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녀간의 일시적인 불장난, 즉 가벼운 연애도 근 10여 년에 걸친 심도 있는 학술적 탐구의 주제가 될 수 있을까? 대답은 ‘그렇다’이다. 이 책이 바로 그 대답이다. 이 책은 연애에 초점을 맞춰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의 남녀관계와 성 풍속에 일어난 혁신적 변화에 연애가 어떤 순기능을 했는지를 탐구한다. 1970년생의 여류 역사학자 파비엔 카스타-로자는 ‘플래르트’(가벼운 연애 유희를 가리키는 프랑스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후반에 이르는 격변의 한 세기를 이 책에서 세세히 되짚어 본다. 책의 서문 제목으로 쓰인 발자크의 고언 “당신의 결혼을 강간으로 시작하지 말라”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신혼 초야가 거의 합법적 강간에 다름 아니던 시대에서부터 소위 ‘여성 상위의 시대’로 일컬어지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남녀관계와 성 풍속에 일어난 혁신적 변화에 플래르트가 어떤 순기능을 했는지를 탐구 과제로 삼았다. 모든 ‘혁신’들이 그렇듯, 이 ‘연애’의 영역에도 선구자와 개척자들이 있고 서슬 퍼런 윤리의 칼날에 희생된 순교자들이 있다. 당연히 이 책에는 시대를 앞서간 그런 여성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마리 바스커체프라든가 방종의 극단까지 나아간 아나이스 닌 같은 여성들이 그렇다.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은 저자가 큰 스캔들을 일으킨 그런 여성들의 소란스런 이야기만 흥미 위주로 좇지 않고, 앙드레 말로의 부인 클라라라든가 사르트르와의 계약 결혼으로 유명한 시몬느드 보부아르 같은 여성들의 순진한 혹은 평범한 플래르트 경험 역시 논하며 탐구의 균형을 취한 것이라 하겠다.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이나 윌리엄 스타이런의 「소피의 선택」 같은 세계 문학사의 몇몇 걸작들을 플래르트의 관점에서 분석해낸 것도 이 책의 성과라 할 만하다. 그리고 플래르트라는 이 ‘가벼운’ 주제를 시종 사회?경제적 여건 변화들(이를테면 전쟁이라든가 피임약의 발명 등)과 밀접하게 연계시키고자 한 저자의 학자다운 집요함에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코르셋을 착용하던 시대부터 미니스커트를 걸치게 된 시대까지, 풍기 문란을 우려하는 보수적 지배층과 해방을 꿈꾸는 신세대간의 끊임없는 대립과 갈등을 축으로 하여 연애, 그 유혹과 욕망의 한 세기를 서술해나가는 이 탐구서는 학술적 가치를 떠나서도 여느 소설 못지않게 재미나게 읽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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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그 유혹과 욕망의 사회사 / 바비엔 카스타-로자/ 박규현 / 수수꽃다리 “플래르트”라는 생소한 단어에 대한 역사적인 기원과 발자취를 여러 자료들과 함께 더듬어 보면서 우리를 그 세계로 인도해 주고 있다. 플래르트. flirt [남성명사] 1. 가벼운 열정, 일시적인 사랑=amourette [여성명사] 일시적 사랑. 2. [비유] (특히 적대적인 관계에 놓인 두 정당간의) 일시적인 화해[제휴] [형용사] [옛] 남의 환심을 사기를 좋아하는. 이 단어는 세계 1차대전 전에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남녀 사이의 은근한 끌림과, 스침, 그리고 주고받는 야릇한 미소 등을 총칭한다 할 수 있겠다. 저자는, ‘플래르트’라는 단어는 옛 프랑스어, ‘달콤한 사랑의 말을 속삭이다(fleurette)'에서 유래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것을 우리 정서에 맞는 이미지로 표현한다면 어떤 것이 좋을까?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나 “춘향전” 속의 남녀 관계가 플래르트에 해당되지 않을까? 종교적, 사회적 제약으로 인하여 직접적인 접촉 대신에 은밀하게 던지는 눈빛이나 살짝 스치는 옷깃 등으로 남녀간의 마음과 관심을 표시할 수 밖에 없었던 18세기에도 규제 틀을 벗어나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여인들이 더러 있었다는 것을 여러 소설과 일기 속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순결한 부인과 아가씨들의 욕망은 마지막 한계, (......) “저편”에 이르지 않고, 성관계의 마지막 직전까지 다다가는 안타까운 절제의 미학으로 플래르트를 완성할 수 밖에 없었다. 이 플래르트가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온 계기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생활양식이 전 유럽으로 퍼지면서부터였다. 성도덕은 너그러워져서 사랑하는 이들 간의 과감한 행동을 용납했으며 젊은 여성들에 대한 순결의 요구나 기혼녀들에 대한 정조의 요구는 가족이나 세습관계에서 더 이상 문제시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동정은 일찍 떼어 버려야 할 무거운 짐으로 여기기까지 하였고 여자들의 순결 역시도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성이 더 이상 아니었다. 그런 사회 현상을 재촉했던 것은 임신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피임약의 발명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당시의 여자들이 곧장 “뜨거운 관계” 속으로 돌입하길 바라는 것은 아니라, 그녀들은 동등한 존재로 대우받기를 원하는 것이며, 그들과 남성들의 차이점을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그 때부터는 플래르트라는 단어 대신에 “데이트”나 “사랑” 등의 미국식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되기에 이르렀다. 남녀간의 사랑이 자유롭고 개방적으로 범람하는 오늘날, 플래르트 의미 역시 변질되고 소멸되어 가고 있다. 플래르트라는 말이 이제는 어느 정도 케케묵은 표현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 그 “모호한 유희”, 불확실한 미완성의 유희가 아니라, “하룻밤의 사랑, 진지하지 않은 일시적 관계”를 의미하게 되었다는 말에서 그 화려했던 플래르트의 쓸쓸한 현실을 확인한다. 오늘에 와서 구시대적인 유물과도 같은 플래르트를 말하는 것은, 잃어버린 순수하고 아름다움에 대한 안타까운 향수일 것이다. 과거의 기억은 늘 실제보다 크게 포장되어 있기 마련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