 주제로 한 작품이 무려 서너편이나 되었다. <오래된 편지>는 한 때 망상적 자신이 동료가 다른 동료의 대학 습작을 표절했음을 주장하는 잊고 있던 자신의 오래된 편지를 지도교수의 유고집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내용이다. <딥오리진>은 자기 때문에 커피숍에 매일 오는 걸로 착각하는 어떤 여자가 화자의 내면 깊숙이에서 질투하고 있던 어떤 작가의 소설을 자신이 다 썼다고 하는 얘기를 듣고 그 소문이 인터넷을 통해 빠르게 확산되는 과정을 그린 약간 으스스한 추리소설 느낌이 나는 작품이다. <하지 않은 일>은 표절에 휘말린 이승우 작가 자신이 겪은 정신적 고통을 고스란히 그려낸 작품으로 보인다. 두 소설 모두 읽어본 내 입장에서는 길고 긴 장편 소설에서 한두 페이지에 주인공의 직업이 본인이 쓴 소설의 주인공과 같다는 점 이외에는 유사성조차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값싼 노이즈 마케팅으로밖에 해석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생긴 중견 작가의 치명적 입지보다는, 무심히 무시하는 편이 사태의 현명한 선택이다라고 생각했었는데,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지옥같은 마음을 그대로 칼날을 들이대고 낱낱이 해부하였다. 난해하지도 몽환적이지도 않고, 개인과 개인 사이에 놓인 참담한 관계와 그것을 극복하는 도구로서 칼을 품는 사내에 대한 이야기 <칼>이 전체를 통틀어 가장 공감되었다.
상징적 의미의 칼. 살짝만 갖다 대도 스윽 하고 베어질 것 같이 날카롭고 잘 갈아진 칼. 불안과 절망으로 점철되었지만 끊을 수는 없는 어떤 관계의 지속을 위해서 우리는 값비싼 명품 칼을 하나씩 마음에 품자고요.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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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리뷰를 쓰면서 가장 좋은 점은 좋아하는 작가가 많아진다는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이승우 작가는 ‘식물들의 사생활’이란 책으로 만났는데 글이 아름답고 예뻐서 좋아하게 된 작가다. 그가 이번엔 8편의 단편을 가지고 책을 냈다. 단편이란 이유로 살짝 망설였는데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8편의 단편이 모두 쉽지 않다. 꼭꼭 씹어 읽지 않으면, 혹은 자칫 다른 생각을 하면 그 흐름을 따라갈 수 없다. 하지만 제대로 정신 차리고 읽었다면 참 좋은 말들이 많은 책이다. 8편의 단편을 모두 요약할 수 없지만 기억에 남는 작품 위주로 이야기 하고 싶다.
책의 제목인 ‘신중한 사람’은 신중함 때문에 곤경에 처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전원생활을 꿈꾸던 남자는 정성을 다해 교외에 집을 짓는다. 공들여 집을 지은 남자는 가족과 함께 그 집에 살고 싶었으나 해외 발령으로 인해 얼마 살지 못하고 3년 동안 해외로 나간다. 이웃에게 집의 관리를 맡긴 남자는 3년이 지나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으나 그곳엔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 자신의 집이지만 다른 사람이 주인인양 살게 된 이상한 동거. 신중함이란 무엇일까? 남자에게 신중함이란 시끄러움과 번잡함을 피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정말 신중하고 정확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엔 신중하지 못한 그 남자의 모습은 우습기만 하다.
‘오래 된 편지’에서는 인간의 이중성을 엿본 것 같아 뜨끔하다. 은사의 집필실을 정리하게 된 윤은 J선생의 집필실에서 보게 된 사진과 자신이 아닌 것처럼 보낸 편지를 보고 뜨악 한다. J선생의 숨기고 싶은 비밀과 윤이 숨기고 싶은 비밀을 쌤쌤으로 만들어 버린 사람. 어쩜 우리들 모두 마찬가지 아닐까? 서로의 비밀로 퉁을 쳐 침묵하게 하는 것. 사람이란 그런 것 같다. 내 약점을 살아생전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것. 사람의 마음을 참 기묘하게 잘 표현했다.
칼을 배달하는 삶을 사는 남자 이야기 ‘칼’은 내 안의 묘한 감정을 일깨운다. 칼이 없어도 불안하지 않은 사람은 칼을 가지지 않고도 잘 살지만, 칼이 없으면 불안한 사람들은 칼이라도 지녀야 겨우 살 수 있다고. 실제로 그 사람들은 칼을 가지고도 애초에 칼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잘 살지 못한다고 그는 말했다. (219) 누구나 마음속에 칼을 갈며 산다. 이 책에서는 그게 실제 칼이지만, 보통 사람들은 마음속의 칼을 가지고 산다. 그 칼을 가지고 누군가는 상처를 주기도 하고, 누군가는 그 칼에 베이기도 한다. 칼 없이 무던하게 사는 사람들이 제일 좋겠지만 삶이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 내 약함을 감추기 위해 칼이 필요한 사람들. 묘하게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참 좋은 단편이었다.
‘어디에도 없는’ 이란 단편에서는 소통 부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외국에 있는 외삼촌 덕분에 해외로 나가 일하려고 하는 남자가 주변을 정리하고 여관으로 간다. 비자가 나올 기간만큼 머물기 위해.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비자는 나오지 않고 남자는 여관 주인과 논쟁을 벌이게 되는데...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지만 단지 그런 인상이라는 이유로. 이 세상은 때론 불안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앞으로 어떤 인생일 펼쳐질지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단정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불안 속에 던져졌을 때 어쩔 줄 모른다. 전체적으로 유쾌하거나 즐겁지는 않다. 하지만 작가가 주는 말들이 참 좋다.
공유하고 있는 기억이 많으면 과거에 집착하게 되고 과거에 했던 일을 떠올리게 되고 과거의 시간 속에 사는 것처럼 살게 되고 과거의 시간 속에 사는 것 같은 착각을 가지고 현재를 살게 된다. (이미, 어디 중 139) 어떻게 보면 말장난 같은 글들이 많이 나온다. 하지만 그 글들을 따라가다 보면 인생이 보이는 것 같다. 그 인생이 우울하고 암울 할 수 있지만 우리 네 평범한 삶 같아서 이해할 수 있다. 단편들이라서 솔직히 좀 어려운 부분들이 있었다. 그래도 이 책의 리뷰를 어떻게든 쓰는 이유는 흔적을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승우의 다른 책을 찾아서 조만간 읽어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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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람을 얼마만큼 믿을 수 있는가 하는 기준을 자신으로 삼으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나는 나를 얼마나 믿을 수 있나, 얼마나 믿고 있나. 내가 나를 이렇게 이 강도로 이만큼의 질로 여기고 있다는 걸 자각하고 나면, 내가 다른 사람을 혹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여겨줄 것인지 견주어볼 만하지 않을까 싶다. 한마디로 '못믿겠다'이다. 그런데 이게 또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아무도 그러라고 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소설 읽는 시간이 길었다. 돌아보니 하루에 한 편 이상 읽기 힘들었다. 참고 두 편 읽은 날은 체한 느낌마저 받았다. 실제로 아프기도 했고. 그게 소설 때문이었는지, 아픈데도 이 책 속 소설을 읽어서 겹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쉽지 않다. 읽고 싶은 글이고 읽어야 할 글이고 읽으면서 좋다 싶은데도 읽는 내내 몸과 마음이 아프다니, 그만둘 생각이 없으니 이 노릇을 어찌해야 할지.
모두 8편의 글. 책 제목처럼 등장하는 주인공 어느 한 사람 신중하지 않은 이가 없다. 이제까지 신중한 태도는 좋은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 책으로 말미암아 신중하기만 한 건 신중하지 못한 것만큼이나 문제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신중하면서 치밀해야 한다고 했으니, 그러고 싶기는 하지만, 사람이 또 불완전하기 그지없어서 신중하면서 치밀하기는 어지간해서는 이를 수 없는 경지로만 보인다. 차라리 어중간하게 신중하고 어중간하게 치밀해서 실수와 실패를 인정하는 게 더 나아 보일 만큼.
주인공들의 딱한 처지에 이입되어 내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읽었다. 내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사소한 억울함이나 원망 같은 것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던 탓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도 누군가에게 가해자로 처신하지 않았을까 하는 데에 생각이 이르렀다. 작가가 공을 들여 묘사하고 있는 인물들의 속사정을 보면 알아챌 수 있었듯이 나도 내 본성을 알고 있고 한편으로 또 모르는 척 하고 있었으니 충분히 그랬을 것 같았다. 내가 누군가로 인해 아프고 힘들었듯이 나로 인해 누군가도 그러했을 텐데, 어쩌면 지금도 그러할 텐데, 마치 나는 세상 누구에게도 피해를 끼치지 않고 살고 있다는 듯 자만하고 있으니. 얼마나 더 내 안을 돌아보아야 하는 걸까. 끝이 없는 길이지 싶다.
띄엄띄엄 그러나 끊임없이 이 작가의 글을 계속 찾아읽겠다. 다만 사서 읽지 않고 빌려 읽는 이유를 말하지 못하겠다. 나 자신을 너무 가까이 만나 알게 되는 두려움 탓이라고 하면 핑계가 될지. 옆에 둘 수가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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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순신 장군의 열풍에 우리나라가 뜨겁다. “생즉사, 사즉생”의 각오로 두려움 없이 왜군과 맞서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두려움과 비겁함을 조금이나마 몰아내고 싶은 소심한 사람들의 바람이 이 열풍 속에 감춰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백성을 자신의 몸보다 더 사랑하는 지도자에 대한 갈망이 영화 “명량”에 열기를 더하고 있는 것은 그보다 더 확실하다. 위대한 사람들과는 반대로 될 수 있으면 ‘가늘고 길게’ 살고 싶은 사람들은 남의 눈에 띄는 걸 자제하고, 일어난 문제에 대해서는 비켜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다행히 운이 따라주어서 평생 평탄한 삶을 누리다 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역사는 ‘짧고 굵게’사는 대신 ‘가늘고 길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피나는 성실함과 몸 사림 덕분에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책을 덮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늘고, 길게’ 사는 일이 ‘짧고 굵게’ 사는 것보다 안전하고 편안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양보할 일과 참을 인자를 가슴에 새긴 횟수도 훨씬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우리 사회는 이런 사람들을 무시하면서 발을 걸고 넘어뜨리기를 좋아한다. 이 책은 이렇게 ‘가늘고 길게’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놓았다. 대부분 실패담이다. 책의 제목인 “신중한 사람”을 다시 읽어보면 소심한 사람으로 읽혀지고 소심한 사람들은 대부분 목소리가 작기 때문에 사회에서 그다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남들에게 질질 끌려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쉽고 다른 사람들의 횡포에 혼자 가슴앓이만 하기 일쑤다. 이런 면에서는 신중함이 비겁함으로 비쳐진다.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하는 권리는 온데간데없이 자신의 밥그릇마저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고도 찾아올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답답한 처지가 쉽게 그들의 몫이 되기 때문이다. 신중한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 특히 자신의 실수나 오점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잘못이나 비리를 제대로 물고 터트릴 용기도 없다. 상대방과 싸워야 할 경우, 자신이 써야할 힘이 부족할 거란 생각을 미리부터하게 되는 것도 실제로 힘이 부족하기 보다는 그런 것들이 귀찮고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이 두렵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종종 자신이 저지른 나쁜 행동은 최대한 숨겨지기를 원해서, 겉으로는 선한 이미지를 극대화하는 경우가 많다. 아래의 인물들처럼. 윤은 자신에게 소설을 가르쳐준 J선생이 갑작스런 사고사로 죽자 그의 집필실에서 유품과 유고를 찾아 분류하는 일을 맡았다. 평소 결점 없이 고결하게만 느껴왔던 J선생의 책상 서랍에서 불미스러운 사진이 나오고, 자신이 젊은 시절 익명으로 보낸 투고 편지가 나오자 그 두 가지를 공개하지 않는 것으로 스승과 자신의 과오를 함께 덮어버린다.(〈오래된 편지>) 신중한 한 소설가는 자신보다 잘 나가는 동료 소설가를 질투해 남몰래 악의적인 내용을 인터넷에 유포하고는 그 일이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자기기만의 가면을 덮어 써버린다.(<딥 오리진>) 이 소설집 속에는 유난히 여관이 많이 나온다. 안정된 삶을 살기 위해 남들보다 훨씬 더 신중하게 사는 사람들이 온전한 집 대신 여관을 전전하게 되는 것은 삶의 아이러니다. 멀쩡한 자신의 집에서 살기 위해 여관처럼 하루 숙박비 만 원씩을 지불해야하는 처지에 놓인 <신중한 사람>의 Y, <리모컨이 필요해>의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지방으로 내려와서는 가장 싼 여관방에서 기거하는 중이다. <이미, 어디>에서는 여관에서 일하고 있으면서 호수로 사라지는 사람들을 고스란히 지켜보는 나가 있고, 살던 지하 단칸방을 처분한 뒤 외삼촌이 있는 E국으로 출국할 날짜만 기다리는 유가 오래 된 골목 여관에 몸을 의탁하고 있다. 여관이란 곳은 안정된 삶하고는 애초에 거리가 먼 장소다. 그런데 신중한 많은 사람들이 여관신세를 질 수밖에 없는 것은 온전히 그 개인들의 상황 탓일까 신중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대부분 사회적으로 높은 가치이기보다는 자신만의 평화로운 삶을 꿈꾸는 정도다. 그런데 사회는 이런 신중한 사람들을 비겁하다고 손가락질하며 무시하기 일쑤다. 때로는 그 소심함을 이용해서 신중한 사람들이 가진 작은 꿈마저 약탈해간다. 결국 소심해서 비겁해진 신중한 사람들은 자신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이미’살았던 곳을 떠난 상태에서 ‘어디’에도 받아주지 않기 때문에 비현실적인 삶에 엉거주춤 거리며 여관 방을 전전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다. 신중한 사람들은 아내의 불가피한 취업을 막을 능력이 없고(<리모컨이 필요해>), 기러기 아빠로 살면서 자신의 집까지 빼앗겨버리는(<신중한 사람>), 못나고 답답한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축하해줄 수 없는 좁은 마음을 가져서 자신의 질투심을 익명의 가면 뒤에 숨겨버리고 싶었던 (<오래된 편지>,<딥 오리진>) 비겁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런 못나고 비겁하며 답답할 정도로 성실한 사람들이 없다면 이 세상이 무슨 수로 하루라도 지탱할 수 있을 것인가. 목소리 큰 사람들이 자신의 큰 목소리를 당당하게 내지를 수 있는 이유는 신중한 사람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성실히 실천해주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도 혼자서는 역사에 유례없는 23전 23승의 빛나는 전공을 세울 수는 없다. 그가 시키는 대로 말없이 노를 젓고, 고된 훈련을 묵묵히 감수해준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명량’이 있었고, 장군의 이름이 빛날 수 있었다. 이 책은 신중해서 비겁해지고 비겁해졌기 때문에 현재에 머물 수 없어서 ‘어디’로 사라지고 싶은 순간들이 많은 신중한 사람들에게 그것이 ‘순전히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문장 하나하나에도 신중하기만한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였다. 신중해서 소심하고 비겁한 독자인 나도그것을 조심스레 받아 읽었다. 신중하다는 것이, 순전히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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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개인의 천성이라고 해도, 요즘 같은 세상에 그저 신중하기만 해서 살아남을 수가 있을까요? 이승우 작가님의 단편집 <신중한 사람>에는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각 소설의 주인공들 중에는 답답할 만큼 신중한 사람도 있고, 신중한 게 아니라 망상에 빠져 현실 적응을 못 하는 사람도 있고, 저렇게 살지 말고 좀 신중해졌으면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너무 신중하다 싶은 사람은 대체로 나이를 지긋이 먹은 데다, 사회에서 정상의 범주 안에 드는 직장에서 여태 스트레스깨나 받으며 살아 온 이들이었고요. 음... 다소 현실부적응적 모습을 보인다 싶은 주인공은 공교롭게도 두 명 다 소설가 신분이었습니다. 잘못된 판단으로 신중치 못한 행동을 일삼다 인생을 망치기 직전까지 간 주인공은, 뚜렷한 직업이 없는, 아직 서른을 넘기지 않았으니 젊다고 할 만한 청년이었습니다. 이 중 어느 편이건 간에, 옆에서 바라보기에 딱하다 싶을 만큼 전도(轉倒)와 실패를 거듭한다는 점이 공통이었습니다. 때로는 우습기도 하고, 때로는 무섭기도 한 주인공들의 행보와 사고를 훔쳐보면서, 저런 모습들이 다소의 과장과 희화화가 개입되었을망정 정신 없이 돌아가는 각박한 사회를 사는 우리들의 하루하루와 다를 바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씁쓸한 느낌에 빠져들게 하더군요.
<신중한 사람>은 정말 답답한 사연입니다. 주인공은 평범한 회사원으로서, 대학생 딸 하나를 아내와 함께 키우는 가장입니다. 그는 도시에서의 팍팍한 삶에 진력이 나서, 한적한 시골에 주택 하나를 장만합니다. 삶의 터전을 이리로 아예 옮기자는 제안에, 딸은 노골적으로 "신분 추락"의 치욕이라도 겪는 양 반발하고, 그런 딸의 태도에 주인공은 "저런 말로 제 부모가 상처를 받는 줄 모른다"며 안타까워합니다. 그는 갑자기 나이지리아 지사에 부임하라는 회사의 지시를 받고,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전원주택의 처분에 고심하게 됩니다. 부양 가족이 있는 가장더러 치안도 위태한 아프리카로 가라면 누가 따를까 싶어, 회사에선 가족의 유럽 거소를 마련하고 주거를 지원하겠다는 제안을 합니다. 딸과 처는 반색하지만, 주인공의 마음이야 착잡할 수밖에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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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좌석에 앉아 활주로를 달리다 지면에서 허공으로 떠오르는 순간의 그 야릇한 쾌감을 선사한다. 그러나 쾌감은 거기까지. 두 번째 문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당신은 지옥문을 통과한 것이다.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당연히 당신이 결코 좋아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한 마디로 ‘신중한 사람’들이니까. 신중한 사람은 충분한 사고를 거쳐 실수 없이 의도했던 바를 이루는 사람을 일컫는다. 인간관계나 일에서 타인에게 신뢰를 주는 사람. 이런 기준에 의하면 나는 절대 신중한 사람이 아니다. 일단 저지르고 그때그때 수습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다. 그나마 수습이 잘 되려면 재빠른 상황판단과 치밀함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데 애초에 생각이 깊지 않았으니 치밀함을 가질 리 없다. 매 순간 되는대로 그럭저럭 수습되지 않은 수습으로 일상을 수습한다. 그것은 수습이라 할 수도 없고 수습이 아니라 할 수도 없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자신이 뭔가를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상당한 시간을 들인다는 것인데 이는 신중히 처리한다기보다는 매번 결정을 유보하는 태도에 가깝다.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유보한 채 신중한 태도만 유지하고 있는 사람. 우유부단한 사람이다. 이승우 소설의 신중한 사람들은 ‘신중하지 않으면 치밀하기 어렵다’라는 생각을 지니고는 있지만 치밀하지 못한 신중함만을 유지해서 결국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서 불행과 조우한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나와 똑같은지. 그걸 참고 보는 일은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가 신중함을 유지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사람은 어차피 다른 사람과 부딪치며 관계를 맺고 크든 작든 ‘견뎌야 할 불편한 사태’를 겪는다. 그런 부침이 세상도 변화시키고 삶을 개선하는 데 필요한 것이리라. 그는 이 불편한 사태를 처음부터 거부하기 때문에 관계를 맺고 접촉하는 일 자체에 회의적이다. 이 신중한 사람의 세계엔 거칠고 무례하고 안하무인인 타인들로 가득하다. 가족도 예외가 아니다.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려 애쓴다. “현상이 유지할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현상을 유지하지 않으려 할 때 생길 수 있는 시끄러움을 피하려고 어쩔 수 없이 현상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만약 변화를 선택한다면 그것은 변화하지 않음으로써 견뎌야 할 더 불편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함일 뿐,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아니다. 감정과 사고, 행위를 지배하는 욕망,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 모두 명확한 것은 아니다. 욕망은 고정된 어떤 것이 아니고, 꿈틀대며 끝없이 흐르는 시간과 같다. 또한 욕망은 상호충돌하고, 모순적이다. 반면 언어는 비가역적이며 공간적이다. 언어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목표를 지닌 셈이다. 설득과 화해가 불가능한 순간을 보면 이내 침묵하고 침묵이 반복되면 시도조차 포기한다. 이 냉담한 세계를 신중함으로 가장한 화자는 끝없이 회의하며 타자의 무례하고 모호한 신호를 파악하려 애쓰고 또 언제나 실패한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 역시 사건의 주체이자 객체라는 것이다. 타인과 마찬가지로 이성과 욕망의 불확정성을 지닌 측정 불가한 단자이며 관계 안에 연루된 자, 타자로 존재한다. 지방 소도시 허름한 골목의 여관 주인은 손님이 왜 “리모컨이 필요”한지 이해할 수 없다. 새벽녘, 그의 옆에 누운 노래방 도우미가 “애들 밥 먹여 학교 보내야”라는 말을 하기 전까지 새벽이면 자동으로 켜지는 텔레비전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신중한 사람의 신중함은 사실 두려움에 가깝다.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가 도저히 파악 불가하다는 것, 그러나 타인들은 이 세계에서 잘도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경악과 두려움. 자신 이외에 모든 타인을 적으로 돌려놓는 이 두려움이 결국 자신의 선택 아닌 선택을 정당화하고 급기야 자신을 스스로 기만하는 데에 이른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부당함을 내면화하고 집주인이 자발적으로 세입자가 되는 전도가 발생한다. 단지 더 번거롭고 성가신 일을 피하고자 자기 집의 지저분한 구석방을 임대할 수밖에 없는 무력한 자폐. 이 골방에 갇혀 자신이 이루어낸 꿈과 희망을 속삭인다. 때론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을 했다는 추문에 휩싸인 한 작가처럼 골방에 틀어박혀 저주를 준비한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란 결론을 내리고 세계와의 전면전을 준비한다. 그러나 전면전이라니…. 저주와 냉소적 주문이라면 모를까. <신중한 사람> 평생 전원생활을 꿈꾸며 수년에 걸쳐 교외에 한적한 주택을 완성한 남자는 정작 아내와 딸의 거부로 서울을 벗어나지 못한다. 가족을 설득해 함께 살거나 흩어져 사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대의 가족은 설득으로 통하지 않는다. 그는 신중한 사람답게 현상을 유지하고 때를 기다린다. 회사로부터 아프리카 지사로 발령을 받자 조기 은퇴를 고려하나 가족을 영국에 거주토록 하겠다는 제안에 아내와 딸은 은근히 가장의 책임을 강요한다. 해외 근무가 끝나자 딸은 영국에서 새로운 진로를 찾겠다며 공부를 시작하고 아내는 딸과 남편 중 누가 더 불편할 것인지 묻는다. 신중한 그는 침묵한다. 그에게 침묵은 실패한 소통이고 그의 아내에게는 성공적인 설득이다. 설득당한 자가 없는 설득은 설득이 가진 중요한 특성이다. 기러기 아빠가 되어 딸의 남은 공부를 책임져야 하는 그에게 퇴직 후의 완벽한 전원생활은 여전히 때를 기다리는 일이다. 문제는 돌아갈 집이 바로 그 전원생활을 위해 지은 집밖에 없다는 것이다. 신중한 그에게 닥치는 문제는 이제부터다. 3년간 이웃에게 관리를 맡겼던 그 집엔 이미 다른 사람이 들어와 살고 있다. 이웃에게 관리를 부탁하며 매월 소정의 금액을 보냈건만 이웃은 사라지고 험악한 사내와 여자가 자신의 왕국을 훼손한 채 새로운 지배자가 되어 있다. 종이 쪼가리 전세계약서를 정당하게 들이미는 그들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이웃에게 전화를 걸어보는 일이다. 수십 번을 시도하지만, 수신 제한 안내만 들려온다. 그는 ‘억지와 불합리와 막무가내를 거북해’했기에 급기야 이 번거롭고 불편한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자신의 영토 중에서 가장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골방에 월 1만 원의 임대차 계약을 맺고 들어간다. 임차인은 안하무인 안방을 차지하고 들어앉아 있고 골방의 임대인은 점점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한다. 회사를 오가는 틈틈이 신중하게 정원과 잔디를 복구하고 정자를 보수하며 훼손된 왕국을 재건하던 그는 갑작스러운 어지럼증으로 쓰러진다. 세상이 허공에서 돌고 돌던 끝에 ‘길고 풍부하고 끈질기고 어지러운’ 울음이 터져 나온다. 의사는 그의 병이 아주 심각하고 오래되었으나 스스로 병에 적응해서 증상을 못 느꼈노라 말한다. 불합리한 상황, 막무가내인 사람들, 불편한 감정, 의사소통의 불가능이 그의 신중함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데, 침묵으로 수렴되는 말과 행위를 신중함이라 자칭하며 ‘세상이 기우뚱하면 몸을 반대 방향으로 기울여 평형을 잡’았던 세월에 그의 몸이 알아서 증상에 적응했던 것이다. 이제 그는 낮엔 지칠 때까지 일하고, 매일 한 번씩 사라진 이웃에게 전화한다. 매번 들려오는 수신 제한 안내로 이웃과 대화를 나눈 것 같은 위안을 받고, 지저분하고 냄새나지만, 이제는 편하고 익숙한 ‘자기 집’처럼 잠 잘 오는 골방에 틀어박힌다. 가끔 걸려오는 아내의 전화에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고 이루어낸 꿈과 행복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안방을 점유한 임차인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속삭이며. 우리는 꾸물꾸물 웅얼거리며 웅크린 해충이 된 그레고르 잠자를 다시 만날 수 있다. <하지 않은 일> 자신의 소설이 표절작이라는 추궁을 받는 소설가가 있다. 더불어 명백한 증거(공개적인 제출은 이루어지지 않는)까지 갖추었다는 익명의 전문가 증언도 등장한다. 그러나 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았다고 답하는 것밖에 더 할 말이 없다. 하지 않은 일은 내가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모든 추궁 자와 증인들이 그러하듯 그들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다. 하지 않았다, 가 아니라 했다는 자백을 원하는 것이다. 하지 않은 일을 어떻게 했다고 할 수 있는가. 추궁은 이어지고 소문은 퍼져간다. 자신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이해와 옹호 역시 내가 누명을 쓰고 있는 것에 대한 이해와 옹호가 아니다. 그것은 응당 그들 처지에 건네야 하는 말이고 더러는 듣는 이를 불편하게 한다. 그들의 이해와 옹호는 어쩌면 그들 자신을 위한 것이다. 이해와 옹호자들에게도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하지 않았다는 나의 말이 가 닿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들의 이해와 옹호가 나에게 와 닿지 않는 것처럼. 어린 시절 문방구점의 도둑으로 몰렸던 기억, 부대 전입 첫날 여자 경험을 말하라는 선임병들 앞에서 여자 경험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당한 치욕스러운 일들이 솟아난다.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솔직하게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순간 치욕이 날아든다. 하지 않았음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서 치욕을 감수하고 혁대를 풀고 바지를 끌어 내려야 하는 현실도 보지 않았는가. 진실이 치욕이 되는 순간이다. 정말. 그런가. 하지 않은 일이란 나에게만 해당하고 나를 벗어나면 내가 하지 않은 일은 내가 할 수도 있는 일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침묵하고 골방에 틀어박히는 수밖에. 했다고 추궁하는 사람은 그가 했다고 믿고, 하지 않았다고 답하는 나는 나의 결백을 믿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나는 나 이외에 온 세계와 싸울 수밖에. 문제는 간단치 않다. 하지 않은 일과 한 일 사이에는 비난과 단죄를 원하는 구경꾼들이 가득하다. 하지 않은 일로 단죄를 당한 사람들은 넘쳐난다. 소송당한 K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단죄는 죄와 반드시 합리적 관계 혹은 인과적 관계에 있지 않다. 단죄와 비난은 이미 실행되고 있다. 죄는 자백으로 입증될 것이지만 자백이 스스로 죄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라면, 또다시 추궁은 시작되고 비난은 이어질 것이다. 죄 없음의 고백이 더욱 강력한 단죄로 이어진다. 적극적으로 자신을 방어하고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의 아내는 말한다. 하지 않았다는 말 이외에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해명할 수 있는 것이 또 있는가. 그는 방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틀어박힌다. 어린 시절 문방구점 도둑으로 자신을 몰았던 동네 아이들은 밤마다 꿈에 나타나 ‘난 아니야’라고 울부짖는 내가 무서워 잠을 잘 수 없다며 아이들이 사실을 말하고 용서를 빌었었다. 작가에게 전할 말이 있다며 찾아온 사내는 불안해 보인다. 아내는 남편을 찾아 작고 좁은 골방으로 들어가지만 그를 발견하지 못한다. 여전히 골방에 웅크리고 있던 작가.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안에 틀어박혀 있으면서도 자신이 무슨 일인가를 했다는 것을 그 누구도 자기 자신도 알지 못”한다, 라고 끝맺으며 이제 사건은 이성과 합리성, 대화와 인정, 화해와 타협의 세계에서 심령의 세계로 건너간다. 그곳에서 “난 아니야”라는 주술로 유령의 복수를 기획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힘들고 사람은 여전히 난해하다. 그래서 소설을 쓰지만, 그래서 소설 쓰기가 쉬워지지 않는다. 나는 맷집이 약하고 체력 역시 부실한 편이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느라 행동하지도 즐기지도 못하는 내 인물들을 보면 언짢고 속이 상한다. 그들에게 미안하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지만, 사랑하는데도, 그들에게서 세상의 고뇌를 벗겨내지 못했다. 그렇지만 내가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나무라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어쨌든 나는 그들을 내버리고 다른 곳으로 달아나지 않았다, 못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만, 사랑한다고 말하고서 사랑하지 않기는 더 어렵다. 내가 내 인물들을 향해 굳이 사랑을 고백하는,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 -『신중한 사람』, 작가의 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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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에서 작가는 인간은 여전히 모호하고 난해한 존재라고 말한다. 작가의 책에 해설을 맡은 정홍수는 이런 작가의 작품을 두고 "현실에 대한 피상적이고 모호한 접근에 대한 저항" "막무가내의 현실로부터 최소한의 인간진실을 지켜내려는 안간힘 " 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어조차 여의치 않은 현실 역시 작가가 그려내고 있는 세계라고 말한다. 작가는 그럼에도 그 세계를 향해 끝없이 부디쳐가고 내달린다. 그림으로 비유하자면 세밀화라고나 할까. 현실있는 그대로를 살아가는 인간의 내면의 상념들을 여과없이 묘사한다. 이승우의 묘사에는 아침점심저녁의 감정과 생각이 이 아닌 몇시몇분의감정과 생각. 그 순간의 언어와 들끓는 질문들이 있다. 때로는 내가 인지하지못했던 나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그래서 인간인 나.그런 불완전한 존재인 나와의 만남은 꽤나 불편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내가 이승우의 소설을 읽는 이유다. 그 불편함속의 모호함을 끊임없이 탐색하고 추적한다. 나는 스쳐지나갔던 질문들을 끝끝내 파고든다. 내가 왜 그랬을까 묻지 못했던 질문들의 생생한 현장이 나에게 달려든다. 그 힘이 이승우 소설의 힘이고 그런 사고를 가능케 하는것이 바로 이승우 문장의 힘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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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에서 작가는 인간은 여전히 모호하고 난해한 존재라고 말한다. 작가의 책에 해설을 맡은 정홍수는 이런 작가의 작품을 두고 "현실에 대한 피상적이고 모호한 접근에 대한 저항" "막무가내의 현실로부터 최소한의 인간진실을 지켜내려는 안간힘 " 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어조차 여의치 않은 현실 역시 작가가 그려내고 있는 세계라고 말한다. 작가는 그럼에도 그 세계를 향해 끝없이 부디쳐가고 내달린다. 그림으로 비유하자면 세밀화라고나 할까. 현실있는 그대로를 살아가는 인간의 내면의 상념들을 여과없이 묘사한다. 이승우의 묘사에는 아침점심저녁의 감정과 생각이 이 아닌 몇시몇분의감정과 생각. 그 순간의 언어와 들끓는 질문들이 있다. 때로는 내가 인지하지못했던 나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그래서 인간인 나.그런 불완전한 존재인 나와의 만남은 꽤나 불편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내가 이승우의 소설을 읽는 이유다. 그 불편함속의 모호함을 끊임없이 탐색하고 추적한다. 나는 스쳐지나갔던 질문들을 끝끝내 파고든다. 내가 왜 그랬을까 묻지 못했던 질문들의 생생한 현장이 나에게 달려든다. 그 힘이 이승우 소설의 힘이고 그런 사고를 가능케 하는것이 바로 이승우 문장의 힘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