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의 근대화를 꿈꾼 사상가 박제가의 개방, 개혁론을 담은 책이다. 연경 방문을 통해 배우고 느낀 중국의 제도와 문물과 풍속을 받아들여 민생을 안정시키고, 사회를 개혁하며, 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 보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의식이 풍족해진 다음에야 예절을 알 수 있다는 이용후생학파의 생각에 기반을 둔 내용들이다. 연암이 <열하일기>에서 중국의 장관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백성들이 생활에 활용하는 '깨진 기와와 똥거름'이었다는 답하는 부문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북학의>에서 박제가의 관심을 끈 주제들은 정말 다양하다. 상업과 유통의 중시, 수레와 배· 벽돌의 이용, 도로망의 확충, 기술과 기계의 도입, 효율성 제고를 중시한 정책, 도량형의 표준화, 사회의 개방화 등이다. 성리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천한 상인들이나 알아야 할 시시콜콜한 내용이라고 폄하할 수 있는 주제들이다. 하지만 국가적으로 본다면 부국강병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내용들이고, 개인적으로 본다면 가난을 탈피하여 문명생활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는 실용적 주제들이다.
박제가가 이런 부문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 원인과 대응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고 느껴진다. 조선 후기 선비들은 성리학적 시각에서 청나라를 오랑캐의 나라라고 우습게 보는 자세를 견지했다. 북쪽을 배워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윤택을 택하자는 <북학의>의 개방과 개혁사상은 성리학적 가치에 사로잡혀 있던 조선사회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안타깝게도 개혁군주였던 정조의 죽음으로 정국이 경색되고, 개혁이 실종되었으며, 급기야 외세의 침략으로 몰락의 길을 걸었던 사실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바와 같다.
<북학의>는 내편, 외편, 진소본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편은 중국 여행을 통해서 배우고 느낀 중국의 제도와 문화를 우리나라의 상황과 비교하고 있다. 물건 하나 하나에 대해 그 생김새와 사용법 등을 상세히 검토하고 설명한다. 조선이 벤치마킹해서 고쳐가야 할 부문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담겨 잇다고 이해하면 좋겠다. 외편은 북학의 이론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직설적으로 개혁을 주장하는 박제가의 성품도 읽을 수 있다. 진소본은 정조가 농업을 권장하는 윤음을 발표했을 때 북학의에서 농업에 관한 부분만을 따로 뽑아 상소문과 함께 정조에게 바친 것이다 |
| 박제가. 그의 이름은 조선 후기 실학에 대해 언급할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북학의>는 그 저서의 내용보다도 상공업을 중시한 ‘북학파’라는 명칭으로 우리에게 더 친숙하기도 하다. 분명 우리 역사의 중요한 일부분을 이루고 있음에 틀림없는데, 국사 시간에 얼핏 주워들은 것을 제외한다면 우린 그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듯 싶다. 뛰어난 학문적 소양을 지녔으나 서얼이라는 출신성분(?) 때문에 출세할 수 없었던, 하지만 운 좋게도 규장각 검서가 되어 자신의 개혁사상을 펼친 인물. 어쩌면 이것이 내가 그에 대해 아는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북학의>는 1778년 이덕무와 함께한 중국행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된 책이다. 당시 중국은 오랑캐로 일컬어지던 청나라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고, 소중화 사상으로 인해 조선은 청나라의 문화를 업신여기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박제가의 눈에 청국의 문화는 실용적인 측면에 있어서 조선의 그것보다 훨씬 뛰어났다.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생활, 형식만을 중시하는 태도로 인해 감수해야만 하는 불편함 등이 조선의 문화에는 너무도 많았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박제가는 <북학의>를 지었다. 이는 한 나라의 문화 전반에 대한 고찰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청국의 문화를 수용하는 것은 당시 지배적인 흐름이었던 성리학적 질서에 반하는 행위였다. 어쩌면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박제가의 사상은 이미 당시로서는 가히 파격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적었다고 이야기하기에는 그 자세함의 정도가 심각할 지경이었다. 단순히 ‘이것이 좋다’를 뛰어넘어 청의 것과 조선의 것을 비교하는 속에서 결론짓는 그의 설명 방식은 이미 사변적인 성리학의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은 것이었다. 수레, 성(城어), 벽돌 등이 왜 좋은지 그 이유를 비교에 입각하여 설명하고, 이것들을 만드는 방식까지 정교하게 설명해내는 그의 능력은 나에게 놀라움을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어쩌면 이는 서얼이라는 그를 제약하는 신분으로 인해 가능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에게 있어서 양반의 체통을 지키며 사는 삶은 아무리 노력해도 닿을 수 없는 선이었으면서도 동시에 지양해야 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는 신분적 제약으로 인한 구속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이는 그의 사상을 조금 더 급진적으로 만드는데 기여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당장의 가난도 타파하지 못하면서 성리학 이외의 학문을 등한시하는 당시 양반의 태도를 그는 비판한다. 타국의 언어를 익히는 것은 천한 것이라며 역관에게 무조건 위임하는 당시의 현실이 타국과의 외교관계에 있어서 적지 않은 제약을 가져다줌을 그는 분명히 이야기한다. 과거제도를 부정하는 그의 태도 역시 실로 날카롭다. 당시 과거는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시험만을 위한 공부에 충실하다면 그 외의 것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해도 관직에 오를 수도 있었다. 시험장에서의 감독 체제 역시도 허술했기에, 부정, 비리에 의해 관직에 등용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인재를 선발하지 못하는 과거제도는 그에게 있어서 무용지물에 다를 바 없었다. 이러한 비판을 바탕으로 그는 사농공상 모두가 중요함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논리 하에 그는 청국의 다양한 농사기구, 구황작물에 대해 중요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 이 대목은 당시의 양반제 자체에 대한 부정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랬기에 정조는 박제가를 ‘왕안석’에 비유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과감한 개혁을 시도했던, 하지만 당대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기엔 너무도 급진적이었던 인물인 왕안석에 비유될 정도로 박제가의 개혁 사상은 혁신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혁신적인 개혁을 통해 안정적인 당시의 국제정세 속에서 부국강병을 실현하길 원했던 박제가였지만, 정조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인해 그의 개혁사상은 완성을 보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그는 세도정치의 혼탁한 상황의 희생자가 되고 만다. 인재를 알아보지 못한 시대적 타락은 이미 망국의 한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에게도 한계는 있다. 그의 개혁적 성향은 당대에는 심히 급진적이었을지 모르나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여전히 성리학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한, 봉건적 성향을 보여준다. 한족의 국가가 성립했던 땅에 건국된 청이기에 비록 오랑캐의 나라이긴 하지만 한족의 영향을 어느 정도는 받았을 것이라고 그는 전제한다.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서 청국의 문화를 수용하는 것은 오랑캐의 것을 수용하는 것이기 보다는 주자의 영향을 조금은 받아 성립했을 문화를 수용하는 것일 수 있었다. (그의 역사관은 사림의 기자 조선을 그대로 받아들인 듯한 부분도 없지 않다. p108 참조) 더불어 그의 개혁 모델은 지독히도 청국에 치우쳐져 있다. 어쩌면 이는 <북학의>가 청국 방문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생기는, 태생적인 한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영역에 있어서 조선의 것은 청의 것에 비해 뒤쳐진다고 파악하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사대주의로 오해받을 수도 있는 여지가 있는 듯 하다. 실학은 기존의 이론에 치우친 학문과는 달리, 현실에 기반한 학문이었다는 점에서 부국강병을 위한 기틀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실학이 당시 사회에 의해 폭넓게 수용되지 못함으로 인해 실학은 말 그대로 실학, 즉 학문으로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사상은 충분히 개혁적이었으며, 후대 개화파의 원류가 된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느 학자보다도 섬세한 눈을 지닌 듯한 박제가, 그의 무서운 집착(?)이 낳은 <북학의>는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단 한권의 책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
| 누구든 뭔가를 말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기회가 필요하다. 적절한 장소일수록 있지만, 더 중요하기는 적절한 때다. 실상 '만고의 진리'란 없거나, 있더라도 들으나마나 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시대를 너무 앞서서 말하면 심한 경우 목숨을 잃기도 하고, 너무 늦게 말하면 이미 남들이 한 얘기만 되풀이하게 된다. 박제가는 지금으로부터 220년 전에 당시로서는 "남에게 말하는 것은 결코 좋지 못한"(연암 박지원의 평가) 말을 하고 있다. 놀고 먹는 유생을 괄시하고 과거 시험을 폐지하라는 거친 주장을 내뱉었으니 그도 그럴만 하다. 명목상으로나마 신분이 없어지고 과거시험이 없어진 것은 그로부터 100년 이상이 지나서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박제가는 그 역시 학문이란 말과 유학이라는 말을 동의어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그는 "잘 나가는 중국"(당시 중국은 건륭제 치하의 시기로 청나라 전성기의 끝무렵이었다)을 본받자고 말했을 뿐이다. 사람이 짐을 져 나르면 비효율적이니 수레를 이용하자고 했고, 흙으로 성을 쌓으면 약하니 벽돌로 쌓자고 했을 뿐이다. 지금으로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지만 당시로서는 너무나도 혁신적인 주장이었다. 어쩌면 그 자신도 자신이 얼마나 혁신적인 주장으로 하고 있는지 몰랐을 수도 있다. 박제가 자신은 그런 표현을 쓰지 않았지만, 실상 그가 주장한 것은 내용의 핵심은 '표준화'였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통해 얻고자 하는 바는 단 하나다. 풍족한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제대로 된 도로의 필요성을 주장한 것도, 제대로 된 교량, 수레의 이용을 강조한 것도 단 하나의 목적, 물자 이동을 쉽게 해 풍족한 사회를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주장은 "소비가 미덕"(국사책의 표현, 실상 의미는 많이 다르다)이라는 극단으로 치닫는다. "중국이 사치로 망한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나라는 반드시 검소함으로 인해 쇠퇴할 것이다. 왜 그러한가? 물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쓰지 않는 것을 일러 검소함이라고 하지, 자기에게 없는 물건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것을 일컫지는 않는다. (중략) 재물이란 우물에 비유할 수 있다. 퍼내면 늘 물이 가득하지만 그만두면 물이 말라버림과 같다. 따라서 화려한 비단옷을 입지 않으므로 나라에는 비단을 짜는 사람이 없고, 그로 인해 여인의 기술이 피폐해졌다." 워낙 중국을 모델로 삼다보니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발언도 거침없이 쏟아진다. 국내 화폐가 질이 제각각이니 아예 중국 돈을 들여와 그대로 쓰자느니, 언어의 장벽 때문에 발전이 더디니 아예 중국말을 공용어로 쓰자느니. 말하자면 현대 한국사회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쓰면서 달러를 화폐로 사용하자는 말이다. 좀 지나쳤다 싶다. 그러나 박제가가 묘사하는 18세기 조선 사회의 현실은 그런 지나침마저 이해하게 만든다. 영조와 정조를 거치는 조선 왕조 황금기의 실상은 이랬다. "남자나 여자나 태어난 이래 침구가 무엇인지 구경조차 못하고, 이불 대신 멍석을 깔고 그 곳에서 아들과 손자를 기른다. 아이들은 10세 전후가 될 때까지 겨울도 없고 여름도 없이 벌거숭이로 다닌다. 그러니 이 천지 사이에 가죽신이니 보선이니 하는 것이 있는지도 모른다. 한둘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러하다." 그럼에도 책이란 무릇 읽히고 봐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선각자의 글을 아쉬운 구석이 있다. 너무나도 치밀한 취재가 돋보이지만, 그 상세한 묘사는 실용 학문에 익숙해 있는 내가 보기에도 무척이나 부담스러운 수준이다. 이런 식이다. "짐을 싣는 수레는 굴대가 구른다. 이 수레의 바퀴살은 공자와 같이 생겼다. 이 수레의 바탕이 굴대와 만나는 곳에는 쇠를 박아 반달 모양의 그림쇠를 만든다. 수레에 짐싣기를 마치고 나면 이 쇠를 뺄 수 있다" 공자왈 맹자왈에만 익숙한 당시 사대부들에게 이런 글이 읽힐 리 만무하다. 당연히 자신의 뜻을 전할 수 없다. 역사를 무척이나 좋아하지만 유독 조선 후기 이후의 역사는 자꾸만 외면하게 된다. 되풀이해서는 안되는 역사임에 분명하지만, 너무나도 답답해 독서 자체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그 답답함은 소위 선각자라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 자신이 높은 뜻을 가졌다면 무지한 자들을 널리 깨우쳐야 할텐데, 이렇게 스스로 포기하고 마는 것이다. |
| 박제가의 '북학의'. 오래전부터 제목은 듣고 있었지만 이렇게 읽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만큼 우리의 교육이 단편적인 지식만을 제시할 뿐 직접 그것들을 접하게 하는데는 소홀하다는 핑계를 대면서 이 책을 읽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박제가의 관찰력이다. 그는 청나라에서 본 다양한 것들을 마치 그림을 그리듯 자세히 묘사했다. 그래서 부분부분 지루한 구석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세밀하게 중국의 문물들을 묘사한 것은 그와 대조적으로 낙후되어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중국 문물에 대한 예찬은 우리 사회의 개혁을 위한 것이다. 문제는 과연 이 글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읽히고 영향을 끼쳤을까하는 점이다. 물론 박제가를 사랑했던 군주 정조 역시 이 책을 읽었겠지만 실제적으로 우리 사회에 변화가 일었는가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좀 남는다. 어쨌든 변화에 대한 열망과 이용 후생에 대한 그의 관심은 오늘날에도 충분히 새겨볼 만한 것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