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날 고교시절 윤리책에서나 보던, 사단칠정의 논쟁...그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책이 나왔다는 광고를 보고는 곧장 이 책을 주문했다. 책을 받아든지 5개월 후, 지난 주부터 이책을 읽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난 이책을 아직 다 읽지 못했다. 전제 586쪽에서 딱 200쪽 모자란 386쪽까지 읽었다. 웬만하면 한달이 걸려서라도 이 책을 다 읽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다 읽는 것을 포기하려고 한다. 일단 이 책을 읽으려면 조선시대 성리학에 대한 상당한 지식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단순한 사단칠정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성리학 전반과 조선 중기의 정치상, 그리고 동시대의 저술 등에 대해서도 상당한 이해가 있어야 이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 이 책은 사단칠정과 그에 관련한 성리학에 대한 개설서가 아니기 때문에 퇴계와 고봉 간에 오간 편지 속의 주된 논점들은 스스로 공부하여 습득하는 수 밖에 없다. 논쟁의 요지에 대해 완벽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이 책을 읽는 것은 과거 초야에 묻혀 학문을 하고자 하는 두 선비의 안부편지를 들여다 보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물론 나 자신의 능력이 부족한 탓에 책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했지만, 이 책의 대상이 일반 독자인 까닭에 조선중기 사상사의 전문가인 저자의 이 책에 대한 설명이 선행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그리고 이 책에는 세세한 주석이 많이 달려있으나-주로 어떠한 문구의 출처를 밝히는 주석-그러한 주석보다도 이 책에서 중요하게 언급되고 있는 심통성정도, 서명도 등에 대한 설명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궁금한 점 하나는 예스24 미디어 리뷰에 나와있는 수많은 기자들이 과연 이책을 읽었는지, 읽었더라도 얼마만큼 이해를 하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책을 읽는데 어려움이 있어 미디어 리뷰를 참고하려 했으나, 그들의 리뷰는 너무 모호하고, 이 책을 관통하는 이들의 성리학의 논쟁에 대해서는 책본문을 인용하는데만 그치고 있어서, 과연 그들이 과연 책을 제대로 읽었는지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잘 이해도 안되는 책을 왜 읽냐는 주변 사람들의 질문에 나는 '정신수양하려고 이 책을 읽는다.'라고 답했다. 개인적으로, 읽어내기에 많은 어려움이 따랐던 이 책의 미덕은 조선시대의 강건한 선비정신과 유학자로서의 겸양이 책 구석구석에 배어있다는 점이다. 책 자체는 참으로 가치가 있으니, 다음에 내가 40대 50대, 아니면 그 보다 더 성숙해지면, 다시 한번 끝까지 읽기에 도전해 보고 싶다. |
| 언젠가 내가 죽으면 나의 장례식에 몇 명이나 와줄까 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세상 사는 일 어느 하나 쉬운 것 없다 하지만 사람을 만나고 사귀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평생을 함께할 벗을 만났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사람은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았노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퇴계와 고봉, 이 두 인물의 나이 차이는 무려 26살. 이제 막 과거에 급제한 고봉, 한 시대를 풍미한 노학자 퇴계를 같은 위치에 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아닐까 한다. 하지만 2003년 선정된 ‘올해의 책’이라는 광고(?)에 혹해 구입한 이 책에는 페이지마다 셀 수 없는 따스함이 베어있었다. 단편적으로 달달 한국사를 암기하던 시절, 두 사람이 했던 이(理)와 기(氣)에 관한 논쟁 요점 정리만으로 이 두 인물이 이토록 깊은 정을 나누었으리라는 짐작을 하는 것은 불가능이었다. 성리학이라는 거대한 사상적 조류가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 서로의 입장을 좀처럼 좁히지 못하고 서로 자신이 옳다며 목소리 높이는 모습을 생각했던 나로서는 다소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 따름이었다. 물론 그들의 편지에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학문적 견해에 대한 거침없는 주장들이 이어진다. 하지만 그것은 오늘날 흔히 벌어지는 막무가내식의 핏대 높이기와는 차원이 다른 싸움이었다. 오히려 그 논쟁 속에는 선비다움이 숨쉬고 있었다. 상대방에 대한 예를 다해 존중하고 자신의 잘못을 과감히 인정, 수정하는 멋진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그러한 태도는 고봉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퇴계에게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들의 편지에서는 삶에 대한 고뇌가 묻어났다. 끊임없이 자신의 삶의 영역을 넘나드는 병고와 외로이 싸우는 그들에게 멀리나마 존재하는 그 이름을 향한 그리움은 유난히도 컸다. 그들이 겪어야만 했던 아픔은 조정 가득 간신들이 들끓고 하루가 다르게 서로에 대한 모함이 끊이지 않는 시대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벼슬로부터 물러나길 간청하는 퇴계를 헐뜯는 신하들과 좀더 높은 벼슬을 내리는 임금. 퇴계의 늙은 몸은 그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없었다. 약한 기질을 타고난 고봉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직은 젊은 나이의, 앞날이 창창한 그에게 임금의 총명함을 가로막는 간신들의 존재는 벼슬에 대한 회의를 불러 일으킬 뿐이다. 그의 강렬하고도 예리했던 기개는 그 시대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기에 그는 방황해야만 했다. 학문에 점진할 시간을 얻지 못함에 한탄하고, 지쳐가는 자신의 모습에 흔들리던 그는 46세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비록 그들은 ‘사단칠정’이라는 화두(?)앞에서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고, 그 다름 속에는 결코 서로간의 간격을 좁힐 수 없는 영역도 존재하고 있었다. 상대방이 제시한 글을 글자 하나하나 분해해본 것 마냥 정확하고도 자세하게 이해하고, 마치 싸울듯한 기세로 서로의 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던 그들의 논쟁은 실로 치열했다. 같은 주자의 글을 두고 이(理)와 기(氣)의 발현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은 두 인물 사후 전개되는 당쟁의 어마어마한 파장을 예고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 맹렬함 속에서도 그들은 서로의 학문적 역량을 높게 평가했으며, 문제제기를 하는 그 순간에도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함을 잊지 않았다. 이는 오늘날 자기만을 알고 타인의 의견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자기중심적 문화에 익숙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오늘날은 모든 것이 너무도 편리하게 행해진다. 어느 시간, 어느 곳에서나 이메일을 보내거나 함께 대화하는 일이 가능한 시대를 우린 살고 있다. 하지만 정보화 사회의 도래와 함께 오히려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깊이는 더욱 얕아진 듯 하다. 가입과 탈퇴가 자유자재로 이루어지는 까페나 커뮤니티는 더 이상 인간적인 정에 대해 보증해주지 않는다. 익명성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무책임한 발언과 원색적인 욕설이 난무하는 속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을 만나면 만날수록 진실된 인간적 감정을 그리워하게 되는 듯 싶다. 현대적 교통도, 기기의 화려함도 존재치 않던 시절, 퇴계가 사망하던 해까지 무려 13년 동안 끊이지 않고 계속된 편지가 시대를 초월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읽히는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인 듯 하다. 진실된 정을 나누면서도 학문적 치열함을 견지했던 두 사람, 그 따스함은 나를 절로 미소짓게 만들어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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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편지는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쓰게 된다. 연인 혹은 친구에게 말로 직접하기 힘든 얘기를 글로 적어 보내기도 하고, 또는 멀리 있는 사람에게 소식을 전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그것을 받는 사람과의 대화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편지에 전하고 싶은 말을 적으면서, 읽을 사람의 반응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그런 까닭에 편지를 쓰는 동안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편지라는 주제를 가지고 글을 쓰다보니, 밤새 고민하며 편지지를 채우던 까마득한 고등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아마도 자그마한 오해 때문에 멀어진 친구와의 관계를 되돌리기 위하여, 당시에는 주로 편지를 이용했던 것 같다. 말이란 일단 입에서 나오게 되면 다시 주워담을 수 없다. 한 순간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가까운 사람에게 함부로 말을 했던 경험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주 절친하던 친구 사이에도 감정적 대립을 겪으면, 한동안 소원해 질 수밖에 없었다. 먼저 마음을 열고 차분히 나의 생각을 글로 적어 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옹졸했던 내 자신에 대해서 반성하게 된다. 또한 편지를 받은 친구 역시 금새 다시 예전의 친밀한 관계로 되돌아갔다. 아마도 글의 힘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이제는 서로의 소식을 전하는 수단으로, 편지 대신에 휴대폰이나 전자메일이 보편화되었다. 우리나라가 인터넷 환경이나 휴대전화 보급률은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른다고 하며,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것들은 생활의 필수 품목이 되어 버렸다. 때문에 이제 편지는 의례적인 소식을 알리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 대부분이고, 그 역할은 휴대전화나 전자메일이 대신 담당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서도 간혹 상대방이 직접 손으로 쓴 편지를 받게되면 대단히 반갑게 느껴진다. 편지를 직접 쓴다는 것은 그것을 받을 상대방에 대한 깊은 애정이 없으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나 자신도 최근에 의례적인 서신 외에, 직접 편지지에 편지를 써서 부쳐본 기억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지금은 휴대전화나 전자메일을 더 애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체국조차도 없었던 옛날에는 어떻게 편지를 전했을까?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는 옛사람들의 편지에 대한 인식과 그것을 주고받은 방법이 잘 나타나고 있다. 이 책은 당대의 대학자이기도 한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과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1527~1572)이 주고받은 편지를 번역하여 엮은 것이다. 각각 영남과 호남에 기반을 두고 생활했던 이황과 기대승은 오가는 사람들을 통해 13년 동안이나 서신(書信)을 교환하였다. 이들은 이 기간동안 간혹 서울에서 서로 만나기도 했지만, 1558년(명종 13년)부터 이황이 죽은 1570년(선조 3년)까지 편지로 지속적인 교류를 하였다. 기대승이 중앙에서 관직을 맡고 있는 동안에는 서울과 안동을 오가는 인편에 의지했으며, 그가 호남의 고향에 내려가 있는 동안에는 다양한 방법을 이용하여 소식을 전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 탓에 이황은 주로 고향인 경상도 안동에서 은거하고 있었고, 기대승은 여러 차례 삭직(削職)과 복직(復職)을 거듭하였다. 따라서 늘 멀리 떨어져 지냈던 이들이 지속적으로 편지를 주고받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황의 아들이나 문인들이 주로 서신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으며, 때로는 상대가 거처하는 곳으로 길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부탁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전달하는 사람의 사정에 의해 편지가 여러 달을 지체하기도 하고, 때로는 한꺼번에 여러 개의 편지를 받게 되기도 한다. 편지의 전달을 인편에 의지하다보니, 이들의 글들에는 편지가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를 걱정하는 내용이 곳곳에 보인다. 상대가 보낸 답장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를 걱정하기도 하고, 자신의 생각에 대한 답변을 기다리기도 하는 심정을 토로하기도 한다. 매번 상대를 진정으로 아끼는 내용으로 시작하는 이들의 편지를 읽다보면, 서로에 대한 신뢰의 감정이 짙게 배어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들이 주고받은 편지는 서로를 존중하는 인간적인 성격의 서신이면서, 특정 주제를 중심에 두고 의견을 교환하는 학문적 토론의 성격을 아울러 지니고 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이들이 비록 26살의 나이 차가 있었지만, 편지를 통해 서로를 존중하며 쌓아간 서로의 돈독한 우정을 느낄 수 있었다. 편지를 전달하기가 쉽지 않은 여건 속에서도 장기간 동안 꾸준히 교류를 했다는 것은 그만큼 상호간의 신뢰가 깊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후학(後學)인 기대승이 이황을 스승으로 여긴 것은 당연하다 하겠지만, 이황은 오히려 기대승을 학문적 관심을 서로 나누는 동학(同學)으로 대하였다.
모두 2부로 이루어진 이 책은 ‘일상을 논한 편지들’(1부)과 ‘학문을 논한 편지들’(2부)로 나뉘어져 있다. 1부의 편지들은 대체로 시간적 순서에 입각해서 배열하였고, 그 가운데 주제가 학문적 관심사로 묶일 수 있는 내용들을 2부에 따로 배치하여 수록했다. 그러나 실상 이러한 분류가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일상을 논한 편지글 속에서도 학문적 주제들에 대한 만만치 않은 논의들이 제기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당시의 유학자(儒學者)들이 학문을 일상과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일상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일상적 관심사를 다룬 1부의 서신들에서는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먼저 개인적인 안부와 서로의 건강에 대한 내용이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기대승이 술을 좋아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 이황은 매우 걱정하며 술을 끊으라고 권고한다. 이에 대해 기대승은 자신이 술을 좋아하는 성품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완곡한 답변을 보낸다. 몸이 약해 늘 병을 앓고 있다는 이황의 편지를 받고, 기대승은 주변에서 약을 구해 문안과 함께 보내기도 한다. 또 평안도에서 자신의 저서를 판각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황은 내용이 부족하다고 여겨 중국의 사신을 맞으러 가는 기대승에게 그 책을 없애주도록 여러 차례에 걸쳐 부탁하기도 한다. 기대승은 그의 부탁을 유념하고 있다가, 마침내 평안도에 가는 길에 해당 지역에 들러 판각(板刻)을 거두어 불태우고야 만다.
이들은 또한 각자가 관심을 갖는 문제들에 대해서 의문이 나는 것에 대해 묻고, 상대방은 자신의 식견과 다양한 전적(典籍)을 참고하여 질문에 답해주고 있다. 또한 서로의 의견이 대립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정중한 예의를 차리면서도, 충분히 반박을 하는 내용도 여러 곳에서 보인다. 서로 대립되는 의견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토론하기도 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여 논증하기도 한다. 아무리 사소한 질문에도 매번 답변하려고 노력하는 이들의 자세에서, 당대의 유학자들이 학문에 대해서 가졌던 마음가짐을 확인할 수가 있을 것이다.
몇몇 논쟁의 과정에서 상대방의 반론에 의해서 자신의 오류가 인정되면 곧바로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 더욱 많은 논거를 통해서 자신의 학설을 조금씩 진전시켜 나가기도 한다. 경전의 한 구절이나 혹은 글자 하나조차도 그 전고(典故)와 의미를 세심하게 살피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들은 여러 차례에 걸친 반론과 재반론을 통해서 어느 순간에라도 자신의 견해가 틀렸다고 인정되면, 곧바로 자신의 주장을 수정하는 열린 자세를 보이기도 한다. 특히 상호 대립하는 주제에 대해서 토론하는 부분을 읽으면서, 신중한 성격의 노학자(老學者)인 이황과 도전적이고 패기에 찬 젊은 학자인 기대승의 성격이 손에 잡히는 듯 생생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밖에도 편지에 언급된 다양한 인물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각자의 교유 관계를 확인하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재미의 하나이다. 대체로 이들은 자신들을 칭할 때 “같이 도(道)를 배우는” 등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였다. 흔히 이들을 당시의 대표적인 도학자(道學者)로 일컫는데, 아마도 이들의 오랜 기간동안 서신을 통해서 교유를 할 수 있었던 이유도 도학에 대한 자세와 관심이 일치했기 때문일 것이다. 몇 차례에 걸친 사화(士禍)로 인해서 많은 학자들이 참변을 당한 후라, 학문적 관심이 서로 일치한다는 것에서 이들은 서로에 대해 신뢰를 느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황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비(碑)에 새길 묘갈명(墓碣銘)을 기대승에게 부탁할 수 있었던 것도 서로의 학문에 대한 믿음이 컸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주지하다시피 도학(道學)이란 유학(儒學)에서 중국 송(宋)나라의 주희(朱喜)에 의해 집대성된 성리학(性理學) 혹은 주자학(朱子學)을 달리 일컫는 표현이다. 이들은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의 근본 유학정신을 새롭게 밝혀 부흥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도학자들은 현실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으며, 개개인의 인격적 완성이 전제되고 그리하여 인격적으로 닦여진 군자(君子)들에 의해 정치가 시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때문에 정치적 입장을 내세울 때 우선적으로 경전에 대한 해석, 특히 주희의 해석에 기대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따라서 이들의 학문적 논쟁의 가장 중요한 기준도 역시 대부분 주희의 학설에 근거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2부의 ‘학문을 논한 편지들’은 이들이 주고받은 편지들 중에서 해당 주제로 묶일 수 있는 것들을 취해서 따로 엮은 것이다. 모두 5개의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중에서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논한 편지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나머지는 유학의 주요 개념 중의 하나인 ‘태극(太極)을 논한 편지들’, 의례(儀禮)의 절차를 따진 ‘상례(喪禮)나 제례(祭禮)의 격식을 논한 편지들’과 ‘국가나 왕실의 전례(典禮)를 논한 편지들’, 그리고 이황의 아버지의 묘갈명(墓碣銘)과 관련해서 주고받은 ‘묘갈명을 논한 편지들’이다. 이러한 주제들은 모두 유학에서 중요하게 취급하는 개념 혹은 절차에 대한 것들이라, 논의 자체가 대단히 사변적(思辨的)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기보다는 그 대체적인 내용을 제시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이 책에서 대상으로 삼은 인물 중 이황은 특히 시조인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의 작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학문이란 자연과의 화합을 체험하면서 인간의 심성(心性)을 탐구하고 기르는 것이라고 여겼다. 편지의 곳곳에서 왕으로부터 벼슬을 제수받고도 거듭하여 출사(出仕)하지 않고 물리치는 내용이 보인다. 불가피한 경우에 잠시 관직에 나아갔다가, 이내 고향인 안동으로 되돌아오는 행위를 반복한다. 이는 당시의 혼란했던 정치 상황에서 기인하는 바가 적지 않겠지만, 자연 속에서 도(道)를 기르면서 살고자 했던 그의 기본적인 자세에서 비롯된 면이 더 컸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에 비해 적극적인 현실 정치에 참여하면서,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경륜을 펴고자 했던 기대승의 태도에서 도(道)를 바라보는 유학자들의 다양한 태도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차니) * 개인의 독서 기록 공간인 포털사이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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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로 묵직한 책이다.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가 역사학자들에게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면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편지는 많이 알려져있 듯이 '사단칠정론'을 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국 철학사와 지성사에서 엄청난 무게감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퇴계와 고봉은 명종13년인 1558년 10월에 시작해서, 퇴계가 세상을 떠났던 1570년 선조3년까지 13년동안 한해도 거르지 않고 100여통의 서신을 주고 받았다고 한다. 이 두 사람의 교류가 놀라운 것은 당시 이황은 지금의 서울대 총장이라고 할 수 있는, 성균관 대사성이었고 기대승은 서른 둘의 이제 막 과거에 급제한 인물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나이 차는 무려 26세였으니 그야말로 지위와 나이 명성의 차이를 뛰어넘은 지성의 교류였다. 그럼에도 이황은 기대승에게 하대하지 않았고, 이 두 사람은 끝까지 상호 존중하며 서신교환을 유지했다.
이 두 사람의 편지를 보면,사대부의 품위가 느껴졌다. 글씨를 부탁하는가 하면 글에 대한 평가와 의견을 구하고, 책이나 소소한 선물을 하기도 했다. 이 황은 기대승에게 부친의 묘갈명을 부탁하는 등..지성인답게 모범적으로 교유했다. 알려졌듯 '사단칠정론'에 관한 논쟁도 편지를 통해 이루어졌다. 정중하고도, 차분하게 논의됐지만 서로 반박하는 편지는 보통 편지와는 비교할 수 없이 장문으로 오가는, 격식과 내용을 함께 갖추었지만 나름 정교한 논쟁이었다. 사실 사단칠청론이나, 뒤에 상례나 제례 등 의례에 관한 편지는 내용이 어렵기도 해서 제대로 읽어내진 못했다. 그럼에도 '사단칠정론'이 갖는 의미가 어떤지는 충분히 알고 있다. 조선의 주자학이 주체적으로 발전하는 담론을 형성했고, 이후 이 이론을 바탕으로 펼쳐진 논쟁이 계속 나왔을만큼 후대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거기에 예의에 관한 조언을 구하는 편지들은 두 사람 모두 주자학이 조선 내부까지 파고들어 생활을 지배하는 이념이 되게 하는 데 동의하고 동조했다는 의미이다. 두 사람 모두 사림이었다는 점에서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편지 중간중간 당파적인 입장을 드러내며, 누가 자신을 공격한다는 표현도 들어있고,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설명하는 내용도 드물지 않다는 것이다. 명종과 선조 시기 사림들이 조정에 자리잡고 당파 색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고 권력 다툼을 하던 시기라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이나, 벼슬자리나 물러남에 대한 의견을 드러내는 부분도 적지 않았고. 기대승이 임금에게 이황을 특별대접하라고 고했다는 말을 이황이 듣고 어리석은 행동하지 말라고 질책하는 내용도 있었다. 그런 민감한 내용도 편지로 주고받을만큼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가까운 사이였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보안에 대해 조심스러워하는 내용은 인상적이었다. 하인이 없으면 삯꾼을 통해 편지를 전해야 하는데..이 과정에서 보안이 걱정된다면서..신호를 정하는 대목. 당파가 자리잡으면서 처신이 힘들어졌다는 말도 되지만 두 사람, 특히 이황이 그만큼 주목받는 거물이었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이황과 기대승,이 두사람의 편지는 조선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편지가 단순히 안부나 소식을 전하는 차원을 넘어서, 학문과 인격을 교유하는 의미있는 수단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과정에서 조선최고의 지성으로 꼽히는 이황이 보여준 열린 태도는 놀라울 정도였다. 유학자들하면 꼬장꼬장하다는 이미지가 있는데, 이황은 거의 한세대 후학인 기대승에게도 글에 대한 조언을 아낌없이 구했고,또 그의 의견에 대해 귀를 열고 받아들였다.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의 편지는 조선 지성사에 길이 남을 내용이기도 했지만, 나이와 지위를 뛰어넘어, 상혼 존중으로 이루어진 정신과 학문의 교류였고 만남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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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 전에 샀던 책이고 산 당시에 읽었던 것 같은데, '다음에 한번 더 봐야지'라는 다짐만 남았을 뿐, 내용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것이 없었던 책. 10년 전 쯤에는 벅찼다고 느껴졌던 책, 2월이 가기 전에 꼭 한 번 더 보리라 하여 다시 펼쳤는데, 아,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한숨이 난다.
옛사람들 중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상가로 이름 남긴 사람들의 글을 읽고 있으면, 그래, 이렇게 한숨이 났다. 지금 우리는 그들로부터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게 아닌가, 아니, 그들이 잘 닦아 놓은 길 위에서 헤매고 있는 게 아닌가, 순전히 과학기술 분야에서 좀더 편리해진 일부를 가졌을 뿐, 윤리도 철학도 정치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지. 2천 년 전, 혹은 5백 년 전에 선조들이 저질렀던 잘못조차 다 알고 있다면서 다시 저지르고 있는 우리의 현재 모습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드는 것이다. 나아진 게 없는 게 아닐까.
퇴계와 고봉의 글, 이황과 기대승의 편지. 이 책은 기대승의 책을 기본으로 번역한 것이라고 한다. 기록, 또 기록의 가치에 대해 확인하고. 나이 차이와는 상관 없이 서로의 사상을 나눌 수 있었던 두 사람. 부족한 부분을 짚고 채워 달라고 하면 서로가 그렇게 응해 주는 관계. 10년 전에 이 책을 보면서 나에게도 이런 상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는 기억이 났다. 나보다 나이가 10살 혹은 그 이상인 사람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싶다는 바람, 그런 꿈이 있었다. 아마도 교사 생활을 하면서 권태로움을 느꼈던 때였으리라.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잊었겠지. 지금 이 책을 다시 보니, 새롭다.
사단칠정에 대한 부분, 아직 정리가 되지 않는다. 마음에 대한 이론을 글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은 보통의 역량이 아닐 것이라는 정도로 짐작할 수 있을 뿐. 두 사람이 주고받는 내용 자체가 내 지식으로 바뀌지는 못했다. 다만 서로의 생각 차이를 더듬어 짚어 주고 확인하는 과정, 사용된 한자 하나하나의 뜻과 쓰임에 의문이 생겼을 때 주고받는 질문과 대답을 보면서 이러한 일이 학문을 하는 데 그 어떤 교육기관이나 교육과정보다 유용했으리라는 생각은 확실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사람들이 토론하고 협의하는 동안의 상승 작용을 확인했다고나 할까. 부러웠다. 동업해서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좋겠지만 이렇게 정신을 모아 한 차원 높은 세계로 함께 오르는 것도 행복의 한 모습이 아닐지.
학문이라는 것, 학문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보여 준다. 매달리고 파고 차이를 구별짓고 따지고 정의하고. 관찰력, 인내심, 성실함, 판단력 등이 왜 필요하다는 것인지, 학문이라는 게 단지 머리만 좋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도 했다. 게다가 사명감까지 보태야 한다면, 요즘처럼 밥 먹고 살기 힘들다는 세상에 학문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싶은 한탄까지 들었다.
책을 또 한번 더 미뤄야겠다. 지금부터 10년 쯤 지난 뒤에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내 마음에 즐거운 빚으로 남겨 둬야지. 그때는 지금보다 사단칠정에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을지도. 편지, 그래, 이제는 이 블로그가 나를 위로한다. 나에게 쓰고 있는 이 편지를 10년 후에도 여전히 쓰고 있기를. |
| 자신의 무지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이 한 권의 단아한 책을 만났다. 서양사에서 영혼의 교류라는 주제로 심심찮게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숙한 만남들을 늘 부러워 하면서, 우리 언어의 특징인 존대어가 세대나 신분을 뛰어넘는 그런 만남에 걸림돌임을 탓하여 왔었다. 일전에 ‘Tuesday with Morrie’라는 책을 잔뜩 추켜 세우며 아예 우리에겐 세대를 이어 주는 이러한 의사교통이 불가능할거라고 단정하기까지 했었다. 비록 퇴계와 고봉의 논쟁에 대해 학생 때 시험 준비과정에서 들어보기는 했겠지만, 그것이 이렇듯 서로의 애틋한 살핌으로 시작해서 예리한 학문적 논쟁으로 닿아가는 인간적 교류임을 몰랐었다는 것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이 책을 소개하는 글이라면 의례 삼십 초반의 당돌한 고봉 기대승과 예순을 바라보는 대학자 퇴계 이황이 시작한 서신의 교환이 조선시대 유학에 끼친 영향에 대해 언급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나 학문에 무지한 내가 이 책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그 내용보다는 형식일 수 밖에 없었다. 나를 비롯한 많은 우리 세대의 사람들이 이들 두 대유의 관계에 대해 제대로 몰랐다는 건 그것을 전달해 줄 매개의 부재 때문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구성, 언어, 편집, 그리고 심지어 쪽번호를 단 방식까지도 글읽기에 게을러진 우리 세대의 기호에 맞추어 준 저자(번역자)와 기획자의 배려를 높이 사게 된다. “황은 머리 숙여 두번 절합니다…” 한자가 상형문자라는 개념밖에 남지 않은 내가 원문을 읽었다면, 또는 고고하신 학자님들의 언어로 남긴 번역본을 대했더라면, 한참 아래의 후학에게 이렇듯 겸사로 시작하는 퇴계를 느끼지 못 했을 것이다. 조선시대 두 학자가 정확히 어떤 구어로써 서로를 대했는지 나로서는 모를 일이고, 저자의 주관적 의역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지만, 책을 읽는 내내 나 스스로가 만들어 내는 한 편의 역사드라마를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한 일이다. 우리 시대의 깨지고 닳아서 너덜너덜해 보이기까지 하는 언어를 피해 가고 싶으면서도, 이미 그것에 푹 절어 있는 자신을 발견할 따름인데, 평이하면서도 마음의 정성과 깍듯한 예의를 잃지 않는 저자의 단아한 언어가 황사를 벗어나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듯한 상쾌함을 두 학자의 깊은 뜻을 더욱 맑게 느끼게 해 준다. 퇴계와 고봉을 읽으며 짐짓 내 생활의 익숙한 수단들에서 물러서게 된다. 이 시대에 발달한 통신 수단이 사람들 사이의 충돌을 더 잦게 만들고 심화시켰다는 의견에 나 자신도 그 희생자이자 주동자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침 한 번 꼴깍 삼키는 순간만 참으면 될 화를 손 끝에 있는 전화기를 통해 쏟아내는 순간, 나의 화가 풀리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문제들을 만들어 냄을 알면서도 그 못 된 습관은 점점 더해만가고, 이젠 이메일조차 답답하여 메신저로 상대방을 쪼아대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다. 교통 수단의 문제로 몇 계절이 지남을 기다려 편지를 전하고 또 그 답장을 기대하는 모습이야 한 시대의 생활상이라 지나칠 수도 있지만, 고봉을 편지를 받고 당장 답변하기를 억누르며 고찰의 시간을 갖는 퇴계에게서 나의 급함이 부른 실수들을 떠 올리며 숙연해진다. 내가 이 사회에 의미를 남길 교류를 가질 주체는 못 될지라도, 시간이나 공간을 넘어 사람들을 만날 기회는 많았을 것이다. 단지 나의 게으름과 부족했던 정성으로 십년의 세월, 나아가 평생을 가져갈 만남들을 순간에 그치게 만들어 왔지 않나 한다. 특히, 나를 고쳐 주려던 사람들을 석연치 않은 자존심에 물리쳤던 어리석음에 한스러워하며, 자신의 비워 상대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우리의 옛 분들을 그린다. 政 |
| 요사이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서한집을 읽고 있습니다. 내용이 깊고 방대하여 한숨에 읽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천천히 보아도 충분합니다. '기선달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씁니다.' 라고 시작된 첫 편지는 '덕을 높이고 생각을 깊게 하여 학업을 추구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라는 구절로 짤막하게 끝을 맺습니다. 마음에 깊이 남게 되는 바는 첫 편지에 시작된 '이만 줄이며 이황이 삼가 말씀드렸습니다.'라는 이황 선생님의 그러한 문체가 끝까지 시종여일하게 지속된다는 것입니다. 알기로는 기대승과의 나이는 무려 26년차. 자신의 아들이라고 해도 좋을 나이의 갓 문과에 급제한 청년에게 깍듯이 높이고 있습니다. 단순히 처세로서, 아니면 당시의 법도로서 높이는 것이 아니라 실로 마음을 다하여 높임이 그의 편지 곳곳에서와 또한 답장으로 오는 기대승의 편지에서 사방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기대승 또한 대학자의 그 겸손한 태도에 자신을 은연 중에 높이기 쉬움에도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하면서도 고집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추운 겨울 미끄러운 길을 걸어가듯 살피며 제시합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건강을 걱정하면서 삶을 공유하는 가운데 사단칠정론이 하나하나 전개되어가는 과정을 살펴 볼 수 있음은 또 다른 즐거움입니다. "저는 늙음과 병이 함께 하여 여러 증상이 번갈아 달려드니, 눈 쌓이고 얼음 덮인 골짜기에서 제 몸 하나 건사하느라 애를 씁니다. 올해는 농사마저 흉년이라 군색함이 더욱 심합니다. 오직 다행스러운 것은 먼지 묻고 좀이 슨 책 사이에 배인 성현의 향기가, 난초 향기가 스며드는 것보다 더 진하다는 것입니다. 한공이 어떤 사람에게 준 시에 나오는 무슨 일로 그 세월 다 보냈는가 어느새 한 해가 저물어 가네 라는 구절을 늘 사랑했는데, 그 말을 되풀이하여 맛볼수록 진정으로 제 마음을 미리 이해했다 할 만하니, 그것으로 근심과 번뇌를 잊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대가 만약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게 된다면 여기서 얻는 것이 재질이 얕고 누추한 저로서는 못 미칠 정도일 것이니, 때때로 인편에 소식을 전해 터득한 것을 가르쳐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먼지 묻고 좀이 슨 책 사이에 배인 성현의 향기가 난초 향기가 스며드는 것보다 더 진하다는... 이 문장을 잊을 수 없어 보고 또 보았습니다. 현실과 격리된 이론의 공허한 논쟁이 아님과 그로 인하여 유학을 실학이라고 하였던 다른 학자의 견해가 떠오르게 하는 글들을 읽으며 나 자신 또한 단정한가를 살피게 됩니다. 이런 것이 진정한 유학의 고매한 향기일까요. 책이 창문을 열어 놓고 간 사이에 비에 젖고 파본이라 책장이 다소 어그러짐이 있지만... 교환하지 않고 그대로 두기로 하였습니다. 하나하나 천천히 넘기며 생각을 담아 놓은 지금의 손때가 다소 묻은 이 책이 새로 나온 반듯한 책보다 결코 못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서입니다. 퇴계와 고봉의 학문에 턱없이 부족한 나이지만 이와 같이 영혼의 교류를 나눌 수 있는 학문의 벗이 있다면 하는 바람을 가만히 그려봅니다. 또한 나와 같이 부족한 사람도 이 향기를 전달받을 수 있도록 우리말로 풀어 옮겨 준 저자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지닙니다. ................................................................................. 다음은 첫 표지 안에 실린 글입니다. 1558년 명종 13년 10월, 퇴계 이황은 지금의 국립대 총장 격인 성균관 대사성이었다. 그리고 고봉 기대승은 이제 막 과거에 급제한 청년이었다. 그해 겨울 12월에 퇴계가 고봉에게 첫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 후로 두 사람의 편지 교환은 1570년 12월 퇴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13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계속되었다. |
| 성리학이 꽃을 피우던 시대, 그 정점에 서 있던 퇴계 이황, 그리고 성리학의 완성과 그 이상적인 실현을 추구했던 고봉 기대승. 이 책은 이 두 명이 13년 동안 주고받았던 편지를 모아 번역한 책이다. 그리고 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나누었던 논쟁 중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그 유명한 사단칠정론이다. 어쩌면 기대승보다 사단칠정론을 아는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유명한 사단칠정론이지만 지금까지 이를 위한 교양서는 없었다. 물론 번역서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 두 사람의 편지만을 위해 나온 책이 없었고, 번역된 책들도 교양서적으로 읽기에는 번역이 세련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이 책은 사단칠정론을 포함한 퇴계와 고봉이 주고받은 편지를 일반인들이 읽기에 충분한 교양서로 만들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이 책은 크게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1부는 일상의 편지들 2부는 학문을 논한 편지들이다. 실제로는 일상의 편지들을 주고받는 사이에 사단칠정론, 태극, 상례, 제례 등 학문적 성격을 띠는 편지들이 중간 중간 들어가 있었으나, 저자가 내용의 체계성을 위해 편지들을 임의로 나누었으며 하나의 편지를 나누어 실어 놓은 것도 있다. 그리고 편지들이 시간 순으로 배열되지 않는 점을 보완하기 위해 주석을 통해 편지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밝혀 놓아 시간 순으로도 읽을 수 있게 배려했다. “지난번에 멀리서 편지를 보내 주시고, 사단칠정에 대해 깨우쳐 주시는 글 한 권까지 덧붙여 주시니, 어리석고 거짓된 이 사람을 버리지 않고 극진히 깨우쳐 주려는 뜻이 매우 깊고 간절하게 느껴집니다.”(2-7, 퇴계가 답한 2서 중에서) 사단칠정을 논하는 편지의 머리글 중의 일부이다. 분명 퇴계는 고봉을 상대해주지 않아도 될 만큼 이미 높은 명성을 가진 학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고봉을 스승 대하듯이 존중해 주고 있다. 논어에 있는 ‘세 사람이 걸어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라는 말을 가장 절실히 통감하고 행동한 것이 퇴계인 것 같다. 퇴계의 높은 학문적 경지는 다름이 아니라 이런 배움에 대한 포용적인 자세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었다. “비록 지난번의 설보다는 조금 나은 것 같지만, 제 의견으로는 그래도 불만스럽습니다.”(2-2, 퇴계에서 올린 사단칠정설 중에서) 기대승이 사단칠정을 논하면서 자신이 이해 할 수 없는 퇴계의 설을 반박하면서 한 말이다. 물론 고봉은 언제나 대 선배인 이황에게 깍듯이 대하지만 학문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부분에서는 윗사람이라 하여 그의 설을 그냥 받아들이거나 넘어가지 않고 위와 같이 명확히 지적한다. 상대방의 존중은 필요하지만 진실을 추구하는 학문을 함에 있어서 권위에의 복종이나 묵인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고봉은 언제나 위와 같은 자세로 학문이나 정치에 임했고, 결국 많은 사람들과 마찰이 빚어 생활이 순탄치 않을 정도였지만, 퇴계, 선조로부터 인정받았고 후대에도 높이 평가 받고 있다. 고봉 역시 배움에 임하는 사람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인물이라 하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2장의 학문의 논한 편지들 부분의 경우는 읽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저자도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주석을 많이 달았으나 사단칠정을 이해를 돕는데 있어서는 부족함이 많았다. 그러나 이 책으로 사단칠정에 관해 자신의 입장을 정립하는 것(태극 부분은 거의 이해 안감)에는 무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퇴계와 고봉이 사단과 칠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사단칠정이 아니더라도 배움에 대한 이들의 자세를 알고 행하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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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사면서는 기대도 있었지만 과연 읽을만한 책일까? 의심스런 맘도 있었다. 그런데 첫 페이지를 읽어 내려가면서 부터 마치 퇴계와 고봉선생이 곁에 살아있는 듯한 느낌에 고전의 맛이 이런거구나! 하게 되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래야 줄줄이 알사탕같이 엮인 사건들의 나열뿐 살아숨쉬는 역사는 눈을 씻고도 찾아 볼 수가 없었는데... 비단 이 책 뿐 아니라 우리 역사속에는 좋은 원전들이 참으로 많을 것 같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런것들을 제대로 접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 좀 더 재미있게 역사 공부를 할 수도 있을텐데..
이 책을 읽고는 퇴계선생이 어찌하여 그리 위대한지를 깨닫지 않을래야 않을 수 가 없다. 퇴계선생의 위대함은 아집이 없는 열린마음에서 부터가 아닐까? 퇴계선생은 새까만 후배가 현재 대학자인 자신의 이론에 반론을 제시해 오는데도 그에게 깎듯한 예의를 갖출 뿐 아니라 그가 제기한 문제들을 진지하게 검토해보고 또 자신의 오류를 발견하면 이를 분명하게 인정하고 고칠줄 아는 분이셨다. 아무리 하잘것 없는 나라도 누군가 내 의견을 반대하고 나오면 보호본능에 충실하여 방어부터 하기 바쁜데 이렇게 대학자의 지위에서도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모습은 존경스럽고 감탄스럽기까지하다. 이 책이 진정한 "멘토"의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세대차이를 넘고 또 이론의 다름을 넘어선 이들의 우정(?)이 너무나 아름답다. 사단칠정론을 모르더라도 이책을 이해하는데는 크게 무리가 없을 것도 같은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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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말할 필요가 없지만, 그가 누구인지 묻는다면 쉽게 말할 이가 그리 많지 않다. '고봉.' 조금은 알 것 같지만, 말하라면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단편 지식에 머물 뿐 깊이 알지는 못한다. 우리는 단편으로 모인 지식 나부랭이를 가지고 온지식으로 착각하면서 산다. 퇴계과 고봉을 말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1558년 명종 13년 10월, 퇴계는 지금의 국립대학 총장격인 성균관 대사성이었고 고봉은 대가에 막 급제한 청년이었다. 당대 최고의 유학자로 존경받던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이 1558년 문과에 갓 급제한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1527∼1572)과의 만남을 기뻐하며 편지를 썼다. 두 사람의 편지는 1570년 11월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퇴계가 육신을 내려놓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지극히 사적인 내용에서부터, 평생, 온 힘을 다하여 이런 사유와 지식 산물인 사상과 이념을 주장하는 치열한 지적 사유 논쟁까지 포함한, 13년 동안 오간 편지를 모은 책이 있다.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1부는 두 분 사이에 오간 '일상 편지들'이고 2부는 두 분이 '사단칠정' '태극' '상례나 제례' '국가와 왕실의 전례' '묘갈명'을 논한 것을 모았다.
이기이원론으로 유명한 퇴계와 이기일원론으로 퇴계의 이론을 논박한 고봉이 편지형식으로 소개되었기 때문에 마음을 구성하는 이-기, 그리고 성-정, 사단-칠정 등의 사유 논쟁을 읽을 수 있다. 이기이원론과 이기일원론. 이-기, 성-정, 사단-칠전에 관한 깊은 지식이 아니라 나부랭이도 안 되는 미천함 때문에 편지글 하나 하나를 읽어가는 것은 고역이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대목은, 오늘날로 치자면 국립대 총장격인 퇴계 선생이 나이가 한참 어린 26살 연하의 고봉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제 견해가 잘못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부분이다.
이는 그냥 겸손이 아니다. 고봉의 지적 깊이가 어떤 부분에서는 퇴계를 능가했다는 것이며, 퇴계는 자신과 견해가 다를지라도 논리와 타당성이 있다면 고봉의 지적 사유를 인정했다는 의미다. 지식과 사상이 발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고봉은 지식 나부랭이를 논한 것이 아니다. '젊음'이라는 객기도 아니다. 객기만 가지고 구세대를 탓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이미 조선 사상의 지랫대인 성리학에 성큼 들어섰고, 퇴계와 같은 성리학 반열에 있었지만 진리에 이르는 길을 조금 달리 했을 뿐이다. 퇴계는 이를 인정했다.
오늘날 자신의 제자가 '스승님 견해가 잘못되었습니다' 라고 논박할 때 스승은 어떻게 대답할까? 아니 '스승님 견해가 잘못되었습니다' 라고 할 만한 제자들의 지식과 사유는 얼마나 깊을까? 껍데기만 가르치고, 배운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지적 사유 논쟁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 세태다. 사유와 지적 논쟁 없는 가르침과 배움만 반복되는 대한민국 대학가이다. 학원가이다. 껍데기 가지고 옳으니, 틀렸니만 외쳐대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조선 시대보다 사상과 철학이 더 진보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스승과 제자 사이에도 지적 논쟁이 없지만 교수와 교수 사이에도 이념적 틀이 다르면 지적 논쟁이 성립되기 어려운 시대다. 사상과 철학이 천박한 시대이다. 천박함은 돈만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니다. 학문에서, 사상과 사유가 사라져버리고 빈껍데기로 학문인양 외쳐대기 천박하다. 실용과 이익이 남지 않으면 학문이 아니라고 하는 시대이니 천박하다. 퇴계와 고봉이 지적 사유 논쟁을 논할 때까지만 해도 조선은 정말 살아 있는 시대였다. 지금보다 그 시대는 살아 있었다. “옛 배움을 익히고 연구해 처음 세웠던 뜻을 저버리지 않고자 합니다만, 잡다한 일이 저를 얽어매어 종일 겨를이 나지 않습니다. 또 속마음을 털어놓을 만한 곳도 없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고봉)
“언제나 빼앗을 수 없는 의지와 꺾을 수 없는 기개와 속일 수 없는 식견을 지녀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학문의 힘을 나날이 담금질한 뒤에야 발꿈치가 단단히 땅에 붙어서, 세속의 명예나 이익 그리고 위세에 넘어지지 않기를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 (퇴계)
배움과 연구를 통해 학문을 알아가고자 했지만 벼슬길에 들어선 고봉은 잡다한 일로 학문을 알아가는데 안타까움을 말한다. 어디 배움을 구할 때가 없다고 말한다. 세속 일이지만 나라일이고, 나라 일을 하려고 하는데 잡다한 일이고, 학문을 해야 할 시간을 빼앗긴다는 안타까움에 퇴계는 학문은 나날이 담글질해야 하는 일이라 한다. 담금질해야 세속의 명예와 이익에 넘어지지 않는다 말한다.
조선시대나 이 시대나, 고봉과 퇴계나 우리 세대도 마찬가지다. 세속의 이익과 명예는 끊임없는 도전이다. 우리 시대 대학은 이미 학문을 잃어버렸다. 초등학교부터 학문은 관심대상이 아니다. 세속의 명예와 이익에 학문이 천박해졌다. 학문을 처세의 방편으로까지는 삼는 시대다.
"저는 늘 말하기를 처세가 어려운 경우 나는 내 배움이 완전하지 못함을 걱정할 뿐이다. 내 배움이 만약 완전하다면 반드시 처세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했습니다." (고봉)
"이른바 미진했다 함은 다름이 아니라 학문을 이루지도 못했으면서 자신을 높이고, 시대를 헤아리지 못했으면서 세상을 일구는 데에 용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실패한 까닭이니, 큰 이름을 걸고 큰 일을 맡은 사람은 반드시 경계해야 합니다." (퇴계)
우리 정치는 정말 껍데기다. 학문에 바탕한 정치가 아니라 처세에 밝은 이들이 오로지 '정권'을 잡기 위해 하는 잡다한 말싸움, 기세싸움만 하고 있다. 처세만 있는 정치는 비극이다. 나라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이들이 지적 사유의 깊이를 통한 바탕 없이 처세를 통한 정권 잡기에만 붙잡혀 있으니 우리 정치가 비극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대운하, 학교자율화, 미국산쇠고기 수입을 보시라. 어디 인간이 있는가? 사람이 없다. 우리 미래를 결정하는 중대한 문제에 대한 진지한 논쟁이 없다. 진지한 논쟁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비전문가 매도한다. 발목잡기리 몰아친다. 사실 그들에게는 진지한 논쟁을 할 지적 능력과 가진 것이 없다. 속이 텅 빈 것을 가지고 무조건 밀어붙이니 무슨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인가? 시민들도 이런 사유 논쟁에 관심이 없다. 오로지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이익에 매몰되어 버렸다. 돈과 자본에 노예가 되어버렸으니 오늘은 배부를 수 있으나 내일은 없다. 내일이 있다고 할 수 있느가? 없다.
사람없는 경제, 학교, 대운하다. 오로지 돈만 되면 다 된다. 조선을 누가 봉건시대라고 욕할 것인가? 성리학에 매몰된 퇴물로 취급할 것인가? 인간에 대한 논쟁은 대한민국이 조선보다 후진국이다.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는 만남과 대화를 통해 퇴계와 고봉이 지적사유논쟁을 어떻게 이루어가는지 자세히 보여준다. 자기완성이라는 영원한 숙제를 풀고자 그들도 고민하고 논쟁했다. 서로에게 묻고, 답했고, 논박하고 비판했다. 수긍과 인정이 반복된다.
퇴계와 고봉, 대사성과 급제한 신출내기, 26살 차이, 이기이원론과 이기일원론 지적사유 사이가 있었지만 그들은 13년간 편지를 통해 생각을 나누었다. 우리 시대는 이런 논쟁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논쟁이 있어야 학문도 발전하고 정치도 발전한다. 없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논쟁을 시도하면 된다. 퇴계와 고봉이 논쟁했던 13년간의 '조선'이 부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