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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내가 소화하지 못한 책에 대한 리뷰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이 책은 어려웠다. 하지만 경이-경외로웠다. '함대'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클라시쿠스'가 '클래식'의 어원임을 인용하며 '고전classic'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첫 장은 누구에게나 무난한 듯 싶지만 본격적으로 문학, 영화, 전시미술, 철학을 넘나들기 시작하면 종횡무진한 저자의 글을 따라잡지 못하고 만다. 나는 이 책을 1주 동안 나누어 읽었는데, 이틀째 되는 날에 알아차렸다. 지금 당장 덤벼들 수 있는 책은 아니라는 것을.(애초에 리뷰라는 짧은 글에 많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이해불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을 수도 있다)
혹시라도 생길 오해를 방지하자면, 이 말이 '독서를 포기하게 만드는 책'이라는 뜻은 아니다. 단지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 이상의 의미가 존재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는 말이고, 아쉽게도 그것을 후일로 미뤄야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지금 당장 느낄 수 있는 즐거움도 충분히 비축하고 있었다. 괜찮은 책의 목록들, 지젝과 같은 흥미로운 철학자에 대한 소개.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문장들.
"그(김훈)은 3인칭 소설은 커녕, 소설 자체를 쓴 일이 없고, 앞으로도 별로 쓸 일이 없을 거라는게 내 생각이다" / "애마부인이 욕망의 주체인 반면, 젖소부인은 욕망의 대상이다" / "새로운 세계 제국으로서의 미국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미국의 '제국-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국-덜됨'에 있다."
이런 문장들은 우리의 사유를 자극하며, 지금 너머의 인식 지평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때문에 이 책은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책을 완전히 놓게 만들지는 않는 그런 책이었다. 흥분해서 '이 책 진짜 매력적이야"라고 할 수는 없지만, 조금 작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이 책 좀 괜찮은 거 같아"라고 할 수 있는 책. 때로는 이런 책이 더 기대가 되기도 하는 법이다.
이 책의 이같은 - (적당하게) 어려우면서 흥미로운 - 특성은 내게는 다소 신기한 저자의 포지션에 기인하는 것 같다. 물론 어렵다는 특성은 저자의 전공-관심분야가 나의 전공-관심분야가 어긋나는 부분에 기인하겠지만, 흥미롭다는 특성은 확실히 저자에 기인하는 것 같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의 포지션을 다소 명시적으로 밝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그(고종석)는 허무주의자도 보수주의자도 아니고, B급 좌파도 아니다. 그는 개인주의자고, 자유주의자다. 이념의 스펙트럼 속에 굳이 자신을 분류해 넣어야 한다면, 나는 그와 같은 칸에 분류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나의 정치적 입장은 그와 대동소이하다." 여기서 허무주의자 혹은 보수주의자란 소설가 김훈을 얘기하고, B급좌파란 주지하다시피 김규항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굳이 특정한 분류로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닌 듯 하다. 그의 (얼마간) 자의적인 구분에 의한다면 몰라도, 한국 사회의 다소 경직된 분류에 따르면 말이다. 뜨거웠던 80년대를 떠올리며, 오늘의 현실(저항의 붕괴, 저항에 대한 세상의 경멸)에 분개하는 김규항에게 "한가한 질문 하지 말아라, 경멸 받지 않으려면 운동의 실력을 길러야 할 뿐"이라고 쏜다. 이른바 좌파를 비판하지만, 이 비판은 오른쪽에서 오지 않고 좌파의 혁신 지점을 짚는다. 게다가 오히려 레닌을 강조하며, 레닌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레닌이 잃어버린 "'(혁명의) 기회'를 반복해야 한다는 사회주의자 지젝을 지지한다"고 표명하기까지 한다. 나는 이런 자유주의자를 본 적은 없다.(물론 들은 적도!)
하지만 좌파에 대한 애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건조하다.(지젝에 대한 애정은 느껴진다!) 때문에 내게 저자는 유령과 같이 느껴진다. 좌파를 오른쪽이 아닌 곳에서 비판하지만, 좌파에 발딛고 있지는 않은.(좌파의 왼쪽은 존재하는가!) 한 사회주의자에 대해 지지를 천명하지만, 대한민국의 현실 좌파에게는 애정을 보이지 않는. 그래서 저자는 현실 정치의 지형, 현실 사회에서는 딱히 입장을 분류하기가 모호한 존재이며, 관념적인 차원에서만 이해가 가능하다. 어쩌면 저자의 이같은 고백 - "나는 87년 6월 이후의 한국 정치사에 대해서는 '케세라 세라', 될 대로 되라다. 그건 무관심이 아니라 낙관이다. 더 이상의 후퇴는 없을거라는." - 이 그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치를 애초에 낙관하거나 포기한 이들은 굳이 현실사회에 자기 포지션을 명확히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애초에 정치인(혹은 정치-운동세력)을 신뢰하지 않는 오늘의 대중에게는 어느 정권이든, 좌파든 우파든 모두 욕지거리의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저자가 그럼에도 특별히 매력적인 것은 관념적인 포지션에서 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상당히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물적토대에 의해서 뒷받침되지 않는 정의는 곧 반격받으며,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 된다." 와 같은 말은 자유주의자들이 자신의 개혁을 온전히 밀어붙이지 못할 때 대는 '현실주의적' 핑계로 자주 쓰인다. 그래서 나는 저자의 포지션을 온전히 관념적이지도, 온전히 현실적이지도 못한 어느 곳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마도 현실과의 거리는 사상적 단결력 - 이른바 현실의 추동력이자 질병 - 으로부터 그를 배제하여 사유의 건강함(유령의 현실성이라는 역설)을 가능케 했을 것이고, 보다 넓은 분야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했을 것이다.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이렇게 넓은 분야에 깊은 조예를 지닐 수는 없다. 예외적으로 진중권 정도를 제외하고는 본 적이 없다.)
물론 이것은 나의 오해나 오독일 소치가 충분한 단견이다. 나는 이미 내가 도망갈 구멍은 충분히 넓게 만들어 놓았다.(이 글은 내가 소화하지 못한 책에 대한 리뷰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여러 번역본을 비교하며 따져보듯이 정성을 쏟지 않을 수 있었다. 야근 후 퇴근한 후에 내는 짧은 시간을 활용하는 내겐 그럴만한 에너지도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과 저자에 대한 섣부른 판단을 내렸다 할 지라도 내겐 지금 이것으로 충분하다. 저자에 대해 내가 느낀 경외감. 그리고 호기심. 또한 그의 경지를 따라가고픈 마음은 이미 충만해졌기 때문이다. 그가 현실과 적당한 거리를 둘 수 있었기에 가지게 되었을 법한 관념적 건강함. 그것이 생산하는 현실적인 사유들을 언젠가 제대로 대면하고 싶다는 생각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내게 필요한 것은 이 책을 꼭꼭 씹어먹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 속에서 보다 건강하게 고민하고 나의 내공을 기르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글은 소화하지 못한 책에 대한 리뷰이자, 언젠가 이 책을 제대로 다시 만나고픈 나의 - 리뷰로 올리기엔 지나치게 개인적인 - 다짐이다.
아, 그리고 한가지 더. 이 책의 카피에 "우리 시대의 '대중 지성' 로쟈"라는 말이 있는데, 로쟈는 결코 대중 지성이 아니다. 로쟈는 대중들이 서로 정보와 지식을 교환하며 집단적으로 쌓아올린 대중지성 - 대중지성은 필연적으로 집단적이다! - 이 아니라 고고하게 홀로 쌓아올린 매력적인 한 개별지성이다. 굳이 대중지성이라고 한다면, 사회적으로 큰 인지도는 없는 '대중' 지성이라는 뜻 정도겠다. 바로 이 부분이 그가 현실과의 거리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본다면, 굳이 지적할 필요는 없었을라나. '대중지성'이 아닌 '대중'지성 로쟈와의 만남은 즐거웠고, 기대된다. 별 하나는 훗날을 위해 예비해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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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는 ‘즐거운 도망’이고, ‘즐거운 저항’이다. 도망치면서 저항하는 것인지, 저항하면서 도망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한없이 도망치고 한없이 저항한다. 아니, 도망치기 위해서, 저항하기 위해서 책을 읽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책읽기의 의의다. 중요한 것은 무조건 즐거워야 한다는 것, 만약에 당신이 책을 읽으면서 즐겁지 않았다면, 당신은 제대로 도망가지도 못하고, 저항하지도 못한 것이 된다. 그건 당신이 변변찮다는 얘기다. 그러니 책은 무조건, 절대적으로, 악착같이 즐겁게 읽을 필요가 있다. 물론 애초에 그럴 만한 책을 고르는 안목이 중요하다.” 웹사이트 두어 곳에 리뷰를 올리고 이곳저곳 돌아보던 중, 로쟈란 이름을 보게 되었다. ‘저공비행’이란 블로그 이름도 눈에 들어왔다. 로쟈의 서재에서 몇 글을 읽던 중, ‘내공이 상당한데..’라고 느꼈고, 가끔씩 들리곤 했다. 그 로쟈가 블로그에 담은 글들을 모아 책으로 펴냈다. 저자에겐 첫 번째 책이다. 출판사 편집부에서 ‘에세이’성격의 글들을 모아 책으로 펴내자는 제안에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손 안대고 코푸는 심정’으로 적극 동의했단다. 사실 이만한 양의 글을 (420쪽) 단숨에 써내려가려면 상당히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여러 해를 두고 꾸준히 올린 글들 중에서 모아 모아 책 한 권이 만들어졌다. 본인은 그의 전공(러시아 문학)외 분야에 대해서 논하는 것이 조심스럽다고 ‘곁다리 인문학자’라고 겸손한 표현을 했지만, 아니다. 내가 보기엔 제대로 된 다리다. 그 분야에 종사한다고 해서 모두 전문가소리를 듣는 것은 아니다. 본인의 전문분야는 물론 타 분야까지도 통섭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저자에게 점수를 후하게 주고 싶다. 저자의 관심 분야는 경계가 없다. 시, 소설, 철학, 영화, 회화, 조각, 번역 등 장르를 떠난 독특한 그의 시각과 글쓰기로 문외한들의 눈과 생각을 열어주고 있다. “법은 계산 가능하지만, 정의는 계산 불가능하다. 산술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유한과 무한이다. 따라서 ‘정의의 권리’ 혹은 ‘정의의 법’ (프랑스어의 ‘droit'는 ‘법’과 ‘권리’를 모두 뜻하므로)이란 말은 ‘무한의 유한’이라는 말로 번안될 수 있으며, 이것은 무한/정의에 대한 법적 침해다. 법이 정의에 부합하는지 심판 받을 수는 있지만, 정의가 법정으로 소환 될 수는 없다. 정의는 법/권리를 넘어서기 때문이다(계산 불가능성으로서의 정의는 소환 불가능성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것은 권리를 부여받거나 양도 받을 수 없으며(법에 따라)권리를 행사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계산 불가능성으로서의 정의는 다만 요구/요청될 따름이다.” 저자가 자크 데리다의 『법의 힘』을 논하면서 쓴 글이다. 페이퍼 형식의 글이지만, 거의 논문 수준에 걸맞게 분석적이다. 저자의 이런 열정과 지식이 부럽다. 저자는 책을 읽다가 그 책의 저자에게 필이 꽂히면 뿌리를 뽑는 스타일이다. 이런 독서습관은 나도 진작부터 시도해보려 했던 부분인데, 사실 그렇게 하지는 못했었다. 책 말미에 로쟈의 독서문답이 실려 있다. 2006년 여름에 북 매거진 《텍스트》와 나눈 이메일 인터뷰와 다른 기회에 끼적거린 몇 차례의 독서문답을 짜깁기해 옮겨 놓았다고 한다. 그 중 이런 내용이 있다. (마지막 질문이다) Q. 지금 당신은 진정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있는가? A. 마지막 질문은 의외다. 보통은 “당신이 진정 쓰고 싶은 글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게 예의 아닌가? 아무래도 쓰고 싶은 것보다는 써야겠다는 걸 더 많이 쓰게 된다. 만약에 직업이 ‘공부’가 아니라 전업 작가라면 한두 달에 한권씩 책을 낼만큼 쓸 생각도 있다. 어쩌면 그게 더 ‘자아실현’에는 도움이 될는지도 모르겠다. 한데, 문제는 내가 쾌락적이면서 또한 금욕적이기도 하다는 데 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한다. 하지만, 아주 조금씩만 한다. 나는 진정 쓰고 싶은 걸 내내 아주 조금씩만 쓰게 될 듯하다..... 저자의 블로그 방제인 ‘저공비행’을 생각하며 한마디 하고 싶어진다. 저공비행 이라함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랜딩할 곳을 찾을 때와 보다 더 세밀한 정찰을 위해서일 것이다. 무엇을 찾느냐는 저자의 몫이지만, 저공비행은 장시간 할 수 없는 단점이 있다. 양력을 잃기 전에 가끔은 구름을 박차고 올라가야만 하리. 그래야 다시 저공으로 내려와도 잘 볼 수 있을 것이다. 밑에서 손 흔들어준다고 우쭐대지 말일이다. 초심을 잃지 말고, 깊고도 냉철한 의식이 유지되기를 바랄뿐이다. 저자의 표현대로 ‘대공 포화’는 조심했으면 한다. 간혹 나는 북 리뷰를 쓰면서, 나는 왜 이 일에 이렇게 몰두하지? 라고 내게 물은 적이 있다. 그냥 막연히 나는 좋아서~ 라고 답했는데, 저자가 이 질문에 대한 모범답안을 적어줬다.
“우리가 어떤 책을 진정으로 읽게 되는 것은, 그러니까 그 책에 대한 읽기를 완성하는 것은 그에 대한 글을 (혹은 책을) 씀으로써 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독자가 읽어내는 텍스트(readerly text)와 독자가 써나가는 텍스트(writerly text)사이의 바르트식 구별은 사소하다. 모든 텍스트는 씌어지는 텍스트여야하며, 그 씌어짐을 통해서 비로소 읽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리뷰를 쓰는 건 책읽기를 통해 얻은 걸 베푸는 것이다. 그리고 책읽기를 완성해나가는 건 그러한 베풂이다. 그러한 쓰기/베풂의 여정은 끝이 없는가? 그렇다. 그것은 무한이기에 그러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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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죄와벌의 주인공. 로쟈인 이현우는 살인마다. 인문학의 썩은 뿌리를 잘라내어 죽이는 살인자. 이제것 내가 알고 있었던 지식이 얼마나 되길래 뻐기느냐고 비웃는 듯했다. 로쟈는 천재다. 아니, 천재이기 보다는 인문학(사람의 무늬를 증명해주는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찬 필로스 덩어리다. 이 책은 로쟈가 보는 문학, 예술, 철학, 지젝, 번역 비평 등 다섯 부분으로 구성 되어 있다.
그는 배우는 것이 얻는 것이고 가르치는 것이 베푸는 것이라 했다. 글을 읽을수록 배우는 사람은 결국 가르치기 위해, 베풀기 위해 얻고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사람됨의 무늬를 얻고 있는가? 그건 바로 베풀기 위함이다. 사람되게 살라고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책을 읽을수록 각 분야에 대단한 열정을 가진 이들을 많이 보게 된다.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하는 이들도 가끔 있는데 '로쟈(이현우)'가 바로 그런 존재다. 박학다식. 사유의 폭을 그만큼 넓히고 깊게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책을 읽고, 쓰고, 또한 생각했을까. 多讀, 多作, 多商量.
나의 하찮음을 느끼게 해준 인물이다. 특히 이책에서 새로웠던 것은 철학과 번역 비평 부분이다. 철학은 삶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법을 알려준다. 철학은 모든 학문과 살아가는데 기본인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철학은 생각할수록 말장난 인듯하다. 이렇게 말했다가 뒤짚어 저렇게 해도 말이 되고 생각이 되는 것 아닌가. 그걸 믿고 '말'하면 철학이 되는 것이다. 철학은 로고스의 장난이다. 젊은 치기에 생각하기로는 철학은 그런 것이다.
그리고 번역에 대해서 무지했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번역본을 눈 앞에 있는 그대로 믿었다. 사이비 교주를 신격화 시키듯이 그저 활자로 된 번역을 믿기만 했다. 의심과 생각의 여지가 없었다.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내가, 회의주의를 들어보고도 적용조차 해보지 않았다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일반적인 것들, 상식. 그것은 거짓부렁이고 조작된 것에 불과하다. 뭐든지 의심하고 생각을 전복시켜야 한다. 그래봤자 인간이고 절대 인간임을 뛰어넘지 못하겠지만. 인간이다. 끝이다. 유물론, 합리론, 경험론, 회의주의, 실존주의... 인간은 누가 만들었는가. 쓰다보니 또 다른 길로 새버렸다. 멍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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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피엔스(Homo Sspiens)는 생각하는 사람이다.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로 생각의 잔가지를 잘라내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데카르트를 볼 수 있다.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럴 때 생각은 만만하지 않다. 생각은 양식이며 에너지다. 아주 일상적이어서 우리가 굳이 생각을 필요로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생각의 무감각과 생각의 감각은 다르다. 전자가 생각의 권태라고 한다면 후자는 생각의 쾌락이다. 전자가 생각하는데 불편하지 않는 반면에 후자는 오히려 불편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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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고 무궁무진한 저공비행이 계속 되길...]
네티즌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게 된 것이 언제부터인가? 내가 첫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처음으로 인터넷에 접속한 때를 기억하니 벌써 12년 전이다. 독수리 타법으로 자판을 두드리면서 오로지 첫아이를 키우는 불안감을 떨치고자 육아정보를 얻는데 여념이 없었던 나. 그렇게 인터넷이라는 공간에 발을 들여놓고 조금씩 이곳저곳 방문하면서 나 역시 어느 사이에 네티즌에 합류하게 되었다. 지금의 인터넷은 정보만을 얻으러 다니기에는 너무도 많은 정보가 넘쳐서 이제는 공유 내지는 공감, 의견을 나누는 공간으로까지 발전해 갔다. 오히려 답답한 현실에서의 소통보다 더 직설적이고 솔직하게 자신의 의견을 나누는 공간이기에 대화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인터넷으로 몰려드는 것 같다. 인터넷을 누비는 사람들 가운데 인터넷 공간 속에서 자신의 집을 자신의 색깔로 채우는 사람들도 많이 등장한다. 블로거 활동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이다. 잡다한 정보 수집부터 책을 읽은 후에 리뷰, 시국에 대한 생각, 문학과 대중문화에 대한 생각 등등...그 가운데 로쟈라는 사람이 있었다. 솔직히 그의 닉니임을 들은 기억은 나지만 남의 집을 그다지 기웃거리지 않는 나로써는 이름만 알고 있는 한반 친구정도였다. 그래도 이름을 알고 있는 탓인지 <로쟈의 인문학서재>라는 이름의 책이 나왔을 때, 00출판사가 먼저 들어오기보다는 인터넷?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역시 인터넷에서는 그에 대한 정보를 빨리 얻을 수 있었다. 알라딘에서 오랜동안 블로거 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인문학은 물론 대중문화 등 다양한 방면에 대한 글을 올리고 있었다. 물론 그의 글을 인터넷이라는 한정된 공간이 아닌 지면을 통해서도 많이 소개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처음 대하는 나로써는 약간의 모험을 가지고 이 책을 읽은게 사실이다. 책을 좋아한다고 해도 인문학.이라는 말은 무척 어렵게 느껴지고 웬지 무겁고 어려운 비평이 먼저 떠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런 대부분의 독자들이 가지고 있는 읽기에 대한 두려움을 간파한 것인지 로쟈는 책읽기에 대해서 즐거운 도망, 즐거운 저항이라고 표현했다. "책을 읽으면서 한없이 도망치고 한없이 저항한다.아니 도망치기 위해서 저항하기 위해서 책을 읽는 건지도 모르겠다.....중요한 것은 무조건 즐거워야 한다는 것. 만약에 당신이 책을 읽으면서 즐겁지 않았따면 당신은 제대로 도망가지고, 저항하지고 못한 것이 된다. 그건 당신이 변변찮다는 얘기다. 그러니 책은 무조건 절대적으로, 악착같이 즐겁게 읽을 필요가 있다. 물론 애초에 그런 만한 책을 고르는 안목이 중요하다. "
아무래도 요지는 마지막에 있는 듯..책 초입부터 책읽기에 대한 로쟈의 생각을 들으면서 제대로 된 책선택을 하고 즐거운 독서를 하는가에 대한 의문부터 들기 시작했다. 이 사람 참 정곡을 제대로 찌르는 구나...쩝소리 나게 입맛을 다시면서 말이다. 그래서 우선은 타의가 아닌 자의에 의해 선택된 이 책을 무조건 끝까지 악착같이 읽어내자는 결심을 했다. 솔직히 머릿속에서 뱅뱅 도는 말이 한둘이 아닌데다가 그가 많이 언급하는 제첵에 대해서는 정말 문외한이어서 낯선 곳을 걷는 느낌도 들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즐거움까지는 아니지만 공감하는 부분은 분명히 있다. 이 사람 정말 문학과 사회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 사람이구나...하는 것이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라는 제목 너머에 달라붙어 있는 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이라는 말이 정말 딱 어울린다. 정통 인문학자라기보다는 곁다리고 더 방대하게 더 자유롭게 관심을 갖고 표현하는 사람, 그리고 그런 자유로움과 관심으로 높이 날기보다는 저공비행을 하면서 더 많은 관찰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저공비행 속에 담긴 인간에 대한 사회에 대한 문학에 대한 애정은 읽는 이들로 하여금-비록 나같이 알아듣기 힘들어 하는 사람도 있지만^^;;-독서의 즐거움을 전해줄만하다고 생각된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거론해서 그런지 레오까락스의 <나쁜피>의 한장면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사랑에 대한 생각들이다. 주인공 알렉스가 모던 보이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듯 질주하고는 안나를 향해 "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있을까요?"라는 물음을 던졌다고 한다. 솔직히 영화를 본지 오래되서 그런 질문을 했었던가는 가물가물하지만 알레스가 몸부림치듯 질주하는 장면과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면서 뛰어가는 안나의 마지막 장면은 생생하게 기억된다. 한가지 질문에서 시작된 사랑에 대한 의문. 번호를 달면서 조금씩 전개되는 생각을 쫓아가는 것도 흥미로웠다. 다방면에 잡학다식한 그의 글을 읽으면서도 잘난체 한다는 생각보다는 이렇게도 생각할 수가 있구나의 호기심에 한표 던진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그 이유를 구지 찾자면, 시집을 읽고나면 시집 가장 마지막에 달린 비평가의 무겁고 너무도 형이상학적인 분석에 짜증이 났던 것과 연관시키면 될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총동원하여 이미 자리잡고 있는 것에 너무도 많은 날개를 달아서 의미부여를 하거나 과도하게 비하하는 학자 내지는 비평가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점때문이다. 아직 글읽기에 글쓰기에 서투른 한 독자로써 로쟈의 저공비행에 100% 공감하지는 못하지만 흥미로운 탑승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앞으로도 그의 블로그에 무궁무진하고 자유로운 저공비행이 계속되길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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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로쟈라는 인물은 방송통신대학교 TV OUN에 나오는 '책을 삼킨 TV'에서였다. 20여분간 한 책을 놓고 이야기하는 그는 왠만한 책은 까내렸으며 보통 비평의 이유가 꽤 합당하고 납득이 가서 호감을 가지지도 반감을 가지지도 않았다. 늘 그를 소개하는 말이 유명한 블로거이며 로쟈라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다. 그래서 그가 러시아문학을 전공했다는 점, 그리고 그의 알라딘 서재에서 나중에 읽는 글은 그가 보통 수준의 블로거는 아니라는 생각이 한순간에 들게했다. 그가 전문가로서 가지는 학문의 수준이 일반의 블로그가 가지는 이야기의 질을 넘어선다는 것은 호기심과 도전의식을 불렀다. 이 책, 400쪽이 되지만 한순간에 넘기기는 힘들었다. 그나마 어줍잖게 라캉, 들뢰즈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철학 페이퍼는 넘겼지만(그가 어떻게 들뢰즈나 데리다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는지, 이해하고 있는지 경이감이 들었다) 나 또한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또한 번역서에 대한 짜증과 안타까움이 섞인 마지막 페이퍼는 그나마 쉽게 읽히는 편이었다. 그리고 지젝에 관해서는 생각보다 거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아서 그가 말하는 '인문학 서재'에 가장 적합한 이 책의 컨텐츠가 아니었나 싶다. 'MTV철학자'라는 누군가의 조소 섞인 별명이 말하듯 대중을 향해 말하는 괴물을 향한 접근을 조금 쉽게 해주었다.그리고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고 유학을 다녀온 그가 경험한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해 러시아 현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어서 일반의 영미권 학자들이 보지 못하는 점을 포착한다는 점 또한 좋았다. 이 책을 이해하는 독서력이 어느 정도일지 모르겠지만, 나의 독서력이 그 벽을 넘기에는 지금은 미약하다. 그의 말은 비문이 아니라서 이해하기가 명쾌하지만, 서문에서 그가 클라시쿠스와 김구의 글을 이야기하며 한껏 띄운 독서와 글쓰기에 대한 고양된 나의 의식은 종종 시험에 들게되었다. 이 책은 즐길 수 있는 책이었는가? 단순하게 오락적인 재미는 없었지만(공감할 부분이 적었다) 올라갈 산이 높다는 과제를 안기면서 하나의 즐길거리의 목표를 제시했다는 점에서는 현재보다 앞으로 즐길 수 있을 책이라는 말로 미완의 대답을 남기게 된다. 그는 겸손하게 10년만 넘기면 자기 정도는 할 수 있다고 하는데 과연 그 날이 올지 궁금해진다. 하지만 이 책이 내용보다 형식이 낯설다는 점에서 다소 현학적이라는 점에서 책의 가치를 까내릴 수 없다. 그리고 어느 인문학 책을 두고 그가 '책을 삼킨 TV'에서 '읽어볼 만한 책의 목록'의 수준이 만족할 만한 것이 못된다는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이제서야 그게 자랑이 아니고 자기가 느끼는 바 그대로라는 것을 이해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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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니터를 통해 글을 읽으면 왠지 불편하다. 그리고 모니터 속 활자는 붕 뜬 느낌이다. 빠르게 읽히기는 하지만, 내 머릿속 지식과 적극적인 상호작용이 이루지지 않는다. 인터넷 기사든, 블로그의 글이든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제대로 읽고 싶은 글은 따로 갈무리 해둔다. 그리고 틈날 때 출력하고, 시간 날 때 읽곤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는 다량의 귀찮음이 수반된다. 그러니 나중에 읽어야지 하고 미루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바탕화면에는 아직 출력하지 않은 문서들이, 책상에는 아직 읽지 않은 출력물들이 쌓여만 간다. 종종 들러서 글을 읽고픈 이웃 블로거나 유명한 블로거들이 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귀찮음 때문에 점점 방문이 뜸해진다. 게다가 내가 컴퓨터로 자주 글을 작성하다 보니, 이제는 컴퓨터 화면을 보는 것 자체가 지치고 피곤하다. 그래서 요즘은 웹서핑조차도 아예 안 하는 형편이다. 뭔가 모순적이다. 나는 이렇게 블로그에 리뷰를 올리면서, 남들의 블로그는 잘 안 간다니. 하지만 지치고 귀찮으니 어쩌겠는가? 그래서 나는 이 책처럼 블로그의 글을 묶은 것을 선호한다. 모니터보다는 출력물이 읽기에 좀 더 편하지만, 출력물보다는 단행본이 더욱 편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읽은 이택광의 책도, 그리고 이 알라딘에서 유명한 블로거 로쟈의 책도 그들이 블로그에 올린 글들을 정리/모음한 텍스트들의 집합이다. 로쟈의 말을 빌리자면, 블록(blook=blog+book)이다. 이런 글들은 블로그의 성격상 태생적으로 가벼운 편이다. 그래서 머리를 쥐어짜야 하는 어려운 책들과 함께 번갈아 가며 읽기에 딱 좋다. 하지만 이 책은 조금 달랐다. 명불허전이라더니, 유명한 블로거답게 글에서 풍기는 내공이 만만찮다. 재미있어서 나름 틈틈이 읽었는데도, 두 번 읽는 데에만 무려 10일이 걸렸다. 그의 내공이 펼쳐져 있는 지적 영토는 놀라울 정도로 광대하다. 현대철학, 정신분석학, 문화이론 등 그의 앎은 참으로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져 있다. 내 생각에 그의 지적 지도라 할 수 있는 이 책은 ‘인문학 지도’라 칭해도 손색이 없다. 일종의 인문학 안내서로 기능한달까. 나는 이번에 그가 제공하는 지도를 들여다본 셈이다. 지도에는 이미 가본 곳도 있었지만, 모르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그 때문에 나의 곤궁함에 약간 슬픔을 느꼈지만, 곧 미지의 영역에 대한 호기심이 굴뚝 같아졌다. 나의 관심 영역을 넓힐 수 있었으니, 전반적으로는 긍정적인 둘러봄이었던 셈이다. 세계지도를 몇 번 봤다고, ‘나는 세상을 안다!’고 말할 수 없듯이, 나 역시 그가 제공한 지도를 본 것만으로는 인문학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현재 그가 제공한 지도를 사전준비를 하고, 가볼 곳을 정했을 뿐이다. 이제 떠나야 한다. 강단 있는 여행자가 되어, 직접 신세계를 탐사해야 한다. 이것은 그가 인용/원용한 저자들과 직접 대면하는 일이다. 그런 후에 나 역시 지도를 그려야 한다. 나만의 지도를. 그것은 저자들의 가르침을 내 식으로 다시 paraphrase함으로써 완성될 것이다. 그 성과물들은 아마도 이 블로그에 새겨질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러한 작업을 실존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할 생각이다.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물음을 넘어, 일상에 대한 형이하학적 물음에 천착하겠다. 그리하여 운신의 폭을 어느 쪽으로 넓혀갈 것인지, 사유하고 또 실천하고, 다시 사유하고를 반복하겠다. 이것이 바로 현실에 힘을 실어주는, 이상적인 ‘현실-인문학’이 아닐까! (여기까지 내 글이 약간 딱딱했나? 하지만 그의 글은 그렇지 않다. 예리하지만, 위트도 넘친다. 가령 “여덟 살 때쯤 동네 친구네 집에 놀라갔다가 책꽃이에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이 좍 꽂혀 있는 걸 보고 경이감을 느낀 적이 있다(우리 집에는 낱권으로도 책이 별로 없을 때였다.) 어쩌자고 세상에는 도대체가 아무것도 없지 않고 책이란 게 있는 것일까!? 그러한 책의 존재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경이롭다(여성들 또한 경이롭지만, 그들은 책만큼 친절하지 않다!)”라는 구절을 읽고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리고 이 유쾌함을 참지 못하고 여자친구한테 직접 읽어주기까지 했다.) 개별적인 장에 대한 언급을 한다면, 이 리뷰가 A4 30페이지는 거뜬히 넘길 것 같다. 그래서 세세한 얘기는 내가 직접 그 곳을 여행한 후로 미루겠다. 사실 나는 이미 여행을 시작했다. 영화 <빈집>과 <화씨 911>을 보고, 고종석의 책을 읽고 있다. 지금 도서관에 가서 지젝을 책을 빌려올 생각이고, 곧 롤랑 바르트의 책을 살 작정이다. 데리다도 조만간 읽어볼거고. 재미있겠다! 구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즉 배우고 수시로 그것을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 나는 ‘익힌다’는 말을보다 적극적/구체적으로 ‘가르친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싶다. (…) 왜냐하면 배움의 완성은 가르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직접 가르쳐보는 경험 속에서 자신이 배운 것이 비로소 자기 것이 된다. (…) 이것이 배움의 변증법이다. 즉 우리가 진정으로 배우는 것은, 배움을 완성하는 것은 가르침으로써다. 가르칠 수 없는 앎은 완성된 앎이 아니다. 그러니까 ‘학이시습지’의 즐거움, 곧 ‘학습’의 즐거움은 가르침으로써 배움을 완성하는 즐거움이다.(…) 변증법적인 ‘학습’의 ‘배우다-가르치다’란 의미쌍을 조금 확장하면 ‘얻다-베풀다’가 될 것이다. 배움은 얻음이고, 가르침은 베풂이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얻는 것은 무엇을 베풂으로써다. 그리고 그것은 덕이란 말이 진정으로, 그리고 상식적으로 뜻하는 바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엇을 베풂으로써 덕을 쌓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한 사정은 ‘읽다-쓰다’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우리가 어떤 책을 진정으로 읽게 되는 것은, 그러니까 그 책에 대한 읽기를 완성하는 것은 그에 대한 글을(혹은 책을) 씀으로써다. (…) 예컨대, 리뷰를 쓰는 건 책읽기를 통해 얻은 걸 베푸는 것이다. 그리고 책읽기를 완성해나가는 건 그러한 베풂이다. 그러한 쓰기/베풂의 여정은 끝이 없는가? 그렇다. 그것은 무한이기에 그러하다.”(p17~p19) “지금까지 우리의 인격을 형성해온 책읽기란 대개는 순응하고 따르는 책읽기라기보다는, 무언가에 반하고 맞서는 책읽기였다. 즉 이제껏 우리가 책을 읽어온 것은, 마치 세상과 등지듯 현실을 거부하고 현실과 대립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때론 우리가 현실 도피자처럼 여겨지고 현실마저 우리가 탐닉하는 독서의 매력에 가려져 아득해질지언정, 어디까지나 우리는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도망자,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탈주자인 것이다. 모든 독서는 저마다 무언가에 대한 저항 행위이다.(다니엘 페나크, <소설처럼>, 문학과지성사, 103~104쪽) 정리하면, 책읽기는 ‘즐거운 도망’이고, ‘즐거운 저항’이다. 도망치면서 저항하는 것인지, 저항하면서 도망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한없이 도망치고 한없이 저항한다. 아니, 도망치기 위해서, 저항하기 위해서 책을 읽는 건지도 모르겠다. 페나크에 따르면 그것이 책읽기의 의의다. 중요한 것은 무조건 즐거워야 한다는 것. 만약에 당신이 책을 읽으면서 즐겁지 않았다면, 당신은 제대로 도망가지도, 저항하지도 못한 것이 된다. 그건 당신이 변변찮다는 얘기다. 그러니 책은 무조건, 절대적으로, 악착같이 즐겁게 읽을 필요가 있다. 물론 애초에 그럴 만한 책을 고르는 안목이 중요하다.”(p30~p31) “’중산층 페미니즘’, 즉 “계급과 사회 구조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는 페미니즘은 ‘허드렛일을 대신해줄 누군가(다른 여성, 빈민, 식민지인)’를 착취하는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 (…) 그런 의미에서 이 페미니즘은 민주주의와 똑같은 딜레마를 갖고 있다. 민주주의 또한 허드렛일을 대신해줄 누군가를 착취하는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민주주의의 기원으로서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바탕은 노예제였다.) 미국, 프랑스, 영국 등 대부분의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경영 국가, 제국주의 국가였던 사실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라크 침공을 거론하면서 이런 것이 미국의 민주주의냐고 비판하는 것은 따라서 예리하지 못하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반민주주의적, 제국주의적 행태이기 때문이다. 곧 다른 데서 착취해야만, 자국의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도 예외가 아니다. 국내적 ‘평등’은 국외적 ‘차별’에 의해서 지탱된다. 민주주의가 고상하고 고급스런 제도라는 건 그런 의미에서다. 어느 정도의 경제적 바탕, 가령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 이상이라든가 하는 토대가 마련돼야만, 민주주의란 제도는 작동한다. 이러한 사정은 ‘고상한’ 페미니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고상한 것들이란 원래 그 모양이다.) 나는 다른 민주주의, 다른 페미니즘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며, 자신할 수 없다.”(p83~p84) “간결함, 리듬 그리고 쉬움 같은 문장에 대한 내 모든 태도들은 오로지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존재한다. 나는 이오덕 선생이 말씀한 ‘삶을 가꾸는 글쓰기’를 믿는다. 모름지기 글은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 글을 씀으로써 내 일상의 에피소드들은 비로소 내 생각으로 정리되며, 그렇게 정리된 생각들은 다시 내 일상의 에피소드에 전적으로 반영된다. 내 삶과 내 글은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순환한다. 내 삶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나라는 인간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내 글은 아무것도 아니다. 결국 내 문장에 대한 내 태도는 삶에 대한 내 태도와 같다.”(p90, 김규항의 글) “정의로서의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는/요구하는 사람들이 왜 경멸 받는가? 그건 힘이 없기 때문이다. 김훈의 표현을 갖다 쓰자면, ‘물적 토대’가 없기 때문이다. 몽테뉴-파스칼의 통찰을 반복하자면 “힘없는 정의는 무력하다. 정의 없는 힘은 전제적이다. 힘없는 정의는 반격을 받는다. 왜냐하면 항상 사악한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의 없는 힘은 비난을 받는다. 따라서 정의와 힘을 결합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정당한 것이 강해지거나 강한 것이 정당해져야 한다.”(데리다, <법의 힘>) 책임질 수 없는 구호들만을 남발하는 걸로 자신이 정의(근본적인 변화)에 변에 서 있다고 믿는 건 착각이거나 오만이다. 그건 자신들이 ‘물적 토대(힘)’를 갖고 있기에 곧 정의롭다고 믿는 것만큼이나 오도된 것이다. 자신의 말(구호)에 책임지고, 그 말에 ‘물적 토대(힘)’을 부여함으로써, 말의 위엄을 되찾을 수 있을 때만이 정의는 반격/경멸을 받지 않게 된다.”(p111) “”신은 죽었다!”란 선언이 니체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돼 있지만, 알다시피 그때의 ‘신’이 뜻하는 것은 어떤 인격체가 아니라 ‘초월적 의미’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 즉 ‘이 삶’을 넘어서는, 혹은 ‘이 삶’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신은 죽었다!”라는 그 선언에는 함축돼 있다(“이게 다예요!”) 생물학 교과서적인 표현에 따르면, 우리는 “Eat, Survive, Reproduce”(먹고 살아남아서 자손을 퍼뜨리는 일) 외에는 따로 일이 없는 존재들이다(우리는 교량일 뿐이다.) 그 ESR이 우리의 존재 근거이자 원리다. 너무도 단순하지만, 너무도 이해되고 있지 않은! (…) 인간이 ‘의미의 질병’을 앓는 동물인 것은, 그러한 EST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에서는 이걸 우리의 대뇌가 급속하게, 불완전하게 진화한 결과로 본다. 보다 근본적인 건 언어 때문이다. 언어는 ‘의미의 질병’을 낳는 산파다. 니체의 표현대로, 우리의 위장을 닮은 대뇌가 해야 할 일은 위장과 마찬가지로 소화 작용일 뿐이다. 그러한 작용으로써 우리를 생존하게 하고 기운 나게 하는 것이 본분이지만, 이 대뇌는 언제부턴가 자신이 소화해낼 수 없는 물음을 던지게 되었다. “What’s it all about?”(이게 다 무슨 수작일까? 혹은, 이게 다 무슨 의미일까?)이 그 물음이다. 그것은 형이상학에 대한 물음이고 요구다. (…) 생각건데, 모두가 ESR에 몰두할 때, 어느 날 문득 이 물음을 처음으로 던진 인간은 ‘위트’ 있는 인간이었음에 틀림없지만 동시에 병적인 인간이었다. (…) 한 ‘위트 있는 이모’가 발견했을 형이상학적 물음은 인간의 문화를 병든 문화, 병적인 문화로 변모시켰다. 사실 종교사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역사이면서 동시에 병리학사 아닌가? 모든 종교의 전제는 ‘삶=질병’이라는 것이니까. 그래서 치료가 필요하고, 구원이 필요하다는. 그래서 ‘병든 인간’은 ‘병든 인간들’이 되었고, 언젠가부터 인간 자체가 돼버렸다. 인간 자체의 존재 방식이 돼버렸다. 해서, 원래의 병들지 않은 인간, 위트에 물들지 않은 인간으로 되돌아가는 여정에 붙여진 이름이 초인(위버멘쉬)이라는 것은 아이러니다. 인간은 인간을 극복함으로써만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젠. 초인에 대한 구구한 설들이 있지만, 내가 이해하는 초인은 병들지 않은 인간, 건강한 인간, 그래서 ‘현재의 이 삶’을, ‘이 모양’을 긍정하는 인간이다. 즉 그에게 다른 삶은 없다(“삶은 다른 곳에 없다!”) 모든 남자는 ‘이 남자’고, 모든 여자는 ‘이 여자’다.(…) 다시 반복하자면, “모든 생명체가 자연이 갖고 있는 유전자 모두를 성공한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기 때문에 성공적인 유전자를 갖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어쩔 건가요?” 우리가 목적이 아니라 다리(교량)이고, 과정이며 몰락이라는데, 어쩔 건가요? “어쩌긴요, 더없이 유머러스한 일인걸요! 어쩜 그럴 수가!””(p199~209) “여기서 음미해볼 대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바로 ‘몰락하는 자’로서의 인간에 대한 규정. 책세상판의 번역을 옮기면, “사람에게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교량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사랑받아 마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의 과정이요 몰락이라는 것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그런 자들이야말로 저기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21쪽 우리는 과거의 인간과 미래에 도래할 인간 사이를 연결하는 밧줄이고 교량이다. 우리의 존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우리는 과정일 뿐이고 몰락일 뿐이며,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면 달리 살 줄을 모르는 자들이다. 처음에 지적한 바대로, 이것은 지극히 생물학적이고 진화론적인 존재 규정이다.”(p222) “새로운 세계 제국으로서의 미국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미국의 ‘제국-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국-덜됨’에 있다. “오늘날 미국에 대한 문제는, 그것이 새로운 세계 제국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다는 것, 즉 그런 척하면서도 무자비하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민족국가로서 계속 행동한다는 것이다.”라는 게 핵심이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세계화를 비판하는데, 그것은 세계화의 실상이 그 명칭에 걸맞지 않기 때문이다. (…) 즉 상품들은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순환하지만, 인간들의 순환은 점점 통제되는 것이 그 진실이다. 물론 이런 건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지나친’ 세계화가 아니라 ‘모자란’ 세계화다. 해서, ‘세계 제국’이니 ‘세계화’니 하는 것은 듣기 좋은 슬로건에 불과하다. 그러니 거기에 반대하는 슬로건도 듣기 좋을 건 당연하다. 즉 그들은 공모적이다. ‘신자유주의’라고 얘기하지만, 그 경우에도 문제는 ‘넘쳐나는 자유주의’가 아니라 ‘부족한 자유주의’다. 자유무역을 내세우지만, 그때 자유무역이라는 건 자국의 비교우위가 확실한 분야에 한정된다. ‘민주주의’ 또한 마찬가지다. 후세인의 독재를 타도하고 이라크의 민주화를 위해서 이라크전을 벌였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미국이 우려하는 것은 이라크의 진짜 민주화이며, 민주선거다.”(p296~p297) “사실, 그런 톨레랑스(불간섭의 관용주의)야말로 지젝 자신이 경멸해 마지않는 태도다(그가 가장 맘에 들어 하는 영화 중의 하나가 <파이트 클럽>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피하거나 얼버무리지 않고, 외상적 실재, 혹은 적대(나는 상냥하게 말하지 않는다!)와 직접 대면하는 것이다(이른바 ‘실재의 윤리’다.) 오역의 실상과 직접 대면함으로써만, 그런 자극과 충격을 정면으로 응시함으로써만, ‘나의 번역’은 개선될 수 있다. 창피하다거나, ‘인신공격’이라거나 하는 것은 부차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p336) “지젝: (…) 반세계화 운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명한듯이 말하는 ‘자유와 민주주의’에 태클을 걸어야 합니다. 즉 자유민주주의가 자본주의적인 사적 소유 없이는 존립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야 우리는 진정으로 반자본주의적으로 될 수 있습니다. 로쟈: 그러니까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거나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라는 식으로 일면만을 주장하는 것은 ‘덤 앤 더머’식이 되겠군요. 때문에 두 겹의 싸움이 필요하겠습니다. 반자본주의 운동이 필요하지만, 자본주의의 정치적 형식, 곧 자유주의적 의회민주주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면 반자본주의가 제아무리 급진적이라 해도 충분하지 않다, 그런 말씀이시죠? 자유민주주의의 유산을 문제 삼지 않으면서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환상이라고 정리하겠습니다.”(p343~p344, ‘로쟈와 지젝과 벅 모스의 가상대담’) “”나는 철학이 어려움에 처한 인간에게 아무런 말도 할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철학이란 인간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법을 가르치지만 결국은 인간을 각자의 운명 속으로 내팽개치고 마는 것이다.”(시오랑) 철학에 대한 나의 관심은 이에 근거한다. 어려움에 처한 인간에게 아무런 말도 할 게 없는 철학의 무능력 자체는 바로 우리의 무능력을 닮은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무엇을? 내던져지고 내팽개쳐진 각자의 운명 속에서, 각자의 눈물 속에서 의미 있는 일반이론, 즉 연대를 끌어내는 일 말이다. 개인의 울음을 집단의 통곡으로 바꿔놓는 일 말이다. 언젠가는.”(p4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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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2.12 이현우 지음 - <산책자> \15,000 우리는 심심찮게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이다.”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우리가 단 한 번이라도 과정을 중요시 해 본 적이 있었던가? 어려운 문제들은 느닷없이 나타나 우리를 괴롭혔고 우리는 그 답을 찾기 위해 쉴 새 없이 발버둥 쳤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과정이 아니라 답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답을 찾지 못한 자에게는 늘 그렇듯 깊은 절망만이 그림자처럼 따라 붙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에게서 모든 ‘의미’를 빼앗아가 버린다. 로쟈의 블로그에 있는 글을 읽을 때의 내 마음 역시 마찬가지였다. 호기심에 그의 글을 열어보았으나 내겐 너무나도 어려운 문제였기에 그저 낙담하며 스크롤을 올렸다 내렸다 할 뿐이었다. 그의 블로그에 접속한 내 행위 자체가 무의미해진 것이다. 그래서 그가 블룩한(Blook : Blog와 Book의 합성어) <로쟈의 인문학 서재>라는 책을 사면서도 ‘이게 나에게 의미가 있을까?’란 생각을 정말 수백 번을 했었다. 물론, 이 책은 누워있던 나를 앉아 있도록, 그리고 몇 번이나 자세를 고쳐 앉게 만들 정도로 어려운 책이었다.(누워서 책을 본 지 5분도 안되어서 책상에 앉아 있게 되었다) ‘포기하고 딴 책 읽을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로쟈의 번역 비평’을 읽을 때뿐이었으니, 문학, 예술, 철학, 지젝 부분은 읽었다기보다는 힘겹게 책장을 넘겼다고 말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그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인터넷 상에서와 마찬가지로 거침없이 ‘뒤로 가기’를 눌렀다. 하지만, 이 글이 종이-책이라는 점이 ‘뒤로 가기’의 의미를 바꿔 놓는다. 이때의 ‘뒤로 가기’는 외면이나 회피가 아닌, ‘다시보기’, 천정환님의 발문에 나와 있는 말을 빌리자면, ‘로쟈 따라잡기 - 꼭꼭 씹어 먹기’를 의미 한다. 어려운 글은 물처럼 쉽게 마셔버리는 것이 아니다. 천천히, 꼭꼭 씹으며 그 맛을 제대로 음미해야 하는 것이다. 부지런히 ‘뒤로 가기’를 해야만 그 속의 내용을 소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로쟈. 그는 글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뒤로 가기’를 거쳤을까?(그의 방대한 독서 편력이란! 그리고 그 책들은 하나 같이 어려워 보인다) 그의 글은 결코 한 순간에 쓰인 것이 아니다. 과정이 있기에 결과가 있다.(나는 또 이 문장을 말해버리고 만다) 답을 못 찾았다고 해서 그 의미마저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직접 부딪혀보았기에 그 의미가 존재하는 것이다. 어려운 글에 절망하며 회피하지 말자. 여유를 가지고, 몇 번이라도 뒤로 가며 부지런히 읽자.(어려움에 낙담하며 애꿎은 신을 찾기보다는 자신이 직접 부딪혀 보는 편이 훨씬 좋지 아니한가!) 그러다보면 언젠가 ‘반코츠의 인문학 서재’가 생기는 날이 오지 않을까? 내가 왔던 길이 지워져버리기 전에, 다시 한 번 그 길을 꼼꼼히 확인해 보아야겠다. “우리가 어떤 책을 진정으로 읽게 되는 것은, 그러니까 그 책에 대한 읽기를 완성하는 것은 그에 대한 글을 씀으로 써다. 모든 텍스트는 씌어지는 텍스트여야 하며, 그 씌어짐을 통해서 비로소 읽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리뷰를 쓰는 건 책읽기를 통해 얻은 걸 베푸는 것이다. 그리고 책읽기를 완성해나가는 건 그러한 베풂이다.” - p19 “모두들 읽었을 거라고 생각하기에 감히 ‘안 읽었다’고 말할 수 없는 책, 그래서 ‘지금 읽고 있어’가 아닌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는 책이 소위 고전이다.” - p26 “그래서 작품은 독자가 ‘읽어내는’것이지만, 텍스트는 독자가 ‘채워 넣는’것이 된다. 해서, 바르트의 다른 용어로 표현하자면 ‘작품’이 독자가 읽어내는 텍스트(readerly text)에 대응한다면, ‘텍스트’는 독자가 써나가는 텍스트(writerly text)에 대응한다.” - p32 “문체란 그러므로 ‘평범하지 않은 것’, ‘일반적이지 않은 것’, ‘정상적이지 않은 것’을 뜻한다. 그래야 눈에 띌 테니까. 다르게 말하자면, 문체란 글쓰기에서 ‘무엇’이 아닌 ‘어떻게’에 주목하는 것이며, ‘달’이 아닌 ‘손가락’에 주의를 두는 것이다.” - p72 “이데올로기란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하는 행동에 있다고 주장한다. 즉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것은 ‘앎’이 아니라 ‘행함’이다.” - p320 “그런 도움 없이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번역이 ‘좋은 번역’이고, 그런 도움과 함께 읽을 수 있는 책이 ‘읽을 만한’ 번역이며, 차라리 안 읽는 게 더 이해에, 그리고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는 번역이 ‘나쁜 번역’이다.” - p357 “인문학이란 궁극적으로 ‘말과 사람’에 대한 관심이고 사랑이다. 시라는 건 그러한 관심/사랑의 최적의 표현이 아닐까 싶다.” - p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