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각을 지배하는 눈 : ‘나는 서양의, 남성의 눈을 가졌다’
나는 니콜라스 미르조에프의 연구를 이 한마디로 압축하고 싶다. [이미지의 왜곡성에 대한 사유들]
비주얼 컬처 읽.기.의 모든 것 혹은 영상문화연구의 모든 것이었더라면 더 책이 내용을 반영하는 제목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혹은 그의 부제 ‘생각을 지배하는 눈의 진실과 환상’이야말로 니콜라스 미르조에프의 궁극적인 주장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제목의 아쉬움을 덮고자 여러 다른 제목들을 생각해본다.
-시각성연구 -레비스트로스에서 바르트까지 -영상문화연구학 -시각과 권력 -권력의 비주얼컬처
이 책은 표지가 매우 인상적이다. Sandy Skoglund의 1981년 작 <Revenge of the Goldfish>는 연극무대처럼 꾸며진 초록빛 침실에 금붕어가 악몽처럼 난무하여 인간을 위협하는 듯한 사진이다. 얼핏 보면 푸른색과 오렌지색의 금붕어 모빌들의 아름다움 색의 조화에 현혹되지만 보면 볼수록 공포감을 주는 사진이다. 니콜라스 미르조에프의 글을 읽고 나니 이 책의 표지에 하필 왜 Revenge of the Goldfish 가 실렸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처음엔 그림이지 않을까 했는데 사진이라는 점에서 일단 놀라고, 보면 볼수록 악몽으로 해석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놀랐다. 이 사진이미지는 일종의 꿈을 그린 상상화인 것처럼 가장하고 있다가 사진이라는 사실에 실재와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두려움을 주게 된다. 이 사진은 오염된 물을 마신 금붕어가 환경파괴의 주범인 인간에게 복수하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고 한다. 나중에는 사람보다 커다랗게 변해버린 금붕어 떼가 영화 <죠스>의 상어만큼 무서워보였다. 그림은 사진보다 더 진실일 것이라는 사고가 우리에게는 내재되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실사로 보여지는 것들은 애니메이션의 과장되거나 단순화된 이미지보다 강력한 힘이 있는 듯하다. 비록 연출되었다 하더라도 사진으로 찍힌 장면에 대한 믿음 같은 것이 우리에게는 분명 있다. 아마도 이 사진을 접했을 때의 두려움 또한 거기에 기반했으리라. 꾸며진 무대만을 직접 보았다면 이러한 두려움에 직면하지는 않았을텐데 거기에서 사진이라는 하나의 단계만을 거쳤는데도 작품에 대한 느낌은 보다 다양해지고 개인적이 된다. 니콜라스 또한 그림에서 사진으로 영상문화가 넘어오면서 그 진실성은 더해졌다고 하는데 그가 인터넷 등의 영상문화를 설명하면서 말한대로 우리는 그 사진 또한 믿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사진은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고 프레임으로 들여다보는 세계는 매우 작고 주관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스코글런드의 이 사진이 <비주얼 컬처의 모든 것 : 생각을 지배하는 눈의 진실과 환상> 표지에 등장한 것은 아마도 영상문화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하고 우리가 보는 것이 가지는 내재된 의미들에 대한 사유를 촉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가 말하는 시각성이란 권력의 문제이며 그 권력의 주체란 바로 서양이며 남성이다. 따라서 식민주의적 시선과 가부장적 시선에 의한 이미지의 재생산이 우리에게 얼마나 왜곡된 정보를 주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파쇼의 미디어 이용, 식민지시대의 이미지 재생산과 왜곡의 사례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우리가 본 것이 아니었음을 다시금 자각하게 만든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으로 하여금 재생산된 이미지를 소비함으로써 또 다른 왜곡된 재생산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이러한 왜곡의 가능성을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영상문화 읽기에서 진정한 주체의 위치에 가까워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는 일찍이 시각적 이미지를 이용한 권력의 사례를 들면서 시각성과 권력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원제였다는 ‘입문’의 수준이라고 보기에는 그는 시각성연구담론을 총괄정리하는 방대하고 디테일한 작업을 해내고 있다. 문화연구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시각성이라는 하나의 방점을 찍고 문화연구와 영상문화담론들을 그 방점을 중심으로 풀어내는 것은 라캉의 정신분석까지 보고 나면 어쩌면 필연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99년의 책이다보니 2000년대에 이루어진 하이브리드와 해체적 담론이 조금 부족하다는 느낌은 있지만 당시까지의 최근의 시각성담론까지를 거의 모두 다루고 있으면서 매우 잘 정리된 영상문화연구서라고 말하고 싶다. 또 젠더적 시각성에 대해 다뤄진 부분에 있어서는 정신분석학적 영상문화해석에 어려움을 느끼는 독자에게도 명쾌한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90년대를 풍미했던 시각성에 관한 담론을 한권의 책으로 정리해 놓은 것은 비주얼리티를 연구하거나 관심있는 독자들에게 매우 반가운 일이나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번역된 것이 유감이다. 또 달리 생각하면 지.금.이어서 더 많은 사유를 자극하기도 한다. 911테러의 충격적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지금, 노무현전대통령의 죽음으로 그를 미디어이미지로밖에 추억할 수 없는 지금의 시점에서 이 책은 여러 생각을 하게 했다.
먼저 911테러와 여러 납치 및 테러적 살해사건들을 뉴스를 통해 접하면서 시간이 갈수록 그것들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되었다. 이미지를 대부분 기계적 매체를 통해 접하고 있는 나는 모든 뉴스들과 리얼리티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된 것이다. 눈으로 보았지만 내가 보지 못한 화면 밖의, 사진 밖의 리얼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우리가 미디어 이미지와 정보를 소비하면서 비판적으로 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실과 이미지는 분명 100% 괴리하는 것만은 아닐것이다. 그러나 이미 숱한 영화와 현실에서의 폭력적이미지의 타성에 젖어 911의 비행기가 빌딩으로 돌파하는 장면은 내겐 연출된 이미지와 구분이 어려워지고 이러한 문제는 911의 이미지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연출된 미디어의 이미지마저도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만큼의 문제성을 가진다. 또한 나는 911의 반복되는 충돌이미지를 하루에 수백번씩 보면서 그 폭력성에 질려버렸다. 그런데 그 폭력성이 미디어가 반복하는 이미지인지 비행기로 빌딩에 돌진해버린 카미가제식 테러의 폭력성인지 모호해짐을 느꼈다. 생각해볼 일이다. 우리는 폭력적 이미지에 얼마나 중독되어 있는지에 대하여 말이다. 중독은 본질적 문제점을 간과하게 만든다. 그것이 독인지 폭력인지 알기에는 이미 우리는 너무도 폭력성 혹은 폭력적인 이미지를 남발하는 미디어에 중독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니콜라스 미르조에프가 정리한 것과 같이 시각적 이미지가 권력을 둘러싼 담론이라면 나는 다시금 노무현 전대통령을 추억하게 된다. 카메라를 통해 보는 그의 이미지는 자신의 이미지를 권위와 결합시키려는 의도가 보이지 않는 이미지들이었다. 그는 카메라를 자신의 권력을 위해 이용하지 않았고 자신의 이미지를 거짓으로 만들기 위해 이용하지 않았다. 보여주고 싶은 국가의 최고 권위자의 모습만을 보여주려 하지 않았고 기꺼이 신발을 벗었고 카메라 앞에서 넘어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시각성의 권력에 대해 오히려 깊게 생각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오히려 더욱 미디어에 자신을 감추지도, 포장하지도 않았던 것이리라. 그가 주장했던 화합은 탈권위에서 탄생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나의 통치자를 중심으로 한 추종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다른 것을 보둠어 주는 것이리라. 가능하지 않은 일로 느껴지는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윗사람들이란 우리에게 어르신과 선생님들이 아니라 물질적 부를 더 많이 쌓았거나 정치의 수직체계의 상층부를 가리키는 언어이다. 물질과 정치권력의 정도가 인간적 대우와 존경어린 대접을 받는다고 인정하는 우리의 언어적 습관은 이러한 폐해를 악순환하는 재생산 미디어가 아닐까.
|
|
우리는 지금 무엇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있는가? 그 매개 창들이 보여주는 것은 과연 진실인가? 그 시각화 되어 보여지는 것들 - 그림, 사진, 영화 , 텔레비전, 인터넷 등 - 과 대중의 인식은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여 왔나? 바로 이러한 이미지들, 영상문화란 무엇이고 그 이해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
이 저술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오늘날 영상문화가 서양에 관한 서양의 담론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의 인식을 기반으로 하여, “시간은 항상 보는 것을 둘러싼 권력의 문제”였으며, 인종화되고 계급화 된 이 유산을 피할 수 있는지 없는지, 한편으론 탈문화로서 상호 간섭하고 지속적으로 변모하는 '횡단문화(Trans Culture)'에 대한 추적이라 할 수 있다. “시각적 이미지 자체는 현실이 아니라 현실의 표상체임이 분명하다.”라고 시작되는 시각성에 대한 고찰은‘원근법’이론을 통한‘유사(類似)’의 개념적 설명과 르네상스 시대의 절대군주와 이상적 관찰자의 등가로서 해석된다. 이러한 사례로서 당시대의 회화가 이미 권력의 반영으로 왜곡된 표상이며, 공간구성의 표준화를 위한 한정된 이미지의 전달 일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미 시각성에 대한 많은 저술들에서 자주 인용되는‘제레미 벤담’의‘파놉티콘(Panopticon;원형감옥)'을 통해 시각성이 훈육체계의 수단으로 작동되었음과, 나아가 원근법을 보완한 색채(Color)의 등장은 그림의 사실성에 대한 절대적 공감을 일으켰고, 이는 19세기 서구유럽의 식민지 정책과 제국주의적 성질과 부합하여 “인종, 젠더, 식민주의 정치학 사이의 복합적 상호작용을 수반”하였음을 설명한다. 즉, 대리석의 하얀 아름다움이 제국주의적 성질의 논의에 참여하여 인간 인종 그 자체에 응용되는 것 과 같이 모든 유색인종을 지배하는 백인의 이상적 지배를 제공하는 색채로서 인종차별주의적 이슈가 되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한편, 사진이라는 새로운 미디어의 대두가 그림에 비해 외적 실재의 완벽한 반영 혹은 유사를 주장할 수 있게 해주었으니 서구 백인종의 환호는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리고 사진이 지니는 시각성에 대한 성찰로서 현재의 근접한 시간의 순간 포착성, 엿보는 자의 역할에서 목격자로의 역할 변화가 가져온 본질적 의미, 기억의 기제로서의 인식이나 죽음에 대한 방어, 기억상실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의미해석 등을 담고 있다. 그리곤 1980년대 컴퓨터 이미지 안에서 사진이 나름 죽음의 시간을 맞았음을 본다. 이제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현실과 가상의 구별을 모호하게 하고 있으며, “동시대의 문화적 실천이 행해지는 글로벌(全地球的)과 로컬(地域的)사이에 복잡한 상호작용의 영역은 현실적이면서도 가상적”이라는 것이다. 이렇듯‘1부, 시각성’에서는 그림에서 사진, 영화, 텔레비전, 컴퓨터에 이르는 시각성의 개별적 의미의 자취와 그 문화적 해석을 탐색하고 규명한다. 그리고 이 저술의 또 하나의 핵심주제인 시각의 횡단문화(橫斷文化)적 고찰이 흥미로운 설명으로 구성된다. 아프리카‘콩고’를 통한 문화의 시각적 투영이라는 낯선 예이긴 하지만, 시각의 식민주의적, 제국주의적 이용과 같은 시각의 권력화에 대한 선명한 이해를 지원한다. 서구 백인의 탐욕과 인종주의적 우월성을 고착화시키는 수단으로서 그림과 사진이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 볼 수 있다. ‘콰드론(백인과 흑인 피가 4:1로 희석된)’과 ‘옥토룬’을 사진의 앞 열에 내세워 백인의 우월성과 유색, 흑색의 열등성을 구분 짓거나, 아프리카 여성들과 관계를 맺어 태어난 아이들을 일종의 물건이나 비생산적인 것으로 치부함으로서, 서구와 백색을 경외하는 여성들의 이미지를 창출하기도 함을 목격케 한다. 이처럼 식민지 지배자의 눈, 남성 중심의 시각으로 묘사된 그림과 사진이 오늘날 우리에게 아프리카에 대해 어떠한 이미지, 인식을 고착화시켰는지 생각하면 그 시각의 권력화가 가지는 왜곡의 힘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시대정신은 본질적으로 진보적이지도 않고 반동적이지도 않으며, 단지 시간의 흐름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일 뿐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당시 콩고의 ‘민키시’조각상이 토착민들의 식민주의자들에 대한 저항물이지만 이미 서구유럽인의 모습이 내재한 문화 횡단성의 증거로 제시하기도 한다. 이 횡단문화론은 ‘다이애나’영국 황태자비의 죽음이 어떠한 이해관계도 없는 지역, 국가들을 포함한 전 지구촌에 영상미디어를 통해 전달되고 공감되는 현상에서 영상문화의 새로운 표현형식으로 의미를 부여한다. 이밖에도 영화와 텔레비전에 스며든 서구 백인의 가치와 정치적 우월함을 재생산하기 위한 활용이나, 인종적 차별의 고착화나, 여성성, 동양성에 대한 비하, 식민주의적 정치색 등이 어떻게 투영되고 있는지에 대해 영화 <인디펜던스 데이>, <스타트렉> 등의 내러티브를 통한 구체적 예시와 설명은 시각이 어떻게 시각을 도구화 하는지, 어떤 정치학적 수사가 개입하는지 이해케 한다. 시각성, 그리고 시각화 도구에 대한 권력화의 다양한 모습, 그리고 문화로서 대중에의 침투가 낳은 현상의 성찰을 통해 시각(영상)문화의 본질과 현실,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영상문화 입문서로서 그 책임을 다하는 저술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시각성에 대한 중요한 저술로서의 가치를 상실시킬 정도로 조악한 번역은 저술의 본질을 상당히 침해하는 결과를 낳는다. 일례로서 “섹슈얼리티는 외투를 벗기는 하나의 느슨한 맺음이다.”라는 문장이 있다. 도저히 우리말이 아닌듯하다. 수식어인 ‘외투를 벗기는’을 제외하고 읽어보자, 주어인 ‘섹슈얼리티’는 ‘하나의 느슨한 맺음’이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이러한 엉터리 번역이 이 저술의 상당부를 이루고 있어 제대로 된 번역이 필수적으로 수반되어 할 것이라는 제안을 남긴다. |
|
"자네들의 눈과 귀를 그대로 믿지 말게. 눈에 얼핏 보이고 귀에 언뜻 들린다고 해서 모두 사물의 본모습은 아니라네."
연암 박지원의 이 말을 근래에 가슴속에 새겨두고 있다. 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의 진위 여부에 대한 혼란이 가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진실의 은폐 혹은 조작은 갈수록 첨예화되어가고 있다. 기술의 진보로 모든 현상과 사물들은 진실에 보다 가깝게 근접해 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진실은 더 교묘하게 가려지고 있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 당시 사람들은 CNN에서 전달하는 미사일 폭격 장면을 마치 불꽃놀이를 지켜보듯이 관람했다. 진실에 대한 물음은 잊은 채 쇼만을 구경했던 것이다. 이러한 예를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우리는 바로 이 시각에도 조작된 이미지를 통해 사건의 단면만을 일방적으로 전달받는다. 작년에 논란이 되었던 촛불시위의 현장을 돌이켜보자. 주요 언론매체는 보도의 객관성을 망각하고 권력에 기댄 이미지를 일방적으로 내보냈다. 민주주의 사회의 주체인 국민의 바람직한 요구는 억지와 협박으로 돌변한다. 이것이 바로 첨단영상시대의 현주소다.
니콜라스 미르조에프는 <비주얼 컬처의 모든 것>(홍시 커뮤니케이션, 2009년)을 통해 생각을 지배하는 눈의 진실과 환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금껏 우리가 당연시 여겨왔던 이미지들은 그의 문제제기 앞에서 산산이 부서진다.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진실로 여겨왔던가. 내면에서는 ‘나는 그렇지 않다’고 항변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의식은 무의식적으로 지배당해왔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니콜라스 미르조에프가 예를 들고 있는 SF영화들을 한번 보자. 외계인을 침입자로 설정하여 흥미진진한 모험담을 들려주는 SF영화들은 한결같이 미국을 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인디펜던스 데이>의 외계인은 지구를 식민지화하여 모든 자연 자원을 소비한 후 또 다른 행성으로 이동하려는 일당이다. 모든 인간은 식민주의의 희생자가 되고, 미국의 리더 아래 연합하여 외계인 억압자에 대항한다. 미국 승리주의의 도식은 비단 SF영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테러와 전쟁을 소재로 한 많은 영화들이 비슷한 공식을 따른다. 백인을 제외한 인종들은 미개하고, 사악한 인물로 묘사된다. 이를 해결하는 영웅은 언제나 백인, 그 중에서도 미국인이다.
<비주얼 컬처의 모든 것>는 3부로 구성되어 있다. 니콜라스 미르조에프는 서장에서 영상문화에 대한 정의를 내린 후 시각성, 문화, 로컬과 글로벌이란 관점에서 영상문화를 설명한다. 시각성은 영상문화의 본질적인 요소로서 시대에 따른 변화를 겪는다. 저자가 주목하는 영상문화에서 현실을 표상하는 세 가지 구성요소는 그림, 사진, 가상현실이다. 저자는 먼저 중세와 근대를 가로지르는 원근법에 주목하는데, 원근법은 하나의 동의된 체계라기보다는 대중적 오락에서부터 기하학적 표현과 사회 조직화 수단 등을 아우르는 표상 전략의 복합체였다. 회화적 구성의 측면에서 기하학적 원근법 체계에 대한 대안적 수단으로 색채가 보완의 수단으로 중시되지만, 색채에 대한 태도들에 내재한 모순들이 완벽하게 해결될 수는 없었다. 이러한 때에 등장한 사진이라는 새로운 미디어는 외적 실재의 완벽한 반영 혹은 유사를 주장할 수 있었다. 이제 시각적인 문화를 결정하는 열쇠는 원근법이나 색채를 바탕으로 한 그림이 아닌 카메라로 넘어 갔다. 그러나 카메라 또한 컴퓨터로 이미지를 제작하고 사진을 조작할 디지털 수단이 생기게 됨으로써, 그 자리를 가상성의 공간에 내주게 된다. 가상성은 현실은 아니지만 현실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의 이미지 혹은 공간이다.
문화라는 관점으로 고찰하는 영상문화에서 저자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은 ‘횡단문화’와 ‘성’이다. 저자는 쿠바의 비평가 페르난도 오티즈의 ‘횡단문화’ 개념, “단순히 다른 문화를 받아들인다는 영어 단어 ‘문화변용’의 실제적 의미보다는, 탈문화화로 정의될 수 있는, 즉 이전 문화의 상실이나 근절을 필연적으로 포괄하는 프로세스다. 덧붙여 말해, 그것은 신문화화라고 불리는 새로운 문화 현상의 결과로 나타난 창조의 관념을 전하기도 한다.”를 차용한다. 콩고는 이러한 횡단문화의 핵심적 현장이라 할 수 있다. 유럽과 원주민의 문화가 만났을 때 콩고는 유럽의 문화에 철저히 무시당했다. 유럽인은 식민지화를 시도했고, 그들의 표상을 재시각화했다. 그러나 이러한 횡단문화화는 반대의 경우도 나타났다. 콩고의 문화가 유럽문화의 일부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영상문화에서의 ‘성’은 줄곧 남성중심의 시선으로 시각화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여성은 차별을 받아왔는데, 여성 중에서도 흑인 여성들에 대한 차별이 심했다. 남성중심의 성 문화는 동성애의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도 이어진다.
흥미를 가지고 읽기 시작한 책이었지만, 내용을 읽어갈수록 부족함을 많이 느끼기도 한 책이었다. 특히 횡단문화의 관점에서 읽는 콩고는 그 낯선 사실들에 더 어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영상문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고, 앞으로 우리들이 어떠한 기준과 관점으로 ‘보이는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지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준 책이었다. 이러한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면 왜곡으로 가득찬 현상들을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 의문을 제기하고, 그 본질을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가 바라보는 것들에 대해 좀더 객관적인 관점을 견지할 수 있을 것이다.
by 꽃다지, 2009년 6월 3일
|
|
우리는 지금 영상문화에 열광하며 책에서 제공하는 소설보다 텔레비전과 극장에서 제공하는 드라마와 영화를 쉽게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생한 현장감을 전달하는 동시에, 한층 정돈되어 받아들이기 편하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편에서는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영상문화가 우리의 창의력을 갉아먹게 된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법정 스님은 “텔레비전 프로를 머리에 가득 채우는 것을 영양가 없는 음식을 꾸역꾸역 집어넣는 것과 같다”며 영상정보를 받아들이는 행위를 강력하게 꾸짖는다. 나 역시 무분별한 영상문화에 노출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지만 지금의 시대적 조류를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늘날과 같이 피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했다면 우리들은 각종 영상정보를 취하되 그것을 나름대로 고찰해본 뒤에 판단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 책의 저자 니콜라스 미르조에프는 우리들이 영상문화를 받아들이고 판단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기준’ 을 확립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이 책을 저술했다고 머릿글에서 밝히고 있었다. 이야기를 전개하기 전에 이 책에 대해 먼저 따져보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책이란 최대한 쉽게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책이다. 비록 어려운 주제를 가지고 있더라도 독자들의 편의를 생각해서 최대한 쉽게 풀어쓴 책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리오 휴버먼의 <자본주의 역사 바로알기>와 같이 철저히 독자 위주의 서술법으로 정보를 제공하는 책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 책을 살펴보면 문단마다 수많은 학자들의 말들과 이론들이 인용된다. 그리고 그것을 적용시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이론에 관련해 주석이 달려 있는 부분도 존재하긴 하는데 전체를 이해하기 위한 주석이 아니라 구색 맞추기에 급급한 주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의무감이 없었다면 높은 진입장벽 때문에 중간에 손을 놓았겠지만 몇 번씩 책을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핵심만 찾자는 생각으로 겨우 독서를 끝마칠 수 있었다. 사실 내가 이 책에서 이해한 내용이 맞는지 조차 확신할 수조차 없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몇 가지 흥미로운 예시를 참고로 읽어 나갔다. 영상문화란 무엇인가? 영상은 시각적(이미지)으로 현실세계를 이해하는 도구로서 존재하는 것이고, 문화는 어떤 사회에 있어서의 네트워크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 그러므로 영상문화는 시각적(이미지)인 도구로서 사회의 네트워크를 이어주는 매개체라고 정의된다. 영상문화의 역사 그런데 사람들은 고대부터 시각적 정보(그림)를 매개체로 현실을 판단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그 결과 생동감 있는 사실을 얻기 위해 개발된 것이 원근법이며, 나중에 가서는 색채의 조절까지 현실세계를 나타내고자 하는 기법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원근법이라는 것이 화가의 기준에 따르는 것으로 이해되면서 사실성은 떨어지게 되었고, 후에 나타난 사진에게 그들의 역할을 물려주고 그림은 초현실주의와 같이 화가들의 개성을 표출하는 도구로 발전된다. 한동안 사진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주는 수단으로서 각광받았지만, 사진기술이 시간이 지나면서 디지털화 되고 조작 가능한 수단으로 변질되면서 가상성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영상문화의 횡단문화로의 변이 이렇게 가상성의 시대에서의 영상문화에는 그것을 드러내는 사람들의 의견이 반영되어 있다. 그것이 권력의 표출일 수도 있으며, 익명성의 유지하기 위한 단순한 거짓일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접하는 영상문화라는 것은 어떤 이의 관념이 적용되어 나타난 산물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영상문화에 내포되어 있는 관념들이 과거에는 대체적으로 백인들의 관점이었으며, 남성상의 관점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신대륙탐험의 결과로 인한 백인과 흑인의 만남에서 힘의 우위에 있었던 인종이 바로 백인종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흑인들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단순히 지능이 매우 뛰어난 원숭이 정도로 인식했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에서 많은 식민지배의 갈등이 일어났고, 그 결과 이 책에서 예로든 콩고에서는 횡단문화가 뿌리내리게 되었다. 즉, 아프리카 문화와 유럽의 문화가 서로 뒤섞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콩고의 원주민에게만 횡단문화가 나타난 것은 아니다. 그곳에 정착했던 백인들 역시 흑인들의 문화를 접하면서 그들의 문화에 동화되어 갔다. 이렇게 두 가지의 문화가 어느 것의 우열에 관계없이 하나로 엮이게 되면서 우열관계는 희석되어 갔다. 영상문화에서의 성의 관념 성의 관념에 있어서 여성성은 심한 차별을 받아왔는데, 그 중에서 흑인여성의 차별은 매우 심했다. 조금이라도 비정상적인 성기를 가지고 태어나면 거세의 대상이 되었고, 그것도 모자라 유럽인들은 비정상적인 신체적 결점을 가지고 있는 흑인 여성에게 치욕스러운 공격을 가했다. 한편 양성성은 절대로 인정되지 않았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 때문에 양성성을 가진 인간들은 성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행위의 일환으로 성기절단을 당했다. 이렇게 양성성을 탈피해 성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행위는 정상인으로 변하는 과정으로 인식되었다.
정상적인 인간, 그것은 곧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 존재로서의 변신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 정체성을 찾고자 행해졌던 과거의 행위들이 오늘날 미용의 개념으로 발전하여 성형수술에 까지 이어진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현재 일어나는 외모지상주의는 문화우월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영상매체에 적용된 시각들. 텔레비전의 드라마와 영화에 내포된 문화우월주의의 시각들. 이것은 현재의 우리들에겐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다. 영상매체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자신의 뜻을 영상이라는 매체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는데 이것은 이 책에 예시되어진 것들 말고도 우리의 영화에서도 많이 존재하고 있다. 이 책에는 SF영화를 토대로 현재의 자본주의ㆍ공산주의 체제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영화들을 많이 보여주는데 우리나라의 영화에서도 그와 유사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영화들이 많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봉준호 감독의 <괴물>은 미군부대의 화학약품으로 인해 생겨난 괴물을 통해 제국주의의 추악한 단면을 드러내어 미군부대의 철회의 목소리를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글로벌 영상문화 우리들은 전 세계가 인터넷망으로 연결된 초고속 시대에 살고 있다. 그것은 갈수록 전 세계의 문화의 횡단이 빠르게 이루어 질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 책에서는 다이애나비의 죽음을 예로 들면서 다이애나 비를 추모하는 전 세계적인 물결로 인해 발생된 글로벌 영상문화의 현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는 모든 문화들이 서로 상호보완적으로 이루어질 것이고, 이 때문에 미래에는 엘리트 문화라는 개념이 상실될 것이라고 저자는 예측한다. 글로벌 영상문화는 여러 곳에서 발생된 문화들의 혼합체로 나타나게 될 것이고, 우리들은 그러한 상황을 인지해야 눈앞에서 드러난 문화들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우리의 눈앞에 드러나게 되었는지를 간파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 책은 비록 쉽진 않았지만 개개인의 내면에 있는 관점을 전달하기 위해서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계속적으로 이미지를 이용해 왔다는 사실과 그 역사를 알려주었다.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를 간파할 수 있는 능력. 책에서는 행간을 읽는 능력이라고 칭하는 이 능력을 단숨에 얻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을 간파하기 위해서는 분야별 바탕공부의 토대가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이며, 여러 곳에서 만들어진 영상문화를 많이 접하면서 따져보는 훈련을 지속적으로 해야만 비로소 영상문화의 행간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인상깊은 구절영상문화의 역사는 시각적인 것이 계급,젠더,성적ㆍ인종적 정체성 등 사회적 상호작용과 정의의 자리에 지속적으로 도전함으로써 논쟁되고 숙고되고 변형되어왔다. 영상문화는 그림 자체가 아닌, 그림을 지향하는 혹은 존재를 시각화하는 근대적 경향에 의존한다. 시각화는 고대와 중세와 사뭇 다른 근세를 형성하는데, 근대를 거치면서 보편화되었으며, 이제는 필수적이 되었다. 보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것이다. 영상 이미지는 우리가 얼마나 성공적으로 해석 할 수 있는가에 따라 성공하거나 실패한다. |
|
예전에 중학생 때 이런 저런 영어 공부를하다가,
너무 인상깊은 숙어를 보았고 아직까지도 늘 기억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Read the lines'
행간을 읽는다는 뜻이죠.
보이는 것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숨은 의도와 또 다른 의미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대학에서 전공 중 하나로
신문 방송학을 선택하고,
이런 저런 실습을 하면서,
그야말로 '편집의 중요성, 혹은 위대함(?)' 을 알게 되었죠.
이 책은 바로 그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의 중요함'을 역설한 책입니다.
일단, 멋있는 제목과 왠지 끌리는 소재만으로
이 책을 읽으실 분들에게 주의를 드리자면,
결코 쉽지 않은 책이 될 거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400 여 페이지 정도의 분량은 그닥 많은 것은 아니지만,
요새 책 답지 않게 엄청 빽빽한 글씨들과,
여러 낯선 이론들을 넘나드는 조금은 딱딱할 수 있는 텍스트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야에 관심이 있거나 몸 담고 있는 분이라면 당연히 필독서이고,
저처럼 모든 분야에서의 지식을 추구하는 분이라면 읽어볼 만한 책입니다.
'비주얼 컬처의 모든 것' 이라는 거창한 제목답게,
전체의 반 이상을 할애한 첫번째 장에서는 비주얼 컬처의 역사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회화에서 사진, TV 와 지금의 가상세계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으로 다루면서,
비주얼 컬처의 시작인 회화에서,
지금은 당연하고 아무 것도 아닌 원근법 조차도 권력에 휘둘리는 모습을 읽으면서,
'보이는 것'에 대한 권력의 통제의 역사가 참 오래도 되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만 봐도,
왜 박정희가 쿠데타를 하면서 처음에 점령했던 것 중에 하나가 방송국이었는지,
왜 고 노무현 대통령이 재임시절 언론과 등을 사이가 나빠서 고생했는지,
이런 것들을 생각해보면 권력과 언론(방송)이 사실 얼마나 밀접한지를 알 수 있죠.
그러나 이런 뻔한 관계 보다도,
눈에 보이지 않는 혹은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것에 의해
보이는 것들이 왜곡되는 것을 더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이 책에서는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헐리우드 영화에서 지구를 지키는 영웅은 늘 거의 미국의 백인들이었고,
러시아 사람들이나 중동 사람들은 테러리스트이고 아시아인들도 악한들이 많았죠.
신문에서도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이 보면 잘 모를
그런 도표나 차트를 사용할 때 필요한 정보를 쏙 빼고
자신들의 주장에 유리한 내용만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을 전한다고 자부하는 뉴스에서 조차도
실제로 제 친구 중 하나가 수능 끝나고 인터뷰할 때,
전체적인 내용은 '시험이 어려웠다'였는데,
뉴스에서 편집한 내용은 '쉬웠다' 가 돼있더군요. 이런 경우들을 실제로 접할 때
사람들은 보이는 것, 즉 시각에 약하기 때문에
대부분 수동적이고 무의식적으로 받아들 일 뿐,
그것을 적극적으로 조사하거나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여론도 쉽게 조작되고 방송에 대한 권력을 가진 자에 의도에 의해 좌지우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제 경우만 해도,
예전에 영화를 편집할 때,
시간의 제한이나 편집 의도를 위해
한 장면을 넣고 빼는 것이 내용의 흐름이나
사람의 이미지를 한 번에 바꿀 수 있다는 것에 놀랐던 적이 있고 그래서 더 공감이 갔습니다.
그러나 굳이 저처럼 직접 경험을 하지 않더라도,
이 책을 읽고 난 후,
모든 '보이는 것'은 그것을 소유한 권력자에 의해,
혹은 최고한 그것을 만들거나 편집한 사람의 의도나 무의식적인 생각에 의해
필연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면,
보이는 것을 활용한 그런 횡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
보이는 것의 권력이라는 새로운 말을 생각해보게 만드는 시간을 선사하는 특별한 책을 만났습니다. 우리에게 보는 것,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믿음들에 대해 과연 그러한가 라는 물음을 던져주며 당연시하던 비주얼에 대한, 그리고 비주얼이 주던 의미까지 두루두루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비주얼에 대한 모든 것을 역사적, 사회문화적인 면을 모두 망라하며 다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책이라는 것이 솔직한 저의 감탄인데, 사실 그 명명이 어색하기도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그동안 당연시하며 별다른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했기에 어색하고 낯선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상문화학에 대한 역사적 이야기들과 제반 이론들의 발전과 영향들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세밀하게 다루고 있어서 그동안 그 분야에 무지했던 저에게 특별한 가르침과 정보를 주는 책이 되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서 지은이는 비주얼이 우리의 생활에서 얼마나 차지하는 부분이 늘어가고 있고 그 영향력도 대단한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어떤 방법들도 이러한 비주얼이 우리 생활에 영향을 주고 파급효과가 대단한가에 대해서도 잘 분석해주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눈을 뜨고 이 시각으로 대부분을 받아들이는 만큼 비주얼을 통해 큰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 사실이구나 라는 것도 마치 유리벽에서 유리벽 건너편에 대해 고민하는 깨우침의 기회를 갖게 되듯이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비주얼의 영향은 미술분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매체들, 사진이나 영화, 인터넷, TV까지 모두 아우르며 자극과 정보를 던져주고 있으니 말이지요. 이렇게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영상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반성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일이 아니겠는가라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또 이러한 비주얼에 대한 지은이의 생각을 사진, 영화 속 이야기들에서도 제시하고 있어 쉽게 이해하고 우리와의 밀접함을 생각하며 볼 수 있어서 더욱 좋았습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비주얼에 대한 이야기를 명석하게 재조명하는 이 책에 감탄하며 세상을 보는 눈이 새로워졌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
|
'보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말에서도 드러나듯, 시각은 다른 감각에 비해 민감하고도 종합적인 해석이 더 많이 이루어지는 감각이다. 실제로 시각은 일상생활에서도 여러 분야에서 깊숙이 관여한다.
이 책은 어렵다. 얼핏 보면 많은 이론과 이론가들을 단순히 나열해놓은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름이 많이 등장한다. 저자도 본문에서 이야기하듯 설명이 친절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는 어떠한 면에서 필연적인 것이다. 역시 본문에서 밝혔듯, 이 책은 '비주얼 컬처의 문화'를 다루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미디어'로 표상되는 시각적인 기술의 등장과 함께 촉발되는 어떠한 변화들은 대부분 공통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 TV의 등장, 카메라의 발명, 컴퓨터의 등장과 컴퓨터 그래픽의 발달이 그러한 예이다. 이제 상상의 영역에 있던 표상들을 사람들은 직접 제시할 수 있게 되었고 그로 인해 많은 것들이 변했으며 기술의 발전과 함께 표상 자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지금은 사람들이 처음 기술을 접했던 때와는 또 다른 현실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는 '비주얼 컬처'가 실제 지역과 문화와 만났을 때에는 무척이나 서로 다른 결과들이 발생한다. 지역적 혹은 문화적 특성에 따라 그러한 시각적인 기술들이나 시도들이 다르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 시각적인 기술이 사용되는 분야는 무척이나 다양하다. 일상단위에서도 거의 모든 곳에 작용한다. 개인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무수한 이론과 이름이 등장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책은 애초부터 '어렵게' 읽어야 하는 책이다. 몇 개의 이론과 단선 구조의 입장으로 비주얼 컬처가 각 지역 등에서 형성한 문화는 결코 몇 가지로 꼽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매끄럽지 못한 번역이나 이름 혹은 저서 명 등에 대한 오역은 더 많은 노력을 통해 조정해 나가야 할 것이다.
|
|
'시각적 경험의 풍부함과 그것을 분석하는 능력 사이의 틈'이라는 저자의 표현이 인상적이다. 굉장히 많은 것을 보고, 보게되는 오늘날, 과연 우리가 보는 것은 무엇인지, 우리가 보면서 진실이라고 믿는 것은 과연 믿을 만한 진실인지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게 된다. 도입부는 '본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림, 사진, 영화, 드라마 등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주도권을 다른 매체로 넘기며, 또 그나름의 정체성을 찾아가는지 차근차근 짚어 나간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이 많다는 것과, 과연 대상의 실체에 얼마나 근접하느냐와는 별개라는 것이 이 책에서 제시하는 문제의식이다. 콩고를 횡단문화적 관점으로 바라본 사례를 통해, 사람들이 얼마나 보고 싶은 것을 보는지, 자기가 볼 수 있는 것만을 보는지 보여준다. 나 또한 그런 관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보는 것에 대한 불평등, 사람들이 접근하는 권한의 불평등도 있겠지만, 무엇을 보여주는가, 무엇을 볼 수 있게 하는가를 결정하는 사회,문화적 틀도 보여준다. 우리에게 제시되는 다양한 시각적 정보, 자극들에서 사회적 소수자를 어떻게 보여주는지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소위 여성을 얼마나 상품화 하느냐는 이미 오래전부터 지적된 것이지만, 여성 뿐만 아니라, 인종적, 사회문화적으로 소수자들에 대한 불평등의 시선도 언급하고 있다. 나의 경우 문화적, 미학적으로 일반 교양수준의 책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지만, 이 책은 좀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았다. 책에서 사례로 나오는 그림, 사진 등의 이미지가 함께 제시되지 않을때는 그 사례가 잘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있고, 또한 사례로 들어준 사건, 인물들의 일화가 정확히 어떤 의도인지(역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인지, 아니면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인지) 혼돈스러운 부분도 몇군데 있었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비주얼 컬쳐에 대해 교양서 수준보다는 좀더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관련된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나, 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분들에게 좀더 적합할 것같다는 생각이 든다. |
|
이 책의 제목을 처음 봤을때 '그래 세상은 보는것이 전부이지 않아. 내 눈을 통해 본 세상 역시 오류를 가지고 있을거야' 라는 느낌을 받고 서평을 신청했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가볍게 보기 어려운 내용들과 전문 지식들이 며칠동안 나를 끙끙거리게 만들었다. 중간중간에 많은 이론들, 일상생활에서 조금 듣기 힘든 단어들. 중간중간에 확실한 뜻을 몰라서 사전으로 찾아본 것도 몇가지 있었다. 그런데 내가 앞에 생각했던 의미가 아닌 이 책은 보이는것에 대한 모순을 기술한 책이 아닌 어느 '특정한' 영상문화의 역사를 기술하기 보다는 시작성의 계보학을 소개해 주는 책이다. 처음에는 그림으로 시작해 사진 텔레비전 그리고 글로벌 영상문화로 발전해 나가는 발자취를 쫗게된다.
다만, 이 책은 시대순으로 서술을 한것이나 우리의 역사 사회이슈와 관련을 지어서 설명을 해주고 있다.
고대나 현대나 사람들은 자신의 눈을 통해 보게된 현상이 진정한 객관성을 지닌 사실이라고 확신하고 느끼고 행동한다. 그런데 옛 사람들은 그 사실을 조금 더 정확하게 느끼고 싶어서 원근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부족함을 느끼고 색채조절을 통해서 조금더 확실한 현실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그림 역시 객관성을 상실하고 화가의 주관이 개입되었다. 그로 인해 더 정확한 현실을 원하던 사람들에게 사진이 대체품으로 들어오면서 객관화가 이뤄지는 줄 알았다.그러나 사진작가가 원하는 연출방식으로 인해 사진을 편집, 수정함으로써 객관성은 또 주관성으로 변질 되었다. 그런식으로 영상문화로 대체가 또 된것이다.
그런데 어떤것으로 표현한다고 해도 어찌 화가, 사진작가, 영상편집자의 주관이 없어질수 있겠는가, 영상문화의 시대에는 식민시대의 정당화를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대표적으로 백인의 우월함인데 영상문화의 시작점인 백인의 관점으로 표현되어서 흑인은 영상문화자체에 주권이 없었다. 그래서 항상 유럽과 아프리카는 논란이 되었으며 콩고에서 횡단문화가 생겨났다. 아프리카와 유럽의 문화가 뒤섞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한쪽이 지배를 하는것이 아니라 백인과 흑인의 문화가 뒤섞임으로 해서 우열관계가 점점 수그러들었다.
영상문화에서는 남성성은 더 굳세지고 여성성 특히 흑인여성의 성은 무참히 짓밟혔다. 성기를 거세당하기도 하고 여성이라는 그 자체로 혹독한 시련의 연속이었다. 우리의 현재의 시간도 그렇지 않은가?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 상태의 어린아이들이 아빠는 돈을 벌고 엄마는 집안일을 한다는 그런 고정관념은 우리가 매일보는 영상문화가 주도하는 것이다.
영상문화는 좀 더 발전해 전 세계까지 나아가는데, 그로 인해 엘리트 문화인 상위문화는 점점 희석되어가서 구지 상위가 아닌 모든 이가 공유할수 있게 될것이다.
우리는 눈을 통해서 세상을 보고 이해한다. 그리고 그림, 사진, 영상물을 통해 내가 보지 못했던 세상을 접할수 있게 된다. 그렇게 세상은 소통하기 시작했고 글로벌시대를 불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주얼 컬처는 그렇게 만들어져 지금은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이 책은 어렵다. 남에게 편하게 추천하거나 다시 한번 읽으려고 펼치기 어려운 책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확실하게 말하고자 하는것은 우리의 시작으로 인해 만들어진 비주얼이라는 것은 사회를 주도하고 미래까지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내가 궁금했던 문제에 대한 정확한 답이 나온것은 아니지만 모든것의 객관성을 존재 하지 않는다는걸 더 정확히 알수 있었다. 그리고 여러 영상문화를 통해서 우리는 현재의 삶이나 현상에 대해서 따져보는 훈련을 해봐야 할것이다. 세상이 조금 더 다르게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