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찍이 리차드 포스터는 <돈 섹스="" 권력="">에서 돈의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을 이야기한 후, "돈은 보다 큰 목표를 위해서 붙잡혀야 하고, 복종해야 하며 사용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토마스 머튼은 현대의 물질 만능주의를 슬퍼하면서, "우리 생활의 진정한 '법'은 부와 물질의 힘이라는 법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리차드 포스터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돈을 지나치게 중요시하는 것은 단순히 불행이라기 보다는 우상숭배이다. 그리스도께 충성하기 위해서는 돈이라는 우상을 향하여 아니라고 소리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돈을 그 권좌에서 끌어내려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돈을 경멸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같은 책, 73쪽). 그는 우리에게 단순한 삶(simple life)을 제안한다. 사실 그는 삶의 단순성을 강력하게 추천하고 있다.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단순한 삶의 서약으로 부름을 받았다고 말한다. 복음서에는 인간과 이 세상 재물과의 관계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예가 많이 있다. 즉 예수님은 물질과 소유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관하여 많이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돈과 그 문제점에 대해 모든 말씀의 1/5을 할당하셨다. 예수님의 비유 38개 가운데 16개가 재물에 관한 비유이다. 신약성경에서 기도와 믿음에 관한 구절은 약 500구절이지만, 돈과 소유에 대해서 다루는 본문은 약 2,000구절에 이른다. 쉐일러 매튜스(Shailer Matthews)에 따르면, 예수님은 정치학이나 경제학을 가르치는 선생은 아니었으나 경제적인 문제들에 무관심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경제문제에 대해 다른 어느 사회 문제보다도 많은 말씀을 하셨다.비교적 단순한 사회에서도 예수님께서 재물의 영적 위험을 크게 강조하셨다면, 지극히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사는 우리는 그 문제를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부와 돈의 문제는 초대교회부터 논의된 '뜨거운 감자'였다. 신약성경에도 빈부문제를 직접 다루는 본문이 많이 있다(예. 야고보 2:1-7; 고후 9장; 눅 1:46-55; 마 19:16-30; 행 2:44--7; 4:32-6). 본서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는 한국교회의 가장 큰 화두 가운데 하나인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것은 "청부론과 청빈론을 넘어서는 가난과 부에 대한 영적 사색"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반적으로 한국 교회는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번영을 신실한 성도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복으로 여겨 왔다. 반면 가난하고 병들고 실패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혹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받은 재앙으로 취급되었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나는 괜한 죄책감을 가진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분위기가 최근 더욱 고조되고 있다고 본다. 이상하게도 기독교 서점가에 "돈"혹은 "부자"에 관한 책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그 중 많은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일반서적 베스트셀러 목록에 "부자 되는 법"에 관한 책들이 지속적으로 올라 있는 사회적 현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지금 우리 사회에는 '부자 되는 것'을 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여기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 가히 '부 권하는 사회'라 할 만하다. 기독교 출판계도 이 풍조에 영향을 받고 있는 셈이다"라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깨끗한 부"라는 말는 허구이다. 그가 비판하는 '청부론'의 입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정당하게 돈을 벌고 그 수입에서 하나님의 몫과 다른 사람의 몫을 정직하게 떼고 나면 그 나머지를 마음껏 누릴 권리가 있다. 돈을 버는 과정에서 깨끗하고, 수입에 대한 몫 가르기에서 깨끗하면, 나머지 돈에 대해서도 '깨끗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물질적인 풍요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니 부자 되기를 부끄러워하지 말라." 저자는 이러한 청부론이 진리로 통하는 우리의 상황을 매우 염려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소명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깨끗한 부자'되는 것이 생의 목표가 될 수 없음을 저자는 확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유한 삶'이 아니라 '거룩한 삶'으로 부르셨다는 것이다. "거룩한 삶이 언제나 부유한 삶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을 사용하여 거룩한 삶으로의 부르심을 완성하기를 원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은 전면적이고 철저하다. 그것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한 부르심이다." 저자는 진정한 복은 "쌓음이 아니라 나눔에 있다"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구약과 신약을 전체적으로 평가한다면 "복 신학"은 근거를 잃는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이란 하나님과 연합하여 그분 안에서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그것이 참된 행복인 이유는 존재의 근거이신 하나님과 연합함으로 진정한 안식을 누리고, 하나님 안에서 소명을 발견함으로 의미로 충만해지고, 그 소명을 이루어 감으로 자신의 존재가 영원함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얻는 기쁨은 다음 무엇과 비교할 수 없다. 어떤 고생도 어떤 유혹도 이 기쁨을 아는 사람을 흔들 수 없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고 바울이 그렇게 살았다. 히브리 11장에서 열거한 구름 같은 증인들이 모두 그렇게 살다 갔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만사형통의 넓은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좁고 험한 길을 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손봉호 교수(서울대 사회교육학과)는 "이 책은 돈, 재물에 대해서 최근에 출간된 어떤 기독교 서적보다 더 급진적이다... 돈 욕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 "위로"를 얻기 원한다면 이보다 덜 철저한 책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돈보다 바른 신앙 생활에 관심이 더 많은 사람만 읽기 바란다"라고 했다.바늘귀를>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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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새 정부 캐치프레이즈가 ‘국민 성공시대’다. 이 이면에는 ‘자본’이 숨어 있다. 그는 이 캐치프레이즈로 집권했으며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5년 동안 끊임없이 정부는 말하고, 시민은 듣게 될 것이다. 1997년 IMF 체제 이후 대한민국은 양극화가 심화되어 계층 상호간에 분열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 더 고착화되면 새로운 계급 사회가 도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며 어쩌면 이미 새로운 계급 사회에 들어갔을 수도 있다. 양극화는 중심은 결국 ‘자본’이다. 자본은 대한민국 모든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다. 교회도 여기에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세속 사회가 한국 교회를 물질주의로 비판하는 것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교회 내부에서 물질주의를 비판한다. 몇 해 전 한국 교회에 ‘청부론’을 두고 많은 논쟁이 있었다. '청부론' 풀어쓰면 ‘깨끗한 부자’이며 핵심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부자 되기를 원하신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돈을 일만 악의 뿌리로 가르침을 받았던 성도들에게는 솔깃한 개념이었고, 돈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할 수 있었다. 청부론은 부를 소유하는 것에 대한 부담을 들어주는 개념이었다. 대한민국 경제체제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국체로 삼고 있고 있기에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 부자가 되는 것을 터부시 하는 일은 옳지 않으며, 성도도 대한민국 시민권자이기에 자본을 통한 부의 축적일지라도 정당하다면 별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 청부론이 대두한 이유이기도 하다. ‘부자 되세요’가 한 해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의 희망으로 자리 잡을 때 성도도 추구하고 싶은 슬로건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청부론이 설득력 있는 개념이어도 성도는 자본을 주인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들이며,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말씀은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살아가는 성도들을 갈등하게 한다. 무조건 ‘부자 되세요’를 삶의 기준으로 삼을 수 없다. 청부론이 등장해야 할 만큼 한국 교회는 세속 사회까지 자본을 주인으로 모시는 자본에 매몰되었다. 돈을 버는 일이 하나님의 복으로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자 어떤 이들은 한국교회를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었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청부론’이 대두된 이유도 자본의 노예가 되어 버린 한국교회가 건전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물질을 소유하는 방법, 자본의 노예는 아니지만 그래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의 부를 어느 정도 가지는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는 인식을 통하여 세속 자본주의와는 다른 부의 개념을 도입하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한국 교회에 대두되어 건전한,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 부자 되기를 원하는 이 청부론 마저 온당치 않다고 비판하는 이들이 있다. 그 중 한 사람이 김영봉이다. 그는<바늘귀를 통과한 부>를 통하여 청부론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김영봉 교수는 학부는 충남대학교에서 경영학을, 대학원은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IVP에서 발행한 <사귐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진 사람이다.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를 읽다보면 과연 그가 경영학을 전공한 사람인지 의심할 정도로 자본-돈에 대한 비판정신이 강하다. 청부론 자들은 돈 자체를 중립적으로 보기에 돈을 죄악시하거나 금기시하지 말 것과 최상의 축복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주장한다. 양비론처럼 보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삶과 성경의 가르침에 놓여 고민하는 성도들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하에 돈은 교환가치로 기능한다. 그렇다 돈 자체는 중립적이다. 하면, 돈 자체가 악하지 않다는 것에 반론 여지는 없는가? 있다. 김영봉은 돈이 중립적, 악하지 않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돈이라는 것 자체는 중립적이지만 돈은 본질상 위험하다. 그는 마태복음 6장 24절과 오스 기니스 말을 인용하면서 돈을 ‘영적 세력’으로 개념을 확대시켜 교환가치라는 중립성에만 규정짓는 것을 비판한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 6장 24절) “돈은 결정적인 영적 능력을 지닌 능동적인 매체로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는 의미이다. 돈은 우리가 선하게 혹은 나쁘게 사용될 때 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기 이전에 이미 하나의 능력으로 존재한다.”(오스 기니스) 주님께서 돈을 하나님과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신 말씀에는 사람들이 언제든지 돈을 섬김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음 경고하신 것이다. 이는 매우 위험한 생각이며, 성도가 가져서는 안 될 개념이다. 김영봉은 돈을 주인으로 의미를 부여한 것에 주목하고 있다. 돈 자체는 물질과 무생물이기에 돈 스스로 인격성을 가지지 않지만 사람이 돈을 사용하면서부터 인격성을 지니면서 돈이 사람을 지배하고, 사회를 지배하게 되며 하나님 대신에 주인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음을 강하게 경고하셨다는 것이다. 사람이 돈에 인격성을 부여하는 순간 하나님 대신에 주인으로 섬기며 이는 우상숭배다.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돈은 사람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고, 돈이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고 있다. 공부하는 목적과 이유가 부자 되어 잘 사는 것이다. 초등학생들이 자기 반에서 서로를 평가하는 기준이 아파트 크기에 달려 있다는 언론 보도는 어린이들까지 주님께서 경고하셨던 돈을 주인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교회 안도 별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돈을 영적 존재로 규정한 김영봉 주장은 매우 중요하다. 영적존재로 규정했기에 돈은 하나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 우상이란 눈에 보이는 타종교의 형상이나, 특정한 이념이나 철학만 우상이 아니다. 하나님 대신, 하나님 자리에 앉는 모든 것은 우상이다. 그 중에 돈이 자리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돈에는 유독 우상 개념이 약하며,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우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어떤 목사와 어떤 성도들은 말한다. 돈을 많이 벌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어느 정도 구제와 선을 행한 후에 남은 모든 것을 나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신 삶이라고 한다. 참 좋은 의미로 들린다. 가난한 사람보다 좋은 부자, 깨끗한 부자를 하나님이 더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나 역시 이런 주장에 어느 정도 공감했으며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을 성도들에게 권했다. 지금도. 하지만 김영봉은 단호하다. 돈으로 성취된 ‘부’ 자체에 대하여 근본 회의를 하고 있다. 부자가 선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하여 회의와 비판하는 모습을 보면서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 덮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생각했다. 그냥 정당하게 벌고, 나쁘게 쓰지 않으면서 적당한 부를 누리면서 사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지 반문하고, 비판하고 싶었다. 하지만 김영봉이 그토록 청부론을 비판하는 생각에 귀를 한 번 기울여 보기로 했다.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잠언 23:4-5). 김영봉은 잠언 말씀에 덧붙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진정으로 거듭난 성숙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많은 물질을 혼자서만 누리지 않고 모두 함께 행복하게 살기 위해 사용한다. 돈을 벌고 많은 부를 축적하는 것은 처음부터 그의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욕심 없이 자신의 물질을 사용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숙한 신앙의 사람은 부자의 범주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부자 되기에 목마른 한국 사회, 자본이 주인이 된 세속, 하나님을 저버려 사람의 근본을 잃어버린 세속은 제외하자. 하나님과 돈을 두 주인으로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이 있지만 두 주인 양립하는 형국을 보여주는 한국 교회와 성도는 새겨야 할 말씀이며, 김영봉 주장이다. 자본이 신으로 자리한 시대에 자본을 거스르는 삶을 산다는 것, 이런 삶을 산다면 얼마나 거룩한 삶이겠는가? 돈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능력을 이미 상실해버린 현대 사회를 비판하지 말고 돈이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주인이라 말은 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기에, 끊임없이 돈을 추구하는 이런 삶을 단호히 거스르는 삶을 살아봄직 하지 않는가? 돈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는 삶은 사실 힘들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성도라면 하나님 안에서 한 번 돈이 주인이 된 대세를 거스르는 삶은 거룩하기에 살아간다면 진정 거룩한 삶이며,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리라. 이는 부자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가난한 자도 마찬가지다. 가난한 자가 부자 되기 위하여 돈에 사로잡혀 오로지 부자 되기를 원하는 것과 부자가 돈을 권세와 권력으로 삼아 살아가는 것은 같은 삶이다. 누구를 욕할 수 없다. 이는 성도 모두에게 해당된다. 너는 틀렸고, 나는 옳다가 아니다. 자본을 한 번은 거스르는 삶을 추구함이 어떤가? 불가능하지만 한 번 살아봄이 어떤가? 대단한 삶이리라. 그럼 가난하게 사는 것이 정답일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럴 수 없음이 정답이지만 김영봉은 그렇다고 말한다. 왜 일까? 가난이 주는 유익이다. ‘가난이 주는 유익이라?’고. 인정하고 싶지만 왠지 심연에서는 거북함이 솟아오른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을 어떻게 거스를 수 있는가? 하지만 김영봉은 가슴을 짓누르는 말을 한다. “부가 영적 생활의 목을 조른다면 가난은 영적 생활을 자유하게 한다. 부를 많이 소유하게 되면 자신의 삶을 스스로 보장하려는 유혹을 받게 되지만 자발적으로 가난을 택한 사람은 하나님께 믿음을 둔다. 부는 우리의 눈을 멀게 하지만 가난은 눈을 뜨게 해준다. 부는 우리 자신을 지배자로 만들지만 가난은 겸손하게 만든다. 부를 잘못 다루면 심판에 처하게 되는 반면, 스스로 택한 가난은 그런 위험을 원천적으로 제거한다. 지나친 가난은 악이지만 스스로 택한 가난은 선이다.” 가난 그 자체를 미화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남이 주는 도움만으로 사는 사람들이 겪는 가난을 말하지 않는다. 김영봉이 말하는 가난한 자, 청빈한 자의 삶이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스스로 청빈한 삶, 가난한 자의 삶을 선택하는 것은 고귀하며, 존귀하다는 말이다. "나는 가난을 자랑하리라"는 말은 패배주의가 아니라 믿음에 근거한 승리주의라는 고백이란 말에는 조금 섬뜩한 느낌마저 들었다. 사실 나 자신은 이런 고백적인 삶을 살아갈 자신이 없다. 조금 넉넉한 삶을 누리는 것이 인간의 근본 목표가 아닌가? 다른 사람에게는 가난을 자랑하라고 할 수 있지만 자신에게 적용하는 일은 죄를 지고 태어난 인간 자신에게는 적용과 실천하기 힘든 일이다. 과연 스스로 가난을 택할 수 있을까? 심히 힘들다. 한데 그는 ‘부(富)’가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부’ 일반적으로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자신을 말한다. 돈 자체가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돈이 영적 세력이라 할 때 그 돈을 주인으로 섬기는 자는 진리를 보지 못한다는 말이다. 사실 마음의 부자, 영적 부자도 있다. 쟈크 엘룰은 <하나님이냐 돈이냐>에서 이렇게 말했다. “성경이 저주하는 대상은 부자들의 어떤 행위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하나님께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그들의 전체적인 삶 자체다. 아브라함과 욥과 솔로몬을 제외하면 의로운 부자나 좋은 부자는 없다. 아브라함과 욥과 솔로몬은 비록 돈은 많이 소유하고 있었지만 성경에 말하는 [부정적]부자들과는 전혀 다른 영적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쟈크 엘룰이 한 말을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끊임없이 자본 곧, 돈에 자신을 팔아 벌인다면 결과는 뻔하다. 김영봉이 하고 싶은 말은 정직하게 돈을 벌자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삶은 하나님 뜻에 따라 의롭게 살자는 것이다. 물질은 하나님께서 주실 수도 아니 주실 수도 있다. 부자를 축복으로 규정하는 것에 김영봉은 단호히 배격한다. 물질만능주의는 이 글을 쓰는 나 자신까지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성도들의 가치를 지배하고 있다. 돈과 부자 논리가 오히려 교회에서 일반사회로 확산되고 있는 형국이다. 교회가 비판받는 것이 성경과 교리의 배타성도 이유겠지만 더 큰 이유는 성경의 가르침과 교리의 가르침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부’가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부자 되라, 성공해라, 행복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라, 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라, 섬겨라 명하신다. 부자 되기 위하여, 성공을 위하여 주님을 믿으라 하지 아니했다. 그렇지 않은가? 바울 사도는 말씀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립보서 3장 18-19절) 우리의 신은 하나님이시지, 배가 아니다. 자본주의보다 더 지독한 돈의 노예가 되어버린 한국 교회가 생명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청부론에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삶, 자족의 삶, 노동의 삶,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김영봉은 말하며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가 요구하는 삶이기도 하다. 돈이 지배하는 한국사회를 조금이라도 회복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읽을 만한 책이다. 복이란 자본을 쌓음이 아니라 나눔에 있다고 그는 말한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다. “거룩한 열망은 우리가 제거하는 물질적 욕망의 양만큼만 우리 마음에 채워진다. 그러므로 자신을 채우고 싶어 하는 그것들을 먼저 비워 버려야 한다. 좋은 것으로 채워지기를 바란다면 악한 것들을 먼저 쏟아 버려야 한다.” 자본을 통한 소유의 넉넉함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를 통하여 넉넉해져야 함을 그는 강조한다.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가난해져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복이란 하나님과 연합하여 그분 안에서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루어 가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욕망에서 자유하라! 기도를 통하여 부자 되고자 함이 아니라 기도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부인하는 시간이며, 나의 욕망을 채우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분별하는 시간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소원을 품는 시간이다. 성도가 할 일이다. 이것이 진정한 부(富)다.
절제는 성령의 열매다. 나눔은 이웃과 함께 내가 건강해지는 것이다. 소유를 통한 행복이 아니라 존재와 관계를 통한 행복이다. 군림하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섬김 길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약한 것이 강하다고 하셨다. 이를 우리 자신들의 삶에서 실천해야 한다. 하지만 이 일은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지배하실 때 가능하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하실 때 가능하다는 말씀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작아지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적합하도록 스스로 변화되는 것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둘 다 하실 수 있다고 김영봉은 말한다. 하나님은 낙타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문을 크게 만드는 것은 원하시지 않는다. 우리가 작게 만들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하신다. 우리가 자본에 매여, 돈을 주인으로 삼아 살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우리로서는 불가능하다. 김영봉도, 나 자신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2000년 교회 역사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는 돈에 사로잡히고, 물질에 사로잡혀 하나님이 아니라 돈을 주인으로 모신 삶을 살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께 사로잡혀 산,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다. 성신 하나님의 지배와 다스리심을 간구하면서 자본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만 사로잡히기를 원하셨다.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제시하는 작은 책이다. 사실 나도 가난하지 않다. 먹을거리가 있으며, 잠 잘 곳이 있다. <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 이라는 책에 따르면 나는 상위 1%에 해당되는 사람일 정도로 부자다. 이토록 부자인데도 돈과 자본에 눈이 멀어 버렸다. 남 탓할 일이 하나도 없다. 그렇기에 김영봉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외쳤다. 돈의 노예가 되지 말라고, 하나님께만 사로잡히라고, 책을 읽으면서 고개는 끄덕거렸지만 실천은 하지 않는 나 자신을 분명히 보았다. 남을 향한 것, 남 탓할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문제임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결국 하나님께 나아갈 수밖에 없다. 성신 하나님께 사로잡히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는 자본- 돈 문제임을 알았다. 돈이 나를 지배하고, 세속 성공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성삼위 하나님이 나를 완전히 지배하고 다스리고 인도하도록 내가 그 분께 무릎 꿇는 일 외에 다른 길은 없음을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는 알게 한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물질적으로 부유해질수록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빈곤해진다. 우리는 새처럼 공중을 날고 물고기처럼 바다를 헤엄치는 복잡한 기술을 터득했지만 모두가 형제처럼 살아가는 간단한 기술을 터득하지 못했다. |
| 저자의 '사귐의 기도'를 읽은 것이 인연이 되어 이 책을 손에 잡게 되었다. 저자가 가지고 있는 신앙에 대한 진지함, 추구하는 자세가 인상적이었고, 그 방향에 있어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실하려는 것이 느껴졌다(개신교 목사라기보다는 약간은 가톨릭의 수도자풍의 느낌을 주는 부분도 있고 또 한편으로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민간단체 지도자의 냄새를 풍기는 부분도 있다). 한국교회의 고질적 병폐 중의 하나인 물질적 축복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각하고 부지불식간에 '돈' 즉 '맘몬'을 추구하고 따르는 것을 제대로 지적하고 있다. 또한 돈에 대한 올바른 생각과 태도와 실천이 없이는 올바른 신앙을 유지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것이 돈으로 계산되는 자본주의사회를 살고 있는 나에게 더욱 어려운 과제일 수 있지만 예수께서 모범을 보이셨던 것처럼 '영성적 가난'과 '영성적 나눔'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라고 믿는다. |
|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늘귀를 자꾸 늘리려 한다. 이런 저런 핑계와 이유, 근거들을 마련해서 자신이 가진 것을 그대로 두고 바늘귀를 통과하여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저자의 말처럼 낙타를 변화시키려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바늘귀가 아닌 낙타를 변화시키는데 관심이 있으시다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것들을 다른 이들을 위해 나누고 세상처럼 돈에 매여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들.. 바로 그들이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라는 것이다. 이 책은 자본주의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매우 강력한 도전을 주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돈을 버는 일에 있어서는 믿음을 적용시키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 책이 말하고 있는 것은 강력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돈을 버는 것, 또는 돈을 쓰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그래서 내가 가진 것들을 내 것이 아니고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
| 몇 년 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씨가 뇌물로 받은 돈 70억 중 5억원을 최일도 목사님이 이끄는 다일공동체에 기증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일공동체는 “재단취지에 맞지 않는다.”며 예의상 백만원만 받고, 나머지 4억 9천 9백만 원을 돌려보냈습니다. 왜 다일공동체는 그 돈을 돌려보냈을까요? 어떻게 벌어들인 돈이든, 그 5억원을 좋은 곳에 쓰면 그게 더 좋을 일 아닐까요? 하지만 다일공동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5억원이 상당히 큰 액수이며, 그 돈이면 좋은 곳에 잘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좋은 일에 쓰일 돈일수록 바르고 정직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손해나 피해를 보더라도, 부정한 이익은 단호히 거부하겠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런 자세가 청빈의 태도겠죠. 얼마나 많이 벌어들이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정직하고 바르게 벌어들일 수 있느냐를 최우선의 원칙으로 삼는 것이 청빈일 것입니다. 참 대단한 일이죠. 만약 김현철씨가 다일공동체가 아니라 저에게 5억원을 기부한다고 했다면, 물론 그럴 일도 없겠지만, 어떻게 했을까요? 받았을까요, 돌려보냈을까요? 기독교에서 부를 바라보는 입장은 크게 두 가지로서, ‘청부론’과 ‘청빈론’이 그것입니다. ‘청부론’은 ‘야베스의 기도’로 대표되는 입장으로, 부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기에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축적하느냐에 있다고 말합니다. 선하고 바르게 축적한 부는 곧 하나님의 은총이며 축복이라는 것이죠. 더 많은 부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더 큰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입장에 반(反)하여, 부 자체의 위험성을 강조하며, 오히려 가난이 그리스도인의 소중한 덕목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입장이‘청빈론’이 있습니다. 그것을 ‘자발적 가난’(voluntary poverty)이라고 말하기도 하며, 혹은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라는 책에서 김영봉 교수는 ‘영성적 가난’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가 말하는 ‘영성적 가난’이란 영성을 추구한 결과로 이르는 가난이라는 뜻이죠. 즉 분에 넘치는 재물을 모으려 힘쓰지 않을 뿐 아니라, 손에 들어온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어 가난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수입에서 다른 사람의 몫을 떼는 데 만족하지 않고, 나에게 필요한 것 이외의 재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이 당하는 가난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소망해야 하는 가난입니다. 사실 아무리 훌륭한 그리스도인에게라도 ‘자발적 가난’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 소유를 내 마음대로 사용한 권리를 스스로 제한하며, 다른 이들을 위해서 포기한다는 것이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렇더라도 ‘청빈론’은 모든 신앙인에게 끝임 없는 자성의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은 분명한 듯합니다. 결코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지금 내게 있는 것들,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필요 이상의 것, 분에 넘치는 것은 아닌 가 돌아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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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고마운 책이다. 김영봉 목사가 이 책을 집필하기 위해 70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 많은 책을 읽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 힘든 작업이었을텐데 김영봉 목사님께 수고의 박수를 보낸다. 그런데 책 표지가 좀 이상하다..특이하다고 해야하나?? 책 종이질도 좀 구리고.. 이정도 좋은 책이라면 더 세련되고 멋있었도 될텐데.. 어쩌면 책 표지에서부터 김영봉 목사에 냄새가 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영봉 목사의 영성적 가난의 냄새가 폴폴난다 ㅋㅋ
서론이 너무 길었나? ㅋ 뭐 본론도 별로 없겠지만... 아무튼 이책은 청부론, 특히 <깨끗한부자>를 정면반박하는 책이다. <깨끗한부자>를 읽었으면 꼭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를 읽기 바란다.
성경의 일부분만을 보고 청부론을 주장하는 자들에게 제대로된 성경해석의 진수를 보여준다. 정말 김영봉 목사는 성경을 제대로 볼 수 있고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신학의 깊이 있는 목사이다. 김영봉 목사의 영성적 가난과 영성적 나눔, 정말 참된 크리스천들에게 요구되는 항목이다. 우리에게 우리의 몫이란 없다. 모두가 하나님의 몫일뿐,
이 책 하나를 읽는 것은 돈에 관한 책 100권을 읽는 것이나 다름없는것이다. 꼭 읽어보고 생각해보길 바란다. 이 책 또한 명쾌한 해답이라고 하기엔 약간의 무리가 따를것 같다. 김영봉 목사도 부족함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겸손이겠지만^^)
청부론과 청빈론, 이제 돈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보완점을 하나 하나 채워 나가는 일, 우리가 해야 할 일이겠지... |
| 요즘 인기있는 소위 '청부론'에 대비되어 '청빈론'을 내세우는 책이다. 재물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지는 것에 대해 청부론과 대조하는 청빈론이다. 이 책에는 재물의 문제만을 내세우지는 않는다. 기독교인이 살아야 하는 모든 면에서 기독교인들이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세를 이 저자는 진정한 기독교인으로서의 살아가는 자세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런점에 있어서는 이 책에서의 주장에 대해 공감하지 않는 기독교인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반대의 논리 즉, 청부론을 내세우는 책들도 읽어보며 서로 비교해보며 읽는 것이 도움이 되겠다. 나는 이 책의 저자에 주장에 동감한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책을 읽고 기독교인의 참된 삶이 어떤 삶인가? 지금의 기독교가 정말 예수님의 말씀대로 걸어가고 있는가? 고민해보며 읽어보면 좋은 책일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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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왠만큼 큰 서점엔 '부자가 되는 법'에 관한 책들을 위한 코너를 따로 마련해 두고 있다. 빈부의 격차는 날로 심해지고 경기는 회복의 기미를 거의 보이지 않는 상황속에서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들의 관심에 대한 뜨거운 반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 부자가 되라고 권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라는 제목부터 비범한 책한권을 만나게 되었다.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는 전체 5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부는 3-4개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1부에서 5부까지의 흐름은 주제들의 성격에 따라 이론적인 주제에서 실천적인 주제로 그리고 개인적인 주제에서 사회적인 주제로 진행되고 있다.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는 기독교 청부론(淸富論)의 정당하지 못한 점을 비판하고, 그리스도인의 경제생활이 어떠해야하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 주제를 통하여 총체적이고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저자는 청부론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을 벗어났으며, 또한 그의 부르심을 향한 우리의 경주를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유한 삶이 아니라 거룩한 삶으로 부르셨으며, 거룩한 삶에 대한 우리의 추구는 인생을 사는 동안 다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는 첫째, 돈에 대한 반듯한 생각을 제시한다. 저자는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신 예수님의 말씀에 주목하여 돈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영적인 문제라 보았다. 돈은 본질상 위험한 것이며 돈을 추구하는 것은 마음 전부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제대로 반응하지 않는 것이라 본다. 돈을 쌓아 놓고 그것을 보장으로 삼으며 사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다.
둘째, 저자는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소유를 나누어 스스로 가난을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저자는 이것을 영성적 가난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가난은 정상적인 삶을 위한 기본적인 필수품에 만족하는 정도를 가리킨다. 정직하게 노력하여 번 돈에서 십일조와 세금, 어려운 이웃을 위한 구제금 등 신앙적 의무를 다 하고 남은 돈이라 할 지라도 자유롭게 사용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해서는 안된다.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돈을 사용하고 싶은 우리의 욕망을 끊임없이 비우며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물질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저자는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의 삶과 교훈을 좇아 역설적 삶의 원리를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원리들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실력으로 번 돈이니 모두 내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나눔으로써 되도록 많은 사람이 인간답고 행복한 사람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삶의 자세는 빈부 격차를 해결하지 못하는 현 경제 체제에서 반드시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섬기는 자를 높이시며, 약한 것을 들어 강한 것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은 돈 잘 버는 직업을 최고로 여기는 세상에서 모든 직업을 성직으로 알아 묵묵히 일해야 함을 제시한다.
책을 읽어 내려가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을 원하시며, 내가 유일하게 원하는 것은 주님 한 분 뿐이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 내가 주님 아닌 어떤 것-돈을 포함하여-에서 만족을 구하기 시작할 때 이미 하나님은 내게 전부가 아니며 나는 그분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드리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또 한가지 깨닫게 된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회 개혁에 대한 의무이다. 특히 빈부 격차가 날로 심해지고 있는 현 경제 상황에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빈부가 세습되는 사회구조에 문제를 제기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제적이고 효과적인 정책을 개발하고 실현시키기위해서 노력해야 함을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의 경제생활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 사람에게 기쁜마음으로 추천하는 바이다. [인상깊은구절]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전부를 요청하신다. 예수님은 우리의 물질적 요구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그분은 물질에 대한 우리의 마음을 전부 거두라고 말씀하신다. 마음의 일부는 물질에 두고 일부는 하나님께 둘 수 없다는 것이다. 물질과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전부를 요구한다. 우리는 어느 한 편을 택할 수밖에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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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의 책을 통해서 돈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일깨워 준 책이다. 나에게 가진 것이 많지만 가진 것에 대한 감사는 잊어버리고 도리어 없는 것에 대한 원망 만 하나님 앞에 늘어놓은 삶은 아니었나 하는 반성이 든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라고 주님은 말씀 하신다. 그 뜻은 무엇일까? 가시나무 가사 처럼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아서 하나님을 모시지 못 함을 노래 하듯 가진 것이 많으면 하나님이 임재 하시는 공간이 없어지는 것은 당연한것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그 만큼 힘든 것이고 물,심적인 가난을 통해서 더욱더 하나님을 묵상하라는 뜻 귀한 뜻이 담겨진 책이다. [인상깊은구절] 기도란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부인하는 시간임을 그 때는 알지 못했다..... |
|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생각하도록 깨우쳐 주는 책이다. 최근 교계에서 "청부론"에 대한 논쟁에 대한 관심으로 읽게된 책이다. 청부론에 대해 찬성이냐 반대냐 가 문제가 아니다. 교회에 다니며, 하나님을 섬기며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과연 무엇이 진정한 신앙생활인지를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책임과 어떤 삶의 자세로 살아야 할지도 깨닫게 될 것이다. 책 내용과 별도로, 나는 재생지를 사용한 책의 제본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영성의 길을 제시한 책답게 친자연적인 책 디자인도 책내용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신학생들은 꼭 읽기를 권면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