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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모세의 이야기이군요~ 이집트의 파라오 대신 나치독일군이 핍박하는 땅에서 유태인들을 데리고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처음부터 어떤 계시나 사명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주인공 비엘스키는 점점 모세의 입장이 되어갑니다. 자기 한 몸 도망치기도 버거운 상황에서, 최적의 전략은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망오는 유태인을 모두 받아들이고, 그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는 데 최선을 다합니다. 산속에서 먹을 것도 모자라고 추위에 몸을 떨지만, 그들에게는 바로 그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입니다. 내부갈등도 어김없이 터져나오지만, 지팡이 대신 총을 들고 그들을 앞으로 전진시킵니다. 뒤에서 독일군이 쫓아오고 바로 앞에 강을 만났을 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틀렸다고 모두 절망할 때, 이것은 정말 모세의 이야기가 됩니다. 기적은 물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혁대를 풀러 연결하고, 밧줄과 묶고 하여 일렬로 강을 건너감으로써 실현됩니다.
모세가 유태인을 가나안땅으로 인도했으나, 유태인이 그 땅에 정착하는 데는 더 많은 세월이 걸렸지요. 따라서 이 영화의 끝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닐겁니다. 이스라엘로 가든, 벨로루시에 남든, 끝없는 싸움은 계속되겠지요. 지독한 바닥을 경험한 것이 어디 유태인뿐이겠습니까? 믿음에 의해서가 아니라도, 혁대를 연결하고, 밧줄을 묶어, 험난한 미래의 강물을 건너가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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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2차 대전 중 독일인을 대상으로 벌인 Bielski 형제의 발치산 활동의 활약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우리 나라에서 지리산을 배경으로 한 빨치산 활동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 계절의 고통을 견뎌내어야 했고, 배고픔의 고통, 그리고 압박해 오는 적으로 부터의 두려움을 이겨내야 했던 그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영화를 보는내내 남부군이라는 영화가 머릿속에 계속 떠올랐다.
www.defiance.com에서 Beilski 형제의 설명이 나온 곳을 읽어보면 이들이 다른 빨치산과 다르게 평가 되는 이유는 독일군과의 싸움에 최고의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삶을 구하는 것에 그 목적을 두었다. 10명의 나치를 죽이는 것보다는 한 사람의 노인을 구하는 것에 가치를 둔 활동을 펼첬다. 이렇게 인도적인 활동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형제들의 상호 협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토비야가 이 목적을 가장 우선시 하였는데, 그 동생 두명의 무력 투쟁이 뒷받침 되지 않았으면 목적을 이루는 것이 훨씬 고통스럽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내 생각을 한 마디 적어야 한다면 역시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고 이야기 해야 할 것 같다. 좋은 비전과 목표 의식은 시간이 흐르고 돌아보았을 때 스스로에게 만족을 가져다 주고, 타인에게도 귀감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유대인의 삶을 구한다는 것은 결국은 인간의 삶을 구한다는 말로도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유대인과 지내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과 함께 지냈다고 할지라도 억압받는 사람의 목숨을 구해내는데 최우선의 목표를 삶았을 것이다.
자유와 고통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 계기가 되었다. 배고픔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수용소와 숲 속에서는 완전히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숲 속의 삶은 자신이 선택한 길이었고, 적어도 숲에서는 인간으로서 가져야 하는 자유를 침해받지는 않았다. 수용소에서는 일정의 음식을 제공받을 수 있었지만, 그들의 삶은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결정되는 운명이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너무도 일반적인 생각이고, 사실 혼란스러운 부분이 영화 중간에 나온다.
음식이 떨어지기 시작하니까 사람들은 수용소의 삶을 다시 이야기가 나온다는 이야기를 토비아가 듣는 장면이었다. 숲 속의 난민들이 수용소가 정말로 그리워서 그런 이야기를 할까라는 의문을 가지면서 영화를 보았다. 아마도 그것은 기본 욕구에 심각한 불만족이 생겨서 그랬을 것이다. 매슬로의 욕구 5단계설에 언급하는 것처럼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이 되지 않을 때, 인간으로서 버릴 수 없는 가치도 가끔은 공격을 받는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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