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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호흡을 맞춰온 파트너인 덴마크에서 온 요한 콜보그와 나란히 주역을 맡은 이 코벤트가든 공연은 피터 라이트가 개작하면서 연극적인 이야기를 대폭 보강했는데요, 그 덕분에 드라마틱하게 전개되는 1막에서는 등장하는 무용수들 중 누구 하나 연기하지 않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극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특히 지젤의 주요 등장인물이면서도 역할의 비중이 크지 않은 지젤 어머니와 힐라리온의 감정을 촘촘히 채워 발레가 소홀히 하기 쉬운 관계의 망을 짜임새 있게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일테면 힐라리온과 알브레히트의 등장이 스치듯 가볍게 다뤄지는 다른 버전들과는 달리
이 로열 버전에서는 사냥한 꿩고기를 들고 나타난 힐라리온이 지젤의 어머니를 만나는 걸로 시작하는데,
병약한 딸이 늘 걱정인 어머니는 힐라리온을 사윗감으로 점찍어놨는지 그를 몹시 반가워하며
무거운 물통을 들어달라고 부탁합니다. 혼자 딸을 키우며 살아온 그녀에게 사윗감의 조건으로
생활력만큼 중요한 것도 없겠지요. 예비장모에게 점수딸 좋은 기회를 힐라리온도 반색하고요.
그뿐 아니라 알브레히트가 망토와 검을 숨겨놓는 오두막의 문을 윌프레드가 열쇠로 잠가놓는다든지,
그래서 신분을 위장한 알브레히트와 윌프레드의 대화를 수상쩍게 여긴 힐라리온이 잠긴 문을 열고 들어가 알브레히트가 귀족임을 나타내는 징표인 검을 찾아내기 위한 복선 역할을 할 수 있게 만들고, 또 마침내 알브레히트의 정체를 폭로한 힐라리온이, 뿔피리 소리에 귀족들이 몰려들 것을 염려해 도망가려는 알브레히트를 가로막는 장면 같은 것들로 단순히 무용수들에게 연기를 주문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할 수 있는 상황을 세밀하게 설정해놓는 것으로 극을 더욱 입체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알브레히트와 지젤이 마을 친구들과 어울려 춤을 추는 장면에서도, 알브레히트는 "내가 어떻게 춤을 춰?" 하는 듯 쑥스러워하고, 그런 알브레히트의 손을 잡고 지젤은 "쉬워요. 제가 가르쳐드릴게요" 하며 당차게 리드하는 등,
지젤과 알브레히트가 가까워지는 과정을, 안무와 안무 사이를 촘촘한 연기로 채워 설득력을 높여줍니다.
지젤의 이마에 맺힌 땀을 보고 딸이 자기 몰래 춤을 추었다는 걸 알아차리고 걱정이 된 어머니가
처녀귀신인 윌리들의 존재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POB 버전과 유사하지만, 로열 버전의 어머니는 더욱 과장된 연기로 길게 설명하며 순진한 딸을 겁먹게 합니다. 6인무로 구성된 패전트 파드되를 보는 동안 지젤과 어머니가 나란히 앉아 손을 꼭 붙잡고 있는 모습도 이 모녀가 어떤 사인지 짐작하게 하며 어머니가 왜 그토록 지젤을 불면 날까 쥐면 꺼질까 보호하는지 힌트를 주고 있어요.
그래서 지젤이 알브레히트가 이미 약혼녀가 있는 귀족이면서도 신분을 속이고 자신에게 접근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아 광란의 춤을 추다 죽어버렸을 때,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이 비극의 목격자로 남아 있기보다 하나둘씩 슬금슬금 퇴장하고 나서 비어버린 무대를, 어머니 혼자 죽은 지젤을 안고 절규하며 슬픔을 고조시킵니다.

코조카루의 지젤은 살아 있을 때에도, 죽어 윌리가 된 다음에도, 그저 요정 같기만 한데요,
1막의 순진한 지젤을 연기할 때는 너무나 사랑스럽고, 2막의 윌리는 안타까움이라는 하나의 정서를 무척이나 다양한 표정으로 표현해내어 이제 이루어질 기회를 잃은 사랑의 비극을 더욱 절절한 것으로 만듭니다.
처음 등장해 슬픔에 잠긴 알브레히트를 발견하고 춤을 출 때에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연인에 대한 안타까움,
알브레히트를 살려달라는 간청을 들어주지 않는 미르타와 윌리들에 대한 안타까움,
알브레히트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춤을 추다 쓰러진 걸 보고서도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마침내 새벽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알브레히트를 살리게 된 것은 기쁘지만 떠나가야 하는 안타까움 등,
코조카루가 보여주는 안타까움의 폭과 깊이는 말로 감히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윌리들이 첫 번째로 힐라리온을 '처리'한 뒤, 다음 희생양이 될 알브레히트가 끌려왔을 때, "이 사람은 안 돼요" 하는 듯이 지젤이 그 앞을 막아서자 (여기까진 다른 버전과 다를 것이 없죠) 미르타와 윌리들이 그녀가 내뿜는 강력한 사랑의 힘에 두려움을 느끼며 두 연인을 외면한 채 벌벌 떠는 장면입니다.
결혼하지 못하고 죽은 처녀귀신들인 윌리들에게, 희생양을 향한 관용 정도가 아니라 윌리 본연의 임무, 혹은 규율을 저버릴 정도로 힘이 센 사랑이라는 것은 가장 두렵고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떠올릴 때마다 아쉬움이 드는 국립 백조의 엔딩을, 이 버전을 참고해서 로트바르트가 좀 더 두려움에 떠는 연기를 하다 퇴장해주면 어떨까 하고, 또 생각해봤답니다.
하지만,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공연이란 없는 법인지, 해석도 연기도 춤도 감정도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이 로열 버전의 지젤에서, 가장 큰 옥의 티는 의상이었습니다. 지젤이 푸른색 대신 갈색 조끼를 입은 것 정도는
코조카루가 워낙 예쁘기도 하고 지젤 코스춤이 대체로 푸른색 일색이니 차라리 신선하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사냥을 마치고 지젤의 집으로 오게 된 귀족들이 입은, 무거워 보이기만 하고 고급스럽지는 않은 모피 의상이라든지,
독일 시골마을 사람들이 입을 법하지만 무대의상으로는 너무나 칙칙하고 소박한 마을 사람들의 의상,
밑단을 톱니바퀴처럼 재단한 윌리들의 튀튀까지, 의상은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어요.
언젠가 로열발레단이 다시 내한하는 기회가 있다면, 그땐 반드시 의상을 대대적으로 바꾼 지젤을 보여준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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