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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프랑클은 나치에 의해 강제수용소에 감금되었던 정신과 의사이다. 강제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실존주의적 경향을 가진 치료법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삶의 물음에 '예'라고 대답하라>는 그가 1946년 3월과 4월에 오타크링 시민대학에서 했던 강의를 묶어 만든 책이다. 강의는 총 3강으로 구성되어있다.
1강의 제목은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하여> 이다. 1강의 주제는 '삶은 삶으로서 가치가 있다'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나치시대를 온 몸으로 겪은 저자는 제일 먼저 무책임한 낙관주의로부터 비롯되었던 나치시대의 비극을 예로 들면서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태도로 시대를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비관주의에 의해서만 행동할 수 있습니다. 오로지 회의적인 태도로만 무엇인가에 손을 뻗어볼 수 있습니다. 반면 예전의 낙관주의는 우리를 잠재우기만 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낙관주의는 비록 장밋빛으로 보일지라도 숙명론만을 불러올 것입니다. 장밋빛 숙명론보다는 냉정한 인식 아래 행동에 나서는 쪽이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p. 20)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며 저자가 처음에 등장시킨 사례는 '자살'이다. 자살의 원인을 네 가지로 나누면서 각각에 대한 분석과 빅토르 프랑클만의 규정이 재미있다. 내가 주목했던 대목은 심리적 고통떄문에 자살하는 경우에 대한 저자의 논평이다. 단지 괴롭다는 것, 고통을 느낀다는 것만으로는 인생 여정을 멈출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문제는 계속 걸어가는 것이 그야말로 의미 있는 일인가, 고단함을 극복하는 것이 그야말로 보람 있는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르러 정말로 필요한 것이 바로 삶의 의미를 묻는 물음에 답하는 것입니다. 삶은 괴롭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의미에 대한 물음에 답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삶의 괴로움은 그 자체로 아직 계속 살아가는 것을 반대할 이유가 되진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는 이유는 단지 삶의 무조건적인 의미를 아는 데 있습니다. (p. 30)
고도의 효율성을 보여주는 사람들만이 칭송받는 세상에서 이런 관점은 참 소중하다. 로봇과 인공지능으로 인해 인간은 점차 노동으로부터 배제될텐데 그럴수록 이런 관점이 더욱 요구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한다. 활동 영역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영역이 채워져 있는지, 그의 삶이 '충족되어' 있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범위에서 개별적인 인간 각자는 대체될 수도 없고 누가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p. 39)
개인적으로 나는 인간인 것과 인간이 아닌 것의 결정적인 차이는 도덕이라고 생각한다. 도덕에 대한 목적론과 의무론의 치열한 논쟁은 둘째 치고, 나는 도덕을 인지하고 실체적으로 인정하는 존재여야 진정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것을 삶의 의미와 직접적으로 연결시킨다. "우선 좀 먹고살자, 도덕은 그 다음이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아무것도 숨기려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한편으로 도덕을 외면한 채 먹고산다는 게 얼마나 의미없는 것인지를, 그리고 오직 먹고사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이 무의미함을 깨달을 경우 얼마나 파멸적인 결과가 올 것인지를 압니다. 특히나 중요한 것은 단 하나의 '도덕', 삶의 무조건적인 의미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라 할 단 하나의 '도덕' 덕분에 어찌 됐든 인내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안다는 것입니다. 굶주림이 단 하나의 의미를 지니기만 해도 인간은 떳떳하게 굶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p. 41)
성취로 존재감을 확인하는 방법은 쉬운데 고통에 직면했을 때 인고로서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은 어려운 일이다. 인간으로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성장하기만 한다'는 격려가 정말 좋다. 우리들 주위에서 일어나는 운명이란 것은 어떤 경우든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또 저렇게 말입니다. '성취를 통해서든 아니면 인고를 통해서든 어떠한 처지라도 고귀해지지 않을 수 없다'고 괴테는 말합니다. 가능하다면 운명을 바꾸거나, 부득이하다면 기꺼이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둘 중 어느 경우라도 운명을 겪으면서, 불행을 겪으면서 우리는 내적으로는 단지 성장하기만 합니다. (p. 46)
무책임한 낙관론으로 사람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다. 삶은 가능성이며 우리는 그 의미를 현실화하려는 결단을 해야한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이성적이고 분명해야한다고 말한다. 삶은 가능성에 따라 언제나 의미를 지닙니다. 때문에 삶이 순간순간 이 지속적으로 변해가는 가능한 의미로써 채워지고 있는지의 여부는 오직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그렇기에 삶은 전적으로 우리의 책임 아래 놓여 있으며, 그때마다의 의미를 현실화하려는 우리의 결단 앞에 서 있습니다. (p. 50)
산다는 것 자체는 질문받는 것이며 대답하는 것이다. 그때마다의 자기 고유의 현존을 책임지고 답변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삶은 이제 주어진 것(Gegebenheit)이 아니라 부과된 것(Aufegebenheit)으로 나타난다, 삶은 매순간의 과제이다, 라고 말입니다. (p. 61~62)
2강은 <삶의 물음에 책임있는 답변을 위하여> 이다. 1강에서는 삶은 질문이며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질문에 어떻게 답변할 수 있을까?
빅토르 프랑클에 따르면 삶의 의미는 세 가지 주요한 방향에서 충족할 수 있다. 첫째, 어떤 무엇인가를 행함으로써, 행위함으로써, 즉 어떤 것을 창조함으로써 둘째, 인간은 어떤 것을 체험함으로써, 자연과 예술과 인간을 사랑함으로써 셋째, 인간은 첫 번째나 두 번째 방향에서의 가능성이 주어지지 않은 곳에서 일지라도 여전히 자신의 삶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으며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세상의 그 어떤 외적인 실패와 좌초도 질병과 죽음에서 얻어질 수 있는 의미를 훼손할 수 없습니다. (p. 85)
공동체를 위한 유용성이란 인간의 본질을 합당하게 측정할 수 있는 유일한 척도가 아닙니다. (p. 100)
인간 각자의 유일무이함과 일회성이 그의 인격의 가치를 형성한다. 이러한 가치는 공동체와 관련된 것이어야 하며 '공동체를 위한' 유일무이함이 가치 있는 의미를 지닌다고도 했습니다. 그때 우리 모두는 주로 공동체를 위한 실행을 생각했던 셈이지요. 하지만 이제 증명되는 것은 두 번째 길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길 위에서 인간은 그때마다 유일하고 단 한번뿐인 존재로서 자신의 이 유일무이함 속에서 바람직한 인간이 됩니다. 그래서 이 길 위에서 그의 인격의 가치가 실현되며, 그러한 그의 인격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의미를 충조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바로 사랑의 길입니다. 사랑받는 길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군요. … (중략) … 사랑은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사랑하고픈 사람에게 당신은 비교할 수도 바꿀 수도 없는 사람이라고 마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사랑하고픈 사람을 알아보게끔 해줍니다. 바로 그의 유일무이함과 일회성 속에서 말이지요. (p. 101~103)
3강은 <시련의 실험 : 강제 수용소 심리학에 대하여> 이다. 빅토르 프랑클은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 갇혔던 경험이 있다. 강제 수용소에 갇혔던 사람들과 자신처럼 탈출할 수 있었던 사람들에 관한 심리상태에 대해 이야기 한다. 당시의 정신분석학자들은 강제 수용소에서 고초를 겪은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퇴행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나보다. 빅토르 프랑클은 그곳에서도 삶의 의미를 만들고 꿋꿋하게 생존한 사람들의 예를 들며 오히려 그 안에서도 인간은 성장할 수 있다며 기존의 연구에 반기를 든다.
정신분석적 성향이 강한 동료들의 말은 근본적으로 틀린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강제수용소 체험이 사람들을 운명처럼 필연적으로 퇴행으로 몰고 간다는, 그래서 내적으로 퇴보하도록 강요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중략) … 사례의 당사자들은 조금도 퇴행하거나 퇴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내적으로 진보했고 자기 자신을 넘어서 내적으로 성장했습니다. 인간의 진정한 위대함에 이르기까지 성장했지요. 바로 강제수용소에서, 강제수용소의 체험을 통해서 말입니다. (p. 128~129)
여기서 살아남는 것은 하나의 당위이다, 이것은 의미가 있다. (p. 136)
강제 수용소에서의 경험이 상당히 끔찍하고 비관적이었을텐데 그 경험을 '하중'으로 표현했다. 사람마다 그 한계는 다르지만 좌절과 고통의 경험들이 사람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경우도 많다. 인간의 영혼은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어떠한 한계 내에서는 '하중'을 겪음으로써 오히려 더 강건해지는 것 같습니다. (p. 139)
빅토르 프랑클은 나치 시대에 대해 독일민족 전체에 대한 비난은 이성적이지 못하다고 말한다. 또한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겪는 죄책감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빅토르 프랑클의 좋은 점은 사람을 판결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한 사람이라도 구하려고 하는 점이다. 우리는 '집단적인 죄책'과 '집단적인 보증책임'을 구별해야 한다. (p. 145) 개별적인 인간을 그의 개인적인 죄책에 따라 평가하거나 판결하지 않고 전체 국민에게 집단적인 일괄 심판을 내리는 세계관 위에 서 있다는 것(p. 148) … (생략)
강의를 마무리하면서 빅토르 프랑클은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 매 순간을 가능성으로 여기며 새롭게 환기할 수 있는 자세, 그리고 일상 속에서 행동할 것을 촉구한다. 여전히 남는 것은 단 한가지 뿐입니다. 즉 행동하는 것, 더구나 일상 속에서 행동하는 것, 이것뿐입니다. 제가 살아가면서 단 한 번이라도 예전에 강의했던 그대로 스스로 모범을 보이라고 강요받은 것이 있다면, … (중략) … 즉 일상 속에서 행동하라는 것이었습니다. (p. 158~159)
우리가 시간 속에서 창조하고 체험하며 고뇌하는 것은 동시에 모든 영원을 위해 창조하고 체험하며 고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어난 일(das Geschehen)에 대해 책임을 지는 만큼, 그래서 '역사(Geschichte)'가 있는 만큼 우리의 책임은 유례없이 과중한 것입니다. (p. 159~160)
가장 하찮은 것이든 가장 중대한 것이든 각각의 결단은 '모든 영원을 위한' 결단임을, 그래서 나는 매순간 하나의 가능성을, 그 한 순간의 가능성을 실현하든 상실하든 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은 두렵습니다. 개별적인 순간 하나하나는 실로 수천 가지의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p. 161)
오늘날 비교적 더 좋은,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나은 상황 속에서 그 모든 것을 실행할 수 없다고 해야할까요? 그러므로 삶에 대해 "예"라고 말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라도 의미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사정이 있다 해도 가능한 것입니다. 삶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니까요. 제가 강연의 최종적인 의미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과 죽음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강의), 육체적이거나 심리적인 질병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강의), 또는 강제수용소의 운명 속에서도 (세 번째 강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예"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p. 162~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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