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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민족의 거대하고 광범위한 역사를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내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다. 전집 구성과 시리즈가 나오는 일이 많지만 독자들의 사랑을 통째로 받기가 힘든 일이다 보니 그 내용안에 대중적인 재미와 오락성이 빠지면 읽기 난해한 책이 되기도 하고 학문연구용 지침서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어려운 책만 골라 읽는 취향이라면 큰 문제는 없을 일이지만 나처럼 약간은 어렵고 약간은 재미가 있어야 되는 어정쩡한 취향에는 재미가 빠진 시리즈물은 별로이다. 약간의 어려움을 감수하고 싶었던 책을 골랐는데 바로 <히스패닉 세계>로 내 입맛에 제법 근접한 책이었다. 한 사람의 저자가 아닌 13명의 석학들의 논문식 자료를 연대별로 정리한 구성과 그 안에 수록된 박학다식한 내용들은 읽는 이의 뇌를 차갑고도 반짝이게 만들어 줄 만한 매력적인 히스토리를 듬뿍 안고 있었다.
나와 스페인은 관계가 멀다. 세상에서 좀 어렵다는 언어중의 하나가 스페인어이지만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언어가 또 스페인어이다. 밖에 나오면 스페인어는 영어만큼이나 대접을 받는다. 기나긴 역사가 그러했듯이 스페인 제국의 최대 전리품인 아메리카에 정착하면서 그들은 승승장구했으며 정치적 혼란과 시대의 변천으로 식민의 땅들을 모조리 잃어가야만 했다. 정통 순수 스페인 혈통을 내세우며 정통 카톨릭을 국교로 애시당초 변화를 거듭해야만 보존 가능한 것들은 그 빛을 차츰 잃어갔다. 현재 스페인은 이탈리아, 그리스, 포르투칼과 더불어 유로화로 인한 국내 경제동향이 어둡고 과거 찬란했던 유구한 역사적 산물들을 뒤로 미뤄둔 채 일류의 자리를 프랑스, 독일및 북유럽 부자 나라들에게 내어 주었다. 20세기초까지만 해도 유럽공동체에는 얼씬도 할 수 없었으며 그들의 국제적인 입지 또한 별 볼일이 없었다.
8세기 초 서고트 왕국의 멸망에서 15세기 말 카톨릭 공동왕 치세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문명간의 공존과 충돌로 점철된 스페인 중세사를 스페인만의 독특한 방식인 재정복과정, 즉 레콩키스타를 중심으로 서두가 펼쳐진다. 정복의 과정속에서 유대인, 무어인을 비롯한 타민족에 대한 공생의 제안도 있었지만 그에 못지 않은 종교적 탄압과 순수혈통이 아니라는 이유로 자행된 학살은 정복역사의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유럽대륙속 스페인을 중심으로 정리된 중세사 도큐먼트를 읽는 즐거움은 매혹 자체였다. 16세기 초부터 19세기 초까지 약 300년 동안 스페인이 세계 최강국으로 급부상했다가 다시 급속히 몰락해가는 과정을 중심부인 카스티야와 주변부인 카탈루냐, 아메리카간의 대립과 긴장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고 콜럼버스 항해이후 중남미 세계에 대한 정복과 정착, 제도의 이식을 토대로 그 위에서 펼쳐진 스페인적 요소와 토착 원주민간 융합과 대립을 통하여 라틴 아메리카 사회의 문화적 정체성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들은 지금의 히스패닉계를 이해하는 차원에서도 그 가치가 있다. 점차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지만 그래서 자신들만의 영역을 찾아가려는 히스패닉, 미국계 히스패닉을 그들은 라티노라고 부른다. 20세기 후반들어 유력한 세력으로 성장하는 과정들속에서 미국내 그들의 입지가 향후 미국 정치와 경제, 사회에 가져올 파장과 전망도 보고되고 있다. 1880~1992년의 스페인은 과거의 위용을 잃고 평범한 이류 국가로 전락했던 프랑코 독재 체제 사후 정치, 경제적 위기속에서 민주주의를 뿌리 내렸으며 이는 과거 영광의 역사를 다시 한번 회복하고자 하는 준비된 과정이기도 하다.
스페인의 문화적 우수성은 인류 문명에 중요한 공헌을 했으며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 사회의 성격을 규정짓는 기본적인 요소들이기도 하다. 스페인 문화권의 정체성은 정통 카톨릭과 연관되며 그 역사적 배경또한 복잡다단하다. 교회와 종교가 스페인 정치와 사회에 미친 지대한 영향력은 긍정적인 면에서는 협력을 부정적인 면에서는 갈등 구조를 만들어 냈다. 일주일을 꼬박 봐도 다 못볼 최대의 미술관이라고 하는 프라도 미술관에 가면 스페인의 자랑인 엘 그레코, 벨라스케스, 고야를 거쳐 피카소, 미로에 이르기까지 거장들의 작품들이 어떠한 기반위에서 형성되고 외부에 영향을 미쳤는지, 그 찬란한 창조물의 결과물들이 그림과 함께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가족관계와 결혼제도, 재산 상속의 문제까지 다루고 있는 이 보고서는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까지 겸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세르반테스에서 현재 라틴 아메리카 고급문학의 작가들, 옥타비오 파스, 카를로스 푸엔테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로 이어지는 현대작가들의 정치 참여적인 면모도 거침없이 보여주고 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여행에세이에도 소개된 유명한 성 야고보 성인의 순례길을 칭하는 산티아고 순례길은 독특한 종교성향을 보여주며 과거 이슬람의 색채를 강하게 고수하는 안달루시아 지방도 언젠가는 꼭 가봐야 할 여행리스트에 올려놓았다. 문화적 풍요로움과 창조성이 기나긴 역사를 거쳐온 원동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상황은 과거의 영광에 비해 누추하기 그지없다. 역사적인 산물을 바탕으로 관광산업에 이바지하는 나라가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이기에 아쉬움이 더해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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