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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는 이미 그 소설의 시작과 함께 영화의 제작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 역사의 시작이 특이했다고 할 수 있다. 축제의 원고는 이미 임권택 영화 시나리오 대본 제작과 동시에 제작되어 나갔다는 것이다. 이러한 창작 과정의 특이성을 뒤로하고 축제의 내용적 측면에서도 강한 여운을 선사한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의 장례식으로 모인 가족들의 상봉과 숨겨진 일화 등을 소재로 드러냄으로써 이야기가 전개된다. 어머니란 각각의 개개인들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제시하였다. 어머니란 이름은 왠지모를 맹목적 사랑을 줄것만 같은 어떤 당위성을 끌어 안은 의미라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어찌보면 주인공 준섭모의 사랑또한 그 굴레속에 포함시킬 수 있는 지극히 당연한 사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들이 이렇게 지극히도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에서부터 그 특별함이 내재 되어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부모의 사랑은 굉장히 제도화된 틀에서도 그 성역을 침범하진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범죄자인 자식을 숨겨주고도 용의자 은닉죄가 포함되지 않는다거나 강우석 감독의 <공공의 적>에서 자신을 살해한 아들의 증거물을 손수 제거하는 어머니의 죽음을 보더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머니의 사랑을 표현할 때 세계적으로 보기드믄 맹목적 사랑의 극치를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어머니의 맹목적 사랑을 생각하면 다음의 장면은 길고도 강한 여운을 선사한다. 준섭이 성공하고 돌아와 어머니를 모시겠다는 약속과 함께 서울 상봉을 떠나는 장면에서 이미 준섭이 집을 떠나게 되면 다시는 돌아올 상황이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특히, 준섭 자신의 믿음과는 달리 준섭 자신이 더 그러한 가능성을 더 잠그고 살아가리라는 것을 더 빨리 알고 있는 어머니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 그것은 이미 알고 있는 미래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 자신이 먼저 기대를 포기함으로써 아들이 느낄 수 있는 죄책감의 부담을 덜어 주려는 사랑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작품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아마도 어머니는 단 한번도 준섭에게 먼저 자신과 같이 살자는 의견을 피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절하는 아들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이 절대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을 줄 어머니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머니의 장례식를 중심으로 하나둘씩 모여드는 가족들 사이의 갈등의 시작. 하지만 이것이 갈등의 시작이 아니라 노인과의 인연으로 생겨난 모든 감점들의 해소. 즉 갈등이 해소되는 과정의 시작임이라는 것은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다. 명절날 가족들이 만나면 오랜만에 만나서 왜 저렇게 싸우고 있는지 라는 생각을 한두번은 해봤다. 하지만 무지의 나이에 그런상황을 겪으면서 생각한것은 그 것(싸움)은 부끄럽고 아픈 기억이었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과거였다. 하지만 그 속에 서로간의 애증이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말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어떤 갈등의 해소 방식이었던 것이다. 서로에게 서운했던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면 갈등은 해소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보면 꼴사납게 싸우는 모습으로 오해 해버릴 수 있는 상황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그것은 의사소통의 변증법인것이다. 너와 내가 서로의 나쁜 감정들을 내뱉으면서 의사소통을 시작했을때 이미 갈등의 고리는 해소 되고 있는 것이다. 가족끼리 왜저렇게 소리내며 울며 싸우는건가라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소리와 울음을 통해 자신과 형제 부모와의 억눌린 서운한감정. 증오로 대표되는 애증의 갈등 관계의 해소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축제는 우리내 삶에서 가족간의 미움과 증오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애증의 관계를 장례식을 치르는 과정속에서 절묘하게 통찰하여 주는 것이다. 준섭모을 둘러싸고 있는 애증의 관계를 정리하지 않을 수 없다. 외동댁, 첫째 아들의 처이며 맏며느리의 위치에서 노인과의 가장 오래된 시간을 그리고 노인의 치매를 보살피며 가장 고생을 한 인물이다. 단순하게 보면 노인이 운명함과 동시에 가장 홀가분한 인물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인간관계라는 것이 참으로 묘하다. 물론 당장의 병수발이나 뒷 치다꺼리를 안함으로써 육체적 고생으로 가장 크게 해방되는 인물이지만 인간이라는 것이 어찌 되었건간에 미운정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일듯 싶다. 우리는 외동댁이라는 인물에게서 작품전체의 밑바탕을 이루는 미운정이라는 가치를 읽을 수 있다. 노인을 가장 곁에서 보살피며 살아온 그녀에게 하루아침에 사라진 노인의 존재는 쉽게 잊혀지지 않는 트라우마를 제공하며 외동댁이야 말로 그런 트라우마 속에서 홀가분함과 미안함, 죄송함 사이의 모순적 감정속에서 갈등하며 살아갈 인물인 것이다. 용순이, 원일부의 방황으로 생겨난 첩의 딸이다. 그녀야 말로 서서히 드러나는 존재임과 동시에 독자에게 가장 궁금증을 제공하는 인물이다. 이러한 독자의 궁금증을 장혜림이라는 기자가 대변하고 준섭을 통해 용순의 존재가 조금씩 드러난다. 작가는 아마도 장혜림이라는 기자의 존재를 준섭이 세상사람, 즉 독자와 소통하는 통로로써 사용한 장치가 아닌듯 싶다. 장혜림이 없었다면 준섭의 내적 갈등을 불러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고 용순과의 지난 과거또한 덮혀있는 사실로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단순히 보면 용순이 전체적 작품의 사건의 중심에 있는 문제적 인물로 볼 수 있지만 준섭과 장혜림기자의 소통과정에서 일종의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한 소통 촉매제로써 그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준섭, 작품의 화자인 동시에 어머니의와의 과거에서 풍수지탄의 감정에 가장 괴로워하며 갈등하는 인물이다. 노인을 모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으로 시달렸는데 사실은 노인은 이미 그 약속을 포기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자신의 도리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과 그러한 아픔과 부끄러움을 잘 알고 있는 용순과의 대면을 꺼리는 설정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용순의 출현과 동시에 낫낫이 들러나는 자신의 감추고 싶은 과거의 사건들, 어머니와의 기억들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괴로워한다. 하지만 작가는 어찌보면 이러한 드러나는 치부 속에서 준섭이 느끼는 노인에 대한 죄책감의 무게를 덜어주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87세라는 호상을 당한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 얼마나 망자에게 못해드렸길래 그렇게 자책하고 괴로워 하느냐는 지적과 함께 용서의 면죄부를 주고자 하는 시도가 작가의 저변에 깔리고 있다고 본다. 세상의 어머니들 특히 우리나라의 어머니들은 왜그리도 자식들에게 아낌없이 주고자만 하는 것인지 어떨때는 부담스러운 점이 더 많다고 생각이 든다. 자신의 인생보다 자식의 인새을 위한 뒷바라지로 한평생을 살아가는 어머니들의 대표격으로 이 작품의 노인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의 맹목적 사랑을 어찌되었던 자신은 할 도리를 다했다는 생각으로 단순하게 치부해버린다면 우리들의 사회를 너무도 매정하게 보는 것이 아닐까한다. 하지만 옛날에는 정말 그렇게 생각한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어머니 자신들의 희생과 사랑의 크기가 너무도 크지 않은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소설 한권을 가지고 우리네 인생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모든 말을 할 수는 없다. 축제의 내용을 계기로 어머니의 사랑에 대하여 한번쯤 생각해보고 그들의 삶에서 사랑의 방식을 깊이 되새겨 봄으로써 지극한 그들의 사랑의 단면을 느끼고 잊지 말아야 할 그들의 사랑을 생각해 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어찌보면 그러한 맹목적인 사랑은 언젠가 우리가 자식들에게 배품으로써 마음의 짐을 더는 과정속에 있는 것 같다. 노인들이 나이를 남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우리 자식, 손자들에게 그들에게 받은 사랑을 나누어 주어야하는 의무를 짊어지게 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