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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의 모든 것 화자인 '내'가 노아 선배에게 빠졌다면 그 이유는 그가 그녀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랑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시작되는 법이니까. 보드게임의 규칙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는 노아 선배에게 빠졌다. 카드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과 당장 사랑에 빠지시오.' 사랑에 빠지려는 사람에게는 상대의 어떤 행위에도 정당화 하려는 노력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노아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이었고 그것은 아무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에 더 특별한 어떤 것으로 느껴졌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노아는 교수나 선배조차도 의견이 맞지 않으면 직접적으로 반감을 드러냈고, 타인 뿐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엄격해서 작은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한 번은 세미나 시간에 마그리트의 그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의 파이프를 퍼피로 잘못 읽은 적이 있었다. 그는 이를 스스로 자책하며 몹시 괴로워했다. '체스'에 들어가기에 앞서 '파이프' 그림은 이 소설의 다른 단서이다. 마그리트가 파이프를 그려 놓고 파이프가 아니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모두가 알고 있는 사물에 대해 '그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전복의 효과를 선점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엄밀히 하자면 위의 파이프는 실제 파이프가 아니라 모양을 유사하게 표현한 것 뿐이며, 활자 역시 파이프라 부르는 대상과의 유의미한 연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선배는 이에 대해 '이미지의 반역을 연기해 반역의 이미지화를 획득'하는 예술이야 말로 자기기만 이라고 한다. 어떤 것을 부정함으로써 그것의 부정을 완성시키려는 시도는 이미 그 전제에서 그것을 수긍해야 하는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에 결국은 언어유희이며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정해진 규칙이 있다면 그것은 규칙일 뿐이지 진리는 아니다. 우리가 파이프로 명명하기로 했기 때문에 파이프이기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이 파이프여야 하는 이유는 한 가지도 없다. 마그리트는 어떤 것을 규정하는 것이 그 어떤 것도 규정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체스의 규칙 '나'와 노아 선배의 사이에는 또 한명의 인물 국화가 서있다. 국화는 노아의 거침없는 성격을 조금도 개의치 않는 또 다른 존재이다. 그런 자유스러움과 당당함이 노아가 볼때 매력적으로 느껴졌던지 둘 사이에는 이상한 기운이 느껴진다. 국화와 노아가 자주 부딪치는 것이 '나'에게 편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 이면에 숨겨진 서로의 감정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노아의 일방적인 감정이라 해도 '나'에게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국화도 받아들이지 않는 국화도 못마땅했다. 선배와 국화는 체스판을 사이에 두고 사랑인지 증오인지 다툼을 끊이지 않았다. 선을 누가 먼저 하느냐부터 게임의 승패를 결정하는 그 모든 장면이 갈등이었고 애정이었다. 그 둘은 마치 먹고 먹히는 체스판의 말처럼 우열을 가리지 못하는 듯 했지만 알고보면 항상 이기는 것은 국화였다. 그 둘의 관계는 '감자튀김' 때문에 완전히 갈라서게 되고 노아는 같은 회사 여자와 결혼을 했다. 체스가 어찌 되었건 체스는 그저 체스판 위의 일이었다. 그렇게 잊고 지내던 선배가 이혼을 한 후 '나'를 다시 찾아왔고 그는 다시 국화를 찾았다. 국화 역시 인생의 쓴 맛을 경험한 후 지쳐 있는 상태였다. 나는 결국 그 둘을 다시 만나게 해주고, 그들의 짧은 만남이 끝났을 때 비로소 나의 사랑도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좌판에 올려진 고등어'처럼 마지막 대화를 나눴다. 노아는 체스에 관해서는 자기가 다 틀렸던 것 같다고 했다.
국화는 학원이 생각대로 되지 않았고, 노아 역시 결혼도 삶도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노아는 최고 고객에서 제공되는 정보를 갖고 증권상담을 하지만 그렇다고 돈을 벌지도 못했다. 그들은 규칙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치열하게 옳고 그름을 따졌지만 아무것도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모두들 파이프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이것은 파이프라고 말하고 다녔다. 결국 그들은 아무리 체스에 대해 말해도 체스가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기를 쓰고 인생에 대해 떠들어대고 증오한다고 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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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에 많은 문학잡지를 구독하며 읽었었다. 그중 [현대문학]과 [문학사상사]라는 두 문학잡지는 매월 정기구독을 하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쌓이던 책을 처지 곤란해서 지금은 고향집 창고 어딘가에 쌓여 있을 것이다. 이제는 매월 읽을 시간과 책을 쌓아 둘 공간도 없이 바삐 살아간다. 그래도 매년 두 출판사에서 나오는 문학상 수상작품집은 구입해서 읽으려고 노력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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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리아 ㅡ 김금희 , 수상작가 자선작 ㅡ 2017 ' 제62회 현대문학상 수상작 , 현대 문학 .
며칠 전 인스타그램을 보며 그녀가 다녀온 전시회장의 그림들의 크기에 대해 이야기를 한 건 내 딴엔 패러디였다 . 책을 다시 꺼내 그 장면을 고스란히 옮겨다 주기는 귀찮고 , 그 비슷한 흉내는 전하고 싶어서 한 말이 " 크면서 아름답기는 참 어려운 거 같아요 . " 였다 . 그런데 소설의 내용을 곰곰 따지고 들자니 , 내가 가져간 표현은 가져가선 안 될 표현이었단 생각이 이제와 든다 . 그러나 그건 인스타그램의 그녀와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 . 나 혼자 골몰한 생각의 이야기이다 .
소설 속의 정은은 졸업 후 매년 송년회에 참석을 한다 . 대학 요트 동아리의 송년회 . 어쩌다보니 다들 어디가고 술이 좀 깰 즈음 남자동기들의 목소리는 이혼한 동기 치운을 운운하며 세실리아를 기억에서 소환하기에 이른다 . 대학 때 붙임성 좋고 친근하며 늘 명랑한 세실리아는 인기도 좋았는데 , 다만 가까워지면 위태롭게도 엉긴다는 게 그 당시 동아리 친구들의 은밀한 정서적 공감대였다 . 그리고 그녀와 멀어지고부터 수순처럼 그녀는 '엉겅퀸' 이 됐다 . 가무잡잡하고 살진 얼굴을 한 엉겅퀸 . 치운이 이혼했다를 자유연상처럼 놓고 동기들은 까맣게 잊고 있던 세실리아를 찾아보라 정은에게 말하고 , 정은은 정말 그녀를 찾아간다 .
바로 그 지점에 , 그 대사가 있다 . " 저런 거대한 것들이 아름답기란 참 힘드니까 . " 정은이 세실리아의 작업실에 찾아갔을 때 다른 작업장의 작품 규모를 보고 나누는 대화이다 .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 그녀 자신의 이야기를 그렇게 표현했구나 싶다 . 덩치가 있어 둔중한 몸을 가진 자신 .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는 세실리아의 몸 . 그 몸을 어느 밤의 치운은 쓰레기보다 못한 짓으로 짓밟았고 그녀는 동아리는 물론이고 대학 생활로부터도 흐릿해져 갔었다 . 엉겅퀸이란 별명이 붙으면서 . 그런 생각은 정은이 일반론처럼 대변을 한다 . 마치 공공연한 의식인 것처럼 . 그러면서도 자신은 공범이 아니란 듯이 그녀를 찾아가는 용의주도함 . 그래서 세실리아는 그녀에게 두고 두고 ' 정은이 너는 한번 꼭 올줄 알았어 .' 라고 한다 . 적어도 독립영화를 보며 울 감성이 남아있던 정은에게 걸던 희망였던걸까 , 최소한의 양심을 바랐던 걸까 ?
정은이 또 놀란 건 그녀의 작업실에 들어서자마자 푹 하고 난데없이 빠진 구덩이 였다 . 세실리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리 깊지 않다고 말하고 마는데 , 깊이가 무릎이 빠질 만큼이다 . 어두컴컴한 작업실의 바닥 . 난데없는 구덩이 . 그게 그녀 세실리아가 공들여 하고 있는 작품 . 회반죽으로 바닥을 높여놓고 그것을 오로지 얼음송곳으로 밤에만 파는 작업 . 그 과정을 동영상에 담는 것까지 ... 으스스함을 느끼는 정은 .
그녀는 새우 튀김을 시켜 놓고 정은과 앉아 수없이 소줏병을 비우고 있다 . 결코 둘은 새우튀김에 손을 대지 않는다 . 기껏 호기롭게 시켜놓고 먹지 않는 새우튀김 , 그리고 술이 들어갈 수록 세실리아는 답답해보이는 검은 터틀넥에 자꾸 손이 간다 . 나중엔 따갑다 따갑다 하니 , 정은이 터틀넥을 입지 말라 하는데 , 그래도 그녀는 그럼 뭘 입냐고 한다 . 정은은 속으로 예술가 나부랭이 어쩌고 , 스티브 잡스 흉내 어쩌고 생각하고 만다 . 세실리아가 철저히 감싸 숨기려는 세상은 보지 못한다 .
그녀에겐 세실리아의 작품이 그저 무릎이 빠지는 구덩이 였듯 , 그녀의 터틀넥도 잡스의 흉내 얼치기에 불과한 무엇이다 . 세실리아는 정은에게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는 말과 함께 치운의 소식을 전하는 그녀에게 그가 어떤 사람인지 한마디로 일축해 말해주고 만다 . 그리고 다시 송년회 . 그리고 이번엔 찬호가 세실리아의 근황을 알려준다 . 그녀가 비엔날레에서 출품한 작품을 보았다며 ... 거기엔 정은이 알던 작품과는 다른 , 구덩이를 매우는 세실리아가 있더라고 ...
대수롭지 않게 말하던 깊이의 구덩이를 파고 메우는 데 걸린 시간 , 그리고 한 사람이 다녀가는 오랜 시간 . 켜켜이 쌓이는 감정의 무늬가 히스테릭해지다 그마저 풀어지는 시간 .
세실리아는 정은이 다녀가고 , 그녀에게 치운의 일을 말한 후 홀가분해 진 것일까 ? 말하고나니 덮을 수 있게 된걸까 ? 자신을 내내 파기만 하던 상처에서 ? 나는 아직 생각중이다 .
그리고 , 여전히 소설 속의 상황을 나의 일상 한 부분에 연결해 놓고 , 나를 자극하는 일도 ... 또 , 이 작품이 자선작인 것이 아쉬웠다 . 체스의 모든 것은 생각이 다 끝나지 않아서 , 쓰다말아서 어중간히 리뷰가 멈춰져 있다 . 나는 세실리아가 좀 더 좋았다 . 텅 빈 구덩이 속에 자라는 시커먼 뼈들이 보여서 , 그래서 좋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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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사람, 부끄러움을 이기는 사람이 되겠다고. 강심장이 되겠다는 뜻이냐고 했더니 아니 그게 아니고 이기는 사람. 부끄러운 상태로 그걸 넘어서는 사람, 그렇게 이기는 사람.’ (「체스의 모든 것」, 25쪽) 매일 안부를 묻는 사람을 곁에 둔 이는 외롭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어진 끈은 끊어졌다가가 다시 연결되기도 하는데 그 끈은 이전과 분명 다르다. 어떤 끈은 더욱 단단해졌을 수도 있고 어떤 끈은 그저 연결된 상태로만 유지될 수도 있다. 왜,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김금희의 소설을 읽은 탓이라고 핑계를 대고 싶다. 대학시절 동아리의 풍경, 그리고 시간이 지나 저마다의 삶에 찌든 얼굴로 송년회에 모여 술잔을 나누며 사는 게 어떠냐고 진심 없는 말을 건네는 소설을 읽고 조금 슬퍼졌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김금희의 소설 속 인물은 언제나 궁금하다. 현실에서 한 번쯤 만났을 듯하지만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기에 말을 나눠본 적이 없는 인물이다. 그래서 가끔 내 앞에 그들이 있다면 나는 새로운 대화를 나룰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하게 된다. 설령 그 대화가 지루하고 재미없더라도 말이다. 아니다, 그건 인물 때문이 아니라 김금희의 화법, 혹은 문장 때문일지도 모른다.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체스의 모든 것」은 대학 시절 같은 선배인 노아와 후배 영지와 국화에 대한 이야기다. 어쩌면 제목처럼 체스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탁구공이 오가듯 논쟁 비슷한 대화를 나누던 노아와 국화. 그런 둘은 체스를 두는 과정도 서로가 아는 룰을 적용하려 한다. 노아는 정해진 규칙대로 체스를 두고 싶었고 국희는 자신만의 방법을 고집했다.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건 언제나 화자의 몫이었다. 누구나 그러하듯 셋은 어느 순간 함께 어울리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그들은 다시 재회하지만 서로에게 예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어느 시절을 떠올릴 때 함께 따라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안부가 궁금해지는 날이다. 소설에서 진로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국화가 되겠다던 부끄러움을 이겨 그걸 넘어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김금희 작가의 자전작 「세실리아」도 다르지 않다. 요트부 동아리 모임의 송년 술자리. 술에 취하면 과거를 꺼내고 누군가의 근황을 묻는다.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지 않고 그저 그러가 보다 판단한다. 대학생이 아닌 마흔을 가까이 둔 30대 후반의 술자리도 그러하다. 소설 속 술자리의 인물이 세실리아다. 잘 알지 못하는 그녀의 과거와 현재를 들먹인다. 동기라는 이유, 친구라는 이유로. 그러니까 누구도 세실리아와 지속적으로 만나거나 연락을 하지 않은 채 아는 척하는 것이다. 이미 잊은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세실리아와 국화는 다르면서도 같은 인물이었다. ‘사랑하죠, 오늘도.’라 말하던「너무 한낮의 연애」의 양희도 말이다. 권여선의 「재」와 이장욱의 「낙천성 연습」, 이기호의 「최미진은 어디로」을 읽는 것도 즐거웠다. 권여선의 「재」는 어쩌면 죽을 수도 있는 병을 진단받은 남자의 이야기로 그는 자신의 모습을 카프카의 『변신』속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로 변한 것과 동일하게 받아들인다. 차마 딸에게 알리지 못하고 혼자 휴직계를 내고 주변을 정리하면서도 그레고르가 잠자가 본 풍경과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속 풍경에서 어떤 위안을 얻는다. ‘그들, 그러니까 그와 제발트는 아직 벌레가 아니고 아무리 황량한 폐허 속에서도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고 찾아낼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다. 아직은 잿빛 세상 속에 끼워 넣을 희미한 의미의 갈피를 지니고 있는 존재들이었다. 그게 비록 초록빛 소주병이나 푸른 등을 단 구급차, 붉은 무생채 가닥이나 개미처럼 움직이는 간호사의 실루엣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재」, 81쪽) 김금희는 여전히 기발하고 유쾌한 이미지로 서늘함을 말하며 권여서는 이전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우울하고 어두웠으나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빛을 조금씩 확장된다고 할까. 이기호만의 유머를 만날 수 있었고 오랜만에 윤대녕의 슬픈 사랑 이야기도 반가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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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런 소설을 다 써〉
『체스의 모든 것』
소개받은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읽기가 망설여졌다. 그러나 소설을 읽다 보니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많았지만 더욱 소설의 재미를 알게 되었다. 이승우소설가가 말하듯 어떻게 이런 소설을 다 써 할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다른 현대문학상 시와 소설을 읽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단편소설이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고 한꺼번에 여러 소설가의 작품을 읽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모두가 다 작품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더욱 좋다.
나는 소설의 이해도가 낮기 때문에 여러 번 읽으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소설을 통하여 간접경험을 하게 되고 인생의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소설은 픽션이면서 논픽션이다. 우리 삶에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창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에 일어났던 체험에서 우러난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세계에 깊이 빠지면 신비의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
김금희의 「체스의 모든 것」은 ‘체스’라는 다소 특이한 모티프를 통해 세 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욕망들의 미묘한 충돌과 좌절, 끝끝내 발설되지 않는 갈망의 시간들을 서술하고 있다. 이 작품의 묘미는 체스의 정해진 룰에 집착하는 선배와 체스는 단지 게임일 뿐이라는 국화의 대결이 갖는 의미가 체스만이 아닌 체스를 둘러싼 보다 본질적인 삶과 문제로 확장되는 지점에 있다. 아마도 우리는 이것을 “퍼블릭한 게 아니라 프라이빗한” 것이라는 국화의 말을 빌려, 삶의 공적인 부분과 사적인 부분 간의 충돌과 긴장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박혜경 (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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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수상 소설집 도서 체스의 모든것 김금희 권여선 김애란 안보윤 이기호 이장욱 조현 최정화 공저 이 책은 아프리카 비제이 사슴님의 책을 읽어주는 방송에서 알게되었다. 사실은 현대문학은 자주 접하는 장르가 아니라 거의 구매하지 않는 장르이긴해서 그런지 지금까진 이 책중에 한편밖에 보지 못했다. 이기호님의 글이었는데 마지막은 책을 봐야만 알 수 있을 정도로 너무나도 잘 끊어서 방송을 해주셔서 참지 못하고 읽었는데 소소하게 재미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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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는 모르겠고, 나는 나 나름대로 장기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다. 장기는 동양의 체스와 같은 것이니까. 비슷하겠지. 그런데, 왜 이런 게임같은 것 가지고 싸우는지 모르겠다. 애들도 아니고. 다 큰 어른들이 말이다. 2017년 현대문학상 수상 소설집에 실린 작품 중 〈체스의 모든 것〉이라는 작품을 읽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뭔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두 번이나 읽었는데도 말이다. 음, 아무래도 더 읽어야 할 듯. 소설 속에는 나와 국화와 노아라는 선배가 나온다. 다들 사람들도 나오기는 하는데 그냥 뭉뚱그려져서 나오기 때문에 흐릿하게 보인다. 그들은 조연도 안되고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이다. 드라마나 영화로 따지자면 1시간 기다려서 한 컷 나오고 만원이나 이 만 원 받는 그냥 아무 이름도 없는 사람들. - 사실 얼마 받는지는 모른다. 생각해보니 이름들이 참으로 희한하다. 국화빵도 아니고 이름이 국화라니. 너무 올드한 이름이 아닌가 싶다. 이런 이름이라면 초등학교 다닐 때 놀림을 무척이나 받았으리라 본다. 놀림을 받으면 싸움을 할 것이고 성격도 쌈닭처럼 변했을 텐데. 음. 그건 모르겠지만 이 소설 속에서는 무신경하게 나온다. 아마도 어렸을 적에 싸우는 것도 지쳐서 무신경하게 사는 게 낫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게 몸에 베이면 그렇게 되는데. 글고 노아 선배는 또 뭐냐? 노아의 방주도 아니고 꼭 성경책에서 베낀 것 같지 않은가. 그런데 노아가 성경책에 나오던가? 그건 잘 모르겠다. 교인이 아니라서…. 이 노아라는 선배도 참 어린애 샅은 성격이다. 별거 아닌데 싸운다. 이야기에서도 후배들이랑은 안 싸우지만 선배들이랑은 잘도 싸운다고 나오던데. 이런 성격이라면 사회생활 하기 힘들 거다. 사회에 나오면 선배들이랑 잘 지내야 하는 거 아닌가? 라인이라는 게 있는데 말이다. 옛 말에도 썩은 동아줄 잡으면 패가망신한다고 했다. 그런 면에서 노아라는 선배는 참 힘들 거다 . 이 소설집에는 김애란이라는 작가의 작품도 있다. 『달려라 아비』라는 작품을 쓴 작가다. 이 작품 읽은 적 있었는데. 음, 지금은 생각도 안 난다. 하지만 좋아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긴 하다. 소설 제목이 「건너편」이라는 작품인데. 이 작품제목을 읽으면 한 사람이 떠오른다. 왜 떠오르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사람. 동대문에서 일한다고 하던데. 일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잘 살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동대문은 안 나오고 노량진이 나온다. 노량진도 지금은 많이 변했을 거다. 내가 요리를 배울 때 노량진에 있는 학원에 다녀서 잘 안다. 요리를 배우고 나면 10시 가까이 되는데 친구와 노량진 수산시장에 가서 술을 마신 적이 많아서 잘 안다. 거기 상인들은 거칠다. 그냥 구경만 하면 욕을 한다. 와, 그 때 식겁했다. 지금 생각해도 오줌을 지릴 것 같다. 아마도 그런 욕을 들은 기억 때문인지 주인공이 줄돔인가 하는 비싼 거 사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비싼나? 이 소설 속 주인공 이름도 참 신기했다. 이수, 도화. 이수교차로가 생각나는 이름과 도화는 꼭 꽃(무슨 꽃인지는…)이 연상이 되기도 해서 말이다. 권여선이라는 작가의 「재」라는 소설을 읽으면서는 ‘재’라는 말이 언제 나오나 생각하면서 읽었다. 나오긴 나왔는데 끝자락쪽에서 나와서 실망했다. 진작 나오지. 그렇게 신경을 긁으면서 나중에 나오다니. 어쨌든 나오긴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 나왔으면 작가 선생의 집에 찾아갈 뻔 했다. 그래도 새로운 작가를 발굴했다는 점에서 뿌듯했다. 나중에 꼭 이 분 작품을 읽어볼 생각이다. 2017년 현대문학상 소설집에는 이외에도 안보윤, 이기호 같은 유명한 작가의 작품들도 실렸다. 재미있게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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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희 「체스의 모든 것」
이장욱 「낙천성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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