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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京城), 일본이 도입한 서구(西歐)의 도시 청사진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서울은 일제 강점기 경성(京城)의 청사진(blue print)과 겹쳐진다. 물론 일제가 만든 원안 그대로 시행된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많은 변화를 꾀했지만, 기본 골격과 변화의 방향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즉, 현재의 서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제 강점기의 경성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제 강점기의 경성은 어떤 존재인가?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漢陽)은 공식적으로는 한 나라의 수도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일본제국(이하 ‘일제’)의 식민지인 조선, 더 나아가 경기도의 도청 소재지로 격하된 경성이 되었다.
“흔히 ‘경성’이라는 이름이 일제강점기에 들어서서 새롭게 작명된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실상과 전혀 다르다. ‘경성’은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성’이란 의미인데, 일반적으로는 ‘수도로써의 서울’을 지칭하는 말로도 통용하여 왔었기 때문이다.1)” “그렇다면 조선총독부는 왜 새로운 용어를 만들지 않고 조선인이 관습적으로 사용한 용어 중의 하나인 ‘경성’을 택했던 것일까? 이것은 조선인에게 ‘이제 너희들의 서울은 경기도에 속한 일개 지방일 뿐이다.’라는 것을 널리 선전하기에 용이할 뿐만 아니라, 공간 인식상의 새로운 조작 역시 용이했기 때문(이다. 즉,) 조선총독부는 바로 조선 수도의 주요한 공간 심상이 ‘성곽’에 있다는 점을 역이용하여 조선 중심지로써의 서울 공간의 심상을 조선인의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했고, 그러한 식민 정책의 의도를 가장 잘 반영할 용어로 ‘경성’을 택했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이는 1912년에 “전통적인 도시공간의 상징성을 해체하고 식민통치에 용이한 공간구조를 창출” 하기 위해 시구개정 훈령(市區改正 訓令), 경성 시구개수 예정선로(京城 市區改修 豫定線路)가 발표되면서 성벽을 헐어 도로를 만들고 확장하는 데서 구체화된다.2)”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전통적 성곽도시이자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은 일본이 도입한, 아니 일본이 이해한 ‘서구(西歐)’의 실험장이자 식민도시 ‘경성’으로 바뀌게 되었다.
경성 도시계획의 수립과 그 영향
일제를 통해 ‘서구’는 ‘근대’라는 이름의 새로운 기준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렇다면 식민도시 경성은 어떻게 이루어져 갔을까? 서구식 혹은 근대식 도시가 되기 위한 경성 도시계획의 수립과 반영에는 “먼저 1919년 ‘도시계획법’을 제정한 일본의 영향을 들 수 있다. 일본에서 도시계획법 제정을 위한 움직임은 나중에 ‘일본 도시계획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되는 내무대신 고토 신페이[後藤 新平, 1857~1929]과 그를 따르는 내무성 관료들의 주도로 시작됐다. (이들에 의한) 일본 도시계획법 제정은 곧장 조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1919년 8월 총독 사이토와 함께 부임한 정무총감 미즈노 렌타로[水野 鍊太郞, 1868~1949]이 그 중심에 있었는데, 그는 고토 신페이 인맥의 거물 내무관료로 조선에 부임하기 전 내무대신으로 직접 도시계획법 제정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미즈노의 부임은 조선에서 도시계획 논의가 활성화 하는데 큰 계기가 되었다.” [pp. 90~91] 그러나 1922년 6월 미즈노 렌타로가 퇴임한 이후 조선총독부 수뇌부는 대체로 경성 도시계획 논의에 부정적이었기에 진행은 지지부진했다.
그러다가 1934년 6월 “‘조선시가지계획령’이 정식으로 제정되면서 조선에서 비로소 법정 도시계획의 실현이 가능해졌다. 그 첫 단계는 행정구역 확장이었다. (왜냐하면) 도시계획 논의 발단이 이촌향도(離村向都)에 따른 경성부의 인구 증가, 그리고 증가한 인구에 따른 외곽 지역의 자연발생적 도시화를 어떻게 통제하느냐에 있었기 때문이다. ” [p. 119] 이렇게 “행정구역 확장이 일단락되자 1936년 5월 (경성부는) 도시계획조사위원회를 개편하고 구체적인 시가지계획안 입안에 들어갔다.” [p. 133]
이렇게 해서 식민지 조선에 서구식 도시계획이 도입된 것이다. 이 도시계획은 당시의 경성부(京城府) 전역 35.1㎢와 주변지역을 포함한 총 108.8㎢를 계획구역으로 설정했으며, 용도지역으로서 주거지역, 상업지역, 공업지역 그리고 유보지역인 미지정지역을 지정했다. 또한 도로도 오늘날과 같이 대로, 중로, 소로 등 도로폭 위주로 계획하였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철도와 연계되는 영등포 및 마포 일부, 청량리 및 왕십리를 대공업 지역 혹은 중소공업지역으로 개발하고 기타 지역을 주거지역화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주거지역 중 일부[한강리 부근]를 고급 주거지역으로 설정” [p. 136]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경성시가지 계획은 “병참기지로서의 사명”과 관련하여 시작” [p. 191]되었지만, 바로 그 전쟁 때문에 제대로 시행되기도 전에 좌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가지계획령’이 미친 영향은 컸다. 1962년 ‘도시계획법’과 ‘건축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약 30년간 적용되었던 최초의 근대 도시계획법이며, 현재 도시계획 관련 법제의 뿌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현대 서울의 모태(母胎)는 성곽도시 한양이 아닌 식민도시 경성이다. 그리고 일제의 식민지화와 침략 전쟁을 위한 도구로 작용했던, 왜곡된 도시계획의 여파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것 또한 현대 서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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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서울은 조선의 오랜 수도였던 역사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를 거치며 축적된 역사가 지층처럼 퇴적된 공간이다. 도시는 고대부터 있던 것이지만 근대성을 담지한 도시, 근대의 모습을 가장 적실하게 반영한 도시의 모습은 말 그대로 '근대'의 충격과 함께 만들어진다. 대한제국기에도 서울을 근대적인 '황성'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근대적 도시로서 서울이 오늘날의 얼굴을 갖게 된 것은 일제의 식민지를 통과하던 시점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일제의 도시개수사업과 도시계획이 현재 서울이라는 도시 구조의 원형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조선의 오백년 수도였던 서울은 일제의 강점으로 한낱 지방 식민도시 '경성'이 되어 버렸다. '경성부'의 행정구역이 오늘날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았다. 도시의 범위는 지속적으로 변모해왔다.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은 근대 도시 '경성'이 탄생하고 변모하는 과정을 '식민통치'의 일환인 일제 도시계획의 한계와 모순과 함께 살펴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