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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스티븐 호킹 박사가 자신의 저서를 통하여 신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세간의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것은 기존의 그의 저서 "시간의 역사"에서 글의 마지막에 신의 존재를 암시한 그의 주장을 뒤집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와 영국의 켄터베리 대주교 와의 설전은 기사화 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거기에는 파문도 없고, 화형이나 이단 심판도 없었지만 여전히 종교와 과학 사이에 놓여있는 거대한 벽을 느낄 수 있었다. 과학과 종교가 대립각을 세운 것은 사실 우리에겐 낯선 일이 아니다. 과학은 사실 시작부터 과학과의 그 팽팽한 줄다리기를 계속해왔다. 그리고 그 옛날 과학이 아직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신학에서 독립하지 못하고 있었을 때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중얼거렸다고 전해진 한 과학자가 있다. 갈릴레이가 구체적으로 어떤 과학자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이 일화는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비록 갈릴레오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지만 이보다 더 과학과 종교의 대립을 함축적으로 더 잘 보여주는 이야기도 없을 것이다. 정신적인 가치로 세상을 설명하려는 종교와 물질적인 논리로 세상을 증명하려는 과학은 어쩌면 그 정체성 자체가 서로 대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카톨릭 교회가 유럽 전역의 왕권과 결탁하여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을 때 종교와 과학과의 전쟁은 대개 종교의 승리로 끝이 났다. 하지만 이성과 진실을 향한 사람들의 욕망은 계속해서 그러한 권위에 도전하였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그러한 진리를 입에 담았다가는 화형을 당하거나 고문을 당하게 되는 과학자들에게는 살얼음판 같은 시대에 살았던, 과학 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던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글의 시작은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이야기보다는 그의 전기를 썼던 작가들의 입을 빌어 그의 아버지 빈첸초와 그 당시 과학계와 그것을 상대하는 종교계에 초점을 맞춘다. 어린 시절의 갈릴레오에 대한 서술은 그가 그저 사물의 이치를 궤뚫어보는 능력이 있었다라고만 단순하게 서술되어 있고 그보다는 그의 아버지 빈첸초를 설명하면서 그가 기존의 다성음악에 반대하는 혁명적인 음악가였고 가난한 삶을 살지언정 자신의 비판적이고 자유로운 신념은 굽히지 않았다는 점에서 갈릴레오 역시 그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케한다. 사실 아버지가 그의 사상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영향을 주었든 주지 않았던 간에 아버지가 그에게 수도원에서 공부시키는 것을 그만두게하는 결정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지금 알고있는 과학자 갈릴레이는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종교인이 되었어도 아마 논리적이고 실험적인 사실을 중요시하는 그의 성격이라면, 정통교단에 맞지 않는 이단아가 되었을 것이지만 말이다. 아버지의 기질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그는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그 반항아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단순히 반항아는 아니었다고 단지 구체적인 실험과 확인 없이 이론과 생각만으로 과학의 법칙을 만들어나가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접근법이 그에겐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다. 다만 그 당시엔 그 아리스토텔레 철학이 종교와 결합되어 어느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 그는 교수들에게 미움받는 문제아 학생이었고, 그는 공공연하게 아리스토텔레스 체제의 과학을 비판하고 무시했다. 실험없이 사고로만 진행되는 기존 과학 체계를 비판하고 그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피사의 사탑에서의 중력 낙하 실험을 했다.(그 실험을 정말 했는지 그 진위에 대해서는 지금도 말이 많지만) 그 실험이 단순히 탑에서 두 개의 무게가 다른 공을 동시에 떨어뜨려본 것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혁명이나 다름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실험을 경시했었고 누구도 과학을 하는데 실험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 실험을 통해 무거운 것이 가벼운 것보다 먼저 떨어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을 정면으로 반박했을 뿐만 아니라 실험과 관찰을 통해 이론을 정립하는 새로운 과학의 방법을 제시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과학계에 화려하게 부상하고 눈도장과 미움을 동시에 받게 된다. 어쩌면 갈릴레오와 시대의 대립은 운명적일 수 밖에 없던 것일지도 모른다. 교회는 진리가 아닌 권력으로, 사랑이 아닌 공포로 세상을 짓밟고 있었다 하지만 종교에 짓밟힌 인간의 이성과 진실을 향한 인간의 욕구는 밟아서 사그라드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커져만갔고 그것들은 종교가 만들어놓은 세계관과 부딪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갈릴레오는 영리했다. 그는 비록 반항아 기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세상에서는 지위와 명예가 있어야 자신의 이론을 사람들에게 더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고, 브루노처럼 순순히 죽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일찍 간파했다. 그는 대학교 교수가 되기 위해 이리저리 지원을 하고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자유로운 사상의 집결지인 피도바의 수학교수가 되고 사람들을 만나 인맥을 쌓아 수완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그를 자유 진영의 선봉의 영웅으로 대접하고 그것은 또한 많은 지지자들과 적들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시대는 결코 호락호락하게 갈릴레오의 활약을 지켜만 보고 있지는 않았다.
작가는 갈릴레오의 행적과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며 종교에 짓밟혀간 철학지 브루노에 대하여 몇 번이고 반복하여 서술함으로써 그 시대 교회의 잔인함과 갈릴레오가 처한 상황의 위험성을 강조한다. 독실한 카톨릭 신도이고 자신이 열성적인 신자라고 고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단으로 몰려 7년 간이나 지하감옥에서 갖은 고문을 당하다 화형당한 철학자 브루노는 갈릴레오와 그 시대 급진적인 과학자들에게 반항의 결과가 어떤지 본보기를 보이는 확실한 예였을 것이다. 다행히 갈릴레오는 이런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잘 알았기 때문에, 그리고 여느 뛰어난 과학자들에게 흔하게 보여지는 사회성의 부족함을 보완할 수 있는 융통성과 인맥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지위와 명성을 얻었고 그의 자리를 지켜낼 수 있었다.과학자하면 떠오르는 그런 외곬수 기질과 괴짜 기질과는 다르게 그는 친구가 많았고 그 인맥으로 인해 어려움을 요리조리 헤쳐나갔다. 집안은 가난하고 아버지는 유명하지 않고, 동생은 형의 돈을 함부로 쓰는 것 외에는 잘 하는 것이 없는 허풍쟁이 음악가였고, 아버지는 그보다 더해서 갈릴레오와 상의도 하지 않고 자신의 딸이 시집가는데 지참금으로 갈릴레오 수입의 4분의 3정도 되는 돈을 주기로 약속하고 (결코 자신이 주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떠나버렸다. 이런 재난 아닌 재난에 그 놀기 좋아하던 갈릴레오도 어쩔 수 없이 돈을 계속해서 벌 방도를 마련해야만 했다. 갈릴레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번뜩이는 천재성이나 다방면에 능한 전인적인 인간의 모습은 보여지지 않지만, 이 재정적인 고난을 헤쳐나가는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다방면에서의 발명은 인상적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각종 발명품들을 고안해 내어서 한 귀족에게 물을 끌어올리는 펌프를 발명해내어 팔았고 (기대한 것치고는 한 명에게 밖에 못 팔았지만.) 해군력에 크게 의존하는 베네치아에게 각종 배의 개량과 도시의 방어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제안들을 하여 이득을 취한 것 역시 아르키메데스 적인 모습이 엿보인다. 그럼에도 갈릴레오는 자기 동생들과 아버지가 벌여놓은 사고들을 뒷수습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궁리하는 그의 모습은 애처롭게까지 보여진다. 놀기를 좋아해서 학창시절에 그는 창녀촌과 각종 유흥가를 왔다갔다 거렸고 대학 교수가 되서도 학생이랑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쏘다니기 좋아했던 그가 졸지에 청년 가장 신세를 면치 못했던 것이다. 그의 이런 몸부림은 향후 200년 동안 전 유럽의 은행가들, 수학자들, 항해자들에게 애용되었던 갈릴레오 컴퍼스를 발명한 것으로 이어진다. 그의 컴퍼스는 그간 그를 괴롭혀 왔던 돈의 문제들을 어느 정도 덜어주고, 거기다가 그가 부양해야 했던 애인과 그의 자식들을 먹여살리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런 그의 궁핍함이 그를 잠시 학문의 길에서 집어내어 발명의 길에 들여서게 했다는 점에서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격언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다. 보통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돈이 필요하면 사업에 손을 대거나 돈을 빌리러 다니거나 또다른 직업을 얻으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철저하게 현실적이면서도 창의적인 사람이었다. 언제나 과학이라는 자기 분야에 집중하면서도 머릿 속에서는 발명을 위한 아이디어도 언제나 항상 지니고 있었다. 학문에 완전히 발을 담그고 있었지만 현실도 항상 잊지 않았던 그의 균형 감각은 그가 지동설 혁명을 일으키고 난 이후에 살아남을 수 있게 하였다. 사실 지동설은 그보다 먼저 코페르쿠니쿠스가 먼저 주장하였지만 지동설로 그가 유명해진 것도 바로 그의 그 현실을 대응하는 방식일 것이다. 코페르쿠니쿠스는 지동설을 주장하면서 교회에게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의 두꺼운 책을 시종일관 애매모호하고 모순적인 내용들로 서술을 함으로써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게 만들고 그의 핵심적인 태양이 중심이라는 사상은 20여 페이지에 걸쳐서 간략하게만 서술해 놓았다. 그 책도 그가 죽기 며칠 전에 출판되었기 때문에 교황청은 그가 죽고 한참 후에야 이 책의 핵심내용을 파악했다. 그런 금단의 내용을 갈릴레오는 지지하였고 또 그만의 방식으로 이러한 혁명을 이어받았다. 그는 문학적인 방식을 채택하여 그의 저서들을 집필하였는데 두 명의 인물들이 대화를 하는 형식으로 그의 사상을 풀어나갔다. 이러한 방식은 그의 생각들을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상되는 반박들을 미리 상대할 수 있었으며 또한 그에게 쏟아지는 직접적인 비난들을 피해갈 수 있는 영리한 장치들이었다. 저자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이지만 그러한 생각을 말하는 것은 가상의 인물이다. 라는 전제하에 말이다. 그는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이러한 방식을 즐기기도 했지만 주류인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에 대항하기 위해서 꺼내든 비주류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다. 그의 저서 " 두 개의 우주체계에 관한 대화"는 지동설을 주장하는 한 사람과 천동설을 주장하는 한 사람의 대화를 서술하면서 지동설을 주장하는 사람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써 지동설에 손을 들어준다. 결국 이런 그의 혁명은 마침내 로마 교황청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게 되어 그의 책을 금서로 만들게 되고 그에게 주장을 철회하도록 선택을 강요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한다. 하지만 종교재판에 끌려가는 순간까지 갈릴레오는 과학은 진리이고 진리는 종교와 대립하지 않고 종교 지도자들을 이해시킬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는 순수한 과학자였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라는, 갈릴레오가 종교 재판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나오면서 중얼거렸다는 이 유명한 독백은, 사실 그가 실제로 그렇게 말했다는 증거가 없다. 하지만 그만큼 그의 인생과 과학관을 말해주기에 적절한 말은 없을 것이다. 그는 비겁한 것이었을까? 그의 주장을 철회하지 말았어야 했을까? 하지만 그의 시대에서 그의 이런 자세는 가장 현명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비이성과 종교의 공포 아래에서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고 그 자신조차도 자신이 굽히지 않았을 경우에 생길 참극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혼자가 아니었고 그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있었고, 또한 가족들이 있었다. 그의 오기와 용기라고 부를 수 있는 것 때문에 그가 끝까지 투쟁을 계속했다면 그의 가족들과 지지하는 세력들조차도 악마의 무리로 몰려 같이 처형될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어찌됐더나 그는 비록 재판정에서 자신의 주장을 굽히고는 말았지만 이미 그의 진리를 향한 외로운 싸움은 유럽 전역에 퍼졌고 이미 퍼져버린 진실은 주워담을 수가 없었다. 종교와 과학의 간극은 벌어질 대로 벌어져서 과학을 수정하려는 종교의 노력은 결국엔 패배하고 말았고 수많은 자연 철학의 도전에 자신의 교리를 양보할 수 밖에 없었다. 마침내 로마 교황청은 1992년 10월 31일 그들의 과오를 인정하고 갈릴레오가 옳았음을 그의 완전 복권을 선언하였다. 오랜 과학과 종교의 싸움 끝에 얻은 값진 승리였다. 사실 승리라는 표현보다는 그저 사람들이 진실을 받아들였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지만 말이다. 흥미롭게도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교회의 적이 된 것에 대하여 이 책은 새로운 가설을 제안한다. 교황청 기록물 보관서에서 발견된 갈릴레오 관련 문서, 이른바 G3문서를 들며 갈릴레오가 교황의 미움을 사게 된 것은 그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해서는 표면적인 이유이고 사실은 그의 저작인 '시금사'에서 원자 이론을 거론한 것이 카톨릭 교회의 "성체성사" 의식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동시대에 살았던 케플러도 코페르니쿠스 설을 지지했고 지동설 자체가 갈릴레오 시대에 하나의 흥미로운 가설로 여겨졌을 뿐 이단으로 규정지어지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그 가설은 훨씬 설득력이 있어보인다. 말하자면, 안 그래도 로마 교회의 영향력에 벗어나려는 신교의 세력이 커져가고 인본주의적인 사상이 교회와 맞서기 시작하는 시대에 갈릴레오의 주장은 카톨릭 교회가 있어야 하는 당위성 자체를 흔들어버릴 수 있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지구가 움직이는지 태양이 움직이는지에는 관심이 없던 종교 지도자들이 정말로 관심을 가지고 우려하고 있던 것이다. 과학계에서 갈릴레오를 종교에 희생된 과학계의 순교자라고 하는데에는 여기에 이유가 있다. 순수한 갈릴레오의 신앙과도 같은 신념이, 종교적이라고도 하기 힘든 정치적인 교황권의 권위 아래에 짓밟혀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종교 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었다.그가 교수로 있었던 피도바 대학은 자유로운 사상의 피난처였으며 교황권의 간섭에 대응할 수 있는 카톨릭 국가 내 몇 안 되는 자유로운 지역이었다. 만약 그가 학문의 자유를 중요시하는 피도바 대학을 떠나지 않고 머물렀다면 종교적이고 보수적인 로마 카톨릭 교회와 대립할 일 없이 좀 더 많은 업적을 이루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가 그런 안전한 지역을 떠나 더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피렌체 가문에 몸을 의탁하며 스스로의 자유를 내놓았던 이유는 강의를 하는데 시간을 쏟지 않고 그만의 연구에 매진할 기회를 얻고 싶었고 좀 더 높은 지위로 자신의 학문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개인적인 욕심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도 그가 순수한 종교와 과학의 공존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는 진리란 어디에 내놓아도 모든 사람들이 납득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과학과 종교는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완하며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같은 시대 교회에게 박해당해 화형당한 브루노의 선례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들에게 가장 위험하고 억압적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로 제발로 들어갔던 것이다.그래서 종교인들에게 과학이란 종교에 반기를 들고 위협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보완하고 더 신의 섭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 싶었다. 앞에서 갈릴레오가 능수 능란하게 세상 일을 처리하고 결코 수완이 없거나 현실 감각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해왔다. 그런 갈릴레오가 자신을 노리는 적의 소굴로 제발로 걸어들어간 부분은 그가 과학에 있어서만큼은 세상 누구만큼이나 모략이 없고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는 순수한 신앙인이었다. 종교에 있어서도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고 교회의 권위를 믿고 의지했다. 그는 자신을 인정해주리라 했던 종교계에서는 그를 인정하지 못하고 적그리스도로 몰아갔지만 과학계에서는 그는 영원한 순례자가 되었다.
그가 과학계의 순교자로서 존경받고 기억되는 이유는 그가 망원경을 발명하고, 지동설을 주장하고, 피사의 사탑에서 등가속낙하 운동 실험을 하고, 달의 표면을 관찰하고 금성의 위성을 발견하고, 원자 이론을 지지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망원경을 처음으로 발명한 사람이 아니고 단지 경쟁자들의 망원경보다 훨씬 개량된 것을 만들었다는 것이고(어떻게 보면 아이디어를 훔쳤다고 표현해도 별 어폐가 없을 정도로), 지동설은 코페르니쿠스가 만들었으며, 피사의 사탑에서의 실험 역시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도 없고 단지 전기 작가의 입에서 이야기를 더 흥미진진하게 만들기 위하여 꾸며진 것이라는 것이 대부분 학자들이 인정하는 부분이며 달의 표면 역시 갈릴레오보다 앞서 영국인 과학자 토마스 해리엇이 지도를 만들었다. 원자 이론 역시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가 주장한 것으로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심지어 그가 조류 간만의 차가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도 틀렸고, 케플러가 행성의 운동이 타원형이라고 한 것도 원은 가장 완벽한 것이기 때문에 별들이 타원형으로 돌리가 없다고 주장한 것도 틀린 것으로 판명 됐고, 그가 종교 재판에서 굴복하고 나오며 중얼거렸다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 라는 그의 가장 유명한 말조차도 꾸며진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갈릴레오의 업적과 일화들이 부풀려지고 사실이 아닌 것이 있다고 해도 그가 위대한 과학자라는 사실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과장된 일화들이 그에게 어울릴 정도로 충분히 위대하다.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근대 과학의 기본적인 사고의 개념을 세웠다는 것이다. 바로 실험과 결과를 중시하는 객관적인 분석을 이용한 과학적인 접근법이다. 그당시까지 실험보다는 논리를 이용한 추론으로 세워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분명 매력적이고 완벽해보였다. 그것이 신학과 결합하여 서양의 철학이라는 단단하고 거대한 틀을 만들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체계는 한계가 있어 더 정밀한 과학의 발전에 오히려 저해가 되었다. 그것의 권위는 너무도 거대해서 그 누구도 거기에 도전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수학적인 개량과 반복적인 실험을 바탕으로한 증명을 중요시하며 그런 주류에 도전했다. 갈릴레오 이후부터 과학은 그때부터 철학의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의 사고 방식은 후대의 과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쳐서 뉴턴 등의 근대 물리학과 화학이라는 학문이 생겨날 수 있는 풍토를 만들어 내었다.
지금까지 이 책은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삶을 다루면서 그가 진짜 위대한 과학자인 이유와 업적을 설명하며 그가 종교재판을 받게 된 진짜 이유의 한 가설을 조심스럽게 제시한다. 진짜 이유는 '그의 원자 이론이 카톨릭의 성체성사 교리를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가설이 더 이슈가 되기 전에 덜 위협적인 지동설로 종교재판을 걸어서 침묵시켰다고 주장한다. 설득력이 있다. 지금까지도 종교와 과학의 갈등이 완전히 종식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다. 진화론은 종교의 창조론을 심각하게 위협하였고, 스티븐 호킹 박사의 우주론은 창조주마저도 부정하려고 덤벼들고, 리처드 도킨스의 유전자학과 무신론은 종교 자체를 흔들어 파괴하려는 것처럼 보인다.과학의 패러다임은 종교의 근간마저도 흔들고 도전하고 있기에 종교는 이제 과학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 앞에서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하고 있다. 신자는 해가 갈 수록 줄어들고 권력 또한 약해져서 세상에게 자신들의 그간의 과오를 인정하고 종교의 세계관은 과학의 세계관과 달라서 정신적인 가치를 중요시 하는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떠나지 말라고 매달리는 상황으로 역전되고 말았다.정신적인 가치도 중요하지만 진실을 알아가려는 노력, 자신이 믿고 아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려 그런 종교와도 같은 신념들이 세상을 조금씩 변화시켜왔고 그 선봉에는 항상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있었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과학의 발견이 어떤 것이 더 위대하고 어떤 것이 덜 위대하다는 기준은 없다. 그의 과학적인 발견 뿐 아니라 그가 과학하는 방법, 수학으로 자연계를 개량하여 수식을 도입할 수 있다는 그의 사고관이 근대의 과학을 시작하게 했다는 것에 그 위대함이 있는 것이다.그는 권력이나 편견 따위로는 변하지 않을 어떤 진리가 있음을 굳게 믿었다. 그러한 진리와 그렇게 용기를 내어 세상에 말할 과학자들이 있기에 인간의 진보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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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pg 가까이 되는 책인데 한순간에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피사의 사탑 실험과 "그래도 지구는 돈다" 이 두 가지 일화로 알려져 있는 갈릴레오의 인간적인 모습을 알 수 있다. 절대적인 자기 확신과 학문에서 있어서는 굽힐 줄 모르는 갈릴레오의 꼬장함, 그리고 학문에 대한 열정과 사랑으로 갈릴레오는 마음껏 연구를 하기 위해 상당히 밑바닥부터 노력한다. 갈릴레오가 적당히 세속적이고 기민하며 정치적이었다는 것도 흥미롭다. 끝까지 갈릴레오를 움직이게 한 원동력, 그래서 그가 불멸의 삶을 얻게 한 그 것은 사물의 진리를 밝혀내려는 그의 호기심, 열정, 자기 확신, 그리고 진리에 대한 끝없는 사랑이었다. 갈릴레오는 아직 과학이라는 개념이 정립되기도 전 자연철학의 선각자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 식의 삼단논법식 추론이 아닌 실제 실험을 통한 일반법칙을 추론해내는 방법론을 과학계에 확립시켰다. 갈릴레오가 살아가는 것을 보고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갈릴레오가 아무리 천재였다고 하지만 그 역시 처음부터 환영받은 것은 아니며 끊임없이 준비하고, 기회를 엿보며, 주어진 사회환경 속에서 자신의 학문적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세상과 적당히 타협했다. 누구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닐텐데 나는 차근차근 경력을 쌓으며 노력해나가기 보다는 처음부터 내가 원하는 자리를 별 노력없이 얻고자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끝까지 나를 살아가게 할 원동력이 무엇일까, 그런 고민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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