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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척 팔라닉 <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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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트 클럽]의 작가...척 팔라닉이 쓴 소설"
이 책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내 말 뜻을 다 알거다. 그러니까...[파이트 클럽]이 폭력이라는 코드로 건조하면서도 매섭게 세상을 풍자했다면... [질식]에서는 섹스라는 코드로 촉촉(?)하면서도 해학적으로 세상을 풍자했다라고 보면 된다. 거봐! 넘 말이 어렵지...암튼, 더 좋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팔라닉의 책이 다 그렇듯이 이 책 또한 그리 술술 읽히지는 않는다.
척 팔라닉...차암 신기하게 글 쓰는 작가가 아닐 수 없다. 가독성 보다는 묘한 중독성을 가졌다고나 할까? 암튼...처음엔 이 무슨 또라이 같은 소린가 싶다가 읽으면 읽을수록 웬지 딱 내 스타일다.
이 책의 주인공은 빅터 맨시니다. 고급음식점에서 식사를 하다가 갑자기 음식이 목에 걸려 질식하는 척 연기를 하고 누군가 나타나 그의 목숨을 구해주면 그 영웅에게 빌붙어 살아가는 사기꾼이다. 거기에 섹스중독자다. 물론 흥미롭고 순수하고 귀엽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 책에서 가장 강력한 캐릭터는 빅터도 아니고, 친구인 데니도...매력적인 페이지도 아니다. 바로 빅터의 어머니 아이더 맨시니이다. 아이더를 보면 [파이트 클럽]의 타일러 더든과 비슷하다. 기발하고 섬뜩하며 무정부적인 성향 또한 닮았다.
"내 목표는 나 자신을 단순하게 만드는 거야."
이 책에서 팔라닉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들을 아이더의 입을 통해 배출된게 아닐까? 집에서든 직장에서든 빡빡하고 찌들린 삶을 살고 있는 남자들에겐 이 팔라닉의 책들이 하나의 로망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의 책은 일단 한번 보면 팬이 되어 버린다. 왜 사람들은 팔라닉의 책에 열광하게 되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ㅎㅎ 책 뒤에 이런 문구가 있다.
"질식의 독자는 오직 두 부류다. 사랑하거나, 질색하거나."
맞는 말이다. 나도 앞으로 친하게 지내고 싶은 넘이 있으면 이 책을 한번 읽어 보라고 권할란다.
이 책을 보고도 열광하지 않는다면... 나랑 친구되긴 글러먹은 넘이다. 그냥 아는 사이로만 지내자고...
만약, 사랑한다면... 와우~~나에게 오라! 나도 당신을 빡빡히 사랑해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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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분의 실익은 진정 존재하는 것인가? 소설은 수시로 플래시백(flashbacks)되고 마치 몽타주처럼 삽입되는 어린 시절 엄마와의 기억은 현실의 사건을 독자에게 납득시키고 정당화하는 도구가 된다. 영화를 상정한 기법이리라.
망상과 치매에 시달리는 엄마의 치료를 위해 의대의 학업을 중단하고 일종의 테마파크에서 18세기 식민지 정부시대 아일랜드 노예역할의 일당과 고급식당에서 목구멍에 음식을 가득 넣고 질식을 가장함으로서 사람들로부터 동정과 연민의 구호를 얻어내는 사기행위로 비루하게 연명한다. 질식으로 절명하려는 인간을 구하는‘선한 사마리아인’의 역할을 사람들에게 제공함으로서 그들을 영웅으로 만드는 자신의 행위는 성인의 행위이기도 하다고 당위(當爲)화한다.
![]() 이야기는 섹스중독자들의 치료 4단계인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자신에 대한 모든 행위를 기술(記述)하는 것이고, 소설은 바로 이 과정의 기록이란 형식을 갖는다.
주인공‘빅터 ’는 세상의 이로움을 위해서는 어떠한 일도 하지 않음으로서 세상을 해롭게 하는 인간이기이기도 하고, 예수의 삶을 살고자 하기도하며, 자신을 강박하는 엄마의 존재를 어쩌지 못하는 25세의 섹스중독자이다. 포르노 영상의 한 장면을 가능한 사실적으로 묘사하려한 듯한 니코와의 화장실 정사는 쓰레기 같은 일상으로서 작품의 서두를 의도적으로 장식한다. 그리곤 버스의 헤드라이트 앞에 발가벗겨져 서있는 어린 소년의 고통과 그 아이의 비쳐진 그림자가 새겨진 암벽에 색을 칠하는 엄마의 분열적인 행동이 중첩된다.
한편 빅터에게 현실감을 갖게 해주는 인물로서, 섹스를 잊기 위해 돌 모으기에 열중하는 동료‘데니’, 작품의 환각성과 현실성을 오가게 만드는‘페이지 마셜’박사는 작품의 재미와 완성도를 높여주는 캐릭터로서 깊은 인상을 준다. 자신의 호칭을 마셜박사로 부르도록 간호사에게 요청하는 장면은 멋진 소설적 도구이자 헐리웃 영화의 매혹적인 한 컷이 된다.
이태리어로 쓰여 진 엄마의 일기장과 출생의 비밀을 둘러싼 페이지의 그 상상력 넘치는 해석, 그리고 “예수가 하지 않을 짓은 뭘까? (What would Jesus not do?)”를 반복하는 성자(聖者)와의 자기 동일시는 우습지만 슬픈 이야기이고 너무도 인간적이기도 하다.
섹스중독이 의미하는 것이 필수아미노산‘펩티드 페닐에틸라민’의 과도한 희구라 할지언정, 빅터의 중독은 어떤 측면에선 진실이 아니다. 빅터의 적극적 행위는 단 한 차례도 묘사되지 않는다. 모두 여성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동적 자세를 견지한다. 더구나 사정을 억제하기 위해 혐오스런 상상을 해댄다. 어린 시절 반복되었던 유괴행위를 통한 엄마의 수많은 음모론과 불분명한 의학적 사실의 강박에 대한 억압된 고통에서 비롯된 자기학대의 다름 아닐까?
연민의 행위, 엄마의 입속에 푸딩을 떠먹이는 빅터, 순교, 사마리아인들이 던져대는 돌팔매질, 과정과 결과의 이 상이함, 삶과 세상의 모순. 무엇을 이룰지 상정되지 않은 허물어진 돌쌓기. 이처럼 모순되고 기이한, 뒤틀린 현실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이 쌓아 올릴 궁극의 미래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이 어둡고 모호한 이미지의 퍼즐 맞추기에 어느새 중독되어버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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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내게 말해 주지 않는 거야?" -299p 어려운 책이었다. 순서는 뒤죽박죽, 이 얘기하다가 저 얘기하다가. 책에서 손을 뗄 때까지도 정신이 혼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흘이라는, 내게는 엄청나게 순식간인 시간만에 읽어버렸다. 더럽게 자극적이면서도 마음을 사로잡는 문장들의 집약체였다. '푸들'에서 한번의 큰 폭소가, 닥터 '페이지'에서 한번의 영화를 보는듯한 반전이 나를 즐겁게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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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식>>의 독자는 오직 두 부류다. 사랑하거나. 질색하거나.....휴스턴 클로니클
첫 장부터 기분이 묘했다. 독자에게 도전을 하는 건가 싶게 쎈 어조로 나온다. 책을 읽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니 두 페이지를 채 넘기지 못하고 손을 놓고 싶어질 거라니 그리너 아예 시작도 하지 말라니... 은근히 부아가 돋는다. 책을 읽고 재미있다 재미없다를 결정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그런데 미리부터 선수를 쳐서 당하기 싫다면 몸을 아끼고 미리 꺼지란 얘길 하다니 끝까지 읽어 보고 말리라 라는 마음이 든다.
두 페이지는 넘었다. 하지만 슬슬 빅터를 가장한 저자의 말에 동의를 하는 듯한 내 모습을 발견하고 있다. 이게 뭐야? 어쩌란 거야? 이런 책은 없었다. 파이트 클럽의 작가라는 말에 두말 없이 선택했던 책이다. 현대인의 광기를 표현했다 싶었던 영화를 너무나도 재미있게 보았고 그 영화의 원작이라면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탄탄한 내용일거고 그런 원작의 작가이니 이 책 또한 나를 만족시키려니 했다. 그런데 몇 장을 넘어가도 아리송하고 온통 섹스얘기 뿐이다. 수위가 높다. 그렇다고 덮을 수는 없다.
무정부주의자로서 미쳐버린 어머니의 병원비를 감당하기 위해 의대를 중퇴하고 돈을 벌고 있는 빅터가 주인공이다. 테마파크에서 엑스트라 연기를 하고 있으며 식당에서 입속에 음식을 가득 넣고 질식하는 연기를 하면서 사람들의 동정을 이끌어 내며 사람들에게 영웅심을 선사하는 것으로 돈을 벌고 스스로를 착한 사람으로 자부하지만 삶 자체는 패배주의자로서 비관하며 비루한 인생을 살고 있다. 또한 그는 섹스중독자이며 약물중독자이다. 어머니와의 상처 그리고 기억 이 모든 것들이 빅터의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주지만 어머니의 병원에서 만나게된 닥터 페이지와의 관계속에서 세상에 대한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뉴욕타임즈의 베스트 셀러이고 영화화되어 24회 선댄스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한 수작이다. 현대인의 성에 대한 탐닉과 과도한 약물복용을 거름없이 표현하고 있기에 읽는 이로서는 불편할 듯도 싶다. 싸워야만 자신을 알수 있었던 파이트클럽에서 보다도 모든 것은 섹스보다도 못하다는 생각을 가진 빅터의 생활을 따라가기 힘들다. 그가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세상에 대한 불만이며 규제와 규칙에 대한 조롱이며 야유임도 알지만 광적인 듯한 행동은 그래도 힘겹다. 그저 야한 얘기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여전히 이해는 안되고 컬트작가의 생각을 따라갈 수는 없지만 중독적이라는 말이 맞을 만큼 끌리는 무언가가 있음을 그래서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책을 놓을 수 없었음을 말할 수 있다.
다시 한번 읽어 봐야 겠다. 두번씩 책을 읽는 경우는 흔치 않으나 척 팔라닉을, 그의 작품세계를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이거 하나만은 분명한 듯하다. <<질식>>의 독자는 오직 두 부류다. 사랑하거나. 질색하거나..... |
![]() 나에게 책 읽기를 멈추라고 했던 빅터의 음성이 귓가에 아직도 머물고 있는 것 같다. 나도 오기가 있지, 보지 마라고 하면 더 보게 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말을 들을 것 같아? 아마 이것이 그가 의도한 일이겠지만 나는 마지막 책장까지 깔끔하게 머릿속에 집어 넣고야 말았다. 광적인 섹스중독자인 빅터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그의 일상 어느 부분에 나의 관심을 쏟아부어야 하는지 당황스럽긴 하지만 식당에서 질식사 연기를 하며 돈을 모아야 하는 그가 애처로워서 감히 중간에 책을 덮어 버릴 수가 없었다.
세인트 앤서니 요양 센터에 있는 어머니를 위해 그는 많은 돈이 필요하고 음식을 거부하는 어머니에게 급식 튜브를 살 돈도 없는 처지다. 돈이 있어도 그는 급식 튜브를 살 것인가? 이것을 놓고 논리적으로 따지고 들 생각은 없지만 자신의 출생에 대해 한마디씩 던지는 어머니를 그냥 떠나보내지 않으려면 그가 무언가 하긴 해야 할 것이다. 어머니의 담당의사 페이지를 통해 빅터의 인생도 달라지지 않을까 기대했었다면 나는 아직 그에게 아름다운 로맨스가 남아 있음을 믿고 있었다 할 수 있겠지만 어디 인생이 그렇게 호락호락하던가, 조금은 순수했던 그가 세상으로부터 한 방 멋지게 제대로 당하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유쾌하게 웃어줄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그의 인생이 너무 가여워서 어찌 바라봐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말이다.
빅터의 출생에 대한 비밀이 밝혀지면서 이 책은 한순간에 섹스중독자 빅터가 아닌 위대한 한 사람의 영웅으로 그를 탈바꿈 시키게 되나 보다 했다. 밑바닥까지 내려간 그에게 이제 더 나빠질 것이 무엇이 있나 싶겠지만 최악의 상황은 또 오기 마련이라, 그의 인생이 어디까지 흘러가는지 궁금하다면 이 책의 마지막장까지 넘길 수 밖에 없으리라. 그의 곁에 있는 데니는 대체 돌을 왜 모으는 것인지, 무언가 건설한다는 의미 같기도 하고 수양을 하는 것 같기도 한데, 척 팔라닉의 '파이트 클럽'은 현재와 과거의 시점을 혼동하고 툭툭 던지는 주인공의 대사에 적응하지 못해 읽어내는 것이 힘들었는데 다행히도 '질식'에서는 작가의 이 엉뚱한 이야기에 녹아드는 것을 보니 하하하, 꽤 유쾌하게 웃어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베스, 데니, 페이지 등 빅터의 곁에 있는 인물들 어느 하나 정상적인 사람들이 안보이니 웃다가 돌이라도 맞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그냥 뚝, 웃음을 그치련다.
험난한 이 세상을 살아낸다는 것이 정상적인 마음을 가지고는 힘든 일이라, 어린 시절의 빅터의 모습과 지금 빅터의 모습이 교차하며 내 마음속은 점점 더 말을 잃어간다. 몇 장 읽어내지도 못하고 멈추게 될 것이라는 그의 경고에도 계속 책장을 넘기게 되는 것은 아마도 처음엔 '호기심'때문이었겠지. 그 다음엔 정상적이지 않은 어머니 밑에서 그가 겪은 일에 대해 궁금해서,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버리지 않고 요양 병원에서 돌보는 빅터를 보면서 그가 사기꾼이라고 손가락질 하지 못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면 그가 처한 모든 삶이 눈 앞에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밑바닥까지 다 드러나는 것이다. 왜? 독자들아, 이 책을 찢어버리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바닥까지 드러내는 거북한 문장들을 읽으면서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은 나라고 빅터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삶이 다 그런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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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트 클럽이라는 놀라운 소설을 세상에 내놓은 척 팔라니의 작품다운 작품이다. 이 세상을 묘사하는 그의 필치는 놀랍기도 하고 끔찍스럽게 대범하기도 하다. 이 책이 보여주는 그의 상상력은 파이트 클럽에서 보여준 세상을 뒤엎어서 생각하는 것, 그 이상이다. 아니 세상을 완전히 다른 각도 바라보게 하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매일저녁 일부러 음식물에 목이 막혀 질식을 하여 죽음의 직전까지 이르는 사람. 그래서 번번히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죽음의 입구에서 빠저 나오는 사람. 우리나라 사람들의 관념으로는 도저히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중독에 거린 사람. 그리고 상상하기 어려운 정도의 평범하지 않은 행동을 마치 즐기듯이 행하는 사람들.
번번히 정신병원에서 탈출하여 자신의 아들을 납치하듯이 데리고 엉뚱한 일을 벌이거나, 함꼐 범죄라고도 불릴만한 일에 참여시키는 어머니의 존재. 그리고 그 엄마가 시간을 쪼개가면서 아이에게 주는 가르침의 놀라움. 파격...
그래서 이 책의 전반부를 읽기가 무척 부담스럽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는 책인지, 이 놀랍고 부산스럽고 엉터리 같은 이야기의 전개들이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왜 이런 내용들이 필요한 것인지, 도대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솟아오르게 만든다. 그러나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저자의 의도를 서서히 이해하게 되면서 이 책의 의미는 급반전하게 된다.
힘든 일과의 대가로 주어진 여유로운 저녁을 스스로 반납하고 (가짜)죽음에 이르른 사람을 살려주려고 나서는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우연히 보게된 TV화면에서 자신이 목숨을 구해(주었다고 생각한)준 사람이 나온 모습을 보고 다시 그를 돕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천여명의 사람들의 존재. 그런 정상적인 사람들의 모습과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아주 비정상적인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정상과 비정상을 오가는 존재.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의 애매함.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가치 판단에 대한 통렬한 비웃음.
이 책은 파이트클럽 이상으로 우리가 사는 삶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작품이다. 질식이라는 것은 매일저녁 질식으로 죽음에 이르는 퍼포먼스를 행하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질시한 사람을 구해내려 나서는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범적인 삶의 질식할듯한 답답함에 대한 고발이다. 이 책이 붉은 도발적인 표지로 꾸며진 것도 파이트 큰럽의 표지를 장식한 큰 주먹만큼의 의미가 있는듯한 느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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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하다'라는 단어는 적절하지 않지만 그게 가장 먼저 떠오른다. 음. 음. 마치 반응고 상태의 끈적끈적한 페인트 통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 같은 느낌. 몸이 무겁고 질퍽거리는 느낌. 나는 좋은 소설이란 이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완벽한 몰입. 내 의지로서의 몰입이 아니라 나를 그렇게 만드는 작품. 척 팔라닉의 소설이 그렇다.
사람들은 흔히 뭔가를 두고 의견이 갈릴 때 이런 얘기를 하고는 한다. 서로의 취향이 다르니까. 맞다. 그럴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가령, 그 뭔가의 범주를 문학이라는 틀로 한정시켜서 예를 들자면 이렇다. 취향이 달라서 좋고 싫고가 갈라질 수도 있지만 작품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게 말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건 취향 문제가 아닌거지. 이건 너도 그럴수 있고 나도 그럴수 있다. 왜, 아닌 거 같아? 퉷. 아님 말고. 그런데 이 작품의 경우는(적어도 내 생각에는) 이해하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라 100% 선호도에 따라 호불호가 결정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작품을 이해했어도 이렇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걸 꼭 그런 식으로 표현해야 해? 이때, 내가 못 배워서 그렇지 뭐. 라고 말하면 바로 성질 더러운 놈이 되는 거다. 왜, 아닌 거 같아? 퉷. 아님 말고. 그러니까 책 소개에 있는 말이 맞는 거 같다는 얘기이다.
<질식의 독자는 오직 두 부류이다. 사랑하거나, 질색하거나.>
맞아. 니 말이 맞아.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전자야. 어때, 기분좋아? 한마디로 나랑은 코드가 맞는 작품이다. 이 작품만이 아니라 척 팔라닉이라는 작가가 생각하는 세계가 나랑 코드가 맞는 것 같다. 컬트적이라고? 으흠. 그래. 그럼 나도 컬트적인가?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 다만, 남들이 생각하지 않는 생각을 좀 더 용감하게 생각할 뿐이지. 그리고 표현하는 거야. 좀 더 사회성이 있어 보이게 말이지. 나이 먹으면서 그런 요령을 배웠으니까. 덜 배우긴 했지만. 지독하게 냉소적인 작품이다. [파이트 클럽]도 그런 것으로 보아, 작가의 시각 자체가 냉소적인 것 같다. 그런데 어떤 대상을 향한 시니컬은 정확해야 한다는 게 중요한데 팔라닉은 정확하다. 그래서, '매혹적'이라는 단어가 적절하진 않지만 그게 가장 먼저 떠오르네.
척 팔라닉은 장르 작가로 알려져 있지 않나? 넘버원 베스트 셀러 작가라니 아마도 그렇겠지. 그런데 나는, 그 어떤 순수문학보다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 질식이. 그 뭐냐, 끊임없는 우주적인 철학과 사념의 내면화, 그리고 현실을 알레고리적인 수법으로 표현하는 게 중요하다고 여기는 순수문학이라면 말이다.(이런 빌어먹을. 내가 써놓고도 뭔 말인지 모르겠네. 이런 말도 쓰던 놈이나 써야지. 젠장.) 내가 순수문학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그러는 너는 아냐? 퉷. 메타포나 물고 있어. 작가가 표현하는 이야기가 단순하게 잔인하기만 하다거나, 기이하기만 하다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적 자체가 단지 말초신경을 자극하려고 쓰인 자극이냐, 아니면 어떤 현실의 깊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위해 수단으로 쓰인 자극이냐에 따라 그 가치를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다. 누가? 내가. 왠지 이유치고는 그럴듯 하잖아. 뭔가 논리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참고로 나는 캐건방진 자세로 다리를 떨면서 이 리뷰를 쓰고 있다. 껌도 씹을 걸.) 그러니까 적나라한 섹스 장면이나 기내 화장실에서 벌이는 애정 행각에만 몰두해서 짜증내지 말고, 작가가 왜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가도 좀 생각해보란 말이지. 머리를 드라이할 때만 사용하지 말고, 좀 다르게 써보라고. 아, 이건 제 말이 아닙니다. 척 팔라닉이 작품에서 하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저한테 싸가지 없다고 하지 마세요. 저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 시킨대로 했을 뿐이예요. 세뇌 당했어요.
그러니까 이 작품은 단순히 적나라한 표현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이면에 뭔가 묵직한 의미들을 담고 있다. 또, 그 의미들이 상당히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도 많다. 평론가들이 댑따 좋아하는 뭐 그런 거 말이다. 가져다 붙이면 장자의 철학도 등장할 수 있고, 다르게 붙이면 묵시록적이네 어쩌네라는 말도 어울릴 것 같은 그런 거. 그러니까 평을 하는 사람이, 작품과 상관없이 자신의 지식을 마음껏 뽐내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여지가 많은 작품인 거지.
내가 싫어하는 꼴통 후배놈이 하나있는데 이유는 얍샵해서이다. 얍삽한 놈들이 대개 머리는 똑똑해서 그 좋은 머리로 이런 문장을 구사하기도 하는 것이다. 저는 미각이 뛰어나요.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안 그런 척 하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이, 저한테 맘껏 잘난 척을 할 수가 있거든요. 잘난 척을 하지 않아도 내심 흡족해 하죠. 자신의 뛰어난 미각에 대해서 말이죠. 제가 그들에게 상대적인 우월감을 부여하는 겁니다. 그리고 후배는 속으로 씩, 웃는다지. 그래서 내가 말했다. 참 그럴듯 해. 그치? 니가 얍삽하지만 않으면 그따위 철학도 제법 쓸만하게 들릴텐데 말이지.
<약한 척하면서 힘을 키우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들에게 자신이 강하다고 느끼게끔 만들어 준다. 그들이 나를 구제하도록함으로써 나는 그들을 구제한다. 그저 허약하고 감사하는 모습을 보이면 된다.>
이 작품의 주인공 빅터(이름도 빅터다)가 질식 연기를 하면서 갖는 자신만의 철학이다. 질식 연기? 그것도 여기다가 설명하라고? 책을 사서 읽어 이 양반아. 날로 먹을라고 들지 말고. 하여간 빅터가 극강의 마이너를 지향하는 나름의 이유가 바로 저것이다. 공장에서 나오는 빵같은 놈들아, 라고 비웃으면서. 자기는 다르다 이거지.
내가 언젠가 타국의 휴양지에서 만난 한국 대학생들을 수영장에 앉혀놓고 사기를 친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이 빅터의 어머니가 주장하는 것과 같다. 나는 니들에게 나쁜 걸 가르치고 있어. 그리고 니들은 지금 내 얘기를 듣는 게 더 중요하지. 왜냐하면 좋은 건, 항상, 누구나, 앞을 다투면서 가르쳐주려고 하거든. 학교에서부터 사회에 이르기까지 말이야. 그래놓고 마치 자신이 어린 양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한 것마냥, 뿌듯한 표정을 지어보이잖아. 딴데서 사기친 걸 그런 식으로 회개하려고 든다고나 할까? 그 놈은 그렇게 뿌듯하게 가고 딴 놈이 와서 니들한테 사기를 치는 거야. 그러니까 니들이 만날 사기를 당하는 거지. 하지만 봐, 나쁜 걸 알면 사기당할 확률이 적어지는 거야. 왜? 아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나쁜 걸 배울 수 있는데가 별로 없다는 거야. 죄다 좋은 것만 가르치려고 드니까. 모든 걸 당하면서 익히다가는 너덜너덜해진다 그말이야. 그러니 생각해 봐, 내가 지금 니들한테 가르쳐주는 나쁜 짓이 니들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 얘기들이냐. 안 그래? 이런 궤변을 늘어놓으면 간혹 침이 떨어지는지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이는 애들이 꼭, 한둘 씩 있기 마련이다. 나이먹은 냥반들은 비웃고. 어쨌든 나는 이때, 순진한 어린 양에게 마지막 도장을 찍는 거다. 그러니까 칼 쓰는 법을 배우는 건 말이지. 남을 공격하기 위해서도 필요하겠지만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법이야. 알겠어? 그러니까 칼 쓰는 걸 배우는 게 전부 나쁜 건 아니라고. 쓰는 놈이 어떻게 쓸 지를 결정하는 머리가 문제인거지. 이러면서 검지로 내 머리를 톡톡, 두 번 건드려주면 아이들이 이렇게 말하곤 하는 것이다. 형님, 한국에서도 뵐 수 있을까요? 이런 젠장. 내가 원하는 답은 이거다. 형님, 2차는 제가 쏠게요. 나는 그들을 다시 볼 이유가 없다. 그런 식으로 뇌를 헷갈리게 만드는 건 처음이나 재미있지 재탕하면 재미가 없고, 일단 형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 모든 돈이 내 주머니에서 나가기 때문에 다시 만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오빠라고 부르는 종족은 생각해볼 수도 있지. 물론 공장에서 찍어낸 빵 같은 미모를 지니고 있어야 겠지만. 걔가 걔야. 아우 헷갈려.
그러니까 한마디로 척 팔라닉이 작품을 통해 드러내는 생각과 내 생각은 코드가 맞는거다. 이 작품은 무언가에 중독되어 사는 현대인, 그렇게 된 이유는 정형화된 틀에서 처박혀 살았기 때문이고, 그렇게 산 이유는 그렇게 교육받았기 때문이고, 그렇기 때문에 틀의 기준이 있어야만 안정적인 삶이라고 믿는 중독. 그 틀을 부수고 싶어하는 의지가 이 작품에 담겨있다.
[파이트클럽]도, 이 작품도, 은근히 아나키즘을 선동하는 척 팔라닉. 뭘 쌓으면서, 뭘 쌓는지 과거의 기록을 대조하면서 틀을 만들지 말라는 거지. 꼭 그걸 보면서 제대로 하는 게 맞는지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 그 말인거야. 뭘 쌓든 당신 내키는 대로 쌓고 그걸보고 사람들이 뭐라든 신경쓰지 말라는 거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에 얽매이지 말고 니꺼를 만들라고, 팔라아아아아아닉은 얘기를 하는 거 같은데? 그래서 이 질식할만큼 틀에 박힌 세상에 중독된 현대인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그걸 좀 거칠게 표현했지. 이쯤 되니 나도 꿈보다 해몽하고 앉았다. 이게 전부 다 교육 때문이야. 빌어먹을. 중독된 거지.
'통찰력'이라는 단어는 적절하지 않지만 그게 가장 먼저 떠오른다. 냉소가 매혹적이려면 확실히 통찰력이 뛰어나야 한다. 나는 새로운 걸 좋아하지만 모든 새로운 걸 좋아하는 건 아니다. 잘 만들어진 새로운 걸 좋아한다. 척 팔라닉이 보여주는 새로움은 잘 만들어졌다. 아님 마는 거고. 취향이 다를 수도 있는 거니까. 퉷.
번역이 매끄럽지는 않다. 매우 흡족한 작품이어서 그다지 문제가 될 건 없지만, 단어의 순서가 어색한 게 많다. 그것은 문장을 읽는 리듬을 어그러뜨린다. 가령, '나는 매일 책을 읽는다'라는 문장에 익숙하다면, 이 작품에서는 '매일 나는 책을 읽는다'식으로 쓰인 것이다. 그런 문장이 제법 많다. 탁, 탁 걸리는 거지. 장문에서도 그러니, 이건 좀 곤란하다. 그래서 어렵지 않은 내용임에도 한 호흡에 읽히지 않는 문장이 꽤 많다.
<납빛의 늙은 여자들이 점심으로 짓이겨진 갖가지 음식을 먹고 있다.>
두 번 읽으면 이해가 된다. 하지만 수고스럽다. 장문으로 들어가면 그 예는 더 많다. 읽다보면 당연히 짜증이 나지. 작품이 마음에 안들었으면 역자에게 욕이 나가는 거고. 멋진 문장 이전에, 좋은 문장이란 게 그래서 있는 거니까. 뭐, 그것도 습관에 중독된 거라고? 아, 뭐. 그럼 그런 거고. 그리고 오타 좀 있어. 아니, 많아. 반말하지 말라고?
네.
디자인은 따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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