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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단문화사의 '다시 쓰는 한국 근대사'는 비교적 객관적 입장에서 기술된 근현대사에 관한 책이다.
역사서의 기술은 그 역사서를 기술하는 학자나 작가의 주관적인 입장이 아닌 객관적인 입장에서 역사서를 기술하는 현 시대가 아닌 그 역사적 사건 등이 일어난 그 당시의 시대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기술해야 역사서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에는 고고학적으로나 역사학적으로나 세계의 어디에 내놔어도 자랑스러운 유물과 유적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출판되는 외국의 유명한 고고학자나 역사학자, 사회학자가 집필한 고고학 및 역사학에 관한 책에서 이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도 지금까지 우리 고고학과 역사학이 외국에서는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있으며 그 이유의 하나가 위와 같이 중도의 입장이 아닌 좌편향 우편향의 고고학 및 역사서여서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현재에도 남북한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는 정권과 학자나 작가가 처한 입장에 따라서는 확연히 그 결론이 달라질 수 있어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저술해야 올바른 역사서로의 역활을 할 것이다.
그런면에서 평단의 한국 근대사는 오직 좌편향적 관점에서 기술한 한겨례출판의 '대한민국사' 세트와는 달리 객관적 기술을 위한 노력이 눈에 보이는 책이다.
특히, 본인과 같이 초등학생이 있는 부모라면 역사서를 구입할 때는 먼저 부모가 구입할 역사를 읽고 구입해 주는 것이 좋다는 것도 말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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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몽고항쟁이후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급속도록 커져갔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가 개국했음에도 조선은 고려시대 때의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국호를 결정을 명의 주원장에게 요청하기까지 했다. 물론 현명하고 주체의식이 강한 왕의 등극은 주체의식을 고양시켰지만 그 때마다 사대와 소중화에 길들어진 신하들에 의해 저지되곤 했다. 집권층들의 이런 의식은 변화와 개혁이 필요한 근대화시대에 한반도의 발목을 잡는 것이었다. 홍경민의 난 임술민란 등 지방에서는 나라의 혁신을 요하는 봉기들이 일어났지만 지배층에게 그들은 언제나 역적이었으며, 자신들은 언제나 충신이었다. 권력에 맴도는 그들의 인식이 변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근대의 한국의 모습은 이미 정해진 상태였는지도 모른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늦게 개방을 통한 근대화 작업에 착수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짧은 시간에 세계에 위협적인 나라로 부상한다. 이에 반해 조선은 일본의 속국으로 전락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국내외의 상황의 차이 외에 가장 큰 이유는 왕을 포함한 지배층의 인식의 차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1800년대 일본은 외세의 개항에 반대하는 분위기에서 에도 막부를 타도하고 왕정복고라는 구호아래 메이지 유신을 일으킨다. 천황은 양이론(외세를 오랑캐로 낮추어 보고 외세에 반대) 으로 출발하지만 세계의 변화를 제대로 파악한 천황과 지배층은 양이론을 버리고 본격적인 근대국가 형성에 돌입한다. 그러나 조선은 앞에서 본 것처럼 조선은 외세에 의지만 하려는 고종과 소중화에 빠진 지배층으로 인해 닫힌 나라로 변해간다. 변혁과 개혁을 꿈꾸던 정조의 열정을 이어받지 못하고 세도정치로 이어진 조선의 정치 풍토가 18,19세기의 불운을 야기한 직접적인 원인이다. 21세기의 한국도 과거와 같은 변화와 개혁의 시점에 놓여있다고 생각한다. 아래를 볼 줄 알고 힘과 재력을 가진 이들이 아닌 평범하고 힘없는 자들을 생각할 줄 사람, 이 시대의 화두로 자리 잡은 경제민주화를 이루어줄 수 있는 사람이 한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자리에 앉기를 바란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등으로 조선은 외세의 침략과 개방요구에 몸살을 앓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에서 김홍집이 가지고 온 ‘조선책략’ 그리고 청으로 보내진 영선사는 조선에도 개혁이 필요하다는 의식을 불러일으키지만 위정척사운동에 부딪힌다. 1882년 임오군란은 청의 흥선대원군 납치와 민씨세력의 복귀를 주도하면서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과시.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체결한다. 오경석, 유홍기, 박규수는 개화의 필요성을 깨닫고 개화를 이룰 후진을 양성한다. 그들은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으로 갑신정변으로 급진적인 개화를 요구하지만, 실패하고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을 더욱 강화시키며 청과 일본이 톈진조약을 맺게 하는 빌미를 제공한다. 지배층의 무조건적인 약탈과 정부의 안일한 대처에 백성들은 동학농민운동으로 힘을 합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잘못의 시정보다는 자신들의 안정을 두려워한 기득권층의 행동 즉 청에 도움을 청하는 태도는 청·일전쟁의 구실을 제공하고 그 결과 맺어진 시모노세키조약, 그리고 삼국간섭으로 한반도에 영향력을 회복하려는 일본의 명성왕후시해 사건, 단발력 등은 을미사변을 불러일으킨다. 고종은 또 다시 문제해결보다는 아관파천이라는 카드를 통해 문제회피를 선택하고 이후 이름뿐인 대한제국 설립을 외친다. 독립협회가 외친 의회설립운동은 고종과 황국협회의 합작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한다. 러시아와 일본 그리고 유럽 국가들의 이권다툼은 러·일전쟁을 발발하게 하고 이는 1차 한일협약(외교권과 국가재정을 일본에게 넘김) 제2차 한일협약 그리고 제3차 한일협약(대한제국군 해산)으로 이어지고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에는 한반도의 치안경찰권까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게 되며 마지막으로 한일합방을 끝으로 조선은 일본인에게 완전히 넘어가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