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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딜, 세 편의 드라마-필요에 의한 선택과 그 배경
"뉴딜, 세 편의 드라마-필요에 의한 선택과 그 배경" 내용보기
앞서 본 책이  그래서 예전에 사놓은 책도 생각났고 거기서도 쉬벨부시의 책이 인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내가 가끔 하는 딱 그 책 말고 옆의 책을 고르게 되었다. 볼프강 쉬벨부시는 문학, 철학, 사회학을 두루 섭렵한 문화사의 거장으로 알려져있다.  이 책은 문화사를 넘어 정치학, 역사학을 아우르는 기존 저자의 저작과는 다른 성격이라 한다. 요즘에는 책 소개나 출판사 리뷰에 내
"뉴딜, 세 편의 드라마-필요에 의한 선택과 그 배경" 내용보기

 앞서 본 책이  그래서 예전에 사놓은 책도 생각났고 거기서도 쉬벨부시의 책이 인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내가 가끔 하는 딱 그 책 말고 옆의 책을 고르게 되었다.

볼프강 쉬벨부시는 문학, 철학, 사회학을 두루 섭렵한 문화사의 거장으로 알려져있다. 

이 책은 문화사를 넘어 정치학, 역사학을 아우르는 기존 저자의 저작과는 다른 성격이라 한다. 요즘에는 책 소개나 출판사 리뷰에 내용 요약이 잘 나와있다. 대중 교양서이면서 거의 학술서라서 몇 마디 안되는 리뷰가 되겠기에 이하 글은 각장 요약과 표시해둔 글을 옮겨둔다. 이런 까다로운 책은 리뷰가 거의 없다.

서론과 1장이 배경이기에 좀 어렵고 뒷 장들은 그보단 수월하다. 초록색은 내가 요약한 것, 검은색은 책 소개에서 떠온 것, 초록색이 모두 중요하다고 볼 수 없고 원글에서 많은 요약과 개인적으로 표시해둔 것이라서 전체 내용에서는 큰 의미없거나 단편적인 글과 많은 경우가 앞의 말과 뒤의 말이 몇 페이지 차이가 난다. "......"로 표시 한다고 했으나 빠진 경우도 많으니 아래 요약이 책 그대로라고 생각말기를, 정치 사회 현대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즐겁게 읽을 수 있다.

 

뉴딜을 미국에서 창조되어 세계로 확산된 것이 아니라 당대의 독일, 이탈리아, 미국, 심지어 소련에서 일종의 공통 기반 위에서 벌어졌던 보편적 세계사로 위치 짓고자 한다.

저자는 신고전주의를 주시하는데 신고전주의가 국가가 권력과 권위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건축양식을 주도하기 때문이다. 대공황 시기에 국가 개입으로 절정에 달했다고 평가한다. 국가 개입, 파시즘, 나치즘, 스탈린주의, 뉴딜을 하나로 수렴시키는 조건이자 요인이었다.

이시기 유행하고 확산된 건축이 신고전주의적, 마뉴멘털리즘적 건축 양식이었다.(기념비에 여러 특성을 빌려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나타내는 건축) 파리, 베를린,모스크바, 워싱턴에서 지배한 이데올로기와 체제가 달랐어도 경쟁적으로 신고전주의 건축 구조물들이 치솟았다.

고전주의classicism 건축의 원형은 그리스와 로마 건축이다. 신고전주의 건축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과 1789~1801년 나폴렝옹의 이집트 원정이 경계가 되어 나타난 건축 양식이다.

신고전주의는 합리주의를 일정 수용했고 미국 독립전쟁 이후 건축에도 영향,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이탈리아 파시즘, 독일 나치즘 정권의 정치적 도구로서 기념비적 건축이 활용되었고 2차 대전 이후 신생 독립국가, 제3세계 국가들에도 같은 목적으로 기념비적 건축이확산되었다. 마뉴멘털리즘, 기념비성은 신고전주의적인 건축을 일컬음.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에 신고전주의적 공공 건축물이 지어진다. 대공황과 이에 대응으로 국가 개입을 총체적으로 각국이 실행하여 나치즘, 파시즘, 뉴딜이 등장하는 시기다. 국가의 개입을 정당화하는 기념비적 건축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서론-신고전주의 건축과 뉴딜들 
쉬벨부시는 당시의 건축학의 사조를 뉴딜들에 관한 설명으로 연결시킨다. 쉬벨부시는 ‘신고전주의’를 눈여겨 주시한다. 신고전주의는 ‘국가가 권력과 권위를 시각적으로 생생하게 보여 주는 건축 양식’을 주도하기 때문이다. 신고전주의는 대공황 시기에 총체적인 국가 개입으로 절정에 달했다고 평가한다. 국가 개입, 그것은 파시즘, 나치즘, 스탈린주의, 그리고 뉴딜을 하나로 수렴시키는 당대의 조건이자 요인이었다. 이 시기에 유행하고 확산된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은 이데올로기와 체제가 아무리 달랐다 해도 경쟁적으로 치솟아 올랐다.
자본주의의 위기 시기였던 대공황 시기에 대중들은 모더니즘의 가장 심각한 적들, 즉 국가사회주의(나치즘)와 파시즘에 현혹되었다. 왜냐하면 국가사회주의와 파시즘은 대중들에게 그들이 원하고 필요로 했던 것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기념비성이었다. 기념비적 건축을 전체주의적 정권들과 잘못 동일시하는 것은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대립을 반영했다. 근대 건축이라고 하면 자유민주주의나 사회 복지 국가를 연상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대립 구조의 가정들에 대해서는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념비적 건축은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제도들의 힘을, 독재 체제에서는 국가의 공격적인 권력을 똑같이 잘 보여 준다”는 프랑코 보르시의 주장이 그랬던 것처럼, 학자들은 신고전주의적인 모뉴멘털리즘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점차 깨닫게 되었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체제의 개혁적 국가들뿐 아니라, 볼셰비즘과 파시즘의 국가들 모두가 건축을 필요로 했다. 그것은 보다 깊은 의미와 공동체에 대한 신뢰, 존경, 그리고 의사 종교적 감정을 자극하는 하나의 사원처럼 국민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국민 위에 우뚝 서게 될 건축이었다.

1차 대전 이후 근대 건축가들은 대중들에 의해서 그리고 대중들을 위해서 했던 사회 혁명을 구조적으로 표현하려는 열망을 가졌다. 하지만 대중들은 근대 건축을 이해하지 못했고 좋아하지않았다. 자본주이 위기였던 대공황 시기에 모더니즘의 가장 심각한 적들인 국가사회주의와 파시즘에 대중들은 현혹되었다. 왜냐 두 이념이 그들이 원하고 필요했던 것을 제공했기 때문이며, 모더니즘이 제공을 거부했던 것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념비성이었다. 기념비적-회고적이며 신고전주의적-건축을 나치 제3제국(신성 로마 제국이 1제국, 1871~1918년 독일을 2제국)과 20세기 다른 전체주의 정권들과 잘못 동일시함은 1920년대 30년대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반영한다.

.......신고전적 기념비적 기념비적인 건물들은 베를린 모스크바,로마 뿐 아니라 1930년대 워싱턴,런던,파리,제네바에도 건축되었다.1930년대 신고전주의 모뉴멘털리즘은 1932년 뉴욕 현대미술관이 국제주의 건축 양식이라는 모더니즘 만큼이나 퍼졌다. ....그것은 국가의 권력 권위를 생생하게 보여 주는 건축 양식이었던 것이다. ....대공황 시기엔 총체적 국가 개입으로 신고전주의는 정점이었다.......자본주의적 민주주의 국가들뿐 아니라 볼세지즘, 파시즘 국가들 모두 건축을 필요로 했다..... 베를린, 모스크바, 로마에서 오스만이 했던 변환,도로들이 확장 건설되었다....르 코르뷔지에, 그로피우스, 에른스트 마이 등은 친소비에트 건축가들, ......워싱턴에서도 1933~39년 사이 신고전주의 건물들은 만들어졌고....건축사가인 존 렙스는 '전제적인 왕, 홍제들의 영광을 찬미 위한 건축 양식이 철학적 토대가 민주주의적 펴등에 확고하게 뿌리박혀 있는 나라의 국가적 상징으로서 적용하게 되어졌다는 최고의 아이러니라고 했다.

학자들은 파시즘과 나치즘이 억압적이고 살인적인 경향과 함께 사회 평등주의적 요소들을 갖고 있으며 대중적 인기는 이것에 기인했던 바가 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930년대 비평가들이 1930년대를 결정할 역사적 계기는 미래의 1945년의 나치 패배가 아니라 1929 대공황이었다. 자본주의와 밀접한 자유민주주의를 대중들이 특별히 선호할 이유가 없었다. .....

세 국가 체제간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탈 자유주의적인 국가자본주의 혹은 국가사회주의로 간주되었다. 세정권 모두 합법적이었고 두 정당이 뉴딜 정부간의 차이가 있었으나 정책들 간에 유사성을 당시 학자들은 확인했다. 미국은 1933년 루스벨트 치하 자발적으로 전환했다는 것이다.....대중들이 끌렸던 것은 동등한 존재로서 취급받는 느낌이었고 혼자 힘으로 살지않아도 되며 국가라는 계급없는 공동체가 제공하는 보호, 안전의 느낌이었다.  세 국가는 모두 한 강력한 지도자의 감독 아래 평등주의적 공동체로서 국가를 바라보는 환상으로 부터 이득을 보았다.

공통성을 찾는 것은 세 국가를 동일시 함이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1장- 파시즘, 국가 사회주의 나치즘, 뉴딜 사이에 우리 생각 이상으로 유사점이 나타난다해서 친족관계이다. 모두 국민 경제를 복구시키기 위해 재무장, 전쟁을 필요했다 본다. 당시 루스벨트 정적을이 그의 정책들 기조에 대해 러시아 방향으로 너무 갔다고 히틀러주의를 이식하려 했다고 비판했는데 루스벨트 정부의 친 파시즘적 경향을 은연중에 대변한다. 실제 루스벨트 정부 재무장관해럴드 이커스는 우리가 하는 것은 러시아와 히틀러 독일에서 행해진 것들이었다고 선언까지 했다. 군사구조들, 자본주의 자유주의에 대한 공격도 그러했고 뉴딜의 이념적 고향이라 할 "혁신주의 Progressivism"을 신봉하던 곤료들이 사회 통제 만세를 외쳤던 것이다. 그리하여 쉬벨부시는 미국이 파시즘을 수용할 때 왜 반 파시즘이라는 가면을 쓰고 수용할 수 밖에 없었는지 보여준다.

'친족 관계' 
국가사회주의자들은 루스벨트가 취임 후 첫 100일 동안에 단행했던 긴급 구제 조치들을 자신들의 혁명적 프로그램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으로서 환영했다. 유럽의 논평가들도 루스벨트를 무솔리니와 같은 국민 투표제로 뽑힌 독재자로서 묘사했다. 베르나르 페는 “대중들의 애정과 열광적 지지를 받는 진실한 독재자”라고 불렀고, 한 저자는 “미국에서도 역시 자본주의는 코포라티즘적인 국면에 진입했다”라고 썼다. 일거에 파시즘은 갑작스레 그 영향력이 국경들을 초월하는 하나의 전 지구적 세력처럼 보였다.
그래서 당시 루스벨트의 정적들은 루스벨트의 제반 정책들에 대해 “러시아 방향으로 너무 멀리” 나아간 것으로 묘사했으며, 심지어는 민주당 의원조차 루스벨트를 “이 나라의 구석구석에다 히틀러주의를 이식하려” 했다고 비난했다. 허버트 후버는 “뉴딜의 경로를 계속해서 따라가면 우리 정부는 일종의 파시스트 정부가 될 수 있다”라고 하며 루스벨트의 정책들에 대한 공개적인 저항을 부르짖었다.
뉴딜 행정부는 파시즘/나치즘과의 유사성을 숨기지 않았다. 루스벨트 스스로 언젠가 기자들 앞에서 무솔리니와 스탈린을 자신과 “피를 나눈 형제들”이라고 말했고, 루스벨트의 고문단의 렉스퍼드 터그웰은 파시즘을 향해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보아 왔던 것 중에서 가장 깨끗하고, 가장 깔끔하며, 가장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사회적 기계의 부속품이다. 그것은 나에게 부러움을 자아냈다”고 말했으며, 루스벨트의 내무장관 해럴드 이커스는 “이 나라에서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러시아에서 해 왔던 것의 일부이며, 심지어 어떤 것들은 히틀러 치하 독일에서 행해진 것들이었다”고 선언했다.
이질적인 것으로 생각되어 왔던 이 체제들을 마치 친족 관계처럼 연결시키는 기제들은 다양하다. 군사 구조들과 군사적 메타포들이 그러했으며,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도 그러했다. 뉴딜의 이념적 고향이라 할 ‘혁신주의’를 신봉하던 미국 관료들의 외침은 ‘자유방임주의는 죽었다. 사회 통제 만세’였다.

독일은 유럽 최대 산업국가였다....루스벨트에게 부여했던 광범위한 권력은 전례가 없었다.....1933년 2월 28일 독일 의회 방화 사건은 히틀러가 미국과 유사한 과정을 통해 입법 권력을 장악했다. 용의자들을 무죄로 걱방해줌은 독일 사법부 자율성에 종말을 고한 판결이 되었다.

국가사회주의자들은 루스벨트 첫 100일 단행했던 긴급구제 조치들을 자신들의 프로그램과 일치한다며 환영했다. 이런 관점은 나치만이 아니라 1936년까지는 미국에 관해 자유롭게 보도할 수 있었던 독일의 비당파적 언론들도 루스벨트를 카리스마의 권위주의적 지도자로 루스벨트 행정부 정책을 국가사회주의적, 경제적 독재 정책으로 특징지었다......뉴딜이 지닌 탈 자유주의적인 경제 요소들을 환영함을 넘어서 국가사회주의자들과  파시스트들은 루스벨트 당선을 최고 선전 기회로 보았다.........서구는 무솔리니를 볼셰비즘에 대항하는 요새로 환영한다. 히틀러에게는 주지않던 지위였다. 무솔리니는 적법한 레닌에 대한 카리스마 넘치는 안티체제였다. ....그에 반해 국가사회주의는 반 볼셰비키적인 온갖 수사에도 불구하고 위험하고 혁명적인 것으로 간주됨.......1930년대 중반이 되면 독일과 이탈리아는 위 견해들과 결별하기 시작한다. 1935년 이탈리아의 이디오피아 친공, 스페인 내전데 대한 독일 이탈리아 개입이 주 이유였다. 서구는 전체주의의 팽창주의로 본다.....만약 2차 대전에 참전했기에 미국이 대공황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역사가들의 합의를 받아들인다면 세 이데올로기는 모두 자신들의 경제를 건강한 상태로 회복키 위해 재무장과 전쟁이 필요했던 것이다.

탈자유주의적 정부(사회 계획,국가 주도 경제를 지향)의 공통점이지만 당시 미국 평자들은 미국이 시민의 자유를 보존한다는 차이를 강조했다.....루스벨트는 무솔리니와 스탈린을 피를 나눈 형제로 말한 예도 있듯 행정부도 유사성을 인정한다. ....뉴딜의 내.외부 서클들에는 친파시스트적 애호갇르이 존재했다는 증거는 많다.......루스벨트의 내무장관 해럴드 이커스는 우리가 하는 것은 러시아, 히틀러 독일에서 행해진 것들이었다고 선언....미국이 볼때 나치 혁명은 자신의 힘을 계속 드러내고 있었다.....1934년 국제철학대회에선 뉴딜을 페이비언 파시즘이라는 페이비언 사회주의의 영국식 신사적 버전을 의미하는 말도 만들어내기도 한다.인간의 얼굴을 가진 파시즘이란 뜻이다.....

도금시대-남북전쟁 이후 19세기 미국 호황기로 마크 트웨인 소설 제목에서 유래,각종 사회 부정 부패가 만연했던 시기.

....세기 전환기 무렵 중간 계급의 몇 부류들이 사회주의를 채택함에 따라 여러 이름의 사회주의가 등장,계급에 상관없이 모든이들에게 구원의 교리를 제공, 이것과 등가물이 미국에선 '혁신주의' 뉴딜의 이념 대부분이 여기서 부터 도출되었고 뉴딜 지지자들 대부눈이 혁신주의자로 경력을 시작했다. P76~77 글은 상당한 내용이라 제대로 요약이 쉽지않다......혁신주의자들은 미국이 1차 대전에 참전을 필연적이라 주장,기술 관료들에게 미국 참전은 민주주의 수호 의미와 그들이 국가 리더쉽을 장악할 기회였다. ...혁신주이적인 레토릭에서 전쟁과 복지는 거의 상호 교환할 수 있게 되었다....혁신주의는 사회 통제를 필요로 했다.(의미 요약)

2장-히틀러 무솔리니 루스벨트의 리더십

모두 합법적으로 선출된 리더십이었고 집회, 축제적인 행사, 라디오를 통해 대중을 사로잡았다. 대중들이 스스로 중요한 존재라고 깨닫게 만듦으로써 대중들을 자신의 편으로 동원할 수 있었다. 이것이 그들의 카리스마 원천을 구성한다고 본다.

오늘날 아돌프 히틀러와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는 거울상체로 비춰진다. 이보다 더 극적인 인물 대비 연구를 상상하기 어렵다. 히틀러는 사악한 독재자나 전체주의의 화신으로 기억된다. 반면에 루스벨트는 귀족적인 신사이자 자유민주주의적 휴머니즘의 구현자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1930년대 당대인들은 상이한 입장을 취했다. 그들에게 히틀러와 루스벨트는 모두 대중을 자신의 영향력으로 사로잡았던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리더십이 없었다면 국가사회주의나 뉴딜은 모두 불가능했을 것이다.
카리스마적인 리더십은 통상적인 대의제가 더 이상 결과들을 산출하지 못하거나 혹은 공공의 열광을 불어넣지 못하는 그러한 위기 상황에서 등장한다. 사회학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그러한 현상은 위기 상황에서 불신당해 온 의회와 정당 같은 매개 기구들을 우회하는, 대중과 지도자 간의 직접적인 국민 투표식 결합으로 설명될 수 있다. 심리학적으로 말한다면, 구체제에 대한 공동의 반란에서 대중과 카리스마적 개인이 상호 수렴한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당대인들은 히틀러와 루스벨트가 인민의 영혼을 감동시키는 탁월한 능력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들의 연설은 인간적이었으며 친밀감을 주었다. 그들은 각자의 고유한 방식으로 청중들에게, 군중이 아니라 마치 청취자 개개인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 루스벨트가 좋아했던 의사소통 수단인 라디오는 지도자에게 가장 친밀한 사회 단위인 가족에 대한 접근을 가능케 했으며, 자신의 메시지를 그 가족 구성원들 각각에게 친히 전달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나치의 주요 집회 무대에서 펼쳐진 인민과 지도자 간의 일체감은 루스벨트가 노변정담들을 통해서 맺어 나갔던 친밀한 연계와는 달랐지만, 양자 모두는 집단적인 경험이었고 최종 결과는 매우 동일했다. “가장 대규모의 행사들에서조차, 개별적인 청중들 모두는 하나같이 총통이 자신에게 직접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한 것이야말로 개인들 하나하나가 이 사람에게 쏟는 거대한 애정과 충성의 원천이다.”
히틀러와 루스벨트 모두 카리스마적 지도자들, 리어십이 없었다면 모두 불가능이었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권력 장악했고 금존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민의 영혼을감동시키는 탁월한 능력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루스벨트의 노변정담은 타고난 재질과 능력,주의깊게 체계적인 연습으로 청취자들이 직접 자신에게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나치의 주요 집회 무대에서 경험 역시 집단적 경험이었고 연설자와 대규모 청중간 전기적 ㅇ녀계였다. 히틀러 연설의 공격성은 일부에 지나지않는다. 내용이며 어조며 표현은 대중에게 알기쉽고 강력한 느낌이었다. 종교적 무아지경의 이벤트로서 불꽃튀는 전류의 교류로 대중과 융합이고 성적 결합의 성격이라고 까지 말한다. 프랑스 이론가 로제 카유아는 뉘렌베르크등에서의 나치 대규모 집회를 관현악으로 편곡된 현기증이라고도 불렀다. 이역시 대중은 총통이 자신에게 직접 말한다는 느낌으로 자신들이 중요함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거대한 애정과 충성의 원천이라고 평했다. 이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둘은 근본 부터가 달랐고 정치 여정도 달랐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라디오를 통한 연설을 하진 않았는데 유럽에선 라디오가 초기 단계였고 히틀러 개인적인 취향 차이로 생각된다....1945년 이후 유럽의 미국화는 1930년대 매스 미디어 문화와 심리학 관점에서 볼때 유럽이 얼마나 후진적이었는지 보여준다.

 

3장 선전

세 나라는 이 시기 엄청난 정부 정책 선전 기구들을 만들었다. 언론 통제도 동일했다. 미국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지만 통제하긴 마찬가지였다. 독일은 Hakenkreuz, 뉴딜은 덜 아려졌지만 실업에 대항하는 여름 대공세라 불리는 1933년 이글 켐페인이었다. 블루 이글 상징이 없을 경우 대공황과 싸우는 우리의 적이라 공표되었고 독일의 스와스티카 보다 더 많았다고 독일 특파원을 말하기도 했다. 이런 선전을 극대화 하기 위해서는 공간의 재조직이 필요했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루스벨트 행정부와 히틀러 정권이 수행했던 홍보 작업은 이전의 그 어떤 정부와도 달랐다. 당시 미국출판인협회의 대표였던 엘리샤 핸슨은 “신문사와 통신사에 고용되어 뉴스를 작성하는 기자들보다 정부를 위해서 뉴스를 쓰는 신문 기자의 수가 더 많다”고 빈정댔다. 물론 미국의 언론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고 정부의 직접적인 지령을 받지 않았지만, 방송 허가권 등을 통해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언론을 통제했다. 미국이 특이했던 것은, 라디오 방송국들은 말해야 할 것에 대해 지시를 받을 필요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대개 그들은 해야 할 말을 이미 말하고 있었다.
어떤 것을 완전히 전유해 내는 능력 면에서 나치당만이 그러한 능력을 독특하게 갖고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이 시기의 “상징 전쟁”에서 보듯 선전에서 상징의 중요성은 분명했다.

선전은 이미 상승하고 있는 어떤 운동에서 가장 잘 작동하며, 선전의 효과가 가장 잘 나타나는 순간은 위기와 혁명의 시기에 온다. 그때는 국민의 의지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을 때인데, 그때야말로 선전 슬로건은 지금까지는 불명료했던 인민의 의지를 명확히 표출하게 된다.
뉴딜은 상징과 강압을 거대한 선전 캠페인 속에 통합해 냈다. 대표적인 것이 블루 이글 캠페인이었다. ‘블루 이글’은 1933년 7월에 대공황에 직면해 끝없이 추락하는 미국 경제를 통제하기 위해 착수한 정책이었다. 루스벨트는 그 캠페인을 “실업에 대항하는 여름 대공세”라고 묘사했으며, 친구와 적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블루 이글 배지는 옷에 달도록 하였고 블루 이글 포스터는 가게나 공장에 걸도록 했다. 블루 이글 상징물이 없을 경우 대공황과 싸우는 국민의 군대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고, 심지어 ‘우리와 함께하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의 적’이라고 공표되었다. 블루 이글을 비방하는 사람들은 ‘얻어맞아도 싸다’는 정치인의 공개적인 발언도 회자되었다. 《데일리 헤럴드》의 한 특파원은 “독일의 스와스티카(나치 갈고리 십자가)보다 블루 이글이 더 많았다”고 했다.
히틀러 정권과 루스벨트 행정부가 행한 선언들은 한도 끝도 없었지만 그런 선언들의 실제 내용은 별로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았다.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던 것은 어떤 특별한 사업과 그것의 성공 기회들이 아니라, 그러한 사업들에서 나타났던 감정적 호소였다. 국가사회주의와 뉴딜은 1930년대에 정치적 성공을 위해 가장 필수적이었던 재능을 갖고 있었다. 즉 혁신적으로, 대담하게, 그리고 파렴치하게 상징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이 그것이었다.

 

미국의 여론에 대해 정부 개입은 1차 대전 동안 처음 발생, 급진적 진행, 1933년 이후 규모 수적인 면에서 워싱턴 베를린 정부 부서는 정보 수집 확산에 같은 비율로 증가했다. 질적 양적으로 두 정권의 홍보 작업은 이전 어떤 정부와도 달랐다.

블루 이글 캠페인은 자유 낙하하는 경제를 통제하기 위해 착수한 정책이었다. 어떤 상징을 부착하면 대중이 애국적 의무감에서 그 상징을 단 판매점에서만 구매토록 고취시킨다는 것,

이 캠페인은 1917~18년의 전시 동원화와 조치들을 노골화한 호전적인 노선을 따르며 참조한 것, 경제와 언론에 국가 통제와 지도, 전쟁 비판자들을 범죄화 기소, 크릴 위원회(1917년 조지 크릴을 위원장으로 설립한 정부 홍보 선전 기관등을 이용하여 지적 감성적 문구로 국민들에게 전쟁을 설득,협조 구했던 기관)에 의한 언론 자유 제한등이었다.

밴드왜건 효과(bandwagon effect);다수가 어떤 방향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면 다른 사람들도 거기 쏠려 따르는 효과.

이상하게도 다른 경우엔 큰 관심을 가지고 뉴딜을 따라다녔을 독일의 미디어는 블루 이글 캠페인에 대해선 실질적인 논평없이 간략한 보도만 했다.....독일에 경우엔 순응의 상징화 라는 표현으로 독일인들이 정권에 대한 충성을 표현했다. 예를들면 Heil Hitler 라는 인사 형식 사용, 가정집 창에 스와스티카 깃발을 전시함, 나치의 동계 구제 자선 사업에 쇄도한 기부금등,이런것들은 간접적인 강제가 존재했다. 1933년 이글 캠페인도 사회적 도편 추방이나 경제적 보이콧 위험이 따랐다.... 순응을 장려하기 위해 접근 방식에 양자의 유사성이 있었다. 블루 이글과 동계 구제는 배지 발급 까지 유사했으나 비순응자,반항자에게 폭력은 독일이 훨씬 컸다. 결론적으로 국가사회주의와 뉴딜은 1930년대에 정치적 성공을 위해 필수적이었던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대담하고 혁신적으로 파렴치하게 상징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게임, 스포츠, 레저 문화가 대규모로 급성장한 것은 1차 대전 이전이었다. 스포츠는 1920년대 오락으로 자리잡았고 1930년대는 국가가 이런 것을 발견,지원 수단화한다. 전체주의 국가들에서 발생했다. ...운동장, 경기장, 수영장, 해변, 소풍, 캠핑 공간의 자연보호 고원, 전망대, 야외 원형 극장등은 뉴딜적 경관의 일부였다. 또 '공원도로'가 있었는데 아우토반 처럼 자동차 여행을 위한 것,

 

4장-공간의 재조직

 땅에 대한 신화를 만들어 땅으로 돌아가자는 정책이 각 체제에서 착수되었다. 땅이 조국이며 혈통이라는 것은 극도의 민족주의와 인종주으를 생산해낸다. 모두 전원 정착지를 건설했다. 미국의 소도시, 독일의 란트도시, 농촌도시등이 인기를 끌었음은 산업화가 파괴했던 산업사회 전 생산양식에 대한 기억이 대중에게 생생히 남아있었고 도덕 경제라는 개념이 작동함으로써 공동체의 향수라고 본다.

지역주의와 ‘땅으로 돌아가자’ 운동 
대공황의 파국은 국가의 재발견과 구현에 자리를 내주었다. 국가는 좌절의 시대에 유일하게 실재하고 믿을 수 있는 가치의 원천이자 최후의 피난처로 간주되었다. 자유주의 경제의 토대 붕괴는 새로운 “지반”을 찾기 위한 탐색을 촉발시켰다. 이탈리아와 독일 그리고 대공황에 영향을 받은 다른 모든 나라들에서 그러한 탐색은 땅에 대한 신화를 창출했다.
유사한 과정이 정치 심리학에서도 발생했다. 국민들은 보호와 지침을 얻기 위해 더 이상 자유민주주의에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대신 국민들은 새로운 유형의 권위주의 국가에 신뢰를 두었다. 이런 국가는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일 두체와 총통으로 제도적으로 인격화되었고, 미국에서는 루스벨트로 상징적으로 인격화되었다. 지도자의 경제적 임무는 국가를 세계 경제로부터 해방시켜서 국내의 토착적인 토양에다 이식시키는 것이었다.
아우타키, 즉 국가의 경제적 자급자족은 1930년대의 표어가 되었지만, 이것은 단순한 경제적 개념 이상의 것을 의미했다. 1930년대에 재발견된 국가는 전 인민의 국가였다. 계급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저 평범한 시민만이 존재했는데, 이들은 계급적 분열을 넘어 하나의 공동체로 통합되었다. 이러한 운동의 일부를 차지했던 것이 바로 “지역”의 부활이었다. 왜냐하면 대지와 향토만이 자신을 안심시키는, 소박하고도 안정적인 그 무언가를 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루스벨트 역시 땅은 자본주의에 의해 황폐화된 세계를 기적적으로 재생시키는 일종의 마술 재료와 같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헨리 포드는 산업과 농업 간의 균형의 필요성을 되풀이해서 강조했다. 포드는 “농업에서의 한 걸음과 산업에서의 한 걸음으로, 미국은 안전하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목표는 많은 사람들이 19세기에 파괴되어 버렸다고 믿었던 자연과 경제, 기술과 문화 사이의 균형과 조화를 복원하는 것이었다. 제시된 해결책들은 거대하게 통합된 산업적?농업적 사업들에 의해 비대해져 버리고 파산된 경제를 좀 더 적정한 규모의, 균형 잡힌, 그리고 무엇보다도 위기 방지적인 체계로 어떻게 재조직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 그것은 이전 시대의 “유기적” 혼합 생산으로 복귀하는 것, 즉 “재농업화”를 의미했으며, 혹은 거대 규모의 산업을 농업 생산 속에 배태시키거나 아니면 농업 생산과 결합되도록 소규모 단위들로 분화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파시즘, 국가사회주의, 뉴딜 모두는 각종 선전을 통해 대중들을 열광시키면서 전원-정착지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이들 정착지 운동은 정책의 상징이 되었기도 했지만, 민주주의 체제이든 혹은 독재 체제이든 간에 공영 주택은 위신을 위한 사업들과 경쟁할 수 있는 웅장함이 매우 부족하다. 이는 1936년 이후부터 선전이 왜 다른 종류의 건설 사업으로 집중되기 시작했는가에 대한 이유이다. 그들은 수년 전에 소련에서 수행되었던 거대한 공공사업들로 시선을 돌렸다.

내셔널리즘은 중간 계급 이데올로기였다. 중간 계급의 등장과 일치했다.....*

니벨룽의 무리들(고대 독일 전설적인 왕족 니벨룽을 시조로 하는 초자연적인 난쟁이 족, 안개 나라 사람들이란 뜻, 마의 두건,돌을 자르는 보검 같은 엄청난 힘을 주는 보물을 많이 가졌다고 한다.............국민들은 대공황에 책임져야할 자유민주주의에 시선을 돌리지않았다. 대신 새로운 유형의 권위주의 국가에 신뢰를 두었고 이탈리아 독일의 일 두체,총통, 미국의 루스벨트로 상징적으로 인격화되었다.

5장 공공사업은 체제들이 자신을 대내외적으로 표출하기 위한 전시 사업들이었다. 여기서 세 국가 모두 소련을 모방했다. 파시즘의 아그로폰티노, 뉴딜의  TVA, 나치 독일의 아우토반이다.이런 공공사업은 권력이 만들고자 했던 새 문명을 대중적으로 기억하게 만드는 기념비의 완성이라고 볼수 있다.

쉬벨부시는 각국의 수도 건설에서 기념비성과 도시의 밀접성을 말한다. 전원성에 대응하는 도시성의 표현으로서 기념비적 건축이 이들 도시에 지어졌다.

모든 정치 체제는 전시 사업을 추진한다. 전시 사업을 통해서 정권은 세계에 자신을 표출하고 자신들의 정치의 목적, 방법, 이상이 판단되기를 기대한다. 파시즘, 뉴딜, 국가사회주의의 경우 전시 사업들은 각각 늪 지역의 개간, 잊혀진 강 계곡에 댐과 발전소의 건설, 그리고 전국적 고속도로망 건설 등이었다. 이들 사업이 위의 세 정부에게 왜 그다지도 중요했는지를 이해하려면 우선 그들 모두가 무조건적으로 모방하고 경쟁하려고 했던 한 정권, 즉 소련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스탈린의 제1차 5개년 계획은 “공산주의의 꿈의 공장”이라 불렸던 선전 기구에 의해서 시작되고 수행되었다. 선전의 주제는 노동뿐 아니라 프로젝트 그 자체이기도 했다. 시멘트와 강철, 굴착기와 트랙터, 굴뚝과 댐, 송전선과 터빈과 같은 원료와 자재들이 그토록 서사적이고 신화적인 웅장함으로 취급되었던 적은 이전에는 결코 없었다. 1927년에 서구는 자신의 번영을 즐기는 데 너무나 몰입해 있어서 스탈린의 러시아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당대인들은 스탈린의 5개년 계획을 통계적 왜곡과 허황된 기술적 낭만주의로 구성된, 머나먼 나라의 이국적인 사건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서구 세계가 광란의 20년대로부터 갑작스럽게 대공황으로 돌입하자 그러한 태도는 일변했다. 신생국 소련의 분주한 움직임과는 대조적으로 산업화 국가들에서의 실업자 행렬과 폐쇄된 공장들을 보여 주는 화보 잡지만큼 두 체제 간의 대조를 확실하게 보여 주는 것은 없었다. 소련의 움직임은 광범위한 공적 관심의 주제가 되었고 모방의 주제가 되었다.
스탈린이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을 정복하려는 거대한 행위, 즉 드네프르 강에 댐을 축조하려는 소비에트 계획을 밝힌 지 3년 뒤인 1930년에, 무솔리니는 자신의 정권을 위해 그와 유사한 위신 사업들 즉 아그로 폰티네 개간에 착수하였다. 1933년 5월 루스벨트는 테네시 강 유역 개발 공사 법안에 서명했다. 독일은 아우토반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1924년 소비에트 공산주의는 첫 패배를 경험했다......세계 시장은 안정되었고 세계 혁명 가능성은 질식했다. ...소련 경제를 위한 스탈린의 1차 5개년 계획은 레닌의 정신 보다 니체적 의지의 행동,또는 디오니소스적 집산주의라 불렀던 것에 따라 진행되었다. .....아그로 폰티노, 뉴딜, 국가사회주의의 공공사업 프로젝트 비교는 지역들을 근대화시키고 재편하려는 기술적 모뉴멘털리즘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테네시 강 유역 공사를 보면 원래 그 지역은 비옥했는데 19세기 말 악덕 자본가 시대가 도래했고 이 지역은 황폐해졌다.  ......TVA는 어느 모로 보나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대한 도전장을 내밀었던 것이다....독일과 미국의 공공사업 프로젝트 공통점은 최신식 기술이었다.... 전력화가 TVA,자동차 대중화는 아우토반을 위한 것이었다.....두 지도자의 카리스마는 특수한 이해관계들을 중립화 시키고 산업을 국유화하고 대중들에게 기적 같은 기술에 대한 접근을 제공할 수 있었던 능력덕분이었다....세계 최초의 고속도로망 아우토반의 건설은 1938년 국민차 폭스바겐 자동차 제작이 시작되기 전 1933년 나치 권력 장악 직후였고(히틀러와 자동차 디자이너 포르세의 만남의 산물이었다) 차들이 존재하기 전 도로가 건설되었다는 것은 놀라웠다...아우토반은 미학에 초점을 두었다. 앞의 두 나라의 공공 사업이 기술적, 경제적 근대화였다면,아우토반의 길은 경관들이 갖는 고유 성격을 강조, 최단거리 연결이 아니라 숭고하게 이전 보다 경관을 더 아름답게 만들도록 기획이었다. 경관의 창조! ....미국의 도로는 공원 도로 건설,아름다운 길,유람도로였다... 운전을 재밌게 함이었다. ..아우토반은 최신식이면서 원상태로 경관을 복원했기에 최고의 업적이었다.... 전례가 없는 역동적인 힘, 제3제국이 요구했던 것이다....

*신즉물주의 운동-1920년대 독일에서 일어난 반 표현주의적인 예술 운동, 사물에 대한 정확한 묘사 강조.

경제적 필연성 - 에필로그
전 지구적 활동 무대에서 파시즘적/국가사회주의적 노선에 따른 전체주의적 복지 국가와 루스벨트의 자유주의적 변이 중 어떤 국가주의 시스템이 승리를 거둘 것인지를 결정한 것은 바로 제2차 세계 대전이었다. 전쟁의 결과가 보여 주듯이, 파시즘과 국가사회주의를 통해서 근대화하려는 구유럽의 시도는 실패했다. 승리한 것은 미국이었지만, 미국은 패배한 적들의 문화의 주요한 부분을 자기 것으로 흡수함으로써만 안정성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항상 미국에게 군사적 위협이었던 유럽 대륙은 일종의 평화주의의 오아시스로 전환되었다. 다른 한편 미국의 고유한 역할은 안전을 책임지면서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미국은 상인商人에서 전사戰士로 거듭났다. 평화로운 상인들의 공화국이라는 미국의 자기 이미지는 40년의 냉전 동안에 소리 없이 역전되었다. 따라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1년 전인 1944년에 미국의 고립주의자인 존 플린이 루스벨트 체제를 비판하며 말한 것은 오늘날 더욱더 적절하게 들린다. “우리에게는 적들이 존재해야만 한다. 그 적들은 우리에게 하나의 경제적 필연성이 될 것이다.”  

에필로그는 자체가 요약이라 일일히 안쓴다.

출판사 리뷰도 참고하길. 


k***9 2012.01.30. 신고 공감 1 댓글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